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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애니미즘
오쿠노 카츠미.시미즈 다카시 지음, 차은정.김수경 옮김 / 포도밭출판사 / 2024년 8월
평점 :
오늘의 세계 철학은 더 이상 주객(主客)을 논하지 않는다. 이미 인간을 주체로 한, 그리고 인간을 제외한 모든 비인간 - 사물, 동물, 식물, 화학물질 등등 - 을 대상화한 결과 그 오만이 얼마나 잘못된 지식이었는지 반성적 고찰을 하게 되었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이러한 이 세기의 자기성찰은 지금까지 수동적으로 소외되었던 객체에게 새로운 권한을 인정함으로써 인식론의 교만을 탈피하여 존재 그 자체를 이해하려는 객체지향 이론 또는 실재론적 존재론에 집중하고 있다.
그것은 인간이 자연을 비롯한 대상 일체 위에 군림하여 인간 자신의 힘, 즉 자력(自力)으로 성취하지 못할 것이 없다는 태도와 이로 인한 철저한 비인간 일체에 대한 소외와 자원화라는 합리주의와 효율성이 더 이상 진실이 아니라는 데 있다. 이제 인간은 주체의 자리에서 내려와 비인간을 동등한 주체로서 이해하여야만 하는 존재임을 알게 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이전에 이러한 이해가 없거나 시도가 없었다는 얘기는 아니다.
주체와 객체, 개체와 전체, 인간과 비인간 등과 같은 이항대립이나, 개체를 더하면 전체가 되거나 전체를 미분하면 개체가 된다는 터무니없는 생각을 일원화하여 동등성과 전체성의 시각으로 통합하려는 유장한 사유의 노력이 있어왔다. 정신과 물질의 이원론적 서구철학의 자성(自省)으로 시작된 후설, 메를로 퐁띠로 이어지는 현상학을 비롯하여 미셸 세르나 브뤼노 라투르를 경유하여 작금의 그레이엄 하먼, 레이 브라이언트, 티모시 머튼 등 존재론적 실재론에 이르기까지 서구의 철학은 주체와 대상의 상호의존성이나 주객 혼효성(混淆性) 등의 변화된 성찰의 토대를 마련하기도 했다.
그러나 서구의 사유는 이항 대립의 관계를 통합하려는 노력만큼이나 독립적이면서 관계들을 분리하는 요소들을 내적으로 포섭하는 데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이 책은 바로 서구철학이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이 지점에 대한 물음에서 시작된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의 애니미즘》이라는 잊혀진 고대의 원초 신앙을 21세기에 소환한 것처럼 대담한 기획이며, 철학적이고 인류학적 도전이랄 수 있다. 그런데 이 ‘오늘날’이라는 수식어가 더해짐으로써 150년 전 인류학자 에드워드 타일러가 ‘인간과 비인간을 확연히 분리한 후 비인간이 본래 가지고 있지 않다고 생각되는 정신(영혼)을 비인간에 투사한’ 그런 소박한 애니미즘이 아니다. 다시 말해 풀, 나무, 벌레, 물고기, 돌 등 삼라만상에 영혼이 깃들어 있다는 정령신앙을 반복하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말이다.
인간 너머의 보이지 않는 거대한 힘,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으며, 인간이 스스로 그 힘에 이끌린다는 함의(含意)를 지닌, 즉 “거대한 타력(他力)을 느끼며 자력을 잊지 않는 자유롭고 활기찬 사상으로서 타력을 상상하는 것”으로서 애니미즘이다. 이미 인간이 무시하고 마음대로 남용하던 비인간의 배후에 숨겨진 힘을 확실히 보았기 때문이다. 애니미즘은 이러한 지상에 존재하는 삼라만상에 대한 겸허한 자세를 갖추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인간은 보다 풍부한 사고와 행동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다. 이는 “인간의 힘도 인간의 지혜도 미치지 않는 곳이 있음을, 또 그것을 두려워하고 그 앞에서 머뭇거리던 기분을 기억”해내는 작업이다. 21세기는 종교가(전지전능하다고 주장하는 일신교가 아니다!) 거대한 주제로 등장하는 시대가 될 것이라 예견되고 있다. 오늘의 인류에게 주어진 새롭고 거대한 테마이다. 주객의 대립이나 정신과 물질 구별의 무용함, 무의미함을 전제로 한, 인간과 비인간이 공히 동등한 정서적, 영적 성질을 가진 존재임을 이해하는 신앙과 실천에 관한 종교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책은 인류학자와 불교철학자 두 사람이 나뉘어 애니미즘이 왜 오늘의 인류에게 소환되어야 하는 정당성이 있는지를 인류학과 초기 불교와 철학적 사유를 중심으로 탐색, 논의한다. 사실 현대인은 인간과 비인간 정령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이 애초 상실되어 있기에 비인간에 대한 감수성에 대해 어떤 지적 감흥을 갖기가 매우 어렵다. 뛰어넘을 수 없는 깊은 골과 장벽이 세워져 있어 표층적 현실을 살아가는 인간들이 언어 이전(以前), 반성 이전과 같이 인간 사고를 초월하는 저 너머 세계에 가 닿는 것은 불가능할 만큼 어렵게 여겨진다. 바로 이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인류가 이해하여야 될 애니미즘 사고가 무엇인지를 민족지적 인류학의 현장 조사, 문학과 철학, 위상 기하학과 종교이론을 넘나들며 흥미롭게 요구되는 애니미즘 사고를 탐사해내고 있다.
문자 이전의 시대인 고대 원시사회는 동물의 정령을 믿었으며, 특정 동물을 죽였을 때, 그 동물의 영혼을 위해 제의를 지냈다. 그 때의 인간들은 산 자의 세계와 죽은 자의 세계가 하나로 이어져 있다는 마음 상태였다. 그들은 인간이었다가 곰과 같은 동물이었다가 다시 인간이 되는 순환하는 세계를 마음속에 지녔다. 이것은 자신의 뿌리가 가 닿는 무시간적(無時間的) 기이한 시공의 경험이다. 오늘의 우리는 이러한 사고를 상상하기가 어렵다. 인류학자인 릿교(立敎)대학 오쿠노 교수는 오직 한 면만으로 형성된, 즉 안과 밖의 구별이 없는 ‘뫼비우스의 띠’를 비유해, 면을 걷다보면 어느 순간 안에서 밖으로, 밖에서 안으로 걷는 존재를 이해토록 돕는다. 인과(因果)로 성립되는 현실 세계에서 인과 없는 세계가 만나는 놀라움, 삶과 죽음이 하나의 세계로 연결되었다는 색다른 시공의 경험을 상상할 수 있게 된다. 인류학을 공부하는 독자들은 오쿠노가 소개하는 아이누족의 곰 의례나 푸난족의 사냥과 같은 사례를 통해 애니미즘의 세계에 보다 근접한 이해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푸난족의 새 사냥 장면은 매우 인상적인데, 화살이 든 대통을 훅 불어 목표물을 향해 화살을 날리는 것인데, 어느 순간 숲 속으로 화살이 날아가고 탁 하고 작은 새가 떨어진다. 우리는 이 장면을 사냥꾼이 화살을 쏘아 새를 맞혀 그 새가 떨어졌다고 인과율에 의해 해석하는 데 익숙하다. 과연 그럴까? 이것을 동시성으로, 무인과적 연결(우연)로 생각할 수는 없는 것일까? “작은 새의 죽음 너머 저편에 펼쳐진 어둠이, 죽음의 시계가 화살을 부른 것”이라고, 푸난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화살을 불고, 죽음이 푸난과 작은 새를 에워싸며 퍼져나갔다고. 이것이 애니미즘의 관점이다.
죽음 속에 자연이 있고 인생이 있으며 생명체가 살아가며 무수한 만남이 존재하는 세계라는 이해이다. “인과로 연결된 표층적 현실 아래 우연의 집적이 사태간의 결합을 통해 상호 연관되는 별개의 존재 영역이 활동을 지속하는 것”이라는 애니미즘의 적절한 예시일 것이다. 이러한 관점이 왜 필요한 것일까? 우리의 인간 중심적 사고가 진실을 왜곡하기 때문이고, 비인간 세계의 존재자들과 대화하는 법을 잊었기 때문이다. 새가 화살을 맞았을까? 맞았을 수도 맞지 않았을 수도 있다. 두 사건에는 어떤 인과성도 없지만 동시에 이루어진 것이다. 이것이 바로 무시간성이다. 이 세계는 수시로 이러한 무시간성, 동시성이 흘러드는 세계이다. 인과성과 무인과성의 세계가 스치듯 마주치는 찰나의 세계를 상상할 수 있는 것, 어쩌면 이것이 우리들이 잃어버린 감수성이고 인간이 관여한 바가 아닌 인간 너머의 거대한 힘의 작용을 상상할 수 있는 열린 마음일 것이다.
한편 불교 철학자인 도요(東洋)대학 교수 시미즈 다카시는 애니미즘을 불교 철학으로 접근하고 있는데, 서구 이원론의 참된 초극을 향한 무수한 노력들이 환원주의를 벗어날 수 없다는 관점을 시작으로 인도의 논리학, 대승 불교에 이미 이원론의 초극에 대한 이론이 발전해왔다는 주장에 입각한다. 특히 ‘주체/대상/하나/여럿’이라는 이항대립의 통합을 위한 추구가 실패하는 이유는 ‘안/밖’이라는 공간적 요소를 도입하지 않고서는 설명이 불가하다며 소위 ‘삼분법’을 설명하는데, 이를 서술하기 위해 논리적 접근을 시도하지만 그 논리가 과학적 논변이 아닌 초월적 형이상학, 즉 불교철학자(선승들 포함)들의 증명할 수 없는 사유들에 의존하고 있어 라투르의 행위자-연결망 이론을 비판승계하려는 야심은 미완에 그치고 있다는 인상이다.
하지만 서구 철학의 실패지점에서 인류에게 요청되는 존재론적 접근인 일원론적 통합의 지향을 동양의 불교와 애니미즘을 교차시키며 그 속에서 모든 영역을 포섭 아우르는 세계를 구상하고 있다는 측면은 그 시도를 존중하고 싶다. 이러한 시도는 한국 철학계에서 찾아볼 수 없는 것이기에 더욱 흥미롭다. 이 책을 통해 서구 철학과 긴밀하게 조응함과 동시에 일본의 독자적 철학을 구축해온 그들의 두터운 층에 시기어린 부러움이 일기도 했다. 특히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에서 라투르의 행위자연결망으로 이어지고, 이를 극복하는데 나가르주나와 도겐의 중관주의 불교 철학을 통해 평면적 대립의 통합 너머 삼차원적 이항 대립의 포섭과 통합으로 나아가는 당찬 주장들은 나름 현대철학의 새로운 가능성을 엿보게도 한다.
이 책을 읽다 관심을 갖게 된 인물을 발견한 것은 내겐 무엇보다 소중한 과실인데, 소설가이자 에세이스트인 ‘이츠키 히로유키(五木寬之, 1932~)’다. 인간중심주의를 비판하고, 비인간의 목소리를 들어야만 하는 인류의 미래에 대해 지속적 목소리를 낸 보기 드문 애니미스트란 점 때문이다. 그의 중심 사상은 ‘타력(他力)’이라는 언어가 점유하고 있는데, 이것은 인류가 오랜 동안 시달려 온 이중성의 문제를 아우르는 혜안처럼 보인다. 지금의 인류는 자기 힘만을 과신하며 못할 것이 없다고 모든 것을 물질화, 도구화하고 있다. 그런데 이 자신감 넘치는 이면에 결여된 것이 무엇일까라는 물음이다.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16~17세기 에도 시대의 검객인 미야모토 무사시가 숙적 요시오카 가문과의 마지막 결투에 앞서 승리 기원을 하려다 말고 바로 결투장에 임하는 일화가 소개되고 있다. 무사시는 배례하기에 앞서 배전(拜殿)의 종을 치려다 말고, 자신이 이곳에서 무엇을 하려는지 자문한다. 이미 죽음을 각오한 몸인데 뭘 빌고 말고 할 것인가 하고는 승리 기원을 멈추고 그대로 자리를 떠난다. 그는 왜 기원을 하지 않고 자리를 벗어났을까. 이것이야말로 거대한 타력의 바람을 느꼈기에 그러했다고 해석한다. 무사시가 자력, 오직 자신의 힘에만 의지하여 싸우려 결심한 것에는 이미 “자신이 관여한 바가 아닌” 타력이라는 기묘한 힘에 이끌려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는 것이다. 이 역시 애니미즘이다.
자연의 보이지 않는 힘을 인식한다는 것은 자신과 자신 주변의 세계를 연결하는 통로를 항상 열어두는 것이다. 우리가 사물과 생명에 주의를 기울이면 사물과 생명, 그리고 세계로부터의 작용에 응할 수 있는 기제가 작동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상상력은 극도로 편협해졌다. 인간의 자력이라는 좁은 틀에 갇혀 저편의 세계를 차단함으로써 세계 실재의 참모습에 이르는 길을 잃어버렸다. 그로부터 발생하는 무수한 자연의 보복에 속수무책으로 방황하고 있다. 여기서 자연(自然)의 의미를 다시 되새길 필요를 느끼게 된다. 자(自)는 저절로라는 뜻이며, 연(然)은 관여한 바 없이 그렇다는 말이다. 그것은 “인간의 관여나 해석을 통해 바뀔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 자체가 저절로 진실의 작용을 드러내기에 우리는 겸허해야 할 이유가 있는 것이다.
【책 61쪽에서 부분발췌】
이 저술은 고대의 소박한 정령신앙의 재판이 아니다. 이 세계와 인간 존재의 위치를 깨닫고 잃어버린 상상력, 감수성을 복원코자하는 작업이다, 서구 일변도의 이원론적, 이항 대립적, 주객분리의 근원적 결여의 사유를 넘어서 만물이 공존하는 세계, 인간 사고와 행동을 보다 풍부하게 만들어가기 위한 제안적 사유로서의 가치를 지닌다. 인류학이나 불교철학을 학문적 토대로 지닌 사람들을 비롯해 존재론적 고찰이나 객체지향의 철학, 즉 비인간 일체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획득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이 책은 새로운 관점과 식견을 충분히 제공하리라 믿는다.
화가 막스 에른스트는 그의 창작 좌우명으로 “해부대 위에서 재봉틀과 우산의 우연한 만남처럼 아름다워!”라는 로트레아몽의 시 구절을 인용했다. 겉으로 보기에 대립적 성질의 둘 또는 그 이상의 요소들을 한층 더 대립적인 성질을 가진 수준에 모아놓은 것으로부터 그는 이 복합적 형상과 그것이 드러내는 배경 사이에서 그 구성 요소들 간의 대립과 상관의 이중적 얽힘이 재편성되고 변형 조정된 의미를 밝히는 것이 바로 예술의 목적이었다고 느낀 것이다. 세계는 이처럼 이질적 존재자들의 얽힘에 의해, 그 보이지 않고 소외된 의미들의 혼효적 창발이 만들어 내는 것이다. 애니미즘을 오늘날이라는 바로 지금으로 호출하는 이 논의는 때문에 우리의 새로운 자세를 위한 너무도 중요한 출발의 사유가 되어 줄 터이며, 아마 이러한 태도를 향한 무수한 영감의 원천이 되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