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 알바 내 집 장만기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25
아리카와 히로 지음, 이영미 옮김 / 비채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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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반대편의 사람이 동시에 의견을 나누고 영상과 정보를 교환할 정도로 엄청난 소통 수단이 일상화된 시대, 세계인이니 세계화니 하는 대화의 거리가 없어진 세상이라고 하지만 정작 오늘의 개인은 소원한 소통으로 외로움은 더욱 증가하는 역설적인 사회가 되어가고 있다. 사회의 가장 작은 단위인 가족조차도 이 문명의 이기가 단절을 재촉하는 압력으로만 작용할 뿐이어서 이웃은커녕 부모와 자식간의 공감대를 상실시키고 대화를 불편하게하며 궁극적으로 사라지게만 한다.

성인으로 성장한 아이들은 물질경쟁을 위해 극한의 생존시장으로 등이 떠밀리지만 세상살이의 선배인 부모와 절해고도(絶海孤島)와 같은 약육강식의 야생적 초원에서 길을 찾지 못하는 자식은 이조차 공통의 주제로 소통할 기회조차 찾지 못하는 것이 오늘 우리네의 모습이라 해도 지나친 이해는 아닐 것이다. 게다가 이 작품의 배경인 일본사회의‘에고(자기주체) 없는 공동체사회’라는 특성은 따돌림이라는 집단폭력까지 더해져 개인을 더욱 소외시키고 고립감에 심한 상처를 입히기까지 한다.

어렵게 입사한 직장을 3개월 만에 호기롭게 박차고 나온‘세이지’라는 청년, 용돈 벌이로 알바(아르바이트)를 해가면서 구직활동을 벌이지만 사회는 그렇게 만만치 않다. 아직은 미숙하기만한 청년은 자기 연민만으로도 고통스럽고, 아버지의 따가운 시선과 거북한 질책은 반목을 키우기만 한다. 이렇게 분열되어만 가는 가족 속에서 동네 여인네들의 20년에 걸친 어머니에 대한 보이지 않는 집단 폭력은 마침내 피해망상을 동반한 불안장애 등 심각한 우울증으로 내몰지만 남편과 아들은 이러한 징후에 무심하기만 하고 마침내 의사의 아내가 되어 출가한 누이의 관심으로 발견되기에 이른다.

같은 거주공간에 있지만 아내, 어머니의 고통과 병세조차 알지 못하는 남편과 자식, 더욱이 출가한 딸이 어머니의 치료를 요구함에도 아내의 유약한 성격 탓으로 돌리고 무관심으로 일관하려는 이기적이기만 한 아버지의 형상은 50대 가장의 비뚤어진 자존심과 고집을 대변한다.
건설현장에서 막노동을 하며, 인부 아저씨들로부터 아버지들의 처지와 생각을 배우고 삶의 겸허함이 지니는 지혜를 읽어낸다. 자신만의 질서와 지혜를 다져온 아버지들이 이해 할 수 없는 상황이란 곧 부인되고 무시될 수밖에 없는 것일 수도 있다는 것, 그렇지만 그네들이 쌓아온 삶의 지혜에는 많은 영양분도 있다는 것이며, 배려함으로써 이해를 구하고 존중함으로써 보석같은 삶의 노하우들을 배울 수도 있음을 터득한다. 마침내 어머니가 시달리는 정신병이 얼마나 위중한 것인지를 아버지 스스로의 깨달음으로 견인하고, 그의 가장으로서의 권위에 숨겨진 지혜를 존중함으로써 부자의 갈등은 점차 해소되어간다.

어머니 정신병세의 원인이 된 이웃의 질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이사’해야 한다는 것, 작품의 제목처럼 백수알바생인‘다케 세이지’가 집장만을 위해, 즉 가족을 위해, 또한 바로 자신을 위해 자기 삶의 책임을 비로소 수행하는 사람으로 곧추 서는 것은 배려와 이해와 존중이란 막혔던 혈관을 뚫어 원활한 소통이 이루어짐으로서 사랑이 교류하게 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천방지축의 백수 청년이 성숙한 성인으로 성장하는 소소한 일련의 현실적 구직활동이나 직장생활의 흐믓한 일화들이 소설의 풍미를 이끌고, 고독하기만 한 현대인들에게 가족의 중요성과 해체된 감성들을 추스르는 방안을 제공해 주기도 한다. 사실 “돌이키기엔 늦었지만, 포기하지 않으면 늦지 않을 거라고...”와 같은 뻔한 조언들이 진정한 의미로 다가설 때 우리들의 정신세계는 한층 깊어지고 풍요로워 질지도 모른다. 권위적이기만 한 이 땅의 아버지들, 자신들의 세대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소통을 단절하는 딸들, 그리고 아들들, 자기를 잃어버린 어머니들 모두가 자신들을 돌아보게 하는 작품이다. 재미있는 일상의 이야기들로 가족의 모습을 따뜻하게 그려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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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를 창조하는 새로운 복제자 밈
수전 블랙모어 지음, 김명남 옮김 / 바다출판사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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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의 모든 사상이나 현상의 근원에 대한 생각들이란 궁극적으로 우리 인간의 본질에 대한 규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의 본성- 생물학적이 되었든, 정신 또는 마음이라는 형이상학적 관점이 되었든 - 에 대해 그토록 알아내지 못해 모두들 안달하는 것일까? 결국 인간의 실체에 대한 정의야 어찌되었건‘인간’이 세상의 주체, 즉 설계자이고 기획자이며 제조자이고, 또한 그렇기에 이로부터 파생되는 정치와 경제, 문화 등의 인간사회 구조에 숨겨진 본질적인 원천적 요소를 이해하는 것은 인간자신들을 위해 당연한 물음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신다윈주의자로서 동물생물학자인‘리처드 도킨스’가 그의 저서『이기적 유전자:The selfish gene』에서 생물학적 복제자인 유전자에 비견하여 처음으로 일종의 문화전달자인 밈(meme)을 언급함으로써 유전자가 아닌‘제 2복제자’에 대한 관심이 시작되었다 할 수 있는데, 이는 현대 인간의 사유와 행동양식이 소위 생물학적 배경만으로 해석 되거나 규명될 수 없다는데 기인한다. 진화심리학을 비롯한 사회생물학자들의 생존유지와 번식이라는 유전자의 생물학적 논리에 기반한 설명이 여전히 개체의 행동을 장악하고 있는 유전자의 지배력에 근인(根因)하는 것이기에 많은 부분에서 타당성을 지니고 있으나 또한 많은 부분에서 설명되고 있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결국 오늘의 인간의 모습, 즉 큰 뇌를 가지고, 언어란 의사소통 기호를 지니며, 각종 전자장치를 만들어내고, 우주공간을 비행하는 것은 물론 더 이상 번식하려 하지 않는 개체가 늘어나는 등 이러한 현상 중 많은 것들을 유전자의 자연선택원리 만으로 설명하기에는 무언가 불명확하고 부족하다는 것이다. 유전자가 아닌 스스로 복제하고 진화하는 제 2의 복제자가 있다는 것인데, 바로“의복과 음식의 유행, 의식과 관습, 예술과 건축, 기술과 공학 등 문화가 뇌에서 뇌로 퍼져 가면서 그 수가 늘어나며 진화하는”문화전달 단위이자 모방의 단위인‘밈(meme)’이 그것이란 것이다. 더구나 이 저술은 밈과 유전자와의 공진화 역사는 물론 경쟁관계에서 우월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고 까지 주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제2의 복제자라는 밈이 진화알고리즘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 된다. 변이와 선택, 그리고 보유(유전)라는 자연선택의 원리인데, 밈 역시 퍼질 수만 있다면 무조건 퍼지게 하려하고 뇌 속의 제한된 처리 용량에 들어가기 위해 경쟁한다. 그리고 뇌를 비롯한 저장장치에 저장되고 모방을 통해서 다른 뇌로 전달된다. 또한 유능한 복제자의 필수요소인 정확한 복사와 복사량을 늘리고 오래 살아남기 위한 전략을 모두 갖추고 있으니 복제자로서의 조건은 확보하고 있는 것이 된다. 특히 밈의 핵심은 남을 관찰함으로써 어떤 행동에 대해서 뭔가를 배우는‘모방’이다. 이 모방을 통해서 밈은 선택되고 복제되기 위해 경쟁하며, 그래서 밈은 자신을 확산시키기 위한 다양한 전략들을 만들어 내는데, 인간 진화역사에서 중요했던 것들인 성(性)이나 권력, 음식에 관한 단어나 문장, 관련 형상들을 통해 보다 많이 선택되어 복제되고, 사람들의 대화에 자주 오르내리는 흥미진진한 스캔들이나 끔찍한 뉴스, 유용한 지침, 위험 회피를 위한 조언과 같은 말들로 자신을 퍼뜨린다. 밈 역시 유전자와 마찬가지로 목적의식이란 것이 있을 수 없다. 다만 자신이 많이 복제되어 오래 동안 살아남는 전략을 취할 뿐이다.

어쨌든 “인간은 진화 역사에서 최고의 전환점은 우리가 서로 모방하기 시작한 순간”, 바로 그 순간부터 제2의 복제자 밈이 나서기 시작했으며, 이 밈이 인간의 뇌를 거대하게 만든 선택압으로 작동했고, 유전자의 선택환경과 그 변화방향에까지 압력을 행사했다는 것이다. 결국 오늘의 인간은 유전자와 밈의 공진화에 의한 결과이며, 나아가 밈이 유전자의 고삐까지 틀어쥔 상황이라고 까지 주장한다.
저자‘수전 블랙모어’는 이러한 밈의 본질 하에 인간과 인간사회의 행동과 사고, 문화 전반에 걸친 해석으로 나간다. 그래서 이 저술은‘밈학’이라는 새로운 학제의 영역을 개척하는 시발점이 되는 중요한 저작물이라 할 수 있다.

사회생물학을 비롯한 심리학, 과학철학, 신경과학, 사회학을 망라한 인간 행동에 대한 다채로운 해석과 밈이론은 경쟁을 벌인다. 어떠한 해석과 이론이 더 유효한가, 그리고 보다 경제적이며 종합적이고 시험 가능한 예측들을 낳을 수 있는 것인지를 통해서 밈이란 제2복제자의 본성을 명료화하고 확증하고 있다. 일례로 인간의 짝짓기는“최고의 모방자와 결합하라!”라는, 즉 당시에 가장 선호되는 밈을 모방하는 남성과의 결합을 선호하게 만들었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오늘날 최고의 모방자라는 최신 유행하는 옷, 음악취향, 종교적 견해나 정치적 견해, 교육수준의 외형적 특성과 밈을 많이 퍼뜨리는 생활을 하는 작가나 예술가, 기자, 아나운서, 영화배우, TV탤런트, 가수, 그리고 유명 정치인(권력자)을 여성들이 선호하는 것을 보면 일견 타당한 논리로 이해된다. 결국 사람들은 상대의 밈복사, 사용, 확산 능력을 기준으로 배우자를 선택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더구나 진화심리학과 같은 사회생물학으로서는 거의 해결하지 못하는 난제인 인간의 금욕주의 행동이나, 산아제한, 입양과 같은 현상도 밈이론으로는 명쾌한 가설과 설명을 낳는다. 출산율 저하의 문제를 대다수의 사회이론은 경제적 문제, 또는 낙태의 용이성, 도덕성의 쇠락이라고 해석하고 있지만, 보다 근원적인 요인은 여성의 높은 교육, 인쇄나 방송매체에 대한 접근성과 같이 여성의 소통 대상인의 증가로 인한, 다시말해 유전자보다는 밈에 시간을 많이 쏟는 여자들, 더 많이 모방되는 인물의 확산에 있다고 해석하고 있다. 나아가서 모방되고 복제될 가능성이 높은 것들, 사람들의 말이나 전달수단을 통해서 빈번하고 많이 오르내리는 성이나 권력, 음식을 보면 그러한 것들이 얼마나 강하게 살아남아 복제되고 확산되는지 이해 할 수 있게 된다.

다소 극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겠지만, 현대 인간의 섹스가 아이를 번식하기 위해 하는 행위라는 생물학적 인식으로 과연 해석이 가능한가하면, 사실 누구도 다음세대에 유전자를 많이 남기겠다는 의지로 섹스를 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아기를 만들려고 야한 잡지”를 사고, 야한 동영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섹스라는 행위 그 자체의 즐거움 때문이라 하는 것이 옳은 판단일 것이다. 즉 성은 이미 밈에 장악되어 있다는 것이며, 이처럼 유전자라는 복제자가 밈이라는 제2의 복제자에게 목이 메달려 끌려가고 있는 형국이란 얘기가 된다.
이 밖에도 밈이 복제와 확산을 위해 선택한 술수로‘이타성의 술수’나‘진실성의 술수’의 본성을 통해 복사의 충실도와 다산성, 그리고 긴 수명의 유지를 위한 책략은 도킨스가 말하는 이기적 유전자의 행동전략을 그대로 취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특히 밈이 이들 전략을 수행하기 위해 다음절(多音節)언어로 그리고 언어의 기호인 문자를 다듬고 나아가 종이위의 기호인 책으로, 라디오로, TV로, 컴퓨터 저장장치로, 또한 확산의 속도와 범위를 확대하기 위한 철도, 도로, 배, 항공기와 같은 이동수단은 물론 인터넷이라는 월드와이드웹으로의 이행은 복제자로서의 밈의 성질을 표현하고 있다 할 수 있다. 밈의 이러한 본성을 이처럼 규명하고 복제자로서 인식하는 실익은 인간을 이해하고 인간의 미래를 예측하는 더할 수 없이 효과적인 도구라는 점이다. 어떤 현상이나 물체가 선택되고 오래 살아남을 것인가는 복사의 충실도, 확산의 용이성과 양적범위, 내구성과 같은 수명이 곧 성공적인 밈을 판단하는 자명한 판단 기준이 될 것이다. 궁극적으로 이러한 복제자들의 경쟁은 더 나은 복사 체계의 발명을 촉진하고 더 획기적인 모방능력을 지닌 것으로의 진행을 압박할 것이다. 또한 유전자의 운반자인 용기로서의 인간 개체는 밈의 운반자라는 동일한 의미의 부여가 가능한데, 소위 자유의지라는 망상에 입각한 자아의 실존이란 상상의 존재를 저자는 자아복합체(일명 셀프플렉스)라는 밈들의 덩어리로 규정하듯이 몸과 뇌와 밈들로 구성된 인간 존재로서의 인간 개체의 이해는 더 이상 독립적 마음이라는 허상을 지우고 진정으로 자유로운 삶으로의 방향으로 구원해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사실 이정도로 인간의 정체성을 해체하고 나면 단지 유전자와 밈의 집합체에 불과하여 인간 존재 의의에 대한 허무성과 비록‘데니얼 데닛’의 표현처럼‘무해한 망상’일망정 자아의 상실로 두려움이 엄습하기도 한다. 제2의 복제자가 완전히 유전자를 압도하는 상황이란 밈(meme)이라는 모방전달자의 세상, 어쩌면 휴머노이드와 같은 로봇의 세상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인간이 스스로를 진정 존중한다면 저자의 역설적 말처럼 자기 복제에만 관심이 있는 이기적인 자아 복합체의 희생자이기를 그만두는 것일지도 모른다. 실체가 없는 기만적인‘자아’에 휘둘림으로써 오늘의 인간들, 인간사회의 살육과 전쟁과 탐욕이 그칠 줄 모르는 것이고, 더구나 배아세포로부터의 줄기세포를 추출하고 인간복제의 자기 파괴적 행위를 서슴지 않는 인간의 모습은 밈의 존재를 더욱 확실하게 하는 증거가 될 것이다. 인간의 진화와 현대 인간의 본성을 통찰하는 데 있어 밈이론은 분명 탁월한 통찰력을 제공하는 개념이다. 과연 제 2복제자로서의 밈이 인간규명의 훌륭한 이론으로 지지 받고, 진정한 학문으로서 정착할지는 두고 보아야 할 일이겠지만,‘수전 블랙모어’가 정의하고 그 가설의 가능성을 진일보시킨 저작이라는 의미에서 모방자의 진화론적 해석은 우리의 직관과 사고, 일상의 행위에 엄청난 파문을 일으키게 한다. 도킨스의 생물학적 진화의 걸작 『이기적 유전자』에 버금가는 인간의 문화적, 형이상학적 진화의 걸작으로 감히 이 저작은 손색이 없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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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 스웜 - 가장 단순한 방법으로 세상을 뒤바꾼 가장 영리한 집단
피터 밀러 지음, 이한음 옮김, 이인식 해제 / 김영사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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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집생활을 하는 사회성 높은 곤충이나, 새나 물고기와 같은 무리생활을 하는 동물들의 행동은 우리 사람들의 눈에 그저 신비스럽기 그지없을 때가 있다. 먹이가 있는 곳의 최단경로를 찾아내는 개미나, 최적의 거주지를 선택하고 판단하는 벌의 행동, 일시에 날아오르고 멋지게 V자 대형을 이루고 날아가는 새 떼의 우아하기까지 한 군무(群舞), 엄청난 높이로 정교하게 쌓아 올려 진 흰개미의 흙 탑 등은 그네들에게 무언가 인간을 능가하는 지성이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기대까지 갖게 한다.

사실 우리 사람의 직관이라는 선입견으로 보게 되면 그들의 일사불란한 행동은 마치 탁월한 지능을 갖춘 강력한 리더에 의해 정교하게 계획, 설계되고, 물샐 틈 없는 감시체계 속에 실행되는 것만 같다. 그러나 오랜 시간 관찰을 해보면 어떤 명령에 의해 움직일 수 없음을 이내 발견하게 되는데, 광활한 대지위에 않아있던 수천의 새들이 동시에 날아오르는 것은 특정한 누군가의 지시가 전달되어 그 전달이 1킬로미터 떨어진 동료에게 이르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또한 개미들이 먹이를 찾으러 군체(群體)를 떠나 특정 장소로 가는 경로를 누가 알려주는 것인가 하면 결코 알려주는 개체도 없으며, 지시자도 없다는 것을 이내 발견하게 된다. 아무도 알려주는 이나 지시자가 없음에도 어떻게 완벽한 시스템처럼 조직화되고 과업이 완성되는 것일까? 그리고 그 원리와 속성을 이해하는 것이 우리에게 어떠한 이득이 있는 것일까?

이와 같은 궁금증의 비밀을 알려주는 것만으로도 이미 이 저술은 매혹적이지만, 그 비밀이 발상의 전환은 물론 창의적 적용을 통해 우리 인간사회의 고민을 해결하는 지혜까지 선사하고 있어 지적쾌락에 더해 복잡계를 이루는 오늘의 사회를 이해케 하여 실용적 이익까지 거두게 하는 영리한 저작이라 할 수 있다.
개미의 먹이 찾기 이동경로에서 복잡해진 영업 네트워크 구축방법을 찾아내고, 꿀벌의 거주지 선택에서 집단지능과 지식의 다양성이 만들어내는 지혜를, 그리고 새떼의 군무에서 로봇지능의 알고리즘으로 발전케 하는 것처럼 발상을 자극하는 무궁무진한 원천적 지혜들을 발견하게 된다.

먹이가 있는 곳에 가려면 몇 갈래의 길이 있지만, 개미가 지나는 곳에는 페로몬이 남는다. 짧은 경로를 지나온 곳은 긴 경로로 간 개미의 밀도보다 시간적으로 빠르기 때문에 페로몬이 다른 경로보다 짙게 되고 그 짙은 페로몬은 개미들을 안내한다. 결국 점진적으로 개미들은 가장 짧은 경로로 모여든다는 것이다. 단지 개체의 본능적인 행동방식이 의미 있는 집단행동이 되는 것으로, 그저 개체 자신의 행동일 뿐이지만 집단으로서는 조직화된 행동이 되는 것과 같다. 여기서‘자기 조직화’가 창발하는 조직구성을 위한 방법론적 힌트를 획득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한편 새로운 거주지의 마련을 위해 벌들이 하는 선택의 과정은 흥분을 자아낼 정도이다. 몇 곳의 장소를 물색한 정찰벌들의 반복되는 춤을 보고 후보지를 지지하는 벌들의 비율이 적정수준에 이르기까지 검토와 지지자가 늘어남으로써 최상의 결과를 선택하는 벌 무리의 지혜는 소위 '대중의 지혜(wisdom crowds)'가 영리함을 능가하는 단적인 실례가 된다. 갈수록 거대해지는 기업조직에서 다수의 구성원들이 하는 언어에 귀를 기울이는 것만으로도 탁월한 예측이 될 수 있으며, 다수가 발하는 다양함이 영리함을 능가하는 선택을 할 수 있다는 예증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집단의 다양성을 “2+2”와 같이 단순한 과제에 적용하는 것은 어리석을 것이다. 게다가“거만한 지도자, 다양성이 부족한 구성원, 외부 정보의 경시”와 같은 불행한 특징들이 조직될 경우에는 오히려 커다란 실수를 저지르게 되기도 하며, 전체 시스템을 보지 못하고 개인의 국지적 부문에만 초점을 맞출 경우 시스템의 복잡성을 외면하여 재앙을 초래하기도 한다. 우호적인 경쟁, 지식의 다양성은 추구하여야하지만 환원적 편견이나 집단사고(groupthink)와 같은 우는 경계하여야 할 것이다.

이외에도 분산지능이 망(network)의 자기 치유적 기능을 위해 어떻게 효율적으로 발휘되며, ‘간접협동’이라는 독특한 영리함을 보이는 흰개미의 개체 수준의 단순한 규칙의 고수가 자기환경에 전략적이고 전술적인 대응책인가와,‘적응모방’이라는 서로 상호작용을 하라는 지극히 단순한 알고리즘이 그 멋진 새들의 집단비행을 만들어내는 것과 같은 실험과 연구사례의 설명은 정보공유 체계의 잇점, 로봇 지능개발 분야의 적용처럼 우리세계에 기발한 아이디어와 전략을 제공하기도 한다.
체커게임이나 스워머 노이드(swormer-noid)와 같이 개체의 단순한 행동의 경험 누적만으로 조직이나 집단의 의미있는 패턴을 구사하게 할 수 있다는 발상은 바로 이 저술이 통찰하고 지향하는 지성이라 할 수 있다.

이렇듯 긍정적인 시사도 있지만 메뚜기 떼와 같이 대규모로 인간의 작물에 손실을 끼치는 부정적 행동에서도 우린 지혜를 찾아낼 수 있다. 결코 군집 생활을 하지 않는 메뚜기가 어떻게 재앙을 일으키는 약탈적 무리로 변하는 것일까? 이유는 메뚜기의 근육질 뒷다리가 자극을 받았을 때 그들은 자신들의 개체가 지나친 밀도로 과밀상태임을 알리는 신호가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서로 잡아먹으려는 행동과 잡아먹히지 않으려는 행동의 촉발, 즉 생존을 위해서는 계속 움직여야 한다는 충동이 거대한 떼를 형성하여 인간에게 막대한 피해를 주는 약탈자가 되는 것인데, 단지 메뚜기 뒷다리의 사소하고 하찮은 자극이 엄청난 결과로 이어지는 자연시스템의 한 사례이다. 이와 같은 예가 사우디아라비아의 연례 성지순례일에 발생했는데, ‘자마라트’라는 세 기둥에 의식을 치루기 위해 수십만의 행렬이 일시에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앞 사람의 1분도 안 되는 지체가 대(大)행렬의 순간적인 정체로 수 백 명이 압사한 사건이다. 사건은 불규칙한 흐름의 패턴, 군중의 밀도에 대한 분석을 통해 시정되었는데, 이때 메뚜기의 행동연구는 훌륭한 모델이 된다. 또한 직접적으로는 메뚜기‘떼’로의 전환을 예방하는 방책으로 밀도의 역치수준을 알아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발견도 가능케 한다.

극도로 복잡해져만 가는 네트워크(網)사회라 할 수 있는 오늘의 현대사회는 이처럼 어디선가의 작은 문제가 사회전체를 마비시킬 수 있다. 시골길 어느 고압선에 나뭇가지의 작은 접촉이 대도시의 정전을 유발하고, 산업전체에 막대한 손실을 초래하기도 하며, 예기치 못한 대형 자연재해는 인간사회를 혼란에 빠뜨려 순간 사회기간망을 무용지물로 만들기도 한다. 너무 복잡해서 어디에서 문제가 발생했는지, 무슨 문제인지를 파악하는 것도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개미사회의 자기조직화나 분산지능, 자기 치유적 기능,  꿀벌의 지식 다양성에 대한 양(Positive)의 되먹임 행동, 단지 이웃과의 상호작용이라는 단순 알고리즘에서 우린 이들을 해결할 해법을 발견하게 된다. 하찮은 미물, 무심코 보여지는 새와 물고기의 움직임에서, 바로 생물의 진화라는 자연 시스템에서 상상치도 못했던 지혜를 보게 된다. 영업, 물류, 조직 등 비즈니스 문제를 비롯한 현대 사회의 난제들을 해결하는 해법이 명쾌하게 설명된 그야말로 탁월한 혁신 전략 총서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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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에 얽힌 몇 가지 에피소드


작품 면면이 저항적이고 비딱함이 뚝뚝 묻어나는‘마리오 바르가스 요사’라는 2010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의 몇 가지 주목되는 일화가 이 작가를 처음 접하는 독자들에게 왜 작품의 제재들이 그럴까하는 의문을 부분적으로 해소시켜줄 것 같다.

마리오의 인생 전반에 아마 결정적이고도 커다란 영향이 되었을 사건이라 할 수 있으리라. 고모 훌리아(Julia urqui di illanes)와의 결혼이다. 아버지의 극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29살 유부녀와 19살 조카의 결혼은 페루 상류계층이었던 이들 사회에서는 도덕적으로 수용할 수 없는 버거운 사건임에 분명했다. 뛰어난 가문을 가진 미모의 여성인 고모와 미소년 마리오의 사랑은 그의 자전적 소설 『나는 훌리아 아주머니와 결혼했다』에서와 같이 감각의 떨림, 밤의 신화가 아니었을까?

1955년 결혼하여 1964년 마리오의 배신으로 헤어지기까지 10년간 이어진 이들 부부생활을 엿보게 하는 몇 몇 사진을 보면 훌리아가 주도하는 그들의 관계를 추측케 하는데, 그녀가 1988년 출간한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와 함께한 나의 인생』이란 자서전에서 마리오의 작가적 역량이 꽃을 피우게 하는 절대적 존재였음을 주장하는 것처럼 그녀의 헌신적인 지원은 그의 사회진출에 중대한 기반이었던 것 같다.

이후 두 번째 아내인 파트리샤(patricia Llosa)의 출현이 이들을 갈라놓았으니 훌리아의 증오와 상처는 꽤나 충격적이었던 것 같다. 어쨌건 이 결혼 생활은 『새엄마 찬양』이나 『리고베르토씨의 비밀노트』라는 작품에서 변조된 모습으로 표현되고 있다 할 수 있는데, 결코 배신은 아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오히려 여신으로서 숭배되었던 대상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들게 한다.

또 하나 마리오와 남미문학의 거두로 잘 알려진‘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Gabriel Garcia Maerquez)’와 치고받은 사건은 폭소를 자아낸다. 마르케스와 요사는 부부가 함께 어울릴 정도로 친근한 사이였는데, 요사가 한동안 스웨덴 여성과 바람이 나자 요사의 아내인 파트리샤를 위로하던 마르케스부부에 적의를 갖게 되었고, 급기야 요사가 마르케스에 주먹을 날려 그의 눈에 시퍼런 멍과 상처를 남긴 사건은 1976년 남미사회를 시끌벅적하게 하였을 정도로 대형 스캔들이었던 모양이다. 이 자유로운 영혼(?)의 여성에 대한 소유욕은 그야말로 그의 작품 속 작중 인물처럼 집요한 것 아니었을까? [사진: 멍든 마르케스]

이후 마르케스와 요사의 사이는 원수지간으로 변하였고, 2002년 마르케스가 자서전의 추천사를 요사에게 요청하면서 근 30년간의 오해를 풀었다고 하니, 이 에피소드는 거장들을 인간적 친근함으로 다가오게 한다. 성 모럴에서부터 종교, 정치, 경제, 문화를 아우르는 주류의 정신에 예리한 반란과 저항의 성향이 그의 사생활과 오버랩되어 미소를 머금게 한다. 매력적인 소년이 75세의 노작가의 얼굴에 남아있는 것 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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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이 2010-10-18 2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재미있는 에피소드에요. 요즈음 제가 요사에 대한 모든 정보를 필리아님으로부터 얻고 있어요. 고맙습니다.

필리아 2010-10-19 08:50   좋아요 0 | URL
훌리아의 자서전이 출간되면 꽤 인기가 있을 것 같은데요...,감사합니다~~

릴케 현상 2010-10-19 0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 정말 재미있네요. 잘 읽었습니다.

필리아 2010-10-19 08:52   좋아요 0 | URL
눈탱이가 밤탱이가 된 마르케스의 미소짓는 얼굴이 재미있잖아요..ㅋㅋ, 감사합니다~~

프레이야 2011-05-25 18: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뒤늦게 '나는 훌리아 아주머니와 결혼했다'를 읽다가
이 페이퍼를 읽게 되었어요. 정말 재미있는 에피소드네요.
특히 훌리아의 실물을 보게되다니요.
마르케스의 눈탱이 밤탱이도 ㅎㅎ
요사의 다른 책들도 더더 읽고 싶게 만들어요.
 
리고베르토씨의 비밀노트 1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지음, 김현철 옮김 / 새물결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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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예술을 인식할 때에는 소위 칸트가 말하듯이 잠시 선악의 코드, 참과 거짓과 같은 윤리적 코드를 꺼두도록 습관화 되어있다는 얘기가 어느 정도는 맞을게다.‘뒤상’의 도발적인 <변기>와 같은 작품이 사실 일반 사무실에 있거나 용도 그대로 가정의 화장실에 있다면 그것이 무슨 예술작품일 수 있겠는가. 미술 전시장에 놓이고, 수식됨으로써 예술로 읽히도록 강요되는 것이 아닐까? 광기와 적나라함, 그리고 엽기적 몽상과 병적인 감각의 그림을 짧은 생애에 수없이 남긴‘에곤 실레’에 바치는 오마주 같은‘바르가스 요사’의 이 작품 역시 문학이라는 형식을 취함으로써 외설을 피하고 있다 할 수 있지 않을까싶다.

이 다분히 병적인 화가의 그림 한 점 한 점이 허구의 이야기에 실려, 소위 건강한 정신이라는 판에 박히고 빈곤한 상상력과 획일화된 것들을 전복하고 인간의 사고를 옥죄는 사상과 가치들의 허위를 마구 찔러대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금지된 상상력을 자극하고, 감추어진 것들을 파헤쳐 충족되지 못했던, 역설적이게도 병적이고 추잡함이라고 하는 것들을 드러냄으로써 비로소 풍요로운 인간의 정신세계를 완성하고자 하는 반란이 바로 여기서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소설은‘리고베르트’라는 환상과 편집광적인 남자의 비밀노트를 우리들이 훔쳐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데, 작중 인물들이 노골적으로 성애장면을 바라보고 있는가 하면, 마치 작품 전체가 관음증에 걸린 현대인을 배려(?)한 듯이 상상의 관능적 쾌락으로 안내되고 있다.

기원전 6세기 로마의 타키누스왕과 그의 아들에게 겁탈당하고 이를 고발한 후 자살한 여인인‘루크레시아’라는 정절과 정숙한 유부녀의 표상인 이름을 지닌 리고베르토의 아내, 그리고 의붓아들인‘폰치토’와 리고베르토, 이들 세 사람이 만들어내는 고통과 쾌락의 몽환적 세계가 펼쳐진다.[사진: Man Ray(만레이), La Prière, 1930]

“내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세계, 내게 기쁨과 고통을 안겨주는 세계는 ~(中略)~ 상상력과 욕망과 예술적인 기교로 탄생한 인물들이 존재하는 세계, 내가 수년 동안 끈기와 애정을 가지고 모아온 그림, 책, 판화에 담긴 세계”라는 리고베르토의 관점은 그대로 소설이 표현하는 세계이다. 이처럼 미신과 편집광적이며 환상으로 넘쳐나는 남편의 세계를 이해하고 공유하던 루크레시아의 생활은‘순수함의 결정체’처럼 보이지만“천사의 탈을 쓴 독사”와 다름없는 초등학생인 의붓아들 폰치토의 함정으로 파괴되고, 이혼 후 독립된 일상을 살아가지만, 다중 인격체 같은 아이의 거침없는 기만에 저항하지 못한다. 이렇게 소설은 리고베르토와 루크레시아, 그리고 폰치토와 루크레시아라는 두 개의 축으로 전개된다고 할 수 있는데, 폰치토와의 이야기는‘에곤 실레’의 그림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으며, 리고베르토와의 이야기는‘관능의 미학’이란 전체의 주제를 구성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루크레시아의 첫 연인이었던‘모데스토(일명 플루토)’와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일을 저질러보는 것, 세속적인 삶이 충동에 충실해지는 것”으로서의 뉴욕과 파리, 베네치아의 화려한 경로에서 보여주는 성희(性戱)가 보여줄 수 있는 상상의 모든 감각을 마비시킬 정도의 직설적인 묘사는 부도덕을 넘어서는 도덕적 상승의 최고의 경지라고 주장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더구나 이 성애(性愛)의 장면 모두는 루크레시아가 리고베르토의 요구에 의해 침실에서 들려주는 것이고, 그 들려지는 장면이 불러일으키는 관능의 쾌락은 성적 감각을 고조시키는 수단이 되고 있다. “욕망이 질투심을 밀어내는”경지, 과연 그것, 쾌락의 지고한 경지가 소위 최대행복을 추구하는 공리주의적 도덕의 최고라는 말이라면 일견 논리적이지만 우리의 감성이 수긍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확신이 서지 않는다.

춘화(春畵)가 연상되는‘우타마로’의 판화 두 점이 내려다보는 리고베르토와 루크레시아의 관능의 내음과 음색이 가득한 침실, 한결같이 치마를 걷어 올리고 이상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실레 그림에 집착하는 폰치토의 불경스럽기만 한 대화는 ‘만레이’의 사진,‘구스타프 쿠르베’의 음부를 드러낸 나신의 그림, 여인들의 향기를 그려보려고 시도했던‘클림트’의 <다나에>, 더구나‘아인란트’나 ‘로제 바이양’, 성의학자‘허벌록 엘리스’까지 인용되면서‘마조흐’의 『모피를 입은 비너스』부류의 변태적 성애를 일찌감치 넘어서버린다. 그런데 이 작품이 그리 단순치만은 않은 것은 종교에서부터, 페미니즘, 상류사회단체들의 위선과 모순, 기만성을 비롯해 보편성을 획득했다고 주장하는 주류적 사고를 처참할 정도로 조롱하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쾌락의 지고(至高)인 성희의 찬양은 바로 솔직하지 못한 인간과 인간사회에 대한 회의와 도덕성에 대한 수위 높은 비판의 다른 표상임을 이해 할 수 있게 된다. “우리는 과연 무슨 이유로 이 무료한 우주에서 비틀거리는 팽이처럼 맴돌고 있단 말인가!”이 성적 쾌락에 관한 백과전적인 관능적 기억과 환상의 노트가 누비고 다니는 실제와 허구의 상상력에 자극되고 마비되느라 시종 경직되었던 감각세포들이 고생 꽤나 하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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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이 2010-10-16 2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엄마 찬양'을 앞부분 몇장 정도 보았어요. 말씀하시는 내용이 서로 비슷하네요. 이게 연작인건가요?

필리아 2010-10-18 22:10   좋아요 0 | URL
연작은 아닌것 같구요, 작가가 에로티즘에 천착한 것 같습니다. 특히 회화를 통한 이야기 전개가 대다수의 작품에 공통적으로 보이네요...//새엄마~,리고베르토~,나쁜소녀~ 세 작품이 동일인물들로 구성되었다는 걸 보면 연작의 특성도 있는것 같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