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눌 수 있는 갈등과 나눌 수 없는 갈등
- 갈등의 번역과 분열주의 생산 관계에 대해서
오스트리아의 사회철학자 ‘이졸데 카림(Isolde Charim)’이 쓴 『나와 타자들(Ich und Die Anderen)』을 읽어가던 중, 현재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는 분열과 퇴행의 양상들이 왜 나타날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하나의 요인을 발견하게 되었다. 카림은 사회학자 ‘앨버트 허시먼(Albert O. Hirschman)’이 정의한 정치, 사회적 갈등으로서 ‘나눌 수 있는 갈등과 나눌 수 없는 갈등’을 통해 민주주의가 어떻게 껍데기뿐인 포스트민주주의, 즉 비민주적 사회로 역행하게 되는 지를 보여주고 있다. 흥미로운 고찰임과 동시에 작금의 한국사회를 진단하는 데 비교적 명쾌한 영감을 주기에 그 소회를 남겨둔다.
나눌 수 있는 갈등은 경제적 이익, 분배문제와 같은 정량화 가능한 이익에 관한 갈등을 말한다. 따라서 이러한 갈등은 눈에 보이는 물질적 갈등이기에 인정이나 교환, 타협이 가능한 갈등으로서 어떻게든 봉합될 수 있는 것이다. 반면에 나눌 수 없는 갈등이란 세계관, 정체성, 문화, 가치를 둘러싼 갈등으로 측정할 수 없어 따라서 어떤 협상이나 타협의 정량적 기준을 지니지 못한다. 그저 인정하거나 불인정하거나라는 극단만이 존재하며 따라서 화해 불가능한 국면으로 치닫기 쉬운 갈등이다.
이 정치적 갈등에 대한 두 개의 서로 다른 갈등의 정의가 왜 중요한가하면 바로 시민의 삶과 직결된 정책으로 표상되지만 시민적 체감으로 인지할 수 있는 계층이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 두 갈등의 결과는 점진적으로 시민의 경제적 삶은 물론 각종 사회 안전망과 인간 존엄성을 파괴하는 결과를 초래하며 민주주의의 요소들을 훼손, 되돌릴 수 없는 지경으로 퇴행시킨다. 결국 이것이 시민의 삶을 나락으로 떨어뜨리고 국가라 부르는 시민의 통합적 상징 이미지를 전락시킨다. 아마 왜 현재의 정권이 재난에 무감하고 무책임한지, 그들이 왜 오랫동안 쌓아올린 사회안전망을 해체하고 시민의 목소리를 무시하는지 그 이면의 본질을 파악할 수 있기에 이 정의는 더욱 의미 깊다. 그들은 이러한 무책임한 정치를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눌 수 없는 갈등은 협의, 타협할 수 없는 것이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 정치는 나눌 수 있는 문제를 푸는 일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가치, 정체성, 문화를 다루는 일에 관여해야 하며, 이 해소할 수 없는 것들을 다루어야 한다. 나눌 수 없는 갈등을 나눌 수 있는 갈등으로 번역하여서라도 이를 해결하여야만 사회의 갈등과 분열을 중재하고 타협할 수 있다. 그래야 시민 대중은 통합될 수 있으며, 국가는 혼란을 멈출 수 있다.
한국사회는 선진 여러 나라에 비해 여전히 미흡하지만 시민의 피를 댓가로 그나마 작금의 사회안전망이나마 갖추고 인권을 신장시켜 온 것들이다. 가장 약한 사람들도 사회적 안전에 대한 권리를 갖도록 건강보험, 최저임금을 비롯하여 여러 복지 체제를 부여했다. 이 권리를 통해 시민은 존엄성을 갖게 되었다. ‘존엄!’, 그렇지만 이 깨지기 쉽고 스스로는 안전을 느끼지 못하는 감정은 확인받는 행위를 요구했다. 즉 나눌 수 없는 사회적 안전, 인간존엄과 같은 나눌 수 없는 것들을 나눌 수 있는 물질적 제도로 확인한 것이다. 이 확인이 곧 복지국가의 형상이며, 민주주의 실현이다. 존엄, 자부심같은 나눌 수 없는 것들이 최저임금이나 의료보호로 ‘나눌 수 있는 확인’으로 보증된 것이다.
동어반복이 될 수도 있겠지만, 만일 이 나눌 수 없는 것들을 훼손하거나 파괴한다면 무엇이 파손되는 것이겠는가? 사회통합을 위한 요소였던 존엄과 평등의 가치, 정체성 등이 손상을 입음으로써 시민이 분열된다. 즉 가치와 세계관, 정체성이 다른 사람들이 서로 배제하고 분리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의료보험의 혜택을 축소하는 것, 각종 사회적 약자에 지원되던 예산을 삭감하는 것, 최저임금을 물가 인상률에 현저히 밑도는 수준으로 결박하는 것, 노동자의 단결권을 부정하며 폭압으로 물아 부치는 것, 이러한 일련의 행위들은 나눌 수 있는 갈등으로 번역되어 타협과 통합을 이루었던 근본을 파괴한다. 민주주의 정치에서 중대한 하나의 축을 찢어발겨 훼손함으로써 나눌 수 없는 갈등의 국면을 봉쇄하려 하고 있다. 즉 민주주의의 중요한 가치를 부인한다. 그리고는 이 갈등에 대한 목소리를 적대화하여 케케묵은 빨갱이, 공산당의 논리라며 파렴치를 서슴지 않는다.
이들이 이러한 지식을 알고 실행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들이 지난 1년6개월 남짓 보여준 모든 정책과 정치, 행정 행위에는 무책임과 회피가 일관되게 표현되었다는 점에서 이들이 갈등의 한 측면에 얼마나 소홀한 지, 혹여 무지한지가 드러난다. 그럼에도 드러난 사실만으로 이들이 지극히 면밀하게 사회통합을 해체하여 분리주의적 분열을 획책하고 있음을 확신할 수 있다. 이들이 제일 먼저 들고 나온 것이 대기업 감세와 초부자의 증여세면제 등 최상위 부유층과 그 나머지 99퍼센트의 시민대중과의 두 국민 정책이 단적인 증거가 될 것이다.
시민대중은 이러한 작태에 대해서 분노하고 격노와 아픔, 실망의 감정을 표시하고 이를 대의 기관인 정당과 정권에 관리해줄 것을 호소하지만 권력은 이 감정들을 엉뚱한 곳에 탕진하거나 방치하면서 약화 상실시켜버리고 있다. 즉 시민들은 자신들의 목소리가 경청된다는 느낌을 전혀 받지 못하고 있으며, 고려받는 느낌조차도 없다. 대의 기능이 작동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현재의 권력은 대의 기능을 전혀 인지하지 않으며, 권위주의적 권력 놀음에 취해 자신들의 주머니 이익에 몰두하고 있을 뿐이다.
강력하게 획책하는 분열주의가 이들의 불의와 부패를 방어해 주리라 믿는 까닭이다. 때문에 이들은 시민 대중 일반에 대한 그 어떤 책임도 느끼지 않으며, 분리한 대다수의 시민의 삶에 관심을 느끼지 못한다. 그래서 구경꾼 코스프레와 쇼의 연출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이태원 참사, 오송 지하차도 참사, 지금 벌어지고 있는 잼버리 대회의 무책임한 운영은 재난에 대한 애초의 관리 의지 없었음을 입증하는 극히 일부 노출된 사례일 것이다. 아마 이러한 재난의 발생과 무책임은 계속될 것이다. 이들에게는 나눌 수 없는 갈등에 대한 이해가 없거나 이를 파손할 의지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들이 간과하는 것은 나눌 수 없는 것, 즉 가시적이고 정량화하기 어려운 합리적 이성으로 작동할 수 없는 것은 존중하고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는 것이라는 환상인 것 같다. 정치는 순수하게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작동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민주주의 정치의 목적은 합리적 합의가 아니다. 이성적 합의 뿐 아니라 감정적 합의를 생산하는 것이 민주주의 정치이다. 사회갈등은 단순한 전략적 이익의 갈등이 아니라는 점이다. 임금협상의 예를 보더라도 여기에는 사회적 관심, 인정, 정의에 대한 생각 등 이성 외의 요인들이 늘 개입한다. 이처럼 실제 나눌 수 있는 갈등에서조차 나눌 수 없는 갈등이라는 기본적이고 근본적인 불일치의 동기가 놓여있는 것이다.
민주주의 정치는 합리적이지만 동시에 비합리적이고 감정적일 수밖에 없는 것들의 타협을 중재하고, 각 정파들 사이에서 감정의 타협을 완성시키는 것이어야 하는 것이다. 사회적 분열을 봉합하고 시민대중을 갈라치기하는 것은 곧 민주주의를 파기하고 독재정치를 하겠다는 선언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분열 획책의 중지와 통합을 위한 민주정치로의 복귀이다. 더 이상의 파괴는 안 된다. 더 이상의 무책임과 무관심, 방관, 거짓말은 안 된다. 나눌 수 없는 갈등에 대한 성실한 번역 작업에 임하는, 일하는 정부가 되어야 한다. 이 어려운 노력을 회피하는 게으른 권력은 필연적으로 몰락하게 되어있다. 30퍼센트의 우중이 언제까지 이러한 진실을 외면하고 맞장구를 쳐줄지는 단언 할 수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