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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나긴 하루
박완서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1월
평점 :
작가는 자신의 육신붙이와 이내 같이 할 것을 예견하였던 것일까? 생전의 마지막 작품이랄 수 있는 「석양에 등을 지고 그림자를 밟다」는 단편이 자신의 일대기로 써진 자전적 소설인 것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자식을 앞세운 어머니이자 여인의 통한의 글 인 것에서 숙연함을 갖게 된다. 마침내 기나긴 인생이란 하루를 마치고 평화로운 그녀의 내세로 가셨으리라는 믿음과 함께 감히 진심의 명복을 빈다.
이 첫 번째 수록 작품은 『그 남자네 집』이나 『아주 오래된 농담』등 몇 편의 장편들을 떠 올리게 한다. 작가의 성장기와 전쟁 통의 성년기 등 당대의 묘사가 중첩되는 것인데, 아마 그녀가 천착했던 “걷잡을 수 없는 증언의 욕구”가 고스란히 녹아있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게다가 이 작품은 작가의 글쓰기가 무엇을 의미하려 했던 것인지도 읽게 되는데, 전쟁의 모순, 이념의 허위가 만들어 낸 터무니없는 폭력의 고발과 복수를 삼키는 수단이 되었다는 고백도 있다. 그녀의 인생 후반부는‘내 붙이’의 죽음이 가져온 삶의 자괴감 속에 견딜 수 없는 슬픔의 시간이었던 듯하다. 더 이상 “내 식구가 귀가하는 발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된, 사랑하던 이들이 부재하는 삶의 쓸쓸함이 사무치게 그려져 있다.
이 부재의 공허함은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이라는 작품에 가 닿는데, 민주화 운동 중 희생된 자식의 어머니, 그 자식을 상실한 어미의 가슴 깊은 곳을 울려대는 입을 앙다문 통곡이 억제된 처절함을 통해 자식의 죽음이란 어쭙잖은 연민으로 위로되는 것이 아님을 비로소 가슴으로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인물이나 출세나 건강이나 그런 것 말고 다만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생명의 실체가 그렇게 부럽더라구요. 세상에 어쩌면 그렇게 견딜 수 없는 질투가 다 있을까요?”
반편이라도 산 자식을 곁에 둔 여인네에 대한 이‘질투’라는 단어가 이렇게 진실로 다가왔던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돼먹지 않은 기득권을 지키겠다고, 권력을 차지하겠다고 거짓된 이념으로 시민을 사지에 몰아넣는 폭력의 흔적은 이렇게 이 땅에 치유되지 않고 남아 있음이다. 그 생명을 대체 어떤 것이 대신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처럼 이 땅에 저질러진 폭력의 기억과 상흔들이 한 여인에게 바이러스처럼 잠재한 고통의 기억으로 술회되는 「빨갱이 바이러스」란 작품에 고스란히 배어있다. 할아버지, 아버지에 이어 우연히 지키게 된 고향집을 팔지 못하고 별장처럼 이용하는 여자가 폭우로 길이 끊겨 교통편을 잃은 낯선 세 여자와 한 밤을 같이하며 나눈 고백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녀들의 고백이란 외도와 불륜, 성적 욕망과 환락 등 망측하고 지저분한 자신들만의 비밀들이다. 그러나 여자는 고백 할 것이 없다고 등을 돌리지만 결코 입 밖에 낼 수 없는 잠복한 기억을 더듬는다.
전쟁이 한창이던 시절 북쪽으로 넘어갔던 삼촌을 삽으로 내려쳐 죽였던 아버지와 그 삼촌을 마당에 묻었으리라는 짐작, 즉 “이념 갈등이 동기간의 골육상쟁으로 치달은”, 발설 할 수 없는 고통의 기억이다. 그래서 “나의 입과 우리 마당은 동일”한 것이 되고, “둘 다 폭력을 삼켰다. 폭력을 삼킨 몸은 무쇠같이 단단한 것 같지만 자주 아프다”는 것이다.
폭력의 기억을 품고 있는 이 땅은 ‘빨갱이 바이러스’로 되살아나 수시로 우리를 괴롭힌다. 툭하면 빨갱이 운운하는 탐욕스럽고 파렴치한 기득권자들의 가장 천한 폭력이 정말 대책 없이 불쌍해지는 것이다.
작가의 많은 작품들이 시종 그려냈던 전쟁과 이념 갈등이 초래한 상처는 폭격으로 부모를 잃은 조카를 자식처럼 키웠던 고모의 심정을 통해 대물림되는 피해자의 삶을 조명하는 「카메라와 워커」라는 단편에서 다시금 확인된다. 우리의 헛된 이념과 전쟁의 상흔은 과거가 아닌 현재 진행형으로 계속되고 있음을.
한편, 이 사회가 안고 있는 세태의 풍자이자 물질이 인간성을 압살하는 도시의 단면을 시어머니이자 며느리이기도 한 여인의 내적 심리를 통해 묘사하고 있는 「갱년기의 기나긴 하루」는 속물들, 위선, 정말 하찮은 인간들을 양산하는 현실을 시어머니의 위장가난, 이혼한 아들내외의 그 버르장머리 없음의 편린들로 맛깔스럽게 지펴내고 있다.
이것은 「닮은 방들」이란 작품에서 그야말로 몰(沒)가치화 되어가는 개성 없는 세상과 인간들의 그 파국적 형상으로 절정에 이른다. 오랜 친정살이를 벗어나 마련한 아파트에 입주하고, 독립된 살림에 서툰 여자는 이웃 여자로부터 살림의 조언을 받으며 친해진다. 가구와 벽지, 커튼조차 닮아가고, 반찬등 상차림마저 이웃여자의 맛을 낸다. 아파트는 작은 자존심의 경연장이 되어 누군가 새로운 것을 하면 이내 누가 흉내 내고 말아 어떤 우월감도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 “닮음에 싫증으로 진저리를 쳐가면서도” 서로 닮아 감을 멈추지 못한다.
급기야 남편들에 대한 얘기에서 이웃집 여자는 자신의 남편을‘그 새끼’라며 도발적인 음란성을 자랑한다. 여자는 그저 순수하기만 한 자신의 남편과 다른 이웃집 남자의 다름에 매혹된다. 이웃집 여자가 지방에 있는 친정나들이를 위해 집을 비운 날, 여자는 이웃집 남자와 잠자리를 같이한다.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을 갖기 위한 같아지기의 극한!, 그 간음(姦淫)은 자기파괴, ‘같아지기’, 존재의 차이를 무너뜨리는 이 파국의 적나라함이 너무 절망적이어서 괜스레 허공을 향해 나도 모르게 욕지거리를 내뱉게 된다. 이런 된장!, 썩을....
작가의 소설들은 이와 같이 삶에 대한 하나의 거대한 은유이자 우화이다. 체하거나, 지성을 뽐내지 않으며, 이념이나 주의(主義)를 말하지 않는다. 어떠한 분류로 편 가름도 이론도 없다. 그저 삶의 현상들, 사랑, 가족, 욕망, 슬픔, 상처의 이야기들 속에 그 무엇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진실과 진리들이 빼곡히 빛을 발하며 가슴을 적신다. 작가의 작품들은 읽을수록 그 문장이 발설하는 풍성함과 진정함으로 망각했던 겸허함을 일깨워주는 듯하다. 미출간작 3편과 엄선된 3편의 단편으로 구성된 작가의 마지막 소설집이 된 이 작품집은 시대를 대표하는 우리문학의 귀중한 지표로 길이 남을 것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