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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운명 사용설명서 - 사주명리학과 안티 오이디푸스
고미숙 지음 / 북드라망 / 2022년 9월
평점 :
오늘을 사는 사람들 모두 아프다고 한다. 왜 모두들 이렇게 자기 아픔을 쓰다듬어 달라고 아우성일까? 자기 연민, 자기애를 말하며, 자신을 우선 사랑하라는 주술이 난무한다. 그런데 이러한 처방들은 모두 고통의 원인이 자기 외부로 인해 발생한 것이니, 그 외부를 차단하고 당신 자신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과연 이 말이 진실일까? 진짜 원인은 무엇인지 탐색, 사유하지 않고 그저 문제의 원인은 세상, 타자의 탓이라는 진단이 맞긴 한 것일까?
사실 우리들이 사는 이 세계는 사람들의 욕망을 자본이라는 화폐로 가치를 단일화한 사회라 할 수 있다. 모든 가치를 먹어치우는 단 하나의 척도인 화폐! 이렇게 세상 만물의 척도가 균질(均質)화되어 버렸으니 이에 갇힌 사람들이 안 아픈 것이 오히려 이상한 것이라 할 테다. 그러니 효, 우정, 의리, 정, 유대감과 같은 비효율적이고 애매한 가치들은 명확한 가치인 자본에 한 방에 사라져 버렸다. 다양성과 자율성을 외치며 SNS시대가 만개하여 개인들의 타자와의 관계가 확대 된 듯하지만 속사정은 오히려 고립과 불안이 심화되고, 삶의 방향도 목적도 상실한 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알지 못하는 무지가 판치는 극심한 고립무원의 세계가 펼쳐지고 있다.
욕망들이 “카오스처럼 들끓는 우주적 충동으로 가득한 인간의 무의식, 예측 불가능하고 측량 불가능한 가치들의 유동적 흐름”인 인간이 이렇게 하나의 가치에 묶여 버렸으니 그 고통을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겠는가? 이제라도 존재 전체가 화폐를 닮은 이러한 표상으로부터 벗어나, ‘나’란 무엇인지, 나는 어떻게 살 수 있는 존재인지를 파악해야 한다.
부여된 인생의 지도에 표기된 운명의 지표를 읽어내는 것, 그 앎으로부터 내 몸과 마음의 행로를 어떻게 조율할 것인지를 아는 것, 즉 자신을 둘러싼 욕망의 배치를 아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나를 파악한다는 일은 결코 수월한 일이 아니다. 그래서 나를 알 기 위한 수단들이 일찍이 무수하게 출현했다. 별자리를 통한 점성술로부터 그 흔한 타로카드 점에 이르기까지. 이 책은 ‘나’를 알기 위한 도구로 “음양오행이라는 개념적 도구를 통해 우주적 비전을 탐구하는 ‘앎의 체계’”인 사주명리(四柱命理)를 그 지표로 삼자고 한다.
“운명을 안다는 것은 필연지리(必然之理)를 파악함과 동시에 내가 개입할 수 있는 당연지리(當然之理)의 현장을 확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42쪽
‘나’라는 존재에 새겨진 운명을 아는 것, 내 존재를 우주적 인과 속에서 보는 삶의 기술로 내 팔자(八字)를 알고, 그것을 통해 결여되었거나 극복되어야 하는 것, 그리고 함께 해야 되는 가치들을 살펴보는 것이다. 팔자가 사납다거나, 내 팔자는 어찌 이렇게 지랄 맞을까를 한탄하는 바로 그 팔자의 의미를 알아보자는 것이다. 팔자는 토끼띠, 돼지띠 하는 12개 지지(地支)인 자축인묘진사오미신유술해(子丑寅卯辰巳午未申酉戌亥)와 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甲乙丙丁戊己庚辛壬癸) 열 개의 천간(天干)으로부터 자신이 태어난 년,월,일,시의 천간과 지지를 배열한 여덟 자 이다. 그것을 2011년 신묘년 5월 계사월 을축일 갑신시에 태어난 사람의 팔자를 표기하면 아래의 그림과 같이 표기할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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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85쪽 부분 발췌】
이것이 바로 우리네 존재의 여덟 개 시크릿(secret) 카드다. 내 존재의 매트릭스! 여기에 운명의 비의(秘義)가 가능태로 잠재하고 있어 이것이 내 인생 행로를 드러내 주고 있다. 천간과 지지에서 내 것에 해당하는 것들은 저마다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또한 이 문자들은 결코 홀로 특성을 견지하는 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 관계성, 조금 어려운 말로하면 차서(次序), 즉 시간과 공간적 리듬에 따른 변화와 상생과 상극의 관계성에 의존한다. 이 책은 그야말로 초식(初識)에 불과한 가르침을 제공한다. 그렇다고 독자가 사주명리학의 전문가가 되려는 것이 아닌 이상 이 정도의 안내면 그 기본을 알고 간략한 자기 앎의 토대를 마련 할 수 있을 것이다.
천간의 오행은 갑을(목)병정(화)무기(토)경신(금)임계(수), 지지의 오행은 자축인묘진사오미신유술해(진한 글자는 토) 목에서 시작해 화토금수로 진행된다. 이렇게 오행으로 팔자를 분류하고 해석하는 것인데, 우측에서 세 번째 칸에 있는 문자를 일주(日柱)라 하고 천간에 있는 것을 일간(日干)이라 하며, 이것이 존재의 근원을 찾아가는 기준점 역할을 한다고 한다. 그 해석을 나열하는 것은 책에 미루자.
‘목화토금수’가 골고루 나와 균형을 맞춘 팔자면 좋겠건만 몇 개의 오행에 치우쳐 나온다. 저자는 이렇게 어느 쪽으로 치우치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한다. 이 치우침을 기꺼이 감내한 존재들이어서 세상에 출생한 것이란다. 만일 완전하게 갖추어진 존재라면 태어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하기 까지 한다. 팔자가 사납게 나왔다고 결코 한탄하고 운명을 포기할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팔자에도 조커가 있단다. 지장간(地藏干)이라 부르는 것으로 땅에 비추어진 하늘의 기운이란 것인데, 이것이 지지에 숨어있다. 내 팔자에 없던 오행이 여기에 숨어있다. 삶의 국면 전환에 요긴하게 꺼내 쓸 수 있는 비장의 카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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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자기 운명을 극복해 나가는 존재다. 자신을 구성하고 있는, 바로 나의 존재를 이렇게 인지함으로써 그 부족과 과잉을 살피고, 자신이 지니고 있는 상생과 상극의 오행을 재배치하여 자기 주도적 삶의 운영을 가능케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자기 팔자의 생극(生克)적 흐름에 부여된 사회적 표상을 십신이라 하는 데, ‘비겁,식상,재성,관성,인성’을 양과 음으로 하여 열 개다. 이렇게 구분하면 자신이 가지고 있지 못하거나 많이 지니고 있는 것을 파악할 수 있게 된다.
내 팔자를 배열하고 보니 식상, 즉 먹을 복, 말(言)복이 아예 없다. 그리고는 비겁과 인성에 치우쳐 있다. 오행의 한 행이 결여되어 있으니 순탄한 순환이 되지 않는다. 내 운명에는 이 부족이 새겨져 있다. 다행스럽게도 내 일간의 지장간에 화(火)가 두 개 숨어있다. 어설프게나마 이해하고 보니 어떻게 명(命)을 운전(運轉)해야 하는지 어렴풋 방향을 설정할 수 있게 된다. 비겁은 자아 관념이 강하단다. 인성은 공부, 어머니에 친화적이란다. 나는 ‘수(水)’가 무려 세 개나 된다. 그러니 인성에 고립되어있는 모양새다, 게다가 고집 센 목(木)기가 두 개이니 그리 순탄한 인생이 아니라고 할 것이다.
사회적 표상인 십신은 다섯 범주의 순환이다. 순환이 막혀버려 식상이 없다보니 비겁에서 건너 뛰어 재성으로 가야하는데 그것이 쉽지 않다. 재성으로 가기가 장애이니 관성 또한 아득하다. 그런데 그렇게 고통스러움을 느끼는 삶을 살았던 것은 아니다.
어쩌면 모든 사회적 표상이 재성으로 향하고 있는 세계와 한 걸음 떨어져 있었던 덕택이 아닌지 모를 일이다. 자신의 모든 운명을 재성이나 관성에 집중하기 위해 애면글면 하는 삶들로 많은 사람들이 괴로워하지 않던가. 이 책은 단순히 사주명리를 알려주는 안내 책자가 아니다. 자본이란 척도로 단일화되어 획일화된 욕망으로부터 어떻게 탈주하여 새로운 삶을 재편성 할 수 있는지, 삶의 운전을 어떻게 할지에 대한 자기 성찰을 촉구하는 인문학적 비판에 가깝다.
“우리의 무의식은 우주적 충동으로 가득하다. 그것은 결코 가족적이지 않다.
사회적이며 역사적이고 초역사적이다.” -201쪽
우리 모두들 왜 그렇게 마음이 다쳤다고, 몸이 아프다고 하는가에 대한 물음에서 시작했다. 소위 ‘정상성’이라는 틀에 묶여 있는 균질화된 척도에 갇혀있기 때문이다. 교환의 차원에 만들어진 화폐, 즉 ‘재성’에 갇혀 비겁도 인성도, 관성도 없는 삶에 매몰된 집착이 붙어 일으킨 질병들이다. 인간관계도, 직장. 사회와 정치적 제도 등과의 관계, 자아의 단단한 확립이 모두 미숙한 채 자본이란 하나의 가치에 집중된 삶이 야기한 것이란 지적이다.
더구나 모두들 핵가족의 ‘스위트 홈’이라는 자본 증식의 전초기지화 된 망상에 자기 영토를 내어 줌으로써, 스스로 자신들의 욕망을 균질화된 방에 가둬 버렸다는 것이다. 이 닫힌 회로를 정상성이라고 부른다. 이를 이탈하면 비정상이 되는 세상이다보니 모두들 아픈 것이 당연한 귀결이란 얘기이다. 이러하다보니 우주적 가치를 지닌 사람의 몸에 새겨진 비의가 견고하게 작동되는 자본의 세계라는 덫에서 탈주하기는커녕 드러나지도 못하는 까닭이라 할 수 있다.
고통과 번뇌로 좌절하고 포기하는 삶의 쓰라린 기억에 노출된 우리네에게 그 인과를 발견하고, 숙명론을 벗어나 운명에 대한 비전 탐구, 적극적인 자기 삶의 운전자가 되고자 한다면 이 책은 분명 운명의 눈부신 도움닫기가 되어 줄 터이다. 유사이래, 무지와 평화가 손잡은 적이 한 번도 없다고 한다. 앎이라는 지혜, 그 깨달음의 영역으로 나아가기 위해 낡아빠져 진부해진 사유의 지평을 깨고 새로운 경계로 향하는 배움, 그 창조의 기예로 가득한 저작이다. 그래, 아는 만큼 걷고, 걷는 만큼 즐길 수 있는 것이 삶이다. 오직 자신만이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는 이 뻔 한 말을 실천하는 그 첫걸음을 함께해 줄 수 있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