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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구인가 - 자화상에 숨은 화가의 내면 읽기
전준엽 지음 / 지식의숲(넥서스) / 2011년 3월
평점 :
품절
31명의 걸출한 화가들이 그네들의 자화상에 표현하려한 의미들을 쫓는다. 자신의 치부를 남긴 솔직한 그림에서부터 구현하고자 하는 어떤 가치를 그리려고 했거나, 사회나 예술계를 향한 속내를 투영하기도 하고, 자신의 삶의 여정을 자전적으로 담아내는가하면, 사랑과 배신 그리고 절망이란 현실적 감정을 투사하기도 한다. 인생의 모든 것이 담겨있는 이 풍부한 표현들과 그에 얽힌 한 인간으로서의 화가들의 내면을 따라가는 것은 어느덧 마음 깊은 저 아래의 본질적이고도 근원적인 무엇을 건드린다.
“나는 누구인가?” 이 당혹스런 질문이 가끔, 아니 어느 순간 불현듯 떠올라 심란한 기분으로 내몰곤 한다. 대체 지금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이 우주에서 스치듯 지나갈 도리밖에 없는 존재로서의 나란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일까? 이러한 질문에 사람들마다의 답변은 그야말로 다양한 모습을 할 것이다. 자신이 처한 상황이나 환경, 아니면 웅대한 어떤 지향점이거나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의 자신을...
고흐, 렘브란트, 뒤러, 프리다 칼로, 에곤 실레 등 익히 잘 알려진‘자화상’들이 떠오른다. 더구나 수없이 많은 그들의 삶이나 작품마다에 도사린 에피소드들 덕택에 기계적이고 일반적인 해석을 줄줄 읊어댄다. 그러하다보니 자화상이란 주제 역시 이러한 설명의 범주를 넘지 못할까봐 내심 걱정하면서 책장을 넘긴다. 그러나 이러한 기우는 정말 쓸데없는 오만에 불과하여 어느새 눈빛이 책을 뚫어버릴 듯 흠뻑 빠진 나를 발견하게 된다. 자부심, 고통, 자존감, 삶의 역사, 존재의 본질 등 한 인간의 의지와 내면을 표현하려했던 그들의 마음을 거니는 철학적 평온함에 휩싸이는 것이다.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지 못한 회오(悔悟)의 반성을, 드러난 외면의 불안정한 이 세계의 현상이 아니라 그 이면에 보이지 않는 진실의 세계를 발견하려는 노력을, 생의 마지막 겨울 미완의 삶을 죽음으로 정리하기에 너무 억울했던 그 심사를, 불온한 시대의 정신을 구원하고자 하는 정신적 양식을, 이상적인 인간의 의지에 대한 표상을, 풍경을 바라보는 사람의 뒷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를, 욕망의 건조한 허탈함에 대한 뒤늦은 깨달음을 표현하려 했던 사람들, 화가들에게서‘나’에 대한 숙연한 답변을 발견한다.
49세에 화가에 데뷔한‘앙리 루소’의 기념 촬영하듯 화가의 소품을 들고 선 자화상은 시대를 훌쩍 넘어 격려를 보내고 싶은 충동이 일고, ‘살바도르 달리’의 흐물흐물 흘러내리는 듯한 <구운 베이컨과 부드러운 자화상>은 시대의 혼돈과 비합리성에 의지하려는 정신적 양식의 반영을 비로소 이해하게 하여준다. 또한 공산주의자‘프루동’의 영향을 받은‘귀스타브 쿠르베’ 의 <아틀리에>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통해 그의 예술적, 윤리적 생애 전반을 보게 하여주고, 영국 구상미술의 맥을 잇는‘스탠리 스펜서’의 권태롭고 공허한 눈빛의 남자와 여자의 정사로부터 어긋나고 건조하며 허탈한 욕망과 그 부질없음, 그리고 그러한 삶에서 허우적댔던 자신의 어리석음에 대한 진솔한 반성을 보기도 한다. 왠지 가슴이 저릿저릿한 느낌이 다가오는데, 그들의 진실성, 진정함, 본질을 꿰뚫는 감동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한 폭의 회화가 지닌 이러한 무진장한 감동의 전달은 아마 저자의 인문학적 통찰력이 빚어낸 감수성 짙은 설명으로 강화된 것이라 할 것이다.
인생의 진한 깨달음, 내 시선을 새삼스레 고정 시킨 그림이 있는데, 독일 화가인 ‘카스파르 프리드리히’의 <뤼겐의 하얀 절벽> 이라는 풍경으로 담아낸 자화상이다. 풍경을 바라보는 뒷모습, 배경일 뿐인 풍경이 아니라 경건한 이야기를 쏟아내는 풍경이 내 마음을 시원의 어느 곳으로 데려다 주는 평온함에 한동안 가만히 빠져들었다. 그리고 ‘샤갈’의 유명한 <산책>에서 그동안 알아차리지 못했던 느낌의 본질이 바로 사랑의 바이러스, 따스한 인간애였음을 알게 된 것은 나름 수확이라 하겠다.
그러나 무엇보다 흥미롭게 바라봤던 그림은‘클림트’의 <키스> 에 대한 오마주인‘실레’의 <죽음과 소녀>로 이어진 플롯의 계보, 그 원조인 ‘오스카 코코슈카’의 심리적 자화상이다. “자신은 죽을 것 같은 열정이지만 알마(구스타브 말러의 미망인)에게는 한여름 꿈같은 사랑”에 불과한 것이었음을, 사랑의 배신과 절망에 대한 결별의 갈등과 고통의 적나라함을 보았기 때문일까? 남자와 여자, 사랑은 아마 인류의 영원한 물음일 것이다. 그러니 이것만큼 본질적인 것도 없을 것이고, 무수한 답변들이 표현되는 것일 게다. ‘나’는 누구인가를 다시금 반추해본다. 결국 남자인 나로선 타자인 여자, 그리고 세상의 모든 인간을 포함한 생물과 사물, 그리고 그 관계에서 그 답을 모색하게 된다. 그들이 바로 나의 모습이기에 말이다. 냉정하고 무심한 타인의 눈빛은 바로 ‘나’의 눈빛이요, 그의 영광 또한 ‘나’의 영광일 밖에 없는 것이기에.
미술, 자화상이라는 회화예술이 인문학적 해설과 자못 철학적인 성찰과 함께 감성적으로 구성된 이 저술은 미술사라는 역사적 조류는 물론, 세밀한 회화분석, 화가의 특성, 인간과 인생에 대한 심원한 통찰을 흥미롭게 버무려낸 모처럼의 유쾌하고 지적인 문학적 예술저작이라 하겠다. 위대한 화가들의 진솔한 내면인 자화상을 보았기 때문일까? 연민과 동종(同種)으로서의 그 어떤 뭉클한 여운이 떠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