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나긴 하루
박완서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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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자신의 육신붙이와 이내 같이 할 것을 예견하였던 것일까? 생전의 마지막 작품이랄 수 있는 「석양에 등을 지고 그림자를 밟다」는 단편이 자신의 일대기로 써진 자전적 소설인 것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자식을 앞세운 어머니이자 여인의 통한의 글 인 것에서 숙연함을 갖게 된다. 마침내 기나긴 인생이란 하루를 마치고 평화로운 그녀의 내세로 가셨으리라는 믿음과 함께 감히 진심의 명복을 빈다.

 

이 첫 번째 수록 작품은 『그 남자네 집』이나 『아주 오래된 농담』등 몇 편의 장편들을 떠 올리게 한다. 작가의 성장기와 전쟁 통의 성년기 등 당대의 묘사가 중첩되는 것인데, 아마 그녀가 천착했던 “걷잡을 수 없는 증언의 욕구”가 고스란히 녹아있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게다가 이 작품은 작가의 글쓰기가 무엇을 의미하려 했던 것인지도 읽게 되는데, 전쟁의 모순, 이념의 허위가 만들어 낸 터무니없는 폭력의 고발과 복수를 삼키는 수단이 되었다는 고백도 있다. 그녀의 인생 후반부는‘내 붙이’의 죽음이 가져온 삶의 자괴감 속에 견딜 수 없는 슬픔의 시간이었던 듯하다. 더 이상 “내 식구가 귀가하는 발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된, 사랑하던 이들이 부재하는 삶의 쓸쓸함이 사무치게 그려져 있다.

 

이 부재의 공허함은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이라는 작품에 가 닿는데, 민주화 운동 중 희생된 자식의 어머니, 그 자식을 상실한 어미의 가슴 깊은 곳을 울려대는 입을 앙다문 통곡이 억제된 처절함을 통해 자식의 죽음이란 어쭙잖은 연민으로 위로되는 것이 아님을 비로소 가슴으로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인물이나 출세나 건강이나 그런 것 말고 다만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생명의 실체가 그렇게 부럽더라구요. 세상에 어쩌면 그렇게 견딜 수 없는 질투가 다 있을까요?”

 

반편이라도 산 자식을 곁에 둔 여인네에 대한 이‘질투’라는 단어가 이렇게 진실로 다가왔던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돼먹지 않은 기득권을 지키겠다고, 권력을 차지하겠다고 거짓된 이념으로 시민을 사지에 몰아넣는 폭력의 흔적은 이렇게 이 땅에 치유되지 않고 남아 있음이다. 그 생명을 대체 어떤 것이 대신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처럼 이 땅에 저질러진 폭력의 기억과 상흔들이 한 여인에게 바이러스처럼 잠재한 고통의 기억으로 술회되는 「빨갱이 바이러스」란 작품에 고스란히 배어있다. 할아버지, 아버지에 이어 우연히 지키게 된 고향집을 팔지 못하고 별장처럼 이용하는 여자가 폭우로 길이 끊겨 교통편을 잃은 낯선 세 여자와 한 밤을 같이하며 나눈 고백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녀들의 고백이란 외도와 불륜, 성적 욕망과 환락 등 망측하고 지저분한 자신들만의 비밀들이다. 그러나 여자는 고백 할 것이 없다고 등을 돌리지만 결코 입 밖에 낼 수 없는 잠복한 기억을 더듬는다.

 

전쟁이 한창이던 시절 북쪽으로 넘어갔던 삼촌을 삽으로 내려쳐 죽였던 아버지와 그 삼촌을 마당에 묻었으리라는 짐작, 즉 “이념 갈등이 동기간의 골육상쟁으로 치달은”, 발설 할 수 없는 고통의 기억이다. 그래서 “나의 입과 우리 마당은 동일”한 것이 되고, “둘 다 폭력을 삼켰다. 폭력을 삼킨 몸은 무쇠같이 단단한 것 같지만 자주 아프다”는 것이다.

폭력의 기억을 품고 있는 이 땅은 ‘빨갱이 바이러스’로 되살아나 수시로 우리를 괴롭힌다. 툭하면 빨갱이 운운하는 탐욕스럽고 파렴치한 기득권자들의 가장 천한 폭력이 정말 대책 없이 불쌍해지는 것이다.

 

작가의 많은 작품들이 시종 그려냈던 전쟁과 이념 갈등이 초래한 상처는 폭격으로 부모를 잃은 조카를 자식처럼 키웠던 고모의 심정을 통해 대물림되는 피해자의 삶을 조명하는 「카메라와 워커」라는 단편에서 다시금 확인된다. 우리의 헛된 이념과 전쟁의 상흔은 과거가 아닌 현재 진행형으로 계속되고 있음을.

한편, 이 사회가 안고 있는 세태의 풍자이자 물질이 인간성을 압살하는 도시의 단면을 시어머니이자 며느리이기도 한 여인의 내적 심리를 통해 묘사하고 있는 「갱년기의 기나긴 하루」는 속물들, 위선, 정말 하찮은 인간들을 양산하는 현실을 시어머니의 위장가난, 이혼한 아들내외의 그 버르장머리 없음의 편린들로 맛깔스럽게 지펴내고 있다.

 

이것은 「닮은 방들」이란 작품에서 그야말로 몰(沒)가치화 되어가는 개성 없는 세상과 인간들의 그 파국적 형상으로 절정에 이른다. 오랜 친정살이를 벗어나 마련한 아파트에 입주하고, 독립된 살림에 서툰 여자는 이웃 여자로부터 살림의 조언을 받으며 친해진다. 가구와 벽지, 커튼조차 닮아가고, 반찬등 상차림마저 이웃여자의 맛을 낸다. 아파트는 작은 자존심의 경연장이 되어 누군가 새로운 것을 하면 이내 누가 흉내 내고 말아 어떤 우월감도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 “닮음에 싫증으로 진저리를 쳐가면서도” 서로 닮아 감을 멈추지 못한다.

 

급기야 남편들에 대한 얘기에서 이웃집 여자는 자신의 남편을‘그 새끼’라며 도발적인 음란성을 자랑한다. 여자는 그저 순수하기만 한 자신의 남편과 다른 이웃집 남자의 다름에 매혹된다. 이웃집 여자가 지방에 있는 친정나들이를 위해 집을 비운 날, 여자는 이웃집 남자와 잠자리를 같이한다.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을 갖기 위한 같아지기의 극한!, 그 간음(姦淫)은 자기파괴, ‘같아지기’, 존재의 차이를 무너뜨리는 이 파국의 적나라함이 너무 절망적이어서 괜스레 허공을 향해 나도 모르게 욕지거리를 내뱉게 된다. 이런 된장!, 썩을....

 

작가의 소설들은 이와 같이 삶에 대한 하나의 거대한 은유이자 우화이다. 체하거나, 지성을 뽐내지 않으며, 이념이나 주의(主義)를 말하지 않는다. 어떠한 분류로 편 가름도 이론도 없다. 그저 삶의 현상들, 사랑, 가족, 욕망, 슬픔, 상처의 이야기들 속에 그 무엇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진실과 진리들이 빼곡히 빛을 발하며 가슴을 적신다. 작가의 작품들은 읽을수록 그 문장이 발설하는 풍성함과 진정함으로 망각했던 겸허함을 일깨워주는 듯하다. 미출간작 3편과 엄선된 3편의 단편으로 구성된 작가의 마지막 소설집이 된 이 작품집은 시대를 대표하는 우리문학의 귀중한 지표로 길이 남을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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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노우맨 형사 해리 홀레 시리즈 7
요 네스뵈 지음, 노진선 옮김 / 비채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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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도입부에 묘사되는 장면의 강렬한 암시는 성의 자유가 그 어느 지역보다 관대한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의 실상이 반영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인상을 받게 된다. 아빠가 아닌 남자와 얽혀있는 엄마의 부도덕한 현장을 목격하는 소년, 엄마를 향해 “우린 이제 죽을 거라고요.”라고 외치는 소년의 분노가 왠지 오래도록 어떤 서늘함에 지배될 것 같은 예감을 갖게 한다. 그리곤 시간이 24년을 훌쩍 뛰어넘어 일견 평온해 보이던 가정의 주부 실종 사건에 앵글이 맞춰진다.

 

비록 강렬하지만 너무 짧아서 어떤 판단을 하기에는 미흡한, 그리고 분명치 않은 꺼림칙한 느낌을 채 벗어나기도 전에 여자의 실종은 오슬로경찰청 강력반장‘해리 홀레’의 등장과 함께 심상치 않은 사건으로 치닫기 시작한다. 사건 현장에서 발견되는‘눈사람’은 의문의 미해결 실종사건들과 연계되어 사건의 범위와 규모가 확대되고, 강도 높은 스릴에 급격하게 닿으면서 순식간에 긴장과 다음 장면에 대한 기대의 설렘으로 몰아 부친다. 600여 쪽에 이르는 두툼한 소설이 불과 몇 쪽을 읽었을 뿐인데, 이미 책을 손에서 내려놓을 수 없는 상태에 이르게 할 만큼 이야기에 압도당해 버린다.

 

특히 인간 남녀의 성(性)선택에 대한 진화론적 해석을 수시로 떠오르게 하는 이 소설의 제재 역시 저항 할 수 없는 매력이라 할 수 있다. 짝짓기라는 종족번식, 즉 자기 재생산 비용의 남녀 차이로 인해 여성이 자신과 아이에게 충성하고 자원을 계속해서 제공할 남성을 선택하기위해 신중한 전략을 채택했음은 잘 알려진 얘기이다. 그러나 여성의 전략은 남성에게 매우 불리하다. 만일 한 여성만을 위해 충성하게 될 경우 남성이 부담할 위험은 증가한다. 여성이 낳을 자식은 확실히 그 여성의 자식이 분명하지만 그 자식이 남성의 자식일 확률은 보장되지 않는다.

   

이 위험율이 소설에서는 노르웨이의 통계로 반복하여 등장하는데, 자기 자식이 아닌데도 알지 못하고 양육하는 남자가 20~25%에 이르고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자기의 자식이 아님에도 충성하게 된다면 남성의 재생산성은 제로(zero)라는 재앙에 직면하게 된다. 속된 말로 오쟁이 진다고 하는 것인데, 결국 남성의 재생산 전략은 여자를 성적으로 독점해서 이 위험을 차단하는 것, 바로 일부일처를 유지하는 것이며, 이 신뢰가 유지 될 수 없으면 남자는 재생산을 극대화하는 저비용 생산전략을 구사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상황으로의 이행은 사실 끔찍한 인류의 붕괴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소설이 물론 이를 주제로 삼는 것은 아니지만 유부녀들, 즉 여성의 불륜을 이처럼 중심 플롯으로 삼고 있다.

 

사건의 희생 제물이 되는 여성들은 남편이 아닌 남자의 자식을 마치 부부의 친자처럼 양육하는 유부녀들이다. 반면에 남성의 저비용 성전략 행태를 보이는 언론재벌의 파렴치도 한 축을 차지하고 있는데, 이들의 성 행태로 인해 야기되는 아이들의 정체성 혼란과 도덕적 갈등으로 초점을 맞추면 이는 또 다른 사회적 문제로 연결 된다. 여성들의 실종과 피살사건이 연속되고, 현장에는 동일범의 소행임을 암시하는 눈사람이 경찰을 조롱하듯 놓여있다. 수사팀을 조직하고 사건 조사에 착수하는 해리 반장에게 여성 경관‘카트리네’가 합류하면서 해리의 수사 방향은 활기를 찾는다.

 

소설은 많은 장치들과 다채로운 이야기 거리들이 교차한다. 장면들은 시간을 현재에서, 12년 전으로, 24년 전으로, 다시 12년 뒤로, 그리고 현재를 반복하면서 과거와 현재 사건들의 유사성과 관련성을 숙지시킨다. 또한 인간관계에 서툴고 반사회적이기까지 한, 해리 홀레의 고독한 삶의 모습과 헤어진 여인 ‘라켈’과 그녀의 아들 ‘올레그’에 대한 사랑, 동료 수사관 ‘카트리네 브라트’와 함께하는 미세한 교감과 신뢰, 관능적 호감과 공적 거리에서 흔들리는 내적 혼동이 어우러져 남편을 배신하고 타인의 아이를 양육하는 여인들만을 대상으로 한 다분히 정신병적인 연쇄 살인 사건을 풍성한 이야기가 되게 한다.

 

의혹을 잔뜩 불러일으킨 용의자의 죽음, 그러나 뒷골목의 여성들과 아이들에게 선행을 베풀었던 사람으로 드러났을 때의 당혹감은 믿을 수 없는 우리의 편협한 인지능력을 생각게 하고, 희생자를 편의적으로 가해자로 치부하여 영원히 진실을 덮어버리는 공권력과 사회의 집단 심리가 지닌 어리석음의 폭력성을 목격하게도 된다.

그런데 이 소설이 정말 매력적인 것은 이러한 선입견과 편협성, 폭력성, 이기심의 부당성에 끊임없이 도전하는 해리, 카트리네, 해리의 직속상사인 하겐 경정과 같은 사람들, 그리고 사생아의 위치에 놓인 아이들의 불안정한 지위와 정체성에 따뜻한 시선을 맞추고 있음에 있다. 우리들이 항상 간과하고 있는 곳에 정작 우리들의 관심과 진실을 향한 에너지가 요구되고 있음이다.

 

소설은 분명 여성들의 불륜이, 부유함과 권력을 가진 남성들의 부정이 만들어낸, 즉 성도덕의 파괴적 현상이 야기하는 사회 범죄적 영향의 병리적 현상을 지적하고 있지만 이러한 표피적이고 직관적인 이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부당하게 희생되는 아이라는 존재들, 그에 부속되는 현실의 문제들에 대한 성찰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일면 진화심리학적인 접근이 보이는 결혼 여성의 불륜현상이란 성 선택 방식이 오늘의 물질중심의 문명사회에서 자연스레 적응하고 있는 진화적 산물이 아닌가하는 의심의 제기이기도 하지 않을까? 가슴에 있어야 할 양 쪽의 눈이 없는 신체적 기형을 가지고 태어난 소년, 더욱이 자신이 불륜을 저지른 엄마로 인해 잉태되었다는 자각은 감당할 수 없는 고통과 증오를 수반하는 것이었을 게다. 그로인해 정신과 육체가 붕괴되어가는 존재, ‘눈사람’의 처절한 복수극이 가히 수준 높은 지성과 영리함으로 똘똘 뭉쳐져 완벽한 스릴러를 탄생시켰다. 북유럽 특유의 얼음 같은 분위기에 압도당하는 즐거움이 대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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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릭맨스티
최윤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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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과 여름이 만나 겨울이 된 남자와 여자의 얘기", 조락과 열정이 결합해 생명이 되고 죽음이 되는 순환의 얘기이다. 혹은 ‘소멸성의 무수한 쾌락’으로 이루어진 우리 인간들의 영원한 착각의 이야기이도 할 것이다.

삶의 안락을 조달하기 위해 자기 인생의‘보조 모터’를 필요로 한 여자와, 차이 없는 여자들과의 만남이 심드렁하지만 어느덧 습관이 된 여자와의 만남, 그리고 며느리를 들이고 싶어 하는 편모의 관습 같은 허영이 꾸며낸 결혼, 그 과정의 시시콜콜한 단면들이 묘사된다.

 

몇 차례 의미를 찾기 위한 만남이 이어지다, 서로의 몸을 탐색하고 그렇게 익숙해지면서 안락한 친밀감에 젖어들고 그 방심에 다른 인간들이 으레 하는 형식에 자신들의 삶을 맡기는 것. 가정을 꾸미고, 물건을 하나씩 쌓아가면서 욕망의 환상적 내용들이 충족될 것만 같은 기대로 부푼다.

그러나 “어디서 어떻게 이 많은 것을 욕망하는 것을 배웠을까?” 라는 여자의 자조적인 독백이 나올 때가 되면 더 이상 물건들의 세상이 결코 호의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일 것이다. 목돈을 던져주지 않는 세상의 인색함! “늘 껄떡거리게 만드는 세상”에 슬슬 짜증이 몰려오고, 방 두 칸짜리 반 지하 전세는 두 젊은 남녀에게 자기 집의 소유를 향한 집념을 자극한다.

 

언뜻 ‘조르주 페렉’의 『사물들』에 등장하는 제롬과 실비의 커플에서 발견되는 세상에 맞서는 개성을 결핍하고, 외부에서 주어진 욕망들과 그 실현 가능성 사이에 벌어진 내면의 불안이란 동일한 소비사회의 갈등과 분열이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여자는 내 집 마련 5개년 계획에 돌입하고, 욕망의 절제를 실천 하지만 사실은 이 자체가 또 다른 욕망이기도 하다. 여자의 이러한 집념에 반기를 들지는 않지만 “물질적이고 즉자적이며 육체적 자극에” 이미 민감해진 남자는 작은 부정의 유혹에 노출된다. 삶은 이렇게 서서히 진부해지지만 인생의 사건들이 잠시 제동을 걸어준다.

 

재산을 모으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이 젊은 맞벌이 부부의 여자가 가장 두려워하는 상상의 동물인 ‘아기’가 자궁에 들어서고, 준비가 덜 된 여자는 남자와 낙태를 합의하는데 마트에서 세제(洗劑)의 용량 대비 가격비교의 순간보다 짧은 수초의 시간밖에 걸리지 않는다. 우리 일반의 현실은 이처럼 피투성이 욕망 세계에 별다른 거부감을 느끼지 못한다. 끊임없이 욕망을 창조하는 자본주의 소비사회의 속성이 우리를 절망시키고 안달 나게 하고 불안케 하여 그 대열에 들어서는 것만이 진리인 듯이 몰아대고 있음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조금 더 삶의 이해가 더해지면 남자는 참을 수 없는 수치와 굴욕의 기억이 될 것이고, 여자는 생명의 고통으로 온몸을 부르르 떨게 될 것이다.

 

아이는 또 들어서고 내 집을 마련한 여자는 사내아이를 낳는다. 남자의 편모는 손자를 위해 아들 내외와 동거하게 되고 여자는 직장에 전념하여 남자보다 먼저 승진한다. 삶은 살짝 지치게 하고 가벼운 일탈의 환상을 실재의 세계로 내려오게 하고 싶어진다. 본디 인생이란 것이 그렇게 되먹은 것이리라. 소설은 이처럼 꾸역꾸역 오늘의 우리들 대개가 살아가는 표정을 옮겨 담아내고 있다. 그러면서 그것들이 의미하는 욕망의 실재들이 무엇인지 관찰하게 한다. 무엇이 생명의 질서를 역행하게 하는지.

 

갈등이 있지만 소설의 멋진 표현처럼 “갈등을 통과한 연대의식”으로 부부는 위기를 넘어서고, 또 그렇게 또 다른 소멸의 쾌락을 향해 돌진한다. 아마 이 쾌락의 멸실을 극대화하려 했는지는 모르지만 소설은 극적인 전환을 하는데, 폭우 속에 계곡으로 추락하는 차내에서 야영지에 홀로 방치된 아이의 구원을 부르짖는 간절한 여자의 외침은 죽음의 순간과 새로운 삶의 신비로운 영속을 보게 한다.

 

여기서 장면은 벨기에로 입양된 한 청년의 ‘순간적인 죽음’이란 증세의 기억으로 전환되고 잠재된 무의식의 세계에 그려진 고통의 실재를 투영한다. 수소문 끝에 찾은 자신의 구출자인 산악구조대원과자신이 구조된 현장, 주홍색 석양이 평화롭게 물드는 계곡의 절경을 바라보면서 비로소 자기 부모들과 자신의 생명의 의미를 확인하는 말미는 어떤 이미지가 잡힐 듯 깊은 인상을 남긴다. 아마 청년 유진이 무의식 속에 중얼거리던‘오릭맨스티’라는 형체 없는 말에 의미가 부여되는, 선명하게 이해되는 장면인 탓이길 때문일 것이다. 오염되고 왜곡된 우리들의 삶과 역행적인 비본질의 것들로 인한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는 정화(淨化)와 회복의 감각을 되살려 주는 기운, 절망을 일깨운 지혜! 그것일 것이다. 내레이터가 흑백의 영상 기록물을 읽어주는 듯한 문장들, 그리고 강물 같은 이야기의 흐름이 인생의 거대한 질서의 엄연함을 더욱 진지하게 경청하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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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안녕히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38
구보데라 다케히코 지음, 홍은주 옮김 / 비채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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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소설의 구조가 매우 흥미롭다. 매년 한 아파트 단지 내 초등학교 동창생이 줄어드는 숫자로 시간의 흐름에 따른 삶의 소소한 변화를 읽게 된다. 107명의 졸업생 동창이 마침내 0명이 되기까지. 초등학교를 졸업하자 소년‘사토루’는 중학교의 등교를 거부하고, 학교 담임선생의 오랜 설득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자신의 울타리를 방어하는데 성공한다. 아파트 단지 내로 자신의 생활범위를 정하고 단지 밖으로는 한 걸음도 내딛지 않는 유폐(幽閉)된 삶의 경계를 단단히 걸어 잠그는 것이다.

 

일어나면 새벽 운동과 단지 내 복지관의 도서관에서 책을 닥치는 대로 읽고, 체력 단련실에서 가라데의 고수‘오야마 마스다쓰(한국명 최배달)’를 닮기 위해 운동에 매진하며, 그리곤 아파트 단지의 동창생들 집을 꼼꼼히 순찰하는 것이 그의 일과이다. 해마다 동창생들은 몇 명씩 이사를 하거나 등등의 이유로 줄어든다. 결국 그의 친구들, 그를 이해할 수 있는 관계가 감소하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 속으로 들어가기를 거부하는 소년, 아파트 단지라는 좁은 세계 속으로 자신의 인생을 닫아 건 소년의 삶에 펼쳐지는 단조로운 듯한 일상의 이야기들이 만만치 않게 재미있다.

 

베란다를 같이하는 이웃집에 사는 동창생,‘마쓰시마’는 소년이 소녀를, 여성을 알아가고, 삶의 기술들을 알아 가는데 더없이 좋은 이성 친구가 되어준다. 사토루의 무모한 듯, 혹은 무례 한 듯한 호기심과 질문에도 흔쾌히 솔직한 답변을 들려주는 소녀이다. 베란다 칸막이 사이로 종을 매단 줄을 연결하여 잡아당기면 얼굴을 내밀어 사토루를 맞으며 담배연기를 내뿜는 마쓰시마의 조숙해 보이는 모습을 곧 그릴 수 있을 것처럼 눈에 선하다.

중학교 졸업장이 쥐어지자 아파트 단지 내 상가에 있는 케이크 숍에 일자리를 가까스로 얻어낸 사토루와 사부(師父)로 부르기로 한 케이크 숍 사장과의 일화들이 친근하게 펼쳐지고, 파티시에가 되는 고단한 과정이 유쾌하게 그려진다.

 

사토루가 왜 아파트 단지 밖의 세계와 자신을 차단한 삶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는지는 TV인터뷰 요청을 받고 출연의 결정을 고민하는 과정에 이르러서 회고담으로 초등학교 졸업식장에서 있었던 충격적인 사건의 전말을 듣게 된다. 여기서부터 소설은 더욱 동력을 얻은 것처럼 20대 청년에 들어선 남자의 이야기가 되어 세상과의 불가피한 접촉을 요구하는 내면의 갈등들이 조명되기 시작한다.

아파트 단지 내 유치원에 보육교사 발령을 받은 초등학교 동창생인‘사키’와의 연인으로서의 발전과 결혼에 대한 언약, 노쇠한 케이크 숍 사장으로부터 사업 후계의 약속 등 폐쇄된 공간에서의 삶이 영원히 지속될 것 같은 믿음을 갖게 되지만, 시간의 흐름과 함께 변화하는 주변의 환경은 이러한 안주를 위협하기 시작한다.

 

사토루의 모든 것을 이해하는 연인이지만 사키는 결국 그를 떠난다. 결혼과 아이의 출산 등 예상되는 삶의 현실 앞에서 사토루의 은둔은 실질적인 장벽이 되는 것이다. 또한 케이크 숍의 사부도 기억력이 흐려지기 시작하고, 사업을 물려준다는 메시지와 함께 사라지고, 삶의 조언자였던 이웃집 마쓰시마도 자기의 인생을 향해 아파트를 떠난다. 아파트는 노후화하고, 빈집이 늘어나기 시작하면서 연이은 화재와 부랑자들의 터전으로 쇠락해 간다. 케이크 숍도 마침내 더 이상 유지할 수 없는 형편으로 폐업하게 되고, 유치원 아르바이트마저도 여의치 않게 되고 만다.

 

화재를 피한 빈 집들에는 외국인 이주노동자들 들어서고 일본인과 결혼한 엄마를 따라 브라질에서 온 소녀에 대한 연민으로부터 마주하게 되는 단지 바깥, 세상으로 걸어 나가야 할 당위는 더욱 분명해지기 시작한다. 급기야 상처받은 어린 아들을 묵묵히 지켜봐준 어머니의 죽음은 아파트 단지를 벗어나야 하는 결정적 사건이자, 변화의 정점이 된다. 이처럼 소설은 엄청난 트라우마로 자신을 가둔 소년의 이야기이며, 동료들로부터 이웃으로부터 소외와 폭력에 노출되어 신음하는 아이들의 이야기이다. 그래서 내면을 걸어 잠그고 고통스러워하며, 인간과의 관계를 주저하는 우리 아이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런가하면 사랑, 이별, 성숙, 그리고 죽음이란 삶의 시간에 대한 이해와 깨달음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특히, 동창생들을 세상의 무엇인가로부터, 그 잔인성과 폭력성으로부터 지켜내기 위해 몸을 단련하고, 아파트를 순찰하는 소년의 영상은 깊은 인상이 되어 그의 말 할 수 없는 가슴에 안은 고통이 더욱 아프게 다가온다. 마침내 자신의 이름을 아파트 단지에 남은 유일한 동창생 명단에서 지우며 세상을 향해 걸어 나가는 그의 모습은 내 어깨까지도 같이 활짝 펴지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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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러의 시 민음 경장편 5
김사과 지음 / 민음사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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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소설은 “한 가지 색에 사로잡힌 채 천천히 무너져 내리는 도시에 대한 이야기”라고 시작한다. 그것은 노랗고 거대한 색일 것이고, 그 도시는‘서울=불법=섹스클럽’이란 도식을 성립시키는 그런 곳이다. 그리고 가장 안전한 개체이지만 그것은 이 도시에서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않는, 존재자이지만 존재하지 않는 그 무엇인 주인공‘제니’의 얘기이다. 그래서 ‘( )’, 아무것도 아닌 것, 그러나 무엇인 것이고, 이야기는“이름을 갖지 못한 것들의 긴 목록”이 된다.

 

매음굴에 짐작이 되어 팔려가고 그곳에는 필리핀, 러시아, 한국의 여자들, 그리고 국적불명(조선족)의 나, 제니가 있다. 환각제에 취해 매춘에 끌려 다니고, 고위공무원이 포함된 유한자들의 난교파티에도 포장되어 이 괴물들의 쾌락의 먹이가 되기도 된다. 쾌락과 돈이 서로 환원되는 이유이다. 섹스파티의 파트너였던 고위직 공무원이란 남자는 제니를 계속하여 찾고 그의 가정부로‘임차’되기에 이른다. 사람이 임차된다는 말은 이미 프로, 즉 자본주의 시장에선 일상화 된 표현이다. 인간이 상품, 즉 사물로서 거래되는 것에 사람들이 별다른 거부반응이 없는 것을 보면 자신들의 개성 없음, 무감각, 무관심의 자인(自認)이 있어서 그런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김사과의 감정 없는 시선은 아무런 열기를 지니지 않고 이 도시의 모습들을 이렇게 기록한다. 그러나 악다구니를 부리며 목청 높여 발악하는 그 어떤 냉소적 진술들보다 핏물이 배어나오는 통렬함이 있다. 이 고위관료 자식들의 국적 또한 걸작인데, 미국인인지, 한국인인지, 자신들의 정체성에 대한 의문조차 지니지 못하는 한심한 인간들, 한국어가 오히려 서툴고, 미국산 주스, 미국산 토스트, 미국산 베이컨, 미국산 포크, 미국산 접시, 미국식으로 다리를 떨고, 미국산 소설을 읽으며, 영어를 투덜대며 아메리칸 블랙퍼스트를 먹어대는 이들의 천박한 장면은 경멸과 역겨움이 되어 한 폭의 우스꽝스런 춘화 같기만 하다. 푸른 눈의 영국청년이 가정교사로 들락거리고 제니는 이 청년‘리’를 따라나선다. 동류의 인간을 알아보는 본능, 자신의 나라를 도망치듯 벗어나 아시아 나라들을 흘러 다니다 아무런 목적도 의지도 없이 한국에 머물게 된 또 다른‘( )’이다.

 

이들이 머무는 곳, ‘페스카마 15호’. 자본 시장에서 비켜난 인간들,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제외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공간이다. 두 사람이 포개지듯 눕기에도 옹색한 방이 다닥다닥 붙은 고시원 건물, 그리고 여지없이 들어선 교회, 매일 들려오는 주님의 사랑아래 행복해진다는 찬송가가 울려 퍼지는 소리와는 정반대로 이곳 사람들의 삶은 매일 더욱 비참해져만 가는 아이러니가 공존하는 것은 왜일까? 목사에게 제니와 리, 이 두 이방인이 활용도 높은 수단으로 눈에 띄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 몇 푼의 돈 봉투를 쥐어주고 부자 신도들 앞에 세워 그들의 험난했던 과거를 얘기하게 하곤 하나님의 종이 되었음을 간증토록 하는 대목에선 실소가 터진다. <주님이 허락하신 성공>이란 베스트셀러의 저자인 목사. 웃겨! 교회를 가득 채우고 있는 인간들, 모두 같은 공장에서 찍어낸 것처럼 똑같아 보이는 서울의 교회는 한 가지 색에 사로잡힌 바로 그 서울 같기만 하다!

 

노동절 행사에는 노동자와는 아무런 관련 없는 사람들이 모여 이론을 떠들고, 부자동네의 미관을 해치는 낡은 페스카마 15호는 늦은 밤, 벽을 무너뜨리며 밀어닥치는 굴삭기와 함께 폐허가 되고, 재개발사업 용역업자들의 방망이 습격으로 사람들은 피투성이가 되어 땅바닥에 끌려 다닌다. “지속 가능한 파괴”를 선이라고 하는 도시, 뉴욕도, 도쿄도, 런던도 아니고 세계 자본주의 최전선이 된 도시. 진짜 인간이 된다는 게 뭔지 알지 못하는 인간들로 구성된 도시. 값싼 연민을 보내는 것으로 휴머니스트가 된 듯 위선과 가식, 가면에 도취된 인간들, 그래서 휴머니즘을 쓰레기통에 쏟아버리는 제니의 행동은 논리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마약, 섹스, 폭력, 교회, 시장 자본주의가 쾌락을 향해 질주한다. 그 욕망의 전율을 쫓느라 미쳐버린 인간들에게 비정규직 노동자와 같은 프레카리아트라는 존재가 보일 턱이 없으며, 하물며 제니와 리 같은 이주 노동자의 존재는 거북하고 불편한 낯선 무엇 이상일 수가 없을 게다. 사회학자인‘이진경’이 그의 책(『불온한 것들의 존재론』)에서 지적한 실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 존재를 지워버린 불온한 것들에 가 닿는다. 거북해서 보지 않고 외면하려는 것들을 거침없이 드러내는 작업, 잔혹하게 착취하다가 제거하고 추방해버리며 그 존재를 부인하려는 우리들의 무능력한 이성과 망상을 까발리는 것이다.

 

꿈과 환각, 현실의 지대를 오가는 주인공 제니의 역겹기조차 한 얘기가 허구이기를 바라지만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 아니라고 손사래 치기에 급급해서는 우리들, 길을 잘 못 들어선 지배질서의 오인을 찾아 낼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소설은 이처럼 공생과 공존, 그 잃어버린 화합의 감각을 살려내는 지독한 처방이라 할 것이다. 또한 작가의 전작 장편 『풀이 눕는다』의 ‘나’와 ‘풀’이 삶과 이 사회의 기본적 딜레마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였다면, 이 작품의 제니와 리 커플은 그 제기된 문제들에 도사린 감추어진 치부, 사실들에 존재자의 이름을 일일이 부여하는 존재론적 명명식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김사과는 항상 다음의 작품을 기대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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