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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풀의 구원 - 부서진 땅에서도 왕성하게 자라난 희망에 관하여
빅토리아 베넷 지음, 김명남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4년 7월
평점 :
애도와 사랑, 10년의 꿋꿋한 희망의 기록
책은 야생의 삶을 실천하는 한 여인의 슬픔과 고통 속에서 길어 올리는 자기의 배움이며, 한 아이의 엄마로서 그 아이가 스스로의 한 인간으로 성장하는 지원자로서, 한편으론 그 아이가 이 지상의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도록 응원하는 조심스러운 걸음이다. 그러기 위해 엄마와 어린 아들은 “살아가는 나날이 한 단위의 기쁨과 슬픔으로 이뤄져 있음”을 이해하며, 서로의 사랑과 용기를 발견하는 여정의 기록이기도 할 것이다.
가슴시리도록 아름다운 이야기다. 이렇게 쓰고 보니 이 책의 상실과 고통, 쉴 새 없이 교차하는 삶의 어둠과 빛, 그리고 끈질긴 생동성이 발산하는 생의 경이로움에 대해 터무니없이 취약한 문장임에 부끄러움을 느낀다. 한 인생에 담긴 슬픔 속에 깃든 작은 사랑 행위들을 어루만지며 문밖 작은 공영주택 야생의 텃밭, 그 소박한 세상에 미소를 짓고, “우아, 정말 아름답다!”고 말하는 아이와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삶에 감사하는 여인의 10년 기록에 나는 몇 차례 눈물을 훔쳐대야 했다. 그렇다고 감상(感傷)에만 젖어들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한국어 표제인 ‘들풀’은 아마 잡초(雜草)의 순화된 우리말 표현일 것이다. 주류의 언어에 내재된 인간 필요 중심의 편협한 의미를 피하려했음이리라. 빅토리아 베넷은 수시로 혈당을 측정하고 인슐린을 주사해야하는 당뇨병성 체톤산증이라는 불치의 병을 지닌 어린 아들과, 돌과 석면과 공장의 잔해위에 세워진 사방이 밭으로 둘러싸인 공영임대주택단지의 작은 집 마당에 야생의 정원을, 마법의 정원을 만들기로 결심한다. 귀족여성이었던 비타 색빌웨스트의 시싱허스트 같은 화려하고 거대한 정원이 아니다. 값싸게 가꿀 수 있으며, 돌투성이 척박한 토양에서도 잘 자라는 야생의 정원이다. 단순하게 말해서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잡초의 정원’, “교란지에서 잘자라는 식물" 들의 정원을 만드는 것이다.
영어 사전에는 잡초를 “사람이 원치 않는 곳에서 자라는 야생식물”이라 정의하는 모양이다. 우리는 혹시 달리 정의하고 있을까하여 찾아보았다. 한국산림청은 “초목(草本)식물로서 묘포(苗圃) 또는 임지(林地)에 발생해서 임업상 해로운 것”이라 하고, 한국어사전은 “농작물 따위의 다른 식물이 자라는 데 해가 되는 여러 가지 풀”이라 하고 있다. 결국 의미상 별 차이가 없다. 인간의 시선에 의해 식물에 자의적 위계를 부여하여 배제하는 대상이라는 점에서. 사람이 그것을 원하지 않을 때면 식물은 잡초가 되어 뽑히고 뭉개지고 폐기되어야 하는 대상이 되는 것이다. (다음의 감상글부터 나는 잡초라는 단어 대신 책의 표제처럼 ‘들풀’을 사용하려 한다)
이것은 공영주택단지에 사는 저자의 가족을 비롯한 거주자들에게도 동일하게 부여되는 배타적 시선이다. 사정은 저마다 다르지만 “사별, 이혼, 외부모, 가족돌봄, 질병, 노령, 직업불안정성, 실업, 저임금, 이유가 무엇이든 사람들은 그들을 다 같은 범주로 분류”하여, 외딴 섬같이 분리하여 그들을 따돌리는 것이다. 그들은 잡초(들풀) 취급을 받아야 하는 사람들로서 세계의 일원으로 참여하는 것은 불온한 짓임을 은연히 강요하는 것이다. 야생의 정원을 가꾸는 행위는 처음부터 단지위원회의 퇴거 협박과 아울러 장애를 겪는다. 단지의 ‘품위와 경관’을 손상시키는 행위라고. 이웃에 불쾌감을 조성하지 않으며 경관을 해치지 않는다는 조건부로 어린 아들과 빅토리아는 도로의 틈새와 버려진 공장 잔해에서 피어나는 들풀들을 가져와 정원을 만들어 간다.
사람들의 뒤틀린 시선으로 인한 구별과 차별의 상황들은 이쯤에서 줄이련다. 저자의 글이 지향하는 것은 이런 부정성의 세계가 아니니 말이다. 주택 소유자와 주택임차자의 가축 돌봄에서조차 규제 적용의 범위가 달라진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에게는 적용되는 규칙이 다른 것이다. 우리 집이 아니어서, 우리에게 집 지을 돈이 없어 차별받아야 하는 세계임을 이해한 어린 아들이 조용히 엄마 빅토리아의 손에 자기 손을 얹는다. 아이가 이 행위를 통해 이 세계에 적용되고 있는 하나의 규칙을 깨달았음에 무력함을 느끼지만 한편으로 이것 또한 아이가 이겨내야 할 경험임을 안다.
【가시칠엽수, 빅토리아의 아들이 태어났을 때 심은 나무다. 6년이 되면 꽃이 피고, 그로부터 6년이 지나면 열매를 맺는다. 12년이다. “내 나무가 이제 엄마처럼 됐어. (...) 자단색 씨앗을 꺼내며 말한다. 그 씨앗을 어떻게 할 거야? 할머니를 위해 심자. (...) 탄생을 위해 한 그루, 죽음을 위해 한 그루(417쪽)”】
엄마는 아들에게 식물 알아보는 법을 가르치기 시작한다. 우리가 들여다본다면 식물이 우리에게 자기 특징을 드러낸다고 알려준다. 나는 이 식물과 동물, 물질 등의 그 자체로 나타남이라는 비인간의 자기 발현 존재성을 고작 현상학, 실재론, 객체지향 이론의 책에서 이제야 배우고 있다. 아이는 엄마로부터 그 어떤 채색된 철학보다 더 깊은 의미를 엄마와 함께하는 체험으로 습득한다. 자연 그 자체의 그러함에 따라 생산과 문화를 구축하는 파머컬쳐 농법을, 지속 가능한 원예의 원칙을 함께 공부하며 이 지상의 세계를 배워나간다.
핼러윈 데이를 맞아 빅토리아는 아이와 함께 마당에서 가꾼 들풀로부터 얻은 꽃잎과 줄기, 뿌리, 씨앗으로 잼과 과자를 만들어 동네 집들을 방문하기로 한다. 아이는 신이 났다. 자신이 엄마와 함께 만든 것을 선물로 누군가에 준다는 행위로, 아이는 문을 두드린다. “즐거운 핼러윈! 과자 드실래요?” 문을 연 사람들은 어린 아이에게 사탕과 작은 장난감을 답례로 선물한다. 아이의 마음에 마을 사람들의 친절이 씨앗처럼 심겨진다. 엄마는 아이에게 이 세상의 진실이 가끔 가혹할지라도 이런 작은 일로 아이가 세상의 좋은 면을 보게 할 것을 기대한다.
아이는 자신의 병인 당뇨병과 싸우는 전투를 벌이지 않는다. 결코 통제할 수 없는 것과는 전쟁을 벌일 수 없는 법이다. 그래서 까다로운 파트너일 뿐이며, 그것과 함께 하는 춤을 배우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춤의 스텝과 루틴을 배워야하고 매일 빠지지 않고 춤춰야 하는 것일 게다. “아들의 희망은 엄마의 슬픔에 빛이 되어주고, 엄마의 용기는 아들의 비틀거리는 발을 지탱하여 줄 것이라는 믿음”으로 때론 헛디디고 미끄러지며 실패할지언정 인생의 이야기를 춤추는 법을 배우기 위해 동행한다.
아마도 원제목인 ‘All my wild mothers'의 ’야생의 어머니들‘, 혹은 ’야생의 여자들‘은 저자 빅토리아를 비롯한 그녀의 어머니와 언니들, 그리고 그녀가 불공평한 세상에서 늘 다시 일어날 수 있도록 알려주었던 여자들을 총칭하는 것일 게다. 세상에 질문을 던졌을 때, 그녀의 호출에 반응하며 함께 야생성을 칭송하고, 어둠 속에서 시를 짓고, 눈물로 시간의 상처를 함께 적셨던 사람들, 상실과 슬픔으로 만들어진 이 세상이 비록 버거울지라도 함께 씨 뿌린 그녀들에 대한 애도와 경외와 감사의 이야기이기도 한 것이다. 빅토리아는 아이의 위태로운 출산에 임박하여 언제나 그녀가 위협과 모욕과 궁박의 상태였을 때 마법사처럼 나타나 든든하게 방어 공격을 해주던 큰 언니의 죽음, 하나하나의 작은 행위를 통해 자기 꿈의 씨앗을 뿌려 육남매라는 멋진 정원을 만들어준 어머니의 돌봄과 죽음 등 상실의 슬픔 속에서 이 어지럽고 끔찍함에도 아름다운 삶임을, 그 삶에 감사해한다.
이 아름다운 글들 속에서 저자가 아들과 둘이 일식을 지켜보는 장면에서 ‘사랑의 고통’을 깨닫는 문장이 있다. 문장을 독자들과 나누고 싶어 옮겨본다.
“다음에 네가 이 나라에서 일식을 본다면, 그때 넌 지금의 할머니 나이와 같은 여든 두 살일 거야. (...) 엄마도 나랑 같이 볼 거야?
엄마가 그렇게 오래 살 것 같진 않아. 아이는 더는 말하지 않는다. 제 손으로 내 손을 덮고, 계속 붙잡고 있는다. 이것이 사랑의 고통이다. 사랑을 찾은 뒤에 그것을 떠나보내야 함을 아는 것, 그때까지는 서로를 계속 붙잡고 있는다. 계속 붙잡고 있는다.“ -345쪽에서
죽음은 “시계가 조용히 자정을 넘기듯 은근슬쩍 다가온다.” 이별의 약속도, 사랑의 다짐도 없이. 우리 모두 빅토리아 베넷처럼 자기주도적 삶을 살아내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들의 인생에도 수많은 작은 사랑의 행위들이 있었음을, 그것들이 이 기이하고 불순한 세계를 살아가는 우리가 잊고 지내는 힘일 것이다. 빅토리아는 마침내 미래를 두려워하며 너무 많은 시간을 보냈음을, 그래서 그런 마음을 비로소 내려놓는다. 도달해야 할 행복 봉우리, 성취해야 할 완벽한 삶이란 없음을, 팔을 뻗었을 때 내 손을 잡을 사랑하는 그 누구와, 괜찮을 거라 말해주는 누군가 있으면 충분히 이 삶은 족할 것이다.
“갈망과 결핍이 묘하게 또한 불편하게 병치된 공간”인 거대한 은유이자 현실인 망가지고 버려진 곳에 무언가가 꿋꿋하게 생명을 키워나갈 수 있음을 증명하는 끈질긴 희망과 사랑의 찬가이다. 우리 모두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버겁고 견디기 힘들다는 생각이 거침없이 내습해 올 때가 있다. 빅토리아 베넷은 사물의 가장자리에서, 보도의 갈라진 틈에서, 단정한 부지의 경계선에서 우리가 모른 새에 자라는 들풀처럼 상호의존의 역사를 부정하며 배제와 소외가 거칠게 행해지는 세계일지언정 새 생명은 자라나 삶이 계속됨을 알려준다. 그리고 삶과 죽음 또한 계속되고 시간은 흐르고 또 흐르는 것임을. 슬픔으로부터 벗어날 길을 찾기 위해 척박한 땅을 갈고 마침내 세상의 경이로 돌아가는 길을 발견한 이 고결한 글을 읽을 수 있었음에 감사한다.
“슬픔은 우리와 함께 산다. 그래도 나는 그것이 우리의 나날을 몽땅 차지하도록
두지 않을 것이다.” - 빅토리아 베넷
【도로 경계석, 배수구와 도로 틈새, 작은 흙무더기 등 들풀은 뿌리를 내리고 끈질긴
생명력으로 그 삶의 순환을 이어간다. 책의 저자 빅토리아는 이러한 들풀로
야생의 정원을 가꾸었을 것이다. 촬영: 2024.9.9. 서울 선유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