지구에서 웃으면서 살 수 있는 87가지 방법
로버트 풀검 지음, 최정인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3월
평점 :
절판


오랜만에 만난 즐겁고 기분좋아지는 책!
 

  새벽 다섯 시가 채 되지 않은 시간에 여명이 밝아오는 줄 이틀 전에 알았습니다. 밤 여덟 시가 넘도록 낮이 가시지 않는 줄은 어제 알았죠. 유월 하늘이 이토록 파란 줄은 오늘 알았고, 한낮에 따가운 햇살은 이미 여름이라 외치고, 아침 저녁엔 아직 떠날 채비를 마치지 못한 봄 바람이 당황해하고 있는 줄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흐르는 시간 속에 살면서도 잠시 멈춰 서서 시간의 흐름을 살피지 못했네요. 아니 안했나 봅니다. 딱히 바쁠 일도 없으면서 불평할 꺼리가 없어 부러 ‘바쁘다 바쁘다’ 인상쓰며 살았나 봅니다. 그나마 그제, 어제, 오늘 알게 되어서 참 다행입니다. 

  어느 아저씨가 아니었다면 그것마저 몰랐을 겁니다. ‘이제 인생은 자신이 찾는 것만 보이고 기꺼이 받아들이고자 하는 것만 얻게 된다는 것을 알 정도로 나이가 든’ 덥수룩한 흰수염의 아저씨 덕분에 오늘을 알고, 내 주위를 둘러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구겨진 인상을 조금은 펼 수 있게 되었죠. 아저씨는 “우리의 삶이 허락한 작은 웃음을 즐기라”고 야릇한 미소로 이야기 합니다. 로버트 풀검 아저씨가 책 <지구에서 웃으면서 살 수 있는 87가지 방법>을 통해 이야기 했습니다. 원래 제목은 What on earth have I done?입니다. 아저씨는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로 우리에게 친숙한 분입니다. 이 책은 이미 70 세를 훌쩍 넘긴 아저씨(할아버지라 해야겠네요?)의 이야기라고는 하나도 느껴지지 않을 만큼 젊고 재미있습니다. 아저씨가 오늘 보낸 하루 중에서 인상 깊은 이야기들을 적었는데요, 이야기 마다 유머러스한 단편소설 같습니다. 

 



 

  이른 아침이나 저녁 늦게 즈음 아저씨는 혼자 그네타기를 즐깁니다. 오늘 저녁도 마찬가지로 그네를 타고 있었는데, 오늘 따라 아이들이 쏟아져 나와서는 놀이터가 만원이 되었죠. 어느 작은 남자아이가 그네를 타는 풀검아저씨 앞에 걸음을 멈추고 묻습니다.

“그네 타고 싶어요 아저씨는 아이가 아니잖아요.”

“나도 애야.”내가 말했다.

“아니잖아요.”

“아이라니까.”

 

서로 실갱이를 하고 있는데, 노인에게 소리를 지르고 있는 자기 아들의 목소리를 듣고는 아버지가 달려왔습니다.

 “왜 그러니, 빌리?”

“이 아저씨가 그네에서 안 내려 줘요. 자기가 아이래요.”

아이의 아빠는 풀검아저씨와 눈을 맞췄습니다. 미소를 짓고 웃더니 빌리에게 말합니다.

 

“이 아저씨 아이 맞네. 좀 크고 나이가 들었을 뿐이야.”

“고마워요.” 풀검아저씨가 말했습니다.

 

그리고는 흔들흔들 그네를 타고 내게 말했습니다. ‘어느 날 아이가 나이 먹은 커다란 아이가 되었을 때, 그 역시 9월의 부드러운 황혼 속에서 그네에 앉아 있는 작은 기쁨을 느끼기를 바랍니다.’ 라고요. (61 쪽- 어른의 그네)

  아저씨는 밤하늘에 뜬 달을 쳐다보면서 달에서 본 지구의 풍경을 상상하며 웃습니다. 고등학교 여학생의 웃기고 요란한 옷차림을 보면서 흉보는 것이 아니라 백인, 흑인, 동양인이 한데 섞여서 어울려 다니는 모습을 보고 50년 전에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보기 좋다’ 웃습니다. 교수가 내준 ‘독특하고 기억에 남을 만한 것, 창조적이고 독창적인 일을 하고 나서 그 경험을 글로 적어오라는 숙제’를 수행하고자 나무의자를 통째로 먹는 대학생의 이야기를 듣고 웃고, 있지도 않은 미래의 남편이 차사고로 다칠까봐 우는 손녀의 눈물을 닦아주며 미래의 손주 사위를 위해 ‘트럭을 조심하라’고 웃으면서 충고합니다.

  풀검아저씨는 ‘놀 줄 아는 사람’은 민첩하고 재치 있어서 누군가 갑작스럽게 상상력의 놀이에 초대할 때 받아들이는 사람, 여유있게 장난하는 사람이고, 놀 줄 아는 사람은 또 잘 웃는다‘고 말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대학 시절 교환학생으로 1년을 있다가 간 마사오군이 생각나는군요. 이 친구는 술만 취하면 지나는 택시마다 따블(두 배를 낸다는 V표시)모양의 손을 흔들며 “태~액씨, 토오쿄~, 따블이요~을 외치는 웃기는 친구입니다. 누나만 넷이 있는 집의 막내로 자라온 터라 제 집이 그리워서 그런다네요. 아무튼 때로는 택시기사 아저씨에게 욕을 먹고, 따귀를 맞는 등 곤혹을 당하지만, 술에 취하기만 하면 늘 따블을 불러서 동료들을 골치 아프게 했답니다. 95년 대동제 전야제 밤에도 그랬습니다. 학교 앞 고갈비 집에서 거나하게 술에 취해 나왔는데, 채 1 분도 걸리지 않는 제 자취방을 놔두고 이 친구는 비틀비틀 도로로 향해서는 어김없이 따블을 외쳤습니다. 택시 한 대가 스르르 섰습니다. 마사오의 이야기를 듣고는 초로의 멋진 흰수염을 단 택시기사 아저씨가 너털 웃음을 짓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친구가 술이 많이 취했군 그래. 어이, 친구. 도쿄는 말이야, 길 건너서 타야 해. 그리고 거기는 굳이 따블 안불러도 돼. 허허허“ 택시기사 아저씨는 놀 줄 아는 사람인가 봅니다. 

  풀검 아저씨는 수입농산물이 그득한 아침상을 차리며 세계여행을 하며 음식을 먹는다고 웃었고, 세탁기에만 들어가면 사라지는 양말 한 짝을 두고는, 오히려 양말 한 짝이 생겼다고 웃었습니다. 풀검아저씨는 재미있는 사람입니다. 웃음을 아는 사람인거죠. 혼자 사는 풀검아저씨는 고독하지만 외롭지 않습니다. 그에게는 웃음을 주는 세상이 있기 때문이죠. 그는 고독과 외로움은 다르다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독은 사람들로 가득 찬 바다에 떠다니는 배 한 척과 같다. 서로의 고독을 존중해 주는 것이 사회적으로 꼭 필요하다. 소로가 [월든]을 출판한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고독을 초월하기 위해서, 혼자 있지만 외롭지 않기 위해서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혼자만 간직하지 않았다. 자신이 생각하는 것을 글로 쓰고 책으로 내서 다른 사람들이 읽게 했다. 내가 이 책을 쓰는 이유도 바로 그것이다.”(18 쪽 - 고독에 대하여)

  보여주는 글(책의 원고, 블로깅)을 쓰는 사람은 외롭지 않은 사람들인가 봅니다. 누구에게 자신의 이야기로 말을 거는 때문입니다. 변화되는 세상은 사람들에게 바쁘기를 재촉하고 홀로되기를 강요하는 듯 합니다. 그리고 ‘나’만을 돌아보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지구에서 웃으면서 살 수 있는 87가지 방법>은 잠시 나를 잊고 내 주위와 내가 사는 세상을 살필 여유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인생이란 고독한 것이고, 고독하니까 사람이라고 이야기해 줍니다. 다만 외로움은 나의 선택 여부에 달렸다고 이야기해 줍니다. 내 삶에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함께 어울린다면 오히려 즐거울 수 있다고 그래서 외롭지 않다고 말해 줍니다. 외롭다 느끼는 당신께 풀검아저씨는 좋은 말벗이 되어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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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기를 치켜세움
폴 오스터 지음, 샘 메서 그림,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3년 12월
평점 :
절판


폴 오스터의 소설들, 혼자 쓴 것이 아니었다?

    어느 가수가 미술작품을 깊숙한 생각에 잠겨 한없이 바라봅니다. 곧 작품 속에서 영감을 얻어 미술작품을 소재로 곡을 만들게 되는데요, 올드팝 중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곡, 빈센트Vincent가 태어납니다. 이 노래는 유명한 화가였던 빈센트 반 고흐의 Starry Night이라는 작품을 보고 돈 맥클레인이 만든 노래입니다. 작품 Starry Night은 고흐가 정신병원에 수용되어 있는당시에 그렸는데요, 밖을 볼 수 없는 고흐가 기억속에 있는 별들이 빛나는 밤을 자신의 감정을 더해서 그린 것이죠. 작품을 보면 그림을 그릴 당시 고흐는 무슨생각을 하고 있었길래 그렇게 격정적인 그림이 나왔나 하는 궁금증도 갖게 합니다. 돈 맥클레인의 곡 빈센트 역시 반짝이는 별처럼 열정적이면서도 약간은 우울한 느낌이 들어 외롭다는 기분에 젖게 합니다. 이 세상에서 버림받은 외로운 영혼, 아무도 자신을 알아주지 않지만 세상에 뭔가를 이야기하고 싶은 고흐의 마음을 떠오르게 하죠. 미술작품과 음악이라...어울리지 않습니까? 




 The Starry Night ( La Nuit Etoilee)
Vicent van Gogh, 1889
Oil on canvas 73.7 * 92.1cm
Museum of Modern Art in New York City
 

출처:  그녀의 고양이 시즌 하나 | 샤니파워
원문: http://enamublog.com/130045796638 



<The Starry Night; 왼쪽 하단>


<The Starry Night : 오른쪽 하단> 



<The Starry Night 오른쪽 상단>



 <그가작품을 그리기 전, 펜으로 드로잉한 작품>

  오늘 또 다른 어울림을 찾았습니다. 하나의 타자기typewriter 로만 저술활동을 고집하는 유명한 소설가가 있습니다. 세월이 훌쩍 지나 워드 프로세서가 나오고 컴퓨터가 나왔는데도, 여행을 하면서도 이 무겁고 소리나는 타자기를 들고 다니며 창작을 했다네요. 소설가 김훈 님이 아직도 원고지에 펜으로 원고를 쓰시는 것처럼요. 작가의 머릿속 이야기는 마치 혈액처럼 글자들이 팔을 타고 내려와 타이프를 치고 펜을 붙잡는 손에 쏠려서 종이에 옮겨지는 것 같다는 우스운 생각이 드네요. 아무튼 타자기를 고집하는 소설가에게 이런 저런 이유로 어느 미술가가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곧 타자기에 반해 버립니다. 왜 반했을까요? 무엇을 발견했을까요? 미술가는 타자기를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아마 “그 훌륭한 소설을 그려낸 기계가 너란 말이냐?“고 물었을지도 모릅니다. 미술가는 타자기를 자신의 작품소재로 그려 넣었습니다. 마치 초상화를 그리듯 화면 가득히 타자기를 그렸습니다. 미술가는 타자기를 줌인을 하기도 하고, 줌아웃을 하기도 합니다. 정면에서도 보고, 위에서도 내려다 보았습니다. 곡선미를 보이듯 옆으로도 틀기도 하고, 타자기에게 입을 크게 벌려 웃어보라고도 하는 듯 합니다. 졸지에 제 삼가가 되어버린 소설가는 기분이 묘했습니다. 그 타자기가 아니면 글을 쓰지 못하기에 자신에게는 ‘함께하는 유일한 밥줄이요, 영원한 친구’인 타자기는 ‘나’만 알아보는 줄 알았는데, 또 한 사람이 늘었으니까요. 게다가 타자기는 글을 토해 놓아야 제 생명력을 과시할 수 있었는데, 이제는 제 모습만으로도 주인공이 되었으니, 제 삼자로 밀려난 화가는 소외된 기분도 얻게 됩니다. 



  미술가는 작가도 물론 그의 작품의 주인공으로 삼았습니다. 하지만 재미있게도 그는 정신없고, 산란하며, 불안정한 인물로 묘사합니다. 다크써클이 그득하고, 담배연기도 그득한 정신없는 사람으로 묘사합니다. 그에 반해 늘 같은 모습이지만 다른 뉘앙스를 풍기는 타자기에게서는 아우라마저 느끼게 작품으로 묘사했습니다. 재미있지 않습니까? 이 묘한 만남의 주인공들은 현대미국문학의 거장이 된 폴 오스터paul Auster와 샘 매서Sam Messer입니다. 사소한 일상의 이야기를 재미있게 묘사하는 폴이 그냥 있었을까요? 물론 아닙니다. 내가 사랑하는 나의 타자기와 어쩌면 나보다도 더 타자기를 사랑하는 듯 한 샘과의 만남을 한 권의 책으로 꾸몄습니다. <타자기를 치켜세움the Story Of My Typewriter>입니다. 70 페이지 남짓의 얇은 책은 타이핑된 활자(아쉽게도 한글입니다. 원작은 폴의 타자기의 활체가 그대로 뭍어 있다네요? 갖고 싶어집니다)와 샘의 그림들로 가득합니다. 폴만이 갖는 짧은 문체의 맛과 샘이 그려내는 타자기 그림들이 잘 어울려 있습니다. 폴의 작품이라면 작품이고, 샘의 도록圖錄이라면 도록입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보면서?) 두 가지를 생각했습니다. 우선 하나는 내게 없어서는 안되는 친구같고 동반자같은 소품이야말로 나만의 명품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지난 해에 ‘생활명품’을 이야기한 책도 있었는데요, 있는 돈 없는 돈 긁어 모아 사서는 잠깐 쓰고 고이 모셔두는 세상사람들이 말하는 명품 말고요, 내 손때와 추억이 뭍은 나만의 명품을 생각해 봅니다. 곰곰이 따져 생각해 보니 제게는 ‘검정색 세컨드 백’이 있더군요. 7-8년 년 어머니께서 선물해 주신 작은 가방인데 제 애인은 ‘사채업자 가방’같다고 놀리는 조금은 낡은 보퉁이입니다. 저는 담배를 피우는 터라 담배와 라이터 그리고 지갑, 때때로 손수건까지를 모두 넣으려면 항상 주머니가 꽉 차서 가뜩이나 퉁퉁한 몸이 영 맵시가 나지 않았는데, 모두 털어낼 수 있어서 고마운 녀석이죠. 조금 구겨넣으면 단행본 한 권도 들어가니 꽤 신퉁한 녀석이죠? 여러분은 없어서는 안될 소품, ‘나만의 명품’이 무엇인가요? 




 

  두 번째는 폴을 생각했습니다. 글을 읽다가 보면 폴의 타자기에 대한 사랑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데요, 제 마음을 온전히 글로 표현할 수 있는 폴의 능력과 고맙고 소중한 것 만큼 아껴주는 마음에 감동했습니다. 아마도 폴은 자신의 오랜 타자기 앞에 서면 처음 소설을 쓸 때를 기억할 겁니다. 숱한 밤을 함께 하얗게 지새우며 타자기와 씨름한 시간을 기억할 겁니다. 폴이 타자기와 함께라면 북극곰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추운 곳에서도, 타지마할의 여명을 느낄 수 있는 더운 곳에서도 글을 쓸 준비가 될 겁니다. 폴은 타자기고, 타자기는 폴이 될 겁니다. 몰입을 생각합니다. 삼라만상의 세상사를 잊고 빠져들 수 있는 시간을 이야기하는 몰입은 인간이기에 갖는 기쁨입니다. 운동을 하거나, 취미생활을 하거나, 사랑을 하는 순간에도 우리는 몰입을 합니다. 그 기쁨을 익히 알기에 몰입할 꺼리가 없고, 몰입할 수 없어서 위험을 무릅쓰고 도박을 하거나, 약물에 취하기까지 하니까요. 어떤 행위를 통하든 몰입의 기쁨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기쁨인 것 같습니다. 위험한 몰입을 빼고는(사실은 위험한 몰입을 전 잘 모릅니다) 뿌듯한 보람이 있습니다. 시간을 보낸 즐거움이겠죠. 그래서 나중엔 ‘사는 맛’을 느끼게 됩니다. 폴에게는 타자기와 함께 글을 쓰는 시간이 몰입하는 시간이겠죠?

  우리는 소설을 읽은 후에 소설가에 주목합니다. 그리고 소설가를 존경하고 사랑하게 되죠. 소설가를 사랑하는 또 다른 방법은 소설가의 수필을 읽는 겁니다. 한 권의 책을 만들어낼 때는 창조자여서 경외로움을 느끼지만, 수필 속에서 만나는 소설가는 ‘별 수 없는 인간’이라는 위안을 얻게 됩니다. 그래서 더욱 친근하게 느껴지는지도 모르죠. <타자기를 치켜세움>을 읽고 나니 폴의 소설들이 더욱 읽고 싶어집니다. 이젠 폴의 소설도 읽지만, 소설 속 활자 속에서는 타자기의 모습이 보일 것 같아서요. 

  소설가는 못됐습니다. 어린이집에서도 가르치는 ‘거짓말’을 뻔뻔하게, 그리고 그럴싸하게 책으로 마구 늘어놓으니까요. 사람들은 멍청합니다. 이 허가받은 거짓말쟁이들의 거짓뿌렁을 익히 알면서도 기꺼이 돈을 주고 사서는 아까운 시간을 쪼개 읽으며서 웃거나, 눈물지으니까요. 사람에게 행복을 주는 거짓말을 ‘하얀 거짓말’이라 했던가요? 그렇다면 이 책은 세계가 인정하는 하얀 거짓말쟁이의 동업자의 이야기겠네요? “이 책은 폴 오스터가 쓰고, 샘 매시가 그린 타자기 평전입니다.” 결국 이 한 문장을 쓰려고 저도 뻔뻔하리 만큼 잡설을 늘어 놓았네요. 마음이 넉넉해지는 오늘, 펼치면 좋을 기분좋은 책입니다.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Written by Richb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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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먹었다 - 우디 앨런 단편소설집
우디 앨런 지음, 성지원.권도희 옮김, 이우일 그림 / 웅진지식하우스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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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어려워서 읽기 벅찬 우디 앨런의 단편소설

  난 우디 앨런의 영화를 좋아한다. 기회가 허락하는 한 그의 영화는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매치 포인트(2005), 스쿠프(2006),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2008)이 최근에 본 작품. 그의 작품들은 풍요로운 듯 허전한 도시민의 삶과 겉과 속 다른 인간의 양면을 해학과 풍자가 가득한 대사와 과장된 연기로 보여주고 있어 늘 나를 매혹시킨다. 노년임에도 왕성하게 작품활동을 계속하고 있는 모습도 멋있지만 무엇보다 변하지 않는 개구쟁이같은 외모와 종종 해외토픽으로 나타나는 그의 파격적인 행동과 발언은 아무것도 무서울 것이 없는 있는 집 자식의 뻔뻔스러울 만큼 당당한 기세를 좋아하는 지도 모른다. 괴짜인 그가 주는 것 없이 좋았고, 그의 영화를 즐겼다. 지금껏 그래 왔다. 그래서 재미있는 제목으로 나타난 우디 앨런의 단편소설집이 있다니, 집어들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여기까지가 내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먹었다>를 펼칠 때까지의 기분이었다.



 

  무슨 내용인지 하나도 모르겠다. 내가 글을 읽고 있는 것인지 두 눈깔로 활자를 쫓고 있는 것인지 구분할 수가 없다. 소설인데 상상이 되질 않는다. 머리 속으로 상상력을 총동원하고, 그가 감독한 영화 속 배경들을 집어 넣어도 도무지 매치가 되질 않았다. 그가 설명하는 상황도 보이질 않고, 그가 그린 단어들이란 도무지 모르는 장소의 이름, 음식, 제품군 투성이였다. 소설을 읽기 시작한 지가 얼마되지 않아서인지, 철학과 사상에 대한 바탕이 부족한 탓인지 그가 하는 말은 하나도 정말 하나도 알 수가 없었다. 내겐 이 소설은 원제목 Mere Anarchy(단순한 아나키)보다 더 복잡한 아나키였다. 

  이 책을 집어들면서 떠올린 인물은 마크 트웨인이었다. 그가 내게 들려준 해학과 풍자 그리고 언어구사력에 채 흥분이 가시지 않았을 게다. 시절도 생김도 다른 두 사람이지만, 마크 트웨인이 미국 현대문학의 거장이자 이단아라면 난 우디 앨런을 미국 영화계의 비슷한 인물로 여겼다. 그래서 마크 트웨인의 산문집만큼이나 재미있고 유쾌할 줄 알았다. 큰 오산이었다. 우디 앨런에 대한 영화팬들의 반응은 극명하다. 현대극이면서도 다소 클래식한 설정이나 철학적이고 풍자적인 대사로 만들어진 그의 영화는 천재가 만드는 최고의 코미디라 칭하는가 하면 유치하기 짝이 없는 코미디물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영화에 대해서 난 전자에 가까웠다. 하지만 소설을 읽은 후에 드는 느낌은 그에게 있어 영화는 무지한 세상 사람들을 위한 천재의 배려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은 그를 좋아하는 독자들을 앞에 앉혀두고 펼치는 이야기 한마당이다. 그와 비슷한 라이프 스타일을 갖거나 사고의 레벨이 비슷한 사람들을 상대로 쓴 듯 했다. 한 문장에서 쏟아지는 명사들 대부분이 새로듣는 단어들이었다면...과연 제대로 읽혔겠는가? 나 정도 수준의 무지한은 영화를 보면서 즐기기에도 사실 벅찬지도 모른다. 책장을 넘기면서 처음엔 당황했고, 그 다음엔 지루했으며, 마지막에 이르러는 화가 났다. 초지일관 변함없는 그의 문체에 화가 났다기 보다는 책을 한 권 다 읽어가는데도 여전히 그의 문체를 캐치해내지 못하는 내 수준에 화가 났다. 능력이 부족해 제대로 소화하지 못했다는 것이 화가 난 것이다. 모두 읽었지만, 말할 수 없다. 내게는 읽기가 어려웠다. 무척이나. 이 책에 관심이 있다면, 다른 리뷰를 찾아 보시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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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당신의 인생을 구할 것이다
A.M. 홈스 지음, 이수현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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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민의 고통, 외로움와 행복에 대한 이야기

  술 몇 순배에 거나해진 취기를 빌어 ‘마이 라이프’를 이야기할 때면 이십대의 여대생이나, 사십대의 아저씨나 같은 말로 시작한다. “내 이야기를 하라고? 오늘 하루로 끝나겠어? 소설로 쓰면 한 질이다, 한질.” 명동거리 cafe가무佳舞 3층에서 옛날 크림 가득한 비엔나 커피에 따끈한 팬케익을 먹으면서 사람구경을 해보라. 가득한 웃음과 미소를 지으며 걸어가는 저들의 모습을 보면 걱정 근심이라곤 눈씻고 볼래야 볼 수가 없다. ‘모두 행복한가 보다. 나만 인생이 우울한 게냐?’ 불쑥 빈정이 상해질 법 하다. 하지만 내려가 길을 막고 그들의 인생을 물어보라. 표정은 이내 바뀌고 모두가 ‘한 질 가득 소설 속 비련의 주인공’은 저들이라고 손들테다. 난 어떻냐고? 나야 물론 한 질 갖고는 어림없다 할테고...

  내가 소설을 읽는 이유는 위안을 받기 위해서다. 슬프면 슬픈대로 위안받고(난 그렇도록 슬픈 인생은 아니거든), 재미있으면 재미있는 대로 위안을 받는다. 소설 속 주인공이 죽거나 다치거나, 마음의 상처를 입으면 가슴 쓸어안아 난 아니라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성공하고 잘나서 결국은 행복해지면 ‘그래, 너라도 그렇다니 다행이다’ 위로한다. 허가받은 거짓말쟁이(소설가)가 꾸민 이야기이거늘 울거나, 웃거나, 심각해지는 날 보면 거짓말인 줄 알면서도 종국엔 아직은 내 심장이 따뜻한가보다 스스로 대견해지기도 한다. 이렇듯 소설을 읽으면 ‘내 삶만 팍팍한 건 아니다’싶은 결론을 얻는다. 그리고 ‘아직 인생은 더 살아볼 만한 가치가 있지 않더냐’ 자문하게 된다. 소설 <이 책이 당신의 인생을 구할 것이다>도  그 기대에 부응했다. 파란만장한 리처드도 사는데, 나라고 인상구기며 살 이유는 절대 없다. 



이미지 출처: Flickr 

   이 소설의 주인공은 로스앤젤레스의 고급 주택가에 사는 중년의 사내 리처드 노박이다. 열 살 때부터 동생이 구슬치기를 할 때 장사를 하며 은행에 개인구좌를 트고 집집마다 돌며 장사를 했던 이 사내는 남부럽지 않은 부자다. 하지만 지금은 철저히 외롭게 사는 혼자다. 사업에 몰두하느라 이혼을 한 후 아내와 아들 벤은 따로 살고 있다. LA의 높은 언덕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는 저택에 사는 그였지만,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었다. 스스로 갇혀 살거나, 사육되고 있다고 보는 편이 낫다. 하루 종일 자신을 서빙해주는 가정부 실비아, 삼시 세끼의 영양을 책임지는 영양사에 정기적으로 운동을 관리하는 트레이너를 두고 있는 이 사나이는 매일 아침 컴퓨터 모니터에서 주식시황과 계좌내역만 체크하면 그다음은 할 일이 전혀 없는 사나이다(일 안해도 충분히 먹고 살만한 부자라는 말도 되겠지만). 어느 날, 아무도 없는 저택에서 갑작스런 통증을 느끼며 그것 즉 죽음을 예감한다. 급한 마음에 옛 아내에게 전화를 했지만 냉랭하기 그지없고, 아들조차 여행을 떠난다고 관심두지 않는다. 곧 죽는다 해도 울어줄 이가 없다. 쓸쓸함, 리처드는 외로움이 닥친 죽음보다 더 무서웠다.

  응급차에 실려 병원에 갔지만, 병명을 알 수 없다. 이내 통증도 사라졌다. 퇴원하는 길에 영양식 외엔 먹지 않던 그는 도너츠를 먹게 되고, 도너츠 가게 사장과 친구가 된다. 마트 과일코너에서 ‘불만스런 인생’에 울고 있던 여인과도 친구를 먹고, 뒷집에 사는 영화배우와도 안면을 튼다. 죽었다 살아난 그는 세상에 눈을 뜨게 된 것이다. 그리고 단순하기 그지없던 그의 삶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아들 벤의 정체는 청천벽력같은 충격이었고, 말리부에서 사귄 친구 닉은 세계적인 문학가란다. 요가선생과의 사랑에서도 숨겨진 자신을 발견하고, 혼자서만 가슴앓이를 했던 아들 벤의 진정한 속마음도 알아가게 된다. 리처드는 인간속의 인간, 다시 말해 속시끄러운 인간세계人間世界속 인간人間이 된 것이다. 소설을 읽다 보면 리처드는 영화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버킷 리스트> 속의 ‘잭 니콜슨’을 생각나게 한다(잭 보다는 열 살 정도는 어려야 하겠지만). 공황장애와 인간세상의 참맛을 노년에 되찾는 코드도 비슷하지만, 어눌한 행동하며 사람들과 부딪히며 어리둥절하는 모습 면면은 잭을 닮았다. 비록 늦었지만 사람과의 관계를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물량공세다. 그가 가진 거라곤 돈 밖에 없으니까. 돈을 위해 살다가 가정을 잃고, 아내를 잃고, 자식 벤을 잃었던 그가 그 돈으로 다시 사람을 얻는 아이러니는 지극히 물질만능주의의 대명사인 아메리칸 드림답다.

  하지만 소설 속 스토리를 부자의 돈지랄이라고 치부하며 빈정대기엔 리처드는 너무 나약하고 위태롭다. 미래의 내 모습 같고, 비슷한 또래 같아서 그가 가진 생각과 슬픔 그리고 회한이 남 이야기같지 않았다. 모두 잃었던 그가 느끼고 깨달으면서 하나씩 찾아가는 모습은 단순하기 그지없는 내 삶에도 돌파구를 찾을 수 있겠다는 희망을 보는 듯 했다. 인간이 시계를 만들어서는 12칸짜리 시침 두 바퀴에 하루를 정해 놓고, 그 속에 갇혀 살고 있듯이, 내가 만든 내 삶 속에 지쳐가는 내 모습도 자의든 타의든 고개만 돌려 인간을 향하면 조금씩 변화할 수 있음을 알게 한다. 

  그럴지도 모른다. 내가 꿈꾸던 성공은 성공이 아니었고, 내가 그리던 행복도 행복이 아닐지도 모른다. 나 뿐만 아니다. 내 옆집 사람도, 내 뒷집 영화배우도 우리 모두가 마찬가지일지 모른다. 평범한 듯 보이는 하지만 실은 모두가 불행한 사람들이 둘이 모이니 답이 보였고, 그들이 이야기하며 세상을 바라보니 작지만 행복을 다시 고민하게 된다. 인간의 막연한 불안은 외로움이고, 그 외로움은 손에 쥐고 있었음에도 모르고 버려버린 내게 있던 보물이었다. 아프고 괴롭고 조용했던 사나이 리처드는 책장을 넘길수록 ‘잃어버린 성궤’를 추적하는 해리슨 포드의 액티브 못지 않았다. 한 시도 마음이 조용할 수 없이 혼란한 상태, 하지만 이게 사람 사는 세상이 아니던가? 행복과 사람사는 맛은 그 속에 있지 않던가? 

  리처드의 가족은 영화 <아메리칸 뷰티>를 생각나게 했다. 정신없는 LA사람들, 더 정신없는 그들의 대화는 제정신을 반쯤 놓아야 차라리 이해가 빠를 정도다. 무지건조하게 툭툭 짧게 던지는 A.M. 홈스의 글은 마침표의 뒤에서 글맛을 깨우치게 한다. 평범하지만 불안한 사람들의 아슬아슬하고 위태하면서도 재미있고, 작은 감동도 있는 소설이다. <이 책이 당신의 인생을 구할 것이다>라는 제목의 이 소설은 당장 내 인생을 구하지는 못할 것 같다. 하지만 모르지...20년쯤 후에 다시 읽는다면, 그때는내 인생을 살릴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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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인 없는 살인의 밤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윤성원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히가시노 게이고틱한 일곱 개의 단편. 단, 한꺼번에 읽지 말라!

  추리소설을 좋아하는 사람은 못됐다. 뉴스나 신문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교통사고와 자연재해을 접하면 ‘저런 쯔쯧쯧~’하면서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유독 살인사건, 다시 말해 ‘사람이 죽은 사건’에 대해서는 ‘오~ 무슨 일이고?’ 하며 관심을 둔다. ‘왜 죽었을까?’에 흥미를 느낀다는 말이다. 남의 일같지 않아서 일까? 살인자적 측면일까, 피해자일까 알 수 없다. 이런 관심도 부족해서 사람들은 추리소설을 읽는다. 살인사건은 왜 일어났고, 범인은 누굴까? 끈질긴 추적 끝에 범인을 잡았다면 어떻게 범인을 찾을 수 있을까? 무척이나 궁금해 한다. 

  물론 ‘살인사건의 피해자와 그 유가족의 억울한 한을 풀기 위해서’라도 범인을 잡는 것은 응당 당연한 일이고, 가장 우선적인 해결을 필요로 하는 일이기에 관심을 두는 것이겠지만, 독자가 모두 형사가 되고 싶을 리 만무한데 왜 그렇게 있지도 않은 소설을 쓰고, 읽으면서까지 살인사건에 집착해야겠냐는 말이다. 그런 이유는 이런 사건은 좀처럼 만나 보기 힘들고, 또한 죽은 사람을 놓고 벌이는 범인과 형사의 머리싸움이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풀어야 할 해답’ 중에 가장 ‘스릴’이 있는 싸움이기 때문은 아닐까?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그런 ‘끔찍한 스릴’을 즐긴다니 그게 못됐다. 게다가 있지도 않은 사건을 만든 이야기를 즐기니 더 못됐다. 

  요즘 내가 못된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늦은 밤 조용히 홀로 앉아 잠을 잊고 미스터리 소설을 읽는 재미에 빠져들고 있다. 읽고 나면 항상 ‘피해자의 억울함’과 ‘범인의 잔인함’에 씁쓸한 입맛을 다시면서도 전혀 알 수 없는 사건들이 실마리가 잡히고 서서히 풀려가는 매력에 사로잡혀 책을 놓질 못한다.원인에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들’이 한 몫을 톡톡히 하고 있다. 나쁜 사람이다, 이 사람. 지난 토요일 밤, 히가시노 게이고의 단편집 <범인 없는 살인의 밤>을 읽으며 밤을 새웠다. 원제목 犯人のいない殺人の夜 이다. 

 



 

  살인사건은 일어났다. 하지만 범인이 없다? 말 그대로라면 자연사나 자살이 아닌가? 하지만 자연사도, 자살도 아니다. 과연 범인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누구를 범인이라고 불러야 할까? 하는 미스터리한 사건들 일곱 편을 한 권에 담았다. 

  이 책은 일본에는 1994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그의 작품다운 트릭과 의외성이 숨어있는 단편 미스터리물이다. 지금껏 내가 읽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들이 장편소설이고 ‘놀라운 지능의 범인’과 ‘ 더 놀라운 지능의 해결사(형사, 물리학 박사)’의 승부였다면, 이 소설은 우리 주변에서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상다반사’의 사건과 ‘평범한 인물’들이 가해자라는 점이 특별했다. 그의 장편에서 느꼈던 길고 긴 숨과 최고 꼭지까지 고조되는 긴장감은 없지만, ‘평범한 사건 속에 숨은 의외성’은 장편의 그것보다 더 현실적이고, 그래서 더욱 짙은 여운을 남긴다. ‘소설에서 말이 되지 않는 사건에 대해 글을 쓴다면 ’개연성도 없고, 현실성없는 말도 안되는 소설‘이라고 비난한다. 하지만 이 말도 안되는 이야기‘가 존재하는 곳이 현실이다’는 어느 소설가의 말이 생각나게 하는 소설들이 들어 있다. 길고 짧은 한 편 한 편의 스토리마다 임펙트가 강했다. 

  <작은 고의故意에 관한 이야기>는 말그대로 ‘미필적고의에 의한 살인’을 말한 단편이다. 이는 ‘과실치사’ 즉 고의를 인정하지 않고 단순히 주의의무위반이나 발생한 결과에 대한 예견가능성과 회피가능성을 문제삼는 과실에 의한 살인이 아니라, 고의성故意性을 지닌 우발적 살인을 이야기했다. 사춘기 시절에 겪는 연인의 버려짐, 즉 실연失戀의 가능성에 일어난 사건인데 히가시노 게이고의 이과적 사고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어둠 속 두 사람> 역시 청춘시절 겪는 사랑으로 빚어진 사건을 담았다. 사랑과 욕정을 누가 함부로 구분할 수 있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욕망 앞에서 있는 인간은 누구나 나약한 존재가 된다는 것을 새삼 실감하게 된다. 

  <춤추는 아이>는 소년의 안타까운 사랑을 이야기했다. 누구나 한 번 쯤은 3미터 거리 만큼 떨어진 사랑을 해 본 적이 있다. 짝사랑이 그것이다. 답을 알 수 없기에 한없이 순수하고, 뜨거울 수 있는 이 사랑은, 알려지는 순간 불쾌한 집착으로 보여지거나 혹은 오해를 사는 아픔을 낳는다. 내가 던졌던 짝사랑들은 어떠했을까? 그들은 내 마음을 알았을까? 그래서 그들도 인생이 변했을까? 과거를 돌아보게 했다. <끝없는 밤>은 형사라는 직업을 생각하게 했다. 용의자 선상에 있는 모든 사람을 ‘범인일 수 있다’는 가정 하에 생각해야 하는 사람들. 형사들은 자신이 찍은 용의자가 범인인 것을 알게 된다면 과연 기뻐하기에 앞서 왜 그래야 했을지를 알아야 하기에 범인의 입장에서 다시 추적해야 하는 직업이다. 그리고 끝내 죄는 미워하고 인간은 미하지 말아야 하는 숙제도 안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을 온전히 볼 수 있는 시각을 잃어 자신이 불행한 삶을 살기 때문이다. 항상 오감을 깃세워야 하는 그들의 직업에 경의를 표하게 했다. 

   <하얀 흉기>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답지 않게 ‘호러물 같은 공포심’을 불렀다. 자식을 잃고 ‘싸이코’가 되어버린 여성을 보면서 가늠할 수 없는 모성애의 깊이와 넓이를 만나게 된다. 또한 상심의 원인을 찾아 복수하는 원초적인 인간성을 목격한다. 섬뜩한 소설이었다. <굿바이, 코치>는 무서운 살인사건 이야기다. 자신의 행복을 지키려 남에게 불행을 부르는 인간과 자신의 영원한 사랑은 자신을 영원히 잊지 못하게 하는 것이라고 판단한 인간이 빚어낸 살인이었다. 전반적인 이야기들이 사건의 정황을 비출 때 ‘일본인답다’는 느낌을 받지만 이처럼 잔인하도록 섬세한 사건을 만나면 ‘과연~’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게 한다. 

  마지막 작품인 <범인 없는 살인의 밤>은 이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이 작품의 백미였다. 쇼프로에서 ‘조용필’은 맨 나중에 나와 대미를 장식하듯 이 작품 한 편을 읽는 것만으로도 ‘제대로 읽었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반전에 반전, 마지막 대반전은 어의를 잃게 만들었다. 이 작품에는 코멘트는 불가하다. 느낌도 말할 수 없다. 아무것도 모른 채 읽어야 한다. 서점을 찾아 서서라도 이 작품은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전지전능하지 못한 인간이 ‘완전무결한 사건’을 만들기는 애초에 불가능한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가장 크게 단죄해야 할 ‘살인’을 해놓고, 잡히지 않기를 바라는 인간의 악심惡心은 과연 그들만의 소유물일까? 그리고 불완전하기에 그 자리에서 ‘범인’을 벌할 수 없는 형사는 어떤 심정으로 범인을 추적하고 대할까? 이것이 내가 추리소설을 읽으면서 찾는 ‘행간의 의미’다. 만약 우리가 제목처럼 ‘범인없는 살인 이야기’를 읽는다면, 아마도 그 책을 읽고 ‘범인 없는 추리소설이 말이 되는가?’ , ‘추리소설가는 직무태만을 한 것 아닌가?’ 외치며 재미없는 책이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화성연쇄살인사건’처럼 아직도 해결되지 못한 채 뭍혀가는 수많은 사건들이 존재하고 있다. 이 사건들은 ‘말이 되는 사건인가?’ 소설같지 않은 사건들이 현실에는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 범인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범인이 잡히지 않는 한 스토리는 진행중이다.

한 편의 추리소설을 읽으면 범인의 지능과 형사의 사건해결능력에 혀를 내두르며 ‘작가’의 필력에 얼만큼의 찬사를 던질지를 준비하게 된다. 그리고 얼른 잊고 싶어진다. 하지만 이 소설은 다르다. 무려 일곱 건의 살인사건이 아니던가? 게다가 주위에서 있을 수 있는 개연성이 충분한 것이어서 작가의 필력을 운운하기에 앞서 피해자와 살인자의 면면에 사로잡혀 미망을 떨치지 못하게 된다. 늦은 새벽에 한 권을 모두 읽고 침대에 홀로 누워 있는 기분이란... 겪어보지 않았다면 말을 말아라. 과거의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성을 발견할 수 있는 책, 하지만 편한 밤을 보내려거든 하루에 한 편씩 읽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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