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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쇼몬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26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지음, 서은혜 옮김 / 민음사 / 2014년 10월
평점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芥川龍之介)’의 여덟 편의 단편으로 편집된 선집이다. ‘구로사와 아키라(黑澤明)’ 감독의 1951년 영화 《라쇼몬》으로 원작이 서구세계에 알려진 영향과 함께, 그의 이름으로 시상되는 문학상처럼 일본 자국 내에서 소설가로서 명망이야 그들의 이해에 터 잡은 것이고, 작품의 해석에 따르는 평가는 결코 이들과 같은 것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특히 구로사와의 영화는 소설의 제목과 일치하지 않는다. 단지 아쿠타가와의 단편집 『라쇼몬(羅生門)』에 수록된 단편 「덤불 속(藪の中)」의 영상화이지 단편 「라쇼몬」의 내용이 아니다. 물론 이 두 단편소설의 주제 의식으로 읽을 수 있는 공통의 요소가 있긴 하지만 다른 작품이다. 나는 이 작품들을 비롯해 아쿠타카와의 소설에서 오늘의 일본인들을 지배하는 정신을 읽는다. 이들이 이러한 직관을 얼마나 오랜 동안 자신들의 몸에 체화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들의 윤리 의식이란 것이 어떤 것인지를 파악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어쩌면 내 독해가 억견(臆見)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덤불 속」은 살인 사건의 당사자들을 포함 일곱 명의 서술자가 하나의 사건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이들의 진술은 살인 방식이나 사건의 정황을 모두 다르게 진술한다. 이들 서로 다른 이야기로 인해 어느 진술도 사실로서 신뢰할 수 없게 되고 또한 그네들의 상황 이해방식 조차 믿을 수 없게 된다. 결국 이들 비협조적 서술자들로 인해 사건은 미궁의 것, 불확실한 상태로 머물게 되고 만다.
[영화 <라쇼몬>의 한 장면]
그런데 이러한 미해결의 이야기에 대한 의문에 대해 작가는 모두 진실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고 한다. 나는 이러한 식의 답변이 거짓이라 생각된다. 하나의 사실을 다르게 말함으로써 진실을 흐리게 만드는 것, 즉 진실을 진공 상태에 빠뜨려 오리무중에 휩싸이게 하는 것, 그래서 자의적 판단을 내리게 하는 태도가 바로 일본인의 윤리의식 바로 그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이들의 역사 인식이나 사실을 대하는 태도에서 너무도 확연히 드러나는 데, 위안부, 징용공 문제 등 역사적 사실의 부인, 독도 영유권에 대한 사실 흐리기와 같이 이를 동일한 인식 선상에서 읽을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이처럼 인식의 윤리적 토대에 의해 이 작품을 바라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론 서술자들의 각 이야기 자체로서 당대에 대한 문화사회적, 정치적 비판의 변으로도 읽을 수 있다. 이를테면 살인 용의자인 도적 다조마루의 자백에 “나는 죽일 때 허리에 찬 칼을 쓰지만 당신들은 칼은 쓰지 않고 그저 권력으로 죽이고 돈으로 죽이고 여차하면 위해주는 척하는 말만으로도 죽이죠.” 라며 지배 권력의 보이지 않는 위선, 잔인성을 비난하는가하면, 살아남은 여자가 하는 참회의 기록에는 “저는 사내에게 걷어차인 것이 아니라 그 눈빛에 얻어맞은 것처럼...기절하고 말았습니다.”와 같이 여성 정절에 대한 사회적 시선의 현주소, 남성적 권위의 시선이 지배하는 세계를 우회적으로 비평하는 것을 들 수 있다.
미시적, 개별적 태도에서는 이렇듯 도덕적 인식이 깨어있음에도 전체적 진실규명에 있어서는 흐리멍덩해지는 이 집단적 윤리의식의 모호성은 아무튼 ‘일본적이다’ 라고 말 할 수 있을 것 같다, 공동체의 의식에 이르면 선악의 경계지대를 거닐며 힘의 방향을 가늠하는 기회주의적 성향, 이것이 일본의 정신으로 읽힌다.
이것은 표제작인 「라쇼몬」에서 더욱 극명하게 인식되는데, 거듭되는 재난으로 일자리를 잃은 남자가 어떻게도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자신의 형편을 인식하며 굶거나 질병으로 죽은 사체들이 버려진 라쇼몬 누각 안으로 하루 밤을 쉬기 위해 찾아들어가며 벌어지는 하나의 상황 이야기다. 이러한 배경으로부터 당대 인간들의 윤리적 수준이 드러나고, 그것은 사회공동체에서 이들 일본인들이 보이는 무심성이다. 시체를 그저 남들이 버리는 곳에 갖다 버리는 행위, 그리고는 그곳은 마치 추악한 장소라도 되는 듯 외면하는 것, 바로 자신들의 행위임을 부정하는 이 모순을 인식치 못하는 것에서 일본인들의 윤리성을 읽는다.
남자는 수많은 시체들이 쌓여있는 누각을 헤매며 시체의 머리카락을 뽑아 담는 노파를 발견하고는 그 행위에 내재된 악에 살의를 느끼고 달려들어 칼을 겨눈다. 이때 노파의 자기 행위 정당화 발언이 시선을 끄는데, 가발을 만들어 팔기위해 시체의 머리카락을 뽑는 것은 “안 그랬음 굶어 죽을 테니 어쩔 수 없어 한 짓이니께 ...내가 하는 일도 나쁘다고는 못하겠구먼”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남자의 윤리적 태도를 결정짓게 하고, 노파의 옷을 벗기곤 시체 더미위로 노파를 발로 차버리는 행위로 이어진다.
“시커먼 동굴처럼 어두운 밤이 펼쳐져 있을 뿐”이라는 마지막 문장과 함께 이 이야기는 악의 정처없는 세계로 마무리된다. 악의 윤리적 정당화를 비판하는, 아니 자성하는 목소리일까?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사적 이익 앞에서 인간상호 간의 윤리를 지배하는 것은 선악의 판별이란 의미없음이라고 선언하는, 즉 공동의 지대에 들어서면 자취를 감추는 전형적 일본인의 윤리 의식의 무의식적 발로가 아닐까?
[민음북클럽 2023스페셜 에디션 중에서]
이러한 윤리적 연상선에서 「마죽」이란 단편도 읽을 수 있다. 오위라는 하급 관리의 궁핍과 주변으로부터의 멸시를 쫓으며, 그의 욕망이 실현되는 여정을 그리고 있는 소설이다. 낡고 헤져 남루한 차림, 딸기코와 볼품없이 가늘고 작은 몸뚱아리로 아이들에게 조차 놀림감이 되는 사람이다. 마죽을 실컷 먹어보는 것이 유일한 소망인 남자에게 동료 사무라이의 초대로 그가 이끄는 장소로 따라가 엄청난 마죽의 대접을 받지만 그는 이내 구토가 올라올 지경으로 그만 물리고 만다.
사실 이 소설은 소설 속에 개입된 작가의 목소리, 다시 말해 주인공의 생각에 작가의 의도를 빌어 발설되는 “가엽고도 고독한 자신, 하지만 동시에 마죽을 실컷 먹고 싶다는 욕망을 오로지 혼자서 소중히 간직하고 있기도 했던, 행복한 자신”을 회상하며 안도하는 모습으로 끝난다. 이는 주변 세계의 조건을 그대로 자신의 것으로 삼는 체념의 평온성을 주입하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안분지족(安分知足)을 삶의 정상성으로 삼는, 세계의 조건에 이의를 달지않는, 어떤 의미에서 자기 외의 세계에 눈을 감는 일본인의 그것이라 해도 지나친 곡해는 아닐 것이다.
「흙 한덩이」라는 소설은 아들이 죽자 며느리와 함께 사는 스미라는 여인의 삶의 시선이라 할 수 있는데, 억척스레 땅을 일구고 남자들이 하는 힘겨운 노동조차 감내하며 살림을 일으키는 며느리로 인해 집안일을 떠맡게 된 시어머니의 푸념의 변이기도 하다. 며느리로 인해 살림의 형편이 나아지지만 손주의 돌봄과 소소한 집안 살림에 묶여 여전히 노동에서 해방되지 못한 자신의 처지에 대한 억제된 불만이다.
며느리인 다미의 느닷없는 죽음의 장면은 묘사됨 없이 단지 죽음의 사실만 기술되고, 그 죽음이 순간적으로 축적된 돈의 여유로운 소비와 자기 행동의 자유에 대한 꿈으로 이어지지만 갑자기 자신을 포함한 죽은 며느리와 아들 모두가 한심한 삶을 살아왔음에 대한 회한에 젖어들며 이야기는 맺는다. 오늘에는 좀 오래된 낡은 사고의 진부함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굳이 소설의 문장들에 물음하며 해석의 시선을 들이대면 왜 며느리는 개가하지 않고 힘겨운 일에 그렇게 전념했을까? 왜 스미는 갑작스레 모두 한심하게 여겨졌을까?를 찾아내 주제를 규명하는 작업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그리 풍부한 읽기로 안내하지는 못할 것 같다.
마지막에 수록된 「두자춘(杜子春)」으로 맺어야 할 것 같다. “해는 지는데 배는 고프고, 이젠 어딜 가도 채워 줄 곳도 없을 텐데” 라며 부질없는 생각을 하면 어디선가 나타난 애꾸눈 노인이 “그것 참 안됐구먼”하며 황금이 묻힌 곳을 알려주어 엄청난 부귀를 안겨주지만, 매번 3년이면 탕진하고 이와 같은 푸념을 반복하고 다시 노인이 황금 장소를 알려준다. 그런데 이러한 반복된 생의 한 시점에서 두자춘은 노인에게 돈은 더 이상 필요 없다고 말한다. 그리곤 예견된 답변을 거스르는 희한한 말이 나온다. 자신의 사치와 낭비의 반성이 아니라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기에 부귀가 소용없다는 것이다.
자기 가난의 상황이 자기 책임이 아니라 부귀에 몰려들어 자신의 사치에 영합했던 인간들에게 책임을 돌리는 것이고, 그래서 인간에 대한 회의를 떠나 노인에게 선술 수업을 받는 제자가 되고 싶다는 것이다. 노인은 이 청을 들어주어 아미산 절벽 바위 위에 내려놓곤 어느 누구에게도 어떤 말도 하지 말아야 선인의 경지로 들어갈 수 있음을 듣는다. 무수한 위협과 사건에 직면하지만 스승의 말에 따라 입을 다물고 그 어떤 말도 발설하지 않는다. 이윽고 이를 괘씸히 여긴 염라대왕은 그의 부모를 면전에 데리고 와 채찍질로 어머니의 살을 찢고 죽음에 내몰지만 그는 입을 다물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어머니는 “우리는 어떻게 되든 너만 행복할 수 있다면...잠자코 있으렴”하고 말한다. 아들을 원망할 낌새조차 없이 자식의 마음만을 생각하는 어머니 곁으로 달려가 두자춘은 기어이 ‘어머니’하고 부르짖는다. 천륜이라는 유교사관에 의거한 이 효심의 발언을 통해 인간됨을 말하려는 이 동화가 당대 일본인들에게 필요했다는 것에서 그네들 윤리관의 현실을 읽을 수 있다. 이 교훈적인 전설을 버무린 드라마가 ‘인간적 정직함’이라는 노인의 말로 마무리하는 데서 더욱 그네들 시대의 윤리적 난맥상이 드러난다. 한편 20세기 초엽의 일본인에게 경제적 의식은 아직 존재하지 않았다고 이해할 수도 있으며, 때문에 개인의 사치와 방탕으로 인한 곤궁함을 주변 인간의 도덕성 탓으로 돌릴 수 있게 된다.
무릇 작품을 읽는 시선 혹은 방식이란 다양할 것이다. 아마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소설들에는 무수한 전문가적 해석들이 존재할 것이고, 이러한 비평들에 의해 당대를 대표하는 작가로 추앙되었을 것이다. 그것은 그들의 인식이지 21세기 한국인의 독해가 아니다. 20세기 초, 한국은 일본의 침탈에 신음하던 시기이다. 바로 그 동시대의 일본인 정신 표현이라 할 수 있는 이 소설들에서 일본의 집단적 사고방식이나 윤리의식을 읽는 것은 정당한 독해라고 확신한다. 그렇다고 작품의 문학적 가치를 훼손하거나 폄훼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나는 단지 이 작품들에서 일본이라는 집단정신에는 모호하고 힘의 논리에 의해 기회주의적으로 결정되는 윤리만 있을 뿐, 진실의 도덕적 정신 없음을 발견한다. 또한 일본인 개인들의 정치적 수동적 태도가 얼마나 오랜 동안 그들의 정신에 주입된 지배 엘리트들의 세뇌였는지도 읽게 된다. 내게 이 작품 선집은 하나의 정신사 엿보기였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