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틀 시카고
정한아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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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몸처럼 아파야 진짜 ‘꿈’이라고요.”

 

꿈을 가슴에 가득 품고 있는 열두 살 소녀의 시리지만 빛 같은 이야기다. 또한 자신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모여 사는 쇠락(衰落)하는 기지촌의 시퍼런 멍의 기록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한국인이 알지 못하는 삶의 이야기, 단지 심심할 때만 동물원 구경하듯 바라보는 시선 밖의 이야기다. 어설프게 타인의 고통을 말하는 위선을 부끄럽게 하는 이야기이며, 슬프고 가난한 사람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소외된 골목이자, 공동묘지의 이야기다. 그럼에도 온통 향긋한 장미꽃 향기가 “말 할 수 없는 감정들을 밝히 비추어주는” 빛처럼 흘러넘치는 정말의 이야기다. 그리고 소녀의 마음 속 거인을 품고 싶어질 만큼 사랑이 풍성한 이야기다!

 

소설의 프롤로그에는 “매일매일 유실”을 경험하고 있다는 조숙한 열일곱 살 소녀가 보이지만, 이내 시간은 소용돌이쳐 열두 살 소녀 ‘선희’의 시선이 자리 잡고, 이전을 앞둔 기지촌 골목의 풍경이 ‘모래 그림’처럼, 아니 지워지지 않고 허물어지 않을 기록이 되어 아릿하게 지면을 채운다. 마을에 미군부대가 들어온 직후부터 생긴 공동묘지에는 미군들에게 꽃을 파는 여인들, 그녀들과 그녀들이 낳은 아이들의 고통과 죽음이 지나온 시간만큼 켜켜이 쌓여 있다. 모래로 그린 그림 같은 삶, 매일매일 허물어지는 삶, 텅 빈 가슴을 부여잡고 죽을 기회를 엿보고 있는 것 같은 삶들로 가득 채워진 골목, 그래서 그 허기를 메우기 위해 열두 살 소녀가 찾아드는 숲 속 공동묘지는 “자다 깨어 엄마!”하듯이 단단히 쥐고 싶은 그것이다.

 

“꽃의 스크럼 - 장미 묘목”

 

미군 기지의 이전(移轉)과 함께 골목의 클럽들과 상점들은 하나둘씩 떠나고, 마을의 풍경은 더욱 을씨년스러워진다. 세상의 시선은 비로소 골목을 찾아든다. 심심한 대중의 관음증을 채우기 위해 카메라 무리를 이룬 방송사 촬영팀이 들어와 ‘죽은 여자들’에 대한 이야기로 화제를 만들고, 더 이상 살(flesh)을 팔지 못해 꽃을 팔아 하루하루 먹고사는 할머니들에게 “지금 기분이 어떠냐고” 마이크를 들이댄다. 어린애도 묻지 않을 몰염치한 말들을.

그래서 꿈꾸는 사람인 ‘체 게바라’가 그려진 셔츠를 입은 촬영팀에게 열두 살 소녀가 묻는다. “아저씨는 우리 골목 때문에 숨도 못 쉬게 마음이 아픈가요?” , “자기 몸처럼 아파야 진짜 꿈이라고요.”하고 말이다. 호기심, 관음증, 고작 일회성 연민으로 자신들의 외면을 위로하는 그런 것이 아니어야 한다는 어린애다운 항변일 것이다. 위선들, 수치를 모르는 뻔뻔함들...

 

공동묘지는 미군 기지가 떠나고 난 터의 골프장 건설을 위한 연결 도로로 파헤쳐질 것이라는 소문이 돌고, 엄마와 그리고 죽은 여자들과 그녀들의 아이들이 묻힌 곳, “납작한 거북이 등”같은 세상의 끄트머리에서 우르르 떨어져 죽은 약한 자들이 자리한 쉼터의 약탈을 막기 위해 소녀는 장미 묘목을 심기 시작한다. 땅을 파고, 거름을 주고 흙을 덮고 물을 길러 나르는 열두 살 아이의 고된 노동은 그 어떤 것보다 성(聖)스럽다. 이것만으로도 이미 세상의 폭력을 무위로 만들기에 충분한 것이 아닐까?

 

공동묘지를 빙 둘러 사방에 장미꽃이 빽빽하게 둘러쳐진 곳, 눈꽃 같은“하얀 장미꽃들이 향기로운 화관”을 쓰고 있는 풍경은 슬프고 가난한 자들의 무덤이 아니라 ‘천국’ 그것이었을 게다. 열일곱 살이 되어 펼쳐보려 했던 엄마의 일기에 담긴 간절하고 따뜻한 사랑의 언어들은 에필로그가 되어 시간을 다시 옮겨놓는다. “다른 사람들을 온 마음으로 가엾게 여기는 사람!”, “온 숲에 ‘무조건적으로’ 다 내리는 비 같은 사랑”이 읽는 이의 마음을 촉촉이 적신다.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이게 하는 것이 시인의 마음 아니런가.  빛과 같은 좋은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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