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한 행복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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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첫 문장부터 거부할 수 없는 지옥의 문틈을 들여다보려는 욕망을 부채질 한다. 아이의 말갛고 충실한 목소리에 실려 시작되는 묘사는 혐오스러워 어두운 저 심연에 수장되어있을 상상을 자극하며 도리질 치게 만든다.

 

엄마는 오리 먹이를 잘 만든다. (...) 필요한 도구는 다음과 같다. 첫째, 중식도, 뼈를 토막내는 칼이다. 손도끼처럼 생겼고 손도끼만큼 무겁다. (...) 두 번째로 '뼈 칼'이 있어야 한다. 뼈에 붙은 살을 바르는 길고 날카로운 칼이다. (...) 손질이 끝난 고기는 찜기 두 개에 나누어서 삶는다. (...) 다 삶은 살코기는 민서기에 간다. (...) 뼈는 믹서로 간다.”

- 9~10

 

상대의 의향에 배반하지 않는 대답을 위해 자신의 모든 신체 반응까지 살피며 신중하고 순종적 답변을 해내려는 어린아이의 고통스러운 노력, 이러한 아이의 태도로부터 한 치의 결함이라도 있는지 광휘의 눈을 번떡이는 여자의 표변하는 감정을 따라가느라 소설 초입부터 쭈볏 선 머리털과 두방망이질 치는 심장을 진정시키느라 녹초가 될 정도이다.

 

세상의 어떠한 것도 자신의 통제를 벗어나는 것을 참지 못하는 여자, "결함도 결핍도 없는 완전성의 우주(115)", 완전치 못하게 하는 불행의 가능성을 제거하는 것이 행복이라 믿는 여자가 있다.  아니. 자신의 행복을 위협하는 앎에 대해 무시와 부인, 부정의 방법을 찾는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나르시시즘은 이 자기기만과 무시, 눈감기라는 존재 인식의 부인과 결여의 다른 표현이지 않을까? 무지에 터 잡은 자기애세계는 자신을 위해서만 존재하여야 한다는 믿음, 그래서 모든 인간은 여자의 행복을 위해 소용되는 도구이며 수단에 불과하다.


여자, 신유나의 전 남편인 지유의 아빠가 사라졌다. 소설의 발단이다. 사라진 남자 준영의 여동생 민영, 재혼한 남편 은호, 관계가 단절되다시피 한 언니 신재인을 통해 한 여자의 모습이 조명된다.  집안의 경제적 상황으로 두 딸 중 어린 신유나는 본인의 의사와는 달리 은퇴한 조류 학자인 할아버지, 교사였던 할머니가 사는 외딴 시골마을로 보내진다. 자신이 부모와 떨어져 살아야 하는 것에 대한 반감, 할머니의 강압적 훈육이 남긴 성장기의 자기 보호에 대한 집착은 불행의 원인으로 인식된 언니 재인에 대한 증오와 배제의 감정으로 키워지고, 부모 사랑의 유일한 절대 소유자가 되기를 갈구한다. 언니의 오랜 남자 친구였던 준영을 가로 채 결혼함으로써 자매의 직접적 소통의 관계는 끊어지고 만다.


 



여자에게 결혼이란 어떤 완전성, "'행복'이라는 신화를 이루는 불가침의 왕국(235)" 건설이다. 자기 행복을 방해하는 모든 것은 없애버려야 할 대상이다. 재혼한 남편의 어린 아들 역시 여자에게는 제거해야 할 불행의 한 요인에 불과하다. 아버지도, 연인도, 남편도, 자식도, 그 어느 것도 여자를 위해 존재하기를 멈추면 그녀에게 그것은 존재 의미를 지니지 못하게 된다. 여자에게 만물은 오직 자신의 필요를 위한 일시적 수단이지 그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다. 연락도 하고 지내지 않던 언니에게 불쑥 아이를 맡기고 사라졌다가는 뒷일까지 내맡겨 버리고, 어느 순간에 나타나 적반하장의 난장을 치고 사라지는, "이 아이는 인간의 외피를 가진 후피 동물인가 싶었다.(177)"는 소리가 절로 나오게 하는 인간이다.

 

"유나에게 한 번 '제 것'은 영원한 '제 것'이었다. '제 것'이 남의 손에 넘어가는 일은 용납하지 않는다. 차라리 없애버릴지언정. " -430


소설의 초입에서부터 옥죄던 긴장감은 마지막 장에 이르기까지 죽음의 신음 소리같은 되강 오리의 짖음과 안개 낀 반달 늪의 음침한 전경이 어우러져 마치 "지옥의 세계로 통하는 들창을 열어버린 기분(285)"에 휘말려 옴짝달싹 못하게 한다. 준영의 소재를 다그치던 재인이 유나로부터 듣게되는 말은 이미 소설의 무수한 암시들에 의해 알고 있음에도 "눈을 가리고 있던 무의식의 막이 한 손에 찢겨나갔다. '설마'라는 저항의 벽이 한 방에 무너졌다.(366)"는 급류처럼 쏟아져 내리는 갇혀있던 상상력 바로 그것의 끔찍함이다. 아마 작가가 펼치는 이 압도적 서사로부터 풀려나는 길은 에필로그 519쪽 마지막 문장을 읽는 순간이 되어야 가능해진다.

 

작가의 말처럼 자존감만 높은 텅 빈 자아만을 가진 나르시시스트들이 넘쳐나는 세계이다.  존재 자체를 부인하는 무시, 그리고 존재 의미에 대한 인식의 결여인 무지. 오늘 우리네 사회를 무지와 무시의 시대라 부르지 않는가?  무지에 무지할 때 악은 끝없이 이어지게 되는 것 같다이들 주변의 사람들과 세계가 얼마나 황폐화되는지, 소설 속 여자와 우리는 과연 얼마나 다르다고 말 할 수 있을까?...

 

"언제부턴가 사회와 시대로부터 읽히는 수상쩍은 징후가 있었다. 자기애와 자존감, 행복에 대한 강박증이 바로 그것이다. 미덕이지만 온 세상이 '너는 특별한 존재'라 외치고 있다는 점에서 이상하기 그지없었다."

- ‘작가의 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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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따스한 유령들 창비시선 461
김선우 지음 / 창비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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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깊은 시인이구나. 한 점 티끌에서 바스락 소리내는 새싹과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나뭇잎, 그리고 금잔화 심던 할머니에 이르기까지 시인의 따뜻한 시선은 미치지 않는 데가 없다. 흩날리는 먼지 한 톨, 그저 내리는 빗방울, 그리고 보이지 않지만 느껴지는, 아니 느낄 수 있는 감각을 지닌 기운에서조차 따스함, 속내를 살필 수 있는 사랑을 품고 있다.

 

우주먼지로 만들어진 내가

우주먼지로 만들어진 당신을 향해

사랑한다,

말할 수 있어

말할 수 없이 찬란한 날

- 작은 신이 되는 날에서

 

그런데 우주먼지인 ''들을 인정치 못하는 무수한 아무개들은 마치 특별한 존재나 되는양 거드름을 피운다. 자신이 무엇인지를 알아채지 못한 존재는 끝없이 아무를 쫓는다. 영속해야만 존재할 수 있는 자본주의의 환영을 실재라 믿는 우매함이란..., 시인은 그래서 반성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현실의 식탁과 보이는 식탁과 보여지고 싶은 식탁 사이

품위 있게 드러내기의 기술 등급에 관하여

관음과 노출 사이 수많은 가면을 가진 신체에 관하여

곁에 있는 것 같지만 곁을 내줄 수 없는 곁에 관하여

비교가 천형인 네트에서 우울에 빠지지 않기 위해 지불해야하는 노력에 관하여

- 일반화된 순응의 체제3 ; 아무렇지 않은 아무의 반성들에서

 

사랑을 아는 시인은 그래서 이렇게 노래한다. 티끌인걸 알게되면 유랑의 리듬이 생긴다고, 그리고 서로를 알아챈 티끌들은 그 알아챔의 근사한 사건을 축복한다. 이 티끌들에게 일어나는 우연한 만남은 "가끔 유난히 아름다운 탄생의 문양(천문의 즐거움에서)"을 만들어낸다. 마르크스의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들을 생각나게 한다. 수직으로 낙하하던 원자의 무한히 작은 편의에 의한 마주침의 유발, 즉 인간의 본질은 '사회적 관계의 앙상블'이란 구절이.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역사는 시야에서 증발되어비리고 말것이라는 지적이리라. 대체 사랑할 줄 모르는 존재가 무엇을 할 수 있다는 말이겠는가!

 

그렇기에 시인은 '오늘은 없는 날'을 꿈꾸는지 모르겠다. "말많고 현란한 매체들, 돈이든 권력이든 세력 불리는 일에 중독된 사람들, (...) 조용히, 더 조용히 오늘은 없는 날(오늘은 없는 날에서)"이라고 부른다.


 



150년전 1871년은 프랑스 내전이 있었던 해이다. 60일간의 시민들의 완전한 자치가 이루어졌던 짧은 파리코뮌의 시대가 있었다. "일체의 억압과 지배가 종결된 자유로운 공동체 (철학 VS 실천, 강신주 , 31, 오월의 봄 )"였다. 시인은 시(), 지구 평의회가 만들어진다면에서 "만약 그럴 수 있다면"이라며 포문을 열고, "그럴 수 있을까, 인간이?"라고 회의적 시그널을 보내고 있다. "자본교에 장악당한지 불과 이백년 만에 멸망의 시간을 카운트 중"인 것을 알거나 모르거나. 사랑 깊은 사람, 시인의 마음을 가진 이들의 실천에 기댈 수 밖에.

 

아주 신랄한 시도 있다. 민주주 의 꽃이 선거? 정말 그런가? 투표 후 인증 숏을 찍는 것이 교양이라면 시인은 사절한다. 이것이 민주시민의 교양이라면 거부한다. 차악과 최악의 사이를 되풀이하는 결국 최악의 놀이, 정당 만들어 국고 보조금 챙겨가는 꽃패놀이, 시인은 "들판의 정치가 시작될 때" 꽃에게 투표할 거라고. 그럼에도 시인은 서로 얼싸안자고 제안한다. 우리가 될 수 있다고.

 

내가 너와 만난 것으로 우리가 되지 않는다

내가 남긴 얼룩이 너와

네가 남긴 얼룩이 나와

다시 만나 서로의 얼룩을 애틋해할 때

너와 나는 비로소 우리가 되기 시작한다

-그러니까 사랑은, 꽃피는 얼룩이라고에서

 

나의 로도스는 여기도 거기도 아니고 '저기'있다고 말한다. 삶이 우리를 춤추게 하는 곳, 그런 곳을 향한 실천, 사랑의 울림이 시집을 가득 채우고 있다. 시인의 맹렬한 사랑이 세상을 뒤덮는 그런 날이 언젠가 오기는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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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쓴 것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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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소설들은 여성 서사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평론가 김미현의 말처럼  진행중인  "이 세계의 다양한 여성의 삶을 담아내기 위한 '천일 야화'엮기"의 부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이 변론적 해설이 조남주의 소설을 긍정하게 하는 것은 물론입니다. 그럼에도 비판적 시선을 배제할 수도 없습니다.  비록 '다양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일지언정 내겐  여성의 삶이라는 동어 반복적인 피로감을 피하기 어려웠으니까요.  그런데 이 작품집의 두 번째 수록작인 작가의 경험적 소재를 차용한 듯한 1인칭 소설인 오기 읽다가 문득 2021년 여름호 창작과 비평통권 192호에 실린 팬데믹 시대의 목소리를 함께 듣는 일이라는 김태선 문학평론가의 글 중 한 문장이 떠올랐습니다.

 

"타자의 목소리, 특히 고통을 듣는 일은 타자의 삶에 참여하며 나를 개방하는 가운데 서로가 의존하는 연결된 존재라는 걸 느끼고 배우는 과정이다어떤 감정이입은 배워야만 하고그 다음에 상상해야 한다."     

창작과 비평통권 192팬데믹 시대의 목소리를 함께 듣는 일51,김태선

 

 

그것은 내 마음을 열어 놓지 않고서는 타인의 고통의 목소리가 제대로 들리지 않는다는 글이었죠. 열려야 그 목소리가 발하는 문제가 나의 것이 될 여지가 생기는 것이라는 의미였습니다내가 마음을 닫아놓았으니 감정이입이 될 여지가 없었던 것이고, 더구나  '어떤 감정이입'은 배워야만 한다는 지적에  한참을 내 속을 들여다봐야 했습니다.

 

읽고 지나쳤던 작품들을 다시 처음부터 읽어야 했습니다. 그렇다고 단박에 어떤 감응으로 소설 속 그녀들의 목소리가 내면에 속속들이 울려 퍼졌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적어도 문제로서 인식하려는, 문제로 수용하려는 준비된 마음은 갖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그리곤 이 작품집의 구성이 눈이 들어왔습니다.  

 

첫사랑 2020의 초등학생 소녀에서 가출의 미혼 여자여자아이는 자라서와 같은 학부형이 된 여자오로라의 밤의 주인공인 50대 중년 여자,  매화나무 아래의 노년의 여자에 이르기까지 연령과 세대에 따른 그녀들이 마주한 여성으로서의 삶의 문제들이 이야기되고 있다는 발견이지요. 그래서 각 작품마다 그 고유의 문제의식이 다른 감응을 불러일으킵니다. 즉 각각에 대응하는 책임의 문제를 생각케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더해 그 분량적 속성으로 인해 단편 소설이 지니기에 수월치 않은 서사적 재미가 있습니다.

 

책의 마지막 수록 단편인  첫사랑 2020 초등학교 5학년이 되는 서연의 첫 사랑이 코로나 팬데믹이  어른들의 세계인 경제적 타격으로 다치게 되는 그 연결성이 그려지고 있는데요코로나-19가 초등생의 사랑에 미치는 영향이란 발칙한 소재로 사회의 많은 이들이 지금 겪는 고통의 현실을 경쾌한 필치로 풀어냅니다. 일본관광 여행업을 아빠 사업의 어려움으로 서연은 사귀기로 약속한 승민과 카톡도, 학원도 같이 하지 못하게 됩니다. 두 아이의 사랑 전선에 먹구름이 끼는 것이죠"코로나 때문에 몇 번 만나지도 못했는데, (...) 얘가 헤어지재요!" 소년은 소녀의 마음을 읽지 못해요. 타자의 문제 자체를 모르는 것이죠. 아니 타자의 삶에 참여하는 방법을 아직은 모를 때여서가 아니었을까하고 생각해 봅니다.

 

소설집을 여는 첫 번째 단편은 치매요양병원에 있는 큰언니를 보러 다니는, 다 늙어 '말녀'라는 이름을 '동주'로 개명한 여인의 이야기를 담은  매화나무 아래입니다금주, 은주, 그리고 말녀로 이어지는, 작명에 있어서도 여성에 대한 전통적인 남녀차별의 인식이 배어있습니다. 그런 그녀가 이런 푸념을 합니다.  "아버지의 그늘도, 남편의 굴레도 참 지긋지긋해놓고 그래서 도망친 게 아들의 어깨였다."고 말이죠이러한 가부장적 질서의 억압적 삶에 대한 반성적 사유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환경에 익숙한 삶을 살았던 자신의 한계 또한 직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소설이 더욱 풍성한 의미로 다가오게  하는 것은 병원 휴게실 창 너머 매화나무 가지의 자줏빛 겨울눈에서 시작되는 무한한 순환의 깨달음이 주는 숙연함 같은 것이었습니다돌봄의 문제, 가부장적 굴레, 생명에 대한 견고한 믿음 등 정말 많은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어요.

 

아마 내 삶의 세계와 가장 친근했던 작품은 오로라의 밤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아내와 소설 속 쉰일곱 살 주인공의 연령적 공감 때문이었을 것 같은데요, 그녀는 이렇게 말하고 있어요 "더 이상 타인과 생활습관, 태도, 취향, 성벽같은 것을 맞추고 이해하고 양보할 여력이 없는 지금 내게 남은 가족이 어머니라서 다행이다."라고 말이죠.  시아버지도 남편도 모두 죽고 시어머니와 며느리인 ''가 함께 살고 있습니다. ''는 직장 여성인 딸의 아이를 봐줄 것을 거절합니다그리곤 시어머니와 둘이 캐나다 옐로나이프로 오로라를 보기 위해 여행을 떠나죠.

 

이 소설은 세 세대에 걸친 여성의 삶이 그려지고 있습니다. 여성에 부과되고 강요된 질서가 각기 다른 세대의 사람들임에도 여자여서 지녀야했던 속박, 그 굴레에 대한 공감이 일치하고 있어요.  ''가 시어머니와 함께 이국에서 밤하늘의 영롱한 오로라의 빛에 감탄하며 기억을 나눌 수 있는 이유가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소설에서 하나 아쉬운 점이 있어요. 딸의 아이를 돌보는 것이 딸 부부의 문제라는 극히 개인적 책임의 문제로 귀결되는 것 같은 인상 때문입니다. 물론 친정어머니나 시어머니의 희생을 요구하라는 퇴행적 요구가 아니라  사회적 장치와 연결망을 필요로 하는 공동의 작업에 대한 문제제기로 이어졌으면 하는 것이죠.

 

단편 오기에 대한 감상으로 마쳐야겠습니다아마 짐작컨데  여성주의의 문제작인 82년생 김지영이후 그녀 이름은의 발표에 이르러 작가의 소설에 대한 무성한 비판적 시각들이 있었던 것에 대한 개인적 경험에서 비롯된 작품이란 인상을 받았습니다소설가인 주인공 초아는  "소설은 너무 많은 말들에 휩싸였다."고 기억을 떠올리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소설가 작품으로서 표현하려 했다는 점에 공감할 수 있습니다

 

작중 소설가 초아의 작품에 대한 악플 사건과 관련하여 고교시절 선생님이었던 지방대 문학교수의 요청으로 진행했던 초빙강의 후 허물없이 들려주었던 선생님의 성장기 가부장의 폭력등에 얽힌 얘기를 듣게 됩니다. 그리고 이 얘기는 초아의 가족사와도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문제가 된 것은 이 얘기가 발단이 되어 써진 소설이 발표된 것이고, 선생님은 이것에 대해 "어떻게 남의 얘기를 고스란히 훔쳐다가 쓸 수가 있어?"라고 초아를 비난합니다. 초아는 흔한 일이라고 답변하죠이에  선생님은  "세상 여자들의 삶이 모두 다르다는 것, 제각각의 고통이 버티고 있다는 걸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라며 초아의 무지를 힐난하죠여기에는 작가 조남주의 목소리가 끼어들어 있다는 인상입니다.

 

허구인 소설이 현실의 엄혹함 앞에서 무력해진 경험 때문이었을 것 같은데요, 그러나  왠지 여성의 삶의 문제에 대한 다양성이라는 이 문제의 환기에도 불구하고 1인칭 세계의 주관성 탓에 윤리적 정당성에 대한 믿음이 흔들린다는 것이죠. 막연하지만 독자인 저는 어떤 새로운 자기, 새로운 삶의 기대를 보여주는 초아를 기대했던 것 같습니다이번 작품집은 소설가 조남주의 작품에 대해 낯설고 새롭게 읽기를 시도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사실 여성의 삶에 대한 문제들에 대해 제 마음의 문이 제대로 열리기 시작했다고 해야 할까요? 

 

어머니와 딸의 관계에서 덮고 지나가기 쉬운 돌봄과 희생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직시에서부터 여성들 스스로 가부장적 주체가 되는 마음에 숨은 기만과 허위의 응시와  자신의 삶의 조건에 구속되지 않고 그 너머의 삶을 꿈꾸는 주체의 형상을 제시하는 것과 같은 진중한 문제제기와 해법의 가능적 사유들이 가득한 작품집이라 하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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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흡공동체 - 미세먼지, 코로나19, 폭염에 응답하는 과학과 정치
전치형 외 지음 / 창비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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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사는 것은 같이 숨쉬는 것이다. 혼자 쉬는 숨은 없다.” - 15

 

공기에 대해 과학과 사회정치적 통합 시각을 전달하는 대중서는 아마 첫 출간물이 아닐까?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는 것은 곧 삶 그 자연적 속성이기에 이 행위가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문제여야 한다는 생각이 낯설게 여겨질 수도 있겠다. 그런데 코로나 팬데믹이라는 상황은 지극히 정치적이고, 사회적이며, 외교적이고 과학적인 문제로 공기를 다각적인 영역으로 끌어들였다. 공기의 흐름을 타고 비말이 타인에게 전달되어 감염되는, "공기의 위기, 숨바꿈의 위기, 공동체의 위기"를 가져왔으니 말이다.

 

우리는 혼자서 결코 살아갈 수 없으며, 더구나 공기를 호흡하지 않고서는 단 일 분을 견뎌내기도 힘든 존재다. 결국 공기는 모든 인간에게 사회적 관계의 토대이고 생물학적 기본 조건이다. 제대로 된 인지가 있기도 전에 이 기본적인 토대가 흔들리는 위기의 시대에 접어들었다. 미세먼지, 황사, 각종 유기화학물질과 질산염등 대기오염 물질의 증가는 이제 적절히 통제되지 않는다면 재앙적 상황이 될 지경에 이르렀으며, COVID-19는 물론 이전의 사스나, 메르스등의 진지구적 감염확산은 인간의 사회적 접촉을 회피토록하는, 즉 같은 공간에서 같은 공기를 함께하는 상황을 용납지 못하게 되었다. 여기에 갈수록 뜨거워지는 공기는 이에 노출된 채로 노동을 해야 하는 약자들에게 또 다른 재난이 되고 있다.

 

책은 이처럼 공기를 대기오염의 측면, 전염병 확산의 매질, 그리고 뜨거워진 공기, 즉 폭염의 재난적 측면에서 각자도생의 공기가 아닌 '공동체를 생각하는 공기'를 사유한다. 경제적 여유가 있는 계층은 즉각적인 방법으로 자신만의 울타리를 치고 탈공해, 신선한 공기가 있는 교외의 장소에 집을 마련할 수도 있다. 또한 개인을 위해 휴대용 공기청정기를 비롯한 공기가전시장이 활황을 맞이하는 것처럼 개개인의 사적 공기 관리를 도모하기도 한다. 그러나 공기는 내 앞의 공기만이 아니라 한반도의 공기, 호흡 공동체의 공기를 도외시할 수도 없으며, 각자도생의 공기를 합산한다고 전체의 공기가 되지도 않는다. 개인의 수준을 넘어서는 공동의 대응을 상상하기 어렵게 만드는 각자도생의 이기적인 몸부림을 넘어서는 사회적, 정치적 관심이 집중되어야 하는 이유이다.

 

"각자도생의 공기를 모두 더하는 것만으로 공동체의 공기를 지키는 일이 실현되지는 않는다."   -60

 

개인이나 기업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과학을 이용하고 그 산물인 제품을 개발, 활용할 수 있다. 그렇다면 공동체의 공기는 누가 관리해야 하는가? 중국발 황사에서부터 미세먼지를 관리하기 위한 과학기술과 그 예산이 요구되지 않는가? "미세먼지의 생성, 변화, 소멸 기작을 규명하는 연구"가 수행되는가하면, 당장의 대책으로 학교 교실마다 공기청정기와 미세먼지 측정기를 보급하여야하며, 무분별한 산업화, 느슨한 규제, 부실한 제도를 보완하여야 하고, 인접한 국가들과 '공기 외교'를 위한 노력도 하여야 한다. 이들 노력을 모두 경주한다고 하더라도 당장 한반도의 공기가 청정해지는 것도 아니다. 실로 많은 자금과 길고긴 과학적 노력이 요구된다. 여기에는 지식이 경합하고, 가치가 충돌하며 제도의 도입을 둘러싸고 논쟁이 그치질 않는다. 엇갈리는 응답에 조율하는 기술, 어떤 요구에 가장 먼저 응답할지 결정하는 호흡공동체의 가치, 그 중요성이 높은 강도로 오늘의 사회를 압박하고 있다.


 



매연으로 인한 고통이 인격권의 침해로 인정되고, 미세먼지가 사회재난의 범주가 되는 법안이 통과되었지만 우리의 '공기 과학'은 이제 초보상태를 막 벗어나고 있는 정도이다. 호흡공동체를 관리하는 과학에는 많은 비용이 소용될 뿐만 아니라 그 결과도 답답하리만큼 느리며, 즉각적인 이윤을 제공하지도 않는다. 돈이 안 된다고 공동체의 생존을 외면하는 과학, 기업, 정부(정치)로 머물 수 만은 없는 것 아니겠는가? 이제 한반도의 공기는 정치(精緻)하게 관리되어야 하는 시대에 들어섰음을 인지해야 한다.

 

"가난이 고인 곳에 열기도 고인다."  - 194

 

한반도의 공기, 공동체의 공기는 이같은 대기오염의 문제에만 머물지 않는다. 어느덧 아열대 현상을 보이는 여름의 기온은 기상청장의 언급처럼 "5개월 여름시대를 준비"해야하는 상황에 이르렀으며, 폭염도 재난의 영역에 돌입했다는 인식이다. 여름이 점점 뜨거워지고 길어질수록 이 뜨거운 공기를 피할 수 없는 사람들에 대한 사회적, 정치적 대책이 요구되는 것이다. 폭염이 "누군가에게는 잠깐의 불편으로 지나가는 온도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생사를 가르는 열기로 작용한다." 뜨거운 공기가 직업에 따라 다르게 체험되고 있다는 것을 아는가? '폭염시민 모니터링'에 의한 택배기사와 건설노동자의 체험 온도는 관측기온보다 13.5도에서 21도가 높을 만큼 노동자가 겪는 '() 스트레스'는 엄청나다.

 

최고온도에 의한 법적 강제력 없는 작업중지 권고가 지금 한국사회의 현실이다. 이를 따르는 기업이나 현장은 없다고 봐도 될 것이다. 노동력 착취에 혈안이 된 이익중심 사회에서 누가 노동자를 놀리겠는가? 자신들은 에어컨이 작동하는 서늘한 사무실에서 체감온도 50도를 넘나드는 중노동을 강요당하는 현실을 외면하는 사회이기를 이제라도 그쳐야하다. 독일은 노동강도를 기준으로 한 체감온도를 세분화하여 인지온도를 기준으로 작업중지를 마련하여 실행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 사회도 이같은 기준과 법적 강제력의 도입을 더 이상 늦춰서는 안 될 것이다.

 

서울 평균 기온이 섭씨 28.1도를 넘어서면 1도 상승할 때마다 사망율이 9.6퍼센트씩 증가한다고 한다. 온열환자로 분류되는 폭염에 의한 매년 사망자 수가 COVID-19의 사망자수보다 많다면 이는 재난인가 아닌가? 아마 에어컨도 없는 닭장같은 초소에 꼼짝없이 갇힌 상태에서 24시간을 견뎌내야 하는 경비노동자에서부터 쪽방촌의 노인들, 폭염 속 택배물품을 나르는 노동자에 이르기까지 뜨거운 열기를 피하지 못하는 이웃이 우리 주변에는 무수하다. 일부 지방자치체에서는 '쉼터'를 마련하여 운영하고 있는 모양이지만 그마저도 코로나 팬데믹으로 운영이 중지되었거나 폐쇄되고 있는 실정인 것 같다. 우린 개인으로서만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공동체의 일원이다. 뜨거워진 공기 또한 공동체가 그 대책을 강구해야만 하는 국가적 재난으로 인식해야 함이다.

 

도심의 열기는 더욱 극악하다. "에어컨 실외기가 내뿜는 열기, 건물 벽 반사광선, 아스팔트가 머금은 열기," 고층빌딩으로 바람의 흐름이 차단되어 열섬 현상은 사람들을 더욱 고통스럽게 한다. 최근 외곽의 자연적 찬 공기를 도심으로 유통시킬 바람길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듯하다. 일명 "바람 생성 숲, 연결숲, 디딤,확산숲"으로 불리며 도심에 자연의 바람을 이끌 길이다. 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건물 높이 제한, 공원도로 너비 확장등 제도적 법규의 보완이 뒤따라야 한다. 대중이 마치 남의 문제처럼 외면하는 한 이같은 노력이 결실을 맺기는 어렵다. 우리에게 당면한 문제가 아닌가!

 

"낯설지만 호혜적인 공기관계를 구성함으로써 더 자주 더 극심하게 찾아올 공기위기를 겨우 살아낼 수 있을 것이다. 이제 피서는 끝났다. 피난 준비를 시작할 때다." - 209

 

COVID-19는 현재 진행형인 전염병이며, 지구적 재난이다. 사실 이 재난은 우리에게 '공기 인류학'이란 것을 가르쳐주고 있다. "공기관계를 이해하고 조정하는 일이 새로운 인류의 과제"가 된 것이다. 여기에도 사회적 약자는 어김없이 최대의 피해자로 부상하고 있다. 오랜시간 자리를 뜨지 못하고 옆 사람과 숨을 섞으며 일해야 하는 노동자들, 특히 콜센터 노동자 집단에서 집중적으로 감염환자가 발생했던 사실을 우린 잘 알고 있다. 공간배치, 새로운 규칙...등 실내 구조, 장치(창문, 배기구, 에어컨 등)에 따라 공기의 흐름을 타고 떠다니는 비말에 대한 연구처럼 우리들의 지식은 쌓여 갈 것이다. 이들의 결실이 공동체가 함께 호흡하는 공기에 대한 정치적, 사회적 문제 해결의 도구가 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궁극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각자도생의 기술이나 제품이 아니라 숨쉴 권리다. 이는 오래되었지만 새로운 권리다." 서로 숨바꾸는 일을 회피하는 사회로서 공동체가 온전하기는 불가능하다. 우리는 함께 나누어 쉬는 공기, 위기를 맞은 공동체의 공기를 되살리는 노력을 게을리 할 수 없는 이유이다. 이 책은 한반도의 공기에 대한 다층적 연구의 중간 결실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현재의 과학과 정치 사회적 현실을 가늠하고 현안 과제를 함께 사유함으로써 공동의 목표를 지향하기 위한 공기 사회학, 공기 과학, 공기 정치학의 토대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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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집
손원평 지음 / 창비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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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남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일을 게을리하지 말자. 그러면 나의 우주가 그렇듯, 타인의 우주 안에도 다양한 작동 원리가 있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 작가의 말, 269쪽에서

 

표제작 타인의 집의 화자인 '시연' "블라인드 틈새로 들어온 햇살" "가늘게 뜬 눈 틈으로" 바라본다. 그리고 문학이란 무엇인가의 중학생 소녀 '보라'는 장례식장의 "오래되어 갈라진 벽, 그 틈" 을 통해 "검은 곰팡이, 간헐적 울음소리, 삶에 관한 이야기, 찐득한 술 냄새, 그리고 죽음이라는 갑작스러운 사건"을 경험한다. 활짝 드러나 너무 뻔한 것일지언정 벽, 블라인드로 가려진 ''을 통해 보는 이들의 시선에서 비로소 무심히 지나쳤거나 외면되었거나 혹은 가려져 있던 것들을 볼 수 있게 된다. 타인이 그리고 거울에 비친 내가 보이기 시작한다. 무수히 다른 삶의 이야기들이.

 

타인의 집은 불안한 생활의 터전으로부터 도약을 꿈꾸는이 시대 젊은 세대의 풍경이 고스란하다. 체인 어학원 상담업무로 위태로운 만족의 삶을 살아가는 '시연'은 집주인에게 세 들어 사는 걸 숨기고 전세입자에게 월세를 지불하는 방에 산다. 명목상인 전대차(轉貸借)의 집이지만 "탐탁지 않을지언정 '공동체'라고 부를 수 있는 집단에 소속돼"있다는 위안의 장소가 되고, "엄연한 집"으로서의 만족감을 준다. 다중 속에 위치해 있다는 안정감과 달리 "원하지 않는 상황에서 굳이 (타인과) 블렌딩 인 될 필요 없"음에 대한 욕구처럼 그 모순과 갈등의 풍경이 소소하게 풀어헤쳐진다. 창가에 서서 "각자 빛을 뿜어내며 차고 넘치도록 많은 풍경 속의 집들"을 바라보는 시연, 오늘의 젊은 세대들 시선이 시리게 다가온다.

 

''과 발음이 같은 zip이라는 제목을 지닌 단편에서는 막상 이렇게 소유된 집의 또 다른 측면을 보게 된다. 주인공의 이름인 '영화', 마치 압축된 동영상 파일을 풀어 놓듯 한 여인의 작은 우주로서의 집과 절묘하게 조우하는 듯하다. 여자에게 집은 편안히 머무는 곳이 아닌 블랙홀 같은 곳, "견고하되 구멍이 많고 드나들 수 있지만 도망칠 수 없는 울타리와 지붕", 삶을 옴짝달싹 못하게 하는 굴레다. 고요했던 여자의 삶에 바람을 피우고, 재산을 탕진하는 등 "너무나 많은 드라마를 제공했던" 남편 '기한'과의 첫 만남에서부터 분노와 복수심으로, 그리곤 미움의 정열마저 태워버리기엔 너무 지쳐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도망치고자 했으나 늘 회귀했던, 모든 것이 눌러 담긴 작은 우주"였던 집에 담겨 전달되는 21세기판 '여자의 일생' 압축파일이라 할까? 여자라 지녀야 했던 오래된 질서와 속박들...

 

"평화와 안온함의 상징, 단란하고 완결된 가족을, 때로는 뭔가를 더 완성시키기 위해 힘을 보태는 것이 모든 것을 어그러지게 한다는 걸, 그때는 몰랐었다. "

- 괴물들 , 51

 

불임의 강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시험관 시술로 쌍둥이를 얻은 여자, 이 과정의 불화는 부부의 관계 단절로 이어지고, 사고로 생계능력을 상실한 남편을 대신해 여자는 어린이집 교사로서 고단한 삶을 꾸려간다. 쌍둥이가 함께 사용하는 듯한 다이어리에 써진 "아빠를. 죽일거야. 오늘, 저녁. 우리 손으로."라는 섬뜩한 이 소설 괴물들 의 첫 문장은 어쩌면 부인하고 싶은 여자의 소망일지도 모르겠다.

 

"평온함마저 변질될 수 있음을 여자는 시간이 감에 따라 느끼고 있었다."는 목소리처럼 '가족'이라는 이데올로기에 씌워진 자본주의의 허상이 사람들을 어떻게 황폐화 시키고 있는지 그 적나라한 고백록으로 읽힌다. 어린이집 교사의 돌봄 노동의 실상까지 더해져, "세계를 받아들이지 못할 때 만들어지는 '마음의 병'"이라는 의사의 진단을 받는 여자로부터 오늘 우리들의 세계가 외면하는 것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돌아보게 한다. 괴물들은 누구일까? 교사에게 과다한 수의 아이를 맡기는 어린이집 원장? 자신의 자유를 위해 아이를 맡기고는 책임만을 강요하는 아이들의 부모? 현실을 파악하지 못하는 안일한 관료행정? 어린이집 교사를 범죄자 취급하는 미디어와 이기주의의 대중?

 

우리네 삶의 현실이 안고 있는 이러한 지배적 몰지성과 몰염치함의 현상들을 총체적으로 품고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리아드네 정원은 노인 인구가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사회의 계급화 된 노인 구획의 가장 아래 등급 바로 위인 'D등급 유닛'에 대한 미화된, 아니 "실마리도 없는 지옥 같은 미로"를 은폐하는 구역의 이야기다. 부유한 노인들이 거주하는 유닛 A로부터 점차 B,C,D,F로 하향 이동한다. 경제력도 신체와 정신력도 떨어짐에 따라 점차 야만적 원시적 구획으로 하강한다.

 

노인 '미화'는 유닛 C에서 유닛 D로 이동했다. 그녀는 마지막 등급인 F로의 이동을 지연시키려고, "구성원 실태에 도움 되는 정보를 '민원 AI'에 전달"함으로써 화폐처럼 사용되는 '생활평가지수 RM'을 쌓기 위해 노력한다. 이 점수로 소위 이야기 동무인 복지파트너를 초대해 "살아있음을 향한 본능"을 충족시키려한다. 그녀는 "손님을 초대한 주인이 되게 하는 기분(느낌)을 주는 아이들"로부터 기쁨을 얻는다.

 

소설의 배경이 되는 '위협적 낙폭의 출산율, 이를 해결키 위한 불가피한 이민자 수용, 남북개방 등 단일성 지배문화가 다인종 계층이 넘실대는 곳으로 변모한' 세계는 어쩌면 눈앞의 근미래에 대한 우리의 현실이라해도 무방할 듯하다. 압도적인 노령화가 야기하는 경제적 부담의 정의에 대해서, 이민자 등 다양한 계층적 차별이 야기하는 혐오와 배제 등 사회 갈등에 대해서, 노인 사회가 만들어 낼 돌봄 등 인권 사각지대의 확산에 대해서, 청년 실업과 일자리 감소에 따른 세대 간 질시와 분열에 대해서 등 편협한 시야를 서로 촘촘히 연결된 복합적 과제로 확장하게 이끈다. 이 작품을 sci-fi 소설로 범주화하는 이들의 안일한 이해가 있는 듯하다. 닥친 과제로서 인식하지 못한다는 반증 아니겠는가? 엄혹한 현실적 허구로 인식되어야 하지 않을까?

 

 

【 『타인의 집스위치 에디션 & 편지엽서

 

"누가 도와달랬어요? 감사하다고 충분히 말했잖아요. 한번 도움을 받았다고 평생 죄인처럼 살라는 겁니까? 누가 도와달랬느냐고요..."

-상자속의 남자, 180

 

위의 인용된 문장은 작품 상자속의 남자 화자가 언덕에서 굴러 내리는 트럭에 무방비로 깔리는 아이를 구하고 대신 영원히 삶의 길로 되돌아올 수 없게 된 형을 대신해서 아이들의 부모로부터 듣게 되는 말이다. 감사의 마음을 너무 쉽고 바르게 망각하는 사람들, 택배 상자를 분류하고 하루치 물량을 배송하는 택배 노동자인 ''는 세상이 가르쳐주는 이 교훈으로부터 "굳이 남들이 감사할 일을 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누군가가 고마워할 만한 일을 한다는 건 내가 더 위험해지거나 손해를 본다는 뜻이니까.(181)"라고 상자 속에 살기로 한다. 안전이라는 삶의 모토를 지키기 위해.

 

이 사건을 시작으로 두 개의 에피소드가 더해지는데, 눈앞에서 모녀인 두 여인이 잔혹하게 살해당할 때 ''는 개입하지 않는다. 그때 문 앞에서 무참히 스러져가는 자신의 엄마와 할머니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는 사람들을 두려움에 경직되어 바라보는 소년을 발견하게 된다. ''는 죄책감을 벗어나기 위해 장례식장을 찾고 은테 안경너머 무심한 눈빛으로 사람들을 관찰하는 예의 소년과 마주한다. 소년은 ''에게 말한다. "알고 싶을 뿐이에요. 세상에 일어나는 일들에 사람들이 반응하는 방식에 대해서요. 거기에 어떤 이유가 있는지. (187)" ''의 형이 마지막처럼 남기는 "어떻게 하든 누군가는 아프게 된다."는 말이 과연 대답이 될 수 있을까? 아마 이 불가능해 보이는 답에 근접하는 것은 우리들이 타인을 위해 할 수 있는 태도에 대한 한 위로의 방식이랄 수 있는 마지막 에피소드일 것 같다. 타자를 향한 내 태도만큼은 자신을 위해 미소 지을 수 있는 그런 삶이 될 수 있기를.

 

이 소설집에서 가장 재미있게 읽은 작품이라면 성장하고 나면 소설가 '손원평'이 되었을 것 같다고 여기고 싶은 문학소녀 '보라'가 있는 문학이란 무엇인가 이다. "어둠을 갈라내는 빛"을 향해 자기만의 소설을 완성해가는 씩씩함, 그리고 시니컬함 속에 위트까지 담고 있는 재치 있으며 남의 속을 빤히 들여다보는 심리적 능숙함이 던져주는 즐거움 탓이었다 할까? 문학계 원로라는 그럴듯한 의상까지 걸친 소설가 윤석이 세간의 맹목적 열광을 빌어 남의 작품을 자기만의 언어로 닥아 낸 후 출간하는 뻔뻔함 등 작품 내 갈등구조나 서사도 소설의 독특한 구성만큼이나 흥미롭지만 내겐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은 세계에 시선을 맞추고 자기 것을 만들어내는 주인공이 맞는 기성 권력의 추악한 위선과 기만의 양상들이며, 그리곤 호들갑을 떨어대는 세상의 방정맞음에 대해 우아하게 날리는 마지막 질책의 한 방이다.

 

"놀랍지만 늘 벌어지는 일이었다. 사람들은 자주 망각했고 또다시 처음처럼 경악했다. 그렇기에 이것은 새로워도 낡은 이야기였다. 그러니까 그들의 이야기도, 전부 똑같거나 혹은 전부 달랐다. "

-문학이란 무엇인가, 236

 

이 소설집의 처음을 시작하는 4월의 눈속 어느 눈 녹은 날 서로 어깨를 토닥여주는 이방의 여인과 남자의 정경과 마지막을 장식하는 "주인이 책방을 열기 전까지" 열리지 않은 책방의 비 그친 길을 걸어가는 "손님이었던 한 사람과 주인이 아니었던 다른 이의 허밍이 섞여" 흐르는 장면은 어느 한 폭의 그림처럼 깊은 잔상을 남긴다. 유토피아를 잊어버린, 아니 부존재라 낙인찍었던 세상의 가능성에 도전해야 할 의미가 있음을 증명하는 것만 같다. 무한히 다른 타자의 세계를 알아가려 할 때 아마 우리는 조금은 더 살아갈 이유를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이 소설집을 나는 '문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담한 정의라 해도 된다고 선언하고 싶다. 작가는 이 책이 "대중에서 시민으로, 관중에서 독자로 이끄"는 그런 훌륭한 일을 해낼 만한 대단한 책이 아니라고 겸손해 하지만 그 일을 해낸 작품집이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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