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쇼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26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지음, 서은혜 옮김 / 민음사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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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쿠타가와 류노스케(芥川龍之介)’의 여덟 편의 단편으로 편집된 선집이다. ‘구로사와 아키라(黑澤明)’ 감독의 1951년 영화 라쇼몬으로 원작이 서구세계에 알려진 영향과 함께, 그의 이름으로 시상되는 문학상처럼 일본 자국 내에서 소설가로서 명망이야 그들의 이해에 터 잡은 것이고, 작품의 해석에 따르는 평가는 결코 이들과 같은 것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특히 구로사와의 영화는 소설의 제목과 일치하지 않는다. 단지 아쿠타가와의 단편집 라쇼몬(羅生門)에 수록된 단편 덤불 속()의 영상화이지 단편 라쇼몬의 내용이 아니다. 물론 이 두 단편소설의 주제 의식으로 읽을 수 있는 공통의 요소가 있긴 하지만 다른 작품이다. 나는 이 작품들을 비롯해 아쿠타카와의 소설에서 오늘의 일본인들을 지배하는 정신을 읽는다. 이들이 이러한 직관을 얼마나 오랜 동안 자신들의 몸에 체화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들의 윤리 의식이란 것이 어떤 것인지를 파악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어쩌면 내 독해가 억견(臆見)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덤불 속은 살인 사건의 당사자들을 포함 일곱 명의 서술자가 하나의 사건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이들의 진술은 살인 방식이나 사건의 정황을 모두 다르게 진술한다. 이들 서로 다른 이야기로 인해 어느 진술도 사실로서 신뢰할 수 없게 되고 또한 그네들의 상황 이해방식 조차 믿을 수 없게 된다. 결국 이들 비협조적 서술자들로 인해 사건은 미궁의 것, 불확실한 상태로 머물게 되고 만다.

 

[영화 <라쇼몬>의 한 장면]


그런데 이러한 미해결의 이야기에 대한 의문에 대해 작가는 모두 진실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고 한다. 나는 이러한 식의 답변이 거짓이라 생각된다. 하나의 사실을 다르게 말함으로써 진실을 흐리게 만드는 것, 즉 진실을 진공 상태에 빠뜨려 오리무중에 휩싸이게 하는 것, 그래서 자의적 판단을 내리게 하는 태도가 바로 일본인의 윤리의식 바로 그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이들의 역사 인식이나 사실을 대하는 태도에서 너무도 확연히 드러나는 데, 위안부, 징용공 문제 등 역사적 사실의 부인, 독도 영유권에 대한 사실 흐리기와 같이 이를 동일한 인식 선상에서 읽을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이처럼 인식의 윤리적 토대에 의해 이 작품을 바라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론 서술자들의 각 이야기 자체로서 당대에 대한 문화사회적, 정치적 비판의 변으로도 읽을 수 있다. 이를테면 살인 용의자인 도적 다조마루의 자백에 나는 죽일 때 허리에 찬 칼을 쓰지만 당신들은 칼은 쓰지 않고 그저 권력으로 죽이고 돈으로 죽이고 여차하면 위해주는 척하는 말만으로도 죽이죠.” 라며 지배 권력의 보이지 않는 위선, 잔인성을 비난하는가하면, 살아남은 여자가 하는 참회의 기록에는 저는 사내에게 걷어차인 것이 아니라 그 눈빛에 얻어맞은 것처럼...기절하고 말았습니다.”와 같이 여성 정절에 대한 사회적 시선의 현주소, 남성적 권위의 시선이 지배하는 세계를 우회적으로 비평하는 것을 들 수 있다.

 

미시적, 개별적 태도에서는 이렇듯 도덕적 인식이 깨어있음에도 전체적 진실규명에 있어서는 흐리멍덩해지는 이 집단적 윤리의식의 모호성은 아무튼 일본적이다라고 말 할 수 있을 것 같다, 공동체의 의식에 이르면 선악의 경계지대를 거닐며 힘의 방향을 가늠하는 기회주의적 성향, 이것이 일본의 정신으로 읽힌다.

 

이것은 표제작인 라쇼몬에서 더욱 극명하게 인식되는데, 거듭되는 재난으로 일자리를 잃은 남자가 어떻게도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자신의 형편을 인식하며 굶거나 질병으로 죽은 사체들이 버려진 라쇼몬 누각 안으로 하루 밤을 쉬기 위해 찾아들어가며 벌어지는 하나의 상황 이야기다. 이러한 배경으로부터 당대 인간들의 윤리적 수준이 드러나고, 그것은 사회공동체에서 이들 일본인들이 보이는 무심성이다. 시체를 그저 남들이 버리는 곳에 갖다 버리는 행위, 그리고는 그곳은 마치 추악한 장소라도 되는 듯 외면하는 것, 바로 자신들의 행위임을 부정하는 이 모순을 인식치 못하는 것에서 일본인들의 윤리성을 읽는다.

 

남자는 수많은 시체들이 쌓여있는 누각을 헤매며 시체의 머리카락을 뽑아 담는 노파를 발견하고는 그 행위에 내재된 악에 살의를 느끼고 달려들어 칼을 겨눈다. 이때 노파의 자기 행위 정당화 발언이 시선을 끄는데, 가발을 만들어 팔기위해 시체의 머리카락을 뽑는 것은 안 그랬음 굶어 죽을 테니 어쩔 수 없어 한 짓이니께 ...내가 하는 일도 나쁘다고는 못하겠구먼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남자의 윤리적 태도를 결정짓게 하고, 노파의 옷을 벗기곤 시체 더미위로 노파를 발로 차버리는 행위로 이어진다.

 

시커먼 동굴처럼 어두운 밤이 펼쳐져 있을 뿐이라는 마지막 문장과 함께 이 이야기는 악의 정처없는 세계로 마무리된다. 악의 윤리적 정당화를 비판하는, 아니 자성하는 목소리일까?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사적 이익 앞에서 인간상호 간의 윤리를 지배하는 것은 선악의 판별이란 의미없음이라고 선언하는, 즉 공동의 지대에 들어서면 자취를 감추는 전형적 일본인의 윤리 의식의 무의식적 발로가 아닐까?


[민음북클럽 2023스페셜 에디션 중에서]


이러한 윤리적 연상선에서 마죽이란 단편도 읽을 수 있다.  오위라는 하급 관리의 궁핍과 주변으로부터의 멸시를 쫓으며, 그의 욕망이 실현되는 여정을 그리고 있는 소설이다. 낡고 헤져 남루한 차림, 딸기코와 볼품없이 가늘고 작은 몸뚱아리로 아이들에게 조차 놀림감이 되는 사람이다. 마죽을 실컷 먹어보는 것이 유일한 소망인 남자에게 동료 사무라이의 초대로 그가 이끄는 장소로 따라가 엄청난 마죽의 대접을 받지만 그는 이내 구토가 올라올 지경으로 그만 물리고 만다.

 

사실 이 소설은 소설 속에 개입된 작가의 목소리, 다시 말해 주인공의 생각에 작가의 의도를 빌어 발설되는 가엽고도 고독한 자신, 하지만 동시에 마죽을 실컷 먹고 싶다는 욕망을 오로지 혼자서 소중히 간직하고 있기도 했던, 행복한 자신을 회상하며 안도하는 모습으로 끝난다. 이는 주변 세계의 조건을 그대로 자신의 것으로 삼는 체념의 평온성을 주입하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안분지족(安分知足)을 삶의 정상성으로 삼는, 세계의 조건에 이의를 달지않는, 어떤 의미에서 자기 외의 세계에 눈을 감는 일본인의 그것이라 해도 지나친 곡해는 아닐 것이다.

 

흙 한덩이라는 소설은 아들이 죽자 며느리와 함께 사는 스미라는 여인의 삶의 시선이라 할 수 있는데, 억척스레 땅을 일구고 남자들이 하는 힘겨운 노동조차 감내하며 살림을 일으키는 며느리로 인해 집안일을 떠맡게 된 시어머니의 푸념의 변이기도 하다. 며느리로 인해 살림의 형편이 나아지지만 손주의 돌봄과 소소한 집안 살림에 묶여 여전히 노동에서 해방되지 못한 자신의 처지에 대한 억제된 불만이다.

 

며느리인 다미의 느닷없는 죽음의 장면은 묘사됨 없이 단지 죽음의 사실만 기술되고, 그 죽음이 순간적으로 축적된 돈의 여유로운 소비와 자기 행동의 자유에 대한 꿈으로 이어지지만 갑자기 자신을 포함한 죽은 며느리와 아들 모두가 한심한 삶을 살아왔음에 대한 회한에 젖어들며 이야기는 맺는다. 오늘에는 좀 오래된 낡은 사고의 진부함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굳이 소설의 문장들에 물음하며 해석의 시선을 들이대면 왜 며느리는 개가하지 않고 힘겨운 일에 그렇게 전념했을까? 왜 스미는 갑작스레 모두 한심하게 여겨졌을까?를 찾아내 주제를 규명하는 작업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그리 풍부한 읽기로 안내하지는 못할 것 같다.

 

마지막에 수록된 두자춘(杜子春)으로 맺어야 할 것 같다. 해는 지는데 배는 고프고, 이젠 어딜 가도 채워 줄 곳도 없을 텐데라며 부질없는 생각을 하면 어디선가 나타난 애꾸눈 노인이 그것 참 안됐구먼하며 황금이 묻힌 곳을 알려주어 엄청난 부귀를 안겨주지만, 매번 3년이면 탕진하고 이와 같은 푸념을 반복하고 다시 노인이 황금 장소를 알려준다. 그런데 이러한 반복된 생의 한 시점에서 두자춘은 노인에게 돈은 더 이상 필요 없다고 말한다. 그리곤 예견된 답변을 거스르는 희한한 말이 나온다. 자신의 사치와 낭비의 반성이 아니라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기에 부귀가 소용없다는 것이다.

 

자기 가난의 상황이 자기 책임이 아니라 부귀에 몰려들어 자신의 사치에 영합했던 인간들에게 책임을 돌리는 것이고, 그래서 인간에 대한 회의를 떠나 노인에게 선술 수업을 받는 제자가 되고 싶다는 것이다. 노인은 이 청을 들어주어 아미산 절벽 바위 위에 내려놓곤 어느 누구에게도 어떤 말도 하지 말아야 선인의 경지로 들어갈 수 있음을 듣는다. 무수한 위협과 사건에 직면하지만 스승의 말에 따라 입을 다물고 그 어떤 말도 발설하지 않는다. 이윽고 이를 괘씸히 여긴 염라대왕은 그의 부모를 면전에 데리고 와 채찍질로 어머니의 살을 찢고 죽음에 내몰지만 그는 입을 다물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어머니는 우리는 어떻게 되든 너만 행복할 수 있다면...잠자코 있으렴하고 말한다. 아들을 원망할 낌새조차 없이 자식의 마음만을 생각하는 어머니 곁으로 달려가 두자춘은 기어이 어머니하고 부르짖는다. 천륜이라는 유교사관에 의거한 이 효심의 발언을 통해 인간됨을 말하려는 이 동화가 당대 일본인들에게 필요했다는 것에서 그네들 윤리관의 현실을 읽을 수 있다. 이 교훈적인 전설을 버무린 드라마가 인간적 정직함이라는 노인의 말로 마무리하는 데서 더욱 그네들 시대의 윤리적 난맥상이 드러난다. 한편 20세기 초엽의 일본인에게 경제적 의식은 아직 존재하지 않았다고 이해할 수도 있으며, 때문에 개인의 사치와 방탕으로 인한 곤궁함을 주변 인간의 도덕성 탓으로 돌릴 수 있게 된다.

 

무릇 작품을 읽는 시선 혹은 방식이란 다양할 것이다. 아마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소설들에는 무수한 전문가적 해석들이 존재할 것이고, 이러한 비평들에 의해 당대를 대표하는 작가로 추앙되었을 것이다. 그것은 그들의 인식이지 21세기 한국인의 독해가 아니다. 20세기 초, 한국은 일본의 침탈에 신음하던 시기이다. 바로 그 동시대의 일본인 정신 표현이라 할 수 있는 이 소설들에서 일본의 집단적 사고방식이나 윤리의식을 읽는 것은 정당한 독해라고 확신한다. 그렇다고 작품의 문학적 가치를 훼손하거나 폄훼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나는 단지 이 작품들에서 일본이라는 집단정신에는 모호하고 힘의 논리에 의해 기회주의적으로 결정되는 윤리만 있을 뿐, 진실의 도덕적 정신 없음을 발견한다. 또한 일본인 개인들의 정치적 수동적 태도가 얼마나 오랜 동안 그들의 정신에 주입된 지배 엘리트들의 세뇌였는지도 읽게 된다. 내게 이 작품 선집은 하나의 정신사 엿보기였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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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 당나귀 현대지성 클래식 22
루키우스 아풀레이우스 지음, 장 드 보쉐르 그림, 송병선 옮김 / 현대지성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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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이름에 대한 논란이 있는 것 같다. ‘변신(metamorphoses)'으로 불리기도 하고, ’황금 당나귀(The golden ass)'로 불리기도 하여 변신 또는 황금 당나귀라고 둘 모두를 포함하는 이름으로 표기하기도 한다. 이런 논의야 어쨌든 기원 후 2세기(AD 170년 추정)에 써진 이 책은 감미로운 향기와 오줌 냄새가 뒤섞여 있는, 그야말로 관능적 아름다움과 외설의 아슬아슬하게 경계를 오가는 희한한 이야기인 것만은 분명하다.

 

푸블리우스 오비디우스(Publius Ovidius)’가 쓴 동명의 책인 변신 이야기의 운문체와 달리, ‘루키우스 아플레이우스(Lucius Apuleius)'의 이 작품은 구어(口語) 서사체라는 점에서 최초의 소설이라는 명예를 안은 것 같다. 서사를 이끄는 화자(話者)는 작가의 소설적 분신이면서 소설 속의 또 다른 이야기의 전달자이자 이야기 속의 주인공이 되어 작품 전체를 하나의 이야기 속으로 통합하는 역할을 한다. 아마 이러한 독특한 구조가 훗날 액자소설이나 피카레스크 소설로 불리는 것들의 전신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소설 속 화자인 루키우스는 자신이 유명한 역사학자 플루타르코스와 철학자 섹스투스의 피를 이어받은 명문가의 귀족임을 은연히 내비치며 나그네들의 기이한 체험의 이야기로 수다를 시작한다. 남자들을 열렬하게 사랑에 빠지게 만들 수 있는 초자연적 능력을 지닌 마녀의 서늘한 이야기다. 마녀의 추적하는 사냥개를 피하기 위해서, 즉 마녀인 여성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스스로 거세함으로써만 가능하다는 당대 남성들의 표면적 피해의식을 반영하는 것 같다. 이는 역설적으로 남성들의 성적 방탕과 통제되지 않는 폭력의 일상성애 대한 다른 표현이기도 할 것이다.

 


루키우스는 사업상 테살리아의 히파타에 도착하여 이 도시의 가장 중요한 인사인 밀로의 집에 머물게 되고, 대 귀족의 아내로 사는 이모 비라에나를 만나게 된다. 그녀는 루키우스에게 초자연적 현상에 대한 네 욕망을 마음껏 채울 수 있게 되었어.”라며, 관능의 즐거움을 예견케 하지만, 음욕 가득한 밀로의 아내 팜필레를 주의할 것을 경고한다. 그러나 마법이 전() 지역에 뿌리내리고 있다는 테살리아를 속속들이 알고 싶은 충동과 갈망에 휩싸인 루키우스는 오히려 장난기와 호기심으로 득의양양 밀로의 집으로 돌아간다. 그리고는 팜필레의 육감적 하녀 포티스의 머리칼에 대한 찬미의 언어로 장장 1페이지를 빼곡하게 채운다.

 

그리곤  마치 사랑의 사과가 내 위를 오르내리는 것과 같았다.”, 포티스와의 수많은 열정의 밤을 능청스럽게 묘사한다. 미지의 것에 대한 앎의 욕망은 다름 아닌 성적 욕망이라는 정신분석학의 표현처럼 루키우스의 호기심은 밀로의 아내 팜필레의 마법에 대한 관심으로 옮아간다. 그녀가 간통 상대자에게 가기위해 새로 변신하는 마술을 엿보고 포티스의 도움으로 마법의 약을 들이키지만 예상과 달리 당나귀로 변해버리고 만다. 다시 인간 루키우스로 돌아오기 위해서는 장미를 먹어야 하지만 주변에 장미가 없어 마굿간에서 밤을 보내게 되고 이 이야기는 본격적 궤도에 오른다.

 

소설은 당나귀로 변해버린 루키우스의 고난의 여정이고, 그야말로 산전수전 공중전을 치루며 거세와 죽음의 문턱을 오르내리는 생존을 위한 투쟁 속에서 바라보게 되는 당대 인간들의 삶의 현실과 인간 본성으로부터 생명의 신성함, 건강한 삶을 길어 올리는 자기 성찰의 역사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소설을 구성하는 소설 속의 무수한 작은 이야기들의 많은 부분이 강도(도둑)들의 탐욕과 잔혹성이며, 타자의 희생 위에서 행해지는 이기적 욕망과 음욕에 대한 것들이다. 특히 프쉬케와 쿠피도의 사랑, 그리고 카리테와 틀레폴레무스의 사랑에 대한 두 이야기는 질투와 호기심, 육체의 탐닉과 심신(心身)이 결합된 사랑, 속박과 자유 등 다채로운 해석으로 독자를 불러들인다.

 

미의 여신 베누스를 능가하는 천상의 아름다움으로 사람들이 보낸 지나친 경의는 그 영광의 대가로 저주가 되어 돌아온다. 프쉬케와 쿠피도의 사랑 이야기는 눈에 보이지 않는 신, 즉 이 세계의 비의(秘意)를 보려는 인간적 호기심의 욕망이 부르는 파멸과 그를 속죄하는 고난의 과정을 묵묵히 수행하는 프쉬케를 통해 사랑이란 진정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고 하면, 틀레폴레무스의 아내인 카리테를 탐하기 위해 트라실루스가 벌이는 간교한 살해와 카리테의 지고한 사랑과 죽음의 이야기 속에서 태초 이래 인간의 어쩔 수 없는 현실적 욕망의 잔인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이기도 한다.

 

포르투나 여신에게 미움받는 당나귀 중에서-223


이 당나귀 변신담은 자신의 고통과 죽음 앞에서조차 어둡지 않고 흥겹기까지 하다. 화자이자 때론 주인공이기도 한 루키우스는 자신의 전문가적 역량을 슬쩍 언급하는데 법률가이자 수다를 떠는 문필가답게 유머와 재치, 저절로 상상되는 묘사된 행위의 순박성, 그리고 결코 진지한 언어로 분위기를 냉각시키지 않는 재주일 것이다. 쓸모없어진 당나귀를 죽이기로 그의 주인들이 합의하거나 미신적 믿음으로 그를 거세하려는 순간이 임박했을 때, 묶인 줄을 끊고 죽으라 내달리는 당나귀 루키우스의 모습은 짐짓 그의 처지에 공감하며 진지해질 수 가 없게 한다. 입을 틀어 막아도 비어져 나오는 웃음이란...

 

자신의 주인이 지나가던 로마병사를 마구 두들겨 패곤 처벌이 두려워 어느 민가에 그와 함께 숨어드는 사건이 있는데, 수색을 피하기 위해 당나귀 루키우스는 지상에서 보이지 않는 2층 방에 갇힌다. 집주인은 이들을 지켜주기 위해 로마병사들의 수색을 저지하고 그들이 자신의 집에 없다고 주장하는 상황에서 당나귀는 호기심으로 커튼이 드리워진 창으로 잠깐 머리를 내민다. 이때 햇빛에 드리워진 당나귀의 그림자를 발견한 병사로 인해 그들은 붙들려 곤혹을 치르게 된다.

 

여기서 당나귀 그림자만 봐도 당나귀인지 안다.”는 지극히 뻔한 말로부터 이에 담긴 경솔함과 호기심을 숨기지 못하는 인간에 대한 조롱을 싣는다. 당나귀가 된 루키우스가 처하는 일촉즉발의 위기들은 사실 모두가 인간의 속성들에 기인한다. 그 경박함, 억제되지 않는 충동들, 남이 가진 것에 대한 소유 욕망, 그리고 성적 갈망이 초래하는 운명의 신이 내리는 벌칙들이다.

 

이 책 저자의 종교적 시선은 소설 속 루키우스의 언어를 통해 고대 로마의 문화적 분위기를 짐작케 하는데, 자기 몸에 채찍질을 가하고 자해하며 가짜 사제 차림으로 구걸하는 무리의 모습이나, 허황되고 꾸며낸 개념으로 단 하나의 신을 주장하는 무리처럼 기독교도에 대한 조롱과 혐오가 눈에 띈다. 또한 아라비아 모든 향수의 언급이나 그리스로마의 여러 신들 뿐 아니라 당나귀 루키우스가 마침내 최고의 신이라 지칭하는 이집트 이시스 여신의 가호로 인해 인간의 몸으로 복귀하는 장면처럼 당대 로마의 종교와 문화를 지배하는 정신과 물질 문명의 뿌리는 서구중심의 왜곡된 관점과 달리 이집트와 서아시아에 있음을 자연스레 짐작케 하기도 한다.

 

그리고 민주주의에 대한 현대적 해석으로 끌어 쓸 수 있는 대중의 우매성에 대한 지적도 흥미롭다. 이를테면 당나귀 루키우스는 베누스를 비롯해 유노와 미네르바 3인의 여신 중에서 미의 여신을 결정하는 권한이 뻔뻔스런 베누스의 성뇌물에 녹아난 프리키아의 비천한 젊은 목동 파리스에게 주어졌다고 비판한다. 또한 그는 전쟁에 참전을 종용한 팔라메데스에 앙심을 품은 오디세우스가 거짓 증거들로 팔라메데스를 기소하여 판단력이 마비된 인간들이 죽음의 판결을 내리는 것처럼 이러한 어리석은 전통을 이어받은 것은 지울 수 없는 인류의 오점이라 주장하는 장면들이다. 생각하지 않는 대중의 판단이 중요한 사안을 다수결로 결정하는 민주주의의 어려움, 그 곤란함이 여기에 있다. 바보같은 이 난처한 궁색함이란.

 

음란하고 기형적 음욕의 묘사나 쾌락과 방종의 묘사들이 제법 지면을 채우는 작품이다. 또한 유쾌한 해학으로 즐거운 미소를 떠나지 못하게 하는 문장들과 은은하게 발산되는 아름다움의 향기가 승화된 시적 이미지로 가득하기도 하다. 복잡다단한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해 풀가동한 심신을 위로하며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책으로 맞춤이다. 밝은 기분으로 상쾌한 독서를 하려한다면 정말 제격인 듯싶다. 이 고대인이 왠지 보고싶어진다. 그와 나누는 대화는 현학적인 체 하지 않으며 의미를 말하고, 흥미진진하고 떠들썩한 기쁨을 주는 사람일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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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리콘밸리 천재들의 생각 아포리즘 - 0에서 1을 만드는 생각의 탄생
김태현 지음 / 리텍콘텐츠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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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시간은 한정되어 있으니....다른 사람들의 생각과 신조에 갇히지 마세요.”

(Don't trapped by dogma...other people's thinking.) - 스티브 잡스(Steve Jobs)

 

 

누군가의 체험이 간결하고 압축된 형식으로 표현된 글이라는 아포리즘의 정의와 같이 방점은 체험에 찍힌다. 우리는 세상의 모든 양태들을 경험할 도리가 없다. 그래서 이러한 체험에서 우러난, 특히 끊임없는 삶과 일의 도전을 그치지 않으며, 인류의 행위에 무언가 긍정적 영향을 끼치는 사람들의 말은 귀중한 깨달음을 줄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책을 읽게 된 것은 이와같은 의미와 함께 삶의 일상 속으로 거세게 밀고 들어오는 GPT’처럼 이미 인공지능과 디지털의 세계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는 기술의 현재와 미래를 경험하는 이들의 언어, 생각을 이해하고 싶어서이기도 하다. 책은 고인이 된 애플의 창업자 스티브 잡스로부터 트위터의 잭 도시’, 구글의 전 CEO에릭 슈미트’, 여성의 사회진출과 일-가정의 양립의 모델이기도 한 유튜브의 CEO ‘수전 워츠츠키’, 구글의 순다르 피차이’, 링크드인의 리드 호프먼’, 이미지 중심의 소셜 네트워크인 핀터레스트의 벤 실버만에 이르는 25인의 실리콘밸리의 설계자이자 혁신가들의 통찰적 응집의 언어들이 우리들과 교감을 위해 그 웅변을 들려주고 있다.

 

이들에게서 반복되어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장기적인 시야실패의 긍정적 수용의 다양한 버전의 조언들은 일과 삶의 목표를 위한 분명한 좌표가 되어 줄 수도 있다. 또한 예견치 못한 사업적 발상의 접근도 발견할 수 있고, 번쩍 하며 어떤 각성의 불빛이 두뇌를 깨어나게 하는 문장에 무릎을 탁하고 칠 수도 있을 것이다. 링크드인의 CEO 리드 호프먼은 소셜 네트워크는 일곱 가지 죄악중 하나를 활용할 때 가장 잘 운영된다.”, 인간의 탐욕을 이용한 네트워크임을 알려주기도 하고, 트위터의 잭 도시는 행운이란 (When)'를 인지하는 것이라며, “You have to start. Start now, Start here, and start small. Keep it simple.”라고 바로 지금 여기서 단순히 시작하라고 제언하기도 한다.

 

유튜브처럼 연령과 학력, 케케묵은 차별의 구분들 그 어떤 것도 장애물이 아닌 곳이 바로 작금의 ICT 세계이다. 주저하지 말 것을, 열정과 실패를 현명하게 그러안는 용기라면 그리고 그것을 지속하는 장기적 안목의 실행이라면 그 자체가 삶의 풍요가 아니겠는가라는 인식 일 것이다. 의미없어 보이는 하나의 점들이 모여 의미있는 선이 되듯, 중요한 것은 열정의 지속임임을 마크 저커버그는 자신의 체험 언어로 들려준다.

 

우리는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으면서 상상 속의 무수한 변수들을 앞세우고 주저 안곤 한다. 세상에서 실패를 보장하는 유일한 전략은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 것임에도 이를 실행하는 우매함을 반복하는 것은 아닌지 돌아 볼 수 있게 된다. 비록 아무것도 얻지 못하거나 실패에 부딪힐망정 결코 그것은 삶의 손해도 실패도 아닐 것이다. 실패의 크기가 함께 커지지 않으면 가시적 성과를 내지 못할 것이라는 아마존의 CEO 제프 조이스의 말이 바로 그것일 것이다.

 



생의 도전과 용기에 관한 체험적 진리뿐 아니라 ICT 기업의 창업과 기술 선도자로서의 각별한 경험의 글들은 창업과 기업의 운영자들이 경청할 현실적 업계의 분위기와 교감을 제공하기도 한다. 미친 짓을 하고 있지 않으면 잘못된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라는 구글의 창업주 래리 페이지의 불가능에 대한 도전의 경쟁없는 가능함의 발상이나, 만약 무언가 실패하고 있지 않다면, 충분히 혁신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며 실패를 곧 성취의 한 실현체로 인식하는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의 말을 되새겨봄으로써 어쩌면 우리의 태도를 반성하는 기회가 될 지도 모르겠다.


GPT의 설계자이자 Open AI 창업자인 샘 알트만은 “AI가 모든 곳에 스며들 것으로 생각합니다. ...지능의 한계 비용과 에너지의 한계비용이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0에 다가갈 것입니다라고 AI의 세계에 우리 인류가 어느새 들어서 있음을, 그리고 그 실현 비용이 필요치 않을 만큼 낮아질 것을 예견하며, 인공지능의 발전이 예상보다 느리고 점진적으로 일어날 것이라고 알려주기도 한다. 이처럼 미래에 대한 식견들과 이 새로운 기술 혁명의 시대를 선도하는 인물들로부터 일과 성취, 삶의 이해, 직업을 바라보는 신념들과 미래 기술의 현재를 읽을 수도 있다.

 

이 책은 유명인들의 짜투리 글이 산만하게 나열된 그런 흔한 아포리즘 모음집이 아니다. 열정적 체험에서 우러난 응축된 이들 언어들의 울림과 그 지향의 의미들이 삶과 일의 경영, 그리고 ICT비즈니스업계의 고유한 설계와 기획, 그리고 혁신을 향한 도전의 시간으로부터 건져낸 깊은 내면의 언어들로 구성된 하나의 경영전략서이고 인생 지침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브라이언 체스, 에어비앤비 창업자는 하룻밤 사이에 성공을 거두는 데 1,000일이 걸렸습니다.”라고 말한다. 누군가는 남의 성취를 하룻밤이라 말하지만 그는 3년의 시간임을 들려준다. 반복은 결코 기억을 만들지 않으며, 자신의 새로운 경험만이 기억을 만들어내고 삶의 유익성을 창출한다. 어쩌면 이 책을 읽으며 실제로 우리들이 배워야 할 것은 다름 아닌 위험 속을 항해하는 것임을 깨우치는 것일지도 모른다.

 

판을 뒤집어 자신의 가치를 내세우려는 태도는 이 책과 어울리지 않는다. 그들은 단지 기성의 판을 엎는 데 관심을 가진 이들이 아니다. 최선을 다해, 정성을 들여, 불가능성에 실패를 무릅쓴 용기로 묵묵히, 미친 듯 열정을 다하는 것이 무엇임을 보여 줄 뿐이다. 인간의 지식에는 아직도 많은 공백이 있다(There are still many large white spaces on the map of human knowledge.)”, 어쩌면 이 책은 기회와 바로 지금의 실천의 용기를 교감하는 계기가 되어 줄지도 모르겠다. 스타트업(startup)을 일궈내려는 창업가들, 무언가를 시작하기에 주저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용기와 가능성을 발견하는 기회가 되어 줄 것이라 믿는다. 무언가를 믿으면 그것은 사실이 된다!

 

 

"Expectation are a form of first-class truth. 

기대는 가장 중요한 진실의 형태이다."     - 빌 게이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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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주의 문학의 이해
강필운 외 / 명지출판사 / 199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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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년 전에 써진 글들이지만 현재적이다. 15세기를 전후한 바로크 시대로 불리는 스페인의 신비주의 문학을 이해하기 위한 글인데, 이 책 신비주의 문학의 이해를 찾아 읽게 된 이유는 이 세계를 인간의 언어로 묘사하는 데 거듭 실패하는, 그 불가능성에 도전하는 글쓰기의 궁극의 방법론으로써 비의(秘意)에 천착할 수밖에 없었던 작가들과 문학작품의 의지를 엿보기 위함이었다. 사실 여러모로 아쉽지만 신비주의 문학과 관련하여 이렇다 할 대중적 간행물을 찾기가 어려운 가운데 발견한 책이다. 품절, 절판되지 않아 읽어 볼 수 있게 된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사실 신비라는 단어자체가 정의를 거부하듯이, 다분히 형이상학적인 언어로서 설명이 결코 단순한 개념이 아니다. 서구의 신비라는 언어의 기원은 그리스어 ‘mistikos’라는 비밀의식에 결합된, 비밀에 찬을 뜻하는 형용사다. 즉 우리 인간의 눈이 닫혀 보이지 않고 알 수 없는 무엇이다. 이성이나 인간의 언어로 형언하기 어려운 것을 재구성하여 형상화하기 위한 개념이기도 하고, 인간 논리와 기존 사고 체계로 설명하기 힘든 비법, 계시나 현시, 애매모호한 비물질적이고 비논리적인 것과 관련된 무엇이기도 하다.

 

또한 이해 될 수 없기에 말 할 수 없는 무엇이어서 어떤 초월적 체험을 통해서만 접근 할 수 있는 몰아(沒我)와 같은 체험적 경지이기도 하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신비의 형이상학적 개념 그 자체에는 관심이 없다. 인간이 보편적 이성이란 것을 저버리고 특수한 심적 상태에서 인식하는 앎, 즉 신비를 통한 인식은 그 가치가 인정될 수 없다는 버트란드 러셀의 무식하기 그지없는 주장의 대척점인, 이 지극히 우려스러운 관점에 설 수 밖에 없는 지점에 관심이 있다. 신비주의, 혹은 비의에 천착하는 것은 시대가 불안하고 기성의 체제가 불의해짐으로써 세계가 혼란해 질 때면 부상하는 신비, 다시 말해 현재의 억압적 지배체제에 가장 효과적으로 저항할 수 있는 수단으로서의 관심이다. 그것은 하나의 언어로 묘사하기 불가능한 것이며, 지독히 복잡하게 얽혀있고 표면적으로 드러나지 않음을 특성으로 하고 있기에 신비에 의탁할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카프카가 그랬고, 랭보도 그러했으며, 바로크의 스페인 작가 세르반테스도, 뉴 바로크 문학의 기수이자 마술적 사실주의의 대표인 보르헤스도 신비와 비의를 통해 해로운 이데올로기를 떨쳐내고 새 시대를 열고자하는 염원을 표현했다. 이해 될 수 없기에 말해 질 수 없지만 느낄 수 있는 글쓰기, 간음한 여인의 판결을 요구하는 무수한 입들에도 불구하고 침묵의 언어로서 논란의 무의미성을 일깨우는 예수의 언어 아닌 언어의 행위를 이해하려는 것이다. 위에 예시된 작가들의 작품은 씀으로써 그 써진 것보다 더 풍부하고 더 광범위하게 현실을 묘사하고 있음을 깨우치게 한다. 즉 그들의 신비, 비의는 지성이 좌절하는 순간, 즉 설명이나 이치가 닿지 않으며, 인간적 물음이 무너지는 때에 등장하여 진실의 지대를 가리킨다.

 


이 책은 가톨릭의 개혁에 반대하던 스페인의 종교적 분위기 탓에 유일신적 종교적 신비주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 형이상학적 신비 관념에 머물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물론 15세기 서반어 문학이란 한정된 공간을 다루고 있으니 불가피한 서술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비주의 문학화와 소설화를 위해 천재적 예술정신을 투영한 미구엘 데 세르반떼스(Miguel de Cervantes)’돈 끼호떼의 미학적 예술창작의 소재로서 신비의 사용이나, 변하지 않고 의심할 바 없는 선험적 기표(God, 이데아, 세계정신, 자아, 질료 등등)의 추구와 현존, 실재, 진리와 같은 궁극에 대한 로고스중심주의 비판에서 시작된 호르헤 보르헤스(Jorge Borges)’가 실현하는 이 세계의 새로운 정렬을 위한 상상, 은유, 우화를 통한 유연한 사고방식의 투영으로서 신비의 사용은 문학을 이해하고, 그것이 말하고자하는 비의를 느끼고 깨우치는 데 긴요한 단초들을 알려주고 있다.

 

낯설고 터무니없어 보이는 돈 끼호떼라는 인물을 설정함으로써 세르반떼스는 16세기 제국의 화려한 외양을 자랑하는 스페인의 내면적 빈궁함과 불만족스러운 삶의 반영이라는 한 시대를 대표하는 풍조로서의 은유된 인물이다. 결국 이 연속된 은유의 서사를 구성하는 기사도의 세계, 모험의 여정, 특히 몬떼시노 동굴 모험은 현실 세계의 불가형언성(不可形言性)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문학적 수단으로서 신비를 사용한 가히 천재적인 미학의 작품임을 알려준다.

 

돈 끼호떼의 이 동굴 체험은 카프카의 단편 의 주인공을 연상케 한다. 두 작품에 사용되는 어휘들이 중세 신비가들이 신비적 비전을 체험할 때 사용하던 언어들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동굴, , 어둠, 짐승, 깨어남, 왕궁 혹은 성, 유리, 수정, 심장, 감은 눈, 만지다, 배고픔 , , 또는 이 세계에 대한 참된 이해를 향한 순례의 여정이자 이를 방해하는 장애물들을 상징, 은유하는 글쓰기가 많은 부분 유사함을 발견 할 수 있다. 우리들은 이러한 비의적 글에서 세계의 비논리적이고 함축적인 그 어떤 특수성을 느끼게 된다.

 

보르헤스의 소설들 알레프, 픽션들에 수록된 바벨의 도서관, 바빌로니아의 복권등의 난해성이란 은유의 연속성이 발하는 신비감 때문이기도 하지만, 현실과 환상으로 나누어진 이분법 파괴논리 자체가 주는 우리들의 습관화된 세계인식 틀의 무너짐으로 인한 것이 클 것이다. 그는 철자(알파벳)의 묘사력을 고갈시켜 현실을 보여주고자 하는 신의 글쓰기, 독자에게 전지전능함을 선사하려는 진정한 불멸의 책을 제안한다.

 

그가 제안하는 14개 단어의 조합으로 무진장하게 텍스트를 재배열함으로써 가능한 미래, 새로운 세계, 새로운 질서,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 낼 수 있음을 독려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자신의 환상기법을 이렇게 설명했다. 문학의 기능은 인간을 위한 일종의 꿈으로써 인간이 그로 인하여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것을 돕는 것이라고. 그러면서 유연한 사고방식을 강조했다. 한편 토라를 해석하고 감추어진 뜻을 제시하기 위해 사용된 유태인들의 일종의 전통적 접신법인 히브리어로 ‘qabbalah’로 표기되는 카발라는 보르헤스 작품의 신비주의에 깊숙이 참여하여 이 세계의 비의를 해석하는 메커니즘으로 활약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신과 모세 사이에 구전되어 계승된 기억의 주석이자 해석인 카발라는 그야말로 본연의 문학, 비의를 간직한 진짜배기 글이기에 보르헤스가 이를 자신의 작품 기반으로 사용한 것은 어쩌면 새로운 현실 세계의 정립을 위한 불가피한 행위였을 것이라 추측해 볼 수 있게 된다. 참 실재에 도달하기 위해 언어 이전의 신화적 조건으로 돌아가 그 진실을 규명하려는 모험이기도 할 것이다. 언어가 하나의 객체로서 진실 밖에 놓여있다는 인식에 동의하게 되면, 우리들은 불충분의 언어에 노출될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게 된다. 오늘의 이 세계는 정말 하 수상하기만 하다. 이해력이 점점 좇을 수 없을 만큼 불의하고 혼돈으로 치닫는 인상이다. 지배이데올로기에 대한 사회적 저항이며 시민적 자유의 계기를 마련하는 토대로서, 또한 무수하게 난무하는 교조적 신념들을 종합하는 통합적 능력으로서 신비주의가 발흥했던 인류사의 한 시기로 평가될 시대이기만 한 것 같다. 문학의 역할과 그 심원성이 더욱 요구되는 시절이다. 비의 가득한 문학 작품 출현의 기대가 지나친 욕심이기만 한 걸까? 고전 명작으로 거론되는 많은 문학작품들이 바로 이러한 비의(신비)로 가득한 이유일 것이다. 독서의 참 맛을 위한 긴요한 참고 문헌이 되어 줄 것 같다.

 

 

참고: 함께 읽으면 좋은 도서

 

1) 미구엘 데 세르반떼스: 돈 끼호떼

2) 호르헤 보르헤스 : 알레프, 픽션들

3) 프란츠 카프카 : 단편선집, , 학술원에의 보고, 변신

4) 아르튀르 랭보: 나의 방랑, 지옥에서 보낸 한 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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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글 - 우리의 글쓰기가 가야 할 길
조르조 아감벤 지음, 윤병언 옮김 / 책세상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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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재의 존재로 속으로 뛰어든 글쓰기로서 문학, 秘義에 대해서>

 

이 비의(秘義)를 좇는 철학자는 인간의 언어, 문학 속에서 부재와 결여의 존재’, ‘무의 존재속으로 뛰어들어 그 보이지 않고 해석을 불허하는 소용돌이에 휘말려, 알 수 없는 기원과 감히 마주하려 한다. 그리고는 바로 이러한 행위가 글이고 문학이어야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이 시론(詩論)이자 문학론이며 언어에 대한 해석의 글은 태생적으로 어려움을 지닌다.

 

그렇다고 수록된 11꼭지의 철학적 문학 에세이 모두가 어떤 신비적 비의에 기탁한다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글이 있는 곳에 불은 꺼져있고, 신비가 있는 곳에 서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는 이 불가능한 모순된 듯한 문제를 이해하는 것은 다분히 비의적이라는 의미에서 그렇다는 말이다. 즉 불과 글, 신비와 서사라는 문학이 포기할 수 없는 요소의 실체를 증명하는 작업이다. 신비가 뿜어내는 검은 빛의 조각들을 식별해 낼 수 있는 일종의 혜안을 알려주려는 선의이기도 할 것이다. 문학을 읽는 독자들을 넘어 문학을 창작하는 작가들에게 의미심장한 영감을 던져 줄 색다른 독서가 되어 주리라.

 

표제이기도 한 <불과 글>이 제일 앞에 놓여있는 것도 이러한 까닭일 것이다. 사실 각 에세이는 그의 설명들을 따라가는 데 비교적 즐겁고 수월한 기분이지만 결론부에 이르면 여지없이 신비적 의미의 장으로 심화되는 바람에 고통스러운 읽기가 되어버리기 일쑤이기에 인내심과 집중력을 요구한다, 작은 방심에도 의미는 마구 꼬여들어 낯선 길을 방황하게 된다. 천천히 차근차근 그가 의도하는 서술을 따라가면 사실 그리 어려울 것도 없는 글이기도 하다.

 

우선 불()과 글(or )의 이 낯선 조합이 대체 무언가 하겠지만 친절하게도 이 말의 근원이 된 전설같은 에피소드로 그 연관성이 드러난다. 아주 힘든 문제가 발생하면 현자가 숲속의 어느 장소에 가서 불을 피우고 기도를 드리면 상황이 해결되었다. 그런데 세대가 흐르고 불과 기도하는 방법을 잊어버리고, 이윽고 장소마저도 망각할 만큼 오랜 세월이 자났을 때 그 세대의 현자는 이렇게 말한다. 장소도, 불 피우는 법과 기도드리는 법도 모르지만 글로 전할 수 있습니다.”라고. 이렇게 말하자 문제는 해결되었는데, 그 현자는 이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 말은 문학이란 곧 태초의 신비가 사라지고 남은 것이라는 뜻이며, 불의 상실에 대한 기억이 문학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글로 전할 수 있다는 이야기는 정작 망각이라는 것이다. 이 의미의 전도(顚倒), 소설은 이같은 비의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며, 오늘의 문학은 바로 이 둘의 관계를 단절하거나 이해하지 못함으로써 작가와 문학의 본질을 상실했다고 비판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단테를 인용한다. 예술가는 예술의 옷을 입었지만 떨리는 손을 가졌다.” 예술가의 떨리는 손이야말로 불의 부재, 신비의 부재로 인한 기억이라는 불가능한 과제 앞에선 극적 긴장이며, 기원의 부재라는 완강함 속에 가끔 전율이 흐르고 은밀한 흔들림을 통해 양식이 느닷없이 밖으로 흘러넘치기 시작하는 그것이 바로 필력이라고 주장한다. 아감벤에게 필력이란 신비의 망각이 언어를 할퀴면서 만들어내는 이 상처가 빚어내는 떨림의 내재성이다. 사실 이 사변적인 정의를 문학 속에서 실현하는 것이 쉬울 리가 없다. 그는 여인의 초상, 안나카레니나, 보바리 부인을 완전한 신비의 상실을 통해 삶의 비의를 드러낸 작품으로 예시하고 있는데, 그의 서술을 상기하며 이들 작품을 다시 읽어보는 과정을 통해 불과 글, 신비와 서사의 의미를 되새겨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비교적 대중적인 읽기가 가능한 몇 편이 있는데, <비유와 왕국>은 복음서의 예수와 카프카의 작품을 통해 비의적 비유를 시작으로 수사학적 비유를 통해 일종의 글쓰기의 지향성과 해석으로서의 읽기를 성찰하도록 돕는다. 예수가 복음서에서 얼마나 비유(parabola)라는 말을 많이 사용했는지 말하다는 동사가 이 비유에서 유래할 정도였으니 말과 비유의 관계는 예수가 비유하는 왕국(하늘나라)을 설명하는 8가지의 비유와의 관계만큼 예사롭지 않은 의미를 읽을 수 있다. 여기서 씨앗이니 왕국이니 비유는 건너뛰고 카프카의 유고(遺稿)중 한 편인 비유에 관하여로 바로 가보면 비유가 지닌 비의가 무엇인지 어렴풋이나마 마음에 와 닿을 수 있다. 이 글은 비유에 관한 비유를 주제로 하지만 정작 비유에 관한 비유는 더 이상 비유가 아니라는 이야기이면서, 사실 말과 현실 사이의 차이 없음, 왕국이라는 신비적 차원의 장소는 바로 여기에 있음을 암시한다.

 


어느 현자가 말한다. 저쪽으로 가라, 이 말은 비유이지 실제로 저쪽으로 가라는 말이 아니다. 저쪽으로 가봐야 아무것도 없으며, 그 저쪽이 어디인지도 알 수도 없다. 이 비유가 일깨우려는 것은 무엇일까? 카프카의 작품 속 이름 없는 누군가가 비유를 더 이상 좇지 않으려는 화자에게 왜 거부하시나요?”라며 문제해결을 제시하지만 화자는 그 이야기 역시 비유인 듯하군요라고 받는다. 그러자 이름 없는 자는 안타깝게도 비유로만 이기셨습니다.”라며 패배를 선언하는 듯하지만 실제 자신이 이겼음을 넌지시 비춘다. 이에 다시 화자는 아닙니다. 현실 속에서만 이기셨어요, 비유로서는 지셨습니다.” 고 답한다. 화자는 현실과 비유가 다르지 않음을 깨달은 사람이다. 분리와 상응!’, 구분된 별개의 대립이 아니라 현실과 비유는 개체인체로 서로 다르지만 둘은 하나로서의 다름이라는 것이다. 하아~, 보이지 않는 비의가 어느 순간 문장을 흘러넘치는 것을 발견하거나 그것을 내장시키는 것이 과연 필력이란 말의 의미를 깨우치게 된다.

 

카프카의 작품이 등장했으니 계속해서 이어가면 에세이 <창조 행위란 무엇인가>는 창조행위란 곧 저항행위라고 들뢰즈를 인용하며 시작하는데, 창조 행위란 소유한 기량의 잠재태, 이를테면 그 힘(기량)을 표출할 수도 하지 않을 수도 있는 가능성의 규정이다. 즉 창조란 역설적으로 발휘되지 않을 수 있다는 가능성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며, 하지 않을 수 있는 무능력의 인정으로부터 능력을 소유할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아주 멋진 말이 등장하는데, 능력뿐 아니라 무능력까지 거머쥘 수 있는 힘만이 진정한 의미에서 지고한 힘이 창조의 행위가 된다는 것이다.

 

피아니스트 글렌굴드는 연주하지 않을 수 있는 힘으로 연주한 피아니스트라는 것이다. 연주 외에 아무것도 모르는 재주 앞에서 거장은 연주를 통해 그의 연주 능력이 아닌 연주하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을 발휘한다.” 갈망하는 표면적인 것들의 욕심을 무너뜨리는 것, 힘의 즉각적이고 무조건적인 충동을 멈춰 세우는 저항 행위를 통해 나타나는 위대하고 은밀한 매너, 부동의 형식 속에서 발견되는 감지 할 수 없는 가벼운 떨림의 출현이 바로 창조 행위라는 것이다. 제어되지 않는 힘의 남용이 얼마나 하찮은지 매양 목격하는 오늘, 우리의 마음에 이 말의 의미는 더욱 크게 와 닿는다.

 

카프카의 단편 위대한 수영선수의 노래를 부르지 못하는 탁월한 가수 요제피나만큼 이의 적절한 예가 없을 것 같다. 휘파람만 겨우 불지만 요제피나는 부족한 조건에서만 허락되는 효과를 얻어내는 데 성공하기에 탁월한 가수이다. 마찬가지로 수영 선수 또한 헤엄칠 줄 모르는 덕분에 성공한다. 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은 할 수 있는 힘의 무위라는 도식에서 해제로부터 비롯된 결과이다. 진정한 능력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우리들은 깨닫게 된다. 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은 할 수 있는 힘의 내부에 존재하는 저항력이다. 스스로의 무능력을 거머쥘 수 있는 잠재력, 그것이 창조행위이고 진정한 능력이란 말이다. 마찬가지로 위대한 시와 소설은 말하지 않고 말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표현하는 문학이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 무위의 시학에서 무위의 정치학을 상상할 수 있게 되면 우리는 오늘의 권력이 얼마나 천박한 것인지를, 그 얄팍한 무지의 정신에 전율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사실 이 책의 에세이들 중 적어도 9편은 가히 빛나는 문학적 사유를 담은 굉장한 글들이다. 롤랑 바르트의 마지막 강의인 소설의 준비로 시작되는 <책에서 화면으로, 책의 이전과 이후>에서는 문학작품의 완성이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니체파솔리니’, 그리고 조르조 망가넬리의 소설을 통해 존재하지 않는 글이 있으며, 우주이자 신이 된 글의 양태를 제시하여 설명하기도 하고, 시인 파울 첼란의 허락되지 않는 공간에서의 허락된 삶을 살아야 하는 유대인으로서의 삶이라는 불가능성에 온통 전념했던 침묵의 시를 <이집트에서의 유월절>이라는 팽팽한 긴장을 담은 이 모순된 제목의 글이 있다. 한편, 물의 원형적 움직임으로부터 언어의 기원, 이름의 기원, 삶의 기원에 이르는 시론의 성격을 지닌 <소용돌이>는 가히 최고 지성의 사유를 맛 볼 수 있게 해준다.

 

소용돌이를 한 번 관찰해보자. 분명 물의 일부지만 물의 흐름에서는 전적으로 분리된 형태이다. 즉 소용돌이는 그 고유의 법칙과 자체로 닫힌 구조를 고수하지만 그럼에도 주변의 모든 것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한다. 그 자체로 존재하지만 물방울은 한 방울도 소유하지 않는 절대적 비물질적 정체다. 이 소용돌이가 기원의 비유로 사용되는데, 이와 같은 소용돌이 현상의 변화와 동시적이지만 현상 속에 독자적이고 견고한 자체의 방식으로의 존재하는 것이 곧 역사적 변화의 기원이다. 역사의 기원은 그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 그 끝에 도달해야만 마주할 수 있다. 작가는 바로 이 소용돌이 속으로 뛰어드는 자여야만 된다는 것이다.

 

이 극단적 모험과 치열함의 집요함을 감당할 수 있는 인간이 작가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의 문필가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중대한 글이 아닐 수 없다, 망각되어 글이 되어 어떠한 신화의 흔적도 없는 문학이 되었지만 그것에는 이 잃어버린 망각 -, 주문, 장소- 이 부재 속에서 넘쳐나야 한다는 과제를 수행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어려운 과제를 안을 작가들이 많은 세상이 되기를, 어쩌면 불가능한 기대가 될지도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그 위대한 창작자를 기대해 보게 된다. 글쓰기와 글 읽기의 어려움을 체험하려는 독자들을 위해 이 책은 활짝 열려있다. 책의 마지막에 수록된 <창작 활동으로서의 연금술>은 하나의 독립된 책으로 출간되어도 손색이 없는 지적 만찬장이다. 삶과 철학과 역사와 창조의 행위가 일치하는 위대한 문학의 길이 여기에 있다. 문자를 책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감히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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