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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 당나귀 ㅣ 현대지성 클래식 22
루키우스 아풀레이우스 지음, 장 드 보쉐르 그림, 송병선 옮김 / 현대지성 / 2018년 8월
평점 :
작품 이름에 대한 논란이 있는 것 같다. ‘변신(metamorphoses)'으로 불리기도 하고, ’황금 당나귀(The golden ass)'로 불리기도 하여 ‘변신 또는 황금 당나귀’라고 둘 모두를 포함하는 이름으로 표기하기도 한다. 이런 논의야 어쨌든 기원 후 2세기(AD 170년 추정)에 써진 이 책은 “감미로운 향기와 오줌 냄새가 뒤섞여 있는”, 그야말로 관능적 아름다움과 외설의 아슬아슬하게 경계를 오가는 희한한 이야기인 것만은 분명하다.
‘푸블리우스 오비디우스(Publius Ovidius)’가 쓴 동명의 책인 『변신 이야기』의 운문체와 달리, ‘루키우스 아플레이우스(Lucius Apuleius)'의 이 작품은 구어(口語) 서사체라는 점에서 ‘최초의 소설’이라는 명예를 안은 것 같다. 서사를 이끄는 화자(話者)는 작가의 소설적 분신이면서 소설 속의 또 다른 이야기의 전달자이자 이야기 속의 주인공이 되어 작품 전체를 하나의 이야기 속으로 통합하는 역할을 한다. 아마 이러한 독특한 구조가 훗날 액자소설이나 피카레스크 소설로 불리는 것들의 전신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소설 속 화자인 ‘루키우스’는 자신이 유명한 역사학자 플루타르코스와 철학자 섹스투스의 피를 이어받은 명문가의 귀족임을 은연히 내비치며 나그네들의 기이한 체험의 이야기로 수다를 시작한다. 남자들을 열렬하게 사랑에 빠지게 만들 수 있는 초자연적 능력을 지닌 마녀의 서늘한 이야기다. 마녀의 추적하는 사냥개를 피하기 위해서, 즉 마녀인 여성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스스로 거세함으로써만 가능하다는 당대 남성들의 표면적 피해의식을 반영하는 것 같다. 이는 역설적으로 남성들의 성적 방탕과 통제되지 않는 폭력의 일상성애 대한 다른 표현이기도 할 것이다.
루키우스는 사업상 테살리아의 히파타에 도착하여 이 도시의 가장 중요한 인사인 ‘밀로’의 집에 머물게 되고, 대 귀족의 아내로 사는 이모 ‘비라에나’를 만나게 된다. 그녀는 루키우스에게 “초자연적 현상에 대한 네 욕망을 마음껏 채울 수 있게 되었어.”라며, 관능의 즐거움을 예견케 하지만, 음욕 가득한 밀로의 아내 ‘팜필레’를 주의할 것을 경고한다. 그러나 마법이 전(全) 지역에 뿌리내리고 있다는 테살리아를 속속들이 알고 싶은 충동과 갈망에 휩싸인 루키우스는 오히려 장난기와 호기심으로 득의양양 밀로의 집으로 돌아간다. 그리고는 팜필레의 육감적 하녀 ‘포티스’의 머리칼에 대한 찬미의 언어로 장장 1페이지를 빼곡하게 채운다.
그리곤 “마치 사랑의 사과가 내 위를 오르내리는 것과 같았다.”며, 포티스와의 수많은 열정의 밤을 능청스럽게 묘사한다. 미지의 것에 대한 앎의 욕망은 다름 아닌 성적 욕망이라는 정신분석학의 표현처럼 루키우스의 호기심은 밀로의 아내 팜필레의 마법에 대한 관심으로 옮아간다. 그녀가 간통 상대자에게 가기위해 새로 변신하는 마술을 엿보고 포티스의 도움으로 마법의 약을 들이키지만 예상과 달리 당나귀로 변해버리고 만다. 다시 인간 루키우스로 돌아오기 위해서는 장미를 먹어야 하지만 주변에 장미가 없어 마굿간에서 밤을 보내게 되고 이 이야기는 본격적 궤도에 오른다.
소설은 당나귀로 변해버린 루키우스의 고난의 여정이고, 그야말로 산전수전 공중전을 치루며 거세와 죽음의 문턱을 오르내리는 생존을 위한 투쟁 속에서 바라보게 되는 당대 인간들의 삶의 현실과 인간 본성으로부터 생명의 신성함, 건강한 삶을 길어 올리는 자기 성찰의 역사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소설을 구성하는 소설 속의 무수한 작은 이야기들의 많은 부분이 강도(도둑)들의 탐욕과 잔혹성이며, 타자의 희생 위에서 행해지는 이기적 욕망과 음욕에 대한 것들이다. 특히 ‘프쉬케와 쿠피도’의 사랑, 그리고 ‘카리테와 틀레폴레무스’의 사랑에 대한 두 이야기는 질투와 호기심, 육체의 탐닉과 심신(心身)이 결합된 사랑, 속박과 자유 등 다채로운 해석으로 독자를 불러들인다.
미의 여신 베누스를 능가하는 천상의 아름다움으로 사람들이 보낸 지나친 경의는 그 영광의 대가로 저주가 되어 돌아온다. 프쉬케와 쿠피도의 사랑 이야기는 눈에 보이지 않는 신, 즉 이 세계의 비의(秘意)를 보려는 인간적 호기심의 욕망이 부르는 파멸과 그를 속죄하는 고난의 과정을 묵묵히 수행하는 프쉬케를 통해 사랑이란 진정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고 하면, 틀레폴레무스의 아내인 카리테를 탐하기 위해 트라실루스가 벌이는 간교한 살해와 카리테의 지고한 사랑과 죽음의 이야기 속에서 태초 이래 인간의 어쩔 수 없는 현실적 욕망의 잔인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이기도 한다.
【포르투나 여신에게 미움받는 당나귀 중에서-223쪽】
이 당나귀 변신담은 자신의 고통과 죽음 앞에서조차 어둡지 않고 흥겹기까지 하다. 화자이자 때론 주인공이기도 한 루키우스는 자신의 전문가적 역량을 슬쩍 언급하는데 법률가이자 수다를 떠는 문필가답게 유머와 재치, 저절로 상상되는 묘사된 행위의 순박성, 그리고 결코 진지한 언어로 분위기를 냉각시키지 않는 재주일 것이다. 쓸모없어진 당나귀를 죽이기로 그의 주인들이 합의하거나 미신적 믿음으로 그를 거세하려는 순간이 임박했을 때, 묶인 줄을 끊고 죽으라 내달리는 당나귀 루키우스의 모습은 짐짓 그의 처지에 공감하며 진지해질 수 가 없게 한다. 입을 틀어 막아도 비어져 나오는 웃음이란...
자신의 주인이 지나가던 로마병사를 마구 두들겨 패곤 처벌이 두려워 어느 민가에 그와 함께 숨어드는 사건이 있는데, 수색을 피하기 위해 당나귀 루키우스는 지상에서 보이지 않는 2층 방에 갇힌다. 집주인은 이들을 지켜주기 위해 로마병사들의 수색을 저지하고 그들이 자신의 집에 없다고 주장하는 상황에서 당나귀는 호기심으로 커튼이 드리워진 창으로 잠깐 머리를 내민다. 이때 햇빛에 드리워진 당나귀의 그림자를 발견한 병사로 인해 그들은 붙들려 곤혹을 치르게 된다.
여기서 “당나귀 그림자만 봐도 당나귀인지 안다.”는 지극히 뻔한 말로부터 이에 담긴 경솔함과 호기심을 숨기지 못하는 인간에 대한 조롱을 싣는다. 당나귀가 된 루키우스가 처하는 일촉즉발의 위기들은 사실 모두가 인간의 속성들에 기인한다. 그 경박함, 억제되지 않는 충동들, 남이 가진 것에 대한 소유 욕망, 그리고 성적 갈망이 초래하는 운명의 신이 내리는 벌칙들이다.
이 책 저자의 종교적 시선은 소설 속 루키우스의 언어를 통해 고대 로마의 문화적 분위기를 짐작케 하는데, 자기 몸에 채찍질을 가하고 자해하며 가짜 사제 차림으로 구걸하는 무리의 모습이나, 허황되고 꾸며낸 개념으로 단 하나의 신을 주장하는 무리처럼 기독교도에 대한 조롱과 혐오가 눈에 띈다. 또한 아라비아 모든 향수의 언급이나 그리스로마의 여러 신들 뿐 아니라 당나귀 루키우스가 마침내 최고의 신이라 지칭하는 이집트 이시스 여신의 가호로 인해 인간의 몸으로 복귀하는 장면처럼 당대 로마의 종교와 문화를 지배하는 정신과 물질 문명의 뿌리는 서구중심의 왜곡된 관점과 달리 이집트와 서아시아에 있음을 자연스레 짐작케 하기도 한다.
그리고 민주주의에 대한 현대적 해석으로 끌어 쓸 수 있는 대중의 우매성에 대한 지적도 흥미롭다. 이를테면 당나귀 루키우스는 베누스를 비롯해 유노와 미네르바 3인의 여신 중에서 미의 여신을 결정하는 권한이 뻔뻔스런 베누스의 성뇌물에 녹아난 프리키아의 비천한 젊은 목동 파리스에게 주어졌다고 비판한다. 또한 그는 전쟁에 참전을 종용한 팔라메데스에 앙심을 품은 오디세우스가 거짓 증거들로 팔라메데스를 기소하여 판단력이 마비된 인간들이 죽음의 판결을 내리는 것처럼 이러한 어리석은 전통을 이어받은 것은 지울 수 없는 인류의 오점이라 주장하는 장면들이다. 생각하지 않는 대중의 판단이 중요한 사안을 다수결로 결정하는 민주주의의 어려움, 그 곤란함이 여기에 있다. 바보같은 이 난처한 궁색함이란.
음란하고 기형적 음욕의 묘사나 쾌락과 방종의 묘사들이 제법 지면을 채우는 작품이다. 또한 유쾌한 해학으로 즐거운 미소를 떠나지 못하게 하는 문장들과 은은하게 발산되는 아름다움의 향기가 승화된 시적 이미지로 가득하기도 하다. 복잡다단한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해 풀가동한 심신을 위로하며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책으로 맞춤이다. 밝은 기분으로 상쾌한 독서를 하려한다면 정말 제격인 듯싶다. 이 고대인이 왠지 보고싶어진다. 그와 나누는 대화는 현학적인 체 하지 않으며 의미를 말하고, 흥미진진하고 떠들썩한 기쁨을 주는 사람일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