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지와 운명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51
카를로스 푸엔테스 지음, 김현철 옮김 / 민음사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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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의지와 운명1,2권  통합 감상입니다.


막스는 운명을 만들어 내기 위해 의지와 운명이 자유롭게 놀 수 있도록 방치했어...

그렇다면, 선생님, 필연은요. 그 빌어먹을 필연은요? 필연이 없는 의지나 운명이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206)

 

소설은 오늘을 구성하는 멕시코의 현대사를 관류하며 형제의 의지와 운명이라는 부조리한 삶의 형식인 시간의 악을 드러내고, 그 악의 형상이 어떻게 오늘의 인간문화에 깊숙이 불가항력적 힘이 될 수밖에 없는지를 가히 신화적으로 묘파(描破)해내고 있다. 그것은 이렇게 시작한다. 나는 잘린 머리다.“, 이 이야기의 종국이 비극임을 전제하는 이 문장은 비장(悲壯)하게 다가온다. (註: 카스토르와 폴룩스, 카인과 아벨, 이들 신화와 성경 속 인물과 소설 속  여호수아와 예리고를 읽으면 더욱 풍부한 얘기로 읽을 수 있다.)

 

태평양 연안 게레로 주 연안, 바닷가에 야자열매처럼 버려져 모래밭에 뇌수가 흘러내리는 몸통을 잃은 머리통이 자신의 짧은 삶의 여정과 시대의 역사를 술회한다. 그런데 이렇게 잘린 자신의 머리통이 멕시코에서 천 번째임을 밝히는 통계 숫자는 그 사회가 만연한 범죄의 장소임을, 뿌리 깊게 부패한 곳임을 천명하는 것이다. 술회하는 머리통, 화자는 여호수아 나달이라는 스물일곱 살 젊은이다.

 

연안 모래밭에 나뒹구는 잘린 머리통, 여호수아는 자기 삶의 여정을 소년시절부터 거슬러 술회하기 시작한다. 코주부로 놀림 받던 어느 날, 에롤이라는 동급생 불량소년들의 우두머리인 에롤로부터 폭력을 당한다. 이때 예리고란 소년이 나타나 그를 보호하고 에롤을 망신시켜 더는 여호수아를 괴롭히지 못하게 처리한다. 여호수아와 한 살 많은 예리고는 평생동안 유지될 동맹, 신성한 형제로서의 의무를 맺는다. 그런데 두 소년 모두 의지가지 할 부모를 알지 못하고 성장한다. 누군가의 정기적 도움으로 살아가지만 둘 은 그 누군가나 그 행위의 의미를 알고자 하지 않는다. 둘은 자신들이 확신하는 각각의 진리, 그들이 학습한 독서와 지식에 기초한 비평의 틀을 통과한 의견만을 받아들이며, 여느 평범한 사람들과는 차별화된, 사회가 설정한 모든 근거나 기준으로부터 해방된 자유로운 존재가 되기를 갈망한다.

 

두 사람은 그들의 지적 성장에 도움을 준 피로파테르 신부의 가르침인 스피노자 철학을 중심으로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페라기우스의 논쟁으로 대변되는 자유에 대한 관점, 즉 펠라기우스의 자유의 철학과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교회라는 중개자가 없다면 개인의 자유란 존재할 수 없다는 두 철학처럼 둘의 삶의 세계에 대한 신념은 조금씩 달리 진행된다. 에리고의 그 어떤 귄위와 위압적 체계에 대한 부정은 어느 것도 진실이 아니라는 사실의 인정으로, 여호수아에겐 확실함을 잃어버렸다는 두려움으로 다가온다. 두 사람과 친구가 된 에롤이 이 둘에게 건네는 말이 있다. 너희가 원하는 것과 사회가 너희에게 허용하는 것 사이에서 길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 아니면 운명과 내기를 걸어보거나 (63).”

 

이제 두 청년은 운명과 내기를 거는 의지라는 자유의 발걸음을 시작한다. 그러나 그 걸음의 길은 그들의 신념만큼이나 다르다. 여호수아는 실제가 허구를 능가함을 안다. 그의 성장통으로 신경증을 앓고 있을 때 그를 간호했던 간호사와의 세속적 신음과 기다란 감탄사로 표현되는 최초의 정사이후 깨달은 것이라면 헛소리가 될까? 이를테면 여호수아는 현실론자이고 예리고는 이상주의자라면 아마도 어설픈 구분이 될 것 같다. 여호수아는 철학으로 이루어진 뼈대에 살을 붙이는, 현실성을 부여하기 위해 법을 공부하기 위해 멕시코국립자치대학 법학부에 진학한다. 둘은 같은 현상을 보지만 그 드러난 문제점의 해결에 접근하는 방식이 다른 것이다. 예리고는 갑작스레 자신은 프랑스로 떠날 것을 선언하고, 두 사람이 추구하는 가치는 이제 보이지 않게 변해가기 시작한다. 어쩌면 이 대화의 문장은 이들의 가치를 상징하는 하나가 될 듯하다.

 

오감에 근접한 손으로 붙잡을 수 있는 세계가 있는 반면, 실제와 허구를 구별할 수 있어야만 존재하는 상상의 세계, 환상의 모든 권리를 갖춘 그런 상상의 세계가 존재한다.” (80)

 

사람을 망치는 게 뭘까? 여호수아는 명예? ? 섹스? 권력? ...” 거론하지만, 예리고는 그 반대쪽에 있는 실패, 무명으로 남는 것, 가난, 성불구...”를 호명한다. 여호수아의 주장에는 항상 의문부호가 있는 불확실성을 전제한 주장인 반면, 예리고는 부정성에 기초한 단정이다. 예리고가 떠난 이후 여호수아는 대통령과 통신사업으로 멕시코 최대의 부를 가진 막스 몬로이의 자문역인 변호사 상히네스 교수로부터 법과 이론의 실제적 통찰을 위한 스스로의 관찰이라는 경험을 위해 살아있는 자들의 무덤이고, 멕시코의 시베리아이자 황무지 안의 황무지인 감옥중의 감옥인 교도소를 출입한다. 인구의 절반이 가난 아니면 범죄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멕시코의 실상인 하부 세계를 경험한다. 여기서 한 독특한 죄수를 만나게 되는데, 스스로 수감되기를 원해 석방을 거부하고 교도소의 질서자로 군림하는 인물, 미겔 아파레시도를 관찰하게 된다.

 


여호수아는 졸업에 즈음하여 상히네스 교수로부터 <마키아벨리와 국가의 탄생>이라는 변호사 자격취득 논문의 주제를 받는다. 이때 프랑스에서 귀국한 예리고와 만나게 되고 두 사람은 영문을 알지 못한 채 상히네스에게 호출되어 불려간다. 여기서 예리고는 대통령 자문위원으로 추천되어 대통령실로, 여호수아는 막스 몬로이의 통신사업제국에 입사하게 된다. 소설은 이때부터 음모와 배신, 비열함과 추악함, 탐욕으로 일그러진 멕시코 사회를 철저하게 해부하기 시작한다. 막스 몬로이의 어머니인 망령이 여호수아에게 건네는 꿈 속 같은 훈계들은 배신과 거짓말, 만행과 복수로 점철된 멕시코의 현대사를 관통하고, 그것은 운명에 마주선 의지의 시험대가 된다. 이십년이나 지속된 내전, 그로 인해 백만 명이 목숨을 잃었어. (...) 이 나라는 배신의 나라야.(202)”

 

젊은 피를 수혈받은 대통령은 예리고에게 주문한다. 투표만 해서는 민주주의를 살 수 없다고, 사람들의 관심을 딴 데로 돌릴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 내야 한다.”, 그를 위해 욕구와 갈증과 허기를 다독일 수 있는 축제를 조직하라고. 사실 오늘날에는, 특히 한국사회에서는 누구나 다 아는 퇴락한 후진 전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민과 국민을 상대로 뻔한 농락을 행하려는 자들이 여전히 이 퇴행적 기만수법을 시도하고 있다는 것은 멕시코 사회와 국민들에게 뿌리깊게 자리잡은 기득권 계층의 집요한 수구적 탐욕과 이를 위한 기만과 거짓, 부패라는 악의 세습이다. 다시금 마이클 존스턴의 한국사회의 부패유형을 지적한 말이 떠오른다. 그것은 많이 배운 놈들이 조직적으로 뭉쳐, 국민을 등쳐먹는 엘리트 카르텔 유형이라는 아픈 말이었는데, 딱 소설 속 멕시코의 유형이랄 수 있다.

 

이야기 속 대통령은 예리고에게 말한다. 의식(儀式)은 우리 모두가 누더기를 가리기 위해 어께에 두를 수 있는 품위 있는 망토라고. 에리고는 대통령의 이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전국을 돌며 이벤트를 준비하지만, 이것은 그의 신념인 이상주의, 즉 무능하고 부도덕한 권력을 전복하는 혁명의 준비로 활용한다. 아주 흥미로운데, 이때 대통령의 유일한 경쟁자인 막스 몬로이는 대통령에게 경고한다. 이런 기만적 수단은 오히려 국민의 불만과 저항만을 만들어낼 뿐이라고, 정보 사회인 오늘은 그런 비밀스런 통치는 더 이상 먹히지 않을 뿐 아니라 권력의 실패를 가져올 수 있다고. 경쟁자가 하는 경고는 조언이 아니다. 자신들의 권력을 항구화하기 위한 기득권집단의 암묵적 협력이다. 반란의 싹을 미리 잘라내 자신들의 기득권이 손상되는 일이 없도록 지원하는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경고요 협박인 듯 하지만 그 속으로 들어가면 공조이자 동업자의 협력인 것이다. 예리고는 실패하고, 권력에 쫓긴다, 잡히면 죽음이다.

 

최종 목적지에서 우리가 발견한 것은 모든 운명이 숙명이라는 사실이었다. 운명은 우리 손에서 빠져나가고, 철문이 닫히듯 삶의 문이 닫히고 만다. (...) 많은 시간이 흘러야 우리는 깨달을 수 있을까? 우리의 의지가 아무리 강해도 운명을 점 칠 수 없다는 사실을, 불확실함이 인생의 실체적 기후라는 사실을....” (246)

 

운명에 도전하여 자신의 의지를 시험한 젊은이는 그 어설픈 낭만적 이상주의의 독단에 의해 실패한 것이다. 이 소설이 얄궂은 것은 여호수아를 정점으로 형제의 동맹을 맺건, 교도소의 지배자인 죄수 미겔이 되었건 막스 몬로이와 맺게 되는 관계다. 이 관계에서 빚어지는 증오와 복수, 빼앗긴 욕망, 그리고 운명과 의지라는 그늘에 덮인 실체가 수면에 떠오르면서 무자비한 폭력의 역사에 토대를 둔 사회에서 의지라는 것은 한낱 숙명으로서 허무에 불과한 것이 되어버리는 양상을 세밀화로 그려낸다. 사실 지구 반대편 남의 나라 역사거나 현실의 실체만이 아니다. 한국 사회는 그야말로 참혹한 폭력의 토대에 구축된 기득권 계층사회이다. 일본의 주구들, 미군정에 기생한 일제 부역자들의 후손이 그대로 오늘의 한국 정치와 경제 권력을 점유하고 있는 까닭이다. 이 진부하게 된 오늘의 현실은 그만하기로 하고, 다시 소설의 마지막으로 가 봐야하는 까닭이 있다.

 

막스 몬로이라는 경제 권력의 거대주체는 여호수아의 믿음인 실제는 허구를 능가한다는 진술이 바로 허구임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현실을 제압하는 것은 허구이기 때문이다. 망상과 다를 바 없는 신화가 현실을 기만하고 세계를 호도하기 때문이다. 막스는 운명을 만들어내기 위해 의지와 운명이 자유롭게 놀 수 있도록 방치했다는 그럴싸한 환상을 만들어내고 그것에 사람들은 현혹되어 실제가 허구를 능가한다고 착각하고 산다. 필연이 없는 의지나 운명이 있을 수 있겠는가라는 필연에 대한 믿음은 폭력사회에서 결코 가능하지 않다는 얘기이다.

 

이것이 현실을 제압하는 허구의 세계인 멕시코요, 바로 허구의 다른 말인 조작이 판치는 한국이며 악의 형상이다. 젊은이들에게 위협을 느끼는 늙은 겁쟁이들이 권력을 확고히 만들고자 하는 수구의 심리는 자신의 아들들을 피비린내 나는 희생양으로 던져 놓는 짓을 서슴지 않는다. 여호수아는 왜 머리가 잘려 해변가 모래위에 던져져야 했을까? 추악하게 일그러진 이 비정한 비극적 드라마는 음모와 배신으로 점철된 권력에 집요하게 매달린 인간들의 염오(厭惡)의 역사, 그 현실을 생생하게 들여다 볼 수 있게 한다. 인간의 조건,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다시금 생각하는 시간이 된다. 이 걸작을 이제라도 읽어 볼 수 있어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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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힐 2024-11-21 1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책을 읽지 않고 필리아님의 리뷰만 봐도 영화의 장면들처럼 떠올라 지네요. 결국 우리가 사는 세상이 허구임을 다시 한번 일깨워 주는 걸작인 것 같습니다. 좋은 글 감사 합니다.

필리아 2024-11-21 12:21   좋아요 0 | URL
소설에는 이런 문장도 있어요. ˝허망함은 우리의 운명이지만 자유는 우리의 야망이며, 자유를 위한 투쟁 말고는 자유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사실을 배우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결국 의지라는 수단으로 운명을 돌파해 내려하지만, 거대하게 구축된 권력의 세계에 희생될 수 밖에 세계를 고발하고 있는 작품이기도 하답니다. 무엇보다 푸엔테스의 이야기를 이끄는 힘을 느끼게 됩니다. 괜찮은 소설이에요. 댓글 고맙습니다. 마힐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