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글 - 우리의 글쓰기가 가야 할 길
조르조 아감벤 지음, 윤병언 옮김 / 책세상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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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재의 존재로 속으로 뛰어든 글쓰기로서 문학, 秘義에 대해서>

 

이 비의(秘義)를 좇는 철학자는 인간의 언어, 문학 속에서 부재와 결여의 존재’, ‘무의 존재속으로 뛰어들어 그 보이지 않고 해석을 불허하는 소용돌이에 휘말려, 알 수 없는 기원과 감히 마주하려 한다. 그리고는 바로 이러한 행위가 글이고 문학이어야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이 시론(詩論)이자 문학론이며 언어에 대한 해석의 글은 태생적으로 어려움을 지닌다.

 

그렇다고 수록된 11꼭지의 철학적 문학 에세이 모두가 어떤 신비적 비의에 기탁한다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글이 있는 곳에 불은 꺼져있고, 신비가 있는 곳에 서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는 이 불가능한 모순된 듯한 문제를 이해하는 것은 다분히 비의적이라는 의미에서 그렇다는 말이다. 즉 불과 글, 신비와 서사라는 문학이 포기할 수 없는 요소의 실체를 증명하는 작업이다. 신비가 뿜어내는 검은 빛의 조각들을 식별해 낼 수 있는 일종의 혜안을 알려주려는 선의이기도 할 것이다. 문학을 읽는 독자들을 넘어 문학을 창작하는 작가들에게 의미심장한 영감을 던져 줄 색다른 독서가 되어 주리라.

 

표제이기도 한 <불과 글>이 제일 앞에 놓여있는 것도 이러한 까닭일 것이다. 사실 각 에세이는 그의 설명들을 따라가는 데 비교적 즐겁고 수월한 기분이지만 결론부에 이르면 여지없이 신비적 의미의 장으로 심화되는 바람에 고통스러운 읽기가 되어버리기 일쑤이기에 인내심과 집중력을 요구한다, 작은 방심에도 의미는 마구 꼬여들어 낯선 길을 방황하게 된다. 천천히 차근차근 그가 의도하는 서술을 따라가면 사실 그리 어려울 것도 없는 글이기도 하다.

 

우선 불()과 글(or )의 이 낯선 조합이 대체 무언가 하겠지만 친절하게도 이 말의 근원이 된 전설같은 에피소드로 그 연관성이 드러난다. 아주 힘든 문제가 발생하면 현자가 숲속의 어느 장소에 가서 불을 피우고 기도를 드리면 상황이 해결되었다. 그런데 세대가 흐르고 불과 기도하는 방법을 잊어버리고, 이윽고 장소마저도 망각할 만큼 오랜 세월이 자났을 때 그 세대의 현자는 이렇게 말한다. 장소도, 불 피우는 법과 기도드리는 법도 모르지만 글로 전할 수 있습니다.”라고. 이렇게 말하자 문제는 해결되었는데, 그 현자는 이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 말은 문학이란 곧 태초의 신비가 사라지고 남은 것이라는 뜻이며, 불의 상실에 대한 기억이 문학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글로 전할 수 있다는 이야기는 정작 망각이라는 것이다. 이 의미의 전도(顚倒), 소설은 이같은 비의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며, 오늘의 문학은 바로 이 둘의 관계를 단절하거나 이해하지 못함으로써 작가와 문학의 본질을 상실했다고 비판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단테를 인용한다. 예술가는 예술의 옷을 입었지만 떨리는 손을 가졌다.” 예술가의 떨리는 손이야말로 불의 부재, 신비의 부재로 인한 기억이라는 불가능한 과제 앞에선 극적 긴장이며, 기원의 부재라는 완강함 속에 가끔 전율이 흐르고 은밀한 흔들림을 통해 양식이 느닷없이 밖으로 흘러넘치기 시작하는 그것이 바로 필력이라고 주장한다. 아감벤에게 필력이란 신비의 망각이 언어를 할퀴면서 만들어내는 이 상처가 빚어내는 떨림의 내재성이다. 사실 이 사변적인 정의를 문학 속에서 실현하는 것이 쉬울 리가 없다. 그는 여인의 초상, 안나카레니나, 보바리 부인을 완전한 신비의 상실을 통해 삶의 비의를 드러낸 작품으로 예시하고 있는데, 그의 서술을 상기하며 이들 작품을 다시 읽어보는 과정을 통해 불과 글, 신비와 서사의 의미를 되새겨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비교적 대중적인 읽기가 가능한 몇 편이 있는데, <비유와 왕국>은 복음서의 예수와 카프카의 작품을 통해 비의적 비유를 시작으로 수사학적 비유를 통해 일종의 글쓰기의 지향성과 해석으로서의 읽기를 성찰하도록 돕는다. 예수가 복음서에서 얼마나 비유(parabola)라는 말을 많이 사용했는지 말하다는 동사가 이 비유에서 유래할 정도였으니 말과 비유의 관계는 예수가 비유하는 왕국(하늘나라)을 설명하는 8가지의 비유와의 관계만큼 예사롭지 않은 의미를 읽을 수 있다. 여기서 씨앗이니 왕국이니 비유는 건너뛰고 카프카의 유고(遺稿)중 한 편인 비유에 관하여로 바로 가보면 비유가 지닌 비의가 무엇인지 어렴풋이나마 마음에 와 닿을 수 있다. 이 글은 비유에 관한 비유를 주제로 하지만 정작 비유에 관한 비유는 더 이상 비유가 아니라는 이야기이면서, 사실 말과 현실 사이의 차이 없음, 왕국이라는 신비적 차원의 장소는 바로 여기에 있음을 암시한다.

 


어느 현자가 말한다. 저쪽으로 가라, 이 말은 비유이지 실제로 저쪽으로 가라는 말이 아니다. 저쪽으로 가봐야 아무것도 없으며, 그 저쪽이 어디인지도 알 수도 없다. 이 비유가 일깨우려는 것은 무엇일까? 카프카의 작품 속 이름 없는 누군가가 비유를 더 이상 좇지 않으려는 화자에게 왜 거부하시나요?”라며 문제해결을 제시하지만 화자는 그 이야기 역시 비유인 듯하군요라고 받는다. 그러자 이름 없는 자는 안타깝게도 비유로만 이기셨습니다.”라며 패배를 선언하는 듯하지만 실제 자신이 이겼음을 넌지시 비춘다. 이에 다시 화자는 아닙니다. 현실 속에서만 이기셨어요, 비유로서는 지셨습니다.” 고 답한다. 화자는 현실과 비유가 다르지 않음을 깨달은 사람이다. 분리와 상응!’, 구분된 별개의 대립이 아니라 현실과 비유는 개체인체로 서로 다르지만 둘은 하나로서의 다름이라는 것이다. 하아~, 보이지 않는 비의가 어느 순간 문장을 흘러넘치는 것을 발견하거나 그것을 내장시키는 것이 과연 필력이란 말의 의미를 깨우치게 된다.

 

카프카의 작품이 등장했으니 계속해서 이어가면 에세이 <창조 행위란 무엇인가>는 창조행위란 곧 저항행위라고 들뢰즈를 인용하며 시작하는데, 창조 행위란 소유한 기량의 잠재태, 이를테면 그 힘(기량)을 표출할 수도 하지 않을 수도 있는 가능성의 규정이다. 즉 창조란 역설적으로 발휘되지 않을 수 있다는 가능성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며, 하지 않을 수 있는 무능력의 인정으로부터 능력을 소유할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아주 멋진 말이 등장하는데, 능력뿐 아니라 무능력까지 거머쥘 수 있는 힘만이 진정한 의미에서 지고한 힘이 창조의 행위가 된다는 것이다.

 

피아니스트 글렌굴드는 연주하지 않을 수 있는 힘으로 연주한 피아니스트라는 것이다. 연주 외에 아무것도 모르는 재주 앞에서 거장은 연주를 통해 그의 연주 능력이 아닌 연주하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을 발휘한다.” 갈망하는 표면적인 것들의 욕심을 무너뜨리는 것, 힘의 즉각적이고 무조건적인 충동을 멈춰 세우는 저항 행위를 통해 나타나는 위대하고 은밀한 매너, 부동의 형식 속에서 발견되는 감지 할 수 없는 가벼운 떨림의 출현이 바로 창조 행위라는 것이다. 제어되지 않는 힘의 남용이 얼마나 하찮은지 매양 목격하는 오늘, 우리의 마음에 이 말의 의미는 더욱 크게 와 닿는다.

 

카프카의 단편 위대한 수영선수의 노래를 부르지 못하는 탁월한 가수 요제피나만큼 이의 적절한 예가 없을 것 같다. 휘파람만 겨우 불지만 요제피나는 부족한 조건에서만 허락되는 효과를 얻어내는 데 성공하기에 탁월한 가수이다. 마찬가지로 수영 선수 또한 헤엄칠 줄 모르는 덕분에 성공한다. 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은 할 수 있는 힘의 무위라는 도식에서 해제로부터 비롯된 결과이다. 진정한 능력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우리들은 깨닫게 된다. 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은 할 수 있는 힘의 내부에 존재하는 저항력이다. 스스로의 무능력을 거머쥘 수 있는 잠재력, 그것이 창조행위이고 진정한 능력이란 말이다. 마찬가지로 위대한 시와 소설은 말하지 않고 말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표현하는 문학이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 무위의 시학에서 무위의 정치학을 상상할 수 있게 되면 우리는 오늘의 권력이 얼마나 천박한 것인지를, 그 얄팍한 무지의 정신에 전율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사실 이 책의 에세이들 중 적어도 9편은 가히 빛나는 문학적 사유를 담은 굉장한 글들이다. 롤랑 바르트의 마지막 강의인 소설의 준비로 시작되는 <책에서 화면으로, 책의 이전과 이후>에서는 문학작품의 완성이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니체파솔리니’, 그리고 조르조 망가넬리의 소설을 통해 존재하지 않는 글이 있으며, 우주이자 신이 된 글의 양태를 제시하여 설명하기도 하고, 시인 파울 첼란의 허락되지 않는 공간에서의 허락된 삶을 살아야 하는 유대인으로서의 삶이라는 불가능성에 온통 전념했던 침묵의 시를 <이집트에서의 유월절>이라는 팽팽한 긴장을 담은 이 모순된 제목의 글이 있다. 한편, 물의 원형적 움직임으로부터 언어의 기원, 이름의 기원, 삶의 기원에 이르는 시론의 성격을 지닌 <소용돌이>는 가히 최고 지성의 사유를 맛 볼 수 있게 해준다.

 

소용돌이를 한 번 관찰해보자. 분명 물의 일부지만 물의 흐름에서는 전적으로 분리된 형태이다. 즉 소용돌이는 그 고유의 법칙과 자체로 닫힌 구조를 고수하지만 그럼에도 주변의 모든 것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한다. 그 자체로 존재하지만 물방울은 한 방울도 소유하지 않는 절대적 비물질적 정체다. 이 소용돌이가 기원의 비유로 사용되는데, 이와 같은 소용돌이 현상의 변화와 동시적이지만 현상 속에 독자적이고 견고한 자체의 방식으로의 존재하는 것이 곧 역사적 변화의 기원이다. 역사의 기원은 그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 그 끝에 도달해야만 마주할 수 있다. 작가는 바로 이 소용돌이 속으로 뛰어드는 자여야만 된다는 것이다.

 

이 극단적 모험과 치열함의 집요함을 감당할 수 있는 인간이 작가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의 문필가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중대한 글이 아닐 수 없다, 망각되어 글이 되어 어떠한 신화의 흔적도 없는 문학이 되었지만 그것에는 이 잃어버린 망각 -, 주문, 장소- 이 부재 속에서 넘쳐나야 한다는 과제를 수행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어려운 과제를 안을 작가들이 많은 세상이 되기를, 어쩌면 불가능한 기대가 될지도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그 위대한 창작자를 기대해 보게 된다. 글쓰기와 글 읽기의 어려움을 체험하려는 독자들을 위해 이 책은 활짝 열려있다. 책의 마지막에 수록된 <창작 활동으로서의 연금술>은 하나의 독립된 책으로 출간되어도 손색이 없는 지적 만찬장이다. 삶과 철학과 역사와 창조의 행위가 일치하는 위대한 문학의 길이 여기에 있다. 문자를 책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감히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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