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고 - 미군정기 윤박 교수 살해 사건에 얽힌 세 명의 여성 용의자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41
한정현 지음 / 현대문학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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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다가 말았던 소설을 다시 읽는 경험은 내겐 최초의 사건이다. 물론 읽기위해 샀던 책이니 작가와 작품에 대한 애정이 없던 것이 아니었지만 오늘의 이 나라 정치현실로 이어지고 있는 해방된 후 미군정 치하의 황망한 역사적 사건들에 대한 분노의 피로감이 반복되는 것을 조금은 피하고 싶었던 까닭이었던 것 같다.

 

그러다 작가의 산문집 환승 인간을 읽게 됨으로써 기억의 한 구석으로 미뤄두었던 이 소설을 다시 읽어야겠다는 의욕이 살아났다. 아마 산문집에 피력된 의도들 - 들끓는 어떤 것들, 어쩌지 못하는 슬픔들에서 비롯되는 복수심 등 - 이 작가의 소설 속에 숨겨져 보관되었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왜 이 문장을 썼을까? 이 글은 어떤 생각을 바탕으로 하고 있을까? 에 대한 조금 더 다가선 읽기가 가능해진 것이다. 이 소설을 조금은 다른 방식으로 읽을 수 있다고 여기게 되었다는 것이다.

 


소설 속에는 빛이 사라지면 너에게로 갈게라는 문장이 몇 차례 반복적으로 등장하는데, 이 글은 스웨덴 작가 욘 아이비데 린드크비스트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Let the Right One in 의 한 대사이다. 작가 한정현에게 의외로 많은 생각을 떠오르게 한 영화의 한 장면이었던 모양이다. 영화를 보던 중 지진을 느꼈을 때 오직 자신만이 영화관에 홀로 있음을 인식하게 되고 이어지는 기억의 연쇄들, 어렴풋 그 상황 속에 있는 한 인간의 내면을 생각해보게 되었다. 동일한 느낌은 불가능하겠지만 말이다.

 

소설은 혐오와 불의, 역겨움을 상징하는 한 인간을 처음부터 살해하고 시작한다. (물론 추리의 형식미이기도 하겠지만) 내가 썼더라도 이렇게 시작했을 것이다. 죽어 마땅한! 일제치하에 미국 유학을 다녀온 덕분으로 미군정에 달라붙어 대학 강단 권력을 행세하며, 지위를 이용하여 여성, 제자 등 그들의 능력과 성()을 갈취하는 파렴치한이다. 제자의 글을 마치 관행인 듯 자신의 글로 도용하면서 능력을 착취하고, 한 때 자신의 집 가정부였던 여성의 과거를 빌미삼아 성노리개 취급하며, 미군정의 위세를 이용하여 자기 이익에 방해되면 좌익몰이 놀이로 타인의 파괴를 일삼는 인간이다.

 

피살된 교수 윤박은 미군으로부터 살해되었음이 당사자의 자백으로 이미 밝혀져있으나, 친미의 탈을 쓴 일제부역자들인 우익 기생권력은 이러한 분께서 동료인 미군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것이 밝혀지면 괴소문이 서울 휩쓸 것이라며 좌익세력에 뒤집어씌울 기회로 삼는다. 살해 용의자로 윤박과 관련된 세 여인을 지목하고 일본 경찰의 개였던 말단 형사출신이었으나 종로경찰서 수사팀 실권자가 된 주구(走狗)가 범죄 조작을 지휘한다. 범인인 미군은 일찌감치 본국인 미국으로 보내버리고 좌익세력의 붕괴를 위한 공작에 착수하는 것이다. 조국 문학의 근대화를 위해 돌아온 명망있는 학자를 살해한 마녀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소설은 커다란 두 개의 축을 가지고 있는데, 살해용의자로 지목된 세 여성의 삶과 관계를 추적하는 과정 속에서 억압받는 당대 여인들의 모습이 흐르고, 한편으로는 이 과정을 수사하는 검시의인 가성과 기자 운서의 서로 함께 빛나는 삶의 동반자로서의 믿음, 사랑의 이야기가 한정현표 낙관, 현실에 대한 바른 직시에 기초한 진짜 삶의 실천을 현시한다. 아마 이 두 축이 교호하는 중심 소재인 피살된 윤박의 제자 현초의가 쓴 어린 마녀들, 마고의 이야기인 소설 <마고>와 한정현의 소설 마고가 결합하여 억압과 불의에 굴복하지 않는 여성들, 마녀로 낙인찍힌 여성들이 빼앗긴 모든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그들만의 낙관을 말한다. 그것은 비록 이겨내지 못하고 지켜내지 못한 것일지언정 기억하고 말하고 있음, 바로 가희가 가성으로, 가성이 다시 운서로 여러 존재로 환승하며, ‘무조건 살아있음의 의지일 것이다.

 

폭격으로 인해 밤중에 한낮 같은 빛이 생긴 거리를 보며 가성은 이렇게 중얼거렸다.  빛이 사라지면 너에게로 갈게.’” -186

 

작가의 말처럼 이 소설은 여성,퀴어들의 사랑 이야기이기도하지만 언어가 비껴간 자리에서 사라지는, 혹은 오해되고 숨겨지는 이야기들인 미군정기의 폭력의 이야기이며, 불의한 권력에 의해 배제된 사람들의 저항과 고발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소설의 여성들이 너무 많이 죽는다. 그런데 이를 지키지 못한 사람들의 슬픔은 무기력한 애수가 아닐 것이다. 아마 더욱 단단해진 복수를 향한 슬픔이 아닐까? 대낮의 작열하는 태양빛, 미군의 초토화 작전 하에 비오듯 퍼붓는 폭탄의 눈부신 섬광이 사라지면 나는 너에게로 가리라.”는 가성의 눈에 가득 들어 온 어디선가 떠오른 낮달, 그 기억이 살아 세대를 그침 없이 이어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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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니가
찬쉐 지음, 김태성 옮김 / 열린책들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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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럽고 악취나지만 빠져나올 수 없는 소설,

-열악한 뇌세포의 강제 노역을 통해서라도 읽을 가치가 있는 가히 영묘한 작품이다!


 

소설은 도입부에서 배경이자 제재(題材)이며 상징적 주제어이기도 한 황니가(黃泥街)’를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황니가는 아주 더럽고 지저분했다....하늘에서 항상 검은 먼지와 더러운 불순물이 쏟아져 내렸기 때문이다....1년 사계절 내내 시시각각 떨어져 내렸다.“ 서사가 어떻게 전개될지 예견되듯 소설은 시종 악취와 더러움, 징그러움과 혐오를 맴돈다.

 

거리는 너도나도 마구 갖다버린 쓰레기로 넘쳐나고, 황니가의 인간들이 내지른 똥과 오줌이 넘쳐흘러 고인 똥물이 찌는듯한 더위로 끓어올라 악취가 진동하며, 구더기와 초록머리 파리, 모기떼가 득시글댄다. 아마 이렇게 황니가의 환경을 옮기기 시작하면 역겨움으로 구토가 일어나고 없던 질병도 전염될 정도이다. 소설은 바로 이러한 양상으로 인해 발생하는 질병과 죽음을 타인에 대한 음모와 질시, 그릇된 확신, 그리곤 자연물에 깃든 미신적 허상에 책임을 전가하고, 거주민 자신들의 방기를 결코 인지하지 않는 듯하다.

 

고양이, 개들의 사체가 방치되어 썩어가며 내는 완강하고도 침투력 강한 냄새가 지면을 넘어 풍겨 나오는 것처럼 느껴질 만큼 머리를 뒤흔들게 된다. 집들에는 쥐가 들끓고, 검은 독버섯이 사방에 주렁주렁 매달리며, 천장에서는 바퀴벌레가 우수수 떨어지고, 곳곳에 구더기가 들끓는다. 그런데 황니가의 사람들은 이러한 상황에 이렇다 할 개선을 위해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으며, 오로지 자신들의 외부 요인에 어떤 문제나 해결책이 있는 듯 행동한다. 이들이 모여 하는 말은 터무니없이 뜬금없다. 동지들 이 문제의 성질은 아주 심각합니다.”, 그래 황니가의 실상은 정말 너무 심각하다는데 동의한다. 그런데 여기에 대응하는 원인의 추정은 완전 동문서답에 가깝다. 도시의 커다란 종이 밤새 미친 듯이 울려 댔어요.”, 종이 울린 것과 황니가에 닥친 역병과 주검들, 온갖 해충과 질병원들의 창궐과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것일까?

 

소설은 왕쯔광 사건과 왕쓰마 사건이라는 두 개의 사건이 서사를 이끄는 소재로 이용되고 있는데, 이 또한 황당하기는 마찬가지다. 전자는 황니가의 실상을 조사하려 왔던 인물로 추정되는 존재가 남긴 황니가의 회생불가능한 더러움에 대한 지적이 야기한 불안이었다면, 후자는 한 존재의 죽음 또는 실종에 대한 실존과 부존의 설왕설래이다. 왕쯔광 사건이 인심을 뒤숭숭하게 하고 있다는 황니가 사람의 말은 마치 문제에 대한 진지한 이해처럼 보이지만 엉뚱한 진단으로 치닫는다. 노선문제는 중대하게 시비를 가려야 할 문제입니다.”라며, 사건에 대한 문제제기와 같이 황니가의 오염된 환경과 질병의 관계에 대한 인식이 아니라 정파적 노선 문제가 되어버린다.

 

한편 왕쓰마를 실재했던 인물이 아니라 허구적 인물, 부재했던 가상의 인물로 처리함으로써 그 죽음 또는 실종의 규명이라는 본질의 차원은 사라지고 만다. 작가는 이 두 소재로부터 공허한 정치적 논리를 비난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본질을 엉뚱하게도 정쟁으로 돌리거나 사실성, 실재성을 부인하며 가짜, 환상으로 몰아가며 문제를 직시하지 못하게 하거나 책임을 회피하는 부패한 정치의 일상적 난맥상에 대한 지적일 것이다. 사실 이 소설을 이렇게 명백한 의미로 해석한다는 것은 오만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실제 등장하는 인물들의 행위에서부터 똥 냄새, 역병, , 박쥐, 파리 구더기, 바퀴벌레, , 거미, 고양이, , 인간들에게 발생하는 기괴한 질병과 죽음, 세상 모든 것을 쩍쩍 갈라지게 할 만큼 뜨겁게 작열하는 태양, 지긋지긋하게 내리는 비, 그치지 않고 사납게 부는 바람, 그리고 기괴한 상황들이 파편처럼 깔려 독자의 인식망에 잡히지 않는 의미들을 음험하게 발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 상징적 소재들이 암시하는 의미들을 해독하려다가는 아마 이 소설 읽는 것을 얼마간은 포기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에 이르면 풀가동한 뇌신경세포들이 녹작지근해져 더 이상은 작동하려 들지 않는 상태임을 느낄 정도로 심취했으니 말이다.

 

찬쉐가 자신의 작품에 대해 결코 논리적 이성에 의해 덤벼들지 말라.’라고 했다든가? 그러니 감정적 직관, 있는 그대로의 전달되는 느낌에 의해서 읽으면 족하다는 말일 것이다. 민감하게 분석적으로 읽으려는 태도를 버리면 아마 이 소설은 그의 말처럼 어떤 인식을 가져다준다. 인간 사회, 혹은 특정한 사회(중국)의 정치적 현실에 대한 은유로도 읽힐 것이며, 1960년대의 씻기 어려운 깊은 인민의 상처를 만들어낸 문화대혁명의 폭력적 광기와 난무하는 무질서의 파국, 혼돈의 시대에 대한 자성과 비판으로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누군가의 집 창문에서 기어 나오는 뱀을 보았다면 그 집은 독사를 기르는 집으로 지목되고, 파리를 먹기 위해 등을 켠다는 근거없는 소문으로 밤에 등이 켜진 집 문밖을 어슬렁거리며 돌멩이를 던지면, 후일 그 돌멩이를 던진 행위는 일종의 음모가 되어 조사 대상으로 변질된다. 보잘 것 없으며, 논란의 대상이 될 여지가 없는 것들이 역병과 죽음의 원인과 결합되어 음모와 조사 대상의 사건으로 확장되고 쓸데없는 행정과 사법의 남용으로 이어진다. 돌멩이를 던진 일이 일종의 음모라고 생각해. 나는 이미 결심이 섰어. 이 일을 조사해서, 물이 마르면 바위가 드러나듯이 진상을 밝히고 말겠어. 우리는 누군가에 의해 계산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 희화된 정파적 생각과 행위는 그야말로 우습고 교활하기 그지없지만 실제 우리네 정치의 실상과 다르지 않음에 실소를 터뜨리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를테면 왕쓰마가 실제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겠나?”라는 구청장의 물음에 황니가의 한 인물은 물론이지요. 황니가처럼 복잡한 동네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이곳은 정말 괴상한 동네입니다. 예컨대 아직도 바퀴벌레를 먹으면서 생활하는 곳이 있다는 얘기를 들어 보셨나요?”라는 황당한 답변이 돌아오는 식이다. 답변에는 황니가의 실상이라는 일말의 진실이 담겨있지만 물음에 대해서는 아무런 진실도 답변된 것은 없다.

 

어쩌면 답변아닌 답변을 통해 상황의 본질에 대한 이해를 촉구하는 것으로 이해 할 수도 있으며, 바로 이 부적당해 보이는 것의 실체에 뛰어듦으로써 비로소 실체를 인식할 수 있다는 작가의 요청이라 이해할 수 도 있을 것 같다. 만일 작가의 의도가 이런 것이라면 정말 영묘한 이야기라 아니 할 수가 없다. 이 점이 구역질나고 추함에도 이 소설을 우아하고 품격있는 작품으로 느끼게 하는 바로 그 요소인지도 모르겠다. 때문에 무수한 사유의 함정들에도 불구하고 이 부조리하고 절망의 양상들로 채워진 소설은 기꺼이 열악한 뇌세포에 고된 노역을 강요하며 읽을 이유가 충분하다 할 것이다. 우리네가 처한 작금의 정치적, 문화적 곤경이란 바로 이 소설의 이야기처럼 황당무계, 기상천외한 맹랑함이라 할 것인지도. 이 작품을 읽다가 시선을 돌린다면 그건 신성모독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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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눌 수 있는 갈등과 나눌 수 없는 갈등

- 갈등의 번역과 분열주의 생산 관계에 대해서



오스트리아의 사회철학자 이졸데 카림(Isolde Charim)’이 쓴 나와 타자들(Ich und Die Anderen)을 읽어가던 중, 현재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는 분열과 퇴행의 양상들이 왜 나타날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하나의 요인을 발견하게 되었다. 카림은 사회학자 앨버트 허시먼(Albert O. Hirschman)’이 정의한 정치, 사회적 갈등으로서 나눌 수 있는 갈등과 나눌 수 없는 갈등을 통해 민주주의가 어떻게 껍데기뿐인 포스트민주주의, 즉 비민주적 사회로 역행하게 되는 지를 보여주고 있다. 흥미로운 고찰임과 동시에 작금의 한국사회를 진단하는 데 비교적 명쾌한 영감을 주기에 그 소회를 남겨둔다.

 


나눌 수 있는 갈등은 경제적 이익, 분배문제와 같은 정량화 가능한 이익에 관한 갈등을 말한다. 따라서 이러한 갈등은 눈에 보이는 물질적 갈등이기에 인정이나 교환, 타협이 가능한 갈등으로서 어떻게든 봉합될 수 있는 것이다. 반면에 나눌 수 없는 갈등이란 세계관, 정체성, 문화, 가치를 둘러싼 갈등으로 측정할 수 없어 따라서 어떤 협상이나 타협의 정량적 기준을 지니지 못한다. 그저 인정하거나 불인정하거나라는 극단만이 존재하며 따라서 화해 불가능한 국면으로 치닫기 쉬운 갈등이다.

 

이 정치적 갈등에 대한 두 개의 서로 다른 갈등의 정의가 왜 중요한가하면 바로 시민의 삶과 직결된 정책으로 표상되지만 시민적 체감으로 인지할 수 있는 계층이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 두 갈등의 결과는 점진적으로 시민의 경제적 삶은 물론 각종 사회 안전망과 인간 존엄성을 파괴하는 결과를 초래하며 민주주의의 요소들을 훼손, 되돌릴 수 없는 지경으로 퇴행시킨다. 결국 이것이 시민의 삶을 나락으로 떨어뜨리고 국가라 부르는 시민의 통합적 상징 이미지를 전락시킨다. 아마 왜 현재의 정권이 재난에 무감하고 무책임한지, 그들이 왜 오랫동안 쌓아올린 사회안전망을 해체하고 시민의 목소리를 무시하는지 그 이면의 본질을 파악할 수 있기에 이 정의는 더욱 의미 깊다. 그들은 이러한 무책임한 정치를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눌 수 없는 갈등은 협의, 타협할 수 없는 것이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 정치는 나눌 수 있는 문제를 푸는 일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가치, 정체성, 문화를 다루는 일에 관여해야 하며, 이 해소할 수 없는 것들을 다루어야 한다. 나눌 수 없는 갈등을 나눌 수 있는 갈등으로 번역하여서라도 이를 해결하여야만 사회의 갈등과 분열을 중재하고 타협할 수 있다. 그래야 시민 대중은 통합될 수 있으며, 국가는 혼란을 멈출 수 있다.

 

한국사회는 선진 여러 나라에 비해 여전히 미흡하지만 시민의 피를 댓가로 그나마 작금의 사회안전망이나마 갖추고 인권을 신장시켜 온 것들이다. 가장 약한 사람들도 사회적 안전에 대한 권리를 갖도록 건강보험, 최저임금을 비롯하여 여러 복지 체제를 부여했다. 이 권리를 통해 시민은 존엄성을 갖게 되었다. ‘존엄!’, 그렇지만 이 깨지기 쉽고 스스로는 안전을 느끼지 못하는 감정은 확인받는 행위를 요구했다. 나눌 수 없는 사회적 안전, 인간존엄과 같은 나눌 수 없는 것들을 나눌 수 있는 물질적 제도로 확인한 것이다. 이 확인이 곧 복지국가의 형상이며, 민주주의 실현이다. 존엄, 자부심같은 나눌 수 없는 것들이 최저임금이나 의료보호로 나눌 수 있는 확인으로 보증된 것이다.

 

동어반복이 될 수도 있겠지만, 만일 이 나눌 수 없는 것들을 훼손하거나 파괴한다면 무엇이 파손되는 것이겠는가? 사회통합을 위한 요소였던 존엄과 평등의 가치, 정체성 등이 손상을 입음으로써 시민이 분열된다. 즉 가치와 세계관, 정체성이 다른 사람들이 서로 배제하고 분리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의료보험의 혜택을 축소하는 것, 각종 사회적 약자에 지원되던 예산을 삭감하는 것, 최저임금을 물가 인상률에 현저히 밑도는 수준으로 결박하는 것, 노동자의 단결권을 부정하며 폭압으로 물아 부치는 것, 이러한 일련의 행위들은 나눌 수 있는 갈등으로 번역되어 타협과 통합을 이루었던 근본을 파괴한다. 민주주의 정치에서 중대한 하나의 축을 찢어발겨 훼손함으로써 나눌 수 없는 갈등의 국면을 봉쇄하려 하고 있다. 즉 민주주의의 중요한 가치를 부인한다. 그리고는 이 갈등에 대한 목소리를 적대화하여 케케묵은 빨갱이, 공산당의 논리라며 파렴치를 서슴지 않는다.

 

이들이 이러한 지식을 알고 실행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들이 지난 16개월 남짓 보여준 모든 정책과 정치, 행정 행위에는 무책임과 회피가 일관되게 표현되었다는 점에서 이들이 갈등의 한 측면에 얼마나 소홀한 지, 혹여 무지한지가 드러난다. 그럼에도 드러난 사실만으로 이들이 지극히 면밀하게 사회통합을 해체하여 분리주의적 분열을 획책하고 있음을 확신할 수 있다. 이들이 제일 먼저 들고 나온 것이 대기업 감세와 초부자의 증여세면제 등 최상위 부유층과 그 나머지 99퍼센트의 시민대중과의 두 국민 정책이 단적인 증거가 될 것이다.

 

시민대중은 이러한 작태에 대해서 분노하고 격노와 아픔, 실망의 감정을 표시하고 이를 대의 기관인 정당과 정권에 관리해줄 것을 호소하지만 권력은 이 감정들을 엉뚱한 곳에 탕진하거나 방치하면서 약화 상실시켜버리고 있다. 즉 시민들은 자신들의 목소리가 경청된다는 느낌을 전혀 받지 못하고 있으며, 고려받는 느낌조차도 없다. 대의 기능이 작동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현재의 권력은 대의 기능을 전혀 인지하지 않으며, 권위주의적 권력 놀음에 취해 자신들의 주머니 이익에 몰두하고 있을 뿐이다.

 

강력하게 획책하는 분열주의가 이들의 불의와 부패를 방어해 주리라 믿는 까닭이다. 때문에 이들은 시민 대중 일반에 대한 그 어떤 책임도 느끼지 않으며, 분리한 대다수의 시민의 삶에 관심을 느끼지 못한다. 그래서 구경꾼 코스프레와 쇼의 연출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이태원 참사, 오송 지하차도 참사, 지금 벌어지고 있는 잼버리 대회의 무책임한 운영은 재난에 대한 애초의 관리 의지 없었음을 입증하는 극히 일부 노출된 사례일 것이다. 아마 이러한 재난의 발생과 무책임은 계속될 것이다. 이들에게는 나눌 수 없는 갈등에 대한 이해가 없거나 이를 파손할 의지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들이 간과하는 것은 나눌 수 없는 것, 즉 가시적이고 정량화하기 어려운 합리적 이성으로 작동할 수 없는 것은 존중하고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는 것이라는 환상인 것 같다. 정치는 순수하게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작동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주주의 정치의 목적은 합리적 합의가 아니다. 이성적 합의 뿐 아니라 감정적 합의를 생산하는 것이 민주주의 정치이다. 사회갈등은 단순한 전략적 이익의 갈등이 아니라는 점이다. 임금협상의 예를 보더라도 여기에는 사회적 관심, 인정, 정의에 대한 생각 등 이성 외의 요인들이 늘 개입한다. 이처럼 실제 나눌 수 있는 갈등에서조차 나눌 수 없는 갈등이라는 기본적이고 근본적인 불일치의 동기가 놓여있는 것이다.

 

민주주의 정치는 합리적이지만 동시에 비합리적이고 감정적일 수밖에 없는 것들의 타협을 중재하고, 각 정파들 사이에서 감정의 타협을 완성시키는 것이어야 하는 것이다. 사회적 분열을 봉합하고 시민대중을 갈라치기하는 것은 곧 민주주의를 파기하고 독재정치를 하겠다는 선언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분열 획책의 중지와 통합을 위한 민주정치로의 복귀이다. 더 이상의 파괴는 안 된다. 더 이상의 무책임과 무관심, 방관, 거짓말은 안 된다. 나눌 수 없는 갈등에 대한 성실한 번역 작업에 임하는, 일하는 정부가 되어야 한다. 이 어려운 노력을 회피하는 게으른 권력은 필연적으로 몰락하게 되어있다. 30퍼센트의 우중이 언제까지 이러한 진실을 외면하고 맞장구를 쳐줄지는 단언 할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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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테뉴의 에세(Les Essais)21

우리 행동의 변덕스러움에 관하여를 읽으며

 


Essais 2-1 에서


작금의 권력은 가장 흔하고도 명백한 악덕을 보여주고 있다. B.C. 1세기의 시리아 출신 그리스 희극작가인 푸블리우스는 재고(再考)할 수 없는 결심은 가장 나쁜 결심이다.”라고 말했으며, B.C. 4세기의 그리스 정치가인 데모스테네스는 모든 덕의 시작은 반성과 숙고이며, 그 끝과 완성은 확고부동이다.”라 말했다고 몽테뉴는 그의 생애 저술인 에세에 인용하고 있다.

 

다시 말해 그릇된 결심을 독단적으로 강행하고, 반성과 숙고란 것을 알지 못한다는 점에서 현재의 권력은 악이라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몽테뉴의 에세(Les Essais)21장인 우리 행동의 변덕스러움에 관하여를 읽으며 현실의 권력이 자행하는 행태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기에 몇 자 적어놓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진솔한 위대한 철학자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온갖 모순을 발견한다.

 

Michel Eyquem de Montaigne, 1533.2.28 ~ 1592.9.13



자기를 주의 깊게 살펴보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자기에게

또 자기의 판단력에서조차 그 같은 다변과 불일치가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나에 대해 절대적으로 확고하고 단순하게 한 마디로 말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

 

그는 자신의 정신이란 온갖 잡다성과 모순이 너무도 천연덕스럽게 공존하고 있음을 이해한다, 인간은 자기와 자기 자신 사이가 자신과 남 사이만큼 차이가 있음을, 즉 항상 같은 인간으로 있기란 불가능하며, 서로 모순되는 것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모든 일에는 반성과 숙고라는 깊은 사려를 통해 도출되어야 함을 역설하는 것이다. 그런데 작금의 권력은 숙고를 통한 확고부동의 길을 알지 못하는 듯하다. 모든 정책에 어떤 지침이나 분명한 원칙을 발견할 수 없다.

 

모두 자의적이며 임기웅변의 권모술수만이 행해지고 있다. 이랬다저랬다 하는 것이 범인의 흔해빠진 본성이며 명백한 악덕임을 벗어나지 못하는 행위로 국가를 통치하려든다. 어떠한 것도 확고부동할 수 없음을 안다면 잘못된 정책과 견해는 재고될 수 있어야 하며, 또한 반드시 바로잡아 시행되어야 한다. 사실 그 어느 정권보다 무능력한 폐쇄 집단 출신의 인간들이라면 더욱 자신들을 돌아 볼 수 있어야 한다.

 

이들이 강압적으로 추진하려드는 정책들에는 어떠한 원칙이나 질서도 없다. 때문에 정책 행위들에 아무런 일관성도 없으며, 모든 일들 사이에 빈틈없는 연관성과 질서가 있어 국민적 연대를 통한 추진력을 지니지 못하고 있다. 그들이 어디로 가려는지, 가려는 목적지는 있는지를 어떤 국민도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 정권에는 어떤 확실한 지침이나 명료한 국가 청사진이 없는 것 같다. 자신이 온갖 모순덩어리임을, 결국 인간에 불과함을 인식해야 한다. 종잡을 수 없는 잡다한 조각으로 구성된 미물에 불과함을 말이다. 어찌 재고가 없을 수 있다는 말인가? 마치 전지전능한 신권을 지녔다는 듯, 자신의 무오류를 주장하는 것이 바로 독재이다. 독재는 자신의 불의로 인해 민중의 언로를 자기 입맛에 맞추려 들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무오류가 오류투성이 임이 만천하에 드러나기 때문일 테니 말이다.

 

지금 권력의 정책들은 주소도 목적지도 없으니 길을 헤매고 혼돈으로 우왕좌왕, 좌충우돌로 정쟁으로 왜곡되기 일쑤고, 민생과 국가 발전의 길은 좌초되어 침몰하고 있다는 지표가 도처에서 경고등을 발하고 있다. B.C. 1 세기의 그리스 철학자 루크레티우스는 주벽(酒癖)으로 취한 인간의 행위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술의 위력이 스며든 인간의 지력 흐릿해짐과 험상궂은 눈, 그리곤 고함과 싸움질로 치닫는 거칠고 동물적 악덕 행위로 말이다. 한 국가의 리더가 자신의 주벽을 뻔뻔하게 시민들이 오가는 길에서 과시하는 파렴치함을 보일 때 그것을 루크레티우스의 경고와 결합시켜 생각하지 않을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허황된 자부심이 얼마나 인간을 지각없게 만드는가! 지금의 한국사회는, 그 시민들은 반성도 없으며, 숙고도 없고, 그 어떠한 확고부동하고 사려깊은 정책도 없는, 게다가 술잔치로 세월을 보내는 권력이 불안하며 그곳에 차가운 눈초리를 보낼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나른해진 사지로 건들거리며 다리는 꼬여 비틀거리는 꼴을 보는 것은 국민적 자존감에 상처를 준다. 깊은 사유를 통한 끝에 도달한 명료한 목적이 없으니 구체적 행동들이 제어되지 않는 것, 통제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모든 재난에 대한 대응의 실패와 회피, 외교적 무능과 실수의 연발, 왜곡된 언론관에 의한 국민의 목소리에 대한 탄압적 폭력행위는 바로 이러한 자기반성과 숙고 없음, 불완전한 존재에 대한 겸허한 인간적 자기 인식 없음으로부터 출현하는 비정상적이고 뒤틀린 악일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전체의 형태를 염두에 둘 수 없으니 부분들이 정돈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이다. 때문에 각 통치 기구의 상호 네트워크의 유연한 연결을 비롯한 거버넌스(governance)의 실패는 불가피한 것이다. 이것이 현 정부의 난맥상이다. 약간만 돌려보거나 조금만 다르게 봐도 온갖 모순이 발견되는 것이 인간이다. 하물며 국가의 그 복잡다단한 정책들은 어떠하겠는가?

 

잔인성의 표본인 로마의 네로도 한 인간을 사형에 처하는 서명을 하여야 하는 것이 너무 가슴 아퍼 내가 글씨를 쓸 줄 몰랐다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말했다고 한다. 인간의 정신이란 이처럼 변덕스럽고 모순으로 뭉쳐있음이다. 제아무리 지혜롭다한들 인간이다. 지혜란 인간 본연의 조건들을 이길 수 없는 것이라고 한다. 너무도 안타까운 마음에 몽테뉴를 빌어 쓴소리를 끄적이게 됐다. 세네카가 말했다.항상 같은 인간으로 있기란 매우 어려운 일임을 알라.”고 말이다. 반성하고 숙고하며 그 완성으로 확고부동한 정책을 펼치는, 다른 의견을 경청하고 자신의 믿음을 재고할 수 있는 권력으로 쇄신(刷新)하는 인간이기를, 또한 권력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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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 - 나이듦의 의미와 그 위대함
시몬 드 보부아르 지음, 홍상희.박혜영 옮김 / 책세상 / 2002년 7월
평점 :
품절



우리에게 생명을 주었던 그 첫 시간이 그것을 거두기 시작했다

(Prima, quae vitam dedit, hora, carpsit)” 

- 세네카, 아우구스트, 몽테뉴 ,장켈레비치, 죽음, La mort에서

 

도래하지 않은 먼 미래의 사건으로서 노쇠를 자신에게는 오지 않을 비현실로 여기는 인간적 시간 사유의 한계를 지적하는 것으로 책의 감상을 시작하는 것이 타당한 것 같다.  책의 서론에 적절한 이야기가 있는데,   한 농부는 자기의 늙은 아버지를 가족과 격리시켜 놓고 조그만 여물통 속에 음식을 담아 먹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자신의 어린 아들이 나무판자를 짜 맞추는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다. 어린 아들은 이렇게 말한다.  이건 아빠가 늙었을 때 쓸려고 만드는 거야.’


필요한 것을 조달할 능력이 없는 노인은 언제나 짐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알고 싶지 않아도 노인에게 설정하는 조건이 바로 자기 자신의 내일의 인간의 조건임을 알아야 한다는 교훈일 것이다. 절대 자신에겐 노쇠가 찾아오지 않을 것이라 여기지만 그 누구도 이를 피한 인간은 없다.(젊어서 우연한 질병이나 사고에 의해 죽지 않고서는)

 

시몬 드 보부아르가 노년에 관한 에세이인 이 책을 준비한다고 했을 때 사람들은 참 이상한 생각도 하셨군요!”라고 비아냥거리며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말한다. 이 말에는 대다수의 인간이 노인이 된다는 사실, 즉 삶의 이 자명한 큰 변화를 사전에 직시하는 사람이 거의 없음을 의미한다. 저런 일은 내겐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터무니없는 망상은 늙는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만 관계있는 것으로 몰아간다.

 

이 책은 노년에 이른 사람들의 운명이 어떠한가를 밝히는 것을 본질적 목표로 한 에세이다. 그것은 시공을 넘어 민족지학적, 인류사적 자료들의 탐색, 문학과 사회학적 각종 지표들과 저술들, 정치경제적 국가별 정책들을 아우르며, 노년을 대하는 사회와 개인의 이해를 생물학적 현상을 넘어 문화적 현상을 포함하는 총체적 조망을 한 770여 쪽의 묵직한 노작이다.

 

사람들, 우리네 사회는 노년에 대해 상당히 이중적이고 모순적 시선을 가지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마치 평등성이라는 윤리를 으스대듯 모든 차원에서 젊은 사람들과 똑같이 취급한다. 그러나 막상 경제적 지위나 욕구와 감정들에 대한 판단으로 다가서면 아주 차별적인 분류로 범주화하고 이질적 종류의 인간으로 취급한다. 이 사회는 노인들이 예전에 가졌던 인간의 자질과 결점들을 고스란히 가졌음을 모른 체하며 노인이 똑같은 욕망과 감정, 요구들을 표명하면 빈축을 사게 된다. 노인이 사랑하는 것은 추하며, 성행위는 혐오스러운 것이 되고, 무엇보다 노인은 평정심을 유지해야 하는 존재이기를 요구한다.

 

노년기란 모든 인간의 직접적인 가능성의 일부라는 것을, 자신들의 내면에 이미 미래의 노인이 살고 있음을 생각지 못하는 이러한 가치관과 관점들은 마치 자신들은 결코 늙지 않을 것처럼 여긴다. 그러나 노년은 이렇게 단순하게 인간의 신체적 감각의 본질에서 비롯되는 문제만은 아니다.

 

사실 노년기에 접어드는 분명한 연령 계층이란 것이 존재치도 않는다. 시작되는 순간은 명확히 정의되어 있지도 않을뿐더러, 시대와 장소, 사회적 계층에 따라 엄청난 차이와 변화가 있다. 잘나가는 시인, 고위 정치권력 계급, 축적된 상당한 부를 지닌 은퇴자 등 사회적 부와 권력이라는 지위를 지닌 자들은 노인에 속하지 않는 것처럼 노년이란 나이가 많은 특정 개인에 대한 보편적 호칭이 아니다. 이들 계층은 무덤에 들어 갈 때까지 사회적 지위와 행세를 하며 노년을 인식하지 않은 채 죽는다. 어쩌면 장켈레비치의 말처럼 이러한 자들은 영원히 산 존재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자신의 죽음이란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것이니 말이다.

 

OECD 노인 자살률 1위를 놓치지 않고 유지하는 국가가 바로 한국이다. 고려장이란 옛날 고대의 풍습이라며 마치 지금 한국사회는 그 같은 문명이전의 비윤리적 야만성과는 거리가 먼 사회라고 자기기만을 떨어대지만 이 지표는 사실 세계에서 가장 냉혹하고 반도덕적인 차별사회임을 쉽게 반박하기 어렵게 한다. 노인에 대한 사회안전망은 지극히 취약하고, 생활에 필요한 것을 조달할 능력이 없는 노인 인구가 증가하고 있다. 말년의 불행이 휩쓰는 사회, 그것은 지금 살고 있는 사회가 착취제제임을 강경하게 고발하는 하나의 표징이라 할 수 있다.

 


노동인구로 활동하여 획득한 소득의 많은 부분이 최상위 계층의 주머니에 들어감으로써 사회안전망의 자원이 되어야 했던 것들이 양극화를 심화시키는 사적 부가 되는 자본주의의 착취적 속성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이윤에 종속된 문명은 인간이라는 도구도 이익을 가져오는 한에서만 관심의 대상이므로 늙은 여자와 남자는 사회적 관심에서 배제된다. 현실이 이러함에도 마치 노년을 항해를 다 끝마치고 도착한 항구의 감미로운 즐거움을 떠벌려 예찬하는 책들이 염치없는 거짓말을 늘어놓는 것을 보는 것이 어렵지 않다.

 

실제 대부분의 수많은 노인들에게 사회가 부과하는 생활수준은 너무도 비참해서 늙고 가난한이라는 표현은 이제 중복 표현에 불과할 정도이다. 천박한 극우집단의 정치적 앞잡이가 된 자유주의 수구 경제학자는 이렇게 지껄인다. 노년의 그 많은 여가시간에 뭐라도 창의적이고 생산적 활동을 하지 않는 게으름 탓이라고 말이다. 여가시간이 많다고 새로운 가능성이 열리는 것이 아니다. 대부분이 해방되는 순간 그 자유를 활용할 수단을 빼앗기기 때문이다. 작금의 이 사회의 정책이 소수의 특권층만을 위한 것이다보니 대다수인 인민을 위한 정책이 극성스럽게 훼손되거나 사라지고 있다.

 

인간은 절대로 자연 상태에서 사는 것이 아니다. 노년기에도 한 개인의 지위는 그가 속한 사회가 그에게 부여하는 것이다, 노년기라 생산 활동에서 배제시키고선 그 배제됨을 비난하는 특권층의 악의가 날로 기승을 부린다. 지금도 고독과 권태 속에서 그럭저럭 목숨을 부지하며, 인수를 거절당한 불량품으로 살아가는 노인들이 즐비하다. 이 사회의 문명적 실패의 징후이다. 아니 야만의 실체적 표지이다. 한국 사회는, 특히 현재의 정치지배 권력은 이러한 현상에 대한 이해도 없으며 오히려 노년의 비인간화를 윽박지른다. 개인은 사회가 그에게 취하는 실제적이며 관념적인 태도에 의해 제약을 받는다.

 

이 책을 통해 우리사회의 현실을 판단할 수 있다. 무수히 노정되는 사회적 난점을 해결하기 위한 처방들과 사회가 책임져야 할 몫이라는 것이 무언지를 말이다. 이 사회의 중산층의 신화는 점점 노년을 타자화하며 자신들과는 무관한 대상으로 전락시킨다. 노화란 변화의 한 유형이다. 불가항력적이며 불리한 변화, 이러한 변화를 우리는 노화라 부르는 것이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성숙기 이후 뚜렷해져서 마침내는 확고부동하게 이르는 불리한 변화의 점진적 과정이다. 이를 피할 수 있는 인간은 그 어느 누구도 없다. 모두 노년기를 거치며 늙는다. 다만 노년을 맞게되는 방식이 계층에 따라 다를 뿐이다. 그 다름은 10%90%의 두 다름이다. 90%의 대다수 노인은 결코 황금인생이라거나 풍부한 경험을 지닌 예지의 인간이 아니다. 늙은 여자, 늙은 남자, 이들의 모습에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노인을 단지 비경제 활동 인구로서의 짐이라 인식한다면 우리 모든 인간의 미래 역시 비경제 활동인구가 될 것이다. 나이 많은 사람들을 부양할 책임을 맡음으로써 자신들의 미래를 오히려 확고히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문해 볼 일이다. 동물적인 생존, 그것은 죽음보다 못하다.”고 했다. 우리 사회가 노년의 인간들에게 죽음 보다 못한 인간으로 내치고 있는 중임을 각성해야 할 때이다. 노년은 다른 연령층처럼 사회적 목소리를 지니지 못한다. 그들은 그저 노인일 뿐이다. 설혹 그들의 목소리가 잡음으로 들려올지라도 그것은 결코 귀 기울여 들을 주제로 인식되지도 않는다. 그래서 더욱 다가가 들으려 애써야 겨우 들을 수 있다. 이러한 행위를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더 이상 문명인, 윤리적 인간이기를 멈추는 것이 될 것이다. 20, 40세에 자신이 노인이 된 것을 생각한다는 것은 마치 타인을 생각하는 것과 같을 것이다. 그럼에도 자신의 타인인 그 미래의 노인을 어루만질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이 인간이다. 우리는 인간이기를 너무도 많은 부분에서 놓치고 있다. 아니 놓으려 하고 있다.

 

책은 노쇠에 대한 어떤 환상적 수사로 기만적 찬사를 하는 엉터리를 말하지 않는다. 단지 노년의 모습 그대로, 그 자체를 삶의 한 순간으로 어떻게 지혜롭게 관리해 나갈지 개인적 태도의 사유를 돕고 있으며, 또한 사회, 문화적 정책과 기능, 역할에 대해 보다 총합적인 시각에서 접근할 수 있는 사례와 방법론들을 제공하고 있다. 노인을 인간 조건의 영역 밖에서 생각할 줄 모르는 인간의 오래된 한계를 자각하는 깨어남의 시간이 된다. 노화라는 불행의 표적이 된 삶을 어떻게 견디느냐에 대한 유익한 문화 산책의 시간도 될 것이다.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는 나이듦의 의미에 대한 이 위대한 저술을 모든 인간에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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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같다면 2023-08-04 17:4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대한노인회 회장이 ˝손찌검을 하면 안되니까 내가 사진이라도 뺨을 한대 때리겠다˝며 김은경 위원장의 사진을 때리는 장면을 보면서 경악했습니다

어제 오늘 머리속에 노년. 아름답게 늙는다는 것. 존경받는다는 것. 천박해지지 않는다는 것.. 이런 생각이 머리속에 가득하네요

필리아 2023-08-04 18:51   좋아요 2 | URL
이런 자들이야말로 노년을 예찬하는 사기꾼들이죠. 이들은 권력에 심취해 노년을 자기이익을 위한 선전물로 이용하는 파렴치한 그 이상이 아닐겁니다. 이들로 인해 다수의 약자인 노인들을 소외시키는 것을 정당화하는 일은 없어야겠지요. 이들은 결코 노인이 아닙니다. 이들은 노인을 착취하는 권력일 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