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과 6펜스 / 과자와 맥주 동서문화사 세계문학전집 84
서머싯 몸 지음, 이철범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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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감상글은 이 책에 수록된 두 편의 작품 중 과자와 맥주(Cakes & Ale)에 한정된 것입니다.


그 어떤 소설문학이 작가 의식의 반영이 아닌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라는 점에서 모든 소설은 작가로서 한 인간의 배설물일 것이다. 그러나 많은 소설 작품들은 이것을 노골적으로 인식하기 어려운 것이고, 그렇기에 문()’이라며 지식의 한 체계라는 거룩한 이름의 범주로 부른다. 그러한 점에서 내겐 이 작품 과자와 맥주(Cakes & Ale)는 전형적인 작가의 배설물이며, 나아가 그 배설의 쾌락을 즐기려는 교활한 자부심과 비겁함의 산물로 보인다. 당대 영국 문단에 대한 비판이라는 장막의 그늘 속에서 자신이 지속하여 간직하고 싶은 한 때의 쾌락을 보존하고자하는 의지를 엿보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을 비난하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 작품을 서머싯 몸은 자신의 작품 가운데 가장 좋아한다고 말했단다. 여든 살 기념작으로 한 작품을 출간하게 되었을 때, 이 작품을 호화장식으로 출간한 것으로도 은폐된 자기만의 즐거움을 위해 써졌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는 하나의 단서가 된다. 이렇게 추측하게 된 이유는 소설 속 곳곳에서도 드러나는데, 당대 영국 사회의 계급신분에 의한 인간관계에 놓인 뿌리깊은 차별의식과 각종 제약에 의한 인습적 수행에 있어 작가의 분신인 작중 화자인 윌리 어셴든(이하 어셴든이라 함)은 자신의 양육 보호자인 숙부인 교구 목사와 귀족 출신 숙모의 요구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따른 것으로 그려낸다. 나는 여기서 몸의 비겁함과 교활함이 내비치고 있음을 읽는다.

 

또 다른 하나는 소설의 주요 대상 인물 중 하나인 문학 거장으로 불리는 에드워드 드리필드(이하 드리필드라 함)의 죽음에 즈음하여 그의 전기를 쓰려는 소설가이자 비평가인 앨로이 키어(이하 로이라 함)의 문학적 성공을 향한 각종의 수법을 열거하며, 목적과 수단의 교묘한 조합을 통해서 무엇을 해낼 수 있는지, 얼마나 출세할 수 있는지를 더없이 잘 보여 주는 본보기가 바로 로이였다.”,  문학적 재능 없는 자가 문단에서 거들먹거리는 행태를 비판한다. 단지 이것으로 그치는 정도가 아니라, 이미 당대 거장으로 칭송되던 드리필드의 출신배경이나 그의 사생활을 들추어냄으로써 은근히 한 문인의 작품 활동이나 작품 자체를 은근히 비하한다. 몸은 이러한 배설을 통해서 아마도 꽤나 커다란 즐거움을 맛보았으리라.

 

끝으로 하나 더 부가 한다면, 아니 이 소설의 절대 중요 제재로써 반드시 논의되어야 할 내용일 것이다. 드리필드의 첫 번째 부인이었던 로지와의 육체관계를 동반한 열정적 관계에 중층의 의미를 부여해 작가 자신의 의지를 감추는 것으로 보이는 점이다. 이것은 일석 삼조인데, 드리필드라는 문학거인을 추문의 희생자로 삼음으로써 격하시키는 효과를 얻는 것이고, 로지를 한 때 자신의 연인으로 삼음으로써 우월감을 성취하는 것이다. 게다가 로지라는 여인은 현실 속 작가의 쾌락적 사랑의 대상이었던 극작가 헨리 아서의 딸인 수 존스의 변신으로서 글로 보존된 숨겨진 관음의 화신이라는 점이다. 결국 이 소설은 아주 교활하고 비겁하게 써진 작가 개인을 위한 쾌락의 절대물이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을 떨쳐낼 수 없었다.

 

물론 이 소설은 이처럼 자전적 요소들로 작가가 숨기려 했으나 어쩔 수 없이 드러나는 욕망들로 인해 비하될 수 만은 없는, 우리네 인간 개인들과 사회에 대한 성숙한 성찰들이 있으며, 소위 사로잡는다라는 이야기의 구성과 전개에 있어 탁월한 재능을 갖춘 작품임을 부정하기는 어렵기도 하다.  대중 독자를 사로잡는 작가의 재능은 로이라는 드리필드 전기 작업을 수행하는 인물을 빗대어 한 편으론 폄하의 논의로, 다른 한편으로는 소설 작품의 불가피한 요소를 오가며, 바로 대중적 흥미를 자신의 작품에 대한 역설적 정당화 논리로 사용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소설 속 1인칭 화자인 어셴든은 어떤 비평가들은  스스로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작가는 인기를 하찮게 여긴다. 인기란 평범함을 나타내는 증거라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몸은 이 말을 진실로 믿어서가 아니라 역설적이고 다양한 반면이 있음을 말하고자 함이었던 것 같다.  소설의 제목, ‘Cakes & Ale'이 셰익스피어의 십이야에서 인생의 향락, 삶의 쾌락을 뜻하는 관용구로 사용되었 듯, 인기란 다름아닌  일반 독자를 사로잡는 뛰어난 재능임을 입증하는 당찬 실현임을 주장하고자 했던 것일 게다.

 

몸은 어셴든의 입을 통해  어리석은 독자들의 흥미를 끌려는 멜로드라마 같은 사건들도 나한테는 아무 매력이 없었다.”고 말하게 하지만,  이 말은 오히려 더욱 이 작품이 바로 그러한 멜로드라마의 유형이라는 점에서 다분히 역설적 진술인 것이며, 실제 작가는 화자의 뒤에 숨어. 소설들 대부분이 전형적 통속 소설의 범주에 속하는 것들이며,  불멸의 걸작이 햇빛도 보지 못하고 안타깝게 사라지는 일도 있겠지만, 후세 사람들이 그걸 무슨 수로 알겠는가라는 인식을 슬며시 내보이는 미끼로 진술된 것 같다. 이 소설은 쾌락적 흥미를 주 요소로 하고 있다.  때문에 이야기의 재미는 아주 자극적이어서 흥미, 매력, 사로잡는, 향락과 같이 그가 문단의 세태를 빈정거리며 제시한 요소들이 모두 버무려져, 대중적 인기를 얻는 작품이어야 함을 실천한다는 관점에서 애초에 이 소설은 흥미로 가득한 인기를 겨냥한 작품으로 써졌으리라 여겨진다.

 

열여섯 살 쯤으로 추정되는 어셴든은 숙부의 목사관에서 계급적 우월의 태도로 사람들과 세계를 인식한다. 낮은 신분의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거나 함께하는 것은 자신들의 신분까지 천박하게 낮추어지는 것이라 삼가는 것인 관습인 시절이다. 소년 어셴든은 자전거 구입을 숙부로부터 승인 받아내자 홀로 타는 연습을 하지만 실패만을 거듭한다. 이때 두 사람이 자전거를 타고 자신의 앞으로 다가오는데, 소설을 쓴다는 석공의 아들인 드리필드 부부다. 어셴든은 짐짓 거만하게 두 사람을 대하지만 상냥하고 붙임성있게 말을 거는 드리필드 부인의 친절에 그만 드리필드의 도움을 받아 자전거를 홀로 타는 데 일거에 성공하게 되고, 이후 어셴든은 숙부내외 몰래 친분을 쌓아나간다. 사실 이것은 드리필드의 죽음 이후 그의 전기를 쓰려는 동료 작가 로이로 인해 야기된 추억으로 시작된 회고의 기록이다.

 

로이는 세상 사람들이 기대하는 대문호의 이미지에 드리필드를 억지로 끼워 맞추려 한다. 때문에 로이가 쓰는 드리필드의 전기는 아마도 부정적 이미지가 제거된 말끔한 것이 될 것이다.  소문나면 안 될 비밀들을 모두 숨긴 채 번듯한 전기를 엮어 내 놓으려는 것에서 어셴든은 부조리한 당대 문단의 왜곡된 조작적 분위기를 포함한 비판의 시선을 들이댄다. 로이라는 인물은 자메이카 총독을 지낸 영국 고위관료의 아들로 케임브리지 대학을 나와 소설가가 된 한 때의 인기 작가이다. 그는 비평가에 잘 보이려 애쓰는 작가 유형의 대표자다.

 

로이가 어셴든에게 하는  유명한 비평가들과 의견이 다르다고 생각하면 불안하지 않나?” 하는 물음은 그의 인물 됨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 물음에 어셴든은  별로, 나도 글을 쓴 지 벌써 35년이나 되네. 그동안 작가들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걸 많이 보아왔지, 천재라고 추앙받으면서 짧은 시간동안 영광을 누린 뒤 망각의 저편으로 사라진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라며, 문단에 의해 조작된 평판을 얻은 작가와 작품은 결국 쉽사리 잊혀질 뿐이라고 로이의 인식을 비판한다.  그런데 이 인식은 불멸의 걸작과 관련한 인기있는 소설에 대한 어셴든 자신의 인식과 충돌한다. 물론 대중적 인기와 문단 또는 비평계의 조작은 그 성격이 달라 완전한 비교 가치는 아닐 것이지만, 문학작품의 위선이라는 악덕의 관점에서는 동일한 기준이 될 것이다. 사실 어셴든의 당대 문학계에 대한 신랄하고 준엄한 비판이란 것의 이면에는 질투라는 썩 유쾌하지 못한 감정이 도사린 듯 보인다.

 


결국 이 소설은 로이가 쓰려는 드리필드에 대한 매끈한 전기에 대해 어셴든이 숨김없이 쓰는 사실로서의 전기소설이라는 위상을 갖는다고 해도 될 것 같다. 그렇다면 몸의 분신인 어셴든이 진정 비판하고자 하는, 혹은 세상이 추앙하는 대상을 격하하려는 거장은 누구였을까? 가 궁금해진다. 석공의 아들이며, 두 번의 결혼, 중산층 등 평민 계층의 인물을 통해 당대 영국사회의 실상을 비판했던 손 위 세대의 거장은 토마스 하디(1840~1928)이다. 어셴든은 드리필드가 신분이 낮은 자의 자식이라는 점을 반복적으로 자신과의 관계에서 둘이 나누는 대화의 어투나 그가 자신을 대했던 낮은 자세를 눈에 띄게 반복한다.

 

또한 그의 첫 번째 아내인 로지가 술집 여급 출신이며, 자유로운 성적 관계를 주변 사람들의 입을 빌어 지속적으로 비하한다. 이처럼 작가의 작품 자체와는 무관한 극히 사적 삶을 통해 격하하는 동시에, 문단 내 평판을 좌우하는 거대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트래퍼드 부부를 등장시킴으로써, 그들의 종속적 인물로서 문단의 평판을 획득하고 거장으로 불린 것으로 묘사하여 문학적 역량 또한 신뢰할 것이 아니었음을 넌지시 비춘다. 몸은 이를 통해 자신이 통속작가이거나 단지 대중인기에 영합하는 작가로 치부되는 문단 내 현실을 돌파하려는 하나의 배설로서의 쾌락적 글쓰기처럼 여겨지는 이유이다.


나는 소설 속 드리필드의 모델로 추정되는 토마스 하디의 결혼 생활의 진실을 알기 위해 간략한 기록들을 살펴보았는데, 첫 번째 아내는 술집 여급과는 전혀 다른 변호사의 딸로서 오히려 토마스 하디보다 우월한 계급 출신여성이었기에 그 신분 차로 인한 갈등으로 두 사람이 결별한 것이라는 점이다. 물론 이 작품은 소설, 허구의 산물이다. 그런데 그의 두 번째 부인에 대한 묘사는 실제 사실과 상당부분 부합한다.  플로렌스 덕데일로 불리던 여인은 소설의 내용과 같이 하디의 문학적 명성을 자랑스러워했고, 후일 토머스 하디 전기를 집필하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로이가 쓰려는 전기 역시 드리필드의 두 번째 아내인 에이미의 요구에 의한 것이고, 그녀가 직접적으로 관여한다는 의미에서 거의 유사하다 하겠다. 그렇다면 몸은 왜 드리필드의 첫 번째 아내는 다른 성격의 인물로 변조한 것일까? 여기에 이 소설의 향락적 재미가 있다. 이 재미는 대중이 기대하는 멜로드라마적 요소와 더불어 자신이 간직한 소중한 사랑의 기억인 여인을 보존하고자 하는 욕망을 은폐할 수 있는 기막힌 위장 수단이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몸과 열정적 사랑의 시간을 8년 남짓 했던 여인인 수 존스는  내면의 밝은 빛이 밖으로 흘러 넘치는 것 같은 여인이라는 찬양처럼 그의 인생에 유일한 여성이었을 것이다. 소설에서도 로지의 초상화를 온 정성을 다해 그려내는 화가가 등장하고, 그 초상화에 대한 어셴든의 첫 인상은 여기 기록하여 남겨두고 싶을 만큼 강렬하다.  나는 그녀와 그림을 뚫어져라 보았다. 갑자기 심장에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누가 날카로운 칼로 심장을 푹 찌른 것 같았다.(...) 묘하게 기분 좋은 아픔이 느껴졌다.”

 

로지의 아름다움에 대한 찬탄의 수사가 책의 몇 쪽에 걸쳐 흐른다. 너무 아름다워 숨이 막힌다고, 수 존스는 이렇게 소설 속 로지의 몸()을 입고 작가 서머싯 몸의 영원한 여신으로 박제화된다,  나폴리 박물관의 정교한 프시케의 조각상처럼.  실제 수 존스의 초상화는 몸의 평생 절친이었던 영국 왕립미술원 원장이었던 제럴드 캐리가 그린 초상화로 여전히 남아있으며, 이 그림은 아마도 소설 속 로지에 대한 묘사와 거의 일치된 감상을 주는 모양이다.

 

나는 허구의 소설을 작가의 현실적 삶으로부터 유추하려는 이 감상이 부당하다고 여기지 않는다. 이 소설은 다분히 작가의 전기적 작품임을 부인할 수 없는 성격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실제 어셴든에 의해 폄하되고 비판되는 문학비평가로 등장하는 로이가 그렇고, 드리필드의 명성을 유지 존속시키려는 두 번째 부인 에이미나, 드리필드를 문학계의 거장으로서 평판을 만들고, 그로부터 자신들의 비평가의 지위와 영향력을 계속했던 트래퍼드 부부 모두 현실 속 인물들을 모델로 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그렇기 때문이다.

 

후일 몸은 여든 살 기념 인터뷰에서 이러한 사실들에 대한 지적을 모두 긍정했으니 작가의 실제 삶과 분리하여 읽는 것은 오히려 작품에 숨겨진 의도를 방해하게 되리라 생각된다. 신분질서의 비인간적 계층질서에 대한 혐오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체화된 뿌리깊은 인습에 굴종된 모습을 보이지만, 술집 여급 출신이라는 로지의 아름다움에 대한 매혹과 그녀의 분방한 성적 자유의 행로에 대해 진심을 다해 긍정하고 응원하는 것에서 한 개인을 둘러싼 세상의 질서와 관습을 이겨낸다는 것의 모순이라는 어려움을 발견하게 된다.

 

혐오하면서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그 나약함과 사랑과 명예의 소유를 향한 갈망들이 때론 거친 격랑처럼 몰려오고, 때로는 구름 한 점 없는 여름날 저녁같은 고요함이 되어 흐른다.  한 인물의 전기를 쓸 때 전체적 조화를 생각해야 한다는 균형이라는 조작된 글이 아니라 엉뚱한 것을 집어넣어 전체 인상을 흩트리려는 작가의 그 교활함을 사랑하게 된다.  어쩌면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이 작품의 진솔함이 바로 이 소설이 시대를 계속하며 명작으로 독자들을 유인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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