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남자 차이의 구축 과학과 사회 8
프랑수아즈 에리티에 외 11명 지음, 배영란 옮김 / 알마 / 2009년 10월
평점 :
절판


여자와 남자, 그 차이에 대한 규명을 위해 이 저술처럼 망라된 연구부문의 논의를 보는 것은 이례적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유전학, 인류학, 신경생물학, 인구통계학, 진화생태학, 분자생물학, 사회인류학, 인지심리학, 정신의학 등 자연과학과 인문사회학분야의 석학들이 쏟아내는 성(性) 구분론에 대한 진실의 과학적 탐구와 사회적 조명은 인류사회에 새로운 관점의 성을, 함께 살아가는 평등으로서의 성을 이야기한다.


바로 이 순간에도 우리는 남자와 여자는 다르다고, 그래서 남자와 여자의 기능적 역할은 같지 않으며, 결코 평등한 관계일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이러한 불평등 관계의 명분으로 생물학적 특성에서 그 이유를 찾으려 하고, 이미 오류임이 입증된 엉터리 과학이나 전혀 과학적으로 타당치 않은 주장들이 대중을 기만하고 확대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
이 같은 자연주의적 환상에 기댄 논리에는 여자의 신체적 취약성, 아이의 양육 등 모성적 한계, 호르몬의 작용, 뇌 크기의 차이, 좌뇌와 우뇌의 남녀 차이 등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들 불평등의 근원이라고 전제하는 이야기들은 과학적 진실일까. 성별에 따른 여자와 남자의 차이는 유전자에 이미 프로그래밍 되어있다는 결정론적 시각은 옳은 것일까.

이 남성 중심의 우월적 논리들은 여지없이 과학과 사회학적 증거들에 의해 전복되고 만다. 인간사회는 꾸준히 남녀 성별의 서열화라는 동일한 구조적 특성을 유지해왔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의 사회에서  성 정체성과 성별 사이의 문제가 세계의 다양한 분야에서 사회, 정치 질서를 재편하는 중요한 '결절점(Nodal Point)'에 이르러 있음을 목격하게 된다.
전통적인 남성의 영역에 여성이 진입하고, 남성의 역할과 여성의 역할이란 경계가 희미해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성전환자, 동성애자 등은 이분법적 성별 기능과 역할을 더 이상 가능치 않게 하고 있다.

이렇듯 사회의 궁극적 변화는 물론, 성에 대한 과학적 진실에도 불구하고 성(性)사이의 불평등, 다시 말해 성별 관계가 순전히 유기체적 요구에 따라 미리 정해진 운명을 주관하는 자연적 차이라는 망상과 같은 구닥다리 모델에 집착하는 것은, 인류 역사이래 남성의 지배적 습관을 청산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말하고 있는 것일 게다. 그러나 그 차이를 만들고 있다고 믿던 과학적 내용의 진실을 이해하는 것은 모든 인간(남성, 여성, 중성)이 함께 살아가는 평등의 즐거움과 타자에 대한 배려와 사랑은 물론 인류의 지속성을 위해서도 더없이 중대한 지식이 될 것이다.

대중적으로 늘 접하는 남녀의 생물학적 차이에 대한 속설인 남자의 뇌가 여자의 뇌보다 크기에 남자가 여자보다 지적우위에 있다는 얘기는 한 마디로 터무니없는 이야기라는 점이다. 뇌의 크기(용적)와 지적 능력 사이에는 그 어떤 상관관계도 없음이 이미 밝혀져 있다. 뉴런 사이가 얼마나 잘 연결되어 있느냐의 문제이며, 인간 개인마다 자신의 뉴런을 활성화 시키는 고유의 방법을 발달시키는 전략의 문제임이 규명되어있다. 즉 시냅스라는 뉴런의 연결들은 단지 태어날 때 10%만 이어져 있을 뿐이며, 나머지 90%는 살아가는 동안 서서히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부류의 속설 중 좌뇌와 우뇌의 기능별 차이를 거론하며 여자는 좌뇌를 남자는 우뇌를, 그래서여자는 언어능력이, 남자는 공간지각능력이 발달했다는 웃기는 얘기도 있다. 영상의학기술의 발달은 이러한 단순하기 그지없는 엉터리 과학 세계의 오류를 시정케 해준다.  뇌 기능은 한 쪽 뇌만으로 그 기능이 확보되지 않으며, 서로 망처럼 연결된 영역들에 의해 그 기능이 수행됨이 확인되고 있으며, 언어와 공간지각능력의 차이는 남녀의 차이가 아니라 개체간의 무수한 편차가 존재하는 극히 일반적 상황을 왜곡한데 불과한 것일 뿐이다.

특히 이 저술에서 가장 관심을 주목시킨 부분으로, ‘성 결정 유전학’과 성 정체성에 대한 것인데, “성 결정 단계와 성 분화 단계의 구분은 여전히 매우 자의적이다.”라는 것이며, 여자의 성 결정 유전학에 대해서 별로 알려진 게 없다는 것이다. 결국 배아가 6~7주 정도에 성별이 결정됨에 있어서 남자와 여자의 성별 구분이란 것이 작금의 인간사회에서 구분하는 여자와 남자의 기능과 역할과 관련을 갖지 못한다는 의미로 해석 될 수 있다. 더구나 남성의 염색체인 ‘XY’에서 여성은 없는 ‘Y'염색체에 의미를 부여하지만 ’퇴화된 ‘X’ 염색체‘의 잔재에 불과하며, 이것이 성의 표현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오늘의 과학을 접하면 우리들의 성 구분론이 얼마나 자의적으로 진행된 것인가를 깨닫게 한다.

이에 더해 영아 및 유아들이 보이는 남자 아이들과 여자 아이들의 차이는 “부모의 성적 특성, 특히 성 본능(억압된 유년기 성 본능)이 젠더의 지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며, “부모 및 부모 이외의 성인이 여아 및 남아에게 대하는 태도나 표현, 기대 등이 매우 다르다는” 분명한 사실로 규명되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남성과 여성이라는 젠더(gender) - 주체가 스스로 남자 또는 여자로 느끼며 그에 따라 처신하는 심리학적 행동의 구분 - 는 타고난 성별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기대치인 개인 및 집단의 생각 속에서 구축된다는 것이다. 정말 센세이셔널하지 않은가!

또한 세 가지 차원에서 정의되는 성, 즉 Y염색체의 유무에 따른 유전적 차원과 정소와 난소로 구별되는 생식선의 차원, 그리고 외부 생식기관(페니스와 음부)의 양상은 항상 일치하지만은 않는 다는 사실 역시 인간의 성별 차이에 대한 편견에 다시한번 충격을 준다.  극단적인 표현을 빌면 XY염색체를 가진다해서 페니스를 갖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신체는 여자이지만 Y염색체를 지니고 있을 수 있다는 이야기이며, 이처럼 유전적인 성과 생식선, 표현형 성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 성 정체성의 구축은 양육환경과 충돌 할 수밖에 없음을 이해케도 된다.

이외에도 이 저술은 피의 상징적인 중첩을 피하는 여자와 사냥의 관계를 통한 여성의 열등함으로의 이전을 위한 이데올로기의 구축이나, 에스키모인 이누이트족의 ‘시피니크(sipiniq)’라는 독특한 트랜스젠더의 현상, 한국과 중국의 심각한 남아와 여아의 성비 왜곡으로 인한 여성의 부족현상과 이로 인한 세대교체 필요 인구의 생산 불가능 사태까지, 과학적, 사회적 문제에 대한 탁월한 연구내용들이 즐비하게 들어차 있다. 성별의 차이는 과학과 이데올로기가 교묘히 얽혀있는 얄궂은 논란이다. 성 구별로 인한 불평등의 지속화와 편견, 그리고 이를 입증하려는 도구로 과학을 오용하는 시절은 이제 무대 뒤로 멀어지고 있다. 오늘의 남성, 여성에게 부과된 잘못된 기대는 평등을 훼손하고, 인류를 분열시킨다. 성이란 것은 인간의 자의적 산물에 불과하다.  ‘생물학적 비대칭성’으로 인한 불가피한 차별은 이제 제도적, 법적 보완과 유지는 물론 실질적으로 작동하는 올바른 처우의 인식, 평등의 이상으로 나아가게 하여야 할 터이다. 남성과 여성이란 이 인위적 젠더에 지녔던, 왜곡되어있던 인식이 이 한 권의 저술로 완벽하게 해소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무지개를 풀며 - 리처드 도킨스가 선사하는 세상 모든 과학의 경이로움
리처드 도킨스 지음, 최재천.김산하 옮김 / 바다출판사 / 2008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우리에겐 경이로움을 향한 시적 욕망이 있다.” 이 욕망은 과학의 원동력과 다르지 않다. 즉, 인간의 삶과 자연, 우주에 대한 외경을 규명하고자 하는 과학의 노력, 진리의 탐구를 향한 숭고함, 바로 과학 안에 시가 있음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다보면 과학지상주의, 과학제국주의와 같은 오해나 선입견을 가질 수 있으나, 이 저술은 그렇게 편협한 주관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 나쁜 시적 과학 - 과학을 곡해하거나 왜곡하고, 과학인 척하는 의사(擬似)과학(pseudo) 등 - 으로 진실을 감추고 파괴하는 사람들과 세상, 그 경향에 대한 비판이고, 과학의 진정성, 그 아름다움에 대한 격조를 높인 훌륭한 시적 과학서이다.

제목인 “무지개를 풀며”는 영국 낭만주의 시인인 ‘존 키츠’가 ‘아이작 뉴턴’이 “무지개를 프리즘의 색으로 환원시킴으로써 모든 시정(詩情)을 말살했다.”고 주장한 것에 대한 반론에서 시작되어 별빛, 음(音), DNA 등 대상을 풀어헤치는 과학의 동기와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그 경이로움까지 포함하는 과학의 세계를 의미하고 있다. 실제 빛의 물리적 성질에 대한 뉴턴의 분석에서 ‘프라운 호퍼’가 발전시킨 빛의 연구에 대한 매혹적인 이야기로 무지개를 풀어내기도 한다.
비록 ‘도킨스’는 ‘재미’라는 요소는 “잘못된 신호를 송신하며, 잘못된 이유로 사람들을 끌어들일지도 모른다.”고 우려하면서, 과학을 하향평준화시켜 고취되어야 할 사람들로부터 오히려 흥미를 잃어버리게 하는 ‘천박한 재미’를 비난하고 있긴 하지만, 이 저술은 그의 발표된 저술 - 이기적 유전자, 눈먼 시계공, 에덴의 강, 만들어진 신 등등 - 들이 그러하듯이 지적 재미를 결코 잃지 않고 있다.

여기에는 물리학, 분자생물학, 동물학, 생화학, 통계학 등 과학의 전 분야를 종횡무진하는 저자의 눈부신 과학세계의 안내와 주장이 단순한 과학이론의 소개와 같은 경박한 접근을 넘어서는, 어려울 수 있으나 도전할 만한 진정한 과학의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다.
특히, ‘이기적 협조자’로서의 유전자, ‘우연모집단’에 얽힌 자연선택과 현대 인간 행동의 불일치에 대한 통계학적 이야기, '자급적 공진화(self-feeding co-evolution)'와 같은 뇌와 외부현상의 ‘자기 되먹임’과 같은 내용은 그 탁월함으로 과학의 매력에 흠뻑 취하게 한다.
저자는 상징주의, 은유, 유사성 등을, 과학을 오염시키는 ‘나쁜 시적 과학’의 요인으로 경계하고 있지만, 우연의 일치에 불과한 사건에 대한 인간의 반응에서, 직관적 통계학을 관장하는 우리의 두뇌 부위는 아직도 석기시대에 머물러 있다는 예화의 설명에서는 가히 ‘호메로스’와 ‘횔덜린’의 서사시를 넘어서는 문학적 작품성을 느낄 정도이다.

또한, 재미와 같은 대중적 접근이라는 미명하에 자행되는 체계적으로 공급되는 반이성적 시각이나, 하향평준화를 통한 과학의 껍데기만 둘러쓴 의사과학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쏟아 붙고 있다. ‘단속 평형설’을 주장하는 진화론의 글쟁이 ‘스티븐 제이 굴드’의 나쁜 시정, 페미니스트 과학자인 ‘샌드라 하딩’은 “편협한 미국적 쇼비니즘”의 발현이라고 혹독하게 비난하고 있으며, 우리네 안방의 TV화면을 가득 채웠던 <X파일>은,  “진정한 과학에 동기를 부여해야 할 경이로운 감정 대신 그 사생아인 ‘초현실성’과 손잡은” 음흉한 최악의 엉터리 과학의 일례라고 지적하기도 한다.

사실 우리들이 사회 현상에서 늘 목격하듯이, 특히 ‘계산된’ 하향평준화는 마치 배려하는 척하면서 멸시하는 대표적 방법론이기도 하다. “진정한 과학은 어려울 수 있으나, 고전문학 또는 바이올린 연주처럼 그 만큼의 보람이 있는 일이다.”라는 점이다. 무턱대고 대중화, 재미를 추구하는 과학은 인간의 숭고한 감성을 자극하기는커녕, 무의미한 말장난, 지적 사기, 진실의 파괴로 엉뚱한 결과를 초래함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러나 이 저술의 탁월함은 도킨스의 유전자에 입각한 진화론적 설명이 깃든 살아남기 위해 협조하는 이기적 협조자, 그리고 조상들이 살던 세계에 대한 암호화 된 설명이 그득한 고대(古代)도서관으로서의 DNA, 우리가 보는 이미지에 대한 뇌의 인식 과정으로부터 시뮬 레이션 세계에 살고 있는 우리의 실제, 오스트랄로피데쿠스의 뇌에서 오늘의 인간 뇌 크기로의 뇌 용량의 크기를 설명하는 하드웨어-소프트웨어 공진화는 ‘수전 블랙모어’의 <모방자 기계: The Meme Machine>와 더불어 가히 과학세계를 만끽하는 즐거움을 준다.

아마도 우주를 이해하고 어떻게 우리가 여기에 존재하게 되었는지를 알기위해 노력하는 삶, 잠시 머무르는 이곳과 머무르는 이유에 대해 이해 할 수 있는 진정 뜻 깊은 시간이 되어준다. ‘좋은 시정(詩情)’이 넘치는 과학은 아마 이러한 저술일 터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공무도하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는 “전 할 수 없고 추적 할 수 없는 세상” 을, 그리고 문장으로 성립 될 수 없다는 비루하고 치사하고 더러운 인간의 삶을 읽는다. 그래서 ‘인간’이란, 포괄적 지칭이기에 오히려 예외가 없으며, 써지지 않은 기사였기에 더욱 진실이라고 수용하고 싶어 한다. 아마 50여년이란 삶에서 나름의 이해가 가져다 준 나만의 세상보기 탓일지도 모르겠다.

소설의 인물들에서 작중 인물인 출판사 편집자 노목희가 말하는 “그 늙음의 힘과 늙음의 리듬으로 사막을 건너가는 듯” 한 낙타의 모습을 보는 것은 어느덧 스산한 바람과 저마다의 색깔로 퇴락을 준비하는 나뭇잎의 변색 탓일까. 이젠 나, 그리고 주변의 사람들, 세상사를 전하는 매체들의 내용에 존재하는 사람들 속에서 정말 ‘던적스러운’ 것이 바로 인간이라는 점에 추호의 의문도 지니지 않는다. 사람이, 사람과의 관계가 징글맞게 싫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그럼에도 그 하찮음과 사소함의 여정을 묵묵히 걸어가는 사람들이 또한 안타까운 것은 어쩔 수 없는 생에 대한 동료의식 때문일까.

뭉쳐진 옷소매와 허망한 표정을 하고 있는 ‘장철수’란 인물이 내 뱉는 “이런 세상”은 “모두 저자신의 자리에서 정당했다.”는 망라된 인간들이 벌이는 사회부 사건기자가 보는, 그러나 ‘안 쓴 기사’, 바로 그것이 아닐까. 물론 장철수의 비루하고, 치사하고, 던적스럽다는 ‘인간론’을 배경으로 하는 세상이겠지만.
저마다 자신들의 이해(利害)를 두들겨보고, 이로움을 관철하기 위해 벌이는 행동들의 충돌, 이 충돌의 범위에 존재치 않는 것들은 마치 변사사건의 “접근되지 않는 죽음들”처럼 “삶과 사소한 관련도 없어 보인다.”는 사회부기자 ‘문정수’의 독백과 같은 차원이 아닐까.

단어와 문장 뒤에 숨겨진 조소와 조롱이, 그리고 비틀어진 반어적 문장들에서 “폭발 직전의 위태로움이” 숨겨져 있는 무력감을 엿본다. 그리곤 이 말들이 꼭 내 가슴을 옥죄기만 하는 흐리멍텅한 삶의 이유와 가능성을 쫓는 우울함과 닮아있다고 느낀다.
동료를 배반하고 뱀 섬 앞바다에 가라앉은 미군의 포탄피를 건져 올리는 남자, 그 작은 목선을 타고 물질을 하는 베트남 여자, 개에게 물려 죽은 버려진 자식과 세상의 이목을 피해 숨어버린 여자, 크레인에 깔려죽은 여고생과 그 아비, 화재현장에서 금품을 절도한 소방관, 그리고 사소함과 적의의 들판의 문턱에서 서성이는 남자까지, 또 그리고 자식을 보호하려는 노모의 모정을 “노모의 몽매한 혈육주의”라 규탄하는 ‘노학연대’, 무참히 죽어버린 여자아이를 이권운동의 도구로 삼는 ‘해망연안연대’ 등등, 세상의 모습은 진정 ‘던적’스럽기만 하다.

“너의 죽음으로, 우린 인간의 존엄과 생명의 고귀함을~ (이하 생략)”하는 비석의 위선에서, 미군대변인의 허무맹랑한 선심에서, 정책수립의 논리적이고 합리적이며, 이성적 판단이란 결정에서 이미 폭력과 외면이 내재하고 있음을 본다. 세상이란 것은 그 명분을 세우고, 타협이라는 이해관계의 산물을 마련해주면 그 위선에 가려져 모두 정당해져 버린다.
입만 열었다하면 욕을 해대는, 아니 노목희의 말처럼 신음을 뱉어내는 ‘당직차장’처럼, “세상을 찌르고 싶은 욕설이 가득 쌓여” 쩔쩔매는 그 짐승이 다름 아닌 내 모습이라 하고 싶다. 니미~
그렇다고 삶이 희망으로 돌아서는 것도 아닐 터인데 말이다.  그래 “육신의 귀에 들리지 않는 선율에 실려서 흔들리면서 흘러가는 것이” 생명현상이란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정처 없는 형용사처럼 말이다. 전 할 수 없는 세상의 이야기를 들어주던 이가 떠나버리고, 사건이 없어 취재처를 옮기는 어느 기자의 발걸음을 굳이 새로운 시작이라 하여야 할까....

도심지역에서 악지적응 훈련을 수 십 년을 받았음에도 면역력이 생기지 않는 내 모습에서 작중인물들과 닮아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목구멍 속에 눈보라가 날리는 것”같은 시원한 가을 새벽의 소주 한잔이 생각난다. 점점 나도 새벽 그네처럼 소주에 젖어 드는가보다...
적의의 들판에서 쭈빗거리는 ‘문정수’는 바로 나, 우리들이지 않을까. 이 작품은 내게, 이 가을 체념 아닌 체념의 삶에서, 희망 아닌 희망을 찾게 하는 동반자가 되어 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기 교양강의>를 리뷰해주세요.
사기 교양강의 - 사마천의 탁월한 통찰을 오늘의 시각으로 읽는다 돌베개 동양고전강의 1
한자오치 지음, 이인호 옮김 / 돌베개 / 2009년 8월
평점 :
절판


사마천의 사기(史記)가 한국인에게 여전히 읽히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웃 중국의 고대사이자 그네들 최초의 역사서라는 의미로 시작해서 그 이상의 무엇이 존재하기 때문일 텐데, 사실 중국의 역사학자인 전종서가 언급했듯이 “옛 역사책의 기록은 대부분 팩션(faction)이다.”라는 말은 더구나 사실로서의 진정성을 상실시키는데, 그럼에도 2000년 전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야 하는 이유는 애매하기 그지없다는 생각을 떨치기 어렵게 한다. 또한, 사기의 본기(本紀)와 열전(列傳)에 기록된 많은 인물들의 흥하고 망하며, 성하고 쇄하는 삶의 이야기이고 여기서 유래하는 오늘날 우리들이 고사성어라고 하는 상황의 이해를 실감나게 하는 소박한 지식의 축적이 전부가 아닌가 하는 생각에 머물게 된다.

특히나 사기를 역사서라고는 하지만, 오히려 삶과 처세에 대한 이야기가 주류를 이루고, 비록 균형적인 관점과 기술을 유지키 위한 노력으로 녹이(錄異)나 수일(搜佚)과 같은 동일한 사건에 대한 서로 다른 기록을 모두 남겨 후세의 판단에 맡기는 노력을 하였으나, 사마천 자신의 주관적 기술을 피하지 않았음은 삶의 지침서라고 하기에 가까운 것이 아닌가 할 정도이다. 아마도 바로 이러한 교훈적 가치들에서 저자의 말처럼 포전인옥(抛磚引玉)하려는 의도가 이유가 되는 모양이다.

그러나 저자 한자오치(韓兆埼)의 사기에 대한 개괄적 해설서라 할 수 있는 이 저술에서 이러한 삶의 원칙이나 처세술을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면면히 20세기를 이어져 온 통치술이자 한국인을 얽어맨 사상적 기원을 발견하고, 당시대에서 조차 비난 받던 제도를 21세기 오늘에도 답습하는 정치꾼들을 떠오르게 하는 것들에서 나는 작은 즐거움을 얻는다.
불과 20세기 초엽까지 우리의 통치술로서의 근간인 유교사상의 본질이 과연 어떤 것이었는가 하는 측면에서, 한 무제(B.C.156 ~ B.C.87)의 패도(覇道)와 왕도(王道)를 병행한 정치술이 기점이 되었다는 것은 의외의 수확이라 할 수 있겠다. 다시 말해 이미 孔孟의 순수한 유교가 아니라 한국인을 2000년간 묵어놓은 지배이념이란 것은 유가의 이상이 변질된 것으로서“성직자와 폭력배가 동시에 통치한 것”이라는 적절한 표현이 어울리는 패도정치이념으로서의 유교라는 설명이다. 이는 결국 백성의 교화와 엄격한 법률 통제의 이론적 배경으로 변화하여 처세기술로서 보다 심화 발전하였다는 인상을 준다.

한편 웃지 못 할 발견이랄 수 있는데, 기원전 2세기 전한(前漢)의 형벌 제도 중 마음속으로 비난했다고 심증적 처벌을 하는‘복비(腹誹)’의 일화를 읽으면서, 보도에서 촛불을 켜면 반정부 시위자일거라고 추정하여 연행하는 오늘의 우리사회와 연결되어 그 폭력성과 전제적 권위, 말살된 인권을 보는 것 같아 통증이 일기도 한다.
이와 같이 본 저술,『사기 교양 강의』에서 “이상적인 정치와 이상적인 사회에 대한 무한한 열망”, 그리고 “동시에 그 당시 정치 및 사회 현상에 대한 준엄한 비판”을 읽게 된 것은 지금까지의 사기에 관한 저술들의 논점을 극복하는 수확이랄 수 있겠다.

조걸위학(助桀爲虐)하는 현 정권의 세력들, 사생취의(捨生取義)는 오간데 없고, 청정무위(淸靜無爲)로 눈 감고 모른 척 나서지 않는 관료와 지식인들이 사기의 처세술만 읽지 말고, 그것이 의미하는 보다 본질적 정신을 헤아릴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든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진시황제도, 항우도, 유방도, 한무제도 죽었다. 권세와 이익을 좇던 조고와 이사도 죽었다. 사마천 말마따나 태산처럼 무겁게 죽느냐, 기러기 털보다 가볍게 죽을 것인가는 인생관의 문제일 것이다. 그러나 삶에는 원칙이 있다. 이 원칙이 사기에는 무수하게 흐르고 있다. 이 저술은 이러한 삶의 지혜를 정확하게 읽어내는 훌륭한 안내서가 되어준다. 독서의 즐거움이 있는 저술이다.

[註]
①포전인옥(抛磚引玉) - 벽돌을 던져 옥을 끌어 들인다.하찮은 의견을 먼저 내놓아 다른 사람들의 귀한 견해를 유도한다는 의미
②조걸위학(助桀爲虐) - 악한 자를 도와 더욱 악행을 저지르는 것
③청정무위(淸靜無爲) - 가급적 조용히 지낸다. 즉, 자신의 안위를 위해 나서지 않음을 의미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jek3049v 2009-10-07 07: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번역을 위해서 사기를 여러 종류의 여러 권을 읽어보았는데, 이번의 것은 생각의 의미를 알게 해준 책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책과의 다른 점은 텅빈 하늘을 바라보면서 풍족함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책이 아닐까?

필리아 2009-10-07 08:39   좋아요 0 | URL
다른 시각으로 보려고 의도적인 노력을 하면서 읽었죠. 목적을 추구하다보니 특정한 면만을 부각시킨 결과가 되었습니다....
 
카인의 징표
브래드 멜처 지음, 박산호 옮김 / 다산책방 / 2009년 9월
평점 :
절판


19년 뒤 홍콩의 어느 곳, 소설의 첫 장부터 알 수 없는 추궁과 비열한 살인 장면이 예사롭지 않은 추격의 양상을 암시한다. 게다가 단지 성서에 16줄에 불과한 기술로 인류 역사상 가장 유명한 살인자가 된 카인의 이야기와 슈퍼맨의 원작자인‘제리 시걸’과 그의 아버지‘미셸 시걸’의 죽음에 얽힌 비밀까지 얽혀들며 현실과 신화적 사건을 오르내리게 한다.

또한 엄마의 죽음을 목격한 아이, 아버지의 구속, 정신적 외상을 지닌 채 거리의 부랑인들을 거두는 청년 칼의 숨겨진 고통을 바라보는 시선도 커다란 하나의 축이 된다.

이처럼 이 작품은 다분히 미국적이고 그네들의 정체성을 유지시켜온 성서와 짧은 역사 속에서 지켜내고 싶은 우상(슈퍼맨)으로서의 충분한 화젯거리를 소재로 하고 있는 본격 범죄추리물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코믹스(Comics)와 영상매체를 오가는 감각적인 작가의 특성이 유감없이 발휘되어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듯이 한 컷 한 컷 치밀한 구성이 돋보이는데, 근본주의자 광신도 앨리스와 마주한 하퍼 부자와의 팽팽한 긴장의 순간장면들은 가히 헐리웃 영상을 뛰어넘는다.

수감되었던 아버지와의 19년만의 재회, 이들 부자의 앞으로 다가온 은밀한 암시는 미지의 책으로 발길을 인도한다. 이후 작품 곳곳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회한과 갈등이 교차하고, 풀어야 할 미궁 역시 아버지와 아들의 용서와 화해를 들려주지만, 이러한 주제의식을 굳이 의식할 이유는 없다. 이미 강력한 묘사라는 도구를 유감없이 발휘하는 이 작품은 정밀한 퍼즐식 스토리의 전개와 불안, 긴장, 잡힐 듯한 단서, 그리고 의외성과 반전을 거듭하며 독자의 혼을 쏙 빼앗아 가버릴 정도로 완벽하기에 이야기의 지적 전개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즐겁고 재미있는 작품이다.

더구나 마지막에서야 드러나는 예언자의 실체와, 툴레회의 광신자 앨리스를 인도하는 다이어리, 칼이 손에 쥔 제리 시걸의 초판본 만화책, 그리고 의문의‘거짓의 서(The Book of Lies)’, 궁극에는 카인의 징표가 무엇인지에 대한 궁금증은 작가의 교활한 트릭으로 결코 책을 손에서 떼어놓지 못하게 한다. 카인은 무엇으로 아벨을 죽였을까? 시걸의 초판본 만화책은 무엇을 지시하고 있는 것일까? 제리는 아버지 미셸의 죽음을 목격한 것일까? 하퍼 부자는 카인의 징표를 손에 넣을 수 있을까? 이러한 요소들은 현실적 실제와 허구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더더욱 사실성이라는 진실에 대한 호기심으로 달아오르게 한다.

그리고 작품 전체에 도도히 흐르는, 아들 칼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흐뭇한 안도의 표정, 고통스러웠을 아들을 향한 용서, 아들을 구하기 위해 무모한 저항을 무릅쓰는 부정(父情)은 카인을 용서한 하느님의 선물과 연대하여 감히 거부할 수 없는 사랑과 화해의 메시지를 보낸다. 끊임없이 긴장을 요구하는 스릴러임에도 작품을 휘감아 도는 부자간의 시선과 감정의 교감이 왠지 모를 따뜻한 정감을 느끼게 한다. 신약을 차용한 걸작이 『다빈치코드』라면 『카인의 징표(原題: The Book of Lies)』는 크리스천 미스터리 팩션의 완결판이라 함에 어떠한 손색도 없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