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응 - 주의 기울임, 알아차림, 어우러져 살아감에 관하여
팀 잉골드 지음, 김현우 옮김 / 가망서사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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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잉골드는 사회인류학자다. 최근 생태학이나 인간-비인간 동등성의 존재론을 논의하는 많은 저술들에 그 이름이 빈번히 거론되는 인물이다. 그런데 정작 팀 잉골드는 이들 학제적 이론가들의 담론에 섞이기를 반기지 않는다. 그들은 연구 대상의 현상적 조건에 동요되지 않고 평정을 유지해야 한다는 전제하에 세계와 이어진 관계로부터 단절되기를 요구하지만, 진리추구란 세계에 온전히 참여해 서로 조응해야만 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이 책을 구성하는 모든 글들은 학자로서의 페르소나를 내려놓고 그 자신의 목소리와 손과 마음으로 쓴, 그로인해 마구 뒤섞이고 흔들리며 혼란에 빠지는 자유를 만끽한 누구나 감응할 수 있는 글로 다가온다.

 

마치 과학적 객관성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자연에서 한 발짝 벗어나야 한다며, 일상의 언어를 기피하고 무척이나 깊이 사유한 척하며 배제와 소외를 자부심으로 하는 그 분리와 배척, 스스로 인간-비인간 자신과 타자의 동등성을 부인하는 모순의 지대로부터 떠나는 것이다. 저자는 평평한 운동장, 좀 더 균형잡힌 대칭적 접근 방식을 주장하는 철학자들의 이중성을 지적한다. 그들은 근대성의 강력한 신화중 하나인 자연의 굴레를 벗어나 역사의 길로 들어선 유일한 종으로서 인간이라는 신화에 올라 탄 인간중심주의의 축을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또한 최근 주류 철학적 위치를 점하는 존재론으로는 우주만물이 서로 뒤섞여 흐르는 세계를 근본적으로 말 할 수 없다고, 그것은 고립과 경계를 세운 개념이며, 이 세계의 단일성이 아닌 다중 세계를 상정하기에 서로 열려있으며 단일한 생성의 세계에 함께 참여하는 이 세계를 기술할 수 없다고 비판한다.

 

세계와 조응하려면 아예 무대 뒤로 가서 은밀히 움직이는

존재들에 합류해 동시에 움직여야 한다.” -31

 

존재론적 실재론에 경도되어 있는 내겐 당혹스러운 비판이지만, 인간과 비인간 모두가 함께 성장하고 활동하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단일 세계임을 부정하는 앎이 없는 나로서는 재발생론으로의 전환을 요구하는 그의 주장을 반박하지 못한다. 이처럼 이 저술은 삶들의 끊임없는 전개와 생성 속에서 서로 합류하고, 존재 및 생성이 한데 얽힌 흐름의 와중(진행중; in between-ness)으로서 조응을 말한다. 이 조응은 주변 세계에 주의를 기울이는 법뿐 아니라 예민함과 판단력으로 그 세계의 모든 존재자들에게 응답하는 법을 되살리려는 시도이다. 또한 이 세계 만물은 존재하는 상태(being)’가 아니라 생성중인 상태(becoming)’라는 저자의 발생론적 시선, 그 자체를 서술하는 글들이라 할 수 있겠다.

 

카렐리아 북부 숲 어딘가에 높이 4미터, 200톤가량의 거대한 바위가 있다. 그 바위는 경사면에 멈춰있는(0 zero의 속도로 미끄러지고 있는) 아슬아슬한 힘의 균형이 바위를 붙들고 있다. 빙하에 떠밀려 내려오다 그곳에 머물러 있다. 비와 눈, 혹독한 추위와 바람과 햇살의 반복 속에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하는 가운데 작은 균열이 발생하고 그 틈에 씨앗이 날아들고 파고든 뿌리가 바위를 단단히 붙잡고 있다. 이 위태롭게 균형잡힌 조합은 그 내부의 고요 속에서 영원히 숨을 멈추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언젠가 이 고요가 깨지고 바위도 굴러 떨어질 것이다. 이것은 순간에 머무르면서도 시간을 초월하는 몽상을 우리에게 안겨준다. 이 광경을 상상하며 나는 하나의 바위, , 나무의 광대한 시간의 목소리를 듣는 듯한 느낌에 빠진다. 그 광경 한가운데 뒤섞임으로서 비로소 감응을 교환하고 그 끊임없는 변화 생성하는 존재에 조응할 수 있는 감각을 얻게 된다.

 


여기의 글들은 이처럼 이 세계--존재들에 귀를 기울이고 세심하게 바라보며 그들과 어우러져 그 순환의 흐름에 함께하는 시간을 발견하게 한다. 오늘날 우리들은 이러한 물질과 함께하며 그들과 조응하는 감각을 잃어버렸다. 아마 인간과 비인간을 분리하고 이성이 통치하는 질서, 이것을 무너뜨리려는 자연에 맞서 지키려고 노력하는 투쟁의 역사라는 시간 속에서 망각하게 된 것인지 모르겠다. 오늘 기후-세계의 물질적 격동 사이에서 조화를 모색하는 인간은 이성의 규칙에 목을 내놓고 더욱더 공학기술을 미래의 방법이라 여긴다, 그럴수록 인간은 비인간 존재와 투쟁에서 패색이 짙어지는 영역들이 늘어날 뿐임을 보지 않으려 하는 듯하다.

 

하나의 일례가 기록되고 있는데. 오염에 대한 인간 인식의 역전적 양상이다. 인간은 자신들이 설정한 통상의 분류된 범주에 맞지 않거나 경계를 넘는 것들은 위험하고 불결한 것으로 간주하여 금기의 관습을 통해 물리적, 상징적으로 배제한다. 오염을 제거하는 것, 즉 오염을 제거하는 정화작업을 통해, 자신들의 개념적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정화작업이란 것만큼 위험한 것도 없다고 지적한다. 물질을 재결합하거나 재방출하기 전에 모재(material matrix)에서 분리해 내는 정화 작업, 자연적으로 섞여있는 상태에서 비교적 무해했던 물질을 순수한 형태로 분리해 낸 후 다시 혼합하거나 결합하는 과정에서 인류를 해악으로 몰아넣는 무시무시한 진정한 오염(핵폭발 등)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오염에 대한 정화의식이야말로 세계내 존재들을 위협하는 가장 극악한 행위가 되고 있다는 말이다.

 

우리는 자신의 눈에 보이지 않거나 완벽하게 정지 상태로 보이는 것들은 그 존재를 무시하거나 불필요한 것으로 여긴다. 보이지 않거나 정지해 있어 지각할 수 없다고 그 존재들이나 그 내부에 움직임이 들끓고 있지 않은 것이 아니다. 우리는 숨 쉬는 생명체인데, 우리 존재를 살아가게 하는 공기부분(aerial part)이 보이지 않는다고 그 존재를 부인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듯, 맨눈으로 관찰할 수 없는 이 대기의 모든 움직임의 와중에 무수한 존재들이 형성되고 해체되고 있음을 알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세심한 주의 기울임, 조응이다. 행위의 주체성과 수용성은 서로 얽혀 순환하는 것이다. 어느 일방 주체의 주관에 의한 일방이란 환상이고 곧 부러질 교만이다.

 

어찌 보면 이 글들은 우리에게 익숙한 사유의 길을 전복하는 여정이기도 하다. 우리들은 기술과학으로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다는 유토피아적 상상이 점점 더 많이 삶을 윤택하게 주리라는 믿음에 사로잡혀 있다. 그래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주는 말조차도 비인간은 물론 같은 인간 종에게조차 상대적 약자와 그들 존재에 비인간화라는 사악함을 뒤집어씌우고 있음을 목격하게 된다. 이를테면 바람직하지 않은 변종, UDV(undesirable variants)’와 같은 두문자어로 우려되는 문제를 가리키는 동시에 외면할 수 있는 사악한 말을 천연덕스레 내뱉는다. 이 말에 대한 경멸, 지시 대상의 원래 명칭을 말할 때 발생할 수 있는 연루의 가능성을 애초에 차단하여, 숙련된 주의력을 내세우지 않으면서 한 발 물러서 거리를 두고 중립적으로 문제를 바라보는 척한다. 이 두문자어로 된 말아닌 파렴치한 기호 뒤에 숨어 세계에 합류할 것을 부정하며 타자를 철저히 단절시키는 것이다. 이 두문자어의 범람은 지시 대상의 실재를 부인하고 관심 밖으로 밀어내며, 그에 얽힌 정서를 지운다. 그럼으로써 대상을 못 보면서도 살펴보고, 감시하고 통제하면서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아주 사악한 효과를 거둔다. 즉 두문자어로 된 말아닌 말은 사물의 진실을 가리고 현실을 왜곡하고 사실을 은폐하는 언어가 가하는 폭력의 다름 아니다.

 

이 세계를 마치 적합한 품종들만의 보호구역으로 만들 것인 양 차이 속에 어울려 살았던 사람들과 비인간 존재들을 폐기하듯 떠밀어 분류하고 쫓아낸다. 아 멋진 신세계여! 실업자, 성소수자, 이주민, 무국적자...들이 떠돈다. 나는 이러한 시각에서 ‘LGBTQ+’와 같은 두문자어를 혐오스럽게 바라본다. 두문자어에 그 내부에 담겨있는 무수한 존재들의 연결을 은연히 가리면서 마치 점잖게 객관적 지위를 차지한 듯 문제를 바라보는 그러한 기회주의적 정서를 읽게 되기 때문이다. 많은 세대에서 말을 줄여 두문자만으로 된 이상한 조어를 사용하는 언어 혐오적 양상들이 늘어나고 있다. 아마 이 두문자어의 증가는 그만큼 이 세계에 폭력성이 비례하여 증가하고 있다는 의미라 여긴다면 지나친 상상인 것일까?

 

영국 국방부가 발표한 두문자어가 2만 여개에 달한다고 한다. NKZ, 핵살상 지대(nuclear killing zone), HK, 물리적으로 대상을 파괴하는 공격(hard kill) 등등,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간단한 사안처럼 포장하여 군사화가 땅과 생명에 가하는 폭력을 위장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광범위한 생명살상은 안중에 사라지고 상상하기 힘든 규모의 파괴를 계획하는 데 어떠한 가책도 느끼지 않게 된다. 군 지휘관은 그저 HK를 지시한다. 이처럼 두문자어는 그 언어에 내재된 폭력성을 가리는 효율성에 가려져 손쉽게 세계와의 단절을 도모하고 폭력을 정상화한다. 이 책을 읽다보면 이 세계에서의 우리 자신의 존재 조건이란 무엇인지, 이에 주의를 기울인다는 것은 무엇인지, 그럼으로써 인간-비인간이 공존하는 이 세계 속 삶의 경험이 얼마나 풍요로워 질 수 있는지를 감각하는 시간을 느끼게 된다. 그것은 지금까지 우리들이 행해 온 모든 가정을 뒤집어보는 사고 실험을 해보는 과정이기도 하다.

 

캐럴 보브, 스탠드에 매달린 조개껍데기스탠드에서 떨어진 조개껍데기2011, 거품이 이는 말의 침전시 작품, 오비츠 애밀리 컬렉션 제공, 로렌초 비투리 촬영, 100


사물은 우리의 개념적 서술을 순순히 따르지 않는다. 자연이 인간에게 굴복했던 적은 단 한순간도 없음을 알아차려야 한다. 상대적 인간 약자가 강자에게 자율적으로 복종했던 적도 없음을 깨달아야 한다. 캐럴 보브의 거품이 이는 말의 침이라는 주제의 전시작품들은 세계의 이러한 이치, 세계의 생동과 과잉의 충돌이 빚어내는 상황의 불안한 한 예시일 것이다. 인간이 보지 않는 세계의 역동성은 이를 통제하려는 인간의 노력을 수포로 만들기에 충분할 만큼 복잡한 얽힘의 세계이다. 무수한 요소들이 뒤섞이는 와중에 그 균형이 평정의 감각을 찾아가는 세계임을 알아차려야 한다.

 

지금 우리들은 사고의 대상과 감각의 대상 중 사고의 대상에 집중하고 있지만 그 둘 사이에 흔들리는 혼란의 소용돌이에 이른 것 같다. 판단을 유예하라. 기원전 4세기 알렉산더 대왕의 궁정화가 아펠렉스가 헐떡이는 말의 게거품을 묘사하지 못해 던진 스펀지가 원하던 효과를 그림에 나타내듯, 그러면 개념들이 정리되고 마음의 평화를, 세계의 평온을 되찾는 길이 발견될지도 모를 일이다. 조응이란 여러 참여자 사이에서 그 와중에 이뤄지는 지속되고 있는 하나의 과정이다. 이 책을 읽고 있노라면 어느 순간 태초에서 이어지는 시간의 흐름 속에 우리들이 함께 그 속에서 조응하는 존재임을 아주 느린 속도로 생각할 수 있는 여유 속에 침잠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인간이 이 세계의 주체가 아님을, 인간 너머의 존재들과 조응할 수 있는 새로운 인식과 사유, 행위와 방식을 체득하는 시간이 되어 줄 것이다. 그 무엇도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어우러져야 한다. 그 아주 시원적인 단순한 이치를 깨우치는 것이 왜 그리도 어려운 것인지, 대체 그것에 이르는 길을 막아서는 장벽들이란 무엇인지를 생각하는 시간도 되어줄 터이다. 바로 지금 우리들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사유의 전복을 위한 하나의 계기가 되어 주는 필독서라 감히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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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비 2024-12-03 11: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저도 진작부터 이 책 읽어보고 싶었는데 아직 못읽었어요. 다시금 의욕을 북돋는 좋은 리뷰 감사드립니다.

필리아 2024-12-03 11:55   좋아요 1 | URL
네, 오늘 우리들의 익숙한 사고의 전복을 안내하고 있어요.
함께 어우러져 뒤얽혀 조응하는 세계를 느릿한 오랫적 시선의
사유로 회복하는 초대장이랍니다. 고맙습니다. 초록비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