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우주먼지인 '나'들을 인정치 못하는 무수한 아무개들은 마치 특별한 존재나 되는 양 거드름을 피운다. 자신이 무엇인지를 알아채지 못한 존재는 끝없이 아무를 쫓는다. 영속해야만 존재할 수 있는 자본주의의 환영을 실재라 믿는 우매함이란..., 시인은 그래서 반성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현실의 식탁과 보이는 식탁과 보여지고 싶은 식탁 사이
품위 있게 드러내기의 기술 등급에 관하여
관음과 노출 사이 수많은 가면을 가진 신체에 관하여
곁에 있는 것 같지만 곁을 내줄 수 없는 곁에 관하여
비교가 천형인 네트에서 우울에 빠지지 않기 위해 지불해야 하는 노력에 관하여
- 詩 「일반화된 순응의 체제3 ; 아무렇지 않은 아무의 반성들」中에서
사랑을 아는 시인은 그래서 이렇게 노래한다. 티끌인걸 알게되면 유랑의 리듬이 생긴다고, 그리고 서로를 알아챈 티끌들은 그 알아챔의 근사한 사건을 축복한다. 이 티끌들에게 일어나는 우연한 만남은 "가끔 유난히 아름다운 탄생의 문양(「천문의 즐거움」中에서)"을 만들어낸다. 마르크스의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들」을 생각나게 한다. 수직으로 낙하하던 원자의 무한히 작은 편의에 의한 마주침의 유발, 즉 인간의 본질은 '사회적 관계의 앙상블'이란 구절이.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역사는 시야에서 증발되어버리고 말 것이라는 지적이리라. 대체 사랑할 줄 모르는 존재가 무엇을 할 수 있다는 말이겠는가!
그렇기에 시인은 '오늘은 없는 날'을 꿈꾸는지 모르겠다. "말 많고 현란한 매체들, 돈이든 권력이든 세력 불리는 일에 중독된 사람들, (...) 조용히, 더 조용히 오늘은 없는 날(「오늘은 없는 날」中에서)"이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