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얼구나 강의 오른쪽 일루저니스트 illusionist 세계의 작가 23
츠쯔졘 지음, 김윤진 옮김 / 들녘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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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쪽만 넘겨도 내 삶의 시원(始原), 태곳적 어느 곳을 거니는 듯한 향수를 느끼게 된다. 자연에 대한 경외와 사랑, 순수함, 섭리에 대한 넓디넓은 포용의 숭고한 정신이 그대로 마음속으로 조용히 스며드는 것만 같다. 아니 잊혀졌던, 잠자던 그 순수의 겸허가 비로소 깨어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 느낌을 무어라 해야 할지, 담아낼 길 없는 조악하기만한 언어의 최고표현으로서 그저 아름답고 숭고하다 할 밖에 없다.

내몽고지역 중러국경을 흐르는 헤이룽 강 지류인‘어얼구나 강’의 오른쪽, 울창한 삼림지대에 태고의 삶의 방식을 지켜왔던 작은 부족인‘어원커 족’여인의 따뜻하지만 또한 시린 한 세기의 이야기가 초연하게 그리고 도저하게 흐른다. 그녀의 담담한 듯 치장되지 않은 운명에 대한 순결한 이해가 그 어떤 기교와 세련됨으로 무장한 문명의 목소리를 압도한다. 순록의 먹이인 이끼와 사냥할 동물이 있는 숲 속 자연을 찾아 이동하는 유목민, 20명 남짓한 씨족 단위인‘우리렁’의 소박한 삶의 면모는 그 옛날 그렇게 살았던 것만 같은 잊었던 기억의 그리움처럼 내게 다가온다.

삶의 방식의 변화를 강요하는 문명은 이들의 우리렁에도 더 이상 항거 할 수 없는 세상이 오고, 피붙이들이 떠난 외로이 남은‘시렁주’밖을 응시하는 그녀의 기억은 마냥 원시의 자연에서 삶을 일구던 어린 시절, 그리고 여인이 되어 사랑을 얻게 되고, 또한 사랑하는 이들을 잃게 하는 운명과 마주하며, 떠나보내는 슬픔까지 삶을 오롯이 껴안아왔던 그 순수의 세계로 향한다.
시렁주 밖에 차가운 북풍이 몰아치는 밤, 엄마‘다마라’의 달뜬 목소리와 아빠‘린커’의 소곤거림 속에 일어나는 바람소리조차 순박함과 신비로운 생명력을 지닌 고결한 언어가 되어 향기롭고 유쾌한 세계로 침잠하게 한다.

순록의 무리와 함께하는 이들의 생명과 자연과의 교감, 자연과 일체가 된 어울림, 그리고 존중과 경외의 정신이 만들어내는 의식(儀式)이 금기의 요소들과 교우하며 신성함, 고결한 인간 정신을 자아낸다. 그러나 삶에 도사린 죽음은 우리렁을 떠나지 않는다. 큰아빠인‘니두’ 무당의 신무(神舞)에 내재한 신성과 인간애를 오가는 절제의 비애감이 깃들고 , 니두의 죽음에 이어 무당이 된 동생의 처 ‘니하오’의 숙명적인 삶의 질곡(桎梏)에 비추어지는 고통은 공동체를 향한 사랑과 희생의 숭고함, 도덕적 지고함이 발산하는 숭고미에 이른다.

우발적인 어린 죽음들, 숲의 정령인 자연이 부르는 죽음들, 그리고 문명과 인간탐욕이 재촉하는 강요된 죽음들로 아비와 어미, 형제들, 사촌들, 씨족들의 죽음이 그치지 않는다. 소나무 때론 자작나무위에 누인 주검들, 그 풍장(風葬)의식이 담고 있는 사랑과 영원함에 대한 약속들의 기원은 운명에 대한 또 다른 포용, 가없는 운명의 사랑이란 웅숭깊은 인간정신을 보여준다.
아흔이 된 숲 속의 어원커 족 여인, 그녀 인생의 새벽과 정오, 황혼에 이르는 삶의 시간에 깃든 사랑과 상실, 그녀를 둘러싼 사람들의 오열과 고통, 화해와 결별, 새로운 생명의 탄생과 성장, 그리고 죽음의 일련의 사건들이 오늘, 우리가 겪는 것들의 오염됨, 추함과 얼마나 격이 다른지 그곳으로 달려가고플 정도이다.

일본의 만주침략은 이들 숲속 우리렁에도 손길이 미치고, 남자들의 군사훈련 동원, 그리곤 일본의 패망과 함께 진행된 중국의 공산화와 문화혁명의 이념적 회오리는 이들 때 묻지 않은 자연인들을 비루한 잣대로 훼손하고, 개발이란 명목 하에 삼림의 무참한 벌목은 이들과 순록의 터전을 몰아댄다. 사랑했던 이들의 얼굴과 순록과 산과 강을 바위에 그리며 그리운 이들이 떠난 세계의 아득함을 담아내던 여인, 도시로 나가 유명한 화가가 된 손녀‘이렌나’가 도시를 떠나 어원커 우리렁의 삶과 자연을 그리고, 마침내 강물에 뛰어들 수밖에 없는 것은 우리들이 문명이라 길들여 놓은 것들이 결코 시원의 숭고함에 이를 수 없다는 상실의 고통 때문이었을 것이다. 우리들의 마음의 고향, 그 순결한 자연, 한 없이 너그러운 운명에 대한 사랑이 낮은 목소리로, 그러나 세차게 가슴을 파고든다.

이 작품을 읽게 된 것은 내게 행운이다. 그리고 작가‘츠쯔젠’을 알게 된 것 역시 더 없는 문학적 발견이라 하겠다. 작은 손바닥에 올려놓은 소금을 핥는 순록의 모습과 듬성듬성 지어진 시렁주들, 니하오 무당의 슬픈 영혼곡, 바람소리들, 우리렁을 위해 사냥을 나간 남자들의 사랑 가득한 자부심, 여인들의 투기와 기다림, 이 모든 순수함이 울려대는 아름다움에 어찌 매혹되지 않을 수 있을까! 작가의 말처럼 인류가 갈망하고 도달하고픈 성스러운 경지, 그 너그러움과 선량함, 애틋함을 품은 마음의 경지를 마음껏 거닐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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