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도시 이야기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34
다나카 요시키 지음, 손진성 옮김 / 비채 / 2011년 8월
평점 :
품절


대의민주주의와 공화정을 토대로 하는 현대 정치의 그럴듯한 합의의 이면에 내재한 추악한 욕망과 부조리함의 실체를 냉소적 지성에 담아낸 걸작 우화이다.
권력이 행사하는 탐욕의 현장마다에서 툭툭 내던져지는 문장들에는 더없이 예리한 통찰과 지성이 빛나고, 인간과 인간사회의 본성에 대한 신랄하고 냉혹한 비판의 목소리가 어떤 심정적 정화(淨化)를 느끼게 한다.

때는 지구의 대전도(Big Falldown)로 인한 인류의 멸망을 지켜보던 달에 거주하던 200만 명의 인간이 새로이 형성된 지구 대륙의 일곱 지역에 인류문명의 재건을 시도한 이래 100여년이 지난 2190년, 22세기 말이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지상 500미터 이상의 높이로는 날수도 없으며 어떤 시설물도 이에 이를 수 없다. 도달하는 순간 지상인에 대한 감시시스템이 작동하여 레이저로 파괴된다. 월면도시의 인간이 지구 인간들의 하늘, 우주를 박탈 한 것인데, 인간의 약탈적이고 탐욕적인 본능을 제지하겠다는 의지이자, 절대적 지배권을 행사하겠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월면도시로 부터의 통신이 두절되면서 달에 있는 인간의 생존이 불투명해지고, 이는 지구표면 인간들의 억제된 본능의 표출로 이어진다.

얄궂은 장치인데, 하늘을 상실한 인간, 그리고 광대한 대륙에 소수의 인간들이 일곱 개의 도시로 분산되어 있다는 것은 인간의 사고와 행동 양식을 단순화시켜준다. 그래서 보다 투명하고 밀착된 인간의 관찰이 가능하고 그 비루하고 취약한 인간성과 인간사회의 본질을 선명하게 부각시킨다.
멸망 후 불과 1세기만에 인간들은 권력을 만들어내고 폭압과 독재의 뿌리를 내린다. 내 것을 더 많이 소유하고 그것을 과시하며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욕망을 재현하고 확장해나간다. 착취와 억압을 통해 확보된 부와 권력이라는 힘에 의존하는 것인데, 결말이 뻔한 폭력과 전복이라는 인류 역사의 반복을 되풀이하는 것이다.

쫓겨난 권력자는 자기 도시의 이익을 담보로 타도시의 힘을 빌리고, 침략전쟁을 벌인다. 누구를 위한 전쟁인가? 전쟁에 참여하는 전쟁 수행자는 누구인가? 전쟁을 지시하는 권력자, 지배자는 결코 전쟁을 수행하는 자가 아니다. 인류가 전쟁이라는 편한 수단을 발명한 이래로 결코 변하지 않는 만고불변의 진리. 그것은 “전쟁을 시키는 사람이 전쟁을 수행하는 사람보다 저수준의 생활을 보낸 예는 역사상 단 한 번도 없었다.”는 것이다. 자신이 가지고 싶은 것을 빼앗기 위해 권력이란 녀석은 타인을 합법적으로 희생시킬 수 있는 힘을 행사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이처럼 소설은 권력의 행사와 그 본질에 대해서, 그리고 그것을 수행하는 자에 대한 본성의 조명을 통해 인간성이란 것의 졸렬함과 비열함, 던적스러움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더구나 이들 책략의 설계 주체인 정치와 권력의 천박성과 저열함의 맨 얼굴들을 여지없이 구정물에 처박는다.
일곱 도시의 수장들과 이들의 힘을 실행하는 무력장치인 군(軍)의 리더들의 면면을 통해 정치적 술수, 조직에서의 생존, 인간적 삶이란 무엇인지, 권력과 정치의 현실적 생태와 당위로서의 진실들을 얘기한다. 나아가서 국제정치라 할 수 있는 도시간의 동맹과 전쟁 등, 힘의 균형을 향한 소위 외교라는 것의 은폐된 진실로부터 인간사회에 근원적으로 도사리고 있는 이기심, 그 비굴함과 야비함을 파헤치기도 한다.

한편, 소설의 서사 축을 지탱한다고도 할 수 있는 장군들, 성공한 가해자라는 파렴치한 정치와 거리를 두려는 인물들, 그리고 탐욕만으로 뭉쳐진 권력자들과 같은 인물들의 성격과 행동을 따라가면서 마주하게 되는 사실적 묘사들은 바로 이거야! 라고 오늘의 현실에서 오는 답답하고 엉켰던 심란한 마음을 풀어준다. 일례로 “우리 시(市)에 리더가 될 수 있는 놈은 한 놈도 없다. 작은 이익을 탐식하는 쥐새끼들이 있을 뿐이다.”라던가, “기업이나 업계에 결탁해 그 이익을 대변하는 것에 만족”하며, “정계는 정치 업계에 지나지 않았고”와 같은 비루한 정치의 현실상을 말하듯이 오늘의 우리 사회에 발어지고 있는 현실과 중첩되면서 낯설지 않은 문장들로 다가온다.

더구나 “이익을 좇다보니 시야가 좁아지고, 그에 따라 논리가 아닌 힘에 의지한다는 순서”와 같은 구절에 이르면 “시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것에 지나지 않는 권력을 자신의 사유물로 착각하고 일신의 이익을 도모하는 데에 광분하는 모습에는 진절머리가 났다.”는 것처럼 정치인들의 더러운 욕구로 침해당하는 시민의 고단한 삶을 바라보는 듯하여 울화가 치밀기도 한다.

또한 유능한 정치가도 아닌 자가 “정치가는 도덕이나 윤리에 의해 판정받는 게 아니라 정책이나 능력에 의해 평가되어야 한다?”고 떠들어대기도 한다. “이런 대사는 부패 했을 뿐 아니라 무능한 정치가가 자기를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해야 할 것은 아니다.”이와 같은 한국의 저열한 정치사회, 거기에 지적 판단력까지 성긴 우민화된 대중까지 더해 이러한 인간적 결함이 증폭되기만 한다.

대의민주주의는 과연 이대로 유지되어야 하는 것일까? 시민은 권력자들에게 어떤 의미일까? “선거 때에는 표이며, 세금에 관해서는 납세카드 한 장, 그리고 전쟁 때에는 소모품으로서의 일개 병사.”라는 말이 오늘의 진실이 아닐까? 마치 삼국지를 보는 듯, 또한‘조너던 스위프트’가 냉혹하게 비판하던 야후같은 인간들의 세상이 떠오른다. 어쩌면 사용하는 언어만 복잡해졌을 뿐, 정신 수준은 유치원생의 야만적 탐욕과 다르지 않다는 진단처럼 한국사회의 정치를 일갈하는 문장도 없을 듯하다.
“범용한 정치가에게 진리를 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무슨 말인지 알아듣기나 하겠는가? 혹 한국 정치를 비판하는 것이냐고 물을지도 모르겠다.
은거한 천재 정치인‘류 웨이’가 말하듯이 정치를 비판하는 게 아니라 범죄를 규탄하는 것이다! 진정한 정치는 자취를 감추고 범죄와 더러운 욕망만 난무하는 세계를.

재치와 기발한 서사로 구성된 일곱 도시의 동맹과 분열, 전쟁과 야합의 시나리오는 읽는 내내 흥분을 감추지 못하게 한다. 변하지 못하는 추악한 인간성의 적나라함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인간사회의 정치라는 위악에 대한 촌철살인의 명문장들이 가져오는 감동, 위트와 냉소가 뒤섞인 번뜩이는 비판적 통찰력 때문이다. 배경 장치의 탁월함은 물론 전쟁과 정치와 같은 제재의 적합성, 스토리의 완벽성, 인물이 제공하는 인간성의 투명한 관찰들까지 매혹적 지성으로 가득한 작품이다. 아니 이 소설이야말로 걸작이란 이름을 붙여야 할 것이다. 고전적 지위를 얻는 작품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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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P 2011-10-18 15: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이 달의 당선작에서 보고 이렇게 찾아와 글을 읽습니다. 이 작가가 은하영웅전설의 작가가 맞는지요 ^^ 참으로 대단한 작품을 쓰는 작가라고 생각이 드네요. 은하영웅전설 역시 마음을 졸이며 읽었는데 그의 작품이 또 이렇게 있다는 사실을 알았네요.
정치적 현실을 우화로 쓴 소설을 참 좋아하는데 이 소설도 꼭 읽어 봐야 겠네요. ^^

필리아 2011-10-20 20:05   좋아요 0 | URL
네, 동일 작가의 작품입니다. 꽤 오래된 작품인데 국내에 선을 늦게 보인것이죠. 대단한 작가라는데 동감입니다. ^^

달사르 2011-10-23 18: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정치우화. 잼있겠어요!
저는 지금 '은하영웅전설' 보고 있거든요. 제가 지금까지 읽고 있는 부분은 지구와는 무관한 우주의 타 행성들에서 서로 전쟁을 벌이고, 전제주의가 등장하고, 전제주의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고, 그 반대파가 조금씩 변질되어가고, 그 와중에 영웅이 한 명씩 나타나고 뭐 이 정도인데요. 인간은 우주에서도 지금과 비슷하구나..싶더라구요.

근데, 어머나. 동일 작가의 작품이로군요? ㅎㅎ 리뷰 잘 봤습니다. '은하영웅전설' 다 보고나서 이 책도 봐야겠어요.

필리아 2011-10-23 20:13   좋아요 0 | URL
와~ 부럽습니다. 전 재출간된 이번의 세트 구입을 벼르고만 있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