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박민규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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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의 '데미안'이 이 소설 속에 숨어 있었다! 

  “누군지는 기억이 나지 않아, 웃기지만 정말이야. 하지만 언제였냐는 기억이 또렷하지. 왜냐하면 하늘에 뜬 별이 모두 땅에 내려앉은 것처럼 거리엔 반딧불이같은 불빛들이 그득하고, 귀에는 캐럴이 끊임없어 들렸거든. 난 명동성당으로 들어서는 을지로 사거리 오른편 가로등에 서 있었어. 한 손에는 ‘사랑과 영혼’을 볼 수 있는 중앙극장 영화표 두 장, 다른 한 손에는 반쯤 타서는 재를 게워내고 있는 담배가 들려 있었지.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 그녀를 난 30-40분 정도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아. 추웠던지, 똥줄이 탔던지 담배를 꽤 피웠던 기억...생생해. 그녀가 오면 보라고 주위에 있는 몇 개의 꽁초까지 모아서 일부러 수북하게 보이게하려고 오른발로 쓸어 모았던 기억도 나. 많이, 그리고 간절하기 기다렸던 것 같아. 

  끝내 그녀는 오지 않았어. 아무래도 내가 일방적인 데이트 제안을 하고 기다렸던 것 같아. 그리고 그녀는 나쯤은 괘념에도 없었던 것도 같아. 애타게 기다린 나도 나지만, 끝끝내 나타나지 않은 그녀였던 걸 보면 말야. 영화가 시작한 후 10분 정도를 그 자리에서 더 기다렸던 것 같아. 담배갑에 든 마지막 담배에 불을 붙이고, 영화표를 아주 잘게 찢었지. 그리고 내 머리 위로 뿌렸던 기억이 생생해. 나를 지나가던 사람들은 내가 그런 이상한 짓을 하는 줄 몰랐을거야. 그 날은 찢어진 영화표보다 훨씬 더 크고 하얀 눈이 내리고 있었거든.“

  며칠 전 지금의 ‘그녀‘에게 말했던 내 스무 살의 크리스마스 이브 이야기다. 바보같은 사내의 꽁트같은 이야기에 그녀는 숨이 넘어갈 듯 까무러치는 웃음에 더욱 신명나게 떠들었지만 고이 숨겨 두었던 아픈 기억에 가슴이 아팠다. 그랬구나, 내가.

  누구였을까 그녀는. 알 듯 모르겠다. 이럴 땐 ’잊어야지‘ 마음먹으면 정말 까맣게 잊고 마는 신기한 기억력이 미워진다. 이 이야기를 꺼낼 때 내 손에 든 것은 반쯤 타고 남은 담배가 아니라 소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였다. 이 소설의 시작은 내 이야기와 비슷한 즈음인 어느 겨울의 크리스마스였다. 



 

  묵은 사랑은 애절하다. 기억이 흐릿할 만큼 세월이 지날수록 애절한 향내는 더욱 진해진다. 어려서 사랑을 아직 몰라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자위를 하지만 사실은 가장 순수하고 뜨거운 사랑을 감당하지 못해서 내쳤는지도 모른다. 그냥 좋았을 뿐 아무런 조건이 없던 그때, 느껴지는 것은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다는 하나’ 뿐이었다.

  소설의 나는 남편으로부터 버림받은 불쌍한 아내의 아들이다. 젊디젊은 톱 탤런트에게 새장가를 간 중년의 배우 아버지, 나에게 그는 미美를 쫓는 나방이었다. 백화점에서 같이 근무하는 ‘끔찍하게 못생긴’ 그녀가 눈에 들어온 건 새장가간 아버지가 반면선생反面先生이 되었는지 모른다. 아니, 버려진 어머니에 대한 연정인지도 모른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그녀를 ‘나’는 좋아하기 시작한다.

  나와 못생긴 그녀와의 사랑 이야기는 자못 싱거울 수 있다. 미추노소美醜老少를 불문하고 당신들의 사랑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랑이 아니던가? 맞불이 붙은 사랑에는 타인의 시선일랑 아랑곳없다. 원래 사랑하는 연인에게 세상은 ‘우리를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의 그 채도와 명도 역시 두 단계쯤 낮아진 배경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상대를 떠나 ‘못난이’인 나 역시 흘러온 시간만큼 사랑을 경험했고, 그 때만큼은 소중한 시간이었기에 이들을 지켜봄은 심드렁할 만하다. 자칫 건조할 뻔 했던 이 소설을 읽은 동안 구름을 걷듯 즐겁게 하고, 내 눈에 뿌려진 안개를 걷어주는 역할을 맡은 세 번째 주인공은 바로 ‘요한’이다.

  요한은 헤르만 헷세의 ‘데미안’을 닮았다. 적에게 총칼을 겨눴던 2차 세계대전의 전장에서 피아彼我 구분할 것 없이 젊은 병사들의 가슴 속에 들어 있던 그 책의 주인공, 데미안을 닮았다. 데미안은 ‘형’ 그리고 ‘친구’의 다른 이름이다. 나와 함께 동시대를 살면서 내가 모르는 세계를 보여주고, 내가 알아야 할 진리를 함께 고민하는 동반자, 그는 그런 인물이었다. 하지만 ‘요한’은 독설쟁이다. 신원을 알 수 없는 데미안의 말들이 신비했다면, 재벌가의 첩자식인 요한의 독설은 ‘지화자’을 연발할 만큼 명쾌하고 시원하다.

  소설의 ‘내’가 입을 떡 벌리고 들을 법한 세상에 대한 그의 삐딱한 시선은 늘 왕눈이 안경을 뒤집어 쓴 박민규의 시선이고 생각이 아닐까. 내가 호불호好不好의 이분법적 수렁에서 벗어나 세상을 다시 대하고, 그녀를 만날 수 있었던 것도 ‘요한’이 있어서였다. -데미안과 요한, 비슷한 캐릭터의 두 사람의 이름은 묘한 아이러니다. 데미안이 Demon 즉, 악마적 이름이라면, 독설쟁이 요한은 그리스도에게 가장 가까이 있었던 ‘그리스도의 선구자다 - 

  내가 요한에게서 들은 첫마디는 백화점 주차 알바에서 살아남는 법이었다. 난(글을 쓰는 나) 그의 첫 번째 대화에 그만 홀랑 반해 버렸다. 그 시절의 나였다면 잠시라도 요한과 떨어지지 않으려 했을 것이다. 

“괜한 친절을 베풀지 마. 주차할 때 뒤를 봐주거나 오라이~ 이런 거 해주지 말란 말이야. 그러다 쿵 하면 너한테 변상하라고 덤비는 게 인간이야. 정 주차가 서툰 운전자면 나나 면허를 가진 근처 직원에게 부탁해. 어이~ 뒤 좀 안 봐주고 뭐해, 따지는 놈도 있지? 대개 그런 놈들은 큰 차 모는 놈들이야. 상황 봐서 최대한 조심하고...혹시나 말이야, 그러다 쿵 해쓴데 고급세단이나 외제차였다! 그럼 니가 행 할 행동을 일러줄 테니 반드시 입력해 둬. 우선 말없이 완장과 모자를 던져버려. 그리고 뒤를 돌아보지 말고 사무실로 뛰는 거야. 주임이 있으면 기절이라도 시키고 책상 오른 쪽 두 번째 서랍을 열어 신상명세서를 찾는 거야. 그걸 찢어 삼키든지 태우든지 하고 곧장 집으로 도망쳐. 그리고 다른 일자리 알아보는 거야. 알았지?” 본문 88 쪽

  요한은 아니, 아니에요를 연발하는 그녀에게 아니에너스라 이름짓고, 그녀를 닮아가는 나에게 아니우스라 부르며 바보 같은 두 사람을 맺어준다. 남의 고민을 발벗고 해결해주는 사람, 남을 즐겁게 해주어 함께 웃으려 하는 사람. 요한은 실은 절대고독의 개미지옥에 빠져 있는 외로운 사람이다. 선구자 요한처럼 세상의 헛헛함을 알았던 것일까, 진절머리 칠 만큼 버려진 사랑을 너무 일찍 안 탓일까, 하나였던 세 사람이 둘이 되자 결국 손을 그어 제 명命을 재촉하는 바보가 된다.

이들이 모이는 아지트는 몰락해 가는 재래시장의 초입에 있는 맥주집 '켄터키 치킨'이다. 간판에 BEER 대신 BEAR가 붙어있고, HOF 대신 HOPE가 떠억 자리잡고 있는 곳, 단골이라고 닭다리가 일곱 개가 나오는 이곳은 뒤죽박죽 섞여버린 세상의 축소판이다. 배를 잡고 웃으며 말하는 그곳 풍경은 사뭇 대학시절 즐겨찾던 ‘딸깍발이’가 생각났다.

“왜 그렇게 우스웠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날 우리는 지겹도록 웃고 또 웃었다. 켄터키 옛집인 듯한 풍경은 알고 보니 네덜란드였고, 스와니겠지 싶었던 강은 아마존이었다. 게다가 버젓이 네바다 사막이며 나이아가라의 사진도 걸려 있었다. 좋아, 다 좋은데 저 돼지는 뭐냐구? 닭이면 또 모를까...닭을 튀기는 주방 근처엔 새끼 돼지들이 줄줄이 엄마 돼지의 젖을 문 이발소 그림이 걸려 있었다. 이 닭도 한국에서 잡은 걸 텐데...또 메뉴판을 뒤지며 켄터키에 마른 오징어라니...이래도 되는 거냐구, 거품을 물었었다. 컨터키의 어떤 것도 찾을 수 없는 가게의 출입구 위엔 알고 보니 무난하게 갓이 걸려 있었다. 급기야 화장실에 간 요한은 이소룡을 발견했었다.” 본문 95 쪽

  여자로서 못생긴 그녀가 본 한국은 화장을 하지 않고선 외출하기가 두려운 사회, 남자와 여자가 철저하게 구분되는 야만적 사회다. 또 추함은 죄가 되고, 못생겨서 받는 차별은 추함의 댓가로 달게 받아야 하는 당연한 벌罰로 인정하는 사회다. 그래서 못생기고 추한 사람은 그 반대의 부류를 위해 존재하는 배경이 되고, 그들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엑스트라다. 바로 디에고 벨라스케스가 평생동안 눈을 떼지 못했던 왕녀를 시중드는 시녀와 다름아닌 것이다. 박민규를 이 소설에 대한 변으로 이렇게 말했다. “저는 늘 스펙만을 강요하는 사회에서 경쟁력 없이 살 수밖에 없는 대다수 사람들을 위로하고 싶었습니다. 삼미 슈퍼스타즈가 남자들을 위한 소설이었다면, 이번 소설은 여자들에게 위로를 줄 수 있었으면 합니다.” 

  어쩌면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은 못생긴 사람들이다. 비교우위를 점하는 자신감에 사로잡힌 불쌍한 사람들이다. 남보다 더 많이 갖고, 더 예쁘고 잘생겨야 행복해진다고 여기는 불쌍한 추물醜物들이다. 행복은 자존감에 있다. 잘나고 못난 것을 인정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라는 자존감은 자신에 대한 사랑으로부터 비롯된다. 박민규는 그녀가 독일에서 ‘못생긴 여자’가 아닌 ‘한 명의 독신 동양인’으로서 살아가는 모습을 통해 지금도 수술대에서 의사의 칼침을 기다리는 수많은 못생긴 사람들이 가져야 할 것 역시 자존감自存感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기존의 소설에서 찾을 수 없는 독특한 구성과 파격적인 문단 구성은 박민규답다는 찬사를 안할 수 없다. 시종일관 독자로 하여금 이십 년 전의 차가운 겨울을 느끼게 하는 데에도 성공했다. 만약 내가 첫사랑과 스무 살을 추억하고 싶어진다면 다시 읽어야 할 책은 이 소설이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권말에 붙어 있는 CD와 엽서다. 잘 된 작품에 굳이 없어도 됨직한 사족이었다(난 아직도 그 부록을 개봉하지 않았다). 독자를 위한 배려였다면 지나쳤고, 완성도를 높이려 했다면 착각이다. 앞으로도 쇄를 거듭해 널리 읽힐 것이 자명한 이 소설, 온전히 제 한 몸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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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거나 혹은 버리거나 in 부에노스아이레스
정은선 지음 / 예담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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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여행기가 아니다. 잘 만들어진 로드 무비 아니, 로드 소설이다!

  연극과 영화를 연출하고 마케팅을 하던 장래의 시나리오 작가가 어느 날 남미로 훌쩍 떠났다. 여행과 영화에 관련된 소재꺼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도착한 곳은 부에노스 아이레스. 그리고 그녀는 그곳 공기에 뭍혀 국적 없는 이방인이 되었다. 보고 듣고 경험한 것을 기억하고, 필름에 담았다. 함께 웃고 함께 고민하며 그들과 어울렸다. 그리고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약간은 그을리고 약간은 핼쑥해졌을까. 알 길은 없다. 하지만 필경 떠나기 전보다 사고의 키가 훌쩍 커서 왔을 것이다. 사진을 보며 한동안 머물렀던 남미의 생활을 추억하다가 문득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그리고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하루에도 수십 권씩 서점의 매대에 쏟아지는 자화자찬의 여행기가 쏟아진다. 남과는 다른 곳, 다른 방식으로 멋진 풍경을 찍고, 그림을 그리고, 그 사이에 이야기를 메꾸지만 책을 덮고 나면 한결같이 ‘정말 가서 살고 싶은 곳’ 운운하는 그저 그런 결말로 그치고 만다. 독자들은 사실 작가(유명인이 아니고서야)가 어디를 갔고, 뭘 했고, 뭘 먹었는지 그리고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는 관심 없다. 관심사는 단 하나. ‘그곳에 무엇이 있더냐’, ‘정말 가 볼만 하더냐’ 일 뿐이다. 



 

 

  책 <찾거나 혹은 버리거나 in 부에노스 아이레스>는 그런 일반적인 여행기가 아니다. 로드 무비 아니, 로드 소설이다. 이 책에는 작가가 없다. 대신 저마다 버려야 할, 얻고 싶은 사연을 가지고 있는 주인공들이 있다. 이들이 가진 공통점은 OJ여사가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에 머무른 여행객이라는 점이다. 주인공들은 나그네가 되고, OJ여사는 주모酒母가 된다. ‘게스트하우스’는 피곤한 나그네들이 하룻밤 신세를 지는 주막인 셈이다. 

  서울에서 진행중이던 모든 프로젝트를 버려둔 채 갑자기 사라진 연인을 찾아온 OK김, 원하지 않던 불륜의 막장 드라마에 질려 무작정 떠나온 나작가, 여자 부모의 반대로 이제 사랑을 떠나보낼 준비를 하는 원포토, 처자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며 살았다며 마지막 정착지로 부에노스 아이레스를 선택한 박벤처. 그리고 의문의 여인 로사. 주인공들의 사연은 작가의 이야기고 독자들의 이야기다. 생면부지의 이들이 서로를 알게 되고 비슷한 처지임에 위로를 얻게 하는 유일한 플랫폼은 OJ여사다. 그녀 역시 그 누구보다 깊은 사연을 담고 있었지만...그들은 모두 사랑에 취해 있었다. 그 대상이 이성異性이든, 자신이든, 가족이든, 사랑을 되찾으러 헤매고 었었다. 젠장 맞을 사랑, 지구 끝에서도 사람들은 사랑타령을 한다.

  영상소설 같은 스토리의 진행은 잘 꿰어 맞춘 육각면체의 큐브처럼 절묘하게 이어진다. 주인공들의 시선이 멈추는 곳은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명소이고, 운치 있는 사진들은 설명이 된다(따로 각주를 넣어 설명도 하지만). 컬러풀한 풍경, 뙤약볕의 한낮, 뜨거운 공기, 알코올 냄새와 소움이 그득한 열정의 밤풍경, 그리고 정열적인 사람들. 마치 각각의 주인공들의 한걸음 뒤에서 그를 좇듯 함께 시선이 머물고 함께 취한다. 저자의 유려한 문체는 주인공들의 목소리마저 들리는 듯 했다. 책의 곳곳에 숨은 전면가득한 사진 속에 들어있는 임펙트강한 저자의 생각은 한 편의 광고문구 같이 멋들어진다.  

그 중 인상적인 글 하나. “우리는 왜 여행을 하며 방황할까?”라는 묻지도 않은 질문에 답을 하는 것 같은 글이다. 

“여기가 어디지?”

서울 시내에서 길을 잃었을 때,

우리가 찾는 것들은 항상 정해져 있다.

광화문의 이순신 동상, 삼성동의 코엑스, 신사 사거리 주유소...

불행히도 삶에서는 그런 행운이 쉽사리 발견되지 않는다.

대부분은 위치조차 모르는 광화문의 이순신 동상을 찾아

끊임없이 떠돌아다닌다. 본문 33 쪽





    영화 같은 소설. 작가가 경험한 그곳의 이야기는 글자로 새겨져 내 눈에 들어왔고, 글자는 다시 필름으로 내 머리에 박혔다. 또 한 편의 여행기거니 하고 심드렁하게 읽은 책이어서 뜨거운 남미의 잔향은 더 오래 내 코끝에 머물러 있다. 

P.S. 공교롭게도 이 책의 원고가 나오고 이를 바탕으로 ‘영화화’가 결정되었단다. 게다가 저자인 정은선은 그 영화의 PD를 맡고 있단다. OJ 여사의 <게스트하우스>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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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브리맨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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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한 소설, 늙은 나를 만나게 하는 무서운 소설이다! 

  노인老人은 나무다. 목표를 향해 내달리는 행인行人들이 교차하는 길거리에 서 있는 나무는 행인들에게는 존재감만 있을 뿐 주목이 대상이 되지 못한다. 토악질을 하거나, 한 다리를 들고 오줌을 싸거나, 신발 밑창에 뭍은 개똥을 털거나, 홧김에 발길질을 할라치면 그제서야 인도와 차도 사이에 간격을 두고 서 있는 물체의 존재가 뭔지를 감지할 뿐. 늦가을 누런 열매를 맺고 구린내를 피우는 은행나무라면 모를까, 울긋불긋 단풍을 떨굴 줄 아는 단풍나무라면 모를까, 누구도 그 존재를 인지하지 않는다. 명절날 잠시 쉬었다가 가는 깊은 산속 별장같은 곳이 고향집이라면, 한여름 그늘을 잠시 피할 곳은 나무 아래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늙어가는 노인은 늙어가는 나무와 닮았다.

  노인은 외로움과 함께 숨을 들이키고, 서글픔과 함께 한숨을 내뱉는다. 노인의 아침은 아픔이고 노인의 밤은 꺼져듦이다. 수명을 다한 장기臟器가 고장을 일으킬 때마다 저승에 이르는 버스는 한 정거장을 성큼 내지른다. 아파서 고생할 바에는 어서 가자, 빨리 가자 말할 법도 하지만 제가 들고 태어난 질긴 명命줄이란게 어디 제 맘대로 끊을 법 하더냐. 고목장승으로 살더라도 살 수만 있다면 끈질기게 살고픈 마음이 또 사람마음이다. ‘개똥밭을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말은 나역시 곧 그렇게 될 생애에 절박하고 간절한 노인이 지은 말일 것이다. 이렁저렁 말해야 뭐할까. 영화제목 말마따나 ‘노인들을 위한 나라는 없다No country for Old Man’.



 

    소설 <에브리맨EVERYMAN>(문학동네)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노인 ‘그’의 죽음을 이야기한 책이다. 소설 속엔 그의 이름도 없다. 그래서 그는 아무도 아니고, 모두기도 하다. 소설은 늙은 작가(하지만 작가는 매년 노벨문학상의 강력한 수상 후보로 거론되고, 미국 현대문학의 4대 작가로 손꼽히는 필립 로스Philip Roth다)가 마치 자신의 자서전을 쓰듯 자연스럽고 평이하게, 그리고 다소 지루하게 일상을 그렸다. 소설 초반 자신의 장례식을 지키는 모습을 묘사하는 장면은 새가 되어 딸과 아들의 슬픔을 지켜보는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를 닮은 점을 빼고는 딱히 특별할 게 없다. 눈이 가는대로 그린 듯, 생각나는 대로 뱉어낸 듯하다. 마지막 생의 순간을 그린 이 소설은 우울하고 어둡다. 그래서 몇 장을 넘기지 못해 ‘짜증날 만큼 지겨운 몇 시간이 되겠다’ 싶어 미리 우려한 것도 사실이다. 기우였다. 읽는 내내 애가 끊어질 만큼 속이 상하고, 가슴이 아팠다. 소설 속의 ‘그’가 이삼십 년 후의 내 모습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언젠가 노인이 되어 살아갈 내 모습이 책 속에 투영되었기 때문이다.

  멋진 제목이다. ‘에브리맨EVERYMAN’. ‘그’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시계수리를 겸한 보석상의 이름과 같다. 그는 에브리맨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대신하지만, 이는 모든 사람이 곧 ‘그’가 될 수 있음도 이야기한다. 늙음은 모두에게 찾아오는 종착지가 아니던가. 독자라고 예외일 순 없다. 그가 지켜본 자신의 장례식은 더없이 허망한 죽음과의 조우다. 나와 우리의 장례식일지 모를 모습이다. 

“ 그것으로 끝이었다. 특별한 일은 없었다. 그들이 모두 하고 싶은 말을 했을까? 아니, 그렇지 않았다. 또 물론 그렇기도 했다. 그날 이 주의 북부와 남부에서 이런 장례식, 일상적이고 평범한 장례식이 오백 건은 있었을 것이다. 두 아들 때문에 뜻밖의 방향으로 흘러간 삼십 초, 그리고 죽음이 발명되기 이전에 순수하게 존재하던 세상, 아버지가 창조한 에덴, 구식의 보석상이라는 탈을 쓴 폭 5미터 깊이 12미터밖에 안 되는 크기의 낙원에서 이루어지던 영원한 삶을 하위가 아주 공을 들여 정확하게 되살려낸 것 외에는 다른 여느 장례식보다 더 흥미로울 것도 덜 흥미로울 것도 없었다. 그러나 가장 가슴 아린 것, 모든 것을 압도하는 죽음이라는 현실을 한 번 각인시킨 것은 바로 그것이 그렇게 흔해빠졌다는 것이었다.” 본문 22~23 쪽

  차가워져 굳어버린 나를 털치고 나와 어디선가 지켜보는 나의 장례식이다. 나는 그와 함께 그 모습을 지켜보며 무엇을 가지려 살았던가, 무엇을 위해 하루하루를 기를 쓰고 생을 살고 있던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엔 우리네와 같이 남겨진 사람들의 처량한 곡哭소리도 없이 무미건조하다. 하긴 까무러치는 곡소리는 떠나보낸 이에 대한 안타까움보다 남겨진 이의 절망감 때문이라는 어느 얘기가 맞다면 그들은 그를 속시끄럽지 않게 하고 온전히 보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그’라면 곡소리를 듣고 싶겠다. 아니면 내가 곡을 할 것 같으니까.

“몇 분이 안 되어 모두 가버렸다. 지친 표정으로 눈물을 흘리며 우리 종種이 가장 좋아하지 않는 활동으로부터 떠나가버렸다. 그리고 그는 뒤에 남았다. 물론 다른 누가 죽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많은 사람들이 비통해했지만, 어떤 사람들은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거나 자기도 모르게 안도했다. 또는 좋은 이유든 나쁜 이유든 진정으로 기뻐하기도 했다.” 본문 23 쪽

  그가 일생에 저지른 가장 큰 실수라면 사려깊고 관대한 두 번째 부인 피비와 살면서 결국은 마지막 아내가 되어버린 훌륭한 껍데기일 뿐, 뇌가 없는 것 같은 여인 메레테와 불륜이다. 그가 메레테와 결혼하게 된 건 이혼 직후의 상황에서 자신의 범죄를 덮어버리는 가장 간단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중엔 병이 무서워 병원조차 오지 않으려고 하는 메레테 덕에 혼자서 마지막까지 병실을 지키는 뜻하지 않은 천벌을 받는다. 한때는 ‘완전한 인간’이었던 그. 비행과 실수로 결국 세 번의 이혼을 겪은 그는 이제 혼자다. 목적없는 낮과 불확실한 밤과 신체적 쇠약을 무력하게 견디는 일이 일상이 되어버린 그는 죽어가는 병든 노인이다. 과연 그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일까. 

  이 소설은 절대 상상으로는 그려낼 수 없는 소설이다. 장소의 묘사를 위해 직접 현장을 찾아 머물면서 주변의 상황을 묘사했던 <하얀전쟁>의 안정효처럼 직간접적으로 자신이 당한 일(거의 직접적이겠지만)을 기록하고 있어서다. 차가운 철제침대에 이끌려 수술실로 들어설 때 한 숨마다 양파 한꺼풀 두께로 심장은 줄어드는 듯한 상황을 그린 것이나, 벌거벗긴 채 수술을 기다리며 수술도구에 그려진 제약회사의 이름을 찾아서 읽어보는 심정이나, 병마다 다른 고통에 대한 세세한 통증은 괄약근마저 움찔거리게 만든다. 하루하루 통증과 싸우며 그가 되뇌인 것은 바로 떠남이었다. 차라리 내가 대신 끊어주고 싶었다.

“떠남. 그가 고통에 질려 숨을 헐떡이며 깨어나게 했던 바로 그 말, 주검의 포옹에서 살아 돌아오도록 구해준 말.” 본문, 171 쪽

  아이러니는 ‘그’의 고통과 죽음을 지켜보면 볼수록 나는 ‘삶의 의욕’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구차하지만 폐세포 몇 개씩 가로막을 담배를 끊을 마음도 생기고, 신새벽 공기마시며 달리고자하는 욕구도 생겼다. 그 무엇보다 하루를, 오늘 하루를 온전히 느끼고 살고 싶어졌다. 죽기 직전 그 역시 먼저 간 그의 부모로부터 같은 이야기를 듣는다.

“그의 어머니는 여든에 죽었고, 아버지는 아흔에 죽었다. 그는 소리내어 말했다.”저는 일흔하나에요. 당신네 아들이 일흔하나라고요.“ ”좋구나. 네가 살아있구나.“ 그의 어머니가 대답했다. 그의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다. ”되돌아보고 네가 속죄할 수 있는 것은 속죄하고, 남은 인생을 최대한 활용해봐라.“ 본문 177 쪽

  태양을 마주선 내 정면의 모습이 삶이라면, 그 뒤에 내 키보다 길게 늘어선 모습은 그림자다. 삶의 영원한 동무는 죽음이다. 오늘은 슬프지만 내일이라는 희망이 있어 하루를 견디는 것처럼 삶을 치열하게 살아야 하는 이유 역시 죽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 로마신화의 선남선녀의 신들이, 그리고 영화 <벰파이어와의 인터뷰>의 브래드 피트가 분한 벰파이어가 나약한 인간을 부러워한 것도 바로 ‘인간의 유한한 삶’이다. 제 명을 다해 영원히 쉴 수 있음은 더할 나위 없는 축복일지도 모른다.

  생각해 보면 죽음에 이르는 고통은 내가 태어날 때 내 엄마가 겪은 고통의 유전이다. 정작 죽지 못할 만큼 고통스러운 것은 내 생에 지은 죄들에 대한 고통이 아닐까. 마지막까지 ‘그’에게서 시선을 놓치 못했던 건 어제를 보내며 또 하나의 죄를 짓고 사는 나이기 때문이다. 시간을 잊게 만든 짧고 굵은 소설은 그를 미래의 나로 착각하게 만들었다. 대단한 소설, 늙은 나를 만나게 하는 무서운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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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되어버린 남자
알폰스 슈바이거르트 지음, 남문희 옮김, 무슨 그림 / 비채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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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책을 좋아하는 사람'을 위한 음습하고 기기묘묘한 소설!

  벼룩시장의 어느 헌책방에서 한 여성이 이유없이 사망 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애서가 비블리 씨는 그녀가 지목했던 책을 훔쳐 나온다. ‘겉표지는 사라지고 없고 갈색 속표만 있는 클로스 제본술로 제작된 무두질한 가죽 같은 질감으로 된 손에 쥐기 딱 알맞아 보이는 책의 이름은 ’그 책Das Buch'다. 비블리 씨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책을 꺼내어 훑어보기 시작한다. 마지막 페이지에서 그는 시선을 고정하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눈으로 활자들을 빨아들이던 그는 책에 홀리고 만다. 이제 그는 책이 되고, 책은 그가 되기 시작한다.  

  알폰스 슈바이거르트의 소설 <책이 되어버린 남자Das Buch>(비채)는 기괴한 매력을 지닌 소설이다. 책을 사랑하는 애서가인 한 남자가 한 권의 낡은 책에 매료되어 푹 빠지더니 결국은 자신이 책이 되어버린다는 이야기는 어느 날 아침잠에서 깨어난 그레고르가 철갑처럼 단단한 등껍질에, 불룩하게 솟은 갈색의 배, 그리고 몸뚱이에 비해 형편없이 가느다란 수많은 다리의 갑충으로 변해버린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을 생각나게 한다. <변신>이 인간 실존의 허무와 절대 고독을 주제로 하고 있다면, <책이 되어버린 남자>는 책과 책에 관련된 사람들의 애정과 애증을 잘 표현한 소설이다. 



 

  사람이 책이 된다는 설정은 흡사 판타지같지만, 책을 읽어보면 몇 번의 ‘작은 소름‘을 경험할 것이다. 그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판타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책을 구입하면서 ’책을 만난다‘고 말하고, 책을 읽으면서 책과 대화한다고, 이야기를 듣는다고 표현한다. 그리고 미리 사 놓고 미처 읽지 않은 책을 놓고 자신을 읽어달라고 눈치를 준다고 느끼고 있다. 한낱 책이거늘 구겨질까, 찢어질까, 젖을까, 얼룩질까 고이 모셔 놓는다. 나는 지금도 책을 사람 보듯 의인화하고 있다. 내가 비블리 씨가 된 듯 해서 오싹해진다. 그가 읽고 있던 책도 바로 ’그 책Das Buch'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소름은 예전에도 경험한 적이 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여행의 책>을 읽을 때 였다. 일반적으로 책이 저자가 독자에게 하고 싶은 말을 받아서 보여주는 가교 역할을 했었다면, <여행의 책>은 책 속에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들어 있었다. 저자는 스스로를 책이라고 말하며 독자인 내게 주문과 비슷한 방식으로 자신과 함께 여행을 떠나자고 말을 걸었다. 독자는 눈동자로 활자를 쫓으며 읽기만 하면 되는 여행인 셈이다. 글을 읽다 보면 그가 이끄는 대로 스스로 움직이는 경험이 시작된다. 유체이탈과 비슷한 상황으로 만들어져 내가 있는 장소에서 부웅 떠서는 천정과 지붕을 뚫고 책과 함께 하늘을 나는 경험을 한다. 책과 함께 불과 물 그리고 흙의 나라를 여행하고 무사히 제자리도 돌아와 안녕을 고하는 <여행의 책>을 읽으면서 책이 독자의 시선을 사로잡고, 독자가 책에 푸욱 빠져버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했다. <책이 되어버린 남자>는 독자인 내가 주인공인 ‘그 책’이 되어 나를 선택하는 사람들, 즉 애서가, 장서가, 책벌레, 책 수집광, 고서 수집가, 독서광, 작가, 편집자, 출판인, 제본업자, 비평가, 독자, 책에 미친 사람들을 경험하게 된다. 한 권의 손을 거쳐간 사람들의 행동과 책에 쓰인 내용을 접하면서 내뱉는 이들의 목소리에서 이들에게 갖는 책의 애정과 애증을 느낄 수 있었다. 

 주인공 비블리 씨가 책으로 변하는 순간은 영화 <플라이>를 보는 듯 하고, 전체적으로 음습하고 어두운 분위기와 장면마다 책과 사람 이렇게 단 둘이 조우하며 전개되는 이야기는 팀 버튼 감독의 <크리스마스의 악몽>을 연상케 했다. 고서적을 느끼게 하는 책 편집효과와 분위기를 잘 묘사한 ‘무슨‘의 그림들은 ’그 책‘을 더욱 실감나게 만들어준다. “서점에서 두 악마가 밀회를 갖는다. 하나는 쓰기의 악마요, 하나는 읽기의 악마다.” (요제프 니들러), “책, 곧 죽은 사람이 산사람이 가진 특권보다 우월한 권리를 행사한다.”(루돌프 폰 예링), "운명이란 바로 그대들이 지닌 책, 책은 저마다 운명을 품고 있으니"(오토 슈토에즐) 등 책의 중간마다 등장하는 독서에 대한 아포리즘을 만나는 것도 특별한 재미가 될 것이다. 

  “만일 그 책을 손에 넣고 거의 끝까지 읽던 중인데, 즉 그 안에 담긴 내용을 건성을 대충 알아 가던 참이었는데, 갑자기 예고도 없이 집중이 되지를 않는다. 그래도 남은 문장들이 무슨 중요한 의미를 품은 것만 같아서 억지로 읽어 보지만 하나도 이해가 되지 않고, 활자들이 흐릿해지며 크기가 작아지다가 결국 완전히 사라져 버린다. 그런데도 왠지 책에서는 눈을 뗄 수가 없다.” 이때가 바로 비블리 씨가 책이 되는 순간이다. 독서를 하면서 책에 자주 몰입되거나, 허리가 아프거나, 키가 줄어든 느낌이 있다면 비블리 씨를 떠올릴지 모른다. 그리고 책에 빠진 사람의 별명을 ‘책벌레’ 대신 ‘비블리 씨’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른다. 특별한 느낌의 기기묘묘한 소설, 책을 읽는 사람만을 위한 멋진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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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Q84 1 - 4月-6月 1Q84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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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가 그린, 아름답지만 애절하도록 슬픈 러브스토리!

  2009년 하반기에 들어 세상은 지금 무라카미 하루키에 열광하고 있다. 천 삼백 페이지가 넘는 대단한 분량의 소설<1Q84>이 그토록 사람들의 마음을 뒤흔들고 있는 이유는 뭘까? 우선 <해변의 카프카>이후 나타난 무라카미 하루키의 컴백만으로도 대답은 충분해질 것 같다. 하지만 제 아무리 하루키라 할지라도 이야기가 형편없다면 일본에서만 7초에 한 권꼴로 팔리고, 국내에도 출간된 이후 베스트셀러 1위의 자리를 내놓은 적이 없다는 통계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에게, 1Q84에게 독자들이 열광하는 이유는 누구든 그 책을 펴기만 한다면 독자인 자신이 주인공이 되는 이야기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우리 가슴 속에 담아두고 있는 ‘이루지 못한 사랑을 다룬 슬픈 러브 스토리’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일생동안 몇 번의 사랑(단 한 번의 사랑도 있겠지만)을 한다. 그리고 사랑의 결실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가정을 꾸며서 살아가는 것으로 여기고 있다. 하지만 사랑한 이와 함께 가정을 꾸몄다고 할지라도 과연 옆에 있는 배우자는 진짜 내 반쪽일까 하고 의문해가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네가 옆에 있어도 누군가가 그립다’면 그것이 진짜 내 사랑일까? 남녀가 한 몸이었던 인간이 신의 시샘을 받아 절반으로 갈라진 후 평생 그 짝을 찾아 헤매다가 죽는다는 어느 신화의 이야기처럼 진정한 사랑, 진짜 내 반쪽은 누구일까 누구든 한 번쯤 생각해 봤을 법한 인류의 고민을 하루키는 이 책에 풀어놓았다. 



 

    세인들은 이 책에 대해 많은 분석과 평가를 내리고 있다. 1,2권이 각각 24장으로 나눠진 구성은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곡집’ 구성을 염두에 둔 것 같다고 하고, 그의 다른 소설들과 마찬가지로 야나체크의 ‘신포니에타’ 마이클 잭슨의 ‘빌리진’ 등 다양한 음악이 등장하고, 찰스 디킨스, 도스토옙스키, 제임스 프레이저, 피츠 제럴드 등 다양한 문학들, 그리고 마셜 아츠와 재즈 그리고 킬러등의 등장 등 스토리 속에 스토리를 숨겨 넣는 베스트셀러적 코드들이 내재돼 있다고 말한다. 

 한편 혹자는 소설의 제목인 ‘1Q84’의 ‘Q’는 질문(Question)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조지오웰의 소설 '1984년'을 염두에 둔 이 제목이 주는 깊은 뜻이 무엇일까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전세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오옴진리교의 사린독가스 사건을 소재로 현대사회의 집단적 광기 또는 병리, 폐쇄되고 고립된 현대인에 대한 관심을 표현했다고도 말했다.

 하지만 난 모든 군더더기를 제외하고 아오마메와 덴고, 이렇게 두 주인공에 주목한다. 하루키는 출간에 즈음해서 어느 날 아오마메와 덴고라는 남녀주인공의 이름을 짓는 순간 둘을 주인공으로 해서 이야기를 써야겠다고 생각했다고 어느 인터뷰에서 말한 것을 읽었기 때문이다. 그 둘에 주목하면 천 삼백 페이지의 이야기는 지극히 짧지만 아름다운 애정소설로 변한다. 아름답지만 애절토록 슬픈 러브스토리다.

  이치카와 초등학교의 동창인 두사람은 학교에서 많은 이야기를 나눈 적도, 친하지도 않았다. 단지 한 번 손을 잡았을 뿐이다. 그 때의 경험은 서소를 숨김없이 원했고, 서로를 격려해 준 기억으로 남았다. 그 한 번의 경험이 그들을 운명적인 사랑으로 만든 것이다. 사랑은 나를 알아주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고 행하고 느끼는 모두를 알아주는 유일한 상대를 만드는 것이다. 사랑이 결핍된 성장과정을 겪은 그들은 자라서도 결코 행복하지 않았다. 그래서 둘의 경험은 더욱 소중했는지 모른다. 아오마메는 사회에서 있어서는 안될 암적인 존재들을 청부살해하는 킬러가 되어 살아가고, 덴고는 일주일에 한 번 있는 불륜의 정사를 위안삼는 소설 지망생으로 살아갔다. 20년 동안 서로 한 번도 마주하지 못한 채.  

 이 둘을 다시 만나게 한 끈은 아오마메에게 있었다. 아오마메는 20 년 동안 덴고를 사랑했다. 덴고는 그녀에게 있어 언젠가는 꼭 봐야 할 사람, 보고 싶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아오마메는 운명이라면 언젠가는 만날 수 있을거라고 믿어 굳이 찾지 않았다. 한편 덴고는 그녀의 존재를 잊고 살았다. 작은 편린 같은 기억만 있을 뿐 그녀에 대한 감정대신 ‘막연히 배고픈 사랑’이 자리하고 잇었다. 그들이 만나게 되는 세상은 현실이 아닌 달이 두 개 있는 세상, 1Q84 였다.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루키에 의해 이야기가 진행된다. 그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물론 그렇겠지만) 홀수 장은 아오마메의 이야기로, 짝수 장은 덴고의 이야기로 채웠다. 하루키의 문장은 늘 그렇듯 알아듣기 쉽고 간결하며 대부분의 경우 편안하게 다가왔지만, 눈으로 본 일을 일이 흘러가는 대로 이야기하고 있을 뿐이다. 중간에 멈춰 서서 “지금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이건 무슨 뜻일까”하고 고찰하는 일이 없다. 그는 천천히 하지만 적당한 보폭으로 계속 이야기를 진행시킨다. 나는 그 시선을 빌려, 그의 시선과 걸음에 맞춰 따라가게 된다. 매우 자연스럽게, 그리고 문득 깨닫고 보니 난 딴 세계에 들어와 있었다. 이곳이 아닌 세계. 1Q84의 세계였다.

 아오마메는 어느 날 달이 두 개인 세상에 들어선다. 커다랗고 노란 달, 그 위에 일그러진 초록의 작은 달. 또 다른 세계를 상징하는 두 개의 달은 하나만 있는 현실과는 다른 세계, 즉 그 세계에서는 누군가를 만나게 되는 상황에 대한 복선이다. 

  아오마메는 어느 종교단체의 범상치 않은 리더를 암살하는 순간 그로부터 이 모든 사실을 듣게 된다. 두 주인공에게 리더는 ‘메신저이자 가교’였던 셈이다. 현실이 아닌 달이 두 개인 세상, 아오마메가 덴고를 언젠가는 찾고자 하는 마음은 사랑하기 때문이고, 덴고 역시 그녀인지를 알지 못하지만, 아직까지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아오마메는 알게 된다. 슬픈 것은 둘의 사랑은 결코 이뤄질 수 없는 운명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1Q84의 세상에서 둘이 서로 사랑하고 있음을 확인한 데에서 만족해야 했다.

  우리가 누군가를 만나게 되면 항상 묻는 질문은 ‘당신이 정말 내 반쪽인가?’일 것이다. ‘당신이 내가 찾는 그 사람인가? 네가 정말 나의 사랑인가?’ 수백 수천 번 사랑을 고백하는 사람이 있고, 한 침대에서 같이 잠을 자고 아침을 맞이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우리는 그 질문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우리의 생에서 ‘운명의 내 사랑’을 결국 찾고 있는가?

 만약 우리가 ‘운명의 내 사랑’을 찾지 못한다면 우리는 전혀 관련을 갖지 못한 채, 서로를 생각하면서 각자 고독하게 늙어갈 것이다. 어쩌면 그런 사랑이 있는지 조차도 모르고 죽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비록 이루어질 수 없다고 하더라도 나의 운명적인 사랑이 누구인지를 확인한 아오마메는 부러운 사람이다. 그녀는 덴고를 만날 수 없다 하더라도, 그가 자신이 있는 1Q84의 세상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살아갈 의미를 찾는다. 단 1%라도 만날 가능성이 있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한편 덴고는 아버지가 있는 병원으로 가는 길에 읽은 단편 <고양이 마을>에서 ‘상실되어야 할 장소’ 즉, ‘마음의 짐을 덜어야 할 곳‘을 찾는다. 바로 코마 상태에 있는 아버지였다. 그는 듣지 못하는(들을 수 있을지언정 대답하지 못하는) 아버지에게 자신이 상실해야 할 무언가를 털어 놓는다. 그것 역시 사랑이었다.

"나는 누군가를 싫어하고 미워하고 원망하면서 살아가는 데 지쳤어요. 아무도 사랑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데 지쳤습니다. 내게는 친구가 없어요. 단 한 사람도. 그리고 무엇보다 나 자신조차 사랑하지 못해요. 왜 나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가, 그건 타인을 사랑하지 못하기 때문이에요. 사람은 누군가를 사랑하고 그리고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고, 그런 행위를 통해 나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을 아는 거에요. 내가 하는 말 알아들어요? 누군가를 사랑하지도 못하면서 자신을 올바르게 사랑할 수는 없어요. 아니 그가 아버지 탓이라는 게 아니에요. 생각해 보면 아버지도 역시 그런 피해자 중 한 사람이었을지도 모르죠. 아버지도 아마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잘 몰랐을 거에요. 안 그래요?“ 

  아픈 기억을 상실함으로써 덴고는 가슴속의 긴밀한 구름은 사라졌지만, 그 대신 심장 바로 가까이에 있는 가상의 부분이 기분 좋을 정도의 희미한 통증은 다시 채워야 할 무엇을 알게 된다. 그는 지금껏 누군가를 진지하게 사랑하지 못했다는 것, 이 사람이라면 나를 던져도 좋다고 느낀 적이 없었던 것이다. 단 한 번도. 그리고 덴고는 순간 그 대상이 아오마메 였음을 깨닫고 그녀를 찾아나선다. 

  아오마메에게 1Q84의 세상은 베이면 피가 나는 또 다른 현실, 그리고 사랑하는 덴고가 있는 현실이다. 그녀는 그곳에서 달이 두 개인 사실을 아는 또 다른 한 사람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덴고(아오마메를 찾고 있던)였다. 열 살 때의 모습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덴고를 보고 그녀는 자연스러운 따스함과 깊은 안도감을 느꼈다. 이 세상에 더 이상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 자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사람을 만났다는 사실이었다. 오랫동안 망설인 끝에 그를 찾았지만 그는 사라지고 없었다. 아오마메는 길 하나 건너에 있는 그의 모습을 보고 그의 팔에 안긴다는 가능성에 격한 기쁨과 기대를 온몸으로 느낀 것으로 그녀는 자신의 사랑을 확인하며 이렇게 다짐했다. 

“1Q84년. 그것이 이 세계에 주어진 명칭이다. 나는 반년쯤 전에 이 세계에 들어왔고, 그리고 지금 나가려 하고 있다. 의도하지 않은 채 이곳에 들어왔고 이제 내 의지에 따라 이곳에서 나가려 하고 있다. 내가 떠난 뒤에도 덴고는 이곳에 머문다. 덴고에게 그것이 어떤 세계가 될지, 나는 물론 알지 못한다. 곁에서 지켜볼 수도 없다. 하지만 그래도 괜찮다. 나는 그를 위해 죽어가려 한다. 나 자신을 위해 살지는 못했다. 그런 가능성은 처음부터 내게 없었다. 하지만 그 대신, 그 사람을 위해 죽을 수 있다. 그러면 돼. 나는 미소 지으며 죽을 수 있어. 거짓말이 아니야.”

  덴고가 아오마메의 존재를 확인하는 순간은 ‘공기 번데기’안에 있는 어린 시절의 그녀를 보면서다. 덴고는 사라져가는 그녀에게 ‘나는 반드시 너를 찾아낼 거야’라고 말한다. 그가 사랑을 확인한 순간부터 이 세상에 달이 몇 개인 것은 상관없다. 자신의 생에서 꼭 이뤄야 할 일을 찾았기 때문이다. “아오마메를 찾자. 덴고는 새삼 마음먹었다. 무슨 일이 있건, 그곳이 어떤 세계이건, 그리고 그녀가 누구이건.” 

  우리가 유한한 행복을 느끼고, 혼자일 때 아련한 아픔을 겪는 것은 ‘진정한 사랑’을 찾지 못한 채 살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진정한 사랑을 찾지 못한 채 만약 혼자된 세상을 살고 있다면 그곳은 아오마메가 숨어 지냈던 안전가옥, 모델룸일 것이다. 모델룸에 들어서듯 태어나서 자리잡고 앉아 차를 마시고 창가의 풍경을 주시하다가 시간이 되면 인사를 하고 나가듯 죽는 세상, 모델룸의 가구와 장식은 종이로 만든 쓸모없는 소품인 것이다. 외로운 우리는 지금 정작 무엇을 위해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을까 고민하게 했다. 이젠 덴고의 차례다. 공기 번데기 속으로 숨어버린 아오마메를 나설 덴고를 지켜봐야 할 차례다. 그가 내가 되고, 내가 그가 되어 찾고 싶어졌다. 10月의 이야기는 나의 이야기가 될 것이기에 계속되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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