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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ㅣ 흄세 에세이 1
알베르 카뮈 지음, 박해현 옮김 / 휴머니스트 / 2022년 10월
평점 :
산다는 것으로부터 마음이 달아나려 할 때면, 그 어떤 의미도 잡을 수 없는 무력감이 휘몰아칠 때면, 나는 스물네 살 청년 카뮈가 발견한 태양의 빛과 폐허 위에 피어나는 꽃들의 향취와 오색의 향연, 바다를 헤엄치는 구릿빛 싱그런 육체가 있는 생(生)의 찬미를 다시 꺼내든다. 카뮈의 감각과 정신이 팔딱팔딱 용솟음치는 그 젊음의 에너지를 내 안의 시들어버린 그것에 자극을 주고자하는 무의식적 요구인지 모르겠다.
이번에는 역자를 달리하여 『결혼(Noces)』을 읽는다. “봄철에 티파사에는 신들이 내려와 산다.(김화영 번역, 책세상 出刊 카뮈전집에서)” 는 정적(靜的)이고 건조하다. 반면 박해현의 새로운 번역은 “봄이 오면 티파사(Tipasa)에는 신(神)들이 강림해서 수런거린다.” 며 어떤 왁자지껄함과 함께 동적 활력이 느껴진다. 내가 느끼고자하는 감각에 조응한다. 단지 새 번역본을 선택한 이유는 그뿐이다. 독자 저마다 취향의 문제일 것이다.
『결혼』을 구성하는 네 편의 에세이는 알제리 북부와 북서부 지중해 연안 도시인 티파사, 제밀라, 알제와 이탈리아 피렌체를 배경으로 삶과 육체에 대한 철저한 응시, 그리고 유한성에 대한 그득한 충만을 노래한다. 그래, 그 일회성이 지닌 그냥 떠내버릴 수 없는 간절함이 응축된 시선이 대지와 하늘 사이의 지상을 가득 채워 홀린 듯 상상의 그곳을 바라보게 된다.
푸른 지중해를 바라보는 티파사의 고대 로마 유적지, 그 “폐허와 봄의 결혼(13쪽)”, 폐허의 잔해를 지워버리며 자연으로 회귀하는 장밋빛 부겐빌레아와 붉은 빛 히비스커스, 하늘에서 내려오는 빛살, ‘치열(齒列)이 찬란한 파도의 미소’는 폐허를 사물의 중심으로 데려간다. 야생의 향내, 하늘의 참을 수 없는 장엄함에 두 눈과 가슴을 활짝 열어젖힌 젊음을 보며 나는 그 화사한 생명의 에너지에 도취된다. 카뮈는 마음껏 삶을 사랑하며, 인간 조건에 대한 자긍심을 외친다.
“온몸으로 살아가고, 온 마음으로 증언한다면 나는 더 바랄 나위가 없다.
티파사를 살고 증언하라.... 거기에 자유가 있다.” - 20쪽
‘하늘의 찬란한 미소에 공모의 미소를 던지는 종족’, 이 종족에 합류하고 싶은 욕망이 솟구친다. 조화와 침묵, 만끽한 기쁨과 고독...
해발 900미터 바위투성이 고지, “바람에 닦여 영혼까지 너덜너덜”하게 만드는 삭막한 찬란함이 부는 「제밀라의 바람」에 이르면 “죽음을 껴안고 되찾는 젊음(34쪽)”, 운명을 정면으로 마주할 줄 알았던 고대인의 순수와 진실을 직시케 된다. 문명의 참되고 유일한 진보란 스스로 의식하는 죽음의 창조, 우리네 자신과 세상을 분리하는 간격을 줄임으로써 어떤 완전체로 틈입하게 되는 쓰디쓴 가르침을 새삼스레 받아들여야 함을 확인한다. 죽음의 자명성, 그 절망의 참된 낯빛을 앎으로써 집착의 노쇠함을 벗어던지고 젊음의 생에 전념하는 기쁨을 나는 어설프게나마 되찾는다.
나는 「알제의 여름」을 제일 좋아한다. 순수한 관능과 극빈의 삶, 유치한 허영이 뛰노는 곳, 청춘을 잃고 난 뒤 찾아오는 멜랑콜리를 치유할 길 없는 장소여서 열정을 불태우는 젊음이 마구 방출되는 도시이기에, 내 정신의 감각은 이 에세이를 즐겨 찾도록 이끈다. 자긍심과 삶을 위해 태어난 알제의 사람들, “하늘과 바다를 겹으로 두른 조가비”같은 ‘파도바니의 해변 댄스홀’, 꽃과 살이 뒤섞인 잔향을 남긴 채 머리를 뒤로 젖힌 채 웃는 어느 아가씨가 있고, 흰색 집 벽에 내리 꽂는 강렬한 햇살과 대비되어 더욱 선명해진 황금빛 육체를 한 갈색 야수들에 동지애를 느낀다.
“일생은 쌓아가는 게 아니라 불태우는 것이다....
지옥의 개념은 이곳에서 앙증맞은 농담일 뿐이다.” - -51쪽
뻔 한 문장이 있는 영화관 박하사탕의 교환으로 평생의 인연이 맺어지는 그 서투름과 순수가 있는 곳, 단순 명쾌한 기본 계율 몇 줄이면 더 이상의 도덕이 필요치 않는 곳, 죽음의 민낯을 드러내는 묘지의 담장 밑에서 밀회를 즐기고 입맞춤과 애무가 있는 곳, “태양의 숨찬 맥박과 영혼의 고향을 재발견”하는 곳, 삶의 부조리를 거역하지 않는 사람들이 죽음의 준엄한 위대함을 회피하지 않는 충만한 삶의 향기가 있는 이 글은 음울한 구석을 맴돌던 마음에 찬란한 생의 기운을 마구 퍼부어준다.
이탈리아 피렌체의 여행기이기도 한 「사막」은 카뮈의 인생 내내 진행되었던 반항하는 인간의 싹이 움트고 있음을 발견케 되는 산문이기도 하다.
“살아있는 로렌초가 비록 장미꽃 나무를 곁에 두고 있더라도 땅에 묻힌
로미오보다 낫다.” -74쪽
셰익스피어 「베니스의 상인」에 등장하는 샤일록의 딸 제시카의 연인 로렌초가 연인 줄리엣을 두고 죽은 로미오보다 낫다는 이 말처럼 카뮈의 신념을 대변하는 말은 없을 것 같다. 이것은 망자들의 덕행을 기리는 수도원 무덤 평석위에서 개구리뜀 놀이를 하는 아이들처럼 죽음의 표식들이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해와 함께 떠올라 함께 지는 것“일 뿐이다.
종교와 시학, “삶의 열정에 덧씌워진 우스꽝스런 탈바가지”라는 관념적 추상의 공허함을 깨부수고, 지금 여기, 살아있는 현재에 대한 유일한 진실성, 그 구체적 감각, 실존성을 외친다. 그래서 카뮈는 말한다. 신들이 비우고 떠나버린 그 거대한 사원에서 모든 우상, 겉만 번지르르한 관념과 형이상학의 세계는 허물어지리라고. 사막? 갈증을 달래지 않은 채 살 수 있는 인간만이 살 수 있는 곳이다. 불멸, 영원, 내세... 오, 나는 애초 이런 희망이란 지녀 본적도 없다. “진리란 제 안에 쓴 맛을 지니기 마련”이라고 한다. 희망의 부재, 이 부정이야말로 긍정의 꽃 피어남, 삶의 기쁨을 내포하고 있음을, 정신은 육체에서 존재의 근거를 찾고 있는 옛 동지를 이렇게 함께한다.
분열과 혐오가 횡행하는 이 불온한 세상과 더불어 어느 사이엔가 차가워진 쓸쓸한 기운이 새삼 회색빛 음울을 더욱 깊어지게 한다. 이 쌀쌀맞은 고독을 차버리고 싶을 때, 향기로운 생명으로 가득 찬 카뮈의 충만한 고독, 외롭지 않은 고독, 오렌지 꽃향기 속 정오의 침묵, 알제의 여름으로 들어간다. 끓어오르는 티파사의 햇살과 알제의 지중해 바다 속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