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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고베르토씨의 비밀노트 1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지음, 김현철 옮김 / 새물결 / 2004년 12월
평점 :
우리가 예술을 인식할 때에는 소위 칸트가 말하듯이 잠시 선악의 코드, 참과 거짓과 같은 윤리적 코드를 꺼두도록 습관화 되어있다는 얘기가 어느 정도는 맞을게다.‘뒤상’의 도발적인 <변기>와 같은 작품이 사실 일반 사무실에 있거나 용도 그대로 가정의 화장실에 있다면 그것이 무슨 예술작품일 수 있겠는가. 미술 전시장에 놓이고, 수식됨으로써 예술로 읽히도록 강요되는 것이 아닐까? 광기와 적나라함, 그리고 엽기적 몽상과 병적인 감각의 그림을 짧은 생애에 수없이 남긴‘에곤 실레’에 바치는 오마주 같은‘바르가스 요사’의 이 작품 역시 문학이라는 형식을 취함으로써 외설을 피하고 있다 할 수 있지 않을까싶다.
이 다분히 병적인 화가의 그림 한 점 한 점이 허구의 이야기에 실려, 소위 건강한 정신이라는 판에 박히고 빈곤한 상상력과 획일화된 것들을 전복하고 인간의 사고를 옥죄는 사상과 가치들의 허위를 마구 찔러대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금지된 상상력을 자극하고, 감추어진 것들을 파헤쳐 충족되지 못했던, 역설적이게도 병적이고 추잡함이라고 하는 것들을 드러냄으로써 비로소 풍요로운 인간의 정신세계를 완성하고자 하는 반란이 바로 여기서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소설은‘리고베르트’라는 환상과 편집광적인 남자의 비밀노트를 우리들이 훔쳐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데, 작중 인물들이 노골적으로 성애장면을 바라보고 있는가 하면, 마치 작품 전체가 관음증에 걸린 현대인을 배려(?)한 듯이 상상의 관능적 쾌락으로 안내되고 있다.
기원전 6세기 로마의 타키누스왕과 그의 아들에게 겁탈당하고 이를 고발한 후 자살한 여인인‘루크레시아’라는 정절과 정숙한 유부녀의 표상인 이름을 지닌 리고베르토의 아내, 그리고 의붓아들인‘폰치토’와 리고베르토, 이들 세 사람이 만들어내는 고통과 쾌락의 몽환적 세계가 펼쳐진다.[사진: Man Ray(만레이), La Prière, 1930]
“내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세계, 내게 기쁨과 고통을 안겨주는 세계는 ~(中略)~ 상상력과 욕망과 예술적인 기교로 탄생한 인물들이 존재하는 세계, 내가 수년 동안 끈기와 애정을 가지고 모아온 그림, 책, 판화에 담긴 세계”라는 리고베르토의 관점은 그대로 소설이 표현하는 세계이다. 이처럼 미신과 편집광적이며 환상으로 넘쳐나는 남편의 세계를 이해하고 공유하던 루크레시아의 생활은‘순수함의 결정체’처럼 보이지만“천사의 탈을 쓴 독사”와 다름없는 초등학생인 의붓아들 폰치토의 함정으로 파괴되고, 이혼 후 독립된 일상을 살아가지만, 다중 인격체 같은 아이의 거침없는 기만에 저항하지 못한다. 이렇게 소설은 리고베르토와 루크레시아, 그리고 폰치토와 루크레시아라는 두 개의 축으로 전개된다고 할 수 있는데, 폰치토와의 이야기는‘에곤 실레’의 그림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으며, 리고베르토와의 이야기는‘관능의 미학’이란 전체의 주제를 구성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루크레시아의 첫 연인이었던‘모데스토(일명 플루토)’와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일을 저질러보는 것, 세속적인 삶이 충동에 충실해지는 것”으로서의 뉴욕과 파리, 베네치아의 화려한 경로에서 보여주는 성희(性戱)가 보여줄 수 있는 상상의 모든 감각을 마비시킬 정도의 직설적인 묘사는 부도덕을 넘어서는 도덕적 상승의 최고의 경지라고 주장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더구나 이 성애(性愛)의 장면 모두는 루크레시아가 리고베르토의 요구에 의해 침실에서 들려주는 것이고, 그 들려지는 장면이 불러일으키는 관능의 쾌락은 성적 감각을 고조시키는 수단이 되고 있다. “욕망이 질투심을 밀어내는”경지, 과연 그것, 쾌락의 지고한 경지가 소위 최대행복을 추구하는 공리주의적 도덕의 최고라는 말이라면 일견 논리적이지만 우리의 감성이 수긍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확신이 서지 않는다.
춘화(春畵)가 연상되는‘우타마로’의 판화 두 점이 내려다보는 리고베르토와 루크레시아의 관능의 내음과 음색이 가득한 침실, 한결같이 치마를 걷어 올리고 이상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실레 그림에 집착하는 폰치토의 불경스럽기만 한 대화는 ‘만레이’의 사진,‘구스타프 쿠르베’의 음부를 드러낸 나신의 그림, 여인들의 향기를 그려보려고 시도했던‘클림트’의 <다나에>, 더구나‘아인란트’나 ‘로제 바이양’, 성의학자‘허벌록 엘리스’까지 인용되면서‘마조흐’의 『모피를 입은 비너스』부류의 변태적 성애를 일찌감치 넘어서버린다. 그런데 이 작품이 그리 단순치만은 않은 것은 종교에서부터, 페미니즘, 상류사회단체들의 위선과 모순, 기만성을 비롯해 보편성을 획득했다고 주장하는 주류적 사고를 처참할 정도로 조롱하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쾌락의 지고(至高)인 성희의 찬양은 바로 솔직하지 못한 인간과 인간사회에 대한 회의와 도덕성에 대한 수위 높은 비판의 다른 표상임을 이해 할 수 있게 된다. “우리는 과연 무슨 이유로 이 무료한 우주에서 비틀거리는 팽이처럼 맴돌고 있단 말인가!”이 성적 쾌락에 관한 백과전적인 관능적 기억과 환상의 노트가 누비고 다니는 실제와 허구의 상상력에 자극되고 마비되느라 시종 경직되었던 감각세포들이 고생 꽤나 하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