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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무덤에서 춤을 추어라
에이단 체임버스 지음, 고정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4년 8월
평점 :
“나를 향한 그대의 사랑은 어느 여인의 사랑도 따를 수 없을 만큼 값졌거늘.”
-「사무엘 하」 1장 26절에서
그래, ‘어느 여인의 사랑도 따를 수 없을 만큼 값졌다’는 성경 속 요나단의 다윗에 대한 사랑만큼이나 간절했던 열여섯 살 청소년의 첫 사랑에 대한 이야기다. 하지만 이 사랑이야기는 주검과 그 주검의 봉분 위에서 왜 춤을 추었는지, 그 기이한 행동의 동기에 대한 고통스러운 자기 성찰의 글이기도 하다.
소설은 이 사랑과 주검이 대체 어떤 의미였는지를, 법원 판결을 위해 그 당사자인 헨리 로빈슨(이하 ‘핼’로 표기)이 망자에 대한 모독으로만 보이는 무덤 위에서 춤을 추는 행위를 했는지, 사건의 진상을 알아내고자 하는 사회복지사의 몇 차례의 면담 시도 끝에 마침내 핼이 써 낸 집요하고 세밀한 자기 관찰기이며, 사건에 이르게 된 동기와 내용의 진실의 기록이기도 하다. 이렇게 쓰고보니 지나치게 무겁고 밋밋한 형식의 이야기처럼 보인다. 하지만 결단코 주검의 어두운 무게가 짓누르는 그런 얘기가 아니다. 오히려 해변과 바다와 요트, 그리고 오토바이와 침실과 사랑과 질투가 거센 파도처럼 휘몰아치는 그런 열정의 이야기다.
이렇게밖에 묘사하지 못한 것은 감상자의 문장과 문체에 대한 열악한 능력일 뿐, 소설에서 사용되는 어휘를 비롯하여 하나하나의 문장, 그리고 그 구성에 있어 기발한 유머와 재치, 이야기를 자유자재로 연결하기 위해 구사하는 ‘수정, 위안, 액션 리플레이’와 같은 앞 선 기술(記述)을 거듭 부연 설명하는 문장 기교로서의 인터페이스는 물론, 사회복지사 보고서라는 제 3자 시선의 글이 틈틈이 교호(交互)하여 이야기의 긴장과 흥미를 견인하는 세련되고 우아하기까지 한 그야말로 생동하는 정념의 열기로 들끓는다. 정말이지 스타일리쉬!한 소설이다. 그럼에도불구하고 나는 이 열여섯 살 핼의 격렬하고 생생한 사랑의 이야기이자 그 설렘에 얽혀드는 비극의 긴장미를 말하는 대신에 조금은 사변적 감상을 쓰려고 한다.
핼은 T.S.엘리엇의 시 「황무지」의 한 문장, “한 순간의 굴복이 가진 무시무시한 힘은 / 한 시대의 분별로도 돌이킬 수 없도다.”를 인용하며, 모든 일에는 어떤 순간이 있음을, 돌이 킬 수 없는 지점, 한 걸음 더 내디디면 다시 돌아 올 수 없다는 걸 아는 순간이 있음을 깨닫는다. 자신의 가슴이 절로 울렁거리며 성큼 사랑에 다가서고 만다. 핼은 바다에 끌고 간 요트 전복의 순간, 그리고 그를 조난의 순간에서 구해준 친절한 또래 청년 배리 고먼을 바라보았을 때, 배리가 그에게 자신의 레코드가게 아르바이트를 권하며 함께 일하기를 제안 했을 때, 핼은 이미 배리에게 저항 할 수 없는 정념의 감정에 휩싸였다.
소설은 이처럼 자신을 잃은 채 온통 사랑에 몰두했던 열여섯 소년을 그린다. 그런데 이 소설은 핼이 쓴 사건과 사건에 이른 나날에 대한 성찰기이며, 바로 소설인 이 글을 쓰는 핼의 글쓰기를 통한 자기 발견의 여정이기도 하다. 때문에 그의 진로선택과 그 선택의 당위성, 그리고 한 인간으로 성장하는데 있어 불가피하게 거쳐야하는 고통스러운 성장과제에 대한 꼼꼼한 자기 관찰의 목소리가 곳곳에 흩어져, 소설 혹은 글쓰기란 과연 무엇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자기 경험의 경계를 초월한(메타적) 문장론이거나 소설론을 엿보게도 한다.
이를테면, “나는 나의 과거를 냉정하게 관찰한다. 정신기술로 배리의 눈, 입, 손, 몸의 움직임, 목소리의 근접 촬영분을 엄선해 모호한 의미를 탐색하고 많은 것을 발견한다. 육체로 이루어진 어휘를.”이라거나, “지난 일을 하나하나 되새기고 있다. 우리가 한 모든 말, 행동, 디테일, 소소한 단편, 그 단편들을 모아서 커다란 단편으로 묶으려고 한다. (...) 하나의 전체로, 어떤 의미가 있는. (...) 나에게 그를, 또 나 자신을 설명해주는 것"처럼, 마치 소설 쓰기의 훈련 작법을 소개하는 것 같은 문장들이다. 물론 이러한 문장들은 배리와 핼 자신의 사랑의 여정에 대한 빠짐없는 묘사를 하려는 노력의 일환이긴 하지만 말이다.
사실 핼의 정념으로서의 사랑 이야기는 청소년이라는 성장기 인간의 경험 부재의 미숙함에서만 문제는 아닐 것이다. 인생에서 처음 경험하는 열여섯 살 핼에게는 자기 자신을 송두리째 삼켜버리는 놀라움이었겠지만, 이것은 안다고 다시 반복하지 않을 수 있는, 이성이 쉽사리 통제할 수 있는 그런 것과는 다를 것이다. 자극에 빠져들고, 이성을 잃고, 상대에 빠져드는 것은 누구나 겪는 통과의례이며, 또한 그 맥락과 상황은 조금씩 다르게 반복되어 우리를 도전에 몰아넣기도 한다. 여기서 주목하게 된 부분이 있는데, 핼이 배리가 자신을 배신했다고 여겨 거친 말다툼을 벌이는 장면이 있다. 배리가 핼에게 쏟아붙는 말들인데, “나는 네가 지겨워!”, “난 네 소유물이 아니야”, “네가 원하는 건 우리 둘이 무언가를 같이하는 게 아니야, 그냥 나일뿐이지. 나의 전부”에서 드러나는 핼의 사랑이란 관념이 빠져있는 오류의 지적이다.
어쩌면 이 소설을 사랑 이야기라 말할 수 있는 만큼, 철학 이야기라 할 수 있는 부분인데, 핼은 “모든 환상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무수한 구멍이 생겨나고 그 구멍으로 현실이 침투한다.”고, 결코 자신은 죽음과 같은 관념에 매몰된 관념론자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듯하다. 그런데 여자사람 친구인 카리는 그에게 “너는 설익은 관념들을 사람보다 중요시하고, 너 자신의 한심하고 탐욕스러운 감정에만 온 관심이 쏠려 있으니까.”라고 말한다. 감상자인 나는 카리와 배리의 지적이 핼을 올바르게 판단한 것이라 생각지 않는다.
핼은 자신과 배리가 나눈 말(대화) 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표정, 몸짓, 분위기, 그리고 이러한 것들이 나타났던 상황과 장소, 맥락에 이르는 드러난 모든 것을 말하고자 한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쓴 이 소설, 이 글에 대해서 “앞에 적은 말들은 우리가 직접 한 말들이다. 하지만 우리 얼굴 뒤쪽에서는 더 많은 일이 일어났다.”고 말한다. 더구나 감상글의 모두에서 말한 바처럼 그는 이미 묘사한 글에 뒤이어 ‘수정’의 글을 다시 덧붙여 쓰거나, 자기감정이 투사된 글에 ‘위안’이라 하여 추가글을 보충한다. 이도 부족했던지 ‘액션 리플레이’라 하여 실제 발생했던 모든 언어와 행위, 상황 일체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별도의 장면으로 철저하게 ‘묘사’하기도 한다. 핼은 죽음의 관념에 사로잡힌 관념론자도, 인식론자도 아니다. 그는 마치 대상 그 자체의 나타남, 그것을 신뢰하는 현상학자에 가깝다. 그래야 핼이 배리에게 2초 남짓의 순간에 사랑에 빠져드는 것, 배리의 모든 몸체를 자기 지각의 대상으로 느끼는 것이 설명된다.
배리의 무덤에서 춤춘 것? 사랑했던 친구에게 더 이상 기댈 수 없었으며, 그 친구의 보살핌을 받을 수 없어졌고, 그래서 그 상황을 견딜 수 없게 되었다는 비난과 함께 핼이 원한 건 배리라는 관념이라고 지적하는 카리의 말은 설명은 옳은데, 귀결은 전혀 잘못 된 것으로 보인다. 핼은 철저하게 대상에서 스스로 드러나는 모든 것이 바로 그 대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기에 보살핌, 기댐과 같은 몸의 얽힘, 몸의 지각을 신뢰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신뢰가 속박이요, 소유욕이요, 지루함이라 말하며, 오토바이를 질주하며, 짜릿함의 일탈로 벗어나려는 배리의 행위는 이 세계와 인간, 그리고 여타 대상에 대한 사랑을 진정으로 할 줄 모르는 것이었다고 여겨진다. 요즘의 사랑들은 배리의 사랑처럼 금세 싫증내고, 그 익숙함, 그 얽힘에 깃든 제한된 자유를 견디지 못하는 것 같다. 자유란 본래 조건부의 자유이지 완전한 자유란 불가능하지 않겠는가? 이미 몸이란 것에 구속된 존재가 어떻게 몸을 벗어나 생각이란 것을 할 수 있을까? “그 누구도 쉴 새 없이 짜릿하게 살 수는 없는 거야” 라는 말이야말로 진실의 일부를 담아낸 것일 게다.
“아마도 나는 그를 사랑했던 것 같다. (...) 그렇다고 생각했다.
내가 사랑이라는 말을 이해하는 만큼은. 사람들은 그걸 어떻게 알까?”
- 이 문장보다 더 현상학적 표현이 어디 있겠는가?
결정적인 단서!, 핼은 “나는 내 몸을 좋아하는 편이다. 이것을 떠나게 된다면 아쉬울 것이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하는 대목이다. 이 문장에 이어서 노화의 무수한 단점들이 이어지기는 하지만, 그건 단지 몸지각의 무뎌짐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이해가 족할 것 같다. 이보다 인용 문장처럼 핼은 몸이 지각하는 것, 그것이 삶의 진실이기에 그 것을 떠난다는 것, 즉 죽음에 의해 주검이 된 것에 대한 아쉬움을 말하는 것 아니었을까? 49일간 이어졌던 첫 사랑의 주검이 누워있는 무덤위에서 춤을 추는 것은 그와 한 약속의 이행이기도 하지만, 자기와 얽혀 세상을 함께 바라보고 이해했던 존재에 대한 상실을 스스로 위로하기 위한 의식, 새로움을 위한 몸의 습관을 떨어내는 의식으로 이해하고 싶어진다. 무진장한 다양성을 경험 할 수 있는 새롭게 변화된 몸으로의 지향을 위해. 카뮈의 말처럼 주검인 무덤, 그것에 대한 조롱과 모욕의 몸짓은 바로 이 새로운 몸들의 태어남이라는 지향의 몸짓인 것 아닐까?
【프랑수아 오종 감독의 영화 《썸머 85》에서】
결국 핼은 모든 것이 가라앉을 수 있는 시간,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어 더 많은 걸 쓰고 싶어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러면서 현재에 파묻히지 않고 새로 일어나는 것은 인간의 영원한 숙제라며, “세상에서 중요한 단 한 가지는 우리 모두가 어떻게 해서든 ‘자신의 역사에서 탈출’하는 것”이라고 쓴다. 이 문장은 소설의 첫 문장인 “나는 주검에는 관심이 없다. 내 관심을 끄는 것은 ‘죽음’이다. 죽음이라는 현상.”으로 돌아가 조우한다. 나는 실존주의의 현상학자 샤르트르의 옅은 그림자를 이 소설에서 본 것 같다. 핼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영문학 선생 오즈번의 말처럼 핼이 쓴 이 글은 “핼의 인생에 새롭고 의미있는 구심점이 되고있는 성찰적 글쓰기”의 결과물이다. 때문에 나는 이 소설을 ‘통제하기 힘겨운 에로스의 뜨거운 에너지를 다루는 성장의 의례적 사건’으로 보기보다는 체험의 성찰을 통한 자기 발견의 철학적이며 문학적 행보라 말하고 싶다. 아무쪼록 이 사랑 소설은 이야기의 긴장감이나 생동감, 강력한 흡입력을 장착한 재능 넘치는 작품이다. 누구나 책장을 넘길 때마다 다채로운 텍스트 구성의 맛깔스러움으로 이야기 전개에서 도망치기는 힘겨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