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릭맨스티
최윤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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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과 여름이 만나 겨울이 된 남자와 여자의 얘기", 조락과 열정이 결합해 생명이 되고 죽음이 되는 순환의 얘기이다. 혹은 ‘소멸성의 무수한 쾌락’으로 이루어진 우리 인간들의 영원한 착각의 이야기이도 할 것이다.

삶의 안락을 조달하기 위해 자기 인생의‘보조 모터’를 필요로 한 여자와, 차이 없는 여자들과의 만남이 심드렁하지만 어느덧 습관이 된 여자와의 만남, 그리고 며느리를 들이고 싶어 하는 편모의 관습 같은 허영이 꾸며낸 결혼, 그 과정의 시시콜콜한 단면들이 묘사된다.

 

몇 차례 의미를 찾기 위한 만남이 이어지다, 서로의 몸을 탐색하고 그렇게 익숙해지면서 안락한 친밀감에 젖어들고 그 방심에 다른 인간들이 으레 하는 형식에 자신들의 삶을 맡기는 것. 가정을 꾸미고, 물건을 하나씩 쌓아가면서 욕망의 환상적 내용들이 충족될 것만 같은 기대로 부푼다.

그러나 “어디서 어떻게 이 많은 것을 욕망하는 것을 배웠을까?” 라는 여자의 자조적인 독백이 나올 때가 되면 더 이상 물건들의 세상이 결코 호의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일 것이다. 목돈을 던져주지 않는 세상의 인색함! “늘 껄떡거리게 만드는 세상”에 슬슬 짜증이 몰려오고, 방 두 칸짜리 반 지하 전세는 두 젊은 남녀에게 자기 집의 소유를 향한 집념을 자극한다.

 

언뜻 ‘조르주 페렉’의 『사물들』에 등장하는 제롬과 실비의 커플에서 발견되는 세상에 맞서는 개성을 결핍하고, 외부에서 주어진 욕망들과 그 실현 가능성 사이에 벌어진 내면의 불안이란 동일한 소비사회의 갈등과 분열이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여자는 내 집 마련 5개년 계획에 돌입하고, 욕망의 절제를 실천 하지만 사실은 이 자체가 또 다른 욕망이기도 하다. 여자의 이러한 집념에 반기를 들지는 않지만 “물질적이고 즉자적이며 육체적 자극에” 이미 민감해진 남자는 작은 부정의 유혹에 노출된다. 삶은 이렇게 서서히 진부해지지만 인생의 사건들이 잠시 제동을 걸어준다.

 

재산을 모으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이 젊은 맞벌이 부부의 여자가 가장 두려워하는 상상의 동물인 ‘아기’가 자궁에 들어서고, 준비가 덜 된 여자는 남자와 낙태를 합의하는데 마트에서 세제(洗劑)의 용량 대비 가격비교의 순간보다 짧은 수초의 시간밖에 걸리지 않는다. 우리 일반의 현실은 이처럼 피투성이 욕망 세계에 별다른 거부감을 느끼지 못한다. 끊임없이 욕망을 창조하는 자본주의 소비사회의 속성이 우리를 절망시키고 안달 나게 하고 불안케 하여 그 대열에 들어서는 것만이 진리인 듯이 몰아대고 있음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조금 더 삶의 이해가 더해지면 남자는 참을 수 없는 수치와 굴욕의 기억이 될 것이고, 여자는 생명의 고통으로 온몸을 부르르 떨게 될 것이다.

 

아이는 또 들어서고 내 집을 마련한 여자는 사내아이를 낳는다. 남자의 편모는 손자를 위해 아들 내외와 동거하게 되고 여자는 직장에 전념하여 남자보다 먼저 승진한다. 삶은 살짝 지치게 하고 가벼운 일탈의 환상을 실재의 세계로 내려오게 하고 싶어진다. 본디 인생이란 것이 그렇게 되먹은 것이리라. 소설은 이처럼 꾸역꾸역 오늘의 우리들 대개가 살아가는 표정을 옮겨 담아내고 있다. 그러면서 그것들이 의미하는 욕망의 실재들이 무엇인지 관찰하게 한다. 무엇이 생명의 질서를 역행하게 하는지.

 

갈등이 있지만 소설의 멋진 표현처럼 “갈등을 통과한 연대의식”으로 부부는 위기를 넘어서고, 또 그렇게 또 다른 소멸의 쾌락을 향해 돌진한다. 아마 이 쾌락의 멸실을 극대화하려 했는지는 모르지만 소설은 극적인 전환을 하는데, 폭우 속에 계곡으로 추락하는 차내에서 야영지에 홀로 방치된 아이의 구원을 부르짖는 간절한 여자의 외침은 죽음의 순간과 새로운 삶의 신비로운 영속을 보게 한다.

 

여기서 장면은 벨기에로 입양된 한 청년의 ‘순간적인 죽음’이란 증세의 기억으로 전환되고 잠재된 무의식의 세계에 그려진 고통의 실재를 투영한다. 수소문 끝에 찾은 자신의 구출자인 산악구조대원과자신이 구조된 현장, 주홍색 석양이 평화롭게 물드는 계곡의 절경을 바라보면서 비로소 자기 부모들과 자신의 생명의 의미를 확인하는 말미는 어떤 이미지가 잡힐 듯 깊은 인상을 남긴다. 아마 청년 유진이 무의식 속에 중얼거리던‘오릭맨스티’라는 형체 없는 말에 의미가 부여되는, 선명하게 이해되는 장면인 탓이길 때문일 것이다. 오염되고 왜곡된 우리들의 삶과 역행적인 비본질의 것들로 인한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는 정화(淨化)와 회복의 감각을 되살려 주는 기운, 절망을 일깨운 지혜! 그것일 것이다. 내레이터가 흑백의 영상 기록물을 읽어주는 듯한 문장들, 그리고 강물 같은 이야기의 흐름이 인생의 거대한 질서의 엄연함을 더욱 진지하게 경청하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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