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구태여 문학 장르를 특정한 개념적 세부분류로 구분하는 것은 어쩌면 식자(識者)들이 자신들의 무료함을 달랠 겸 어쭙잖은 전문성의 자랑질도 하고 싶었던 것이라고 얘기할 수 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 동기야 어쨌든 이러한 분류 작업은 독자들의 작품에 대한 이해에 분명 도움을 주고, 글을 쓰는 이들에겐 진부함을 탈피하는 새로운 방향의 안내가 되어주기도 할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단순한 이해에는 무언가 부족한 느낌이 듭니다. 우리네 일상적 언어로 이 세계를 온전히 표현할 수가 있나요? 아마 부족한, 결여된 무엇을 느낄 수밖에 없을 겁니다. 이를테면 지배질서가 은닉하거나 배제시켜 그 근원을 표현하지 못하거나 할 수 없는 것들로 인해 그것에 도달하기 위해 작가들은 그 결핍의 욕구에 시달리는 것이 실상이니까요. 그래서 작가들은 기성의 세계 인식이나 언어가 확보한 독단론을 뛰어넘어 시간성의 교란이나 현실과 가상을 전복하는 새로운 세계를 그리고 싶은 충동에 내몰리곤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럼으로써 이 세계의 존재방식을 재질서화하고 풍부하고 다채로운 세계의 인식을 제시하려고 하는 것이겠지요. 이러한 관점으로 바라보면 새로운 장르의 출현, 그 시도는 당연하고 불가피한 소산이라고 이해하게 됩니다. 이제 슬립스트림(slipstream)’이라는 이미 오래되었지만 제겐 낯선 장르를 알아보아야겠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국내에 번역 소개된 적이 없던 작가인 것 같은데요, 민음사에서 ‘애나 캐번(Anna Kavan)’의 소설 Ice』이 번역 출간 되었네요. 이 소설을 평론가들은 생소한 장르인 슬립스트림의 전형적 작품으로 꼽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추가적인 장르화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SF작가 존 케셀(JohnKessel)’ 슬립스트림은 장르가 아니라 공포나 코미디 같은 문학의 효과일 뿐이며, 인지부조화가 그 핵심이라 지적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단지 문학적 효과로 이해하던, 장르로 받아들이던 슬립스트림이 무엇인지는 알아야겠습니다. 이러한 개념을 포함하고 있는 작품이 과연 내 취향에 맞는 것인지, 설사 맞지 않더라도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에 대한 선()지식이 필요한 것이니까요.

 

가장 단순하고 간단한 정의는   익숙한 것을 낯설게 하거나 낯선 것을 낯익게 만드는 글쓰기의 한 형태인 이상함의 소설’”이라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를 조금 구체적으로 표현한 설명으로, 슬립스트림 문학의 특징은   사실주의 원칙의 파괴, 전통적인 환상적 이야기의 탈피를 위해 SF를 비롯해 심리적 붕괴에 대한 인식을 이용한 비현실적 감성의 탐구라고 합니다.  이들 정의는 너무 압축되어 있으며, 구체적 실체가 그려지지 않습니다. 혹자는 간략하게  ‘SF 요소를 지닌 소설이지만 주류의 순문학에 가까운, 경계가 허물어진 주류 문학이라고도 합니다. 다시 말해 인간의 상태를 표현하기 위해 SF장르의 비유를 사용하는 고급 예술의 한 형식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정의들을 보면 언뜻  마술적 사실주의가 떠오르는데요, 슬립스트림은 이를 포함하는 상위의 개념이랍니다. 마술적 사실주의는 우리들이 몸담고 있는 일상적 현실에서 출발하는, 즉 굳게 현실에 발을 딛고 창조적 상상을 통해 환상에 이르도록 가공되는 것입니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가브리엘 마르케스, 이탈로 칼비노로 대표되는 일련의 작가들이 보여주는 환상과 현실, 심리적 실재와 현실성, 역사와 허구 등의 경계 해체를 통해 상호 교환되는 특성을 공유하는 작품들이지요.

 

그런데 슬립스트림은 환상, 동시성, 파편성 등 마법적 사실주의의 시간 형식의 파괴는 물론 소설의 행동 공간을 여러 층위로 중첩 사용할 뿐 아니라, 일반적 SF소설이 갖는 선형적 이야기 구조를 버리고 사실과 초현실, 부조리를 마구 뒤섞은 의식의 흐름 기법에 가까운 비현실적 소설이라 묘사되고 있습니다. 영국 소설가 크리스토퍼 프리스트(Christopher Priest)’는 이를 한 문장으로 정리했는데요,   일그러진 거울을 살짝 들여다보듯 독자에게 느껴지는 '타자성'”이라고 말이죠. 슬립스트림을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것을 마음의 상태에 접근되는 상태 그대로 생각하는 것이라고 조언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슬립스트림, 왠지 이들 정의에 대한 문장들을 읽고 나면 선뜻 다가가기 어려운 소설로 이해됩니다. 그럼에도 이 용어의 기원을 말한 영국 사이버펑크 작가 브루스 스털링(Bruce Sterling)’의 말처럼 "SF 장치를 사용하지만 장르 SF가 아닌 작품" 이라는 간략한 문장이 다소 그 문턱을 낮춰줍니다. 슬립스트림의 범주에 속하는 작품으로 스타니스와프 렘(Stanistaw Lem)’The Cyberiad, ‘토니 모리슨Beloved, '무라카미 하루키태엽 감는 새 연대기등이 거론되고 있습니다만, 페미니즘 문학의 시원을 연 ’애나 캐번의 작품 Ice를 통한 슬립스트림의 실체에 접근해 보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이 작품은 서구에 페미니즘의 두 번째 물결이 몰아치기 직전인 1967년 출간 되었답니다. 1970년대 페미니스트 SF 주요 작품이 등장하기 이전에 써진 소설로서, “여성에 대한 위협적이고 치명적인 성적 대상화와 삶을 파괴하려는 집단 간의 냉전을 묘사하고 있다고 하는군요. 그리고 기후변화와 전쟁 위기... 즉 이들을 통한 페미니스트 문학의 실험이라는 것입니다. Ice는 기존의 거의 모든 장르를 넘나들며, 장르를 파괴하는 파괴적 모더니스트 소설이라 평가되고 있습니다.

 

1967, 68혁명이 아직은 일어나지 않은, 기성의 고루함과 젠더의 구분이 여전히 암약하던 시대입니다. 애나 캐번은 기성의 언어로는 그녀가 기대하는 새로운 질서를 표현하는 것이 불완전하고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세계의 실재와 본질에 대한 의구심, 그 반발의 추동이 불가피하게 문학의 장르 파괴, 마구 넘나드는 의식의 흐름을 쫓을 수밖에 없었던 것 아닐까하고 생각해보게 됩니다. 어떤 개념의 원형으로 불리는 작품은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시대성, 지배 질서를 넘어서기 위한 작가의 노력이 배어있으니까 말이죠. 그것의 실체에서 무언가를 발견하게 되리라는 기대일 겁니다.  어쩌면 요즘의 SF를 넘나들며 주류 문학의 경계를 허무는 한국 문학의 흐름도 이와 그리 다르지 않는 연장선에서 보아도 되는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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