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러의 시 민음 경장편 5
김사과 지음 / 민음사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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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한 가지 색에 사로잡힌 채 천천히 무너져 내리는 도시에 대한 이야기”라고 시작한다. 그것은 노랗고 거대한 색일 것이고, 그 도시는‘서울=불법=섹스클럽’이란 도식을 성립시키는 그런 곳이다. 그리고 가장 안전한 개체이지만 그것은 이 도시에서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않는, 존재자이지만 존재하지 않는 그 무엇인 주인공‘제니’의 얘기이다. 그래서 ‘( )’, 아무것도 아닌 것, 그러나 무엇인 것이고, 이야기는“이름을 갖지 못한 것들의 긴 목록”이 된다.

 

매음굴에 짐작이 되어 팔려가고 그곳에는 필리핀, 러시아, 한국의 여자들, 그리고 국적불명(조선족)의 나, 제니가 있다. 환각제에 취해 매춘에 끌려 다니고, 고위공무원이 포함된 유한자들의 난교파티에도 포장되어 이 괴물들의 쾌락의 먹이가 되기도 된다. 쾌락과 돈이 서로 환원되는 이유이다. 섹스파티의 파트너였던 고위직 공무원이란 남자는 제니를 계속하여 찾고 그의 가정부로‘임차’되기에 이른다. 사람이 임차된다는 말은 이미 프로, 즉 자본주의 시장에선 일상화 된 표현이다. 인간이 상품, 즉 사물로서 거래되는 것에 사람들이 별다른 거부반응이 없는 것을 보면 자신들의 개성 없음, 무감각, 무관심의 자인(自認)이 있어서 그런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김사과의 감정 없는 시선은 아무런 열기를 지니지 않고 이 도시의 모습들을 이렇게 기록한다. 그러나 악다구니를 부리며 목청 높여 발악하는 그 어떤 냉소적 진술들보다 핏물이 배어나오는 통렬함이 있다. 이 고위관료 자식들의 국적 또한 걸작인데, 미국인인지, 한국인인지, 자신들의 정체성에 대한 의문조차 지니지 못하는 한심한 인간들, 한국어가 오히려 서툴고, 미국산 주스, 미국산 토스트, 미국산 베이컨, 미국산 포크, 미국산 접시, 미국식으로 다리를 떨고, 미국산 소설을 읽으며, 영어를 투덜대며 아메리칸 블랙퍼스트를 먹어대는 이들의 천박한 장면은 경멸과 역겨움이 되어 한 폭의 우스꽝스런 춘화 같기만 하다. 푸른 눈의 영국청년이 가정교사로 들락거리고 제니는 이 청년‘리’를 따라나선다. 동류의 인간을 알아보는 본능, 자신의 나라를 도망치듯 벗어나 아시아 나라들을 흘러 다니다 아무런 목적도 의지도 없이 한국에 머물게 된 또 다른‘( )’이다.

 

이들이 머무는 곳, ‘페스카마 15호’. 자본 시장에서 비켜난 인간들,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제외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공간이다. 두 사람이 포개지듯 눕기에도 옹색한 방이 다닥다닥 붙은 고시원 건물, 그리고 여지없이 들어선 교회, 매일 들려오는 주님의 사랑아래 행복해진다는 찬송가가 울려 퍼지는 소리와는 정반대로 이곳 사람들의 삶은 매일 더욱 비참해져만 가는 아이러니가 공존하는 것은 왜일까? 목사에게 제니와 리, 이 두 이방인이 활용도 높은 수단으로 눈에 띄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 몇 푼의 돈 봉투를 쥐어주고 부자 신도들 앞에 세워 그들의 험난했던 과거를 얘기하게 하곤 하나님의 종이 되었음을 간증토록 하는 대목에선 실소가 터진다. <주님이 허락하신 성공>이란 베스트셀러의 저자인 목사. 웃겨! 교회를 가득 채우고 있는 인간들, 모두 같은 공장에서 찍어낸 것처럼 똑같아 보이는 서울의 교회는 한 가지 색에 사로잡힌 바로 그 서울 같기만 하다!

 

노동절 행사에는 노동자와는 아무런 관련 없는 사람들이 모여 이론을 떠들고, 부자동네의 미관을 해치는 낡은 페스카마 15호는 늦은 밤, 벽을 무너뜨리며 밀어닥치는 굴삭기와 함께 폐허가 되고, 재개발사업 용역업자들의 방망이 습격으로 사람들은 피투성이가 되어 땅바닥에 끌려 다닌다. “지속 가능한 파괴”를 선이라고 하는 도시, 뉴욕도, 도쿄도, 런던도 아니고 세계 자본주의 최전선이 된 도시. 진짜 인간이 된다는 게 뭔지 알지 못하는 인간들로 구성된 도시. 값싼 연민을 보내는 것으로 휴머니스트가 된 듯 위선과 가식, 가면에 도취된 인간들, 그래서 휴머니즘을 쓰레기통에 쏟아버리는 제니의 행동은 논리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마약, 섹스, 폭력, 교회, 시장 자본주의가 쾌락을 향해 질주한다. 그 욕망의 전율을 쫓느라 미쳐버린 인간들에게 비정규직 노동자와 같은 프레카리아트라는 존재가 보일 턱이 없으며, 하물며 제니와 리 같은 이주 노동자의 존재는 거북하고 불편한 낯선 무엇 이상일 수가 없을 게다. 사회학자인‘이진경’이 그의 책(『불온한 것들의 존재론』)에서 지적한 실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 존재를 지워버린 불온한 것들에 가 닿는다. 거북해서 보지 않고 외면하려는 것들을 거침없이 드러내는 작업, 잔혹하게 착취하다가 제거하고 추방해버리며 그 존재를 부인하려는 우리들의 무능력한 이성과 망상을 까발리는 것이다.

 

꿈과 환각, 현실의 지대를 오가는 주인공 제니의 역겹기조차 한 얘기가 허구이기를 바라지만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 아니라고 손사래 치기에 급급해서는 우리들, 길을 잘 못 들어선 지배질서의 오인을 찾아 낼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소설은 이처럼 공생과 공존, 그 잃어버린 화합의 감각을 살려내는 지독한 처방이라 할 것이다. 또한 작가의 전작 장편 『풀이 눕는다』의 ‘나’와 ‘풀’이 삶과 이 사회의 기본적 딜레마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였다면, 이 작품의 제니와 리 커플은 그 제기된 문제들에 도사린 감추어진 치부, 사실들에 존재자의 이름을 일일이 부여하는 존재론적 명명식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김사과는 항상 다음의 작품을 기대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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