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트리 스피박 라이브 이론
마크 샌더스 지음, 김경태 옮김 / 책세상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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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 낯선 인종의 사람은 그 생김새가 같아 보인다. 한국인을 비롯한 극동에 위치한 사람들을 서구의 인간들은 다 똑 같이 생겼다고 하며, 더구나 이러한 자신의 편협한 시선에 기초하여 한국인은 성형대국답게 모두 똑같이 생겼다고 모욕을 가하기까지 한다. 인종적 우월의식에 따른 무관심과 무시해도 된다는 억척스런 무지에 토대를 둔 교만 때문이다. 어찌 모두 똑같게 생겼겠는가? 다름에 대한 차별과 배제라는 알지 않으려는, 알고 싶지 않다는 외곬의 수구(守舊)성과 타자를 알지 못하는 유아적 이기심에 터 잡은 미성숙한 자의식에 뿌리를 둔 골 깊은 맹목(盲目)일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글을 쓰거나, 써진 글을 읽는 사람에게도 아주 흔하게 나타난다. 유럽의 엘리트 지식인이라 자처하는 인간들은 자신의 글이 세계 모든 지역의 인간에게도 동일한 인식으로 읽힐 수 있으며, 그렇게 읽혀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시아의 한 귀퉁이 사는 농부의 아내는 아마 전혀 다른 시선으로 읽기 십상이다. 그럼에도 감히 인류 보편적 진리 또는 지식이라거나, 동일한 이해를 갖는 것이 지식이라 주장하기도 한다.

 

그런가하면 읽는 이들 또한 글쓴이가 의도한 의미를 읽어내는 것, 혹은 평자가 해독한 어떤 지침적 노선을 따라가는 것을 잘 읽어 낸 것으로 착각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한 소설에서 작가가 일부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말투를 사용하며, 마치 리얼리티를 부여하려 했다고 하면, 독자는 이렇게 쓴 작가의 의도를 따라가는 것, 즉 작가의 의지를 읽는 것을 잘 읽었다고 생각하기 일쑤다. 그 말투를 사용한 이유, 즉 직업에 대한 오래된 편견이 내재하고 있으며, 그것을 관습적으로 되풀이하는 작가의 인식에 의문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이거 계급 차별 아닌가? 인종차별 아닌가? 이 작가는 사람을 이렇게 구분하고 있구나라고 그 글의 태도를 알아차리는 읽기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 책은 이러한 태도와 상궤(常軌)를 같이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책의 주제이자 대상 인물인 가야트리 스피박 초국가적 리터러시라고 일컫는, 여러 차이 안에서 세상을 읽는 능력을 지닌 주체로의 변화를 주장하며, 마르크스주의와 페미니즘에 데리다의 해체적 시각을 도입하여, 다르게 읽기와 소외되고 무시된 이들에게 저항의 언어를 제공한 시대의 윤리학자이자 사상가이다.

 

책은 스피박의 주저(主著)포스트 식민이성 비판을 중심으로 하고, 그녀의 사상적 시원이라 할 수 있는 논문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를 기저(基底)로 하여, 주류 세계의 잃어버린 관점과 특권의 탈중심화를 향한 지고한 윤리적, 문화적 사유를 쫓는다. 그것은 자본주의의 결여된 윤리를 가리키고, 페미니즘 전선에 뛰어들며, 뿌리깊은 언어의 오용과 문화적 폭력의 실태를 드러낸다. 저자인 뉴욕대() ‘마크 샌더스교수는 이 탐사를 꼼꼼하게 해독하고 있지만 여전히 스피박의 저술만큼 쉽지 않다.

 

그럼에도 저작들을 읽는 일반 독자에게는 접하기 어려운 스피박의 각종 발표 논문을 통해 특정 사상이나 주장의 논지를 보다 분명히 전달 받을 수 있으며, 논의의 명료성을 스피박 당사자의 답변을 통해 확인케 하는 대담으로 인해 문학과 독해, 윤리에 대한 그녀의 개념들에 상당한 이해를 갖게 된다. 스피박은 초기 탈식민분야의 시초격인 인물이다. 그녀의 행적은 민족-국가의 시민으로서 대도시와 민족-국가와 출생지 사이의 교류를 위한 조력자로서 서발턴을 비롯한 목소리를 지니지 못한 인민을 담아내기 위한 노력으로 점철되어있다.

 

우리는 미래의 인문 교육자들이 초국가적으로 글을 읽고 쓸 수 있도록 해야 한다.” -13

 

이 문장은 스피박의 연구 실천의 행적을 아마 한 마디로 요약한 것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주류의 목소리인 담론적이고 사회적, 지정학적 내재성에 대한 공모자로서의 읽기가 아닌, 스스로 다른 사람과 그 밖의 많은 타인의 입장이 되어봄, 즉 도덕적 선의 위대한 도구인 상상력을 지님으로써 세계의 특권적 해독을 피할 수 있다는 선언일 것이다. 그것은 고대 연극의 파라바시스(Parabasis)’와 말소 표기 아래에서만 번역되어야 하는 책임 불가능성의 보존이며, 존재한 적 없던 것처럼 지워버린 승인되지 않은 페제(廢除)의 흔적으로부터 말하는 주체의 상상하기 이다.

 

이러한 언어들은 모두 다르게 읽기, 서사의 양식 외부에 있는 사람들을 포함하는 읽기, 내포된 독자로 상정된 읽기로부터 비켜선 읽기를 말하는 방식이다. 예를 들자면 탈식민화된 지역의 양상을 전하는 토착정보원이 있다고 하자. 아마 그는 분명 그 지역의 지식 엘리트일 것이고, 그는 현지의 하급계급과 분리되어 있는 존재일 것이다. 즉 그 정보에는 그들이 보호하고자 하는 이들의 실제와 인식론적 불연속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하층 계급의 사람들은 역사적 진보의 주류에 결합되지 못하기에 항상 서발턴으로 남게되며 또한 서발턴으로 만들어진다는 점이다.

 

그래서 데리다의 해체는 스피박에게 중요한 해독의 도구가 된다.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영역를 하면서 스피박은 서문에 해체를 자신의 언어로 정의하고 있는데, 그것은 이미 기입되어 있는 재구성하기 위해 분해하는 것으로서, 결정할 수 없는 순간을 드러내고, 고유 체계를 뒤집는것이다, 또한  비평가의 통제, 텍스트의 권한을 버리는 것, 의미의 우위에 대한 확신을 저버리는 독해이다.

 

마음의 변화와 욕망의 비강압적인 재배열로서 인문학 교육을 배우고 실천하는 것, 아래로부터 배우는 것을 학습하는 것이다. 입증 불가능한 것으로부터 배우는 훈련으로서 문학적 읽기, 즉 초국가적 리터러시를 실행하는 것이다. 이러한 실천적 모델로서 스피박의 마르크스 자본읽기나 인도의 작가 마하스웨타 데비의 소설 읽기의 사례들은 자본주의의 윤리적 결여와 페미니즘의 작동방식 및 양상을 새롭게 이해하고 바라볼 수 있는 관점을 제공한다.

 

이를테면 데비의 벵골어로 써진 소설 Stanadayini을 스피박은 <젖어미>로 번역한다, 가능한 번역어인 <The wet-nurse(유모)>는 원어의 의미가 지닌 충격을 주기에는 불충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젖가슴을 상품으로서의 노동력이라는 기관으로, 또한 성별화된 동인의 작동방식을 가시화하는 것이다. 문학 읽기, 번역의 시선에서 이처럼 숨겨질 수 있는 것을 드러내어 해독하여 존재하지 않음을 읽는 것이 바로 초국가적 리터러시임을 알려주는 것이다.

 

스피박은 쥘리아 크리스테바중국 여성에 관하여를 비롯하여 데리다의 저술들에 내재된 자민족중심주의, 강박적인 자기-중심주의를 비판하기도 한다. 이러한 예시적 이야기가 있다, 백인 남성이 황인 남성으로부터 황인 여성을 구하는 스토리가 있다고 가정하자. 이것에 어떤 문제가 도사리고 있는지 우리는 읽을 수 있어야 한다. 유럽 백인의 제국주의적 자비를 통해 여성 서발턴을 침묵시키게 한다. 황인 여성은 이 구원에 대해 무어라 할 말이 있겠는가? 그래서 스피박은 선언한다. 페미니스트로 발언하기 위해서는 서구 제도의 역사에서 그 흔적을 완전히 덮어버려야만 한다.”.  어떤 텍스트가 쉽게 대립적으로 보일 때 그 공모를 목격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스피박은 크리스테바에게 주문한다. 내가 누구인지, 다른 여성은 누구인지, 나는 그녀를 어떻게 명명하고 있는지를, 그리고 유럽중심적인 페미니즘의 타당성은 무엇인지를 자문해보라고. 부유한 국가의 여성은 통합적인 착취 체제에 객관적인 관심이 없다고 지적한다. 명확하게 억압을 작동시키는 저임금 노동의 가장 낮은 수준의 여성들에 대한 인식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사실 나의 감상은 스피박의 사상적 논의에 대한 마크 샌더스가 쓴 해석들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스피박의 윤리적, 사상적 이해가 어떤 것인지를, 그것이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어떤 의미인 것인지를 수용하는 데 결코 적은 것은 아닐 것이다.

 

읽기에 관한 직감 및 윤리적인 것에서 독자가 그러한 연결고리를 발견하도록 도와주는 단서들을 구체적 해석의 형태로 제공하는 이 책은 무수한  찢어진 문화적 직물들을 어떻게 수선(修繕)하며 해독하여야 하는지를 분명히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혹시 우리는 자애로운 자유주의적 페미니스트로서 제3세계를 자기 이해의 수준에서 동질화해버리는 것은 아닌지를 돌아보게 된다. 우리는 우리를 의심해보아야 한다. 나는 어떤 위치에서 세계를 읽고 있는지를. 내 양식의 외부에 있는 존재에 대한 이해가 있는지를. 난해하고 독창적인 스피박에 조금 가까이 다가가는 데 아마 이 저술은 분명 긴요한 도움이 되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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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원 2023-02-08 21: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미안한 질문 드려요. ˝ 데비의 벵골어로 써진 소설 「Stanadayini」을 스피박은 <젖어미>로 번역한다, 로 번역해도 충분해보이지만 충격을 주기에는 불충분한 의미를 지닌 어휘이기 때문이다. ˝ 이 부분이 이해가 잘 가지 않아서요. 젖어미가 아니라 무엇으로도 충분한가요. 뒷문장에 나오는 단어인가요?

필리아 2023-02-08 22:13   좋아요 1 | URL
‘유모‘로 번역되는 어휘이지만 스피박은 원어가 담고있는 의미의 적나라한 드러내기를 위해 ‘젖어미‘라는 여성의 신체를 포함한 단어로 번역했다는 뜻입니다...^^
즉 유모라는 단어는 사용자인 주인의 언어이고, 실제 여성의 신체를 내어주는 노동이라는 의미를 숨기고 있는 것이죠. 스피박은 이 노동을 은폐한 주류의 언어를 버리고, 보다 진실한 언어를 사용한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제 문장 표현이 서툰 까닭인 것 같네요. 문장을 조금 수정했습니다~고맙습니다. 초원님.

초원 2023-02-09 21:22   좋아요 0 | URL
친절한 필리아님 감사해요. 촘촘한 읽기로, 세련된 리뷰로 고마운 안내자이십니다.
 
뮈세의 베네치아 작가가 사랑한 도시 6
알프레드 드 뮈세 지음, 이찬규.이주현 옮김 / 그린비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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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른 욕망의 나라는 그리 일찍 깨어나지 않는다.” - 티치아노의 아들에서

 

 

이 관능적 문장은 젊은 시인 뮈세가 연인 조르주 상드에게 기대했던 열정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뮈세 사후 2년 뒤에 출간된 상드의 소설 그녀와 그(Elle et Lui)에서 뮈세로 추정되는 주인공 로랑이 기대하는 여인상, 바로 그것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아이는 성녀 테레즈의 숨결로 되살아난 비너스같은 사람을 애인으로 원한다고 상드는 쓰고 있다. 신성한 모성애와 밤의 열정을 지닌 여인, 자신의 갈망만을 가지고 세상의 온갖 도취를 끌어안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 이기적 인물이 당사자로서 상드와 함께한 그 유명한 스캔들을 낳은 베네치아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이다.

 

책의 표제는 뮈세의 베네치아로 하고 있지만 그 실제는 뮈세의 단편 소설 티치아노의 아들이다. ‘작가가 사랑한 도시라는 기획 하에 편집된 시리즈의 하나로서 소설의 무대가 이탈리아 베네치아이기 때문이었던 듯하다. 이 책을 읽게 된 것도 오직 베네치아에 매혹된 내 취향이 이끈 것으로, 주인공들이 거닐고 이동하던 장소를 그려보며, 운하에 떠있는 곤돌라와 바닷물에 잠긴 광장, 바닷물이 계단에 철썩이는 현관, 새벽안개 자욱한 미로같은 골목길의 영상이다.

 

소설 티치아노의 아들속으로

 

이 작품은 16세기 이탈리아 베네치아 르네상스 황금기를 대표하는 회화 <우르비노의 비너스(Venus of Urbino)><천상과 세속의 사랑(Sacred and profane love)>으로 잘 알려진 티치아노 베첼리오(Tiziano Vecellio)’의 둘째 아들 폼포니오 필리포 베첼리오(일명 피포)’와 베네치아 최고행정기관인 10인 위원회의 피에르 로레단의 딸이자, 행정장관 도나토의 미망인인 스물네 살의 과부이며 명문가의 상속녀인 베아트리체 도나토와의 사랑 이야기이다.

 

선친 티치아노와 형이 같은 시기에 사망하자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은 피포는 베네치아의 젊은이들을 몰락시키는 일을 하는 오르시니 공작부인의 집에서도박과 여흥으로 가산을 탕진하며 놀아나는 방탕아라 할 수 있다. 이 인물은 뮈세 자신이 투영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상드와 함께한 베네치아 여행에서 그녀는 소설 집필에 몰두하며 연인인 뮈세의 시작(詩作) 활동을 독려하고 있었다. 젊은 연인의 사랑의 갈망을 열의로 받아들이지 않는 상드에 대한 배반감으로 뮈세는 그 상황에 대한 바람과 자신의 열정을 이 소설로 표현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성(理性)을 모두 저당 잡힌 채 쾌락에 허우적거리는 무기력한 일상을 보내고 있던 피포에게 그윽한 섬세함이 배어 있는금자수가 수놓인 벨벳으로 된 주머니가 선물처럼 전달된다. 그곳에는 이 주머니가 간직하게 될 것을 허투루 낭비하지 마세요. 집을 나설 때, 금화 한 닢만을 주머니에 넣으세요. 그날 하루가 괜찮을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인가 남아 있거든 자선을 베풀 수 있는 가난한 자를 찾아보세요.”라는 서신과 함께. 피포는 베네치아의 귀족 여인들을 그려보며, 주머니를 만든 여인을 찾아보려는 열정으로 끓어오른다. 피포는 자신의 대모인 행정관 파리칼리고의 아내인 도로테아 부인을 찾아 혹여 주머니의 주인에 대한 행방을 알 수 있는지 묻게 되고, 그녀로부터 하나의 제안을 받는다. 당사자를 알려 줄 수는 없으나 소네타를 써보라는 단서를 붙인다. 몇 차례 썼다 버렸다를 반복한 끝에 미지의 여인을 위한 소네타를 완성하고 넌지시 도로테아 부인의 치마폭에 밀어 놓는다. 그 내용은 대략 이렇다.

 

어릴 적 페트라르카를 읽었을 때

나는 시의 영광을 나누고 싶어 했다네.

그는 시인으로 사랑하였고 연인으로 노래하였다네.

그만이 사용할 수 있는 신들의 언어로.

 

.....(中略).....

 

저 아래서 나를 부르는, 나를 사랑하는 그분께

스치는 길에서라도 내 손을, 내 삶을 드릴 수밖에.

 

이 유치한 소네타는 곧 효력을 나타내는데, 주머니에 대한 긍정적인 사랑의 고백으로 받아들인 미지의 여인은 하녀를 시켜 모든 이들의 눈에 띄지 않는 비밀의 만남을 약속받는다. 이 꽃에 입맞춤을 하세요. 이것은 제 여주인의 입맞춤을 담고 있답니다.” 이 행위에서 발견되듯 피포는 실물성(實物性)’이라는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것만이 사랑이라는 믿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실물성에 대한 주장은 반복되고 있는데, 베아트리체의 기대와 피포의 행위가 어긋나는 것의 상징적 비유일 것이다.

 

피포의 방탕에도 불구하고 예술에 대한 신성한 불꽃이 잠재해 있을 것이라 믿으며, 베아트리체는 자신이 그의 화가로서의 재능을 살려 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마치 상드가 뮈세에게 기대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녀는 자신이 그와 함께하는 조건으로 매일 화폭 앞에서 2시간의 그림 작업을 할 것을 제안하고 그 첫 번째 작업으로 자신의 초상화를 그려 줄 것을 제안한다. 베아트리체에 대한 존경과 감사, 신비와 사랑에 휘감겨 있는 피포로서는 제안을 수락하지만, 이 젊은이의 강렬한 정념과 탕아적 기질은 이런 규칙적 일을 감당해 내지 못한다. 그는 이렇게 항변한다.

 

이 초상이 아름답다 한들(진정 내말을 믿으라)

연인의 입맞춤 한 번만도 못하기 때문이니!

 

피포가 남긴 소네트의 마지막 절의 이 문장처럼 그는 실물이 아닌 제아무리 아름다운 걸작이라 하더라도 살아있는 여인의 입맞춤에 비 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베아트리체의 인내와 피포의 화가로서의 재능의 발현에 대한 기대는 왜 사랑에 몰입하지 않고 일(회화작업)의 병행을 요구하는가라는, 다음과 같은 피포의 자기 정당화와 마주치게 된다.

 

사랑과 영광은 형제자매 같아요, 왜 그것을 나누려고 하시는 거죠? ... 사람들은 결코 동시에 두 가지를 할 수 없습니다. ()과 시()를 동시에 상인이 할 수 없듯...”

 

소설 이야기는 이쯤에서 정리하고 이 작품에 수놓인 베네치아의 거리와 사랑의 순간에 대한 기막힌 문장들의 거리를 거닐어 봐야 할 것 같다. 베아트리체와 피포의 은밀한 첫 만남에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버린 채 이렇다 할 화가로서의 재능도 보이지 않는 남자의 사랑에 몸을 낮추는 여인의 모습이다. 그녀의 눈은 사랑과 더불어 혼란과 용기가 가득했으며, 에로스 신은 그 순간 초자연적인 명작을 더욱 미화시키는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은빛 꽃들이 수놓인 그녀의 벨벳 드레스가 바닥을 덮고” “우아하고 슬픔이 어린 모습으로 대리석 여신처럼 아름답고 창백한 그녀는 운명에 몸을 맡겼다.” 19세기 낭만주의 문장의 절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두 연인의 데이트 장소인 운하 옆 퀸타빌레 거리 궁륭아래, 도시와 리도 섬 사이, 달 밝은 밤이면 베네치아식 사랑을 나누라고 독자에게 권하고 싶은 장소로 피포가 말하는 이 장소에 독자의 상상력이 더해지면서 과연 이곳을 찾아 볼 기회가 있을까하며 머리를 저어보기도 한다. 16세기에도 쇄락하는 도시로 묘사되었던 해수면 아래로 매일 조금씩 가라앉는 안개와 물의 도시 베네치아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사랑과 예술의 세기말적 상상의 이 작품은 시간과 몰입, 인내, 천재성과 같은 예술적 지향과 맞닿으면서 특별한 문학적 여행을 만끽하게 한다.

 

()은 여자가 원하는 것을 원한다.” - 베아트리체 도나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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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구태여 문학 장르를 특정한 개념적 세부분류로 구분하는 것은 어쩌면 식자(識者)들이 자신들의 무료함을 달랠 겸 어쭙잖은 전문성의 자랑질도 하고 싶었던 것이라고 얘기할 수 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 동기야 어쨌든 이러한 분류 작업은 독자들의 작품에 대한 이해에 분명 도움을 주고, 글을 쓰는 이들에겐 진부함을 탈피하는 새로운 방향의 안내가 되어주기도 할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단순한 이해에는 무언가 부족한 느낌이 듭니다. 우리네 일상적 언어로 이 세계를 온전히 표현할 수가 있나요? 아마 부족한, 결여된 무엇을 느낄 수밖에 없을 겁니다. 이를테면 지배질서가 은닉하거나 배제시켜 그 근원을 표현하지 못하거나 할 수 없는 것들로 인해 그것에 도달하기 위해 작가들은 그 결핍의 욕구에 시달리는 것이 실상이니까요. 그래서 작가들은 기성의 세계 인식이나 언어가 확보한 독단론을 뛰어넘어 시간성의 교란이나 현실과 가상을 전복하는 새로운 세계를 그리고 싶은 충동에 내몰리곤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럼으로써 이 세계의 존재방식을 재질서화하고 풍부하고 다채로운 세계의 인식을 제시하려고 하는 것이겠지요. 이러한 관점으로 바라보면 새로운 장르의 출현, 그 시도는 당연하고 불가피한 소산이라고 이해하게 됩니다. 이제 슬립스트림(slipstream)’이라는 이미 오래되었지만 제겐 낯선 장르를 알아보아야겠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국내에 번역 소개된 적이 없던 작가인 것 같은데요, 민음사에서 ‘애나 캐번(Anna Kavan)’의 소설 Ice』이 번역 출간 되었네요. 이 소설을 평론가들은 생소한 장르인 슬립스트림의 전형적 작품으로 꼽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추가적인 장르화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SF작가 존 케셀(JohnKessel)’ 슬립스트림은 장르가 아니라 공포나 코미디 같은 문학의 효과일 뿐이며, 인지부조화가 그 핵심이라 지적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단지 문학적 효과로 이해하던, 장르로 받아들이던 슬립스트림이 무엇인지는 알아야겠습니다. 이러한 개념을 포함하고 있는 작품이 과연 내 취향에 맞는 것인지, 설사 맞지 않더라도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에 대한 선()지식이 필요한 것이니까요.

 

가장 단순하고 간단한 정의는   익숙한 것을 낯설게 하거나 낯선 것을 낯익게 만드는 글쓰기의 한 형태인 이상함의 소설’”이라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를 조금 구체적으로 표현한 설명으로, 슬립스트림 문학의 특징은   사실주의 원칙의 파괴, 전통적인 환상적 이야기의 탈피를 위해 SF를 비롯해 심리적 붕괴에 대한 인식을 이용한 비현실적 감성의 탐구라고 합니다.  이들 정의는 너무 압축되어 있으며, 구체적 실체가 그려지지 않습니다. 혹자는 간략하게  ‘SF 요소를 지닌 소설이지만 주류의 순문학에 가까운, 경계가 허물어진 주류 문학이라고도 합니다. 다시 말해 인간의 상태를 표현하기 위해 SF장르의 비유를 사용하는 고급 예술의 한 형식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정의들을 보면 언뜻  마술적 사실주의가 떠오르는데요, 슬립스트림은 이를 포함하는 상위의 개념이랍니다. 마술적 사실주의는 우리들이 몸담고 있는 일상적 현실에서 출발하는, 즉 굳게 현실에 발을 딛고 창조적 상상을 통해 환상에 이르도록 가공되는 것입니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가브리엘 마르케스, 이탈로 칼비노로 대표되는 일련의 작가들이 보여주는 환상과 현실, 심리적 실재와 현실성, 역사와 허구 등의 경계 해체를 통해 상호 교환되는 특성을 공유하는 작품들이지요.

 

그런데 슬립스트림은 환상, 동시성, 파편성 등 마법적 사실주의의 시간 형식의 파괴는 물론 소설의 행동 공간을 여러 층위로 중첩 사용할 뿐 아니라, 일반적 SF소설이 갖는 선형적 이야기 구조를 버리고 사실과 초현실, 부조리를 마구 뒤섞은 의식의 흐름 기법에 가까운 비현실적 소설이라 묘사되고 있습니다. 영국 소설가 크리스토퍼 프리스트(Christopher Priest)’는 이를 한 문장으로 정리했는데요,   일그러진 거울을 살짝 들여다보듯 독자에게 느껴지는 '타자성'”이라고 말이죠. 슬립스트림을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것을 마음의 상태에 접근되는 상태 그대로 생각하는 것이라고 조언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슬립스트림, 왠지 이들 정의에 대한 문장들을 읽고 나면 선뜻 다가가기 어려운 소설로 이해됩니다. 그럼에도 이 용어의 기원을 말한 영국 사이버펑크 작가 브루스 스털링(Bruce Sterling)’의 말처럼 "SF 장치를 사용하지만 장르 SF가 아닌 작품" 이라는 간략한 문장이 다소 그 문턱을 낮춰줍니다. 슬립스트림의 범주에 속하는 작품으로 스타니스와프 렘(Stanistaw Lem)’The Cyberiad, ‘토니 모리슨Beloved, '무라카미 하루키태엽 감는 새 연대기등이 거론되고 있습니다만, 페미니즘 문학의 시원을 연 ’애나 캐번의 작품 Ice를 통한 슬립스트림의 실체에 접근해 보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이 작품은 서구에 페미니즘의 두 번째 물결이 몰아치기 직전인 1967년 출간 되었답니다. 1970년대 페미니스트 SF 주요 작품이 등장하기 이전에 써진 소설로서, “여성에 대한 위협적이고 치명적인 성적 대상화와 삶을 파괴하려는 집단 간의 냉전을 묘사하고 있다고 하는군요. 그리고 기후변화와 전쟁 위기... 즉 이들을 통한 페미니스트 문학의 실험이라는 것입니다. Ice는 기존의 거의 모든 장르를 넘나들며, 장르를 파괴하는 파괴적 모더니스트 소설이라 평가되고 있습니다.

 

1967, 68혁명이 아직은 일어나지 않은, 기성의 고루함과 젠더의 구분이 여전히 암약하던 시대입니다. 애나 캐번은 기성의 언어로는 그녀가 기대하는 새로운 질서를 표현하는 것이 불완전하고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세계의 실재와 본질에 대한 의구심, 그 반발의 추동이 불가피하게 문학의 장르 파괴, 마구 넘나드는 의식의 흐름을 쫓을 수밖에 없었던 것 아닐까하고 생각해보게 됩니다. 어떤 개념의 원형으로 불리는 작품은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시대성, 지배 질서를 넘어서기 위한 작가의 노력이 배어있으니까 말이죠. 그것의 실체에서 무언가를 발견하게 되리라는 기대일 겁니다.  어쩌면 요즘의 SF를 넘나들며 주류 문학의 경계를 허무는 한국 문학의 흐름도 이와 그리 다르지 않는 연장선에서 보아도 되는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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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달피 모자를 쓴 친구 - 선총원 단편선집
선총원 지음, 이권홍 옮김 / 어문학사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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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총원의 글을 읽게 된 동기는 출판사 첵세상에서 간행된 동북아, 니체를 만나다에 수록된 루쉰과 선총원의 니체 해석이라는 수원가오지안후이(高建惠)’교수의 논문 덕분이다, 중국 문예비평가 주광첸(朱光潛)’은   중국을 대표하는 작가는 루쉰과 선총원 밖에 없다.”며 중국 현대문학 최고의 작가라 칭송하기도 했다.

 

1, 선총원(沈從文)은 누구인가?

 

1988년 노벨문학상 최종 심사에 올랐으나 그의 사망으로 수상자가 되지 못했음을 밝힌 노벨문학상 심사위원 고란 말름크비스트의 발표는 뒤로하더라도 루쉰과 나란히 거론되는 대작가가 왜 대중에게 그토록 알려지지 않았던가에 대한 의문으로 시작해 보자. 그는 문학의 정치와 상업의 종속에 반대함으로써 중국공산당 정권에 의해 기녀 작가로 매도되고, ‘반동 작가로 분류됨으로써 1978년 복권될 때 까지 그의 이름과 작품이 거론되는 것 자체가 금지되었다는 이유가 가장 큰 이유가 될 것이다.

 

한편 그의 생애 80여 편의 작품집을 남겼으나, 복권 이후 그는 필()을 꺾고 역사연구원으로 1988년 생()을 마감했다. 그의 사망 이후인 1990년대 되어서 비로소 작품 평가가 새롭게 이뤄지고 잠깐의 열풍이 불긴 했으나 그의 중국 현대문학에 대한 업적과 영향, 나아가 그에 대한 연구는 미흡한 채로 남게 된 실상이 안타깝게 전해지고 있다.

 

가오지안후이는 선총원을 “1920년대 후반 중국에서 1차 니체 붐이 퇴조하던 시기에 새로운 시각에서 니체에 진입한 현대 문학의 대가로 소개하고 있다. 그는 루쉰의 냉철한 문학 스타일과 판이한 시적 자연의 작가로서 니체의 초인(超人)을 고립주의와 개인 중심주의로 수용하였으며, 고독주의에 대한 긍정적 관점을 유지했다고 해석한다. 실제 10년여에 이르는 대학(칭다오와 베이징)교수 생활을 제외하곤 체제 밖에서 살며, 고향 샹시(湘西) 지역을 비롯한 원시 자연의 생명력과 자유로움을 가식 없이 원초적으로 유지하는 현대문명에 물들지 않은 자연의 변방지역을 심미적 예술의 근거지로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현실로부터의 도주와는 다른 것이었다. 선총원은  적당한 외로움을 유지해야만 독립적인 사고와 깊은 인식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며, 이 고독주의에 대한 긍정으로부터 초인을 발견할 수 있다는 신념의 실천이라 할 수 있다고 설명되고 있다.  본질은 생명을 긍정하는 데 있으며, 생명의 본질은 강력한 의지이며 강력한 의지는 디오니소스 정신이 개조된 생명의지다.”라는 비극의 탄생에 기초한 그의 문장이나, 아침놀을 연상케 하는 말인(末人)들의 우매함에 대한 비판은 그가 중국인들의 정신세계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으며, 어떻게 변화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고뇌의 투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선총원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작품집으로 변성(邊城), 장하(長河)가 있다고 하지만 국내에는 이렇다 할 그의 작품이 소개된 것이 없다. 변성은 문명의 오물에 오염되지 않은 샹시(湘西) 땅에 사는 사람들의 얽매이지 않은 생명력을 말인(末人)과 대조적인 초인(超人)으로 보여주고 있으며, 고독한 캐릭터들이 끊임없이 순환하는 운명의 반복과 순환을 거듭 묘사함으로써 영원회귀를 반영하는 니체적 작품의 전형이라 얘기되고 있다. 아무튼 선총원은 루쉰의 니체 수용과는 달리 미적 예술의 문인으로 니체를 해석함으로써 중국화한 대표적 문인으로 불리우고 있다. 그의 문학 세계를 폭넓게 대할 수 없는 내 언어능력이 아쉽기만 할 따름이다.


2. 수달피 모자를 쓴 친구, 선총원 단편집으로

 

수달피 모자를 쓴 친구를 표제로 한글 번역된 이 책은 선총원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어머니 병문안을 위해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마주하는 샹시(湘西)지역의 변화를 아내 장쟈오러(張兆和)’에게 그 변모를 알려주겠다는 약조에 따라 쓴 편지글을 모아 1936년에 출간한 샹시(湘西)행 잡기를 옮긴 것이라고 역자는 설명하고 있다.

 

기행문 같기도 하고 편지글 같기도 하며, 문학적 향취 짙은 에세이이기도 한, 그런가하면 단편 소설이자 비평적 르포기사이기도 한 1936년에 작품집으로 발간된 이 글들에는 향토색이 짙게 배어있으며, 칠 백리 뱃길을 따라 마주하는 자연과 마을의 풍광과 인간들에 대한 그의 시선은 문명에 물들지 않은 자연미와 인간미, 바로 그것인 것만 같다.

 

표제작인 <수달피 모자를 쓴 친구>는 뱃길에 오르기 전 샹시 우링(武陵)의 오랜 옛 친구와의 만남, 그 변치 우정의 깊이를 들려준다. 17년만의 귀향에서 만남, 한적하고 정갈한 여관 주인이 되어 서예와 골동품을 애호하는 풍아한 사람이 된 친구가 선총원을 맞이하는 말은 그야말로 인간미란 무엇인지를 대변한다. , 정말로 네가 보고 싶었다고!”, 환하게 팔을 벌려 친구를 껴안는 모습이 그려지는 듯하다.

 

그리고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의 언어들은 격식과 모든 가식을 걷어낸 토속적 속어들로 정감이 물씬 묻어난다. 이런 개같은 경치, 그야말로 그림이군!”, 아취(雅趣)와 속취(俗趣)가 뒤섞인 감탄사를 내뱉는 허식 없이 친구를 맞이하는 친구의 말은 운치가 백출하고 유머와 진지함이 섞여 창강(長江)의 흐르는 물처럼 계속된다. 도시의 부패한 말인들과 달리 초인의 면모란 무엇인지로 글을 여는 작가의 뜻을 읽을 수 있을 것만 같다.

 

이어지는 타오위안((桃源)과 위안저우(沅州)에서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무릉도원(武陵桃源)이라 일컫는 바로 그곳이다. 신선이 사는 이상향, 그곳은 옛날 진()나라가 쇠락하고 변란을 피해 은거한 유민들이 일군 마을로서 우링(武陵)의 어부가 발견한 곳이라는 뜻이다. 사람들에게 깊은 환상을 준 그곳, 타오위안((桃源)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신선이라 어느 누구도 생각지 않는다며 문장을 연다.

 

그곳에는 뒷강(後江)이란 불리는 기녀들이 줄줄이 늘어서 군정(軍政)각계의 사람들을 위로하고 여행객을 사로잡아 번 돈에 꽃세를 받아 지역 행정과 보안에 보충한다며, 기녀들의 쓸쓸한 일생에 담아 삶의 곤궁함과 피로함에 대한 연민을 잔잔히 풀어 놓는다. 도화원기를 읽은 풍아한 상류 사람들은 아름답고 그윽한 정취를 찾아 타오위안에 찾아들지만, 신중하지 못한 이들은 병원을 찾아들게 된다며 은근히 지배계급의 위선을 슬며시 건네며 뒷강 기녀들이 그들보다 더 도덕적이라고 무산계급의 신산한 삶을 옹호, 위무하기도 한다.


 

창강(長江) 뱃길 주변의 조각루(우측)



칠 백리 창강을 세 사람의 뱃사람이 젓는 작은 배를 타고 그 뱃길과 여울의 난폭함에 따라 정박하게 된 지역의 삶의 형상들을 묘사하며 그는 오물에 오염되지 않은 땅에 사는 사람들의 얽매임 없는 생명력을 찬양한다. 아마 이러한 자연의 생명력, 그 활력을 강하게 묘사하는 글로서 야커웨이의 밤은 그 순수한 인간들에 대한 가장 멋진 관찰이며 깊은 애정의 시선을 가장 잘 녹여낸 글일 것이다.

 

강을 따라 줄지어 산 중턱에 지어진 조각루들, 이 조각루의 삶이 들려주는 격정적 신음 소리와 치밀어 오르는 뱃사람들의 억제하지 못하는 욕망과, 욕을 해대며 강기슭 조각루로 걸어가는 발걸음 소리는 자연 성욕의 자유로움으로 가식 없이 원초적 생명력의 활력이 시적 정취에 묻혀 어떤 추함도 없는 아름다움의 정경으로 마음에 깃든다. 젊은 청년 뱃사공과 조각루 여인과 하루 밤의 운우지정, 그리고 그네들의 사랑의 담화가 작가의 상상력에 기대 문학적 언어가 되어 들려진다. , 이 자연의 활력을 품은, 생명의 문장들로 이루어진 10여 편의 글들을 읽는 것은 지금 도시적 삶의 메마름에 안절부절 하는 우리네에게 다시금 니체의 자유인, 그 초인의 세계로 안내한다.

 

현대 도시인의 노예적 병색에 깊게 물든 인간들의 구경꾼적 관점, 즉 타자에 대한 무감각과 자기편익에 골몰하는 중국인의 자기반성을 촉구하던 그의 소설들, 목이 잘리는 혁명부부의 광경으로부터 동정심이란 인간적 공감은 오간데 없이 고작 망나니의 칼질이 멋져 그 직업의 장래가 유망하리라 생각하는 인물을 그린 신여구(新與舊), 변성(邊城)의 주인공 추이추이를 읽어 볼 수 없음이 계속 아쉽다. 그나마 이권홍 교수의 번역으로 선총원의 일면을 접할 수 있음에 감사한다. 지금 어느 누가 익숙하지 않은 중국 문인의 책을 찾을 것인가라는 우리네 독서계에 대한 현실적 자조의 목소리에 십분 동의하지만, 그럼에도 현실의 통속을 벗어나 앎을 확장하려는 독자들이 항상 존재하고 있다. 만만치 않은 환경이겠지만 대표작 변성(邊城)만이라도 소개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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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3-02-02 18:0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 몰랐던 작가인데, 좋은 작가 소개 감사합니다. 저도 구해서 읽독해 보겠습니다!!

필리아 2023-02-03 09:17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yamoo님~, 즐거운 독서 되시기를 바랍니다.
 

1년 이상 책장에 손을 대지 않은 채 꽂혀있던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야릇한 제목을 한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을 읽는 우연과 함께, 미스터리 장르의 소설책이 내 시선을 끌었다. ‘사토 기와무라는 작가가 쓴 테스카틀리포카(Tezcatlipoca란 작품이 독자들을 열광케 했다는 홍보 문장, 그리고 주술 자본주의토대에  칠흑같은 저승에 잠든 욕망들이 벌이는 피의 전쟁이란 표현은 당연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베르베르의 백과사전 98번 항목, 아스테카 사람들이 상상한 세상의 종말은 아즈텍 신화에서 다섯 번째 태양기인 현세에 앞선 네 번의 종말에 대한 간략한 신화를 담고 있다. 세계의 첫 번째 시기를 주관하는 신이 바로 테스카틀리포카. 연기나는 거울(Smoking Mirror)’이란 의미를 지닌 전능한 신이다. 그의 가슴에 달린 거울에는 우주의 모든 것이 나타난다. 인간의 생각과 마음을 포함한 세상일을 모두 알고 있는 신, 그래서 이 신은 주술(呪術)의 신이기도 하다.

 

이 신은 전능한 신()답게 별칭을 무려 360가지를 가지고 있다. 즉 모든 신의 속성을 지닌 하늘과 땅과 바다의 신이며, 인간 창조자이며, 온갖 생명의 기원이다. 아즈텍인 들이 이 신을 경외한 것은 물론이다. 부귀와 영화를 누리게 하다가 단숨에 모든 것을 빼앗기도 하며, 불화와 적의, 전쟁을 부추기기도 하는 신.

 

사토 기와무의 소설이 마약밀매 조직의 잔혹한 전쟁을 소재로 하며, 이제까지는 없던 피의 비즈니스를 시작하게 되는, 가장 추악한 자본주의, 그 검은 비즈니스의 내막을 상상을 초월하는 디테일로 그려내는 모양이다. 가장 강력한 주술의 도형인 마약 자본주의라는 소설의 주제를 드러내는 문장이 아주 적나라하고 자극적이다.

 

그런데 또한 우연인지, 의도된 맞춤인지 정치철학자 낸시 프레이저의 걸출한 역작, cannibal capitalism(식인 자본주의)좌파의 길이란 제목을 달고 번역되어 출간되었다. 프레이저는 "한계 없이 자본을 축적하고, 가치를 팽창시키려는 절대적 강박"을 내재하고 있는 자본주의 시스템의 비경제적 조건을 드러내며, "마치 전이되는 암처럼 도처에 전체 사회조직이 압도당할 때까지 인구 집단에 고통를 가하게 될 것이라고 자본주의 시스템 자체의 위기, 전 지구적인 파국을 회피하고 인류의 해방적 시나리오를 향한 행동을 만들어내기 위한 숙고이자 각성을 요청하고 있다.

 

주술의 신, 거울의 신인 아즈텍의 전쟁신 테스카틀리포카는 신의 의지를 넘어서려는 이들 자본주의의 마법진을 펼치는 인간들에게 과연 어떤 응징을 내릴까? ‘마약자본주의’, 그야말로 식인자본주의의 그 폭력적 욕망의 전형일 것이다. 아마도 사토 기와무의 소설, 낸시 프레이저를 함께 읽으며, 자본주의, 그 탐욕과 무자비함과 잔혹함의 속성,  그 태생적인 윤리의 결여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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