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과 6펜스 / 과자와 맥주 동서문화사 세계문학전집 84
서머싯 몸 지음, 이철범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17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래 감상글은 이 책에 수록된 두 편의 작품 중 과자와 맥주(Cakes & Ale)에 한정된 것입니다.


그 어떤 소설문학이 작가 의식의 반영이 아닌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라는 점에서 모든 소설은 작가로서 한 인간의 배설물일 것이다. 그러나 많은 소설 작품들은 이것을 노골적으로 인식하기 어려운 것이고, 그렇기에 문()’이라며 지식의 한 체계라는 거룩한 이름의 범주로 부른다. 그러한 점에서 내겐 이 작품 과자와 맥주(Cakes & Ale)는 전형적인 작가의 배설물이며, 나아가 그 배설의 쾌락을 즐기려는 교활한 자부심과 비겁함의 산물로 보인다. 당대 영국 문단에 대한 비판이라는 장막의 그늘 속에서 자신이 지속하여 간직하고 싶은 한 때의 쾌락을 보존하고자하는 의지를 엿보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을 비난하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 작품을 서머싯 몸은 자신의 작품 가운데 가장 좋아한다고 말했단다. 여든 살 기념작으로 한 작품을 출간하게 되었을 때, 이 작품을 호화장식으로 출간한 것으로도 은폐된 자기만의 즐거움을 위해 써졌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는 하나의 단서가 된다. 이렇게 추측하게 된 이유는 소설 속 곳곳에서도 드러나는데, 당대 영국 사회의 계급신분에 의한 인간관계에 놓인 뿌리깊은 차별의식과 각종 제약에 의한 인습적 수행에 있어 작가의 분신인 작중 화자인 윌리 어셴든(이하 어셴든이라 함)은 자신의 양육 보호자인 숙부인 교구 목사와 귀족 출신 숙모의 요구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따른 것으로 그려낸다. 나는 여기서 몸의 비겁함과 교활함이 내비치고 있음을 읽는다.

 

또 다른 하나는 소설의 주요 대상 인물 중 하나인 문학 거장으로 불리는 에드워드 드리필드(이하 드리필드라 함)의 죽음에 즈음하여 그의 전기를 쓰려는 소설가이자 비평가인 앨로이 키어(이하 로이라 함)의 문학적 성공을 향한 각종의 수법을 열거하며, 목적과 수단의 교묘한 조합을 통해서 무엇을 해낼 수 있는지, 얼마나 출세할 수 있는지를 더없이 잘 보여 주는 본보기가 바로 로이였다.”,  문학적 재능 없는 자가 문단에서 거들먹거리는 행태를 비판한다. 단지 이것으로 그치는 정도가 아니라, 이미 당대 거장으로 칭송되던 드리필드의 출신배경이나 그의 사생활을 들추어냄으로써 은근히 한 문인의 작품 활동이나 작품 자체를 은근히 비하한다. 몸은 이러한 배설을 통해서 아마도 꽤나 커다란 즐거움을 맛보았으리라.

 

끝으로 하나 더 부가 한다면, 아니 이 소설의 절대 중요 제재로써 반드시 논의되어야 할 내용일 것이다. 드리필드의 첫 번째 부인이었던 로지와의 육체관계를 동반한 열정적 관계에 중층의 의미를 부여해 작가 자신의 의지를 감추는 것으로 보이는 점이다. 이것은 일석 삼조인데, 드리필드라는 문학거인을 추문의 희생자로 삼음으로써 격하시키는 효과를 얻는 것이고, 로지를 한 때 자신의 연인으로 삼음으로써 우월감을 성취하는 것이다. 게다가 로지라는 여인은 현실 속 작가의 쾌락적 사랑의 대상이었던 극작가 헨리 아서의 딸인 수 존스의 변신으로서 글로 보존된 숨겨진 관음의 화신이라는 점이다. 결국 이 소설은 아주 교활하고 비겁하게 써진 작가 개인을 위한 쾌락의 절대물이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을 떨쳐낼 수 없었다.

 

물론 이 소설은 이처럼 자전적 요소들로 작가가 숨기려 했으나 어쩔 수 없이 드러나는 욕망들로 인해 비하될 수 만은 없는, 우리네 인간 개인들과 사회에 대한 성숙한 성찰들이 있으며, 소위 사로잡는다라는 이야기의 구성과 전개에 있어 탁월한 재능을 갖춘 작품임을 부정하기는 어렵기도 하다.  대중 독자를 사로잡는 작가의 재능은 로이라는 드리필드 전기 작업을 수행하는 인물을 빗대어 한 편으론 폄하의 논의로, 다른 한편으로는 소설 작품의 불가피한 요소를 오가며, 바로 대중적 흥미를 자신의 작품에 대한 역설적 정당화 논리로 사용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소설 속 1인칭 화자인 어셴든은 어떤 비평가들은  스스로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작가는 인기를 하찮게 여긴다. 인기란 평범함을 나타내는 증거라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몸은 이 말을 진실로 믿어서가 아니라 역설적이고 다양한 반면이 있음을 말하고자 함이었던 것 같다.  소설의 제목, ‘Cakes & Ale'이 셰익스피어의 십이야에서 인생의 향락, 삶의 쾌락을 뜻하는 관용구로 사용되었 듯, 인기란 다름아닌  일반 독자를 사로잡는 뛰어난 재능임을 입증하는 당찬 실현임을 주장하고자 했던 것일 게다.

 

몸은 어셴든의 입을 통해  어리석은 독자들의 흥미를 끌려는 멜로드라마 같은 사건들도 나한테는 아무 매력이 없었다.”고 말하게 하지만,  이 말은 오히려 더욱 이 작품이 바로 그러한 멜로드라마의 유형이라는 점에서 다분히 역설적 진술인 것이며, 실제 작가는 화자의 뒤에 숨어. 소설들 대부분이 전형적 통속 소설의 범주에 속하는 것들이며,  불멸의 걸작이 햇빛도 보지 못하고 안타깝게 사라지는 일도 있겠지만, 후세 사람들이 그걸 무슨 수로 알겠는가라는 인식을 슬며시 내보이는 미끼로 진술된 것 같다. 이 소설은 쾌락적 흥미를 주 요소로 하고 있다.  때문에 이야기의 재미는 아주 자극적이어서 흥미, 매력, 사로잡는, 향락과 같이 그가 문단의 세태를 빈정거리며 제시한 요소들이 모두 버무려져, 대중적 인기를 얻는 작품이어야 함을 실천한다는 관점에서 애초에 이 소설은 흥미로 가득한 인기를 겨냥한 작품으로 써졌으리라 여겨진다.

 

열여섯 살 쯤으로 추정되는 어셴든은 숙부의 목사관에서 계급적 우월의 태도로 사람들과 세계를 인식한다. 낮은 신분의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거나 함께하는 것은 자신들의 신분까지 천박하게 낮추어지는 것이라 삼가는 것인 관습인 시절이다. 소년 어셴든은 자전거 구입을 숙부로부터 승인 받아내자 홀로 타는 연습을 하지만 실패만을 거듭한다. 이때 두 사람이 자전거를 타고 자신의 앞으로 다가오는데, 소설을 쓴다는 석공의 아들인 드리필드 부부다. 어셴든은 짐짓 거만하게 두 사람을 대하지만 상냥하고 붙임성있게 말을 거는 드리필드 부인의 친절에 그만 드리필드의 도움을 받아 자전거를 홀로 타는 데 일거에 성공하게 되고, 이후 어셴든은 숙부내외 몰래 친분을 쌓아나간다. 사실 이것은 드리필드의 죽음 이후 그의 전기를 쓰려는 동료 작가 로이로 인해 야기된 추억으로 시작된 회고의 기록이다.

 

로이는 세상 사람들이 기대하는 대문호의 이미지에 드리필드를 억지로 끼워 맞추려 한다. 때문에 로이가 쓰는 드리필드의 전기는 아마도 부정적 이미지가 제거된 말끔한 것이 될 것이다.  소문나면 안 될 비밀들을 모두 숨긴 채 번듯한 전기를 엮어 내 놓으려는 것에서 어셴든은 부조리한 당대 문단의 왜곡된 조작적 분위기를 포함한 비판의 시선을 들이댄다. 로이라는 인물은 자메이카 총독을 지낸 영국 고위관료의 아들로 케임브리지 대학을 나와 소설가가 된 한 때의 인기 작가이다. 그는 비평가에 잘 보이려 애쓰는 작가 유형의 대표자다.

 

로이가 어셴든에게 하는  유명한 비평가들과 의견이 다르다고 생각하면 불안하지 않나?” 하는 물음은 그의 인물 됨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 물음에 어셴든은  별로, 나도 글을 쓴 지 벌써 35년이나 되네. 그동안 작가들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걸 많이 보아왔지, 천재라고 추앙받으면서 짧은 시간동안 영광을 누린 뒤 망각의 저편으로 사라진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라며, 문단에 의해 조작된 평판을 얻은 작가와 작품은 결국 쉽사리 잊혀질 뿐이라고 로이의 인식을 비판한다.  그런데 이 인식은 불멸의 걸작과 관련한 인기있는 소설에 대한 어셴든 자신의 인식과 충돌한다. 물론 대중적 인기와 문단 또는 비평계의 조작은 그 성격이 달라 완전한 비교 가치는 아닐 것이지만, 문학작품의 위선이라는 악덕의 관점에서는 동일한 기준이 될 것이다. 사실 어셴든의 당대 문학계에 대한 신랄하고 준엄한 비판이란 것의 이면에는 질투라는 썩 유쾌하지 못한 감정이 도사린 듯 보인다.

 


결국 이 소설은 로이가 쓰려는 드리필드에 대한 매끈한 전기에 대해 어셴든이 숨김없이 쓰는 사실로서의 전기소설이라는 위상을 갖는다고 해도 될 것 같다. 그렇다면 몸의 분신인 어셴든이 진정 비판하고자 하는, 혹은 세상이 추앙하는 대상을 격하하려는 거장은 누구였을까? 가 궁금해진다. 석공의 아들이며, 두 번의 결혼, 중산층 등 평민 계층의 인물을 통해 당대 영국사회의 실상을 비판했던 손 위 세대의 거장은 토마스 하디(1840~1928)이다. 어셴든은 드리필드가 신분이 낮은 자의 자식이라는 점을 반복적으로 자신과의 관계에서 둘이 나누는 대화의 어투나 그가 자신을 대했던 낮은 자세를 눈에 띄게 반복한다.

 

또한 그의 첫 번째 아내인 로지가 술집 여급 출신이며, 자유로운 성적 관계를 주변 사람들의 입을 빌어 지속적으로 비하한다. 이처럼 작가의 작품 자체와는 무관한 극히 사적 삶을 통해 격하하는 동시에, 문단 내 평판을 좌우하는 거대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트래퍼드 부부를 등장시킴으로써, 그들의 종속적 인물로서 문단의 평판을 획득하고 거장으로 불린 것으로 묘사하여 문학적 역량 또한 신뢰할 것이 아니었음을 넌지시 비춘다. 몸은 이를 통해 자신이 통속작가이거나 단지 대중인기에 영합하는 작가로 치부되는 문단 내 현실을 돌파하려는 하나의 배설로서의 쾌락적 글쓰기처럼 여겨지는 이유이다.


나는 소설 속 드리필드의 모델로 추정되는 토마스 하디의 결혼 생활의 진실을 알기 위해 간략한 기록들을 살펴보았는데, 첫 번째 아내는 술집 여급과는 전혀 다른 변호사의 딸로서 오히려 토마스 하디보다 우월한 계급 출신여성이었기에 그 신분 차로 인한 갈등으로 두 사람이 결별한 것이라는 점이다. 물론 이 작품은 소설, 허구의 산물이다. 그런데 그의 두 번째 부인에 대한 묘사는 실제 사실과 상당부분 부합한다.  플로렌스 덕데일로 불리던 여인은 소설의 내용과 같이 하디의 문학적 명성을 자랑스러워했고, 후일 토머스 하디 전기를 집필하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로이가 쓰려는 전기 역시 드리필드의 두 번째 아내인 에이미의 요구에 의한 것이고, 그녀가 직접적으로 관여한다는 의미에서 거의 유사하다 하겠다. 그렇다면 몸은 왜 드리필드의 첫 번째 아내는 다른 성격의 인물로 변조한 것일까? 여기에 이 소설의 향락적 재미가 있다. 이 재미는 대중이 기대하는 멜로드라마적 요소와 더불어 자신이 간직한 소중한 사랑의 기억인 여인을 보존하고자 하는 욕망을 은폐할 수 있는 기막힌 위장 수단이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몸과 열정적 사랑의 시간을 8년 남짓 했던 여인인 수 존스는  내면의 밝은 빛이 밖으로 흘러 넘치는 것 같은 여인이라는 찬양처럼 그의 인생에 유일한 여성이었을 것이다. 소설에서도 로지의 초상화를 온 정성을 다해 그려내는 화가가 등장하고, 그 초상화에 대한 어셴든의 첫 인상은 여기 기록하여 남겨두고 싶을 만큼 강렬하다.  나는 그녀와 그림을 뚫어져라 보았다. 갑자기 심장에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누가 날카로운 칼로 심장을 푹 찌른 것 같았다.(...) 묘하게 기분 좋은 아픔이 느껴졌다.”

 

로지의 아름다움에 대한 찬탄의 수사가 책의 몇 쪽에 걸쳐 흐른다. 너무 아름다워 숨이 막힌다고, 수 존스는 이렇게 소설 속 로지의 몸()을 입고 작가 서머싯 몸의 영원한 여신으로 박제화된다,  나폴리 박물관의 정교한 프시케의 조각상처럼.  실제 수 존스의 초상화는 몸의 평생 절친이었던 영국 왕립미술원 원장이었던 제럴드 캐리가 그린 초상화로 여전히 남아있으며, 이 그림은 아마도 소설 속 로지에 대한 묘사와 거의 일치된 감상을 주는 모양이다.

 

나는 허구의 소설을 작가의 현실적 삶으로부터 유추하려는 이 감상이 부당하다고 여기지 않는다. 이 소설은 다분히 작가의 전기적 작품임을 부인할 수 없는 성격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실제 어셴든에 의해 폄하되고 비판되는 문학비평가로 등장하는 로이가 그렇고, 드리필드의 명성을 유지 존속시키려는 두 번째 부인 에이미나, 드리필드를 문학계의 거장으로서 평판을 만들고, 그로부터 자신들의 비평가의 지위와 영향력을 계속했던 트래퍼드 부부 모두 현실 속 인물들을 모델로 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그렇기 때문이다.

 

후일 몸은 여든 살 기념 인터뷰에서 이러한 사실들에 대한 지적을 모두 긍정했으니 작가의 실제 삶과 분리하여 읽는 것은 오히려 작품에 숨겨진 의도를 방해하게 되리라 생각된다. 신분질서의 비인간적 계층질서에 대한 혐오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체화된 뿌리깊은 인습에 굴종된 모습을 보이지만, 술집 여급 출신이라는 로지의 아름다움에 대한 매혹과 그녀의 분방한 성적 자유의 행로에 대해 진심을 다해 긍정하고 응원하는 것에서 한 개인을 둘러싼 세상의 질서와 관습을 이겨낸다는 것의 모순이라는 어려움을 발견하게 된다.

 

혐오하면서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그 나약함과 사랑과 명예의 소유를 향한 갈망들이 때론 거친 격랑처럼 몰려오고, 때로는 구름 한 점 없는 여름날 저녁같은 고요함이 되어 흐른다.  한 인물의 전기를 쓸 때 전체적 조화를 생각해야 한다는 균형이라는 조작된 글이 아니라 엉뚱한 것을 집어넣어 전체 인상을 흩트리려는 작가의 그 교활함을 사랑하게 된다.  어쩌면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이 작품의 진솔함이 바로 이 소설이 시대를 계속하며 명작으로 독자들을 유인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혐오의 즐거움에 관하여 - 거장의 재발견, 윌리엄 해즐릿 국내 첫 에세이집
윌리엄 해즐릿 지음, 공진호 옮김 / 아티초크 / 2024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성미가 까다롭지만 고상하고, 심술궂지만 고결하고, 독선적이지만

인류의 권리와 자유를 진심으로 열망하는 한 인물을 만나게 된다.”

- 버지니아 울프, 윌리엄 해즐릿 사후 100주년 기념 에세이에서


윌리엄 해즐릿은 최소한 조지 오웰이나 토머스 드 퀸시, 찰스 램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에세이스트로 존경받는 인물이다 라는 평가와 같이 현대의 관문에 들어선 19세기 당대의 새로움을 분석하고 해설해주는 출중한 재능을 지닌 치열한 문장가이자 지성인이었다. 모두에 인용한 해즐릿 사후 100주년 기념 에세이를 쓴 버지니아 울프가 그의 글과 인물됨에 대해 묘사한 것처럼 우리 또한 그의 글에서 유사한 느낌을 갖게 된다. 해즐릿의 글들은 준엄하고 냉소적이며 신랄하고 예리하지만 인간 심리의 깊이를 모색하고 세상사의 이치를 스스로 납득하여 그 사색의 결과를 공유하고 싶어 했던 인류애의 소유자임을 발견할 수 있다.

 

나는 해즐릿의 이 유일한 국역본을 읽으며 시종 야릇한 흥분과 공감을 잃지 않았다. 그의 탐색적이고 분석적이며 냉소적인 비판의 시선에 놓여있는 준엄한 지성과 그 활기가 여기 있는 듯 다가왔기 때문이다. 학식을 존중하지 않는 당대의 분위기와 그를 헐뜯는 블랙우드 매거진과 같은 보수 저널들의 거짓말과 조롱에도 자신의 원칙에 충실했으며, 결코 정부의 도구가 되지 않았던, 오직 진리를 추구하며 굴욕과 환멸의 고통을 겪어냈던 인물에 대한 존경을 갖게 된다.

 

이 에세이집은 버지니아 울프의 기념 에세이와 여섯 편의 해즐릿의 에세이를 수록하고 있다. 독자의 욕심 같아서는 그의 에세이집 인간 행동론, 좌담, 정치 에세이등 보다 많은 글들을 접하고 싶지만, 이 국내 최초의 해즐릿 에세이집은 그야말로 최고의 글들이 엄선되었음을 절로 깨달을 만큼 독보적 강렬함이 발산된다. 1819년 반혁명적인 반동 지식인들과의 투쟁으로 그의 천재성만큼이나 세상에서 배제되어 그의 글들은 사장되었던 것 같다. 이를 다시금 세상에 복귀시킨 장본인이 바로 울프였던 것 같다. 울프는 그녀의 에세이에서 자신은 그를 마음에 들어 했을 거라며 현란하지 않고 화려한 수식 없이 오직 진리를 찾고 싶어 한 절박한 욕구를 위해썼을 해즐릿의 글들을 옹호한다. 그의 글들을 200년이라는 시간 뒤에 이국의 장소에 있는 한 독자가 생생하게 읽을 수 있게 된 것도 아마 울프라는 지성의 덕택이라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200쪽 남짓한 에세이집의 매 페이지마다 이처럼 많은 색인 스티커를 붙인 적이 없었던 듯하다. 거의 모든 페이지가 형광펜 밑줄로 가득 채워졌으며, 옮겨 써 놓은 문장들도 조금 과장해서 거의 노트 한 권 분량에 이르렀다. 이 에세이집의 표제명이 된 혐오의 즐거움에 관하여는 단연 어떠한 수식어도 필요없는 지혜와 집요한 탐구 정신이 돋보이는 글이다. 그 강렬한 맛에 내 정신이 어찔할 정도다. 로버트 루이 스티븐슨의 오늘날 우리는 해즐릿만큼 쓰지 못한다.”는 고백은 결코 실언이 아님을 확인케 된다. 이하 감상글은 여섯 편 중 내게 인상적이었던 세 편의 글에 대한 간략한 인상으로 남겨두고자 한다. 모든 문장을 옮겨오고 싶은 마음이지만 절제 하련다.

 

1. 혐오의 즐거움에 관하여

 

이 글은 해즐릿이 탐색하고 분석한 인간 본성론의 한 단면일 것이다. 이 글이 쓰인 시기에 대한 기록이 제공되지 않아 정확한 시기는 알 수가 없지만 아마 인간 행동론에 수록된 1805년이거나, 그가 모닝 클로니클의 의회 출입기자로 정치 기사를 쓰던 1812년 무렵일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해서 이 글에 투영된 그의 분석 대상이 되었던 인간모델들은 어쩌면 정치인들을 비롯한 소위 권력 계층 인물들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 어조의 신랄함은 더욱 날카롭고 강렬하다.

 

증오에 물리는 일은 있을 수 없고, 농축된 악의처럼 잘 보존되는 것도 없다.

우리는 모든 일에 싫증을 내지만 타인을 조롱하는 일에는 그렇지 않다.” -52쪽에서

 

이는 결코 주의깊고 치열한 관찰을 통하지 않고는 획득될 수 없는 경험적 지식을 바탕으로 한 것처럼 보인다. 정말이지 인간의 마음이란 들여다보면 볼수록 반감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혐오할 게 없으면 생각과 행동의 원천마저 잃어버릴 것 같기만 하다. 우리는 비근하게 이러한 양상을 관찰할 수 있다. 어떤 비극적 사건을 목격하는 일이라면 열정적으로 떼지어 몰려드는 인간 군상들을 보라. 또한 자신들과 조금이라도 다른 이질적 행동을 하는 사람이 보이면 사방의 인간들이 몰려들어 공격하고 괴롭히는 것을 얼마나 쉽사리 볼 수 있는가. 온라인 사회연결망에 어떤 도덕적 아량을 넘어서는 행위자의 영상에 대한 집단적으로 달리는 무수한 비난과 폭력적 댓글들, 이것들에서 우리는 해즐릿이 보았던 얽매임 없이 풀려난 충동적이고 기뻐 날뛰는 야성의 환호, 농축된 악의인 혐오의 즐거움 목격하게 된다.

 

왜 그럴까? 흠잡기 좋아하는 성향, 남들의 행동과 동기를 시기하고 감시하는 편협한 태도에 근인(根因)하는 것이라고 해즐릿은 지적한다. 이 불온한 인간의 본성은 결코 혐오를 버리지 못할 것이라는 인간 본성에 대한 예견은 그대로 오늘의 우리 사회 현실의 이해 도구가 되어줄 수 있다. 그는 만일 인류가 올바름을 희망했다면 오래 전에 이루었을지 모른다.”며 공포와 혐오의 대상을 상상 속에 끈질기게 살려두려는 인간의 의도를 간파하고 있었다. 지나친 인간 비하의 논리라 반박하고 싶어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 세계에서 혐오는 죽지 않는다!”

 


2. 질투에 관하여

 

이 에세이는 앞서 소개된 혐오의 즐거움에 관하여에 버금가는 탁월한 사회심리분석이라 할 수 있겠다. 여물통의 개처럼 우리에게 소용이 없는데도 타인이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갖지 못하게 방해하고 사취하는 데 있는 심술궂고 자신의 더러운 욕망을 감추고 조작하려는 욕구를 동반하는 비열하고 역겨운 감정이 바로 질투이다. 이 감정의 속성을 해부, 분석하여 이것이 사회와 인간관계에 끼치는 영향에 대한 논쟁적 글이기도 하다.

 

이 기형적 감정 또한 바로 지금의 한국사회에 팽배한데, 특히 정치인들이라 불리는 족속의 일원에서 아주 쉽사리 발견된다. 우선 하찮고 건방진 자아가 일으키는 사회적 물의라는 측면에서 해즐릿은 이렇게 지적한다. 별스럽고 균형을 잃은 부모의 인격을 보면 그 자식이 심술궂고 제멋대로인 게 놀랍지 않다.”.  악질의 정치인 자식들이 제멋대로 이 사회를 휘젓고 다니며 법질서를 파괴하는 것에는, 질투의 근원인 과도한 자기애의 속성 때문에 자신이 더 중요해 보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질투란 본디 시기하며 악의 품은 곁눈으로 세상을 보는 자기중심적 악의에서 출발하는 까닭이다.

 

때문에 자기를 정점으로 세상이 작동하지 않으면 제아무리 우수한 것이라도 짓밟아 파괴시켜 버리려는 냉소적 무관심이요 악질적 경멸의 심리이다. 이러한 인간들은 결코 타인이든 세상사든 모두 자기애에 부속적일 때만 연대의식이 작동되기에 거의 모든 행위가 증오로 뭉쳐진 적대감이다. 오늘 한국사회 권력자의 행태는 해즐릿의 통찰처럼 절대적 질투의 화신이랄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기심이 낳은 기형아의 전형이랄 수 있겠다. 사회적 행위에 있어 인간이 보이는 행태에 이 질투라는 감정이 어떻게 영향을 끼치는지, 그래서 우리들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고 타인과 사회를 이해, 비판하는 근거로 읽게 된다.

 

3. 학자들의 무지에 관하여

 

읽고 쓰는 일 이외에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것보다

차라리 읽을 수도 쓸 수도 없는 게 낫다.” -132

 

이 글은 나의 독서 행태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도록 하였는데, 바로 다음의 문장에 작은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머릿속 빈곳에 채워지고 끊임없이 서로를 삭제하는 낱말들과 설익은 비유가 지겹게 끝없이 펼쳐지는 책에 만족하며 가만히 앉아 있다.”, 책을 자연을 바라보는 안경으로 사용하기 보다는 자연의 강렬한 빛과 시시각각 변하는 풍경을 차단하는 막으로 쓰는 자기 생각 부재와 실제 세계의 이해에 무력함을 해즐릿은 지적하는 것이다.

 

학식은 진정한 지식을 대체한다!”  세상의 혼잡과 소음과 눈부신 빛에서 고개를 돌리고 죽은 언어들의 조용한 단조로움과 덜 놀랍고 더 알기 쉬운 문자의 조합으로 시선을 돌리는 책벌레가 빠지는 함정이다. 사실 이 문장을 일반화하여 독서와 학식을 싸잡아 비난하는 것은 분명 오류이지만,  책이라는 이질적 출처에 생각을 의존하는 습관이 생각의 내재적 힘을 약화시키는 것 또한 진실을 담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오직 책에서 책으로 건너가는 독서광들은 어쩌면 살아있는 세계의 형태를 표현하는 데 서툴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많은 서평가들이 정작 자기만의 고유한 글을 쓰지 못하는 것도 이러한 원인에 기인하는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책을 내던지고 스스로 생각하라!”

 

책벌레는 글자로 구성된 일반론의 거미줄로 스스로 돌돌 말고서

다른 사람들의 두뇌에서 반사된 가물거리는 그림자를 볼 뿐이다.” -132~133

 

해즐릿은 명문 이튼스쿨의 우등 졸업생인 인물이 가장 훌륭하지 못한 정치인이었음을 예시하며, 배운 것만 잘 기억했지 결코 총명하지 않은 아이가 대개 전체 일등을 한다고 경험과 열정, 창의를 추구하는 살아있는 지식에 무지함으로써 빚어지는 학식의 무모성을 새롭게 바라보게 한다. 우리 사회 또한 어린 시절 시험 성적이라는 달달 학습한 기억지식을 우수한 지성으로 인식하는 토대에 기초하고 있다. 바로 눈과 귀의 위대한 세상이 가려진 채 책이라는 하나의 문만 열려 있을 때 그 사회가 무지에 맥없이 빠져드는 현상이 발생함을 오늘 우리가 목격하게 되는 이유일 것이. 때문에 우리들은 이기심이 낳은 저 기형아를 선택하는 어리석음을 저지르고 지금 신음하고 있지 않은가.

 

4. 죽음의 공포에 관하여, 비위에 거슬리는 사람들에 관하여, 맨주먹 권투

 

앞 선 세 꼭지의 에세이에 결코 뒤지지 않는 글들이다. 특히 죽음의 공포에 관하여는 지금 우리 사회에서 논란을 겪는 노인 문제와 관련하여 시사(示唆)하는 바가 높은 사유의 글이다. 나 또한 이제 나이가 제법 들어차면서 죽음의 관념에 곧잘 잠기게 되곤 한다. 어느 새 발치에 안개가 끼고 나이의 그늘이 자신을 감싸드는 것을 알아차리게 된 것이다. 느리지만 엄숙히 다가오는 죽음이라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의 몽상은 죽음은 단지 추상적 명제이거나,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라는 동의에 그치고 자신에게 온다는 것을 깊이 깨닫지 못한다.

 

해즐릿은 노년의 길고 우울하고 장엄한 색채와 가을 저녁의 어둠이 모든 것을 덮는 시간이 파괴한 것들 속으로 사라질 것을 예감하지 못하는 젊을 때에는 물체와 감각의 무리에 가려 죽음이 보이지 않는다.”고 말한다. 물론 젊음만이 죽음의 필연성을 자기와는 멀고 먼 불가능의 진리로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아마 많은 대부분의 산 사람들은 죽음의 다가옴을 실감하지 못한다. 이 때문에 인간 사회의 정치적 현실은 갈등에 휩싸이곤 한다. 마치 자신들에게는 절대 노화와 죽음 같은 것은 오지 않을 것이기에 멸시하고, 혐오하고, 부정함으로써 영원히 현재의 자리를 벗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싶어 한다.

 

해즐릿은 이러한 인간들일수록 죽음에 대한 공포는 크다고 지적한다. 자기 존재에 대한 뿌리 깊은 편애 때문인데, 물론 삶을 사랑하는 습관적 애착을 비난할 생각은 없다. 다만 다가오는 죽음의 예감에 가까워진 노인들 스스로가 활동적이고 삶에 적절한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 기회를 지원하고 응원하는 세계여야지 그것을 박탈하려는 그 어떤 것도 비윤리적이요, 부도덕한 저열성이란 비난을 면키 어려울 것 같다. 인생이라는 무대에서 내려 온 뒤 세상으로부터 빨리 잊힌다고 나는 놀라거나 걱정하지 않는다. 해즐릿의 말처럼 무대 위에 있을 때도 거의 눈에 띄지 않았으니말이다. 햄릿31절의 대사처럼 오래 사는 불행은 겪고싶지 않은 마음이다. 죽음에 대한 다양하고 깊은 신선한 통찰들이 가득한 글이다.

 

비위에 거슬리는 사람들에 관하여혐오의 즐거움에 관하여질투에 관하여두 글에 대한 보충적 논의로 읽어도 될 것 같다. 호감을 살만한 거의 모든 자질에도 불구하고 괜히 비위를 거슬리는 사람들에 관한 관찰이기에 우리들 자신의 언행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어 줄 터이다. 혹여 나는 우월함을 드러내기 위해서 타인에 은혜를 베풀 듯 행동한 적은 없는지, 선행을 모종의 암시를 흘리거나, 꺼내지 말아야 할 화제를 꺼냄으로써 친절을 가장한 적은 없는지 말이다. 끝으로 맨주먹 권투라는 에세이는 문자 그대로 맨주먹으로 벌이는 권투 시합의 생생한 관람기다. 챔피언으로 자신을 과신한 개스맨이라는 선수가 과대한 자기평가에 매몰되어 박살나는 광경을 역동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해즐릿의 저널리스트로서의 모습이 선연한 작품이다.

 

아마 당대 정치인들을 비롯한 사회 각계의 인물들에서 그는 이러한 자만, 자기애의 오류를 무수히 목격했기 때문 일 것이다. 이러한 양태는 오늘에도 전혀 다르지 않다. 이 에세이들은 위대한 탐구적 지성이 자신의 생각을 잘 알고 그것을 힘차게, 눈부시게 밀고나간, 모든 힘이 정제되어 들어있는 영혼의 글들이랄 수 있다. 그 신랄하고 절박한 열정에 독자는 끌어 당겨져 몰입되지 않을 수 없다. 인간과 그들의 사회는 200년 전 해즐릿이 살던 곳과 근본적 질서는 물론 그 어떤 인간본성도 그다지 변한 것이 없다. 세상사의 이치를 전하고 싶어 했던 일류지성으로부터 오늘의 우리를 읽고 이해할 수 있는 까닭이다. 윌리엄 해즐릿 읽기를 감히 모든 독서가들에게 추천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겅클
스티븐 롤리 지음, 최정수 옮김 / 이봄 / 2024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표제인 겅클(Guncle)은 굳이 설명이 필요치 않을 만큼 단어의 외형이 이미 그 개념을 드러낸다. 게이 삼촌. 겅클은 또한 아이들로부터 거프(Gup; Gay Uncle Patrick)로도 스스럼없이 불리는데, ‘게이 삼촌 패트릭은 끔찍해하지만 굳이 아이들의 순수함이 기꺼이 수용한 친근한 언어이기에 사용을 금지하지 않는다. 아이들의 엄마이자, 동생 그레그의 아내였던 패트릭의 오랜 여자사람 친구였던 세라의 오랜 투병과 죽음은 이들에 커다란 상처를 남긴다. 죽음을 앞두었던 아내의 상실에 대한 고통으로 이미 심한 알콜 중독상태에 빠져있던 그레그는 형 패트릭에게 아홉 살 메이지와 여섯 살 그랜트를 자신의 중독치료 기간동안 맡아 줄 것을 부탁한다.

 

자신의 배우자였던 조의 죽음에 대한 비탄에서 여전히 헤어나오지 못한 패트릭에겐 절망적인 부탁으로 느껴지지만 동생의 상태를 치유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로 받아들인다. 인생의 중반에 어언 사년간 사막의 사유지에서 숨어 지내왔던 패트릭은 두 아이들과 상실의 고통을 서로 보듬고 직시하며 그 상황을 각자의 삶에서 어떻게 이해되어야 할 것인지를 배워 나간다. 작품의 초입부터 뚜렷하게 도드라져 소설을 더욱 매혹적인 작품으로 이끄는 주요 동력이 있는데, 패트릭이 어린 조카 아이들에게 하는 말투(語調)의 양식이다. 그는 마흔 중반의 영화배우가 동료들과 나눌 때 사용함직한 언어를 그대로 들려준다. 그리고는 아이들이 미처 알지 못하는 말들은 친절한 설명과 그 말이 어떤 의미로 이야기 된 것인지를 알려준다. 세상에 대한 신랄한 경험의 말이지만 안전한 방식으로.

 

이것은 세 사람의 구십 일간 함께하는 일상에서 선언되는 십여 가지의 겅클 규칙으로도 드러나는데, 거프, 왜 다른 사람처럼 말하지 않아요?”라는 여섯 살 그랜트의 물음에 패트릭은 단호히 이렇게 말한다. 너 자신이 되어라, 다른 사람들은 이미 그들만의 것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대답하는 식이다. 그런데 이렇게 진지함만으로 흐른다면 이 소설은 다소 지루해버렸을 테지만, 아이는 삼촌이 하는 행위를 쫓아 거슬리는 행위를 하고, 패트릭은 이내 그런 조카에게 주의를 준다. 이때 어린 그랜트는 나 자신이 되고 있어요.”라고 받아친다. 아이만의 유머와 유쾌함이 깃든 수용 방식이다. 그들은 이렇게 서로 함께하는 법을 배워나가며, 슬픔의 비통함에서 탈출하기 위해 서로의 이해를 넓혀가며 삶의 길을 밝혀나간다.

 

아홉 살 메이지의 당돌한 표현들은 소설의 흐름에 깊숙이 개입하여 아이들의 상실의 슬픔에 대한 이해의 워크북 같은 역할을 수행하기도 한다. 삼촌 애들한테 그런 얘기를 하면 안 되죠. 안 되나? 안 되죠! 우리를 달래줘야죠, 그것도 몰라요?” 어린이답게 웃고 어리석게 행동하는 걸 육아라고 생각지 않는 패트릭에 대한 세상의 진부한 언어를 장착한 아이의 항의다.

 


페트릭은 일상의 행위와 언어로 세계에 대한 이해를 체현토록 한다. 겅클 규칙 7, 이 집안에서는 우리가 원하는 옷을 입는다. 남자 옷이냐 여자 옷이냐는 상관없다. (...)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신경 쓰지 않는 거야. 어때?”, 혹은 그건 여자가 하는 거잖아요. 그렇지 않아, 이 집에서 무슨 말을 하는 거니? (...) 남자 일 또는 여자 일이라는 말조차 있어선 안 돼. 사람은 그냥 자기가 원하는 일을 해야 하는 거야.” 이들 대화로부터 독자는 편견없이 사랑하고 진정한 자아를 가꾸도록 아이들에게 영감을 주도록 신중하게 선택된 언어임을 말하는 패트릭을 알아차릴 수 있다.

 

특히 아이들과 삼촌 패트릭이 아이들의 엄마 세라의 생일을 기리며 케익에 세 개의 촛불을 켜놓고 각자의 소원을 비는 장면이 있는데, 같이 할 수 없는 사랑했던 존재의 상실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그 상실을 어떻게 자기 생과 더불어 지낼 수 있는지를, 혹은 분리 할 수 있는지, 자기 내면의 진솔함을 당당하게 꺼내도록 함께 용기를 내보는 것이다. 상실의 슬픔이 세상의 끝이 아니라는 것을. 패트릭은 아이들의 엄마, 세라를 향해 소원을 말한다. 너를 힘들게 한 몸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길 바라, 네가 빛으로 가득하길.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길. 그리고 춤을 출 수 있길 바라...”, 그때 그랜트가 삼촌을 향해 그 소원 좋아요, 거프, 이 대화가 얼마나 아름다움으로 충만했는지, 존재에 대한 사랑과 아이들 마음에 대한 이해가 어우러져 인생의 이야기란 춤추는 법을 배우는 것이라는 빅토리아 베넷의 언어와 함께 진실의 언어로 내게 새겨진다.

 

소설은 마음속을 맴도는 상실의 비탄을 함께 나누며, 숨 쉴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나가는 아이들과 겅클의 성장기다. 아마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두 아이에게 패트릭이 전하는 난 너희가 진정으로 살기를 원한단다. 산다는 건 가장 드물고 귀한 일이야.”라는 아이들에게는 어렵게 들릴 말이지만 그 진정함에서 그것은 곧 자신을 향한 언어이기도 함을 읽게 된다. 동성인 배우자 조에 대한 상실의 웅덩이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던 패트릭은 아이들과 함께하며, 그들의 놀라운 생명선, 회복 탄력성을 발견하고, 바깥세상과 연결되는 길을 찾아낸다.

 

헐리웃을 연상케하는, 대중의 일상적 삶에 신선한 유쾌함을 던져줄 그런 통속적 소재의 이야기 전개를 보이지만, LA에서 직선거리 150Km 떨어진 주요 배경인 팜스프링스처럼 적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그 문화의 유머와 속도감, 기분좋은 감동만을 빼내 상실의 슬픔과 삶에 대한 진지한 통찰을 우아하게 직조해 낸 작품이라 하고 싶다. 아이들의 온 숨이 넘어갈 듯 까르르대는 그 즐거움에 함께 순수해지는 웃음소리, 이야기를 관류하는 가장 사랑하던 엄마, 그리고 연인과 아내의 상실이란 슬픔으로 인해 흐느끼는 자기 소외의 고통을 온전하게 품어낸 소설이다. 그 안에 깃든 마음 속 깊은 서로에 대한 의지와 용기의 감정, 그 사랑의 정체가 독자에게 깊숙이 스며들어 환한 감동의 웃음을 지으며 춤추는 그들을 그려 보게 된다. 내면의 그 무언가가 녹아내리는 기운을 느끼게 된다.

 

우린 힘든 여름 내내 우울하게 지내는 대신 파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에겐 여러분이 필요 했어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내 무덤에서 춤을 추어라
에이단 체임버스 지음, 고정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4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를 향한 그대의 사랑은 어느 여인의 사랑도 따를 수 없을 만큼 값졌거늘.”

-사무엘 하126절에서

 

그래, ‘어느 여인의 사랑도 따를 수 없을 만큼 값졌다는 성경 속 요나단의 다윗에 대한 사랑만큼이나 간절했던 열여섯 살 청소년의 첫 사랑에 대한 이야기다. 하지만 이 사랑이야기는 주검과 그 주검의 봉분 위에서 왜 춤을 추었는지, 그 기이한 행동의 동기에 대한 고통스러운 자기 성찰의 글이기도 하다.

 

소설은 이 사랑과 주검이 대체 어떤 의미였는지를, 법원 판결을 위해 그 당사자인 헨리 로빈슨(이하 로 표기)이 망자에 대한 모독으로만 보이는 무덤 위에서 춤을 추는 행위를 했는지, 사건의 진상을 알아내고자 하는 사회복지사의 몇 차례의 면담 시도 끝에 마침내 핼이 써 낸 집요하고 세밀한 자기 관찰기이며, 사건에 이르게 된 동기와 내용의 진실의 기록이기도 하다. 이렇게 쓰고보니 지나치게 무겁고 밋밋한 형식의 이야기처럼 보인다. 하지만 결단코 주검의 어두운 무게가 짓누르는 그런 얘기가 아니다. 오히려 해변과 바다와 요트, 그리고 오토바이와 침실과 사랑과 질투가 거센 파도처럼 휘몰아치는 그런 열정의 이야기다.

 

이렇게밖에 묘사하지 못한 것은 감상자의 문장과 문체에 대한 열악한 능력일 뿐, 소설에서 사용되는 어휘를 비롯하여 하나하나의 문장, 그리고 그 구성에 있어 기발한 유머와 재치, 이야기를 자유자재로 연결하기 위해 구사하는 수정, 위안, 액션 리플레이와 같은 앞 선 기술(記述)을 거듭 부연 설명하는 문장 기교로서의 인터페이스는 물론, 사회복지사 보고서라는 제 3자 시선의 글이 틈틈이 교호(交互)하여 이야기의 긴장과 흥미를 견인하는 세련되고 우아하기까지 한 그야말로 생동하는 정념의 열기로 들끓는다. 정말이지 스타일리쉬!한 소설이다. 그럼에도불구하고 나는 이 열여섯 살 핼의 격렬하고 생생한 사랑의 이야기이자 그 설렘에 얽혀드는 비극의 긴장미를 말하는 대신에 조금은 사변적 감상을 쓰려고 한다.

 

모든 일은 2초 사이에 일어난다.”

 

핼은 T.S.엘리엇의 시 황무지의 한 문장, 한 순간의 굴복이 가진 무시무시한 힘은 / 한 시대의 분별로도 돌이킬 수 없도다.”를 인용하며, 모든 일에는 어떤 순간이 있음을, 돌이 킬 수 없는 지점, 한 걸음 더 내디디면 다시 돌아 올 수 없다는 걸 아는 순간이 있음을 깨닫는다. 자신의 가슴이 절로 울렁거리며 성큼 사랑에 다가서고 만다. 핼은 바다에 끌고 간 요트 전복의 순간, 그리고 그를 조난의 순간에서 구해준 친절한 또래 청년 배리 고먼을 바라보았을 때, 배리가 그에게 자신의 레코드가게 아르바이트를 권하며 함께 일하기를 제안 했을 때, 핼은 이미 배리에게 저항 할 수 없는 정념의 감정에 휩싸였다.

 

소설은 이처럼 자신을 잃은 채 온통 사랑에 몰두했던 열여섯 소년을 그린다. 그런데 이 소설은 핼이 쓴 사건과 사건에 이른 나날에 대한 성찰기이며, 바로 소설인 이 글을 쓰는 핼의 글쓰기를 통한 자기 발견의 여정이기도 하다. 때문에 그의 진로선택과 그 선택의 당위성, 그리고 한 인간으로 성장하는데 있어 불가피하게 거쳐야하는 고통스러운 성장과제에 대한 꼼꼼한 자기 관찰의 목소리가 곳곳에 흩어져, 소설 혹은 글쓰기란 과연 무엇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자기 경험의 경계를 초월한(메타적) 문장론이거나 소설론을 엿보게도 한다.

 

이를테면, 나는 나의 과거를 냉정하게 관찰한다. 정신기술로 배리의 눈, , , 몸의 움직임, 목소리의 근접 촬영분을 엄선해 모호한 의미를 탐색하고 많은 것을 발견한다. 육체로 이루어진 어휘를.”이라거나, 지난 일을 하나하나 되새기고 있다. 우리가 한 모든 말, 행동, 디테일, 소소한 단편, 그 단편들을 모아서 커다란 단편으로 묶으려고 한다. (...) 하나의 전체로, 어떤 의미가 있는. (...) 나에게 그를, 또 나 자신을 설명해주는 것"처럼, 마치 소설 쓰기의 훈련 작법을 소개하는 것 같은 문장들이다. 물론 이러한 문장들은 배리와 핼 자신의 사랑의 여정에 대한 빠짐없는 묘사를 하려는 노력의 일환이긴 하지만 말이다.

 


사실 핼의 정념으로서의 사랑 이야기는 청소년이라는 성장기 인간의 경험 부재의 미숙함에서만 문제는 아닐 것이다. 인생에서 처음 경험하는 열여섯 살 핼에게는 자기 자신을 송두리째 삼켜버리는 놀라움이었겠지만, 이것은 안다고 다시 반복하지 않을 수 있는, 이성이 쉽사리 통제할 수 있는 그런 것과는 다를 것이다. 자극에 빠져들고, 이성을 잃고, 상대에 빠져드는 것은 누구나 겪는 통과의례이며, 또한 그 맥락과 상황은 조금씩 다르게 반복되어 우리를 도전에 몰아넣기도 한다. 여기서 주목하게 된 부분이 있는데, 핼이 배리가 자신을 배신했다고 여겨 거친 말다툼을 벌이는 장면이 있다. 배리가 핼에게 쏟아붙는 말들인데, 나는 네가 지겨워!”, “난 네 소유물이 아니야”, “네가 원하는 건 우리 둘이 무언가를 같이하는 게 아니야, 그냥 나일뿐이지. 나의 전부에서 드러나는 핼의 사랑이란 관념이 빠져있는 오류의 지적이다.

 

어쩌면 이 소설을 사랑 이야기라 말할 수 있는 만큼, 철학 이야기라 할 수 있는 부분인데, 핼은 모든 환상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무수한 구멍이 생겨나고 그 구멍으로 현실이 침투한다.”, 결코 자신은 죽음과 같은 관념에 매몰된 관념론자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듯하다. 그런데 여자사람 친구인 카리는 그에게 너는 설익은 관념들을 사람보다 중요시하고, 너 자신의 한심하고 탐욕스러운 감정에만 온 관심이 쏠려 있으니까.”라고 말한다. 감상자인 나는 카리와 배리의 지적이 핼을 올바르게 판단한 것이라 생각지 않는다.

 

핼은 자신과 배리가 나눈 말(대화) 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표정, 몸짓, 분위기, 그리고 이러한 것들이 나타났던 상황과 장소, 맥락에 이르는 드러난 모든 것을 말하고자 한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쓴 이 소설, 이 글에 대해서 앞에 적은 말들은 우리가 직접 한 말들이다. 하지만 우리 얼굴 뒤쪽에서는 더 많은 일이 일어났다.”고 말한다. 더구나 감상글의 모두에서 말한 바처럼 그는 이미 묘사한 글에 뒤이어 수정의 글을 다시 덧붙여 쓰거나, 자기감정이 투사된 글에 위안이라 하여 추가글을 보충한다. 이도 부족했던지 액션 리플레이라 하여 실제 발생했던 모든 언어와 행위, 상황 일체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별도의 장면으로 철저하게 묘사하기도 한다. 핼은 죽음의 관념에 사로잡힌 관념론자도, 인식론자도 아니다. 그는 마치 대상 그 자체의 나타남, 그것을 신뢰하는 현상학자에 가깝다. 그래야 핼이 배리에게 2초 남짓의 순간에 사랑에 빠져드는 것, 배리의 모든 몸체를 자기 지각의 대상으로 느끼는 것이 설명된다.

 

배리의 무덤에서 춤춘 것? 사랑했던 친구에게 더 이상 기댈 수 없었으며, 그 친구의 보살핌을 받을 수 없어졌고, 그래서 그 상황을 견딜 수 없게 되었다는 비난과 함께 핼이 원한 건 배리라는 관념이라고 지적하는 카리의 말은 설명은 옳은데, 귀결은 전혀 잘못 된 것으로 보인다. 핼은 철저하게 대상에서 스스로 드러나는 모든 것이 바로 그 대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기에 보살핌, 기댐과 같은 몸의 얽힘, 몸의 지각을 신뢰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신뢰가 속박이요, 소유욕이요, 지루함이라 말하며, 오토바이를 질주하며, 짜릿함의 일탈로 벗어나려는 배리의 행위는 이 세계와 인간, 그리고 여타 대상에 대한 사랑을 진정으로 할 줄 모르는 것이었다고 여겨진다. 요즘의 사랑들은 배리의 사랑처럼 금세 싫증내고, 그 익숙함, 그 얽힘에 깃든 제한된 자유를 견디지 못하는 것 같다. 자유란 본래 조건부의 자유이지 완전한 자유란 불가능하지 않겠는가? 이미 몸이란 것에 구속된 존재가 어떻게 몸을 벗어나 생각이란 것을 할 수 있을까? 그 누구도 쉴 새 없이 짜릿하게 살 수는 없는 거야라는 말이야말로 진실의 일부를 담아낸 것일 게다.

 

아마도 나는 그를 사랑했던 것 같다. (...) 그렇다고 생각했다.

내가 사랑이라는 말을 이해하는 만큼은. 사람들은 그걸 어떻게 알까?”

- 이 문장보다 더 현상학적 표현이 어디 있겠는가?

 

결정적인 단서!, 핼은 나는 내 몸을 좋아하는 편이다. 이것을 떠나게 된다면 아쉬울 것이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하는 대목이다. 이 문장에 이어서 노화의 무수한 단점들이 이어지기는 하지만, 그건 단지 몸지각의 무뎌짐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이해가 족할 것 같다. 이보다 인용 문장처럼 핼은 몸이 지각하는 것, 그것이 삶의 진실이기에 그 것을 떠난다는 것, 즉 죽음에 의해 주검이 된 것에 대한 아쉬움을 말하는 것 아니었을까? 49일간 이어졌던 첫 사랑의 주검이 누워있는 무덤위에서 춤을 추는 것은 그와 한 약속의 이행이기도 하지만, 자기와 얽혀 세상을 함께 바라보고 이해했던 존재에 대한 상실을 스스로 위로하기 위한 의식, 새로움을 위한 몸의 습관을 떨어내는 의식으로 이해하고 싶어진다. 무진장한 다양성을 경험 할 수 있는 새롭게 변화된 몸으로의 지향을 위해. 카뮈의 말처럼 주검인 무덤, 그것에 대한 조롱과 모욕의 몸짓은 바로 이 새로운 몸들의 태어남이라는 지향의 몸짓인 것 아닐까? 

 

프랑수아 오종 감독의 영화 썸머 85에서


결국 핼은 모든 것이 가라앉을 수 있는 시간,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어 더 많은 걸 쓰고 싶어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러면서 현재에 파묻히지 않고 새로 일어나는 것은 인간의 영원한 숙제라며, 세상에서 중요한 단 한 가지는 우리 모두가 어떻게 해서든 자신의 역사에서 탈출하는 것이라고 쓴다. 이 문장은 소설의 첫 문장인 나는 주검에는 관심이 없다. 내 관심을 끄는 것은 죽음이다. 죽음이라는 현상.”으로 돌아가 조우한다. 나는 실존주의의 현상학자 샤르트르의 옅은 그림자를 이 소설에서 본 것 같다. 핼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영문학 선생 오즈번의 말처럼 핼이 쓴 이 글은 핼의 인생에 새롭고 의미있는 구심점이 되고있는 성찰적 글쓰기의 결과물이다. 때문에 나는 이 소설을 통제하기 힘겨운 에로스의 뜨거운 에너지를 다루는 성장의 의례적 사건으로 보기보다는 체험의 성찰을 통한 자기 발견의 철학적이며 문학적 행보라 말하고 싶다.  아무쪼록 이 사랑 소설은 이야기의 긴장감이나 생동감, 강력한 흡입력을 장착한 재능 넘치는 작품이다. 누구나 책장을 넘길 때마다 다채로운 텍스트 구성의 맛깔스러움으로 이야기 전개에서 도망치기는 힘겨울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들풀의 구원 - 부서진 땅에서도 왕성하게 자라난 희망에 관하여
빅토리아 베넷 지음, 김명남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4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애도와 사랑, 10년의 꿋꿋한 희망의 기록

 

 

책은 야생의 삶을 실천하는 한 여인의 슬픔과 고통 속에서 길어 올리는 자기의 배움이며, 한 아이의 엄마로서 그 아이가 스스로의 한 인간으로 성장하는 지원자로서, 한편으론 그 아이가 이 지상의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도록 응원하는 조심스러운 걸음이다. 그러기 위해 엄마와 어린 아들은 살아가는 나날이 한 단위의 기쁨과 슬픔으로 이뤄져 있음을 이해하며, 서로의 사랑과 용기를 발견하는 여정의 기록이기도 할 것이다.

 

가슴시리도록 아름다운 이야기다. 이렇게 쓰고 보니 이 책의 상실과 고통, 쉴 새 없이 교차하는 삶의 어둠과 빛, 그리고 끈질긴 생동성이 발산하는 생의 경이로움에 대해 터무니없이 취약한 문장임에 부끄러움을 느낀다. 한 인생에 담긴 슬픔 속에 깃든 작은 사랑 행위들을 어루만지며 문밖 작은 공영주택 야생의 텃밭, 그 소박한 세상에 미소를 짓고, 우아, 정말 아름답다!”고 말하는 아이와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삶에 감사하는 여인의 10년 기록에 나는 몇 차례 눈물을 훔쳐대야 했다. 그렇다고 감상(感傷)에만 젖어들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한국어 표제인 들풀은 아마 잡초(雜草)의 순화된 우리말 표현일 것이다. 주류의 언어에 내재된 인간 필요 중심의 편협한 의미를 피하려했음이리라. 빅토리아 베넷은 수시로 혈당을 측정하고 인슐린을 주사해야하는 당뇨병성 체톤산증이라는 불치의 병을 지닌 어린 아들과, 돌과 석면과 공장의 잔해위에 세워진 사방이 밭으로 둘러싸인 공영임대주택단지의 작은 집 마당에 야생의 정원을, 마법의 정원을 만들기로 결심한다. 귀족여성이었던 비타 색빌웨스트의 시싱허스트 같은 화려하고 거대한 정원이 아니다. 값싸게 가꿀 수 있으며, 돌투성이 척박한 토양에서도 잘 자라는 야생의 정원이다. 단순하게 말해서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잡초의 정원’, 교란지에서 잘자라는 식물" 들의 정원을 만드는 것이다.

 

영어 사전에는 잡초를 사람이 원치 않는 곳에서 자라는 야생식물이라 정의하는 모양이다. 우리는 혹시 달리 정의하고 있을까하여 찾아보았다. 한국산림청은 초목(草本)식물로서 묘포(苗圃) 또는 임지(林地)에 발생해서 임업상 해로운 것이라 하고, 한국어사전은 농작물 따위의 다른 식물이 자라는 데 해가 되는 여러 가지 풀이라 하고 있다. 결국 의미상 별 차이가 없다. 인간의 시선에 의해 식물에 자의적 위계를 부여하여 배제하는 대상이라는 점에서. 사람이 그것을 원하지 않을 때면 식물은 잡초가 되어 뽑히고 뭉개지고 폐기되어야 하는 대상이 되는 것이다. (다음의 감상글부터 나는 잡초라는 단어 대신 책의 표제처럼 들풀을 사용하려 한다)

 

이것은 공영주택단지에 사는 저자의 가족을 비롯한 거주자들에게도 동일하게 부여되는 배타적 시선이다. 사정은 저마다 다르지만 사별, 이혼, 외부모, 가족돌봄, 질병, 노령, 직업불안정성, 실업, 저임금, 이유가 무엇이든 사람들은 그들을 다 같은 범주로 분류하여, 외딴 섬같이 분리하여 그들을 따돌리는 것이다. 그들은 잡초(들풀) 취급을 받아야 하는 사람들로서 세계의 일원으로 참여하는 것은 불온한 짓임을 은연히 강요하는 것이다. 야생의 정원을 가꾸는 행위는 처음부터 단지위원회의 퇴거 협박과 아울러 장애를 겪는다. 단지의 품위와 경관을 손상시키는 행위라고. 이웃에 불쾌감을 조성하지 않으며 경관을 해치지 않는다는 조건부로 어린 아들과 빅토리아는 도로의 틈새와 버려진 공장 잔해에서 피어나는 들풀들을 가져와 정원을 만들어 간다.

 

사람들의 뒤틀린 시선으로 인한 구별과 차별의 상황들은 이쯤에서 줄이련다. 저자의 글이 지향하는 것은 이런 부정성의 세계가 아니니 말이다. 주택 소유자와 주택임차자의 가축 돌봄에서조차 규제 적용의 범위가 달라진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에게는 적용되는 규칙이 다른 것이다. 우리 집이 아니어서, 우리에게 집 지을 돈이 없어 차별받아야 하는 세계임을 이해한 어린 아들이 조용히 엄마 빅토리아의 손에 자기 손을 얹는다. 아이가 이 행위를 통해 이 세계에 적용되고 있는 하나의 규칙을 깨달았음에 무력함을 느끼지만 한편으로 이것 또한 아이가 이겨내야 할 경험임을 안다.


가시칠엽수, 빅토리아의 아들이 태어났을 때 심은 나무다. 6년이 되면 꽃이 피고, 그로부터 6년이 지나면 열매를 맺는다. 12년이다. 내 나무가 이제 엄마처럼 됐어. (...) 자단색 씨앗을 꺼내며 말한다. 그 씨앗을 어떻게 할 거야? 할머니를 위해 심자. (...) 탄생을 위해 한 그루, 죽음을 위해 한 그루(417)”

 

엄마는 아들에게 식물 알아보는 법을 가르치기 시작한다. 우리가 들여다본다면 식물이 우리에게 자기 특징을 드러낸다고 알려준다. 나는 이 식물과 동물, 물질 등의 그 자체로 나타남이라는 비인간의 자기 발현 존재성을 고작 현상학, 실재론, 객체지향 이론의 책에서 이제야 배우고 있다. 아이는 엄마로부터 그 어떤 채색된 철학보다 더 깊은 의미를 엄마와 함께하는 체험으로 습득한다. 자연 그 자체의 그러함에 따라 생산과 문화를 구축하는 파머컬쳐 농법을, 지속 가능한 원예의 원칙을 함께 공부하며 이 지상의 세계를 배워나간다.

 

핼러윈 데이를 맞아 빅토리아는 아이와 함께 마당에서 가꾼 들풀로부터 얻은 꽃잎과 줄기, 뿌리, 씨앗으로 잼과 과자를 만들어 동네 집들을 방문하기로 한다. 아이는 신이 났다. 자신이 엄마와 함께 만든 것을 선물로 누군가에 준다는 행위로, 아이는 문을 두드린다. 즐거운 핼러윈! 과자 드실래요?” 문을 연 사람들은 어린 아이에게 사탕과 작은 장난감을 답례로 선물한다. 아이의 마음에 마을 사람들의 친절이 씨앗처럼 심겨진다. 엄마는 아이에게 이 세상의 진실이 가끔 가혹할지라도 이런 작은 일로 아이가 세상의 좋은 면을 보게 할 것을 기대한다.

 

아이는 자신의 병인 당뇨병과 싸우는 전투를 벌이지 않는다. 결코 통제할 수 없는 것과는 전쟁을 벌일 수 없는 법이다. 그래서 까다로운 파트너일 뿐이며, 그것과 함께 하는 춤을 배우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춤의 스텝과 루틴을 배워야하고 매일 빠지지 않고 춤춰야 하는 것일 게다. 아들의 희망은 엄마의 슬픔에 빛이 되어주고, 엄마의 용기는 아들의 비틀거리는 발을 지탱하여 줄 것이라는 믿음으로 때론 헛디디고 미끄러지며 실패할지언정 인생의 이야기를 춤추는 법을 배우기 위해 동행한다.

 

아마도 원제목인 ‘All my wild mothers'야생의 어머니들‘, 혹은 야생의 여자들은 저자 빅토리아를 비롯한 그녀의 어머니와 언니들, 그리고 그녀가 불공평한 세상에서 늘 다시 일어날 수 있도록 알려주었던 여자들을 총칭하는 것일 게다. 세상에 질문을 던졌을 때, 그녀의 호출에 반응하며 함께 야생성을 칭송하고, 어둠 속에서 시를 짓고, 눈물로 시간의 상처를 함께 적셨던 사람들, 상실과 슬픔으로 만들어진 이 세상이 비록 버거울지라도 함께 씨 뿌린 그녀들에 대한 애도와 경외와 감사의 이야기이기도 한 것이다. 빅토리아는 아이의 위태로운 출산에 임박하여 언제나 그녀가 위협과 모욕과 궁박의 상태였을 때 마법사처럼 나타나 든든하게 방어 공격을 해주던 큰 언니의 죽음, 하나하나의 작은 행위를 통해 자기 꿈의 씨앗을 뿌려 육남매라는 멋진 정원을 만들어준 어머니의 돌봄과 죽음 등 상실의 슬픔 속에서 이 어지럽고 끔찍함에도 아름다운 삶임을, 그 삶에 감사해한다.

 

이 아름다운 글들 속에서 저자가 아들과 둘이 일식을 지켜보는 장면에서 사랑의 고통을 깨닫는 문장이 있다. 문장을 독자들과 나누고 싶어 옮겨본다.

 

다음에 네가 이 나라에서 일식을 본다면, 그때 넌 지금의 할머니 나이와 같은 여든 두 살일 거야. (...) 엄마도 나랑 같이 볼 거야?

엄마가 그렇게 오래 살 것 같진 않아. 아이는 더는 말하지 않는다. 제 손으로 내 손을 덮고, 계속 붙잡고 있는다. 이것이 사랑의 고통이다. 사랑을 찾은 뒤에 그것을 떠나보내야 함을 아는 것, 그때까지는 서로를 계속 붙잡고 있는다. 계속 붙잡고 있는다.“ -345쪽에서

 

죽음은 시계가 조용히 자정을 넘기듯 은근슬쩍 다가온다.” 이별의 약속도, 사랑의 다짐도 없이. 우리 모두 빅토리아 베넷처럼 자기주도적 삶을 살아내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들의 인생에도 수많은 작은 사랑의 행위들이 있었음을, 그것들이 이 기이하고 불순한 세계를 살아가는 우리가 잊고 지내는 힘일 것이다. 빅토리아는 마침내 미래를 두려워하며 너무 많은 시간을 보냈음을, 그래서 그런 마음을 비로소 내려놓는다. 도달해야 할 행복 봉우리, 성취해야 할 완벽한 삶이란 없음을, 팔을 뻗었을 때 내 손을 잡을 사랑하는 그 누구와, 괜찮을 거라 말해주는 누군가 있으면 충분히 이 삶은 족할 것이다.

 

갈망과 결핍이 묘하게 또한 불편하게 병치된 공간인 거대한 은유이자 현실인 망가지고 버려진 곳에 무언가가 꿋꿋하게 생명을 키워나갈 수 있음을 증명하는 끈질긴 희망과 사랑의 찬가이다. 우리 모두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버겁고 견디기 힘들다는 생각이 거침없이 내습해 올 때가 있다. 빅토리아 베넷은 사물의 가장자리에서, 보도의 갈라진 틈에서, 단정한 부지의 경계선에서 우리가 모른 새에 자라는 들풀처럼 상호의존의 역사를 부정하며 배제와 소외가 거칠게 행해지는 세계일지언정 새 생명은 자라나 삶이 계속됨을 알려준다. 그리고 삶과 죽음 또한 계속되고 시간은 흐르고 또 흐르는 것임을. 슬픔으로부터 벗어날 길을 찾기 위해 척박한 땅을 갈고 마침내 세상의 경이로 돌아가는 길을 발견한 이 고결한 글을 읽을 수 있었음에 감사한다.

 

슬픔은 우리와 함께 산다. 그래도 나는 그것이 우리의 나날을 몽땅 차지하도록

두지 않을 것이다.” - 빅토리아 베넷


도로 경계석, 배수구와 도로 틈새, 작은 흙무더기 등 들풀은 뿌리를 내리고 끈질긴 

생명력으로 그 삶의 순환을 이어간다.  책의 저자 빅토리아는 이러한 들풀로 

야생의 정원을 가꾸었을 것이다. 촬영: 2024.9.9. 서울 선유에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