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따스한 유령들 창비시선 461
김선우 지음 / 창비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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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깊은 시인이구나. 한 점 티끌에서 바스락 소리내는 새싹과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나뭇잎, 그리고 금잔화 심던 할머니에 이르기까지 시인의 따뜻한 시선은 미치지 않는 데가 없다. 흩날리는 먼지 한 톨, 그저 내리는 빗방울, 그리고 보이지 않지만 느껴지는, 아니 느낄 수 있는 감각을 지닌 기운에서조차 따스함, 속내를 살필 수 있는 사랑을 품고 있다.


우주먼지로 만들어진 내가

우주먼지로 만들어진 당신을 향해

사랑한다,

말할 수 있어

말할 수 없이 찬란한 날

- 詩 「작은 신이 되는 날」 中에서


그런데 우주먼지인 '나'들을 인정치 못하는 무수한 아무개들은 마치 특별한 존재나 되는 양 거드름을 피운다. 자신이 무엇인지를 알아채지 못한 존재는 끝없이 아무를 쫓는다. 영속해야만 존재할 수 있는 자본주의의 환영을 실재라 믿는 우매함이란..., 시인은 그래서 반성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현실의 식탁과 보이는 식탁과 보여지고 싶은 식탁 사이

품위 있게 드러내기의 기술 등급에 관하여

관음과 노출 사이 수많은 가면을 가진 신체에 관하여

곁에 있는 것 같지만 곁을 내줄 수 없는 곁에 관하여

비교가 천형인 네트에서 우울에 빠지지 않기 위해 지불해야 하는 노력에 관하여

- 詩 「일반화된 순응의 체제3 ; 아무렇지 않은 아무의 반성들」中에서


사랑을 아는 시인은 그래서 이렇게 노래한다. 티끌인걸 알게되면 유랑의 리듬이 생긴다고, 그리고 서로를 알아챈 티끌들은 그 알아챔의 근사한 사건을 축복한다. 이 티끌들에게 일어나는 우연한 만남은 "가끔 유난히 아름다운 탄생의 문양(「천문의 즐거움」中에서)"을 만들어낸다. 마르크스의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들」을 생각나게 한다. 수직으로 낙하하던 원자의 무한히 작은 편의에 의한 마주침의 유발, 즉 인간의 본질은 '사회적 관계의 앙상블'이란 구절이.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역사는 시야에서 증발되어버리고 말 것이라는 지적이리라. 대체 사랑할 줄 모르는 존재가 무엇을 할 수 있다는 말이겠는가!


그렇기에 시인은 '오늘은 없는 날'을 꿈꾸는지 모르겠다. "말 많고 현란한 매체들, 돈이든 권력이든 세력 불리는 일에 중독된 사람들, (...) 조용히, 더 조용히 오늘은 없는 날(「오늘은 없는 날」中에서)"이라고 부른다.


150년전 1871년은 프랑스 내전이 있었던 해이다. 60일간의 시민들의 완전한 자치가 이루어졌던 짧은 파리코뮌의 시대가 있었다. "일체의 억압과 지배가 종결된 자유로운 공동체 (「철학 VS 실천」, 강신주 著, 31쪽, 오월의 봄 刊)"였다. 시인은 시(詩), 「지구 평의회가 만들어진다면」에서 "만약 그럴 수 있다면"이라며 포문을 열고, "그럴 수 있을까, 인간이?"라고 회의적 시그널을 보내고 있다. "자본교에 장악당한지 불과 이백 년 만에 멸망의 시간을 카운트 중"인 것을 알거나 모르거나. 사랑 깊은 사람, 시인의 마음을 가진 이들의 실천에 기댈 수 밖에.


아주 신랄한 시도 있다. 민주주의 꽃이 선거? 정말 그런가? 투표 후 인증 숏을 찍는 것이 교양이라면 시인은 사절한다. 이것이 민주시민의 교양이라면 거부한다. 차악과 최악의 사이를 되풀이하는 결국 최악의 놀이, 정당 만들어 국고 보조금 챙겨가는 꽃패놀이, 시인은 "들판의 정치가 시작될 때" 꽃에게 투표할 거라고. 그럼에도 시인은 서로 얼싸 안자고 제안한다. 서로의 얼룩을 껴안음으로서, 우리가 될 수 있다고.


내가 너와 만난 것으로 우리가 되지 않는다

내가 남긴 얼룩이 너와

네가 남긴 얼룩이 나와

다시 만나 서로의 얼룩을 애틋해 할 때

너와 나는 비로소 우리가 되기 시작한다

-詩 「그러니까 사랑은, 꽃피는 얼룩이라고」中에서


나의 로도스는 여기도 거기도 아니고 '저기'있다고 말한다. 삶이 우리를 춤추게 하는 곳, 그런 곳을 향한 실천, 사랑의 울림이 시집을 가득 채우고 있다. 시인의 맹렬한 사랑이 세상을 뒤덮는 그런 날이 언젠가 오기는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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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분의 1은 비밀로 넥서스 경장편 작가상
금성준 지음 / &(앤드)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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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을 만들 때에는 누구에게나 전략이란 있는 법이다. 어디선가 비집고 나타나는 쥐새끼들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우산을 챙기지 않은 날 퇴근시간만 되면 비가 내리는 것처럼, 소설은 한바탕 회오리가 몰아치듯 그 익살과 해학이 궁박한 인간들의 몸과 마음을 헤집어대며 휩쓸고 지나가는 해프닝, 아니 그렇기에는 조금은 아프다. 가진 자들의 교활함과 후안무치가 버젓이 활개치는 이 세계에서는.

 

소설 속 루저들이 발설하는 그 유치찬란하고 몽매한 말들과 행위에 웃고, 이기적 욕망이 발산하는 그 인간적 비열함과 탐욕스러움에 수긍하며, 책장을 휘리릭 넘기게 하는 생생한 교도소의 풍경과 그네들의 일상이 빚어내는 코믹함을 통과하고, 책장을 덮을 즈음에는 어느덧 어지럽게 뒤섞인 소시민적 욕망의 민낯을 통해 돈에 영혼을 빼앗긴 우리네 초상을 들여다보는 자신을 발견케 된다. 소설은 수용자의 영치품을 담당하는 교도관의 미실현 독직(瀆職)범죄를 다루고 있다.

 

이야기는 군더더기 없이 일사천리로 달려 나간다. 어느 날 교도소에 수감되었던 김대식이라 알려진 노인이 사망했다. 그가 입소 할 때부터 애착을 보이던 캐리어에는 5만 원 권이 100장씩 묶여진 돈다발 9억 원이 가득 채워져 있다. 이제 이 돈의 임자가 사라진 것이다. 김대식에게는 피붙이도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고, 이 돈에 대해서 아는 자가 없는 듯하다. 영치품 창고 관리 담당자인 교도소 하급관리인 8급 교사 기봉규와 허태구는 매일 조금씩 밖으로 빼내 절반 씩 나누어 가지기로 둘 만의 비밀 약속을 한다. 소설은 이 궁박한 인간들을 통해 자기 삶의 주체자로서 거듭 나는 도덕적 성장의 여정을 담아내고 있지만 나는 조금은 다른 오독(誤讀)을 시작해야겠다.

 

내게 떠오른 생각은 임자 없다고 여겨진 땅을 발견한 미국인들이 이것은 내 땅이라고 선언하던 시대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먼저 본 놈이 임자라는 말에 대한 것이다. 즉 최초의 소유권 주장의 논리이다. 그런데 이 자기 소유를 주장하는 논리에는 무수한 원칙이 있다. 우스개 소리로 아주 어린 아이들, 유아들이 외치는 소유권 주장 원칙들인데, ‘내가 먼저 봤으면 내 것이다.’부터, ‘내 맘에 들면 내 것이다’, ‘내 손에 있으면 내 것이다.’, ‘내가 빼앗았으면 내 것이다.’, ‘좀 전 까지 나한테 있었으면 내 것이다.’, ‘내 것이면 누가 뭐래도 남게 아니다.’ 등등이다. 사실 유아들의 이러한 자기 소유권 주장의 행동은 어른이 된다고 그 본질이 바뀌지 않는다. 기와 허가 나눠 갖기로 했던 이 비밀스런 계획은 여지없이 허물어지는 데, 이 돈을 두고 무수한 자기 소유 주장자들이 등장하는 것이다.

 

죽은 김대식의 감방 동료인 범죄 조직 우두머리 출신의 수감자 어금니부터, 이들의 말을 엿들은 교도소 교위 오용수’, 기봉규와 그의 아내 말을 엿들은 처남과 그 애인, 이들이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벌인 굿 무당과 북채잡이에 이르기까지 유아들이 외치는 원시적 욕망의 논리를 내세우며 자기 몫을, 또는 온통 자기 것임을 주장한다. 그런데 공유지의 재난이란 것이 있지 않은가? 결국 돈의 소유에 대한 권리자가 늘어나는 것, 즉 비밀의 공유자가 늘어나면서 이를 지킬 의무는 사라지고 말며, 그것은 곧 비밀의 붕괴, 다시 말해 애초의 전략은 날아가 버리고, 궁극적으로 그들은 아무것도 손에 쥘 수 없게 되는 것, 이미 도착지가 보이는 쓸 데 없는 짓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기와 허, 삶의 궁지에 몰려 일상이 늪에서 허우적대는 느낌을 떨쳐낼 수 없는 두 사람에게 이 돈은 그들의 발목을 잡았던 삶의 질곡(桎梏)을 떨쳐내고 새로운 인생설계가 가능한 매혹적인 신의 선물처럼 여겨졌을 터이다. 이러한 삶의 배경은 이들에게 비밀이 유지되리라는 믿음, 망자의 캐리어에 대한 의혹의 눈길이 얼마나 많은지에 대한 기만적이기까지 한 무지를 보이지 않게 하며, 따라서 소유권리의 그 원시성, 공유지의 무책임이 지닌 태생적 실패의 논리성을 그대로 따르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고 여겨진다.

 

임자 없는 돈이라고 여겨지는 순간, 이 원시적 욕망이 인간들의 본성을 깨운다. 물론 소설 속 등장인물들은 하급 교도관, 수감된 조폭 두목, 빈둥거리며 처남부부에 기생하는 룸펜, 이들을 기만, 위협하며 몫을 주장하는 무당 무리에 이르기까지 사회 하부 계층 사람들의 천박한 탐욕을 충실히 묘사하고 있지만, 우리네 현실은 이들의 욕망은 고작 N분의 1로 나뉘는, 교도관 기봉규의 혼잣말처럼 이런 식으로 몇 달만 지나면 수두룩한 인간들에게 500원짜리 동전 하나씩 나눠줘야 할지 모르는(118)” 하찮은 욕구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돈이란 소설 속 사람들에게 생활을 영위해야 할 시급성의 문제이며, 오늘날 인간 생의 주체가 되어버린 돈에 대한 욕망의 문제 측면에서 권력과 부를 차지한 계층들이 뿜어내는 욕망의 악취와는 사뭇 다른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개발업자로부터 50억 원을 받아내곤 그 어떤 죄책감은 물론 오히려 정당한 것이라 악을 써내는 것이나, 주가 조작으로 천문학적 돈을 사취하곤 권력의 비호 속에서 유유자적하는 것에 비할 바가 되지 못한다. 허태구는 비밀 약속 이후 지속하여 교도소 내 조사계에 사실을 말하려 하거나, 실제로 돈에 대한 관심을 잃어버리고 있으며, 기봉규 또한 끊임없는 죄의식과 번민으로 혼란을 겪는다.

 

실제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의식 혹은 무의식은 이미 돈이라는 물신에 사로잡혀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없으면 불편한 것이라는 짐짓 의연함을 가장하곤 하지만 단지 불편함을 덜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삶의 목적이 되어버렸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아직은 우리가 도덕적 부패의 극한에 이른 것은 아니라고 믿는다. 어쩌면 두 주인공이 다시금 돈을 제자리에 돌려놓고 교도소 윤리책임자에게 자신들의 과실을 고백하고, 삶의 태도를 일신(一新)하는 것이 비록 애초의 계획이 공유자 증가와 비밀 누설의 위험으로 야기된 실현 불능이라는 깨달음에 의한 것일지언정, 이것은 분명 여전히 우리네에게 잔존하는 도덕적 존엄성에 대한 믿음으로 이끈다. 가지지 못한 자들의 한바탕 해프닝!

 

다시 소유권의 문제로 가보자. 소유권의 핵심 논리에는 선착순, 점유, 노동, 귀속, 상속, 자기신체소유가 있다. 인간들이 주장하는 이것은 내 것!’이라는 논리에는 이것들 말고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에 해당하지 않는 소유 논리는 모두 강탈, 착취, 사기라는 폭력성을 지닌다. 지금 한국의 현실 세계는 지배 권력의 이러한 폭력적 소유 주장이 공개적이고 죄의식 없이 자행되고 있다. 이 소설을 이렇듯 소유 권리의 측면에서 바라보면 그 주인공들이 파렴치함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들 권력 계층으로 바뀌었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비록 허구이지만 소설의 제재는 한국의 사회적 구조에서 실현 가능성이 없는, 설혹 실행되더라도 처벌을 피할 수 없는 계층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은 마치 하부 계층은 범죄의 유혹에 항상 노출된 존재라는 왜곡된 시선을 의심케 한다. 만일 이러한 돈이 지배 계급에게 발생했다면 아마 어떠한 흔적도 없이 갈취되고 말았을 것이다. 소설이 삶의 예측 불가능성과 신산한 소시민적 삶을 가로지르며 그 욕망의 원시성과 우상화된 돈 신에 굴종된 오늘을 재치 넘치는 해학과 풍자로 슬기롭게 성찰케 하고 있지만, 그 재미만큼 만끽 할 수 없었던 작은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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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과 나의 사막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43
천선란 지음 / 현대문학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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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은 교류야, 흐르는 거야. 옮겨지는 거고, 오해하는 거야.” - 133

 

 

상징과 은유와 대유(代喩)가 더욱 짙게 바로 지금 현실의 삶에 덧 씌워지는 느낌을 갖게 하는 작품이다. 위의 인용 문장은 살아 움직이는 존재들의 실체적 대면의 감정에 대한 것이지만, 오늘 SNS상에서 펼쳐지는 인간들이 하는 행위, 실체를 은폐한 익명의 존재들이 가상공간에서 벌이는 위조된 감각과 표면적으로 하등 다를 바가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들의 행위가 지닌 의미를 착각한다. 소통과 연대감, 공감의 세계가 만개했다고. 그러나 진실은 그 반대쪽을 가리키고 있지 않은가!

 

이 만개했다는 사회연결망은 그 위조된 형태만큼이나 쩍쩍 갈라진 메마른 감정, 공허함만이 휘몰아친다. 혐오, 갈등, 고립의 세계, 감정이 증발한 무관심과 공감 없는 세계만을 여실히 드러낼 뿐이다. 이러한 현실 세계의 대유일까? 소설의 배경은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인간 존재들의 막이 내리는 시대, 자신들의 탐욕에 삼켜져 버려 미생물조차 드물어진 황폐한 사막의 행성이 된 49세기의 지구다. 여기에 29세기, 전쟁의 시대에 만들어졌으나 모래사막에 파묻힌 채 2000년의 시간이 흐른 뒤 열한 살짜리 인간 에 의해 발견되어 다시 깨어난 로봇 고고가 있다.

 

소설의 첫 문장은 얄궂기 그지없다. 랑의 엔진이 꺼졌다. 아니, 심장이다. 인간은 엔진을 심장이라 부른다.” 고고에게 세상을 알려준 보호자이자 스승이며 친구, 즉 유일한 목적이었던 인간의 죽음, 그 상실로부터 출발한다. 랑을 사막의 구덩이에 묻는 의식(儀式)을 행하고, 더 이상 목적을 지닐 수 없게 된 존재의 새로운 목적, 존재의 의미를 향한 여정이 시작된다. 엔진과 심장, 이 분별이 지닌 의미의 경계는 분명한 것인가? 아니 감정이라곤 스며들 여지없어 보이는 존재에게도 그리움, 사랑, 공감의 존재로 변화가 가능한 것인지를 묻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니다. 그 변화가 가능한 것이라고 말하려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고고는 저장되어 있던 과거의 장면을 통해 랑의 얼굴과 표정, 그와 나눈 대화들과 그 것에 어우러진 몸짓, 행위들을 만나곤 한다. 우리는 타자의 얼굴을 얼마나 가까이 응시하고 있을까? 랑의 화난 얼굴. 만지고 싶다.(13)”, 일찌감치 로봇 고고의 이 감각적 표현에서 그리움을 읽게 된다. 그런데, 그리움이라는 감정은 화난얼굴조차 만지고 싶은 감정, ‘사랑을 전제로 하는 느낌이다. 느닷없이 기억 장치가 멋대로 과거를 재생하는 일이 많아지는 것을 고고는 로봇인 자신의 어찌할 수 없는 오류로 이해하려하지만 그것이 마치 그리움 같아서 흉내 내고 싶어 한다.

 

아마 고고의 사막을 걷는 여정은 이 불현듯 재생되는 랑과 함께 했던 장면들이 그에게 전해진 의미의 해석이며, 과정에서 만나게 되는 존재들, 사건들과의 마주침에서 깨우치게 되는 새로운 이해, 변화의 시간이자 의미 획득의 공간일 것이다. 로봇은 랑과 나눈 대화를 복기한다. 감정에는 효율을 따질 수 없다. 따져서는 안 된다. 절대로 그래서는 안 된다고.”, 또한 거치지 않은 감정은 지나가는 게 아니라 몸에 쌓인다.”. 그러나 로봇은 이러한 인간의 감정을 의도이자 해석의 대상이 아닌 마음의 움직임으로 이해하는 것에 동화되지 못하고, 그런 자신에 의문을 지닌다.


 


이들 대화 중에서 사막에 대한 그림과 사진의 정의는 아마 이 서사의 궁극적 언어일 것이다. 감정인 그림과 의도인 사진, 불가능의 가능으로의 변화에 대한 어떤 기대, 희망, 구원을 향한 발걸음이 될 것을. 랑을 함께 묻었던 지카가 들려준 과거로 가는 땅’, 멈추지 않는 돌풍의 시작점이 있는 드카르가 언덕 너머를 향한 걸음, 인간들이 만들어낸 헛된 희망 같은 곳, 인간을 이끄는 알 수 없는 희망의 길, 마음의 목적지를 향해서.

 

이 여정은 상실한 이들이 밟는 애도의 통과 의례를 닮아있다. 고고는 한 걸음 씩 사막의 존재자들, 그리고 사태를 만나면서 그 어떤 호소력도 무력화시키는 인간의 믿음을 지켜보고, ‘중요한 건 결과가 아닌 행위라며 자신의 조물주를 기다리는 존재에게 절망의 실체를 은닉하며, 낭설의 땅, 인간의 헛된 희망으로 만들어졌을 확률이 더 높은 땅, 랑이 기다리고 있을 과거의 땅으로 향한 걸음을 지속한다. 어쩌면 합리성을 거부하며 0.01퍼센트의 확률을 따르는 고고의 이 여정에서 이미 그가 자신의 판단 오류라 여기는 그것이 마음이고 감정임을, 자신이 바로 감정을 지닌 존재임을 부정하지 않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조가 죽은 이후 평온하던 랑을 갑자기 펑펑 울게 만드는 버튼이 내게도 있을까 봐 ...내가 무서웠고 두려웠다.(105)”는 문장에서부터 기다려도 만날 수 없다는 것이, 이 이상함을 계속 이상한 채로 품어야 한다는 것까지 전부 끈적하게 등에 달라붙는다. 낯선 감각이 든다.... 형용할 수 없는 응어리가 오색 빛깔로 내 속을 휘젓고 다니는 것만 같다.(111)”는 문장처럼 고고는 이 감정을 자기의 것으로 인정하는 데 주춤거린다.

 

이윽고 한 팔이 없어 거대한 폭풍이 머금은 물기가 스며들어 자신이 파괴되는 두려움을 무릅쓰고 드카르가의 검은 벽’, 커다란 절벽처럼 서있는 폭풍으로  걸어 들어가는 장면, 그리고 그 두려움 속에서 눈을 감고 걸어봐. 고고, 나처럼. ... 춤추면서 간다고 생각하자.”는 랑과의 대화를 되새기는 장면은 이어질 최후의 장면과 함께 메마른 내 마음에 깊은 파문을 일으킨다.

 

고고가 밟는 통과의례의 마지막 시공(時空)인 사막에 있을 수 없는 흔들리는 잎사귀가 있는 거대한 나무가 있는 곳, 수천 년간 인간의 행위를 지켜봐 온 외계행성으로부터 온 살리와의 만남으로부터, 부정하던 자신의 오류, 그것은 감정 중 가장 시효가 긴 그리움이란 것을, 느끼고 공감하는 자연스러운 그것이 바로 감정임을 받아들인다. 고고는 살리의 도움으로 망가지는 자신의 몸을 지니고 그 망가짐이 끝내는 시간이 붙잡을 수 없는 영역으로 갈 것임을 알면서도 랑을 만나기 위해, 그에게 자신이 걸어 온 사막에 대해 말하기 위해 과거로 가는 홀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장면은 속울음이 터져 나오는 감동으로 새겨진다.

 

한 존재의 떨쳐지지 않는 상실에 대한 애도의 지난한 통과의례이자, 자기감정에 대한 진솔한 승인에 이르는 성장의 이야기이도 하며, 인간을 철저하게 배제시키는 오늘의 삭막하게 메마른 인간 감정에 대한 환기의 각성이기도 하다. 또한 로봇을 비롯한 타자에 대한 구별, 그 범주화의 경계란 것이 얼마나 인간적인, 자의적인 것인가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이기도 한 이 작품은 이처럼 다층적이고 다면적인 시각에서 읽도록 하는 소설이다.

 

작가의 말처럼 삶의 목적을 잃었을 때 우리들의 삶을 다시 일으켜 세우게 하는 힘은 무엇인지를 생각게 하는 여정일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오지 않을 것임을 알면서도 실행케 하는 일견 무모해 보이는 행위일 수도 있으며, 고집스런 믿음이기도 할 것이고, 고고의 여정처럼 사랑과 그리움, 공감이라는 감정의 발견이기도 할 것이다. 어둠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치는 과거로 가는 홀에 발을 딛을 때 고고, 너는 랑을 진심으로 사랑했던 거야! 네 마음은 진짜야!”라는 살리의 목소리는 아마 그가 선택한 소멸, 목적을 위해 만들어진 존재를 향한 최고의 찬미였을 것이다. 거센 사막 폭풍조차 적막한 소리로, 그리고 잔잔하게 들려지는 랑과의 추억 속의 대화들에도 불구하고 강렬하게 전해져오는 그리움의 간절함은 작품 속으로 독자를 깊고 한없이 빨려 들어가게 한다. 잠시 이 사랑의 이야기에 멈추어 있으련다.

 

 

 

"해당 게시물은 출판사 현대문학으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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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흄세 에세이 1
알베르 카뮈 지음, 박해현 옮김 / 휴머니스트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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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는 것으로부터 마음이 달아나려 할 때면, 그 어떤 의미도 잡을 수 없는 무력감이 휘몰아칠 때면, 나는 스물네 살 청년 카뮈가 발견한 태양의 빛과 폐허 위에 피어나는 꽃들의 향취와 오색의 향연, 바다를 헤엄치는 구릿빛 싱그런 육체가 있는 생()의 찬미를 다시 꺼내든다. 카뮈의 감각과 정신이 팔딱팔딱 용솟음치는 그 젊음의 에너지를 내 안의 시들어버린 그것에 자극을 주고자하는 무의식적 요구인지 모르겠다.

 

이번에는 역자를 달리하여 결혼(Noces)을 읽는다. “봄철에 티파사에는 신들이 내려와 산다.(김화영 번역, 책세상 出刊 카뮈전집에서)” 는 정적(靜的)이고 건조하다. 반면 박해현의 새로운 번역은 봄이 오면 티파사(Tipasa)에는 신()들이 강림해서 수런거린다.” 며 어떤 왁자지껄함과 함께 동적 활력이 느껴진다. 내가 느끼고자하는 감각에 조응한다. 단지 새 번역본을 선택한 이유는 그뿐이다. 독자 저마다 취향의 문제일 것이다.

 

결혼을 구성하는 네 편의 에세이는 알제리 북부와 북서부 지중해 연안 도시인 티파사, 제밀라, 알제와 이탈리아 피렌체를 배경으로 삶과 육체에 대한 철저한 응시, 그리고 유한성에 대한 그득한 충만을 노래한다. 그래, 그 일회성이 지닌 그냥 떠내버릴 수 없는 간절함이 응축된 시선이 대지와 하늘 사이의 지상을 가득 채워 홀린 듯 상상의 그곳을 바라보게 된다.

 

푸른 지중해를 바라보는 티파사의 고대 로마 유적지, 폐허와 봄의 결혼(13)”, 폐허의 잔해를 지워버리며 자연으로 회귀하는 장밋빛 부겐빌레아와 붉은 빛 히비스커스, 하늘에서 내려오는 빛살, ‘치열(齒列)이 찬란한 파도의 미소는 폐허를 사물의 중심으로  데려간다. 야생의 향내, 하늘의 참을 수 없는 장엄함에 두 눈과 가슴을 활짝 열어젖힌 젊음을 보며 나는 그 화사한 생명의 에너지에 도취된다. 카뮈는 마음껏 삶을 사랑하며, 인간 조건에 대한 자긍심을 외친다.

 

온몸으로 살아가고, 온 마음으로 증언한다면 나는 더 바랄 나위가 없다.

티파사를 살고 증언하라.... 거기에 자유가 있다.” - 20

 

하늘의 찬란한 미소에 공모의 미소를 던지는 종족’, 이 종족에 합류하고 싶은 욕망이 솟구친다. 조화와 침묵, 만끽한 기쁨과 고독...

 

해발 900미터 바위투성이 고지, 바람에 닦여 영혼까지 너덜너덜하게 만드는 삭막한 찬란함이 부는 제밀라의 바람에 이르면 죽음을 껴안고 되찾는 젊음(34)”, 운명을 정면으로 마주할 줄 알았던 고대인의 순수와 진실을 직시케 된다. 문명의 참되고 유일한 진보란 스스로 의식하는 죽음의 창조, 우리네 자신과 세상을 분리하는 간격을 줄임으로써 어떤 완전체로 틈입하게 되는 쓰디쓴 가르침을 새삼스레 받아들여야 함을 확인한다. 죽음의 자명성, 그 절망의 참된 낯빛을 앎으로써 집착의 노쇠함을 벗어던지고 젊음의 생에 전념하는 기쁨을 나는 어설프게나마 되찾는다.

 

나는 알제의 여름을 제일 좋아한다. 순수한 관능과 극빈의 삶, 유치한 허영이 뛰노는 곳, 청춘을 잃고 난 뒤 찾아오는 멜랑콜리를 치유할 길 없는 장소여서 열정을 불태우는 젊음이 마구 방출되는 도시이기에, 내 정신의 감각은 이 에세이를 즐겨 찾도록 이끈다. 자긍심과 삶을 위해 태어난 알제의 사람들, 하늘과 바다를 겹으로 두른 조가비같은 파도바니의 해변 댄스홀’, 꽃과 살이 뒤섞인 잔향을 남긴 채 머리를 뒤로 젖힌 채 웃는 어느 아가씨가 있고, 흰색 집 벽에 내리 꽂는 강렬한 햇살과 대비되어 더욱 선명해진 황금빛 육체를 한 갈색 야수들에 동지애를 느낀다.

 

일생은 쌓아가는 게 아니라 불태우는 것이다....

지옥의 개념은 이곳에서 앙증맞은 농담일 뿐이다.” - -51

 

뻔 한 문장이 있는 영화관 박하사탕의 교환으로 평생의 인연이 맺어지는 그 서투름과 순수가 있는 곳, 단순 명쾌한 기본 계율 몇 줄이면 더 이상의 도덕이 필요치 않는 곳, 죽음의 민낯을 드러내는 묘지의 담장 밑에서 밀회를 즐기고 입맞춤과 애무가 있는 곳, 태양의 숨찬 맥박과 영혼의 고향을 재발견하는 곳, 삶의 부조리를 거역하지 않는 사람들이 죽음의 준엄한 위대함을 회피하지 않는 충만한 삶의 향기가 있는 이 글은 음울한 구석을 맴돌던 마음에 찬란한 생의 기운을 마구 퍼부어준다.

 

이탈리아 피렌체의 여행기이기도 한 사막은 카뮈의 인생 내내 진행되었던 반항하는 인간의 싹이 움트고 있음을 발견케 되는 산문이기도 하다.

 

살아있는 로렌초가 비록 장미꽃 나무를 곁에 두고 있더라도 땅에 묻힌 

로미오보다 낫다.” -74

 

셰익스피어 베니스의 상인에 등장하는 샤일록의 딸 제시카의 연인 로렌초가 연인 줄리엣을 두고 죽은 로미오보다 낫다는 이 말처럼 카뮈의 신념을 대변하는 말은 없을 것 같다. 이것은 망자들의 덕행을 기리는 수도원 무덤 평석위에서 개구리뜀 놀이를 하는 아이들처럼 죽음의 표식들이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해와 함께 떠올라 함께 지는 것일 뿐이다.

 

종교와 시학, 삶의 열정에 덧씌워진 우스꽝스런 탈바가지라는 관념적 추상의 공허함을 깨부수고, 지금 여기, 살아있는 현재에 대한 유일한 진실성, 그 구체적 감각, 실존성을 외친다. 그래서 카뮈는 말한다. 신들이 비우고 떠나버린 그 거대한 사원에서 모든 우상, 겉만 번지르르한 관념과 형이상학의 세계는 허물어지리라고. 사막? 갈증을 달래지 않은 채 살 수 있는 인간만이 살 수 있는 곳이다. 불멸, 영원, 내세... , 나는 애초 이런 희망이란 지녀 본적도 없다. 진리란 제 안에 쓴 맛을 지니기 마련이라고 한다. 희망의 부재, 이 부정이야말로 긍정의 꽃 피어남, 삶의 기쁨을 내포하고 있음을, 정신은 육체에서 존재의 근거를 찾고 있는 옛 동지를 이렇게 함께한다.

 

분열과 혐오가 횡행하는 이 불온한 세상과 더불어 어느 사이엔가 차가워진 쓸쓸한 기운이 새삼 회색빛 음울을 더욱 깊어지게 한다. 이 쌀쌀맞은 고독을 차버리고 싶을 때, 향기로운 생명으로 가득 찬 카뮈의 충만한 고독, 외롭지 않은 고독, 오렌지 꽃향기 속 정오의 침묵, 알제의 여름으로 들어간다. 끓어오르는 티파사의 햇살과 알제의 지중해 바다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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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운명 사용설명서 - 사주명리학과 안티 오이디푸스
고미숙 지음 / 북드라망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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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사는 사람들 모두 아프다고 한다. 왜 모두들 이렇게 자기 아픔을 쓰다듬어 달라고 아우성일까? 자기 연민, 자기애를 말하며, 자신을 우선 사랑하라는 주술이 난무한다. 그런데 이러한 처방들은 모두 고통의 원인이 자기 외부로 인해 발생한 것이니, 그 외부를 차단하고 당신 자신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과연 이 말이 진실일까? 진짜 원인은 무엇인지 탐색, 사유하지 않고 그저 문제의 원인은 세상, 타자의 탓이라는 진단이 맞긴 한 것일까?

 

사실 우리들이 사는 이 세계는 사람들의 욕망을 자본이라는 화폐로 가치를 단일화한 사회라 할 수 있다. 모든 가치를 먹어치우는 단 하나의 척도인 화폐! 이렇게 세상 만물의 척도가 균질(均質)화되어 버렸으니 이에 갇힌 사람들이 안 아픈 것이 오히려 이상한 것이라 할 테다. 그러니 효, 우정, 의리, , 유대감과 같은 비효율적이고 애매한 가치들은 명확한 가치인 자본에 한 방에 사라져 버렸다. 다양성과 자율성을 외치며 SNS시대가 만개하여 개인들의 타자와의 관계가 확대 된 듯하지만 속사정은 오히려 고립과 불안이 심화되고, 삶의 방향도 목적도 상실한 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알지 못하는 무지가 판치는 극심한 고립무원의 세계가 펼쳐지고 있다.

 

욕망들이 카오스처럼 들끓는 우주적 충동으로 가득한 인간의 무의식, 예측 불가능하고 측량 불가능한 가치들의 유동적 흐름인 인간이 이렇게 하나의 가치에 묶여 버렸으니 그 고통을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겠는가?  이제라도 존재 전체가 화폐를 닮은 이러한 표상으로부터 벗어나, ‘란 무엇인지, 나는 어떻게 살 수 있는 존재인지를 파악해야 한다.

 

부여된 인생의 지도에 표기된 운명의 지표를 읽어내는 것, 그 앎으로부터 내 몸과 마음의 행로를 어떻게 조율할 것인지를 아는 것, 즉 자신을 둘러싼 욕망의 배치를 아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나를 파악한다는 일은 결코 수월한 일이 아니다. 그래서 나를 알 기 위한 수단들이 일찍이 무수하게 출현했다. 별자리를 통한 점성술로부터 그 흔한 타로카드 점에 이르기까지. 이 책은 를 알기 위한 도구로 음양오행이라는 개념적 도구를 통해 우주적 비전을 탐구하는 앎의 체계’”인 사주명리(四柱命理)를 그 지표로 삼자고 한다.

 

운명을 안다는 것은 필연지리(必然之理)를 파악함과 동시에 내가 개입할 수 있는 당연지리(當然之理)의 현장을 확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42

 

라는 존재에 새겨진 운명을 아는 것, 내 존재를 우주적 인과 속에서 보는 삶의 기술로 내 팔자(八字)를 알고, 그것을 통해 결여되었거나 극복되어야 하는 것, 그리고 함께 해야 되는 가치들을 살펴보는 것이다. 팔자가 사납다거나, 내 팔자는 어찌 이렇게 지랄 맞을까를 한탄하는 바로 그 팔자의 의미를 알아보자는 것이다. 팔자는 토끼띠, 돼지띠 하는 12개 지지(地支)인 자축인묘진사오미신유술해(子丑寅卯辰巳午未申酉戌亥)와 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甲乙丙丁戊己庚辛壬癸) 열 개의 천간(天干)으로부터 자신이 태어난 년,,,시의 천간과 지지를 배열한 여덟 자 이다. 그것을 2011년 신묘년 5월 계사월 을축일 갑신시에 태어난 사람의 팔자를 표기하면 아래의 그림과 같이 표기할 수 있게 된다



85쪽 부분 발췌

 

 

이것이 바로 우리네 존재의 여덟 개 시크릿(secret) 카드다. 내 존재의 매트릭스! 여기에 운명의 비의(秘義)가 가능태로 잠재하고 있어 이것이 내 인생 행로를 드러내 주고 있다. 천간과 지지에서 내 것에 해당하는 것들은 저마다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또한 이 문자들은 결코 홀로 특성을 견지하는 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 관계성, 조금 어려운 말로하면 차서(次序), 즉 시간과 공간적 리듬에 따른 변화와 상생과 상극의 관계성에 의존한다. 이 책은 그야말로 초식(初識)에 불과한 가르침을 제공한다. 그렇다고 독자가 사주명리학의 전문가가 되려는 것이 아닌 이상 이 정도의 안내면 그 기본을 알고 간략한 자기 앎의 토대를 마련 할 수 있을 것이다.

 

천간의 오행은 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 지지의 오행은 자인묘사오신유(진한 글자는 토) 목에서 시작해 화토금수로 진행된다. 이렇게 오행으로 팔자를 분류하고 해석하는 것인데, 우측에서 세 번째 칸에 있는 문자를 일주(日柱)라 하고 천간에 있는 것을 일간(日干)이라 하며, 이것이 존재의 근원을 찾아가는 기준점 역할을 한다고 한다. 그 해석을 나열하는 것은 책에 미루자.

 

목화토금수가 골고루 나와 균형을 맞춘 팔자면 좋겠건만 몇 개의 오행에 치우쳐 나온다. 저자는 이렇게 어느 쪽으로 치우치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한다. 이 치우침을 기꺼이 감내한 존재들이어서 세상에 출생한 것이란다. 만일 완전하게 갖추어진 존재라면 태어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하기 까지 한다. 팔자가 사납게 나왔다고 결코 한탄하고 운명을 포기할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팔자에도 조커가 있단다. 지장간(地藏干)이라 부르는 것으로 땅에 비추어진 하늘의 기운이란 것인데, 이것이 지지에 숨어있다. 내 팔자에 없던 오행이 여기에 숨어있다. 삶의 국면 전환에 요긴하게 꺼내 쓸 수 있는 비장의 카드다.


 


사람은 자기 운명을 극복해 나가는 존재다. 자신을 구성하고 있는, 바로 나의 존재를 이렇게 인지함으로써 그 부족과 과잉을 살피고, 자신이 지니고 있는 상생과 상극의 오행을 재배치하여 자기 주도적 삶의 운영을 가능케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자기 팔자의 생극(生克)적 흐름에 부여된 사회적 표상을 십신이라 하는 데, ‘비겁,식상,재성,관성,인성을 양과 음으로 하여 열 개다. 이렇게 구분하면 자신이 가지고 있지 못하거나 많이 지니고 있는 것을 파악할 수 있게 된다.

 

내 팔자를 배열하고 보니 식상, 즉 먹을 복, ()복이 아예 없다. 그리고는 비겁과 인성에 치우쳐 있다. 오행의 한 행이 결여되어 있으니 순탄한 순환이 되지 않는다. 내 운명에는 이 부족이 새겨져 있다. 다행스럽게도 내 일간의 지장간에 화()가 두 개 숨어있다. 어설프게나마 이해하고 보니 어떻게 명()을 운전(運轉)해야 하는지 어렴풋 방향을 설정할 수 있게 된다. 비겁은 자아 관념이 강하단다. 인성은 공부, 어머니에 친화적이란다. 나는 ()’가 무려 세 개나 된다. 그러니 인성에 고립되어있는 모양새다, 게다가 고집 센 목()기가 두 개이니 그리 순탄한 인생이 아니라고 할 것이다.

 

사회적 표상인 십신은 다섯 범주의 순환이다. 순환이 막혀버려 식상이 없다보니 비겁에서 건너 뛰어 재성으로 가야하는데 그것이 쉽지 않다. 재성으로 가기가 장애이니 관성 또한 아득하다. 그런데 그렇게 고통스러움을 느끼는 삶을 살았던 것은 아니다.

 

어쩌면 모든 사회적 표상이 재성으로 향하고 있는 세계와 한 걸음 떨어져 있었던 덕택이 아닌지 모를 일이다. 자신의 모든 운명을 재성이나 관성에 집중하기 위해 애면글면 하는 삶들로 많은 사람들이 괴로워하지 않던가. 이 책은 단순히 사주명리를 알려주는 안내 책자가 아니다. 자본이란 척도로 단일화되어 획일화된 욕망으로부터 어떻게 탈주하여 새로운 삶을 재편성 할 수 있는지, 삶의 운전을 어떻게 할지에 대한 자기 성찰을 촉구하는 인문학적 비판에 가깝다.

 

우리의 무의식은 우주적 충동으로 가득하다. 그것은 결코 가족적이지 않다.

사회적이며 역사적이고 초역사적이다.” -201

 

우리 모두들 왜 그렇게 마음이 다쳤다고, 몸이 아프다고 하는가에 대한 물음에서 시작했다. 소위 정상성이라는 틀에 묶여 있는 균질화된 척도에 갇혀있기 때문이다. 교환의 차원에 만들어진 화폐, 재성에 갇혀 비겁도 인성도, 관성도 없는 삶에 매몰된 집착이 붙어 일으킨 질병들이다. 인간관계도, 직장. 사회와 정치적 제도 등과의 관계, 자아의 단단한 확립이 모두 미숙한 채 자본이란 하나의 가치에 집중된 삶이 야기한 것이란 지적이다.

 

더구나 모두들 핵가족의 스위트 홈이라는 자본 증식의 전초기지화 된 망상에 자기 영토를 내어 줌으로써, 스스로 자신들의 욕망을 균질화된 방에 가둬 버렸다는 것이다. 이 닫힌 회로를 정상성이라고 부른다. 이를 이탈하면 비정상이 되는 세상이다보니 모두들 아픈 것이 당연한 귀결이란 얘기이다. 이러하다보니 우주적 가치를 지닌 사람의 몸에 새겨진 비의가 견고하게 작동되는 자본의 세계라는 덫에서 탈주하기는커녕 드러나지도 못하는 까닭이라 할 수 있다.

 

고통과 번뇌로 좌절하고 포기하는 삶의 쓰라린 기억에 노출된 우리네에게 그 인과를 발견하고, 숙명론을 벗어나 운명에 대한 비전 탐구, 적극적인 자기 삶의 운전자가 되고자 한다면 이 책은 분명 운명의 눈부신 도움닫기가 되어 줄 터이다. 유사이래, 무지와 평화가 손잡은 적이 한 번도 없다고 한다. 앎이라는 지혜, 그 깨달음의 영역으로 나아가기 위해 낡아빠져 진부해진 사유의 지평을 깨고 새로운 경계로 향하는 배움, 그 창조의 기예로 가득한 저작이다. 그래, 아는 만큼 걷고, 걷는 만큼 즐길 수 있는 것이 삶이다. 오직 자신만이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는 이 뻔 한 말을 실천하는 그 첫걸음을 함께해 줄 수 있는 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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