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중석 스릴러 클럽 32
조힐 지음, 박현주 옮김 / 비채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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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과 사, 선과 악, 그 경계를 찾는 것이 가능하지 않음을 말하려는 것이었을까? 소설은 삶의 실제와 몽상적 시공을 오간다. 그런데 그 구분이 지극히 모호하다. 이승과 저승의 이원적 경계를 오락가락하는데, 그것이 대체 현실인지 죽음의 세계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어쩌면 지나치게 은유의 세상을 살아 온 탓에 순수하게 바라 볼 수 없을 만큼 내 관념의 세계가 불순해졌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표의된 그대로 받아들이면 될 것을 혹여 정말의 의미는 따로 있다고 억척스레 해석하는데 익숙해진 이유일 것이다. 자고 일어나니 양쪽 관자놀이에 뿔이 자라나 있다면 이미 현실이 아니지 않은가? 그런데 이렇게 단순하게 받아들여도 되는 것일까? 뿔은 그저 심상(心象)일 뿐인 것인가? 악(惡)이 깃든 마음의 표상의 수단으로서? 아니 이 둘 모두는 아닐까? 현실의 악이자, 저승의 세계를 모두 포함하는 모순된 기표로서 말이다.

 

소설은 이처럼 모순의 세계를 넘나든다. 삶과 죽음, 선함과 악함이 마구 뒤섞여 살아있는 것인지, 죽은 것인지, 사람인지, 악마인지 분간할 수 없다. 이렇게 분간하려는 것이 오류는 아닌지, 사실 그 구분이란 본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악이란 것이 오롯이 악이지만은 아닌 것처럼. 그래서인지 뿔이 솟아난 남자‘이그’는 악마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악인이라고 규정할 수 없는 인물이다. 사랑하던 연인‘메린’의 처참한 죽음이라는 상실을 지우지 못하고 있음에도 세상은 그에게서 메린의 살해용의자라는 시선을 거두지 않는다. 미래의 아이들을 말하던 두 사람의 사랑, 그 사랑을 앗아간 세상은 그에겐 이미 지옥이다. 지옥 같은 현실, 바로 죽음의 세계 아니던가?

 

소설은 사랑을 만들고 우정을 키워가며 사람의 본성을 알아가던 과거의 시간을 통해 인간에 내재된 악마성의 실체를 탐색한다. 자기중심적 사고, 오해, 잃을 것을 가진 자의 두려움, 집착, 소유욕..., 하찮은 욕망들이 발산하는 터무니없고 또한 형편없는 산물들. 뿔은 메린이 살해되는 현장을 들려주고, 살인자와 희생자, 동행자인 오랜 지기인 ‘리’와 연인 ‘메린’, 형 ‘테리’와의 기억들을 통해 신(神)의 자리를 대신한 악마의 선의를 역설(逆說)한다. 선과 악의 혼화(混和) 그리고 순환. 그런데 더럽게 종교적이다. 이 뿔 달린 악마가 죽은 연인의 십자가 목걸이에는 무력화하고 순화된다. 굳이 평하자면 이 소설의 오점이랄 수 있는데, 관대하게 보아 넘기려면 연인의 순결한 영혼의 상징이라고 할까? 결국 조금 유치하게 되어버리긴 하지만 아무튼 이것은 소설에서 중요한 중의적 도구로 사용된다.

 

십자가가 달린 메린의 목걸이, 이것은 사랑의 매개이며 또한 욕망의 매개체로 이그와 리, 메린의 육신을 돌아다닌다. 우상이다. 그러면서도 본질은 영원성을 말하는듯하다. 이들이 모두 이승을 떠났을 때에도 지상에 남아 누군가를 또 기다리는 걸 보면. 물질이 영원이라는 정신을 대체하는 것 아닌가? 사랑하는 여인이 어느 날 서로 다른 이성과의 경험을 위해 자신들의 사랑이 변하지 않는 것인지 확인하는 이별의 시간을 갖자고 한다. 분노한 남자는 그런 여자를 남겨두고 떠나버린다. 여자의 살에 대한 집착을 가진 이그의 친구, 리는 여자가 자신에게 기회를 주기 위한 이별이라고 여기지만 여자에겐 사랑하는 연인 이그를 위한 필연적 선택으로서의 이별일 뿐이다. 여기서 세상의 악은 자라난다. 분노는 살인을 부르고 거짓과 위선, 기만, 도피를 만들어낸다. 그리곤 세상은 저주와 죽음의 욕망만이 부글거린다.

 

소설은 또한 피살된 여자의 죽음에 기묘한 필연을 엮어 넣는다. 암(癌)에 점령당한 육신의 부패를 사랑하는 이에게 부담시키지 않기 위한 절절함의 당위성으로 말이다. 이렇게 되면 살인자의 행위는 악행이면서도 선행이기도 한 것이 되어버린다. 이처럼 선악의 구분이란 것이 얼마나 인간적인 오류이자 얼토당토않은 것이냐고 묻는 것일 게다. 삶이란 이렇듯 규정지을 수 없는 무엇들일 것이다. 분노와 악의가 설설 끓어댈 것 같은 악마가 더없이 인간적인 행보를 하는 것도 이미 분간 할 수 없는 본성의 본질을 역설(力說)하고자 함이었을 것이다. 캄캄한 절망의 세계, 저주가 너울거리는 지옥의 세상에서 애틋한 사랑의 이야기가 흐느끼는 절묘한 이야기에 인간의 본질을 탁월하게 담아낸 역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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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위해 웃다
정한아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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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들에는 왠지 모르게 순수하고 투명한, 그리고 어느 것도 놓치지 않는 세심한 관찰력을 가진 작은 어린 여자아이의 시선이 느껴진다. 우리네들의 삶과 세상이 그녀에게 모두 들켜버린 것 만 같은 그런 수치심 때문일까?

작품 어디에도 빈 수레들의 큰소리가 없다. 소란스럽지 않은 나지막한 소리에 거절과 두려움, 상처와 슬픔, 불안과 균형, 삶의 깨달음이 실려 있어 더 없이 그 이야기들의 진지함에 동화된다. 이렇듯 8편의 소설 모두에서 삶의 그 우연함과 몰염치함의 부조리에도 항상 평온이 깃들어 있고, 측은함과 연민이 애틋하게 배어있음을 본다.


“크게 되는 것만은 나의 의지였으니까.”라는 엄마의 중얼거림에서 삶의 자유로운 평화를 보는 것처럼, 출생과 성장의 비애로만 비추어지는 불쾌한 세상의 이야기들로 뻣뻣해져오던 몸이 이미터 사십 센티가 되어버린 엄마처럼 시원한 기분을 맞이하게 된다. 나와 엄마에 퍼진 그 훈기의 편안함이 그 모녀만이 아닌 나에게까지 전해져 오듯이. <나를 위해 웃다>

세상을 제 정신만으로 바라보는 것이 힘겨운 사람들, 사랑과 상실의 외로움으로 정신의 결을 반대 방향으로 바꾸는 사람들, 거절당하는 것을 직업으로 삼은 뒤 서서히 소모되어온 사람들, 꿈꾸지 않기에 적당히 살아 갈 수 있는 사람들, 삶 어딘가 늘 텅 비어버린 듯한 체념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그리고 먼 길을 돌아와 비로소 가야할 길을 깨닫는 이들의 모습에 보내주는 그 따뜻한 기대와 긍정의 기운이 우리네 마음에도 어느덧 깃들게 한다.


“남자들이 끝도 없이 밀고 들어오는 새벽. 죽고 싶을 때마다 대신 바라보려고 손목 아래 그려놓은 빨간 점선”을 내려다보는 세상 밖에선 그녀들의 두려움을 정말“선명한 정신으로 바라보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손을 내밀면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거리고 덥석 물어버리는 쪽에 언제나 마음이 더 끌”리는, 사람에 대한 그 이해와 관심이 너무 소중하고 탐나기까지 한다. <아프리카>


한편으로 론 “열두 평짜리 임대아파트와 미뉴에트 선율”의 어색한 조화, “보석을 손에 쥐어보면 그 속에 뜨거운 불길이 갇혀 있다”와 같은 일상에 대한 작가의 진솔한 성찰이 어디에까지 이르는지 보는 것 또한 분명 기분 좋은 독서에 일조한다.

위태로워 보이던 가족의 그 평범함에서, “품위”를 되뇌는 아버지의 자전거. 그리고 매연이 이는 거리와, “그 뒤에 앉은 엄마를 떠올릴 때면, (중략) 그게 아주 균형 잡힌 춤처럼 느껴지는”주인공의 시선에서 소중한 그 무엇들이 행복한 슬픔으로 남겨진다.<댄스댄스>


그리고 “매번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았지만, 나는 나도 모르게” 따라 불렀던 그 노래들. 늘 어딘가 텅 비어있는 듯하던 삶, 절름발이처럼 느껴지던 그 삶, 구겨져서 보이지 않던 그 삶의 노래는 <천막에서> 의 ‘나’처럼 내가 가야 할 곳을 깨닫는다. <휴일의 음악>


젊은 작가의 시선이 그리 녹록치 않다. 세상을 깊고 그윽하게 바라보는 그 엄숙하다고까지 할 성찰에서 깨끗하고 고귀한 품격을 보지 않을 수 없다. 사방을 두리번거리는 번잡함도 없다. 정면을 마주하고 오늘을 귀 기울여 듣고, 지금의 모습을 헤쳐 가는 그런 성숙함이 있다. 감히 만족스럽다는 말을 사용하고 싶다. 모나지 않은 조용한 숨결 속에 예리함을 넘어서는 탁월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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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틀 시카고
정한아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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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몸처럼 아파야 진짜 ‘꿈’이라고요.”

 

꿈을 가슴에 가득 품고 있는 열두 살 소녀의 시리지만 빛 같은 이야기다. 또한 자신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모여 사는 쇠락(衰落)하는 기지촌의 시퍼런 멍의 기록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한국인이 알지 못하는 삶의 이야기, 단지 심심할 때만 동물원 구경하듯 바라보는 시선 밖의 이야기다. 어설프게 타인의 고통을 말하는 위선을 부끄럽게 하는 이야기이며, 슬프고 가난한 사람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소외된 골목이자, 공동묘지의 이야기다. 그럼에도 온통 향긋한 장미꽃 향기가 “말 할 수 없는 감정들을 밝히 비추어주는” 빛처럼 흘러넘치는 정말의 이야기다. 그리고 소녀의 마음 속 거인을 품고 싶어질 만큼 사랑이 풍성한 이야기다!

 

소설의 프롤로그에는 “매일매일 유실”을 경험하고 있다는 조숙한 열일곱 살 소녀가 보이지만, 이내 시간은 소용돌이쳐 열두 살 소녀 ‘선희’의 시선이 자리 잡고, 이전을 앞둔 기지촌 골목의 풍경이 ‘모래 그림’처럼, 아니 지워지지 않고 허물어지 않을 기록이 되어 아릿하게 지면을 채운다. 마을에 미군부대가 들어온 직후부터 생긴 공동묘지에는 미군들에게 꽃을 파는 여인들, 그녀들과 그녀들이 낳은 아이들의 고통과 죽음이 지나온 시간만큼 켜켜이 쌓여 있다. 모래로 그린 그림 같은 삶, 매일매일 허물어지는 삶, 텅 빈 가슴을 부여잡고 죽을 기회를 엿보고 있는 것 같은 삶들로 가득 채워진 골목, 그래서 그 허기를 메우기 위해 열두 살 소녀가 찾아드는 숲 속 공동묘지는 “자다 깨어 엄마!”하듯이 단단히 쥐고 싶은 그것이다.

 

“꽃의 스크럼 - 장미 묘목”

 

미군 기지의 이전(移轉)과 함께 골목의 클럽들과 상점들은 하나둘씩 떠나고, 마을의 풍경은 더욱 을씨년스러워진다. 세상의 시선은 비로소 골목을 찾아든다. 심심한 대중의 관음증을 채우기 위해 카메라 무리를 이룬 방송사 촬영팀이 들어와 ‘죽은 여자들’에 대한 이야기로 화제를 만들고, 더 이상 살(flesh)을 팔지 못해 꽃을 팔아 하루하루 먹고사는 할머니들에게 “지금 기분이 어떠냐고” 마이크를 들이댄다. 어린애도 묻지 않을 몰염치한 말들을.

그래서 꿈꾸는 사람인 ‘체 게바라’가 그려진 셔츠를 입은 촬영팀에게 열두 살 소녀가 묻는다. “아저씨는 우리 골목 때문에 숨도 못 쉬게 마음이 아픈가요?” , “자기 몸처럼 아파야 진짜 꿈이라고요.”하고 말이다. 호기심, 관음증, 고작 일회성 연민으로 자신들의 외면을 위로하는 그런 것이 아니어야 한다는 어린애다운 항변일 것이다. 위선들, 수치를 모르는 뻔뻔함들...

 

공동묘지는 미군 기지가 떠나고 난 터의 골프장 건설을 위한 연결 도로로 파헤쳐질 것이라는 소문이 돌고, 엄마와 그리고 죽은 여자들과 그녀들의 아이들이 묻힌 곳, “납작한 거북이 등”같은 세상의 끄트머리에서 우르르 떨어져 죽은 약한 자들이 자리한 쉼터의 약탈을 막기 위해 소녀는 장미 묘목을 심기 시작한다. 땅을 파고, 거름을 주고 흙을 덮고 물을 길러 나르는 열두 살 아이의 고된 노동은 그 어떤 것보다 성(聖)스럽다. 이것만으로도 이미 세상의 폭력을 무위로 만들기에 충분한 것이 아닐까?

 

공동묘지를 빙 둘러 사방에 장미꽃이 빽빽하게 둘러쳐진 곳, 눈꽃 같은“하얀 장미꽃들이 향기로운 화관”을 쓰고 있는 풍경은 슬프고 가난한 자들의 무덤이 아니라 ‘천국’ 그것이었을 게다. 열일곱 살이 되어 펼쳐보려 했던 엄마의 일기에 담긴 간절하고 따뜻한 사랑의 언어들은 에필로그가 되어 시간을 다시 옮겨놓는다. “다른 사람들을 온 마음으로 가엾게 여기는 사람!”, “온 숲에 ‘무조건적으로’ 다 내리는 비 같은 사랑”이 읽는 이의 마음을 촉촉이 적신다.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이게 하는 것이 시인의 마음 아니런가.  빛과 같은 좋은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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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의 배신 - '긍정의 배신'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워킹 푸어 생존기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배신 시리즈
바버라 에런라이크 지음, 최희봉 옮김 / 부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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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신문의 경제섹션은 우리사회에서 저소득층이라고 인식하는 사람들의 비율이 50%를 넘어섰다는 내용을 머릿기사로 장식했다. 급속하게 중산층 의식마저 하락하고 가난의 대중화로 치닫고 있다는 얘기다. 실로 정치 권력자에게 주어진 5년이란 시간은 무서운 것이다. 이렇게 고도로 양극화되고 빈곤을 촉진하는 탐욕스런 세력은 본 적이 없었다. 지금 한국은 빈곤의 보편화를 강력하게 추진 중인 듯하다. 극소수의 거부와 대다수의 빈민이라는 두 국민 정책이 이제 그 결실을 드러내고 있다. 현 정권은 성공했다. 아마 상위 1%만 모이는 그네들의 파티에선 연일 칭송이 잦을 것이다. 수고했습니다! 라고.

 

정권을 잡자마자 재벌 감세와 규제 완화부터 시작하고, 서민들의 소득세 감면 항목들을 삭제하거나 부과기준을 상향 조정함으로써 부자들을 위한 감세로 인해 부족해진 세수를 서민의 얄팍한 급여로 충당할 정도로 사악했다. 재벌을 살찌우면 샤워효과로 그 부의 상당부분이 아래로 흘러내려갈 것이라고 이들은 자신들의 탐욕을 정당화했다. 그러나 인간의 역사 이래 이런 예는 단 한 번도 실현된 적이 없다는 것은 그 뻔뻔함의 정도를 짐작케 하기에 충분하다. 부자는 더욱 부를 늘려가기만 했을 뿐, 국민 대다수는 점점 가난해졌다. 실질 소득은 급격하게 감소하고, 물가는 천정부지로 솟아올랐다.

 

땀을 뻘뻘 흘려 열심히 일해도 갈수록 먹고살기 아주 힘겨울 정도가 되고 있다. 육체와 정신적 손상으로 더 이상 할 수 없을 정도로 일을 하면 할수록 가난해지는 이상한 구조로 변화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사람들에게“사회계약을 구성하는 믿음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는 말의 다름 아님이다. 사회에 대한 신뢰가 손상되기 시작했다면 과연 그 사회에서 사람들이 무엇을 기대할까? 잘못된 구조, 권력이 왜곡시켜버린 경제구조를 신속하게 교정하는 작업에 착수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러한 현상을 자각하고 직시하기는 하는 것일까? 나도 언젠가는 저 1%에 들어 갈 수 있을 거야, 그래서 이 망상을 자극하는, 바보 상자들이 쏟아내는 미혹에 걸려든 사람들은 자신들의 가난을 인정하지 못하게 된다. 우민화를 위한 각종 미디어 정책들 역시 성공적이다. 재벌들에게 이 정권은 이처럼 정말 갚을 수 없을 만큼 많은 도움을 준 것이다. 그 결과는 가난은 대중화되고 빈곤은 만성적이 되어감에도 마치 이것이 없는 것처럼 이 사회에서 보이지 않는 형태가 된다. 그렇다고 존재하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불평등한 사회에서는 이와 같이 그 고유의 시각적 특성 때문에 경제적 우위에 있는 자들의 눈에 빈민들이 눈에 띄지 않는다고 한다. 당연한 말이다. 계층의 구별 짓기가 이젠 완전 고착되는 단계에 들어서 서로 마주할 기회가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들의 눈앞에 서는 빈민들의 옷차림새는 실제와는 다른 것이기에 더더욱 알 수 없는 것이다. 상상력 부족의 시대! 마치 빈민들이 사라지고 있는 듯한 이 역설적인 현상은 ‘빈곤의 발견’을 더더욱 위장한다.

그러다보니‘게으르고 의존적이며 자식만 주렁주렁한 자들이 실업급여 창구를 메운다’는 어느 시장만능의 자유주의 신봉자가 하는 돼먹지 못한 말처럼 빈곤을 터무니없이 왜곡하고 몰염치에 이르는 양태까지 보이는 것일 게다.

 

“사람이 더 열심히 일해도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더 가난해지고 빚만 늘어나는 구조”는 좀체 생각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잘못돼도 한참 잘못된 것이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저임금 노동에 참여해보라. 체험해 보라. 책은 바로 노동 현장, 만성적인 빈곤으로부터 헤어 날 수 없게 구조화된 저임금 노동 시장의 생생한 체험의 기록이다. 과연 게을러서 가난하고, 의존적이어서 빈곤해질 수밖에 없다는 보수 자유주의자들의 헛소리가 혹여 조금이라도 진실인지를 말이다.

아마 자유주의 신봉자가 뱉어낸 가증스런 그 말은 한 가정집에 청소용역을 할 때 주인 여자가 하는“정말 운동이 되죠?”라고 청소부에게 하는 말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그 청소가 운동이겠는 말이다. “완전 비대칭적이고 무자비하게 반복적이어서 근육과 뼈를 망가뜨리는” 중노동이 어찌 운동일 수 있겠는가? 몰지각과 중산층의 이 뻔뻔한 상상력은 오늘 우리들의 도덕적 인식능력이 얼마나 마비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일례일 것이다.

 

책을 빌려 무지하고 탐욕으로 그득한 신자유주의 신봉자의 악질적 발언의 진위를 들여다보자. 한 몸을 의탁할 싸구려 주택의 보증금, 월세를 내기에도 빠듯한 시간당 임금으로 교통비, 공과금, 식비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그야말로 육신이 부서지고 골병이 들 정도로 노동을 해내도 가능할까 말까이다. 청소부로 웨이트리스로, 대형 할인점의 의류 점원으로, 노인병원의 조무사로 종횡하고, 이 하찮은 저임금 직업을 얻기 위해서 얼마나 모욕과 수모를 견뎌내야 하는가를 목격하는 것은 고통이란 단어 말고는 표현할 방법이 없어 보인다.

 

“빈곤 속의 삶의 시작 조건은 모든 것을 결정” 할 정도로 그것을 탈피하는 것은 가능치 않다는 결론에 이른다. 왜 그럴까? 먹고 살기 위한 기초 생활자금에도 모자라는 것이기에 그렇다. 저축? 웃기는 얘기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가난한 사람들을 자식만 주렁주렁 낳는 무책임한 사람들로 묘사한 신자유주의 꼴통의 말은 터무니없는 것이다. 지쳐 쓰러진 노동자가 무슨 재주로 자식들을 갖는다는 말인가? 자기 몸 하나도 간수하기 힘든데 말이다. 오히려 부자, 중산층들의 여유있는 삶에서나 가능한 얘기이다. 세 자녀에 대한 각종 정부 지원금과 육아 지원제도는 서민의 복지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부자들을 위한 정책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빈민들은 아이를 낳을 기력도, 낳아 기를 능력도, 더구나 세 자녀씩이나 낳는다는 것은 그들 삶의 현실에서는 요원한 사치일 뿐일테니 말이다.

 

저자의 표현처럼 가난한 여성들은‘번식녀 계급’에 포함되지 못하는 것이다. 빈민은 더 이상 자녀를 생산해서는 안 된다는 사회경제적 장막이 쳐져 있는 것이 보이지 않는다는 말일까? 저임금 노동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게으른 것도 아니요, 자녀를 무책임하게 생산하는 자들도 아니며, 의존과는 멀어도 한참이나 먼 사람들이다. 그들의 세계는 통증이 지배하고 정말의 피땀으로 점철되어 있을 뿐이다. 대체 알량한 실업급여를 기다리는 서민들과 실직자, 저임금 노동자를 무엇으로 여기고 있다는 말인가!

신자유주의 찬사로 가득한 보수주의자의 황당한 서적들과 마주칠 때면 화장실 변기를 닦아 “대장균이 듬뿍 묻어있는 헝겊으로 부엌 싱크대를 그냥 한 번 쓱 닦아주기만” 하면 되는데 하고 소심한 생각에 머무는 청소부‘바버라’의 상상을 그대로 이 승냥이들의 낯짝에 문질러 주고 싶은 심정이 든다.

 

저임금 노동자들의 임금이란 생활임금에 턱없이 모자란다. 경제학자들은 이런 항변에 “아니오, 임금은 계속 오르고 있다”고 반론한다. 현실과는 동떨어진 이 탁상공론은 최하위층 임금이 얼마나 하찮게 오르고 있는지를 보지 않는다는 말과 같다. 더구나 서민들의 실제 경험과 공식적 지표로 정의되는 빈곤이 불일치하는 것은 가계경비를 산출하는 부적절한 방식에 있음에 주의를 가지지 않는 이유도 있을 것이다. 식비를 근거로 산출하는 구시대적 집계 방식 같은 것들...

부서져라 일하고 끊임없이 직업을 찾아 헤매며, 파김치가 된 몸으로 하루 두 개의 직업을 오가도 살기 힘든 임금 구조는 노동의 가치 운운하는 세력들의 허위만을 입증 할 뿐이다. ‘노동의 배신’을 만들어내는 이 같은 사회가 지속 가능한 세상이 될 수 있겠는가?

워킹푸어가 사라지는 세상, 진정 노동이 사람들을 배신하지 않는 세상을 꿈꾸는 것은 이상주의자의 헛된 꿈에 불과 한 것일까? 저임금 노동현장에 뛰어 들어 그 배신의 속살을 비로소 발견하고 분개한 여성 저널리스트의 이 고발은 보이지 않는 가난, 빈곤을 명료하게 드러내 보여준다. 저자의 비장한 마지막 문구, “넘어진 사람을 발로 차지 않겠다”는 다짐은 그 어떤 너절한 언어보다 엄중하게 우리들의 사회에 각성을 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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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개미 2012-08-27 04: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열변을 토하셨네요. 그리고 동감합니다. 저도 이 책 보면서 완전 분노했었는데, 정말 변해야할 필요성을 느낍니다.

필리아 2012-08-27 14:52   좋아요 0 | URL
비판정신이 마비된 젊은이들을 양산하는 교육구조이다보니 보수 시장지상주의자의 노동자 모욕의 논리에도 아랑곳 없이 열광하는 한국의 주류 의식이 안타까워서 말이죠...
 
[뱀파이어, 끝나지 않는 이야기]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뱀파이어, 끝나지 않는 이야기
요아힘 나겔 지음, 정지인 옮김 / 예경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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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파이어란 존재에 대한 정의는 무엇일까? 살아있는 인간의 피를 먹고 살며, 낮과 밤(빛과 어둠)으로 은유되는 삶과 죽음의 이원적 경계를 오락가락하는 존재이다. 물론 이러한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정체성을 확립한 것은 불과 2세기 안팎이긴 하지만 이 기이한 존재에 대한 대강의 실체를 설명하는 데 부족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 정의는 생사의 경계를 오가는 존재로서 생기를 먹고사는 사신(死神)이라는 우리의 귀신(鬼神)에 대한 정의와 거의 일치 한다.

 

이렇듯 유사한 존재이긴 하지만 그 형상의 이질성은 물론이거니와 출현의 배경이나 사회적 인식의 출발점은 매우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책을 흥미롭게 읽게 한 동력은 동서(東西)의 귀신이 이렇게 서로 다른 배경을 갖게 된 것이 무엇일까 하는 궁금증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최근의 <트와일라잇>이나 <렛미인>과 같이 신비로움과 달콤한 사랑의 고통을 수반하는 뱀파이어의 등장에 이르면 뱀파이어가 현실의 인간들에게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인지, 21세기에 이르러 어떻게 변화된 것인지를 은근히 추적케 한다.

 

1. 귀신과 뱀파이어

 

서구의 뱀파이어란 존재는 언제, 어떻게 등장한 것일까? 그리고 왜 오늘날 우리들이 알고 있는 그러한 정체성을 가지게 된 것일까? 역시 이 존재의 출현에는 기독교라는 종교가 한 몫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 종교가 항상 그러해왔듯이 자신들이 이해하고 설명할 수 없는 것이면 악의적으로 형상화해서 그것에 책임을 돌리는 것이다. 결국 저자가 쓴 것처럼 “뱀파이어 사례가 보고된 시기는 항상 치명적 질병들이 집중적으로 발생한 시기와 일치”한다는 분석이 그것이다. 다시 말해서 신의 자비를 얻지 못한 망자들이 중간 세계에서 방황하는 것이며, ‘마르틴 루터’가 그의 저술 《탁상 담화》에서 “그 불쾌한 소음은 사탄의 소행”이라고 언급하는 것과 같다.

 

이 지옥의 망상적 존재가 오늘의 뱀파이어로 형상화되는 것은 이처럼 종교적 산물이며, 사회적 반영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우리의 귀신과 뚜렷한 차이점을 발견 할 수 있다. 한국의 귀신은 사회가 소외시키고 배제시킨 대상이 무엇인지 발설하여 불합리한 현실을 준열하게 비판하고자 한 반면에 뱀파이어는 오히려 부조리함을 은폐시키기 위한 산물이라는 점이다. 사회의 부조리를 환기하는 장치로서의 귀신과 대비하여 서구의 정신세계는 책임회피를 위한 망상적 존재에 불과한 것이라고 말 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우리의 귀신은 현실적 규범과 질서의 균열로 인한 부정에 의해 희생된 소외되고 배제된 자들의 목소리를 되살려내어 사회적 건강성을 회복시키려는 시대적 합의의 성격을 갖는다. 그러나 뱀파이어는 사탄이고 악마이며 신의 권위에 대항하는 사악한 존재로 치부될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알지 못하는 것이나, 자신들의 영역에 침입하는 어떤 것에 불온한 이미지를 씌워 배제시킴으로써 자신들의 권위와 영역을 지키겠다는 내심의 반영에 머무르고 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16~7세기에 대두된 이 존재의 이러한 정체성은 세기가 흐르면서 꾸준히 변화했다는 점은 주목할 부분이다. 우리의 귀신, 특히 처녀귀신 등, 여전히 과거의 전통적 산물에 머물고 있는 것과 대조되는 측면이다.

 

2. 뱀파이어의 진화?

 

책은 이 혼란스러운 망상의 산물인 흡혈귀가 서구사회에서 어떻게 변모하고 있는지를 추적한다. 그것은 문학과 회화, 음악과 영화 등 문화적 도구들을 통해 그 형상과 정체성을 확립해나가고 나아가 새로운 사회적 의미를 추가해 가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계몽주의 시대가 도래하자 이성에 의해 망상이 짓눌리는 것은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하지만 곧 이은 낭만주의 시대는 이 망상의 산물에 휘황찬란한 형상을 입히기 시작한다. 괴테를 비롯한 무수한 작가들의 작품을 토대로 1836년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흡혈귀의 상당부분을 형상화한 작품인‘테오필 고티에’의 《죽은 연인》을 낳는다. 인간적 감정을 지닌 존재이며 자신의 희생자와 사랑하는 사이가 되는 최초의 흡혈귀, 게다가 뱀파이어와의 결합이 영생(永生)의 약속을 의미하는 것도 이 소설이 처음인 모양이다.

 

그리고 최고의 판타지 문학상의 이름이 된 그 유명한‘브램 스토커’의 소설,《드라큘라》의 출현은 바로 뱀파이어의 모든 변형들의 전범(典範)이 된다. 아마 대략 이 시기부터 문학과 영화, 음악 등이 상호 교섭하며 각양각색의 정체성을 지닌 뱀파이어들이 만들어졌다고 해야 할 것 같다. 그것은 비록 저작권 문제로 인해 《노스페라투》라는 이름으로 발표될 수밖에 없었으나 브램 스토커의 《드라큘라》를 가장 탁월하게 영화화한 감독‘무르나우’의 천재성에 기초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햇빛은 뱀파이어에 치명적이다.”, “길고 뾰족한 송곳니” 처럼 뱀파이어의 기호가 된 대부분의 이미지들이 여기에서 형상화되었다고 전하니 말이다.

 

이것을 기점으로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뱀파이어류의 소설과 영화, 오페라와 연극 등이 발표 되었으니 책에 소개된 특유의 시학적 감각으로 컬트적 지위를 지닌 B급 영화들까지 쫓다보면 사람들이 얼마나 이 망상적 존재의 매혹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지를 가늠케 된다.

이와 같이 뱀파이어가 사회문화 전반에 양적으로 양산되는 것과 함께 질적 변화도 수반되어 왔음을 목격하게 된다. 모두(冒頭)에서 말한 바와 같이 초기의 뱀파이어는 그저 종교와 사회적 부조리를 은폐하고 배제하기 위한 존재였다. 그러나 브램 스토커에 이르러 신에게 맞서는 대적자로서의 사탄으로 변형되고, 노스페라투에 가서는‘인간과 죽음의 본질에 대한’철학적 대화에 이른다.

 

드디어 양산과정에서의 경쟁은 단지 혐오와 헌신 사이를 오가는 긴장이나, 피안의 존재가 지닌 어두운 마성위에 보다 자극적이고 감각적인 동기를 부어 넣기 시작한다. 희생자 여인과의 성적 결합, 피에 대한 욕망과 같이 관능과 관음증을 집중 공략하는 트래쉬 무비들을 낳지만 이 대량생산은 자연스레 인간적, 사회적 반영을 내재하게 된다. 즉 진화의 도약을 이룬다고 해야 할 것 같다. 도태와 선택의 과정을 겪으면서, 신의 창조에 맞선 자부심으로서, 섬뜩함의 정체에 대한 자연의 경외에 대한 탐색으로, 환생과 구원에 대한 희망으로써, 인간의 영생에 대한 은유로써의 정체성을 확립해 나갔다는 것이다. 이것은 급기야 “육체와 피의 봉헌극”이라는 도식을 벗어나《트와일라잇》같은 청교도적 동화 같은 뱀파이어를 탄생시키기에 이르렀다.

어떤 존재가 만들어졌다면 분명 이유가 있다. 그런데 수세기를 변모해서 오늘에 이른 뱀파이어는 어떤 이유를 지니고 있는 것일까?

 

3. 마무리 말

 

21세기 문화로써의 뱀파이어는 사실 그 동기를 상실했는지도 모른다. 다만 인간의 욕망을 대변하는 망상적 존재라는 하나의 도구에 불과하다고 하면 지나친 얘기가 될까? 고작 매력적인 남자친구와 이를 원하는 소녀와의 이룰 수 없는 달콤한 좌절의 고통을 매개로 한 사랑이야기가 전부일 정도다. 본래 태생이 건강한 것이 아니다보니 시대의 변화에 적응하기 위한 한낱 상품으로서 전락한 것이 아닐까? 본디가 상품이었다는 것이다. 기독교의 은폐 상품, 주류의 위장 상품, 그리곤 인간의 영원한 욕망인 생명에 대한 희구라고 구색을 맞추긴 하지만 사실 그 사회적 존재로서의 생명은 이미 끝 난 것인지도 모른다. “뱀파이어, 끝나지 않는 이야기”는 이처럼 상품시장에서의 도태를 피하기 위한 처절한 변신, 신상품 기획의 요구에 대한 고달픔이 느껴진다. 정체성이 달라진 귀신은 이미 또 다른 존재인 것이지 끝나지 않은 것이 아니다. 단지 새로운 존재의 시작이지 않을까? 아무튼 서구의 흡혈귀에 대한 통속적 고찰이랄 수 있는 이 책의 망라적 소개는 충분히 흥미로운 자료적 가치를 제공하고 있음에는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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