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분의 1은 비밀로 넥서스 경장편 작가상
금성준 지음 / &(앤드)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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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을 만들 때에는 누구에게나 전략이란 있는 법이다. 어디선가 비집고 나타나는 쥐새끼들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우산을 챙기지 않은 날 퇴근시간만 되면 비가 내리는 것처럼, 소설은 한바탕 회오리가 몰아치듯 그 익살과 해학이 궁박한 인간들의 몸과 마음을 헤집어대며 휩쓸고 지나가는 해프닝, 아니 그렇기에는 조금은 아프다. 가진 자들의 교활함과 후안무치가 버젓이 활개치는 이 세계에서는.

 

소설 속 루저들이 발설하는 그 유치찬란하고 몽매한 말들과 행위에 웃고, 이기적 욕망이 발산하는 그 인간적 비열함과 탐욕스러움에 수긍하며, 책장을 휘리릭 넘기게 하는 생생한 교도소의 풍경과 그네들의 일상이 빚어내는 코믹함을 통과하고, 책장을 덮을 즈음에는 어느덧 어지럽게 뒤섞인 소시민적 욕망의 민낯을 통해 돈에 영혼을 빼앗긴 우리네 초상을 들여다보는 자신을 발견케 된다. 소설은 수용자의 영치품을 담당하는 교도관의 미실현 독직(瀆職)범죄를 다루고 있다.

 

이야기는 군더더기 없이 일사천리로 달려 나간다. 어느 날 교도소에 수감되었던 김대식이라 알려진 노인이 사망했다. 그가 입소 할 때부터 애착을 보이던 캐리어에는 5만 원 권이 100장씩 묶여진 돈다발 9억 원이 가득 채워져 있다. 이제 이 돈의 임자가 사라진 것이다. 김대식에게는 피붙이도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고, 이 돈에 대해서 아는 자가 없는 듯하다. 영치품 창고 관리 담당자인 교도소 하급관리인 8급 교사 기봉규와 허태구는 매일 조금씩 밖으로 빼내 절반 씩 나누어 가지기로 둘 만의 비밀 약속을 한다. 소설은 이 궁박한 인간들을 통해 자기 삶의 주체자로서 거듭 나는 도덕적 성장의 여정을 담아내고 있지만 나는 조금은 다른 오독(誤讀)을 시작해야겠다.

 

내게 떠오른 생각은 임자 없다고 여겨진 땅을 발견한 미국인들이 이것은 내 땅이라고 선언하던 시대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먼저 본 놈이 임자라는 말에 대한 것이다. 즉 최초의 소유권 주장의 논리이다. 그런데 이 자기 소유를 주장하는 논리에는 무수한 원칙이 있다. 우스개 소리로 아주 어린 아이들, 유아들이 외치는 소유권 주장 원칙들인데, ‘내가 먼저 봤으면 내 것이다.’부터, ‘내 맘에 들면 내 것이다’, ‘내 손에 있으면 내 것이다.’, ‘내가 빼앗았으면 내 것이다.’, ‘좀 전 까지 나한테 있었으면 내 것이다.’, ‘내 것이면 누가 뭐래도 남게 아니다.’ 등등이다. 사실 유아들의 이러한 자기 소유권 주장의 행동은 어른이 된다고 그 본질이 바뀌지 않는다. 기와 허가 나눠 갖기로 했던 이 비밀스런 계획은 여지없이 허물어지는 데, 이 돈을 두고 무수한 자기 소유 주장자들이 등장하는 것이다.

 

죽은 김대식의 감방 동료인 범죄 조직 우두머리 출신의 수감자 어금니부터, 이들의 말을 엿들은 교도소 교위 오용수’, 기봉규와 그의 아내 말을 엿들은 처남과 그 애인, 이들이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벌인 굿 무당과 북채잡이에 이르기까지 유아들이 외치는 원시적 욕망의 논리를 내세우며 자기 몫을, 또는 온통 자기 것임을 주장한다. 그런데 공유지의 재난이란 것이 있지 않은가? 결국 돈의 소유에 대한 권리자가 늘어나는 것, 즉 비밀의 공유자가 늘어나면서 이를 지킬 의무는 사라지고 말며, 그것은 곧 비밀의 붕괴, 다시 말해 애초의 전략은 날아가 버리고, 궁극적으로 그들은 아무것도 손에 쥘 수 없게 되는 것, 이미 도착지가 보이는 쓸 데 없는 짓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기와 허, 삶의 궁지에 몰려 일상이 늪에서 허우적대는 느낌을 떨쳐낼 수 없는 두 사람에게 이 돈은 그들의 발목을 잡았던 삶의 질곡(桎梏)을 떨쳐내고 새로운 인생설계가 가능한 매혹적인 신의 선물처럼 여겨졌을 터이다. 이러한 삶의 배경은 이들에게 비밀이 유지되리라는 믿음, 망자의 캐리어에 대한 의혹의 눈길이 얼마나 많은지에 대한 기만적이기까지 한 무지를 보이지 않게 하며, 따라서 소유권리의 그 원시성, 공유지의 무책임이 지닌 태생적 실패의 논리성을 그대로 따르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고 여겨진다.

 

임자 없는 돈이라고 여겨지는 순간, 이 원시적 욕망이 인간들의 본성을 깨운다. 물론 소설 속 등장인물들은 하급 교도관, 수감된 조폭 두목, 빈둥거리며 처남부부에 기생하는 룸펜, 이들을 기만, 위협하며 몫을 주장하는 무당 무리에 이르기까지 사회 하부 계층 사람들의 천박한 탐욕을 충실히 묘사하고 있지만, 우리네 현실은 이들의 욕망은 고작 N분의 1로 나뉘는, 교도관 기봉규의 혼잣말처럼 이런 식으로 몇 달만 지나면 수두룩한 인간들에게 500원짜리 동전 하나씩 나눠줘야 할지 모르는(118)” 하찮은 욕구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돈이란 소설 속 사람들에게 생활을 영위해야 할 시급성의 문제이며, 오늘날 인간 생의 주체가 되어버린 돈에 대한 욕망의 문제 측면에서 권력과 부를 차지한 계층들이 뿜어내는 욕망의 악취와는 사뭇 다른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개발업자로부터 50억 원을 받아내곤 그 어떤 죄책감은 물론 오히려 정당한 것이라 악을 써내는 것이나, 주가 조작으로 천문학적 돈을 사취하곤 권력의 비호 속에서 유유자적하는 것에 비할 바가 되지 못한다. 허태구는 비밀 약속 이후 지속하여 교도소 내 조사계에 사실을 말하려 하거나, 실제로 돈에 대한 관심을 잃어버리고 있으며, 기봉규 또한 끊임없는 죄의식과 번민으로 혼란을 겪는다.

 

실제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의식 혹은 무의식은 이미 돈이라는 물신에 사로잡혀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없으면 불편한 것이라는 짐짓 의연함을 가장하곤 하지만 단지 불편함을 덜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삶의 목적이 되어버렸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아직은 우리가 도덕적 부패의 극한에 이른 것은 아니라고 믿는다. 어쩌면 두 주인공이 다시금 돈을 제자리에 돌려놓고 교도소 윤리책임자에게 자신들의 과실을 고백하고, 삶의 태도를 일신(一新)하는 것이 비록 애초의 계획이 공유자 증가와 비밀 누설의 위험으로 야기된 실현 불능이라는 깨달음에 의한 것일지언정, 이것은 분명 여전히 우리네에게 잔존하는 도덕적 존엄성에 대한 믿음으로 이끈다. 가지지 못한 자들의 한바탕 해프닝!

 

다시 소유권의 문제로 가보자. 소유권의 핵심 논리에는 선착순, 점유, 노동, 귀속, 상속, 자기신체소유가 있다. 인간들이 주장하는 이것은 내 것!’이라는 논리에는 이것들 말고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에 해당하지 않는 소유 논리는 모두 강탈, 착취, 사기라는 폭력성을 지닌다. 지금 한국의 현실 세계는 지배 권력의 이러한 폭력적 소유 주장이 공개적이고 죄의식 없이 자행되고 있다. 이 소설을 이렇듯 소유 권리의 측면에서 바라보면 그 주인공들이 파렴치함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들 권력 계층으로 바뀌었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비록 허구이지만 소설의 제재는 한국의 사회적 구조에서 실현 가능성이 없는, 설혹 실행되더라도 처벌을 피할 수 없는 계층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은 마치 하부 계층은 범죄의 유혹에 항상 노출된 존재라는 왜곡된 시선을 의심케 한다. 만일 이러한 돈이 지배 계급에게 발생했다면 아마 어떠한 흔적도 없이 갈취되고 말았을 것이다. 소설이 삶의 예측 불가능성과 신산한 소시민적 삶을 가로지르며 그 욕망의 원시성과 우상화된 돈 신에 굴종된 오늘을 재치 넘치는 해학과 풍자로 슬기롭게 성찰케 하고 있지만, 그 재미만큼 만끽 할 수 없었던 작은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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