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의 즐거움에 관하여 - 거장의 재발견, 윌리엄 해즐릿 국내 첫 에세이집
윌리엄 해즐릿 지음, 공진호 옮김 / 아티초크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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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미가 까다롭지만 고상하고, 심술궂지만 고결하고, 독선적이지만

인류의 권리와 자유를 진심으로 열망하는 한 인물을 만나게 된다.”

- 버지니아 울프, 윌리엄 해즐릿 사후 100주년 기념 에세이에서


윌리엄 해즐릿은 최소한 조지 오웰이나 토머스 드 퀸시, 찰스 램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에세이스트로 존경받는 인물이다 라는 평가와 같이 현대의 관문에 들어선 19세기 당대의 새로움을 분석하고 해설해주는 출중한 재능을 지닌 치열한 문장가이자 지성인이었다. 모두에 인용한 해즐릿 사후 100주년 기념 에세이를 쓴 버지니아 울프가 그의 글과 인물됨에 대해 묘사한 것처럼 우리 또한 그의 글에서 유사한 느낌을 갖게 된다. 해즐릿의 글들은 준엄하고 냉소적이며 신랄하고 예리하지만 인간 심리의 깊이를 모색하고 세상사의 이치를 스스로 납득하여 그 사색의 결과를 공유하고 싶어 했던 인류애의 소유자임을 발견할 수 있다.

 

나는 해즐릿의 이 유일한 국역본을 읽으며 시종 야릇한 흥분과 공감을 잃지 않았다. 그의 탐색적이고 분석적이며 냉소적인 비판의 시선에 놓여있는 준엄한 지성과 그 활기가 여기 있는 듯 다가왔기 때문이다. 학식을 존중하지 않는 당대의 분위기와 그를 헐뜯는 블랙우드 매거진과 같은 보수 저널들의 거짓말과 조롱에도 자신의 원칙에 충실했으며, 결코 정부의 도구가 되지 않았던, 오직 진리를 추구하며 굴욕과 환멸의 고통을 겪어냈던 인물에 대한 존경을 갖게 된다.

 

이 에세이집은 버지니아 울프의 기념 에세이와 여섯 편의 해즐릿의 에세이를 수록하고 있다. 독자의 욕심 같아서는 그의 에세이집 인간 행동론, 좌담, 정치 에세이등 보다 많은 글들을 접하고 싶지만, 이 국내 최초의 해즐릿 에세이집은 그야말로 최고의 글들이 엄선되었음을 절로 깨달을 만큼 독보적 강렬함이 발산된다. 1819년 반혁명적인 반동 지식인들과의 투쟁으로 그의 천재성만큼이나 세상에서 배제되어 그의 글들은 사장되었던 것 같다. 이를 다시금 세상에 복귀시킨 장본인이 바로 울프였던 것 같다. 울프는 그녀의 에세이에서 자신은 그를 마음에 들어 했을 거라며 현란하지 않고 화려한 수식 없이 오직 진리를 찾고 싶어 한 절박한 욕구를 위해썼을 해즐릿의 글들을 옹호한다. 그의 글들을 200년이라는 시간 뒤에 이국의 장소에 있는 한 독자가 생생하게 읽을 수 있게 된 것도 아마 울프라는 지성의 덕택이라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200쪽 남짓한 에세이집의 매 페이지마다 이처럼 많은 색인 스티커를 붙인 적이 없었던 듯하다. 거의 모든 페이지가 형광펜 밑줄로 가득 채워졌으며, 옮겨 써 놓은 문장들도 조금 과장해서 거의 노트 한 권 분량에 이르렀다. 이 에세이집의 표제명이 된 혐오의 즐거움에 관하여는 단연 어떠한 수식어도 필요없는 지혜와 집요한 탐구 정신이 돋보이는 글이다. 그 강렬한 맛에 내 정신이 어찔할 정도다. 로버트 루이 스티븐슨의 오늘날 우리는 해즐릿만큼 쓰지 못한다.”는 고백은 결코 실언이 아님을 확인케 된다. 이하 감상글은 여섯 편 중 내게 인상적이었던 세 편의 글에 대한 간략한 인상으로 남겨두고자 한다. 모든 문장을 옮겨오고 싶은 마음이지만 절제 하련다.

 

1. 혐오의 즐거움에 관하여

 

이 글은 해즐릿이 탐색하고 분석한 인간 본성론의 한 단면일 것이다. 이 글이 쓰인 시기에 대한 기록이 제공되지 않아 정확한 시기는 알 수가 없지만 아마 인간 행동론에 수록된 1805년이거나, 그가 모닝 클로니클의 의회 출입기자로 정치 기사를 쓰던 1812년 무렵일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해서 이 글에 투영된 그의 분석 대상이 되었던 인간모델들은 어쩌면 정치인들을 비롯한 소위 권력 계층 인물들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 어조의 신랄함은 더욱 날카롭고 강렬하다.

 

증오에 물리는 일은 있을 수 없고, 농축된 악의처럼 잘 보존되는 것도 없다.

우리는 모든 일에 싫증을 내지만 타인을 조롱하는 일에는 그렇지 않다.” -52쪽에서

 

이는 결코 주의깊고 치열한 관찰을 통하지 않고는 획득될 수 없는 경험적 지식을 바탕으로 한 것처럼 보인다. 정말이지 인간의 마음이란 들여다보면 볼수록 반감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혐오할 게 없으면 생각과 행동의 원천마저 잃어버릴 것 같기만 하다. 우리는 비근하게 이러한 양상을 관찰할 수 있다. 어떤 비극적 사건을 목격하는 일이라면 열정적으로 떼지어 몰려드는 인간 군상들을 보라. 또한 자신들과 조금이라도 다른 이질적 행동을 하는 사람이 보이면 사방의 인간들이 몰려들어 공격하고 괴롭히는 것을 얼마나 쉽사리 볼 수 있는가. 온라인 사회연결망에 어떤 도덕적 아량을 넘어서는 행위자의 영상에 대한 집단적으로 달리는 무수한 비난과 폭력적 댓글들, 이것들에서 우리는 해즐릿이 보았던 얽매임 없이 풀려난 충동적이고 기뻐 날뛰는 야성의 환호, 농축된 악의인 혐오의 즐거움 목격하게 된다.

 

왜 그럴까? 흠잡기 좋아하는 성향, 남들의 행동과 동기를 시기하고 감시하는 편협한 태도에 근인(根因)하는 것이라고 해즐릿은 지적한다. 이 불온한 인간의 본성은 결코 혐오를 버리지 못할 것이라는 인간 본성에 대한 예견은 그대로 오늘의 우리 사회 현실의 이해 도구가 되어줄 수 있다. 그는 만일 인류가 올바름을 희망했다면 오래 전에 이루었을지 모른다.”며 공포와 혐오의 대상을 상상 속에 끈질기게 살려두려는 인간의 의도를 간파하고 있었다. 지나친 인간 비하의 논리라 반박하고 싶어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 세계에서 혐오는 죽지 않는다!”

 


2. 질투에 관하여

 

이 에세이는 앞서 소개된 혐오의 즐거움에 관하여에 버금가는 탁월한 사회심리분석이라 할 수 있겠다. 여물통의 개처럼 우리에게 소용이 없는데도 타인이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갖지 못하게 방해하고 사취하는 데 있는 심술궂고 자신의 더러운 욕망을 감추고 조작하려는 욕구를 동반하는 비열하고 역겨운 감정이 바로 질투이다. 이 감정의 속성을 해부, 분석하여 이것이 사회와 인간관계에 끼치는 영향에 대한 논쟁적 글이기도 하다.

 

이 기형적 감정 또한 바로 지금의 한국사회에 팽배한데, 특히 정치인들이라 불리는 족속의 일원에서 아주 쉽사리 발견된다. 우선 하찮고 건방진 자아가 일으키는 사회적 물의라는 측면에서 해즐릿은 이렇게 지적한다. 별스럽고 균형을 잃은 부모의 인격을 보면 그 자식이 심술궂고 제멋대로인 게 놀랍지 않다.”.  악질의 정치인 자식들이 제멋대로 이 사회를 휘젓고 다니며 법질서를 파괴하는 것에는, 질투의 근원인 과도한 자기애의 속성 때문에 자신이 더 중요해 보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질투란 본디 시기하며 악의 품은 곁눈으로 세상을 보는 자기중심적 악의에서 출발하는 까닭이다.

 

때문에 자기를 정점으로 세상이 작동하지 않으면 제아무리 우수한 것이라도 짓밟아 파괴시켜 버리려는 냉소적 무관심이요 악질적 경멸의 심리이다. 이러한 인간들은 결코 타인이든 세상사든 모두 자기애에 부속적일 때만 연대의식이 작동되기에 거의 모든 행위가 증오로 뭉쳐진 적대감이다. 오늘 한국사회 권력자의 행태는 해즐릿의 통찰처럼 절대적 질투의 화신이랄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기심이 낳은 기형아의 전형이랄 수 있겠다. 사회적 행위에 있어 인간이 보이는 행태에 이 질투라는 감정이 어떻게 영향을 끼치는지, 그래서 우리들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고 타인과 사회를 이해, 비판하는 근거로 읽게 된다.

 

3. 학자들의 무지에 관하여

 

읽고 쓰는 일 이외에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것보다

차라리 읽을 수도 쓸 수도 없는 게 낫다.” -132

 

이 글은 나의 독서 행태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도록 하였는데, 바로 다음의 문장에 작은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머릿속 빈곳에 채워지고 끊임없이 서로를 삭제하는 낱말들과 설익은 비유가 지겹게 끝없이 펼쳐지는 책에 만족하며 가만히 앉아 있다.”, 책을 자연을 바라보는 안경으로 사용하기 보다는 자연의 강렬한 빛과 시시각각 변하는 풍경을 차단하는 막으로 쓰는 자기 생각 부재와 실제 세계의 이해에 무력함을 해즐릿은 지적하는 것이다.

 

학식은 진정한 지식을 대체한다!”  세상의 혼잡과 소음과 눈부신 빛에서 고개를 돌리고 죽은 언어들의 조용한 단조로움과 덜 놀랍고 더 알기 쉬운 문자의 조합으로 시선을 돌리는 책벌레가 빠지는 함정이다. 사실 이 문장을 일반화하여 독서와 학식을 싸잡아 비난하는 것은 분명 오류이지만,  책이라는 이질적 출처에 생각을 의존하는 습관이 생각의 내재적 힘을 약화시키는 것 또한 진실을 담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오직 책에서 책으로 건너가는 독서광들은 어쩌면 살아있는 세계의 형태를 표현하는 데 서툴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많은 서평가들이 정작 자기만의 고유한 글을 쓰지 못하는 것도 이러한 원인에 기인하는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책을 내던지고 스스로 생각하라!”

 

책벌레는 글자로 구성된 일반론의 거미줄로 스스로 돌돌 말고서

다른 사람들의 두뇌에서 반사된 가물거리는 그림자를 볼 뿐이다.” -132~133

 

해즐릿은 명문 이튼스쿨의 우등 졸업생인 인물이 가장 훌륭하지 못한 정치인이었음을 예시하며, 배운 것만 잘 기억했지 결코 총명하지 않은 아이가 대개 전체 일등을 한다고 경험과 열정, 창의를 추구하는 살아있는 지식에 무지함으로써 빚어지는 학식의 무모성을 새롭게 바라보게 한다. 우리 사회 또한 어린 시절 시험 성적이라는 달달 학습한 기억지식을 우수한 지성으로 인식하는 토대에 기초하고 있다. 바로 눈과 귀의 위대한 세상이 가려진 채 책이라는 하나의 문만 열려 있을 때 그 사회가 무지에 맥없이 빠져드는 현상이 발생함을 오늘 우리가 목격하게 되는 이유일 것이. 때문에 우리들은 이기심이 낳은 저 기형아를 선택하는 어리석음을 저지르고 지금 신음하고 있지 않은가.

 

4. 죽음의 공포에 관하여, 비위에 거슬리는 사람들에 관하여, 맨주먹 권투

 

앞 선 세 꼭지의 에세이에 결코 뒤지지 않는 글들이다. 특히 죽음의 공포에 관하여는 지금 우리 사회에서 논란을 겪는 노인 문제와 관련하여 시사(示唆)하는 바가 높은 사유의 글이다. 나 또한 이제 나이가 제법 들어차면서 죽음의 관념에 곧잘 잠기게 되곤 한다. 어느 새 발치에 안개가 끼고 나이의 그늘이 자신을 감싸드는 것을 알아차리게 된 것이다. 느리지만 엄숙히 다가오는 죽음이라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의 몽상은 죽음은 단지 추상적 명제이거나,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라는 동의에 그치고 자신에게 온다는 것을 깊이 깨닫지 못한다.

 

해즐릿은 노년의 길고 우울하고 장엄한 색채와 가을 저녁의 어둠이 모든 것을 덮는 시간이 파괴한 것들 속으로 사라질 것을 예감하지 못하는 젊을 때에는 물체와 감각의 무리에 가려 죽음이 보이지 않는다.”고 말한다. 물론 젊음만이 죽음의 필연성을 자기와는 멀고 먼 불가능의 진리로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아마 많은 대부분의 산 사람들은 죽음의 다가옴을 실감하지 못한다. 이 때문에 인간 사회의 정치적 현실은 갈등에 휩싸이곤 한다. 마치 자신들에게는 절대 노화와 죽음 같은 것은 오지 않을 것이기에 멸시하고, 혐오하고, 부정함으로써 영원히 현재의 자리를 벗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싶어 한다.

 

해즐릿은 이러한 인간들일수록 죽음에 대한 공포는 크다고 지적한다. 자기 존재에 대한 뿌리 깊은 편애 때문인데, 물론 삶을 사랑하는 습관적 애착을 비난할 생각은 없다. 다만 다가오는 죽음의 예감에 가까워진 노인들 스스로가 활동적이고 삶에 적절한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 기회를 지원하고 응원하는 세계여야지 그것을 박탈하려는 그 어떤 것도 비윤리적이요, 부도덕한 저열성이란 비난을 면키 어려울 것 같다. 인생이라는 무대에서 내려 온 뒤 세상으로부터 빨리 잊힌다고 나는 놀라거나 걱정하지 않는다. 해즐릿의 말처럼 무대 위에 있을 때도 거의 눈에 띄지 않았으니말이다. 햄릿31절의 대사처럼 오래 사는 불행은 겪고싶지 않은 마음이다. 죽음에 대한 다양하고 깊은 신선한 통찰들이 가득한 글이다.

 

비위에 거슬리는 사람들에 관하여혐오의 즐거움에 관하여질투에 관하여두 글에 대한 보충적 논의로 읽어도 될 것 같다. 호감을 살만한 거의 모든 자질에도 불구하고 괜히 비위를 거슬리는 사람들에 관한 관찰이기에 우리들 자신의 언행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어 줄 터이다. 혹여 나는 우월함을 드러내기 위해서 타인에 은혜를 베풀 듯 행동한 적은 없는지, 선행을 모종의 암시를 흘리거나, 꺼내지 말아야 할 화제를 꺼냄으로써 친절을 가장한 적은 없는지 말이다. 끝으로 맨주먹 권투라는 에세이는 문자 그대로 맨주먹으로 벌이는 권투 시합의 생생한 관람기다. 챔피언으로 자신을 과신한 개스맨이라는 선수가 과대한 자기평가에 매몰되어 박살나는 광경을 역동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해즐릿의 저널리스트로서의 모습이 선연한 작품이다.

 

아마 당대 정치인들을 비롯한 사회 각계의 인물들에서 그는 이러한 자만, 자기애의 오류를 무수히 목격했기 때문 일 것이다. 이러한 양태는 오늘에도 전혀 다르지 않다. 이 에세이들은 위대한 탐구적 지성이 자신의 생각을 잘 알고 그것을 힘차게, 눈부시게 밀고나간, 모든 힘이 정제되어 들어있는 영혼의 글들이랄 수 있다. 그 신랄하고 절박한 열정에 독자는 끌어 당겨져 몰입되지 않을 수 없다. 인간과 그들의 사회는 200년 전 해즐릿이 살던 곳과 근본적 질서는 물론 그 어떤 인간본성도 그다지 변한 것이 없다. 세상사의 이치를 전하고 싶어 했던 일류지성으로부터 오늘의 우리를 읽고 이해할 수 있는 까닭이다. 윌리엄 해즐릿 읽기를 감히 모든 독서가들에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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