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스트 차일드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13-1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13
존 하트 지음, 박산호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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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고통에 우린 얼마나 공감하는 것일까? 그 아픔을 어루만져주고 삶의 일상으로 복귀하는데 필요한 견고한 연대를 위한 진정의 시선과 노력을 지속적으로 보낼 수 있는 것일까? 우리가 어떤 고난에 이르렀을 때 누군가 내민 따뜻한 손을 잡아 본 적이 있긴 한가? 우리의 믿음이 함께하는 공동체라는 것이 존재하기나 하는 것인가? 어쩌면 메마르고 조각난 오늘의 인간들의 심성에 이러한 신뢰와 지원과 같은 애정의 유대를 기대한다는 것이 터무니없는 환상일지도 모르겠다. 아니 상당부분은 현실일 것이다.

누군가의 사랑하는 자식이 실종되고, 살해되거나, 가족의 불행한 사건이 사회, 공동체의 관심을 받는 것은 아주 순간적이다. 고작 관음증을 자극하는 미디어의 상업적 호기심이나 마치 도덕적 사회인 냥 가벼운 연민을 표시하는 것이 전부일 게다. 자신만은 자기의 가족만은 그런 고통에 연루되지 않았다고 가슴을 쓸어내리고, 지나친 자극으로 무뎌진 분별력이 곧 무감각과 무관심으로 잊혀지고 결국은 고통 받는 자에게 혐오의 시선을 보내며, 자신들의 연대에서, 공동체에서 격리시키기까지 하는 것이 진실이기조차 하다. 이때 굳건할 거라 믿었던 법과 제도와 사회적 장치들, 사람들에 대한 믿음이 모래알 같은 것이었음을 확인하게 될 때 우린 어느 곳으로부터 보호를 받고 도움을 기대할 수 있을까?

열 세 살의 어린 소년, ‘조니’에게 세상은 이미 어떠한 연대도, 믿음도, 도움도 기대 할 수 없는 냉엄한 곳이다. 오히려 사악하고 기만적이며 위선과 폭력, 잔혹함만이 무성한 곳이다. 이란성 쌍둥이 여동생인‘앨리사’의 실종은 아빠의 가출과 헤어날 수 없는 상실감에 휩싸인 엄마의 무기력으로 가족을 끝없이 몰락시킨다. 무력한 미모의 미망인은 더러운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추악한 인간들의 사냥감이다. 성욕의 탐닉에 장애물인 아이에게 가해지는 상습적 폭력, 약물에 취해 사는 엄마, 사회의 무관심은 소년을 절망하게 한다.

「이제 조니는 그 모든 것, 그렇게 강한 확신을 가지고 배웠던 모든 것에 의심을 품게 됐다. 신은 사람의 고통에 신경 쓰지 않는다. 적어도 어린 아이들의 고통에는. 정의나 인과응보, 지역 공동체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이웃은 서로 돕지 않았고, 착한 사람들은 보상받을 수 없다, 그 모든 말이 헛소리였다. 교회, 경찰, 엄마, 누구도 문제를 해결 할 수 없었다, 그렇게 할 힘도 없었다. 1년 동안 조니는 자신이 혼자라는 새롭고도 냉엄한 진실 속에서 살아왔다.」

결코 세상은 그와 그 가족의 고통을 이해하지도, 돕지도 않았다. 신은 없었다. 아이가 인식한 세상은 선하지 않았으며 어떠한 믿음도 존재하지 않은 냉혹한 세계였다. 실종된 누이동생을 찾기 위해서, 그가 나서야 하는 것이었다. 오직 자신만이 가족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이다. 삼촌도, 이웃도, 공동체도, 경찰과 같은 공권력도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않는다. 세상은 본디 그런 것이라는 확신...
지역사회가 더 이상 기억하지 않는 소녀의 실종이 1년이 지났을 무렵, 또 한명의 소녀가 실종 된다. 경찰 서장은 자기 조직의 체면과 자기 지위의 보전이란 이기심에서 이 새로운 사건을 이해한다. 어린 생명의 구출, 가족의 고통, 범죄의 규명, 공동체의 안전 보장이란 본원적 소명의식이나 의지가 아니다. 모든 것이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대한 손익계산에서 출발한다.

피폐한 사회에 정의와 신뢰를 회복하려는 양심은 항상 있기 마련이라는 다소 고답적인 구태의연함이 있긴 하지만 조니 가족의 고통을 잊지 않는 경찰이 있다. 형사반장, ‘헌트’의 조니에 대한 보호와 미해결 시건인 앨리사 실종에 대한 수사는 출세욕에 찌든 서장의 적대적 시선을 피해 지속된다. 세상이 제아무리 추하고 믿음이란 존재하지 않는 곳일지언정 살아있는 단 하나의 연민, 신뢰라는 불꽃이 어둠을 걷어내는 법인 모양이다. 여기에 사랑, 믿음의 복원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는 소년 조니의 용기 있는 탐색과 도전이 더해져 우리들이 잃고 있는, 아니 이 사회에 절실히 요구되는 미덕들의 실체를 보여준다.

소아성애자의 광기가 저질러대는 수없는 어린아이들의 살해, 알콜과 약물에 취해 약자들을 착취하고 그녀들의 성을 유린하는 파렴치한 부자들의 광란, 하찮은 권력이라도 지니면 자기 이익을 위해서 범죄도 서슴지 않는 공적 권력의 하수인들, 쾌락을 위해서는 유아조차 밀폐된 차안에 방치하는 탕자들, 자기자식의 성공을 위해 남의 자식의 죽음을 은폐하는 두렵기만 한 오늘의 인간들의 일그러지고 뒤틀린 세계가 소년의 용기와 형사반장의 연민에 그 추악한 모습들을 드러낸다.

어린아이들의 죽음과 비열한 인간들의 조합만큼 인간세계의 타락과 추악성을 설명하는 말도 없을 것이다.
인간의 사악함이 빚어내는 고통이 얼마나 많은지 우린 인정해야 할 것이다. 이런 자각을 넓혀나가지 못하는 사회만큼 암울하고 절망적인 곳은 없을 지도 모른다. 가까이는 이웃, 그리고 우리주변의 약자, 어디선가에서 시름하는 사람들에 대한 고통의 공감과 연민의 실천에 대해 되돌아보게 하는 작품이다. 사건이나 사건현장의 추리적 수사라는 진부한 궤적을 벗어나 사건이 지닌 본질적 배경, 인간사회의 실제, 그 파멸적 도덕과 붕괴된 정의에 대해 생각게 하는 구성은 더욱 절실하고 감동적인 새로운 스릴러문학의 방향을 제시한다. 다층적 스토리의 전개, 악의 의외성과 그 실체가 빚어내는 반전 , 예리하게 포착된 인간사회의 통찰 등 실로 품격 있는 빼어난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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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얼구나 강의 오른쪽 일루저니스트 illusionist 세계의 작가 23
츠쯔졘 지음, 김윤진 옮김 / 들녘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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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쪽만 넘겨도 내 삶의 시원(始原), 태곳적 어느 곳을 거니는 듯한 향수를 느끼게 된다. 자연에 대한 경외와 사랑, 순수함, 섭리에 대한 넓디넓은 포용의 숭고한 정신이 그대로 마음속으로 조용히 스며드는 것만 같다. 아니 잊혀졌던, 잠자던 그 순수의 겸허가 비로소 깨어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 느낌을 무어라 해야 할지, 담아낼 길 없는 조악하기만한 언어의 최고표현으로서 그저 아름답고 숭고하다 할 밖에 없다.

내몽고지역 중러국경을 흐르는 헤이룽 강 지류인‘어얼구나 강’의 오른쪽, 울창한 삼림지대에 태고의 삶의 방식을 지켜왔던 작은 부족인‘어원커 족’여인의 따뜻하지만 또한 시린 한 세기의 이야기가 초연하게 그리고 도저하게 흐른다. 그녀의 담담한 듯 치장되지 않은 운명에 대한 순결한 이해가 그 어떤 기교와 세련됨으로 무장한 문명의 목소리를 압도한다. 순록의 먹이인 이끼와 사냥할 동물이 있는 숲 속 자연을 찾아 이동하는 유목민, 20명 남짓한 씨족 단위인‘우리렁’의 소박한 삶의 면모는 그 옛날 그렇게 살았던 것만 같은 잊었던 기억의 그리움처럼 내게 다가온다.

삶의 방식의 변화를 강요하는 문명은 이들의 우리렁에도 더 이상 항거 할 수 없는 세상이 오고, 피붙이들이 떠난 외로이 남은‘시렁주’밖을 응시하는 그녀의 기억은 마냥 원시의 자연에서 삶을 일구던 어린 시절, 그리고 여인이 되어 사랑을 얻게 되고, 또한 사랑하는 이들을 잃게 하는 운명과 마주하며, 떠나보내는 슬픔까지 삶을 오롯이 껴안아왔던 그 순수의 세계로 향한다.
시렁주 밖에 차가운 북풍이 몰아치는 밤, 엄마‘다마라’의 달뜬 목소리와 아빠‘린커’의 소곤거림 속에 일어나는 바람소리조차 순박함과 신비로운 생명력을 지닌 고결한 언어가 되어 향기롭고 유쾌한 세계로 침잠하게 한다.

순록의 무리와 함께하는 이들의 생명과 자연과의 교감, 자연과 일체가 된 어울림, 그리고 존중과 경외의 정신이 만들어내는 의식(儀式)이 금기의 요소들과 교우하며 신성함, 고결한 인간 정신을 자아낸다. 그러나 삶에 도사린 죽음은 우리렁을 떠나지 않는다. 큰아빠인‘니두’ 무당의 신무(神舞)에 내재한 신성과 인간애를 오가는 절제의 비애감이 깃들고 , 니두의 죽음에 이어 무당이 된 동생의 처 ‘니하오’의 숙명적인 삶의 질곡(桎梏)에 비추어지는 고통은 공동체를 향한 사랑과 희생의 숭고함, 도덕적 지고함이 발산하는 숭고미에 이른다.

우발적인 어린 죽음들, 숲의 정령인 자연이 부르는 죽음들, 그리고 문명과 인간탐욕이 재촉하는 강요된 죽음들로 아비와 어미, 형제들, 사촌들, 씨족들의 죽음이 그치지 않는다. 소나무 때론 자작나무위에 누인 주검들, 그 풍장(風葬)의식이 담고 있는 사랑과 영원함에 대한 약속들의 기원은 운명에 대한 또 다른 포용, 가없는 운명의 사랑이란 웅숭깊은 인간정신을 보여준다.
아흔이 된 숲 속의 어원커 족 여인, 그녀 인생의 새벽과 정오, 황혼에 이르는 삶의 시간에 깃든 사랑과 상실, 그녀를 둘러싼 사람들의 오열과 고통, 화해와 결별, 새로운 생명의 탄생과 성장, 그리고 죽음의 일련의 사건들이 오늘, 우리가 겪는 것들의 오염됨, 추함과 얼마나 격이 다른지 그곳으로 달려가고플 정도이다.

일본의 만주침략은 이들 숲속 우리렁에도 손길이 미치고, 남자들의 군사훈련 동원, 그리곤 일본의 패망과 함께 진행된 중국의 공산화와 문화혁명의 이념적 회오리는 이들 때 묻지 않은 자연인들을 비루한 잣대로 훼손하고, 개발이란 명목 하에 삼림의 무참한 벌목은 이들과 순록의 터전을 몰아댄다. 사랑했던 이들의 얼굴과 순록과 산과 강을 바위에 그리며 그리운 이들이 떠난 세계의 아득함을 담아내던 여인, 도시로 나가 유명한 화가가 된 손녀‘이렌나’가 도시를 떠나 어원커 우리렁의 삶과 자연을 그리고, 마침내 강물에 뛰어들 수밖에 없는 것은 우리들이 문명이라 길들여 놓은 것들이 결코 시원의 숭고함에 이를 수 없다는 상실의 고통 때문이었을 것이다. 우리들의 마음의 고향, 그 순결한 자연, 한 없이 너그러운 운명에 대한 사랑이 낮은 목소리로, 그러나 세차게 가슴을 파고든다.

이 작품을 읽게 된 것은 내게 행운이다. 그리고 작가‘츠쯔젠’을 알게 된 것 역시 더 없는 문학적 발견이라 하겠다. 작은 손바닥에 올려놓은 소금을 핥는 순록의 모습과 듬성듬성 지어진 시렁주들, 니하오 무당의 슬픈 영혼곡, 바람소리들, 우리렁을 위해 사냥을 나간 남자들의 사랑 가득한 자부심, 여인들의 투기와 기다림, 이 모든 순수함이 울려대는 아름다움에 어찌 매혹되지 않을 수 있을까! 작가의 말처럼 인류가 갈망하고 도달하고픈 성스러운 경지, 그 너그러움과 선량함, 애틋함을 품은 마음의 경지를 마음껏 거닐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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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기와 우연의 역사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안인희 옮김 / 휴머니스트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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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역사에서도 그러하겠거니와 평범한 개인의 삶에 있어서도 어떤 짧은 순간에, 또는 이해할 수 없는 모순 속에서 숙명적인 결과가 일어난다는 것은 실로 당혹스러운 진실이 아닐 수 없다. 그 결정적 순간이나 몰락으로부터 무한한 상승의지가 솟아나는 위대한 모순을 알 수 있었다면 우린 천재로 불리고 삶과 역사의 전환자로서 우뚝 서있을지도 모른다.

‘슈테판 츠바이크’는 ‘순간’, 그리고 ‘위대한 비극’을 포착했다. 이것들에 드리운 광기, 바로 인간 내면의 심층에서 역동하는 어리석음과 무서운 본능이 지배하는 인간사와 인류의 역사의 전환적 사건들의 실체를 보았다는 것이다. “본질적이고도 지속적인 것은 모두 아주 드물고도 짧은 영감의 순간에 창조된다.”는 그의 말은 이 책에 소개되는 인물들과 역사적 사건 모두를 정의하기에 충분하다. 빼어난 이야기꾼이 문학적 향기 그득한 문장에 담아 들려주는 운명의 진실들, 우린 한 걸음 더 우리 자신의 역사에 다가가게 된다.

선택의 순간, 단 1초의 무의식적이기도 하고 의식적이기도 한 망설임, 그리고 역사의 페이지는 넘어간다. 한 개인은, 인류는 오늘의 세계와는 전혀 다른 길을 걷고 있을지도 모른다. 또한 이길 수 없는 운명의 거대한 힘에 맞서려는 광기가 없었다면 예술도, 과학도, 문명도 없었을지 모른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역사는 우연과 광기가 낳은 위대한 모순의 산물이라고도 할 것이다.

세계사를 바꾼 ‘1초’

1815년, 유럽, 나아가 세계를 뒤흔든 ‘워털루 전투’는 나폴레온이라는 인물의 정치생명과 유럽대륙의 패권 향방을 가름 짓는 절대 절명의 역사로 기록되고 있다. 그러나 이 세계사적 전투가 운명의 부름에 귀 기울이지 못하는 어리석고 무능한 장군, ‘그루쉬’라는 인물의 한 농가에서의 1초, 순간적 오판의 결과였다는 것은 인류의 엄청난 역사라는 것도 사실은 대부분의 일상적이고 지루함이며 본질적인 것은 그 속의 아주 짧은 순간뿐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그 우연의 순간 말이다. 이미 이 미련한 프랑스군 장수를 따돌리고 영국군을 지원하기 위해 워털루로 달려간 프로이센군의 흔적만을 찾는 그루쉬의 1초는 세계의 시간이었던 것이다.

이 1초라는 순간의 시간, 어떤 우연함에 의해 찾아든 시간은 그 순간만큼 무한히 확장되는 시간이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정치범으로 처형대에 끌려가 검은 두건에 시야가 가려지고 사형되기 직전에 교차하는 불타오르는 죽음의 키스, 영원한 빛으로 나아가는 기쁨과 행복이 어울린 지상의 마지막 고통, 그리곤 삶의 달콤함에 미련을 떨치지 못하는 그 찰나(刹那)의 상념들이 이루어지는 시간이다. 칼이 내려치려는 직전의 순간, 처형은 정지되고 생의 순간으로 복귀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얼굴에 매달린“창백한 노란 웃음”은 실로 형언 할 수 없는 인간의, 삶의 미지의 숭고한 무엇이다.

역사의 우연, 그 순간들이 소설이 되어 흐르고, 웅장한 서사시가 되어 호수의 잔잔한 물결처럼 우리의 가슴에 파문을 일으킨다. 삶과 역사의 대부분은 지리멸렬하고 초라하다. 어떠한 것도 지속으로 내내 운명적이지 못한 것이다. 그 짧은 찰나의 시간이 우리의 영원을 규정하고, 지탱한다. 흔해빠진 역사의 소재가 아름다운 문학적 문장으로 변신하여 웅숭깊고 지고한 삶의 교훈으로, 인간 본성에 대한 경이로운 통찰이 되어 심장을 파고든다.

인간의 진실, ‘광기’, 그 모순의 세계

감성의 억제, 이성의 채로 걸러진 이지적 감성을 말하던 대문호 ‘괴테’의 노년에 찾아든 열정, 아마 죽음이 임박한 일흔 네 살의 노(老) 대가에게도 그 불안의 강렬함은 마지막 욕망과 마지막 체념의 경계를 오르내리게 했던 모양이다. 열아홉 살 소녀, ‘울리케 폰 레베초프’를 향한 연정, 다시금 청춘을 소유하고 싶다는 열망, 늙은 베르테르가 다시 깨어나는 그 전환적 외침은 광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광기! 그 인간적 진솔함, 가장 깊고 가장 성숙하고 정말로 가을처럼 이글거리는 문학작품이라 불리는 『마리엔바트의 悲歌』의 탄생을 가져왔으니 말이다.

“어찌 다시 만나기를 희망하랴,
이 날에도 아직 닫혀있는 저 꽃 봉우리를.
낙원도 지옥도 네 앞에 열려 있으니
마음 속 생각들은 얼마나 불안하게 흔들리는지!”

울리케의 키스를 받으며 이별하고 돌아오는 노인의 체념에는 잊을 수 없는 내적 갈등이 안타깝게 출렁인다.

이처럼 광기는 열정이요, 집념이며, 생래적 부조리에 대한 대항이다. 동로마제국을 멸망시킨 마흐메트 2세의 콘스탄티노플 성벽공략을 향한 집념의 산물들, 거대한 대포, 노출된 바다를 우회하기위해 산을 오르는 배는 그야말로 욕망의 실현을 위해 인간이 행하는 광기의 정수를 보여준다.
또한 유럽인들에게 신대륙의 진면을, 광활한 대양 태평양을, 나아가 잉카에 이르는 길을 최초로 드러낸‘발보아’란 인물의 불멸을 향한 도주의 행로는 한 인간의 광기가 세계사의 흐름을 어떻게 뒤바꾸는지를 찬란하게 드러내며, 성공이라는 우연성에만 집착하며 불타올랐던 남극탐험가 스콧의 장엄한 도전은 위대한 비극의 진한 감동을 일깨운다.

더구나 근대적 시간관, 지상에서의 속도, 그 규모나 리듬에 있어서 근본적 변화를 가져온 1837년의 세계사적 사건을 주목하게 하는데, 한 인간의 굽히지 않는 소박한 용기, 그래 광기다. 격리되어 있던 인간 체험을 동시적인 것으로 만들어 준 대 역사, 구대륙과 신대륙을 잇는 대서양의 해저 케이블 설치는 미친 짓이었을 것이다. 모르스부호가 전신(電信)을 타고 순식간에 세계를 연결하였으니, 오늘날의 이동통신기술은 사실 이 최초의 진보를 향한 도전에 비할 것이 못된다.

에필로그

일생의 작품세계에서 인간의 숨겨진 악마성, 광기와 욕망의 본성, 그 순간의 우연에 천착한 ‘슈테판 츠바이크’의 시선이 녹아든 이 저작은 예리한 역사적 통찰을 문학 향기 그득한 소설로, 서사시로, 희곡작품으로 둔갑시켜 우리네 삶의, 감성의 한복판으로 흐르게 한다. ‘헨델’의 숭엄한 <메시아>의 선율로, 공병장교‘루제’의 하룻밤 열정이 조국 프랑스의 국가인 <라마르 세예즈>가 되어 울려 퍼진다.
그리고 ‘톨스토이’의 미완성 희곡 『그리고 어둠속에 빛이 비친다』는 폭력과 권력에 대한 이중 잣대로 가장했던 대문호의 양심을 하나의 희곡으로 완성하기도 한다. ‘아스타포보’ 기차역 대합실에 붙어있는 작고, 좁고, 낮고 가난한 침대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가장 멀리 도망쳐야 했던 노 작가의 죽음을 승화시키면서.

가끔 우리는 거대한 당위를 거스르는 위험한 광기에도 휩쓸리며, 우연한 어느 순간에 자신의 길을 벗어날 필요도 있을 것이다. 거부할 수 없는 운명에 한없이 작기만 한 인간이지만 그것에 저항하는 위험한 우리의 모순된 행동이야말로 바로 위대한 비극 아니겠는가? 삶이란 역사란 그런 것이라고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위대한 전기 작가이자 소설가이며 시인인 츠바이크의 역사, 세상, 인간보기에 다시금 매혹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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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도시 이야기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34
다나카 요시키 지음, 손진성 옮김 / 비채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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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의민주주의와 공화정을 토대로 하는 현대 정치의 그럴듯한 합의의 이면에 내재한 추악한 욕망과 부조리함의 실체를 냉소적 지성에 담아낸 걸작 우화이다.
권력이 행사하는 탐욕의 현장마다에서 툭툭 내던져지는 문장들에는 더없이 예리한 통찰과 지성이 빛나고, 인간과 인간사회의 본성에 대한 신랄하고 냉혹한 비판의 목소리가 어떤 심정적 정화(淨化)를 느끼게 한다.

때는 지구의 대전도(Big Falldown)로 인한 인류의 멸망을 지켜보던 달에 거주하던 200만 명의 인간이 새로이 형성된 지구 대륙의 일곱 지역에 인류문명의 재건을 시도한 이래 100여년이 지난 2190년, 22세기 말이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지상 500미터 이상의 높이로는 날수도 없으며 어떤 시설물도 이에 이를 수 없다. 도달하는 순간 지상인에 대한 감시시스템이 작동하여 레이저로 파괴된다. 월면도시의 인간이 지구 인간들의 하늘, 우주를 박탈 한 것인데, 인간의 약탈적이고 탐욕적인 본능을 제지하겠다는 의지이자, 절대적 지배권을 행사하겠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월면도시로 부터의 통신이 두절되면서 달에 있는 인간의 생존이 불투명해지고, 이는 지구표면 인간들의 억제된 본능의 표출로 이어진다.

얄궂은 장치인데, 하늘을 상실한 인간, 그리고 광대한 대륙에 소수의 인간들이 일곱 개의 도시로 분산되어 있다는 것은 인간의 사고와 행동 양식을 단순화시켜준다. 그래서 보다 투명하고 밀착된 인간의 관찰이 가능하고 그 비루하고 취약한 인간성과 인간사회의 본질을 선명하게 부각시킨다.
멸망 후 불과 1세기만에 인간들은 권력을 만들어내고 폭압과 독재의 뿌리를 내린다. 내 것을 더 많이 소유하고 그것을 과시하며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욕망을 재현하고 확장해나간다. 착취와 억압을 통해 확보된 부와 권력이라는 힘에 의존하는 것인데, 결말이 뻔한 폭력과 전복이라는 인류 역사의 반복을 되풀이하는 것이다.

쫓겨난 권력자는 자기 도시의 이익을 담보로 타도시의 힘을 빌리고, 침략전쟁을 벌인다. 누구를 위한 전쟁인가? 전쟁에 참여하는 전쟁 수행자는 누구인가? 전쟁을 지시하는 권력자, 지배자는 결코 전쟁을 수행하는 자가 아니다. 인류가 전쟁이라는 편한 수단을 발명한 이래로 결코 변하지 않는 만고불변의 진리. 그것은 “전쟁을 시키는 사람이 전쟁을 수행하는 사람보다 저수준의 생활을 보낸 예는 역사상 단 한 번도 없었다.”는 것이다. 자신이 가지고 싶은 것을 빼앗기 위해 권력이란 녀석은 타인을 합법적으로 희생시킬 수 있는 힘을 행사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이처럼 소설은 권력의 행사와 그 본질에 대해서, 그리고 그것을 수행하는 자에 대한 본성의 조명을 통해 인간성이란 것의 졸렬함과 비열함, 던적스러움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더구나 이들 책략의 설계 주체인 정치와 권력의 천박성과 저열함의 맨 얼굴들을 여지없이 구정물에 처박는다.
일곱 도시의 수장들과 이들의 힘을 실행하는 무력장치인 군(軍)의 리더들의 면면을 통해 정치적 술수, 조직에서의 생존, 인간적 삶이란 무엇인지, 권력과 정치의 현실적 생태와 당위로서의 진실들을 얘기한다. 나아가서 국제정치라 할 수 있는 도시간의 동맹과 전쟁 등, 힘의 균형을 향한 소위 외교라는 것의 은폐된 진실로부터 인간사회에 근원적으로 도사리고 있는 이기심, 그 비굴함과 야비함을 파헤치기도 한다.

한편, 소설의 서사 축을 지탱한다고도 할 수 있는 장군들, 성공한 가해자라는 파렴치한 정치와 거리를 두려는 인물들, 그리고 탐욕만으로 뭉쳐진 권력자들과 같은 인물들의 성격과 행동을 따라가면서 마주하게 되는 사실적 묘사들은 바로 이거야! 라고 오늘의 현실에서 오는 답답하고 엉켰던 심란한 마음을 풀어준다. 일례로 “우리 시(市)에 리더가 될 수 있는 놈은 한 놈도 없다. 작은 이익을 탐식하는 쥐새끼들이 있을 뿐이다.”라던가, “기업이나 업계에 결탁해 그 이익을 대변하는 것에 만족”하며, “정계는 정치 업계에 지나지 않았고”와 같은 비루한 정치의 현실상을 말하듯이 오늘의 우리 사회에 발어지고 있는 현실과 중첩되면서 낯설지 않은 문장들로 다가온다.

더구나 “이익을 좇다보니 시야가 좁아지고, 그에 따라 논리가 아닌 힘에 의지한다는 순서”와 같은 구절에 이르면 “시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것에 지나지 않는 권력을 자신의 사유물로 착각하고 일신의 이익을 도모하는 데에 광분하는 모습에는 진절머리가 났다.”는 것처럼 정치인들의 더러운 욕구로 침해당하는 시민의 고단한 삶을 바라보는 듯하여 울화가 치밀기도 한다.

또한 유능한 정치가도 아닌 자가 “정치가는 도덕이나 윤리에 의해 판정받는 게 아니라 정책이나 능력에 의해 평가되어야 한다?”고 떠들어대기도 한다. “이런 대사는 부패 했을 뿐 아니라 무능한 정치가가 자기를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해야 할 것은 아니다.”이와 같은 한국의 저열한 정치사회, 거기에 지적 판단력까지 성긴 우민화된 대중까지 더해 이러한 인간적 결함이 증폭되기만 한다.

대의민주주의는 과연 이대로 유지되어야 하는 것일까? 시민은 권력자들에게 어떤 의미일까? “선거 때에는 표이며, 세금에 관해서는 납세카드 한 장, 그리고 전쟁 때에는 소모품으로서의 일개 병사.”라는 말이 오늘의 진실이 아닐까? 마치 삼국지를 보는 듯, 또한‘조너던 스위프트’가 냉혹하게 비판하던 야후같은 인간들의 세상이 떠오른다. 어쩌면 사용하는 언어만 복잡해졌을 뿐, 정신 수준은 유치원생의 야만적 탐욕과 다르지 않다는 진단처럼 한국사회의 정치를 일갈하는 문장도 없을 듯하다.
“범용한 정치가에게 진리를 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무슨 말인지 알아듣기나 하겠는가? 혹 한국 정치를 비판하는 것이냐고 물을지도 모르겠다.
은거한 천재 정치인‘류 웨이’가 말하듯이 정치를 비판하는 게 아니라 범죄를 규탄하는 것이다! 진정한 정치는 자취를 감추고 범죄와 더러운 욕망만 난무하는 세계를.

재치와 기발한 서사로 구성된 일곱 도시의 동맹과 분열, 전쟁과 야합의 시나리오는 읽는 내내 흥분을 감추지 못하게 한다. 변하지 못하는 추악한 인간성의 적나라함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인간사회의 정치라는 위악에 대한 촌철살인의 명문장들이 가져오는 감동, 위트와 냉소가 뒤섞인 번뜩이는 비판적 통찰력 때문이다. 배경 장치의 탁월함은 물론 전쟁과 정치와 같은 제재의 적합성, 스토리의 완벽성, 인물이 제공하는 인간성의 투명한 관찰들까지 매혹적 지성으로 가득한 작품이다. 아니 이 소설이야말로 걸작이란 이름을 붙여야 할 것이다. 고전적 지위를 얻는 작품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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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P 2011-10-18 15: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이 달의 당선작에서 보고 이렇게 찾아와 글을 읽습니다. 이 작가가 은하영웅전설의 작가가 맞는지요 ^^ 참으로 대단한 작품을 쓰는 작가라고 생각이 드네요. 은하영웅전설 역시 마음을 졸이며 읽었는데 그의 작품이 또 이렇게 있다는 사실을 알았네요.
정치적 현실을 우화로 쓴 소설을 참 좋아하는데 이 소설도 꼭 읽어 봐야 겠네요. ^^

필리아 2011-10-20 20:05   좋아요 0 | URL
네, 동일 작가의 작품입니다. 꽤 오래된 작품인데 국내에 선을 늦게 보인것이죠. 대단한 작가라는데 동감입니다. ^^

달사르 2011-10-23 18: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정치우화. 잼있겠어요!
저는 지금 '은하영웅전설' 보고 있거든요. 제가 지금까지 읽고 있는 부분은 지구와는 무관한 우주의 타 행성들에서 서로 전쟁을 벌이고, 전제주의가 등장하고, 전제주의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고, 그 반대파가 조금씩 변질되어가고, 그 와중에 영웅이 한 명씩 나타나고 뭐 이 정도인데요. 인간은 우주에서도 지금과 비슷하구나..싶더라구요.

근데, 어머나. 동일 작가의 작품이로군요? ㅎㅎ 리뷰 잘 봤습니다. '은하영웅전설' 다 보고나서 이 책도 봐야겠어요.

필리아 2011-10-23 20:13   좋아요 0 | URL
와~ 부럽습니다. 전 재출간된 이번의 세트 구입을 벼르고만 있거든요...^&*
 
산마처럼 비웃는 것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35
미쓰다 신조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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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이함, 아마 인간의 지성으로 헤아려지지 않는 무엇에 붙여진 표현일 것이다. 혹은 직면하고 싶지 않은 두려움이나 꺼림직 한 것, 무언가 은폐하고 싶은 것에 접근치 못하게 하려는 제약, 금지의 다른 표상일수도 있을 것이다. 어느 마을이나 지역에 전해 내려오는 이러한 기담은 사실 이러한 것들이 응집된 이야기이기에 당대의 시대상이나 은닉된 진실이라 하여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그 으스스하고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기담의 요소들이 진실에 정면으로 마주하는 것을 회피하게 한다. 그래서 이 터부의 실체를 들여다보려면 그 부정하거나 속된 것으로 들어갈 용기가 필요하다. 
작가‘미쓰다 신조’는 바로 이러한 괴이에 명철한 이성의 메스를 갖다 댐으로써 호러물의 공허한 공포를 현실이란 추리의 세계로 끌어낸다. 초월적 또는 환상적 세계를 현실, 속세의 감추어진 욕망의 세계로 전환하는 것이다. 금기란 바로 이처럼 음흉함을 이면에 감추는 가해자의 그럴듯한 장치라 할 수 있다.

상당한 분량을 차지하는 소설의 시작 부는 ‘고키 노부요시’라는 자의 괴이한 체험기이다. 고향마을 하도의 전통의식으로서 성년의 통과의례인 성인참배를 위해 신산(神山)인 삼산(三山)을 홀로 종주하면서 기도하는 것이다. 이 행로에서 고키는 산녀(山女), 산마(山魔)에 쫒기는 환영과 괴이한 울음소리 등 환청에 시달리다가 길을 잃어 흉산(凶山)인 부름산에 들어가게 되고 산속에 어울리지 않게 서있는 집과 사람들을 만난다. 산 넘어 가스미가(家)의 20여 년 전 집을 떠났다는 ‘다쓰이치’일가를 만난 것인데, 아침에 일어나자 홀연히 이들 가족이 모두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이 기이함과 산마의 두려움을 떨치지 못한 고키가 ‘도조 겐조’라는 기담수집가이자 아마추어 탐정에게 체험의 기록을 보내 그 실상의 규명을 의뢰한 것인데, 여기서부터 향토색 짙었던 괴담은 과학적 이성의 추리, 경찰의 수사라는 현실의 세계와 융합하기 시작한다.
이 기담이 현실로 진입하는 사건의 발단은 다쓰이치 일가가 사라졌다는 부름산의 주인인 가지토리가(家)의 당주인‘리키하라’의 도움을 받아 산 속 밀폐된 집에서 얼굴이 불타는 시신을 발견하는 것이다. 안에서만 잠기는 대문의 집 안에서 살해자는 자취가 없고 막 살해된 듯한 사람의 얼굴을 숨기려 한듯 얼굴을 알 아 볼 수 없게 불을 지른 것이다. 소위 밀실트릭이란 열린 공간의 상식을 차단하려는 은폐 술책이다. 당연히 이 밀실책략에 무언의 진실이 숨겨져 있음은 물론이다.

그리고 흉산인 부름산이 오래전 금광이 있었다는 전언이나, 다쓰이치나 그 형제인 다쓰조의 금광에 얽힌 끔찍한 소문이 실려 금기란 바로 금, 재물에 대한 탐욕의 은폐가 오랜 세월 축적된 현상임을 암시한다. 살해된 자의 신분이 다쓰이치, 다쓰지, 다쓰조 삼형제의 집안인 가스미가를 지키는 다쓰지임이 드러나면서 사건은 본격화한다. 죽은 다쓰지는 구마도를 수호하는 신령인 여섯 지장의 첫 번째인 백색지장의 표식을 한 형상이다. 연쇄 살인을 예고하는 것인데, 곧 이어 두 번째인 흑색지장을 모신 기도당에서 다쓰지의 아들이 살해된 채 발견된다. 이제 살인 사건은 가미스가 가족 간의 금광에 대한 물밑 다툼으로 추정되지만 기담가 겐조를 돕던 가지토리가의 당주 리키하라가 살해됨으로써 사건은 오리무중에 빠진다.

어느 향토마을의 흉산에 얽힌 민담의 이면에 인간의 추악한 사욕이 잠자고 있다는 이야기는 사실 진부하기까지 한 소재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가스미가 세 형제의 사라짐과 죽음의 추정, 여인네의 치정, 재물다툼, 그리고 기괴한 산마의 전설과 얽혀 교묘한 속임수이거나 함정으로 작동하며 정교하고 치밀한 추리의 지적 세계로 일궈내는 작가의 구성은 혀를 내두를 정도로 참신하다. 이윽고 가스미가의 성인 모두가 살해되는데 이르고 현지에 차려진 수사팀은 범인을 찾아내는데 한계에 몰린다. 외지인이라고는 기담가 겐조와 수도를 하는 순례자, 단 두 명뿐인 작은 마을의 연쇄살인범이 오리무중이라는 것은 혹시 모를 다쓰이치 일가나 오래전 죽었거나 실종되었다는 다쓰조로 인해 수사팀을 흉산의 수색으로 이끈다.

현지 수사팀을 지휘하는 경부의 신뢰 속에 범인의 실체로 다가가는 겐조의 논리와 추리력은 감탄을 연신 터뜨리게 한다. 범인으로서 완벽한 배경논리가 정립되었는가하면 여지없이 반론, 반대증거로 허물어진다. 반전, 대반전, 그리고 허를 찔리는 역전에 작품의 묘미는 한없이 고조된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일생, 삶을 지탱케 하는 가치가 있다. 그것이 누군가에 의해 훼손되어 정체성이 손상된다면 엄청난 화를 불러 올지도 모른다. 산마가 어디 있겠는가! 타인을 단지 조롱하는 것만으로도 멸문(滅門)의 끔찍한 재앙에 직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튼 트릭의 정수를 보았다는 느낌이다. 깔끔하고 알찬, 진정 명쾌하고 세련된 작품으로 기억될 것 같다. 완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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