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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안녕히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38
구보데라 다케히코 지음, 홍은주 옮김 / 비채 / 2012년 2월
평점 :
절판
소설의 구조가 매우 흥미롭다. 매년 한 아파트 단지 내 초등학교 동창생이 줄어드는 숫자로 시간의 흐름에 따른 삶의 소소한 변화를 읽게 된다. 107명의 졸업생 동창이 마침내 0명이 되기까지. 초등학교를 졸업하자 소년‘사토루’는 중학교의 등교를 거부하고, 학교 담임선생의 오랜 설득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자신의 울타리를 방어하는데 성공한다. 아파트 단지 내로 자신의 생활범위를 정하고 단지 밖으로는 한 걸음도 내딛지 않는 유폐(幽閉)된 삶의 경계를 단단히 걸어 잠그는 것이다.
일어나면 새벽 운동과 단지 내 복지관의 도서관에서 책을 닥치는 대로 읽고, 체력 단련실에서 가라데의 고수‘오야마 마스다쓰(한국명 최배달)’를 닮기 위해 운동에 매진하며, 그리곤 아파트 단지의 동창생들 집을 꼼꼼히 순찰하는 것이 그의 일과이다. 해마다 동창생들은 몇 명씩 이사를 하거나 등등의 이유로 줄어든다. 결국 그의 친구들, 그를 이해할 수 있는 관계가 감소하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 속으로 들어가기를 거부하는 소년, 아파트 단지라는 좁은 세계 속으로 자신의 인생을 닫아 건 소년의 삶에 펼쳐지는 단조로운 듯한 일상의 이야기들이 만만치 않게 재미있다.
베란다를 같이하는 이웃집에 사는 동창생,‘마쓰시마’는 소년이 소녀를, 여성을 알아가고, 삶의 기술들을 알아 가는데 더없이 좋은 이성 친구가 되어준다. 사토루의 무모한 듯, 혹은 무례 한 듯한 호기심과 질문에도 흔쾌히 솔직한 답변을 들려주는 소녀이다. 베란다 칸막이 사이로 종을 매단 줄을 연결하여 잡아당기면 얼굴을 내밀어 사토루를 맞으며 담배연기를 내뿜는 마쓰시마의 조숙해 보이는 모습을 곧 그릴 수 있을 것처럼 눈에 선하다.
중학교 졸업장이 쥐어지자 아파트 단지 내 상가에 있는 케이크 숍에 일자리를 가까스로 얻어낸 사토루와 사부(師父)로 부르기로 한 케이크 숍 사장과의 일화들이 친근하게 펼쳐지고, 파티시에가 되는 고단한 과정이 유쾌하게 그려진다.
사토루가 왜 아파트 단지 밖의 세계와 자신을 차단한 삶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는지는 TV인터뷰 요청을 받고 출연의 결정을 고민하는 과정에 이르러서 회고담으로 초등학교 졸업식장에서 있었던 충격적인 사건의 전말을 듣게 된다. 여기서부터 소설은 더욱 동력을 얻은 것처럼 20대 청년에 들어선 남자의 이야기가 되어 세상과의 불가피한 접촉을 요구하는 내면의 갈등들이 조명되기 시작한다.
아파트 단지 내 유치원에 보육교사 발령을 받은 초등학교 동창생인‘사키’와의 연인으로서의 발전과 결혼에 대한 언약, 노쇠한 케이크 숍 사장으로부터 사업 후계의 약속 등 폐쇄된 공간에서의 삶이 영원히 지속될 것 같은 믿음을 갖게 되지만, 시간의 흐름과 함께 변화하는 주변의 환경은 이러한 안주를 위협하기 시작한다.
사토루의 모든 것을 이해하는 연인이지만 사키는 결국 그를 떠난다. 결혼과 아이의 출산 등 예상되는 삶의 현실 앞에서 사토루의 은둔은 실질적인 장벽이 되는 것이다. 또한 케이크 숍의 사부도 기억력이 흐려지기 시작하고, 사업을 물려준다는 메시지와 함께 사라지고, 삶의 조언자였던 이웃집 마쓰시마도 자기의 인생을 향해 아파트를 떠난다. 아파트는 노후화하고, 빈집이 늘어나기 시작하면서 연이은 화재와 부랑자들의 터전으로 쇠락해 간다. 케이크 숍도 마침내 더 이상 유지할 수 없는 형편으로 폐업하게 되고, 유치원 아르바이트마저도 여의치 않게 되고 만다.
화재를 피한 빈 집들에는 외국인 이주노동자들 들어서고 일본인과 결혼한 엄마를 따라 브라질에서 온 소녀에 대한 연민으로부터 마주하게 되는 단지 바깥, 세상으로 걸어 나가야 할 당위는 더욱 분명해지기 시작한다. 급기야 상처받은 어린 아들을 묵묵히 지켜봐준 어머니의 죽음은 아파트 단지를 벗어나야 하는 결정적 사건이자, 변화의 정점이 된다. 이처럼 소설은 엄청난 트라우마로 자신을 가둔 소년의 이야기이며, 동료들로부터 이웃으로부터 소외와 폭력에 노출되어 신음하는 아이들의 이야기이다. 그래서 내면을 걸어 잠그고 고통스러워하며, 인간과의 관계를 주저하는 우리 아이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런가하면 사랑, 이별, 성숙, 그리고 죽음이란 삶의 시간에 대한 이해와 깨달음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특히, 동창생들을 세상의 무엇인가로부터, 그 잔인성과 폭력성으로부터 지켜내기 위해 몸을 단련하고, 아파트를 순찰하는 소년의 영상은 깊은 인상이 되어 그의 말 할 수 없는 가슴에 안은 고통이 더욱 아프게 다가온다. 마침내 자신의 이름을 아파트 단지에 남은 유일한 동창생 명단에서 지우며 세상을 향해 걸어 나가는 그의 모습은 내 어깨까지도 같이 활짝 펴지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