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강
천운영 지음 / 창비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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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은 끝나지 않았다. 선악과 정의의 무지(無知), 가치의 다원화를 타고 더욱 심화되었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물론 그 형태를 바꾸었지만 말이다. 작중 인물인 고문 기술자, “물고문 전기고문 관절 꺽기의 명수인” 장의사집 둘째 주인이라 불리는‘안부장’은 80년대에만 존재했던 인물은 아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이처럼 일그러진 신념에 포획된 인간들이 꽤나 우리들의 눈앞에 많이 등장하긴 했다. 이런 것도 신념이라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국가를 위해서, 사회를 위해서, 가족의 안녕을 위한 진정 충성스런 애국심의 발로라고, 이 야릇한 애국심이라는 민족주의적 감수성을 자극하면 지적 판단력이 성긴 인간들은 물불을 가리지 않고 이웃을, 동족을 학대하고 살해하는 도구, 즉 자신들과 생각과 가치가 다른 인간은 인간이 아닌 돌과 같은 사물이라고 인식하는 괴물들로 무진장하게 양산되는 그런 사회였으니 말이다.

사실 지금도 권력을 행사하는 일부 인간들은 자신들과 다른 생각들이 권력에 위협이 되기만 하면, 상대를‘빨갱이’로 몰아세우면 그저 게임은 끝난다라는 신화를 가지고 있을 정도니,  60여년 넘게 진행된 전 국민적 세뇌는 뿌리 깊은 것이기도 하다. 독재에 반대해도 빨갱이, 민주적 헌정질서를 훼손하는 권력에 저항해도 빨갱이, 인간의 존엄성과 같은 자연권적 기본권의 보장을 요구해도 빨갱이, 소외된 사회 저소득층을 위한 복지정책을 요구해도 빨갱이, 자원의 불평등한 제도의 시정을 요구해도 빨갱이가 되는 희한한 사회는 이승만이래 부도덕한 정권들의 자기보존을 위한 방책으로 이용되기 시작하여 실로 질기게 악용되는 용어가 되었다.

이렇듯 심하게 왜곡된 용어로 훈육되어 경도된 인간들은 자신들이 부패하고 부도덕한 권력의 한낱 소도구임을 알지 못한 채 존재하지 않는 적을 만들고, 그것이 마치 이 사회를 수호하기 위한 충성이자 의무라고 여기는 것이니 그 무지와 분별없음을 누구 탓이라 해야 할지 안타깝기만 하다. 80년 중반 각종 지면과 각종 미디어에 연일 기사화되던 도피 고문기술자가 있었다.
이는 멀쩡했던 청년이‘책상을 탁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물고문 치사사건이 발단인데, 군사반란을 통해 무력으로 정권을 탈취한 정부의 발표는 이정도로 안하무인(眼下無人)이었고 폭력적이며 무식했다. 그 발표는 그야말로 외국 언론들의 더할 나위없는 가십거리였을 정도로 기막힌 것이었는데, 국민 여론이 심상치 않자 사악하고 폭력적인 그네들의 더러움을 대리할 제물로서의 누군가로 고문경관은 제격이었지 싶다. 소설은 바로 이 인간백정인 고문기술자, 추악한 괴물로 변한 한 어리석은 인간의 도피행적을 쫓는다.

고문경관인‘안’은 충(忠)과 의(義)만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고 자신의 정의를 말한다. 이 사회, 권력에 도전하는 인간들은 그에겐 모두‘개(犬)’에 불과하다. 외판원을 하다 그의 우악스런 폭력을 마음에 들어 한, 소위 비밀 대공(對共)수사기관의 간부에 스카웃되어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찬란한(?) 고문기술을 발휘하는 것인데, 인간의 공포를 끌어내는 자신이 만든 고문 도구인 칠성판, 그리고 물의 채찍, 공포의 각성단계 등 주도면밀한 자기만의 고문기술에 자부심을 가진 인물이다. 이러한 자가 고문 치사사건으로 도피행각을 벌이며 마주하는 불안과 두려움의 실체, 그리고 권력과 썩은 세상의 관성(慣性)들이 비추어진다. 여기에 그의 딸‘선’이 등장하여 모르는 것, 바로 무지함만큼 무섭고 사악한 죄악도 없음을 말한다.

한편 이러한‘안’의 도피 초기에 사회정의와 가족연대가 충돌하는 장면이 있는데, 자수를 권유하는 수사진들에게 그의 아내가 항변하는 소리다. “애국한 죄밖에 더 있어요? 빨갱이 잡는다고...”아마 이것이 우리사회의 본 모습일지도 모른다. 또한 아버지의 부재(不在)에 대해 묻는 딸에게 “빨갱이 새끼 뺨 몇 대 때린 것 뿐...”인데 죄가 되겠느냐고 위로하는 것이다. 이는 도덕, 정의에 대해 자칫 왜곡될 수 있는 문제로 비칠 수 있는데, 고문이란 상습적 폭력행위로 이 땅의 청년들, 무고한 시민들, 즉 타자를 희생시킴으로서 자기가족, 자신들의 안위를 지키는 것, 다시 말해 소위 인간을 자신들의 행복을 위한 수단이라는 도구로 이용하는 것은 결코 진정한 정의가 될 수 없으며, 인간은 그 자체인 목적, 바로 인간의 존엄성 존중이라는 공공선, 공적 이성을 부정하고서는 그 어떠한 정의도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해야한다.

자못 무거운 주제를 이 소설은 비교적 가볍게 읽어낼 수 있게 하는데, 물론 오늘의 사회와는 다른 형태의 폭력을 그리고 있다는 시대의 간극으로 먼 과거의 일처럼 비치는 것이 원인이기도 하지만, 20대의 싱그럽고 발랄한 ‘안’의 딸, ‘선’과, 그야말로 표제처럼 “쌉쌀한 단 맛”이자 “달달한 쓴맛”의 ‘생강’같이 톡 쏘는 문장과 이야기 구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아비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알 필요가 없었던 풋풋한 사랑의 설렘을 기대하던 여대생이 거대한 어둠의 장막인 도피자 아비의 실체를 알게 됨으로써 비로소 삶의 도리와 이 사회의 진실에 눈을 떠가는 과정이 고통스럽고 아프기도하지만 사랑스럽게 성숙하는 과정에서 어떤 희망의 기대와 안도감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릇된 신념이 사회에 보내는 악질적 메시지들에 대한 담론은 비록 과거의 이야기를 소재로 하고 있지만 그 어느 때보다 지금에 더욱 강력한 의미로 다가온다. ‘안’의 도주에 그의 은밀한 비호 연대세력이 마련한 도피처인 갱생원과 원장, 그의 충복들인 감시자들의 모습을 ‘안’이 외부자로 바라보는 시선이다. “쉬파리 새끼”, “그들은 완장을 차고 충성을 다하여 수용자들을 감시하고 제어한다.” 이들에게 버러지같이 파렴치한 놈들이라고 경멸을 보내는‘안’, 바로 그가 그들의 분신이라는 것을 자각하지 못하는데, “씨발놈, 백정 새끼가 거드름은...”하며 이를 지적하는 것이 바로 썩어빠진 갱생원 원장이란 자라는 것은 실소를 머금지 못하게 한다. 부패한 권력과 그에 아첨하고 기생하는 것들, 그래서 보이지 않는 거대한 폭력의 질서와 체계가 되어 악취가 진동하는 권력의 무리를 구성한다. 진짜 개새끼들의 유치찬란한 향연인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권력의 조직은 기막힌 전략을 갖는다. “이 조직이란 게 말이야... (中略) 불가사리 같은 거란 말이지. 잘려나가면 그 자리에 새로운 발이 생겨나는” 이것처럼 말짱하게 권력을 정의하기도 힘들 것이다.

인간의 믿음을 조롱하는 인간백정, 고문기계, “사람들을 아프게 하는”그래서 자신의 그 엉터리 신념을 지키겠다고 미장원 다락방에 은둔하는, 자신의 연대에서 추방당한 짐승의 몰골은 혐오스러움과 인간적 절망이라는 불쾌함만이 더해진다. 악마이면서 존경까지 받고 싶어 했던 이 백정이 쏟아내는 잘못의 부인, 직업적 신념이라는 주장에서 문득 대통령까지 해먹은 자와 그의 충복들인 장씨, 허씨들이 이후 정권의 청문회에서 주절대던 소리가 떠오른다. 무고한 시민을 대량 학살하고 폭력적으로 정권을 탈취한 그자들의 입에서 쏟아져 나온 소리는 ‘국가의 안녕을 위한 소신’이었다는 것이니, 게다가 그 읍소하는 모습은 소설 속 ‘선’이 아비에 보내는 말처럼 “근거 없는 원망과 터무니없는 투정”이요,  “어린애의 거짓 눈물, 자기 자신을 안쓰러워하는 진액, 지독한 자기애에서 나온 눈물, 불가사리의 썩은 진물”이상이라 부를 수 없는 것일 게다.

이들이 위했다는 정의는 고작 자신들의 이익, 권력욕을 위한 것이었을 뿐이며, 그들이 지키려 했다는 가족과 사회의 안녕은 우리의 가족과 이웃들을 살해함으로써 가능했다. 그런데, 이러한 이상한 신념의 주장은 사라지지 않고 더욱 공고해져서 작금의 기득 권력이 빈번하게 사용하고 있다.
제발 선량하고 양식있는 시민들을 위해서 그랬다고 하지 마라. 할 일을 했다고 말하지 마라. 그건 당신들을, 당신들의 구역질나는 사욕을 위해서한 것이라고 지금이라도 솔직하게 말하여야 하는 것이다. 당신들이 불안해하는 권력유지의 두려움과 공포는 끝나지 않는 것이다. 영원히...
또한 주구(走狗)들도 항변한다. 무식한 것, 즉 알지 못하는 것은 죄가 아니라고. 조직에서 시키는 일, 권력이 명령한 일을 수행하는 것, 그것이 설혹 불의이고 위법이며 반인륜적일지언정 그런 것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 알려 하지 않는 것은 죄가 아니라고 말이다. 아니 그러한 구분에 대한 인식조차 이 사회는 요구치 않았고, 권력을 향해 달려가도록 채찍질하는 것이 이 사회 아니었느냐고 말이다.

그러나 주구들에게 안타까운 것은 그들이 언제든 잘라내도 되는 불가사리의 발, 소모품이라서가 아니라 다름의 인정과, 타자의 존엄성, 그리고 정의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죄악의 실행자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모든 악이 시작되는 것이다. 무지의 신념을 깨부수지 못하는 아비와 무지를 뚫고 깨어나는 딸의 대비가 선명하고 자극적인 영상으로 남는다. 짧고 탄탄하면서 사실적인 문장, 원초적으로 묘사되는 내면의 동요와 갈등, 아비와 딸이라는 세대의 교차가 보여주는 미래에 대한 희망적 기대의 메시지, 그리고 감정의 풍랑을 높고 낮게 쉴 새 없이 조종하는 흐름은 작품에 한껏 빠져들 수밖에 없게 한다. 그야말로 일품 소설이다! 아~ 이 맛이 바로 생강 맛이구나 하고 무릎을 탁 내려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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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구인가 - 자화상에 숨은 화가의 내면 읽기
전준엽 지음 / 지식의숲(넥서스)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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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명의 걸출한 화가들이 그네들의 자화상에 표현하려한 의미들을 쫓는다. 자신의 치부를 남긴 솔직한 그림에서부터 구현하고자 하는 어떤 가치를 그리려고 했거나, 사회나 예술계를 향한 속내를 투영하기도 하고, 자신의 삶의 여정을 자전적으로 담아내는가하면, 사랑과 배신 그리고 절망이란 현실적 감정을 투사하기도 한다. 인생의 모든 것이 담겨있는 이 풍부한 표현들과 그에 얽힌 한 인간으로서의 화가들의 내면을 따라가는 것은 어느덧 마음 깊은 저 아래의 본질적이고도 근원적인 무엇을 건드린다.

“나는 누구인가?” 이 당혹스런 질문이 가끔, 아니 어느 순간 불현듯 떠올라 심란한 기분으로 내몰곤 한다. 대체 지금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이 우주에서 스치듯 지나갈 도리밖에 없는 존재로서의 나란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일까? 이러한 질문에 사람들마다의 답변은 그야말로 다양한 모습을 할 것이다. 자신이 처한 상황이나 환경, 아니면 웅대한 어떤 지향점이거나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의 자신을...

고흐, 렘브란트, 뒤러, 프리다 칼로, 에곤 실레 등 익히 잘 알려진‘자화상’들이 떠오른다. 더구나 수없이 많은 그들의 삶이나 작품마다에 도사린 에피소드들 덕택에 기계적이고 일반적인 해석을 줄줄 읊어댄다. 그러하다보니 자화상이란 주제 역시 이러한 설명의 범주를 넘지 못할까봐 내심 걱정하면서 책장을 넘긴다. 그러나 이러한 기우는 정말 쓸데없는 오만에 불과하여 어느새 눈빛이 책을 뚫어버릴 듯 흠뻑 빠진 나를 발견하게 된다. 자부심, 고통, 자존감, 삶의 역사, 존재의 본질 등 한 인간의 의지와 내면을 표현하려했던 그들의 마음을 거니는 철학적 평온함에 휩싸이는 것이다.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지 못한 회오(悔悟)의 반성을, 드러난 외면의 불안정한 이 세계의 현상이 아니라 그 이면에 보이지 않는 진실의 세계를 발견하려는 노력을, 생의 마지막 겨울 미완의 삶을 죽음으로 정리하기에 너무 억울했던 그 심사를, 불온한 시대의 정신을 구원하고자 하는 정신적 양식을, 이상적인 인간의 의지에 대한 표상을, 풍경을 바라보는 사람의 뒷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를, 욕망의 건조한 허탈함에 대한 뒤늦은 깨달음을 표현하려 했던 사람들, 화가들에게서‘나’에 대한 숙연한 답변을 발견한다.

49세에 화가에 데뷔한‘앙리 루소’의 기념 촬영하듯 화가의 소품을 들고 선 자화상은 시대를 훌쩍 넘어 격려를 보내고 싶은 충동이 일고, ‘살바도르 달리’의 흐물흐물 흘러내리는 듯한 <구운 베이컨과 부드러운 자화상>은 시대의 혼돈과 비합리성에 의지하려는 정신적 양식의 반영을 비로소 이해하게 하여준다. 또한 공산주의자‘프루동’의 영향을 받은‘귀스타브 쿠르베’ 의 <아틀리에>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통해 그의 예술적, 윤리적 생애 전반을 보게 하여주고, 영국 구상미술의 맥을 잇는‘스탠리 스펜서’의 권태롭고 공허한 눈빛의 남자와 여자의 정사로부터 어긋나고 건조하며 허탈한 욕망과 그 부질없음, 그리고 그러한 삶에서 허우적댔던 자신의 어리석음에 대한 진솔한 반성을 보기도 한다.  왠지 가슴이 저릿저릿한 느낌이 다가오는데, 그들의 진실성, 진정함, 본질을 꿰뚫는 감동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한 폭의 회화가 지닌 이러한 무진장한 감동의 전달은 아마 저자의 인문학적 통찰력이 빚어낸 감수성 짙은 설명으로 강화된 것이라 할 것이다.

                  
인생의 진한 깨달음, 내 시선을 새삼스레 고정 시킨 그림이 있는데, 독일 화가인 ‘카스파르 프리드리히’의 <뤼겐의 하얀 절벽> 이라는 풍경으로 담아낸 자화상이다. 풍경을 바라보는 뒷모습, 배경일 뿐인 풍경이 아니라 경건한 이야기를 쏟아내는 풍경이 내 마음을 시원의 어느 곳으로 데려다 주는 평온함에 한동안 가만히 빠져들었다. 그리고 ‘샤갈’의 유명한 <산책>에서 그동안 알아차리지 못했던 느낌의 본질이 바로 사랑의 바이러스, 따스한 인간애였음을 알게 된 것은 나름 수확이라 하겠다.


그러나 무엇보다 흥미롭게 바라봤던 그림은‘클림트’의 <키스> 에 대한 오마주인‘실레’의 <죽음과 소녀>로 이어진 플롯의 계보, 그 원조인 ‘오스카 코코슈카’의 심리적 자화상이다. “자신은 죽을 것 같은 열정이지만 알마(구스타브 말러의 미망인)에게는 한여름 꿈같은 사랑”에 불과한 것이었음을, 사랑의 배신과 절망에 대한 결별의 갈등과 고통의 적나라함을 보았기 때문일까? 남자와 여자, 사랑은 아마 인류의 영원한 물음일 것이다. 그러니 이것만큼 본질적인 것도 없을 것이고, 무수한 답변들이 표현되는 것일 게다. ‘나’는 누구인가를 다시금 반추해본다. 결국 남자인 나로선 타자인 여자, 그리고 세상의 모든 인간을 포함한 생물과 사물, 그리고 그 관계에서 그 답을 모색하게 된다. 그들이 바로 나의 모습이기에 말이다. 냉정하고 무심한 타인의 눈빛은 바로 ‘나’의 눈빛이요, 그의 영광 또한 ‘나’의 영광일 밖에 없는 것이기에.

미술, 자화상이라는 회화예술이 인문학적 해설과 자못 철학적인 성찰과 함께 감성적으로 구성된 이 저술은 미술사라는 역사적 조류는 물론, 세밀한 회화분석, 화가의 특성, 인간과 인생에 대한 심원한 통찰을 흥미롭게 버무려낸 모처럼의 유쾌하고 지적인 문학적 예술저작이라 하겠다. 위대한 화가들의 진솔한 내면인 자화상을 보았기 때문일까? 연민과 동종(同種)으로서의 그 어떤 뭉클한 여운이 떠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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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을 찾아서
성석제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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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거나 살아가다보면 절로 보이고, 느껴지고, 그래서 깨우쳐지는 인간의 모습, 그리고 그들의 관계가 만들어내는 사회의 속성이란 것이 있다. 때론 그것이 역겹고 부조리해서 독설을 담아 비판하기도 하지만 그게 어디 보이는 것이 아닌 까닭에 거대한 에피스테메가 된 담론적 질서에 종속된 사람들로부터 동의를 받거나 변화를 기대하기란 역사의 진실을 보더라도 가능치 않아 보인다. 그래서 아예 단절된 어딘가로 떠나고 싶어 속내를 태우지만 나 같이 이러한 현실에 얽혀 발을 빼내기가 어려운 범인(凡人)들로서는 이도 실행한다는 것은 수월한 일이 아닐뿐더러 아예 겉으로 내색조차 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은 것이 실상이다.

그래서 삶을 살아가는 내내 타자와 세상에 냉소를 보내고 군중 속에서 홀로 은둔하는 불편함을 인생이려니 하고 감수한다. 내가 바로 타자들의 그것인 것을 이해하지 못한 채 말이다. 그러자니 만나는 오래된 벗들이나 동료들을 청중으로 하여, 내 불운한 인생 이야기, “냉소의 부산물인 추억의 납덩어리”를 소설 속 화자인‘장원두’란 인물처럼 풀어 놓곤 하는데, 그러하다 보면 어린 시절인 오래 전의 시대로 훌쩍 넘어가버린다. 그럼 그 시대를 풍미했던 인물들이나 인생에 첫 대면했던 자극적이고 진기했던 사건들이 줄줄이 잠긴 기억의 사슬을 풀고 쏟아져 나온다. 다만 내겐 이 소설 속 화자처럼 현실의 가까운 거리에‘마사오(正夫)’같은 신화적 인물, 마음의 영웅이 존재하지 않았고, 또한 그 후계자를 걱정할 필요조차 없었기에 어른이 된 어느 시기에 이르러 마음속에서 지워버리는 의식(儀式) 같은 거추장스런 부담이나 회한의 시간이 불필요했다. 물론 숭배할만한 지배 권력에 익히 예속되어 그 안에서 평온을 누리던 사람들이 굳게 믿었던 신화가 깨지고 역사의 시대, 새로운 권력의 다른 습관을 인식하게 되면 냉소적이었던 자신조차도 그 물에 놀던 물고기인지라 추억을 되씹는 것은 도리가 없는 일이긴 할 것이겠지만.

화자(話者)는 자신의 성장기 내내 마음 속 왕이었던 고향지역의 거리가 낳은 최초의 건달, 싸움꾼, 깡패이자 “지역의 평온과 질서를 유지하는 경찰, 재판관, 시장, 의원, 언론인, 배우의 기능을 겸한 위대한 인물”이었던 영웅인‘마사오’를 신성한 권력의 한 모습으로 그려낸다. 소설은 이 신화의 스러짐을 기점으로 시간을 과거로 돌리는데, 그래서 그 시간 속에 기록되는 것들은 어차피 이미 진행되어버려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또한 화자의 고향인‘지역’으로 상징되는 공간 역시 회오리바람과 비안개로 뿌옇게 가려져 보이지 않는 곳이어서 현실인 지금과는 다른 시공간처럼 보인다. 추억이란 것이 따지고 보면 이처럼 삶의 경계가 다른 것이 당연하지 않겠는가. 그렇다고 이 경계가 다른 세상이 우리네들의 세상이 아니란 것이 아니라 이제 이러한 세상과는 단절하거나 아니, 안개 낀 흐릿한 어둠에서 밝은 햇살이 빛나는 화창한 세계, 즉 변화된 세계로 연결하려는 의미일 게다.

‘나’, ‘장원두’와 한 날 한 시에 태어난 지역의 친구, ‘재천’은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의 뚜렷이 다른 행동양식을 보여준다.  그리고 지역의 구성원인 군상들이 맺는 관계와 그 관계의 의미, 지역을 지배하는 권력양태의 변천과 속성을 소위 “중앙이나 제도권 언론에서는 도저히 취재할 수 없는 것, 무시하고 포기하는 진실, 예상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으면서도 사실인 것, 다룰 수 없는 역사를 폭넓게 다루는”소문이라는 풍부하고 설득력 있는 형식에 담아 그것들의 여과 없는 모습을 그려 낸다. 이것은 다름 아닌 국민적 망각에 숨겨진 것들, 인간의 이성이 무능력을 나타내는 것들을 여지없이, 극명하게 드러내주는 것 아니겠는가?

자신보다 뛰어난 존재를 참지 못하며, 평범한 것에는 만족할 줄 모르는‘재천’이 비범해지기 위해 발달시킨 달변의 혀와 웃는 표정 뒤의 야비함과 폭력성은 결정적인 순간에는 항상 머뭇거리기만 하는 ‘나’와 대조되어 오늘을 사는 기형화된 우리들을 투사하고 있다. 이처럼 삶을 기술화시킨 사회의 양태는 ‘나’의 짝사랑 연인이었으나 ‘재천’의 처가 된 ‘세희’를 통해 자신의 아름다움과 매력으로 남성을 정복할 일방적 거리를 아는 여성의 본능적인 남성관, 모였다하면 재야 정치가, 재야 경제인, 재야 지식인, 재야 천재화가, 그리고 지역을 대표하는 민주투사로 변신하는 소시민들의 졸렬함, 권력자 가까이서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단련시킨 아첨을 아첨 같지 않게 하는 핵심기술, 그래서 “걸레 사이에 낀 먼지처럼 거짓말이 섞인 세계관을 가지고 살아야”하는 인간사회, 바로 소설 속‘지역’은 축소판 한국 사회, 편협하고 패거리를 짜내고, 보잘것없음에도 비범하기만을 바라는 사람들의 무식한 욕망이 들끓는 곳, 그런 곳이 된다.

이제 경계너머‘지역’의 시간과 공간성은 멸실되어야 할 대상이 되어야 하는 것일까? 자신 이외의 모든 타자는 단지 이용되어야 할 대상이 되고 마는 세상, 그렇게 해서 수중에 넣은 권력에 무슨 행복과 진실이 존재할 수 있을까? 우리 사회는 거침없이 타자를 극복할 대상으로만 가르친다. 그래서 모두 성공, 출세라는 말이 지닌 본성을 이해하려하지 않는다. 야합과 적만이 존재하는 사회를 인식하는 것은 냉소가 아니다. 아니 설혹 “힘없고 가난한 자에게 신이 내려준” 도구가 냉소라고 비하하려 할지언정 우린 ‘장원두’의 ‘지역’같은 사회에는 분명 밝음이 무엇인지, 화창함이 무엇인지, 빛을 느끼게 해주어야만 할게다. 너무 밝아서 모든 것이 드러날 정도로 투명한 세상, 바로 그런 것이 진짜 삶이 되어야 한다고 말이다.

역사로 말하지 않는 것이지만 우리들, 우리사회를 잠식하고 있는 지워버릴 수 없는 바로 우리가 무능력을 보이는 내면화된 삶의 어두운 풍속의 속성, 우리사회가 흘러가고 있는 주류적인 그것들, 익숙한 그것들을 전복하거나 변형하는 힘이 소용돌이치게 하여야 할 것이다. 그래서 ‘마사오’는 ‘나’의 마음속 가장 오래된 영토를 지배하는 영원한 영웅, 왕이 아니었을까? 지역을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의 울분을 이해했던 돌발점에서의 반항이요, 용기요, 자유요, 새로움이 바로 그였기에. 시니컬한 재치로 버무려진 맛깔스런 이야기 속에 부패하고 안일한 우리의 내부를 강하게 두들겨대고 이탈을 촉구하는 의외의 목소리가 담긴 작품이다. 문득 나도 마사오같은 인물, 비감(悲感)하게 생을 마친 바보 대통령, 그가 내 마음에 있었음을 비로소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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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위대한 여행
앨리스 로버츠 지음, 진주현 옮김 / 책과함께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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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인류, 현생인류라고 하는 종(種)은 과연 언제부터 이러한 모습을 하고 있었을까? 또는 대체 최초의 기원이라 할 수 있는 어떤 출발지가 있었을 텐데 그곳은 어디일까? 그리고 어떻게 지구상의 모든 대륙과 섬에 퍼져 나갔을까? 황색과 흑색, 백색의 피부색과 눈과 코 등 얼굴의 윤곽이 뚜렷하게 차이나는 것은 왜일까? 아무튼 뿌리를 찾아가다 보면 이러한 의구심들이 해결되지 않을까하는 기대를 하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들, 즉 현대호모사피엔스에 대한 학계의 통일적이고 확정적인 결론이 있다는 것일까? 사실 호모일렉투스니 호모하이델베르겐시스, 네안데르탈인 등 호미닌 種에 대한 분류에 있어서 고생물학계도 병합파와 세분파로 나뉘어져 있는 모양이다. 다양한 형태의 화석을 하나의 종으로 묶으려는 병합파와 화석간의 차이점에 주목하려는 세분파는 호모사피엔스니 나아가 호모사피엔스사피엔스니 하는 식의 모호한 각축장이 되고 있다. 게다가 현생인류의 동아프리카 기원을 주장하는 서구중심의 다수파와 오늘의 중국인은 호모일렉투스로부터 진화했다고 주장하는 중화중심의 지역 기원설까지 그야말로 다종다양한 견해들이 있다.

이처럼 절대적이고 결정적인 이론이 정립되지 못하는 것은 입증할 수 있는 구체적 증거의 희소성과 불확실하고 불명료할 밖에 없는 화석에 의존하기 때문이라 할 것이다. 지질학, 생물학, 해부학, 유전학 등을 전문배경으로 한 유능한 고고학자들이 엄청난 과학기술의 도움으로 연구 매진하고 있음에도 수 만년, 수 십 만년 전의 흐릿한 흔적들을 통해 그 계통의 논리성, 역사성을 규명하는 일에는 한계가 존재하는 것이 어쩜 당연한 현상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저자인 영국의 해부학 의사인 이 여성학자가 현생 인류의 지난한 발걸음을 좇으며 들려주는 다양한 관점과 고고학적 방법들, 그리고 그 증거인 화석과 유물, 유적에 대한 이야기들은 주류의 주장을 수용할 수도 있으며, 혹은 새로운 돌파구를 발견하거나 반론을 지닐 수도 있게 안내한다. 특히 현학적인 접근을 피하고 인류화석의 발굴지들을 중심으로 아프리카에서부터 아시아, 유라시아, 오세아니아, 유럽, 아메리카대륙에 이르는 직접의 체험적 여정을 에세이로 담아내 자칫 지루할 수 있는 고고학을 유쾌한 지식여행으로 이끌고 있어 수월한 이해를 도와준다.

현생 인류에 대한 기원과 그들이 지구촌 곳곳에 이르게 되는 경로는 저자가‘아프리카 기원설’에 학문적 동의를 하고 있다는 의미이지만, 다른 이론이나 주장을 경시하는 것은 아니다. 반대 이론이나 그들이 제시하는 화석과 지질학적 증거, 유물과 흔적들을 그대로 제시하고 있다. 다만, 그 과학적 접근이나 증거물에 대한 연대측정의 불완전성에 대해 논리적인 비판을 하고 있어, 이에 대한 수용은 그대로 독자의 몫이란 판단에 맡겨지고 있다 할 수 있다. 한편 이 저술이 지향하는 대중적 접근이라는 친절함이 돋보이는데, 대략 30여 쪽에 달하는 서문에 지구의 지질학적 연대인 플라이스토세(홍적세), 즉 빙하기의 연대별 세분을 통해 인류의 이동과 기후, 환경의 영향을 연결 지을 수 있게 하여주고, 화석의 연대측정 기법인 발광 연대 측정, 방사성 탄소 연대측정, 포타슘-아르곤 연대측정, 전자스핀 공명법 등이 어떠한 방법을 통해 그 연대성을 적확하게 측정해내는지 그 과학적 신뢰성을 알려주기도 한다. 더구나 모계(母系)로부터만 물려받는‘미토콘드리아 DNA’를 통해 인류의 모계를 역추적하여 그 기원에 이르는 유전기술은 강력한 과학적 신뢰의 기반이라는 새로운 이해를 안겨주고, 이후 본격적인 고고학적 발견들과 주장들을 독자적으로 해석하고 비판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

저자는 호모사피엔스의 화석이 가장 많이 발견된 동아프리카인 에티오피아‘헤르토’와 ‘오모 키비시’의 발굴 현장을 시작으로 현생인류의 위대한 흔적을 따라간다.  호모사피엔스는 동아프리카를 벗어나 언제부터 동쯕으로 또는 북쪽과 서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을까? 넓게 막아선 사막과 빙하, 산맥을 넘어설 수 있었던 시기는 과연 언제였을까? 그 가능한 이동 경로는 어느 곳이 될 수 있었는지 화석 발굴지들을 연계하여 인류의 조상들의 발자취를 좇는 과정은 진정 신비로울 정도로 경이롭기만 하다. 해안을 따라 대륙에서 대륙으로 그래서 인도를 지나고 동남아시아의 인도네시아로, 그리곤 오늘보다는 해수면이 낮아 근접해있던 섬들을 건너 오스트레일리아로, 또는 동북아시아로 이동하는 대 여정은 그야말로 호모사피엔스라 명명된 4만5천 년 전의 인간 조상들의 생존을 향한 감동적인 집념과 슬기를 느끼게 한다. 그들은 바다를 어떻게 건널 수 있었을까? 배를 만들었을까? 가능한 추측일까? 아니라면 대체 어떻게 오스트레일리아에서 현생인류의 화석이 발견될 수 있겠는가! 인도네시아 밀림의 풍부한 대나무와 줄기들, 다양한 식생들, 그래서 대나무로 엮은 원시적 배를 타고 실험항해를 직접 해보기도 하는데, 과연 그네들은 성공한다. 이를 실험고고학이라고 한단다.

이러한 흥미로움이 이 저술 곳곳에 빼곡하다. 동북아시아를 거쳐 베링해를 건너 알래스카,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동하는 인류는 또한 어떤가? 1만2천년 전에야 비로소 간빙기에 접어드는데, 1만4천년~1만8천년 전의 남아메리카에서 발견되는 호모사피엔스의 화석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엄청난 빙하가 북아메리카 대륙에 놓여 모든 생명의 존재를 부인하던 그 삭막한 지대를 어떻게 통과했을까? 아니면 유럽에서 대서양을 건너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한 인류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매머드의 멸종과 인류의 아메리카대륙에의 도착은 과연 우연일까? 1만2천년 전의 대운석 충돌로 인한 것일까? 이에 대한 가능한 이론과 고고학적 발견들이 저자의 여행체험에 실려 생생하게 수를 놓는다. 아마 저자의 이 인류기원 대탐사의 여정은 엄청난 감동으로 가득했을 것만 같다.

그러나 여전히 풀리지 않는 미궁들이 있다. 유럽대륙에 공존하다 어느 순간 사라져버린 네안데르탈인은 호모사피엔스와 어떤 관계가 있었을까? 왜 그들은 사라지고 호모사피엔스만이 오늘의 인류로 진화했을까? 서로 유전자가 교환되는 일은 없었을까? 그러면서 자연스레 종이 합쳐진 것은 아닐까? 남아메리카 호모사피엔스의 화석은 동북아시아인의 생김새와 다르다. 그럼 그들은 또 무어란 말인가? 무궁무진한 의문과 과학적 해석이 더해진다. 호모사피엔스의 기원과 확산에 대해 이렇게 풍부하고 다채로운 해석을 풀어 놓은 저술은 없을 것이다. 아프리카 기원설, 다지역 기원설, 그리고 중간이론인 아프리카에서 출발한 호모사피엔스와 지역의 원시 호미니드와의 교배설까지 아무튼 흥미롭고 절묘한 고인류학이 독서의 여정을 내내 즐겁게 해준다. 어쨌든 우리 모두는 이들 호모사피엔스의 독창성과 적응력 덕택에 꿋꿋하게 살아남아 문명을 일으키고 이렇게 존재하고 있으니 그들에게 감사해야 하지 않을까? 재미와 지식과 감동을 함께 느끼게 해주는 따분함하고는 거리가 한 참 먼 걸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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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의 역습 - 내 몸속 세포가 말라 죽고 있다
클라우스 오버바일 지음, 배명자 옮김 / 가디언 / 2011년 2월
평점 :
절판


우리 한국인의 식단은 유독 자극적인 음식이 많다. 맵고 짠맛이 사실 특징이랄 수 도 있는데, 그래서인지 신장질환자를 주변에서 많이 발견하게 되는 사유인 모양이다. 염화나트륨, 바로 소금이 우리네 음식, 특히 장류인 간장, 고추장, 된장은 물론 김치, 젓갈, 장아찌에서부터 전골, 찌개, 탕, 조림 등을 통해 엄청난 양이 우리 몸속으로 유입된다. 게다가 각종 냉동식품, 즉석식품, 통조림 등 염화나트륨 덩어리인 가공식품까지 가세하여 그야말로 소금이 한국인의 몸을 절이고 있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이 책을 들게 된 이유도 손발이 붓는 것 같고, 소화능력도 석연찮은 것이 혹 너무 짜게 먹는 것 아닌가하는 나름의 의심과 진단 때문에 소금이 인간의 신체에 미치는 영향, 그 질환은 물론 예방책이나 저염식 식단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였다 하겠다. 그러나 실제 염화나트륨(소금)이라는 미네랄이 우리 신체의 각 기관이나 호르몬, 그리고 생체장치로서 수행하는 역할을 접하고는 그 기능상의 중요성과 민감성에 놀라움이 생각보다 컸다고 할 수 있다.  

소금이 혈액순환을 담당하는 림프계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나, 신장 사구체의 기능을 저하시켜 소변 항상성의 기능을 훼손하고, ‘혈압 상승 터보장치’인 ‘노르아드레날린’이란 호르몬에 민감하게 반응해 혈관을 수축시켜 혈압을 올린다든가, 생체 중에 압수용체라는 혈압조절 역할장치가 유독 한 물질로부터 큰 영향을 받는데 그것이 바로 소금으로서 생명의 결정적 위협이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또한 소금은 혈액 속으로 파고들어가 그곳에서 물과 결합하고 혈액은 빼앗긴 물을 보충하기 위해 세포에서 물을 빼내와 생명장치를 파손하고 생체의 균형을 망가뜨리기도 하며, 관절활액을 희석시켜 점성을 떨어뜨려 관절의 손상을 야기하기도 한다.
이러한 위협적인 기능에도 불구하고 가장 시선을 잡는 것은 소금이 인간의 본질적인 생명장치라 할 수 있는 ‘심장’의 펌프강도를 조절하고 혈관의 저항력을 조정하는 핵심적 영향을 미친다는 설명이다. 이는 단순히 짠맛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내 무딘 감각이 벌떡 일어나게 하는데, 게다가 피부노화, 시력감퇴 등 수분과 관계하는 모든 신체적 현상에서 과다한 소금이 가져오는 결정적 폐해는 지금까지 나의 식생(食生)을 전면적으로 전환 할 것을 요구한다.

염화나트륨이 우리의 몸에 결코 불필요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생명유지를 위한 필수적 미네랄임에 분명하지만 성인기준 하루 섭취량의 한계인 5~6그램 이상을 먹는 우리의 과다한 소금식단이 가져오는 가공할만한 폐해가 문제인 것이다. 아마도 이 한계기준량의 몇 배를 우린 별 생각 없이 그 짠맛에 중독되어 자기 신체를 학대하고 손상시키는지도 모르며 죽음에 가까워진다는 경고이다.
이 책은 이처럼 소금의 무서운 신체적 해악의 설명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의학적, 생리학적 지식을 통해 적정한 식습관과 신체관리를 지원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보여주고 있다.

나트륨과 염화물이라는 필수 미네랄의 결정체인 소금이 인체에 심각한 위협을 가한다는 것은 달리 해석하면 그만큼 중추적 역할을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몸 속 수분조절, 영양소 수송, 수소이온 농도조절, 뇌의 신진대사, 근육유지 및 혈압유지 조절, 단백질 소화 등 그 기능은 그야말로 절대적이라 할 수 있기조차 하다. 그러나 인체가 요구하는 양 이상이 투입되고 있어 그 균형을 상실한 신체들은 그 만큼 비극적 상황에 처해있는 것이기도 하다는 의미가 된다. 자연의 산물에는 굳이 소금을 별도로 섭취하지 않더라도 이미 충분한 염화나트륨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별도로 가미하는 각종 장류와 가공식품, 음식은 이미 지나칠 만큼 많은 소금을 포함하고 있어 주의하여야 할 것임을 말하는 것이다.

아보카도, 양배추, 바나나, 감자, 브로콜리, 시금치 등 과일과 야채에는 이미 인간이 섭취할 충분한 일일 나트륨과 칼륨이 들어 있는 만큼 별도의 염화나트륨은 과잉 섭취가 되는 것이며, 그러나 우리 식습관이란 단숨에 바뀔 수 있는 것도 아니니 염분 배출을 돕는 감자, 고구마, 오이, 부추, 버섯, 대두, 토마토, 감귤의 섭취는 훌륭한 건강관리 대안이 되어 준다. 더구나 소금이 아니더라도 풍부한 미네랄과 염화나트륨을 포함한 타임, 로즈마리, 바질 같은 채소이자 양념의 제안, 저염식 요리와 간식, 주스, 염분 배출 식단의 친절한 소개는 기꺼이 실천하는데 유용한 도움이 된다.

‘나트륨-칼륨 펌프’에서부터 ‘세포외액', '푸린(purine)의 덫', 각종 호르몬의 작용까지 소금의 인체 내에서의 생리학적 역할과 기능을 대중적으로 쉽게 풀이하여 섭생에 경각심을 갖게 하여주고, 나아가 소금과 관련한 역사적 일화나 당뇨 등 관련된 질환까지 아우르고 있어 편하게 읽을 수 있는 건강 지침서이자 저염식 식생활 실천 가이드로서 효과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짠맛, 거부하기 어려운 맛의 유혹이지만 우리의 말라죽는 체세포들, 고달픈 신장의 장치들, 신경계들을 위해서 점진적으로라도 소금을 줄여나가야 할 것 같다. 짧은 저술이지만 유익함이 큰 저작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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