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강
천운영 지음 / 창비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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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은 끝나지 않았다. 선악과 정의의 무지(無知), 가치의 다원화를 타고 더욱 심화되었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물론 그 형태를 바꾸었지만 말이다. 작중 인물인 고문 기술자, “물고문 전기고문 관절 꺽기의 명수인” 장의사집 둘째 주인이라 불리는‘안부장’은 80년대에만 존재했던 인물은 아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이처럼 일그러진 신념에 포획된 인간들이 꽤나 우리들의 눈앞에 많이 등장하긴 했다. 이런 것도 신념이라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국가를 위해서, 사회를 위해서, 가족의 안녕을 위한 진정 충성스런 애국심의 발로라고, 이 야릇한 애국심이라는 민족주의적 감수성을 자극하면 지적 판단력이 성긴 인간들은 물불을 가리지 않고 이웃을, 동족을 학대하고 살해하는 도구, 즉 자신들과 생각과 가치가 다른 인간은 인간이 아닌 돌과 같은 사물이라고 인식하는 괴물들로 무진장하게 양산되는 그런 사회였으니 말이다.

사실 지금도 권력을 행사하는 일부 인간들은 자신들과 다른 생각들이 권력에 위협이 되기만 하면, 상대를‘빨갱이’로 몰아세우면 그저 게임은 끝난다라는 신화를 가지고 있을 정도니,  60여년 넘게 진행된 전 국민적 세뇌는 뿌리 깊은 것이기도 하다. 독재에 반대해도 빨갱이, 민주적 헌정질서를 훼손하는 권력에 저항해도 빨갱이, 인간의 존엄성과 같은 자연권적 기본권의 보장을 요구해도 빨갱이, 소외된 사회 저소득층을 위한 복지정책을 요구해도 빨갱이, 자원의 불평등한 제도의 시정을 요구해도 빨갱이가 되는 희한한 사회는 이승만이래 부도덕한 정권들의 자기보존을 위한 방책으로 이용되기 시작하여 실로 질기게 악용되는 용어가 되었다.

이렇듯 심하게 왜곡된 용어로 훈육되어 경도된 인간들은 자신들이 부패하고 부도덕한 권력의 한낱 소도구임을 알지 못한 채 존재하지 않는 적을 만들고, 그것이 마치 이 사회를 수호하기 위한 충성이자 의무라고 여기는 것이니 그 무지와 분별없음을 누구 탓이라 해야 할지 안타깝기만 하다. 80년 중반 각종 지면과 각종 미디어에 연일 기사화되던 도피 고문기술자가 있었다.
이는 멀쩡했던 청년이‘책상을 탁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물고문 치사사건이 발단인데, 군사반란을 통해 무력으로 정권을 탈취한 정부의 발표는 이정도로 안하무인(眼下無人)이었고 폭력적이며 무식했다. 그 발표는 그야말로 외국 언론들의 더할 나위없는 가십거리였을 정도로 기막힌 것이었는데, 국민 여론이 심상치 않자 사악하고 폭력적인 그네들의 더러움을 대리할 제물로서의 누군가로 고문경관은 제격이었지 싶다. 소설은 바로 이 인간백정인 고문기술자, 추악한 괴물로 변한 한 어리석은 인간의 도피행적을 쫓는다.

고문경관인‘안’은 충(忠)과 의(義)만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고 자신의 정의를 말한다. 이 사회, 권력에 도전하는 인간들은 그에겐 모두‘개(犬)’에 불과하다. 외판원을 하다 그의 우악스런 폭력을 마음에 들어 한, 소위 비밀 대공(對共)수사기관의 간부에 스카웃되어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찬란한(?) 고문기술을 발휘하는 것인데, 인간의 공포를 끌어내는 자신이 만든 고문 도구인 칠성판, 그리고 물의 채찍, 공포의 각성단계 등 주도면밀한 자기만의 고문기술에 자부심을 가진 인물이다. 이러한 자가 고문 치사사건으로 도피행각을 벌이며 마주하는 불안과 두려움의 실체, 그리고 권력과 썩은 세상의 관성(慣性)들이 비추어진다. 여기에 그의 딸‘선’이 등장하여 모르는 것, 바로 무지함만큼 무섭고 사악한 죄악도 없음을 말한다.

한편 이러한‘안’의 도피 초기에 사회정의와 가족연대가 충돌하는 장면이 있는데, 자수를 권유하는 수사진들에게 그의 아내가 항변하는 소리다. “애국한 죄밖에 더 있어요? 빨갱이 잡는다고...”아마 이것이 우리사회의 본 모습일지도 모른다. 또한 아버지의 부재(不在)에 대해 묻는 딸에게 “빨갱이 새끼 뺨 몇 대 때린 것 뿐...”인데 죄가 되겠느냐고 위로하는 것이다. 이는 도덕, 정의에 대해 자칫 왜곡될 수 있는 문제로 비칠 수 있는데, 고문이란 상습적 폭력행위로 이 땅의 청년들, 무고한 시민들, 즉 타자를 희생시킴으로서 자기가족, 자신들의 안위를 지키는 것, 다시 말해 소위 인간을 자신들의 행복을 위한 수단이라는 도구로 이용하는 것은 결코 진정한 정의가 될 수 없으며, 인간은 그 자체인 목적, 바로 인간의 존엄성 존중이라는 공공선, 공적 이성을 부정하고서는 그 어떠한 정의도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해야한다.

자못 무거운 주제를 이 소설은 비교적 가볍게 읽어낼 수 있게 하는데, 물론 오늘의 사회와는 다른 형태의 폭력을 그리고 있다는 시대의 간극으로 먼 과거의 일처럼 비치는 것이 원인이기도 하지만, 20대의 싱그럽고 발랄한 ‘안’의 딸, ‘선’과, 그야말로 표제처럼 “쌉쌀한 단 맛”이자 “달달한 쓴맛”의 ‘생강’같이 톡 쏘는 문장과 이야기 구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아비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알 필요가 없었던 풋풋한 사랑의 설렘을 기대하던 여대생이 거대한 어둠의 장막인 도피자 아비의 실체를 알게 됨으로써 비로소 삶의 도리와 이 사회의 진실에 눈을 떠가는 과정이 고통스럽고 아프기도하지만 사랑스럽게 성숙하는 과정에서 어떤 희망의 기대와 안도감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릇된 신념이 사회에 보내는 악질적 메시지들에 대한 담론은 비록 과거의 이야기를 소재로 하고 있지만 그 어느 때보다 지금에 더욱 강력한 의미로 다가온다. ‘안’의 도주에 그의 은밀한 비호 연대세력이 마련한 도피처인 갱생원과 원장, 그의 충복들인 감시자들의 모습을 ‘안’이 외부자로 바라보는 시선이다. “쉬파리 새끼”, “그들은 완장을 차고 충성을 다하여 수용자들을 감시하고 제어한다.” 이들에게 버러지같이 파렴치한 놈들이라고 경멸을 보내는‘안’, 바로 그가 그들의 분신이라는 것을 자각하지 못하는데, “씨발놈, 백정 새끼가 거드름은...”하며 이를 지적하는 것이 바로 썩어빠진 갱생원 원장이란 자라는 것은 실소를 머금지 못하게 한다. 부패한 권력과 그에 아첨하고 기생하는 것들, 그래서 보이지 않는 거대한 폭력의 질서와 체계가 되어 악취가 진동하는 권력의 무리를 구성한다. 진짜 개새끼들의 유치찬란한 향연인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권력의 조직은 기막힌 전략을 갖는다. “이 조직이란 게 말이야... (中略) 불가사리 같은 거란 말이지. 잘려나가면 그 자리에 새로운 발이 생겨나는” 이것처럼 말짱하게 권력을 정의하기도 힘들 것이다.

인간의 믿음을 조롱하는 인간백정, 고문기계, “사람들을 아프게 하는”그래서 자신의 그 엉터리 신념을 지키겠다고 미장원 다락방에 은둔하는, 자신의 연대에서 추방당한 짐승의 몰골은 혐오스러움과 인간적 절망이라는 불쾌함만이 더해진다. 악마이면서 존경까지 받고 싶어 했던 이 백정이 쏟아내는 잘못의 부인, 직업적 신념이라는 주장에서 문득 대통령까지 해먹은 자와 그의 충복들인 장씨, 허씨들이 이후 정권의 청문회에서 주절대던 소리가 떠오른다. 무고한 시민을 대량 학살하고 폭력적으로 정권을 탈취한 그자들의 입에서 쏟아져 나온 소리는 ‘국가의 안녕을 위한 소신’이었다는 것이니, 게다가 그 읍소하는 모습은 소설 속 ‘선’이 아비에 보내는 말처럼 “근거 없는 원망과 터무니없는 투정”이요,  “어린애의 거짓 눈물, 자기 자신을 안쓰러워하는 진액, 지독한 자기애에서 나온 눈물, 불가사리의 썩은 진물”이상이라 부를 수 없는 것일 게다.

이들이 위했다는 정의는 고작 자신들의 이익, 권력욕을 위한 것이었을 뿐이며, 그들이 지키려 했다는 가족과 사회의 안녕은 우리의 가족과 이웃들을 살해함으로써 가능했다. 그런데, 이러한 이상한 신념의 주장은 사라지지 않고 더욱 공고해져서 작금의 기득 권력이 빈번하게 사용하고 있다.
제발 선량하고 양식있는 시민들을 위해서 그랬다고 하지 마라. 할 일을 했다고 말하지 마라. 그건 당신들을, 당신들의 구역질나는 사욕을 위해서한 것이라고 지금이라도 솔직하게 말하여야 하는 것이다. 당신들이 불안해하는 권력유지의 두려움과 공포는 끝나지 않는 것이다. 영원히...
또한 주구(走狗)들도 항변한다. 무식한 것, 즉 알지 못하는 것은 죄가 아니라고. 조직에서 시키는 일, 권력이 명령한 일을 수행하는 것, 그것이 설혹 불의이고 위법이며 반인륜적일지언정 그런 것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 알려 하지 않는 것은 죄가 아니라고 말이다. 아니 그러한 구분에 대한 인식조차 이 사회는 요구치 않았고, 권력을 향해 달려가도록 채찍질하는 것이 이 사회 아니었느냐고 말이다.

그러나 주구들에게 안타까운 것은 그들이 언제든 잘라내도 되는 불가사리의 발, 소모품이라서가 아니라 다름의 인정과, 타자의 존엄성, 그리고 정의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죄악의 실행자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모든 악이 시작되는 것이다. 무지의 신념을 깨부수지 못하는 아비와 무지를 뚫고 깨어나는 딸의 대비가 선명하고 자극적인 영상으로 남는다. 짧고 탄탄하면서 사실적인 문장, 원초적으로 묘사되는 내면의 동요와 갈등, 아비와 딸이라는 세대의 교차가 보여주는 미래에 대한 희망적 기대의 메시지, 그리고 감정의 풍랑을 높고 낮게 쉴 새 없이 조종하는 흐름은 작품에 한껏 빠져들 수밖에 없게 한다. 그야말로 일품 소설이다! 아~ 이 맛이 바로 생강 맛이구나 하고 무릎을 탁 내려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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