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남자 차이의 구축 과학과 사회 8
프랑수아즈 에리티에 외 11명 지음, 배영란 옮김 / 알마 / 2009년 10월
평점 :
절판


여자와 남자, 그 차이에 대한 규명을 위해 이 저술처럼 망라된 연구부문의 논의를 보는 것은 이례적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유전학, 인류학, 신경생물학, 인구통계학, 진화생태학, 분자생물학, 사회인류학, 인지심리학, 정신의학 등 자연과학과 인문사회학분야의 석학들이 쏟아내는 성(性) 구분론에 대한 진실의 과학적 탐구와 사회적 조명은 인류사회에 새로운 관점의 성을, 함께 살아가는 평등으로서의 성을 이야기한다.


바로 이 순간에도 우리는 남자와 여자는 다르다고, 그래서 남자와 여자의 기능적 역할은 같지 않으며, 결코 평등한 관계일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이러한 불평등 관계의 명분으로 생물학적 특성에서 그 이유를 찾으려 하고, 이미 오류임이 입증된 엉터리 과학이나 전혀 과학적으로 타당치 않은 주장들이 대중을 기만하고 확대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
이 같은 자연주의적 환상에 기댄 논리에는 여자의 신체적 취약성, 아이의 양육 등 모성적 한계, 호르몬의 작용, 뇌 크기의 차이, 좌뇌와 우뇌의 남녀 차이 등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들 불평등의 근원이라고 전제하는 이야기들은 과학적 진실일까. 성별에 따른 여자와 남자의 차이는 유전자에 이미 프로그래밍 되어있다는 결정론적 시각은 옳은 것일까.

이 남성 중심의 우월적 논리들은 여지없이 과학과 사회학적 증거들에 의해 전복되고 만다. 인간사회는 꾸준히 남녀 성별의 서열화라는 동일한 구조적 특성을 유지해왔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의 사회에서  성 정체성과 성별 사이의 문제가 세계의 다양한 분야에서 사회, 정치 질서를 재편하는 중요한 '결절점(Nodal Point)'에 이르러 있음을 목격하게 된다.
전통적인 남성의 영역에 여성이 진입하고, 남성의 역할과 여성의 역할이란 경계가 희미해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성전환자, 동성애자 등은 이분법적 성별 기능과 역할을 더 이상 가능치 않게 하고 있다.

이렇듯 사회의 궁극적 변화는 물론, 성에 대한 과학적 진실에도 불구하고 성(性)사이의 불평등, 다시 말해 성별 관계가 순전히 유기체적 요구에 따라 미리 정해진 운명을 주관하는 자연적 차이라는 망상과 같은 구닥다리 모델에 집착하는 것은, 인류 역사이래 남성의 지배적 습관을 청산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말하고 있는 것일 게다. 그러나 그 차이를 만들고 있다고 믿던 과학적 내용의 진실을 이해하는 것은 모든 인간(남성, 여성, 중성)이 함께 살아가는 평등의 즐거움과 타자에 대한 배려와 사랑은 물론 인류의 지속성을 위해서도 더없이 중대한 지식이 될 것이다.

대중적으로 늘 접하는 남녀의 생물학적 차이에 대한 속설인 남자의 뇌가 여자의 뇌보다 크기에 남자가 여자보다 지적우위에 있다는 얘기는 한 마디로 터무니없는 이야기라는 점이다. 뇌의 크기(용적)와 지적 능력 사이에는 그 어떤 상관관계도 없음이 이미 밝혀져 있다. 뉴런 사이가 얼마나 잘 연결되어 있느냐의 문제이며, 인간 개인마다 자신의 뉴런을 활성화 시키는 고유의 방법을 발달시키는 전략의 문제임이 규명되어있다. 즉 시냅스라는 뉴런의 연결들은 단지 태어날 때 10%만 이어져 있을 뿐이며, 나머지 90%는 살아가는 동안 서서히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부류의 속설 중 좌뇌와 우뇌의 기능별 차이를 거론하며 여자는 좌뇌를 남자는 우뇌를, 그래서여자는 언어능력이, 남자는 공간지각능력이 발달했다는 웃기는 얘기도 있다. 영상의학기술의 발달은 이러한 단순하기 그지없는 엉터리 과학 세계의 오류를 시정케 해준다.  뇌 기능은 한 쪽 뇌만으로 그 기능이 확보되지 않으며, 서로 망처럼 연결된 영역들에 의해 그 기능이 수행됨이 확인되고 있으며, 언어와 공간지각능력의 차이는 남녀의 차이가 아니라 개체간의 무수한 편차가 존재하는 극히 일반적 상황을 왜곡한데 불과한 것일 뿐이다.

특히 이 저술에서 가장 관심을 주목시킨 부분으로, ‘성 결정 유전학’과 성 정체성에 대한 것인데, “성 결정 단계와 성 분화 단계의 구분은 여전히 매우 자의적이다.”라는 것이며, 여자의 성 결정 유전학에 대해서 별로 알려진 게 없다는 것이다. 결국 배아가 6~7주 정도에 성별이 결정됨에 있어서 남자와 여자의 성별 구분이란 것이 작금의 인간사회에서 구분하는 여자와 남자의 기능과 역할과 관련을 갖지 못한다는 의미로 해석 될 수 있다. 더구나 남성의 염색체인 ‘XY’에서 여성은 없는 ‘Y'염색체에 의미를 부여하지만 ’퇴화된 ‘X’ 염색체‘의 잔재에 불과하며, 이것이 성의 표현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오늘의 과학을 접하면 우리들의 성 구분론이 얼마나 자의적으로 진행된 것인가를 깨닫게 한다.

이에 더해 영아 및 유아들이 보이는 남자 아이들과 여자 아이들의 차이는 “부모의 성적 특성, 특히 성 본능(억압된 유년기 성 본능)이 젠더의 지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며, “부모 및 부모 이외의 성인이 여아 및 남아에게 대하는 태도나 표현, 기대 등이 매우 다르다는” 분명한 사실로 규명되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남성과 여성이라는 젠더(gender) - 주체가 스스로 남자 또는 여자로 느끼며 그에 따라 처신하는 심리학적 행동의 구분 - 는 타고난 성별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기대치인 개인 및 집단의 생각 속에서 구축된다는 것이다. 정말 센세이셔널하지 않은가!

또한 세 가지 차원에서 정의되는 성, 즉 Y염색체의 유무에 따른 유전적 차원과 정소와 난소로 구별되는 생식선의 차원, 그리고 외부 생식기관(페니스와 음부)의 양상은 항상 일치하지만은 않는 다는 사실 역시 인간의 성별 차이에 대한 편견에 다시한번 충격을 준다.  극단적인 표현을 빌면 XY염색체를 가진다해서 페니스를 갖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신체는 여자이지만 Y염색체를 지니고 있을 수 있다는 이야기이며, 이처럼 유전적인 성과 생식선, 표현형 성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 성 정체성의 구축은 양육환경과 충돌 할 수밖에 없음을 이해케도 된다.

이외에도 이 저술은 피의 상징적인 중첩을 피하는 여자와 사냥의 관계를 통한 여성의 열등함으로의 이전을 위한 이데올로기의 구축이나, 에스키모인 이누이트족의 ‘시피니크(sipiniq)’라는 독특한 트랜스젠더의 현상, 한국과 중국의 심각한 남아와 여아의 성비 왜곡으로 인한 여성의 부족현상과 이로 인한 세대교체 필요 인구의 생산 불가능 사태까지, 과학적, 사회적 문제에 대한 탁월한 연구내용들이 즐비하게 들어차 있다. 성별의 차이는 과학과 이데올로기가 교묘히 얽혀있는 얄궂은 논란이다. 성 구별로 인한 불평등의 지속화와 편견, 그리고 이를 입증하려는 도구로 과학을 오용하는 시절은 이제 무대 뒤로 멀어지고 있다. 오늘의 남성, 여성에게 부과된 잘못된 기대는 평등을 훼손하고, 인류를 분열시킨다. 성이란 것은 인간의 자의적 산물에 불과하다.  ‘생물학적 비대칭성’으로 인한 불가피한 차별은 이제 제도적, 법적 보완과 유지는 물론 실질적으로 작동하는 올바른 처우의 인식, 평등의 이상으로 나아가게 하여야 할 터이다. 남성과 여성이란 이 인위적 젠더에 지녔던, 왜곡되어있던 인식이 이 한 권의 저술로 완벽하게 해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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