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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집
손원평 지음 / 창비 / 2021년 6월
평점 :
"나와 남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일을 게을리하지 말자. 그러면 나의 우주가 그렇듯, 타인의 우주 안에도 다양한 작동 원리가 있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 작가의 말, 269쪽에서
표제작 「타인의 집」의 화자인 '시연'은 "블라인드 틈새로 들어온 햇살"을 "가늘게 뜬 눈 틈으로" 바라본다. 그리고 「문학이란 무엇인가」의 중학생 소녀 '보라'는 장례식장의 "오래되어 갈라진 벽, 그 틈" 을 통해 "검은 곰팡이, 간헐적 울음소리, 삶에 관한 이야기, 찐득한 술 냄새, 그리고 죽음이라는 갑작스러운 사건"을 경험한다. 활짝 드러나 너무 뻔한 것일지언정 벽, 블라인드로 가려진 '틈'을 통해 보는 이들의 시선에서 비로소 무심히 지나쳤거나 외면되었거나 혹은 가려져 있던 것들을 볼 수 있게 된다. 타인이 그리고 거울에 비친 내가 보이기 시작한다. 무수히 다른 삶의 이야기들이.
「타인의 집」은 불안한 생활의 터전으로부터 도약을 꿈꾸는이 시대 젊은 세대의 풍경이 고스란하다. 체인 어학원 상담업무로 위태로운 만족의 삶을 살아가는 '시연'은 집주인에게 세 들어 사는 걸 숨기고 전세입자에게 월세를 지불하는 방에 산다. 명목상인 전대차(轉貸借)의 집이지만 "탐탁지 않을지언정 '공동체'라고 부를 수 있는 집단에 소속돼"있다는 위안의 장소가 되고, "엄연한 집"으로서의 만족감을 준다. 다중 속에 위치해 있다는 안정감과 달리 "원하지 않는 상황에서 굳이 (타인과) 블렌딩 인 될 필요 없"음에 대한 욕구처럼 그 모순과 갈등의 풍경이 소소하게 풀어헤쳐진다. 창가에 서서 "각자 빛을 뿜어내며 차고 넘치도록 많은 풍경 속의 집들"을 바라보는 시연, 오늘의 젊은 세대들 시선이 시리게 다가온다.
'집'과 발음이 같은 「zip」이라는 제목을 지닌 단편에서는 막상 이렇게 소유된 집의 또 다른 측면을 보게 된다. 주인공의 이름인 '영화'는, 마치 압축된 동영상 파일을 풀어 놓듯 한 여인의 작은 우주로서의 집과 절묘하게 조우하는 듯하다. 여자에게 집은 편안히 머무는 곳이 아닌 블랙홀 같은 곳, "견고하되 구멍이 많고 드나들 수 있지만 도망칠 수 없는 울타리와 지붕", 삶을 옴짝달싹 못하게 하는 굴레다. 고요했던 여자의 삶에 바람을 피우고, 재산을 탕진하는 등 "너무나 많은 드라마를 제공했던" 남편 '기한'과의 첫 만남에서부터 분노와 복수심으로, 그리곤 미움의 정열마저 태워버리기엔 너무 지쳐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도망치고자 했으나 늘 회귀했던, 모든 것이 눌러 담긴 작은 우주"였던 집에 담겨 전달되는 21세기판 '여자의 일생' 압축파일이라 할까? 여자라 지녀야 했던 오래된 질서와 속박들...
"평화와 안온함의 상징, 단란하고 완결된 가족을, 때로는 뭔가를 더 완성시키기 위해 힘을 보태는 것이 모든 것을 어그러지게 한다는 걸, 그때는 몰랐었다. "
- 「괴물들 」, 51쪽
불임의 강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시험관 시술로 쌍둥이를 얻은 여자, 이 과정의 불화는 부부의 관계 단절로 이어지고, 사고로 생계능력을 상실한 남편을 대신해 여자는 어린이집 교사로서 고단한 삶을 꾸려간다. 쌍둥이가 함께 사용하는 듯한 다이어리에 써진 "아빠를. 죽일거야. 오늘, 저녁. 우리 손으로."라는 섬뜩한 이 소설 「괴물들」 의 첫 문장은 어쩌면 부인하고 싶은 여자의 소망일지도 모르겠다.
"평온함마저 변질될 수 있음을 여자는 시간이 감에 따라 느끼고 있었다."는 목소리처럼 '가족'이라는 이데올로기에 씌워진 자본주의의 허상이 사람들을 어떻게 황폐화 시키고 있는지 그 적나라한 고백록으로 읽힌다. 어린이집 교사의 돌봄 노동의 실상까지 더해져, "세계를 받아들이지 못할 때 만들어지는 '마음의 병'"이라는 의사의 진단을 받는 여자로부터 오늘 우리들의 세계가 외면하는 것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돌아보게 한다. 괴물들은 누구일까? 교사에게 과다한 수의 아이를 맡기는 어린이집 원장? 자신의 자유를 위해 아이를 맡기고는 책임만을 강요하는 아이들의 부모? 현실을 파악하지 못하는 안일한 관료행정? 어린이집 교사를 범죄자 취급하는 미디어와 이기주의의 대중?
우리네 삶의 현실이 안고 있는 이러한 지배적 몰지성과 몰염치함의 현상들을 총체적으로 품고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리아드네 정원」은 노인 인구가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사회의 계급화 된 노인 구획의 가장 아래 등급 바로 위인 'D등급 유닛'에 대한 미화된, 아니 "실마리도 없는 지옥 같은 미로"를 은폐하는 구역의 이야기다. 부유한 노인들이 거주하는 유닛 A로부터 점차 B,C,D,F로 하향 이동한다. 경제력도 신체와 정신력도 떨어짐에 따라 점차 야만적 원시적 구획으로 하강한다.
노인 '미화'는 유닛 C에서 유닛 D로 이동했다. 그녀는 마지막 등급인 F로의 이동을 지연시키려고, "구성원 실태에 도움 되는 정보를 '민원 AI'에 전달"함으로써 화폐처럼 사용되는 '생활평가지수 RM'을 쌓기 위해 노력한다. 이 점수로 소위 이야기 동무인 복지파트너를 초대해 "살아있음을 향한 본능"을 충족시키려한다. 그녀는 "손님을 초대한 주인이 되게 하는 기분(느낌)을 주는 아이들"로부터 기쁨을 얻는다.
소설의 배경이 되는 '위협적 낙폭의 출산율, 이를 해결키 위한 불가피한 이민자 수용, 남북개방 등 단일성 지배문화가 다인종 계층이 넘실대는 곳으로 변모한' 세계는 어쩌면 눈앞의 근미래에 대한 우리의 현실이라해도 무방할 듯하다. 압도적인 노령화가 야기하는 경제적 부담의 정의에 대해서, 이민자 등 다양한 계층적 차별이 야기하는 혐오와 배제 등 사회 갈등에 대해서, 노인 사회가 만들어 낼 돌봄 등 인권 사각지대의 확산에 대해서, 청년 실업과 일자리 감소에 따른 세대 간 질시와 분열에 대해서 등 편협한 시야를 서로 촘촘히 연결된 복합적 과제로 확장하게 이끈다. 이 작품을 sci-fi 소설로 범주화하는 이들의 안일한 이해가 있는 듯하다. 닥친 과제로서 인식하지 못한다는 반증 아니겠는가? 엄혹한 현실적 허구로 인식되어야 하지 않을까?
【 『타인의 집』 스위치 에디션 & 편지엽서】
"누가 도와달랬어요? 감사하다고 충분히 말했잖아요. 한번 도움을 받았다고 평생 죄인처럼 살라는 겁니까? 누가 도와달랬느냐고요..."
-「상자속의 남자」 , 180쪽
위의 인용된 문장은 작품 「상자속의 남자」 화자가 언덕에서 굴러 내리는 트럭에 무방비로 깔리는 아이를 구하고 대신 영원히 삶의 길로 되돌아올 수 없게 된 형을 대신해서 아이들의 부모로부터 듣게 되는 말이다. 감사의 마음을 너무 쉽고 바르게 망각하는 사람들, 택배 상자를 분류하고 하루치 물량을 배송하는 택배 노동자인 '나'는 세상이 가르쳐주는 이 교훈으로부터 "굳이 남들이 감사할 일을 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누군가가 고마워할 만한 일을 한다는 건 내가 더 위험해지거나 손해를 본다는 뜻이니까.(181쪽)"라고 상자 속에 살기로 한다. 안전이라는 삶의 모토를 지키기 위해.
이 사건을 시작으로 두 개의 에피소드가 더해지는데, 눈앞에서 모녀인 두 여인이 잔혹하게 살해당할 때 '나'는 개입하지 않는다. 그때 문 앞에서 무참히 스러져가는 자신의 엄마와 할머니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는 사람들을 두려움에 경직되어 바라보는 소년을 발견하게 된다. '나'는 죄책감을 벗어나기 위해 장례식장을 찾고 은테 안경너머 무심한 눈빛으로 사람들을 관찰하는 예의 소년과 마주한다. 소년은 '나'에게 말한다. "알고 싶을 뿐이에요. 세상에 일어나는 일들에 사람들이 반응하는 방식에 대해서요. 거기에 어떤 이유가 있는지. (187쪽)" '나'의 형이 마지막처럼 남기는 "어떻게 하든 누군가는 아프게 된다."는 말이 과연 대답이 될 수 있을까? 아마 이 불가능해 보이는 답에 근접하는 것은 우리들이 타인을 위해 할 수 있는 태도에 대한 한 위로의 방식이랄 수 있는 마지막 에피소드일 것 같다. 타자를 향한 내 태도만큼은 자신을 위해 미소 지을 수 있는 그런 삶이 될 수 있기를.
이 소설집에서 가장 재미있게 읽은 작품이라면 성장하고 나면 소설가 '손원평'이 되었을 것 같다고 여기고 싶은 문학소녀 '보라'가 있는 「문학이란 무엇인가」 이다. "어둠을 갈라내는 빛"을 향해 자기만의 소설을 완성해가는 씩씩함, 그리고 시니컬함 속에 위트까지 담고 있는 재치 있으며 남의 속을 빤히 들여다보는 심리적 능숙함이 던져주는 즐거움 탓이었다 할까? 문학계 원로라는 그럴듯한 의상까지 걸친 소설가 윤석이 세간의 맹목적 열광을 빌어 남의 작품을 자기만의 언어로 닥아 낸 후 출간하는 뻔뻔함 등 작품 내 갈등구조나 서사도 소설의 독특한 구성만큼이나 흥미롭지만 내겐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은 세계에 시선을 맞추고 자기 것을 만들어내는 주인공이 맞는 기성 권력의 추악한 위선과 기만의 양상들이며, 그리곤 호들갑을 떨어대는 세상의 방정맞음에 대해 우아하게 날리는 마지막 질책의 한 방이다.
"놀랍지만 늘 벌어지는 일이었다. 사람들은 자주 망각했고 또다시 처음처럼 경악했다. 그렇기에 이것은 새로워도 낡은 이야기였다. 그러니까 그들의 이야기도, 전부 똑같거나 혹은 전부 달랐다. "
-「문학이란 무엇인가」, 236쪽
이 소설집의 처음을 시작하는 「4월의 눈」속 어느 눈 녹은 날 서로 어깨를 토닥여주는 이방의 여인과 남자의 정경과 마지막을 장식하는 "주인이 책방을 열기 전까지" 「열리지 않은 책방」의 비 그친 길을 걸어가는 "손님이었던 한 사람과 주인이 아니었던 다른 이의 허밍이 섞여" 흐르는 장면은 어느 한 폭의 그림처럼 깊은 잔상을 남긴다. 유토피아를 잊어버린, 아니 부존재라 낙인찍었던 세상의 가능성에 도전해야 할 의미가 있음을 증명하는 것만 같다. 무한히 다른 타자의 세계를 알아가려 할 때 아마 우리는 조금은 더 살아갈 이유를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이 소설집을 나는 '문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담한 정의라 해도 된다고 선언하고 싶다. 작가는 이 책이 "대중에서 시민으로, 관중에서 독자로 이끄"는 그런 훌륭한 일을 해낼 만한 대단한 책이 아니라고 겸손해 하지만 그 일을 해낸 작품집이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