겅클
스티븐 롤리 지음, 최정수 옮김 / 이봄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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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제인 겅클(Guncle)은 굳이 설명이 필요치 않을 만큼 단어의 외형이 이미 그 개념을 드러낸다. 게이 삼촌. 겅클은 또한 아이들로부터 거프(Gup; Gay Uncle Patrick)로도 스스럼없이 불리는데, ‘게이 삼촌 패트릭은 끔찍해하지만 굳이 아이들의 순수함이 기꺼이 수용한 친근한 언어이기에 사용을 금지하지 않는다. 아이들의 엄마이자, 동생 그레그의 아내였던 패트릭의 오랜 여자사람 친구였던 세라의 오랜 투병과 죽음은 이들에 커다란 상처를 남긴다. 죽음을 앞두었던 아내의 상실에 대한 고통으로 이미 심한 알콜 중독상태에 빠져있던 그레그는 형 패트릭에게 아홉 살 메이지와 여섯 살 그랜트를 자신의 중독치료 기간동안 맡아 줄 것을 부탁한다.

 

자신의 배우자였던 조의 죽음에 대한 비탄에서 여전히 헤어나오지 못한 패트릭에겐 절망적인 부탁으로 느껴지지만 동생의 상태를 치유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로 받아들인다. 인생의 중반에 어언 사년간 사막의 사유지에서 숨어 지내왔던 패트릭은 두 아이들과 상실의 고통을 서로 보듬고 직시하며 그 상황을 각자의 삶에서 어떻게 이해되어야 할 것인지를 배워 나간다. 작품의 초입부터 뚜렷하게 도드라져 소설을 더욱 매혹적인 작품으로 이끄는 주요 동력이 있는데, 패트릭이 어린 조카 아이들에게 하는 말투(語調)의 양식이다. 그는 마흔 중반의 영화배우가 동료들과 나눌 때 사용함직한 언어를 그대로 들려준다. 그리고는 아이들이 미처 알지 못하는 말들은 친절한 설명과 그 말이 어떤 의미로 이야기 된 것인지를 알려준다. 세상에 대한 신랄한 경험의 말이지만 안전한 방식으로.

 

이것은 세 사람의 구십 일간 함께하는 일상에서 선언되는 십여 가지의 겅클 규칙으로도 드러나는데, 거프, 왜 다른 사람처럼 말하지 않아요?”라는 여섯 살 그랜트의 물음에 패트릭은 단호히 이렇게 말한다. 너 자신이 되어라, 다른 사람들은 이미 그들만의 것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대답하는 식이다. 그런데 이렇게 진지함만으로 흐른다면 이 소설은 다소 지루해버렸을 테지만, 아이는 삼촌이 하는 행위를 쫓아 거슬리는 행위를 하고, 패트릭은 이내 그런 조카에게 주의를 준다. 이때 어린 그랜트는 나 자신이 되고 있어요.”라고 받아친다. 아이만의 유머와 유쾌함이 깃든 수용 방식이다. 그들은 이렇게 서로 함께하는 법을 배워나가며, 슬픔의 비통함에서 탈출하기 위해 서로의 이해를 넓혀가며 삶의 길을 밝혀나간다.

 

아홉 살 메이지의 당돌한 표현들은 소설의 흐름에 깊숙이 개입하여 아이들의 상실의 슬픔에 대한 이해의 워크북 같은 역할을 수행하기도 한다. 삼촌 애들한테 그런 얘기를 하면 안 되죠. 안 되나? 안 되죠! 우리를 달래줘야죠, 그것도 몰라요?” 어린이답게 웃고 어리석게 행동하는 걸 육아라고 생각지 않는 패트릭에 대한 세상의 진부한 언어를 장착한 아이의 항의다.

 


페트릭은 일상의 행위와 언어로 세계에 대한 이해를 체현토록 한다. 겅클 규칙 7, 이 집안에서는 우리가 원하는 옷을 입는다. 남자 옷이냐 여자 옷이냐는 상관없다. (...)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신경 쓰지 않는 거야. 어때?”, 혹은 그건 여자가 하는 거잖아요. 그렇지 않아, 이 집에서 무슨 말을 하는 거니? (...) 남자 일 또는 여자 일이라는 말조차 있어선 안 돼. 사람은 그냥 자기가 원하는 일을 해야 하는 거야.” 이들 대화로부터 독자는 편견없이 사랑하고 진정한 자아를 가꾸도록 아이들에게 영감을 주도록 신중하게 선택된 언어임을 말하는 패트릭을 알아차릴 수 있다.

 

특히 아이들과 삼촌 패트릭이 아이들의 엄마 세라의 생일을 기리며 케익에 세 개의 촛불을 켜놓고 각자의 소원을 비는 장면이 있는데, 같이 할 수 없는 사랑했던 존재의 상실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그 상실을 어떻게 자기 생과 더불어 지낼 수 있는지를, 혹은 분리 할 수 있는지, 자기 내면의 진솔함을 당당하게 꺼내도록 함께 용기를 내보는 것이다. 상실의 슬픔이 세상의 끝이 아니라는 것을. 패트릭은 아이들의 엄마, 세라를 향해 소원을 말한다. 너를 힘들게 한 몸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길 바라, 네가 빛으로 가득하길.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길. 그리고 춤을 출 수 있길 바라...”, 그때 그랜트가 삼촌을 향해 그 소원 좋아요, 거프, 이 대화가 얼마나 아름다움으로 충만했는지, 존재에 대한 사랑과 아이들 마음에 대한 이해가 어우러져 인생의 이야기란 춤추는 법을 배우는 것이라는 빅토리아 베넷의 언어와 함께 진실의 언어로 내게 새겨진다.

 

소설은 마음속을 맴도는 상실의 비탄을 함께 나누며, 숨 쉴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나가는 아이들과 겅클의 성장기다. 아마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두 아이에게 패트릭이 전하는 난 너희가 진정으로 살기를 원한단다. 산다는 건 가장 드물고 귀한 일이야.”라는 아이들에게는 어렵게 들릴 말이지만 그 진정함에서 그것은 곧 자신을 향한 언어이기도 함을 읽게 된다. 동성인 배우자 조에 대한 상실의 웅덩이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던 패트릭은 아이들과 함께하며, 그들의 놀라운 생명선, 회복 탄력성을 발견하고, 바깥세상과 연결되는 길을 찾아낸다.

 

헐리웃을 연상케하는, 대중의 일상적 삶에 신선한 유쾌함을 던져줄 그런 통속적 소재의 이야기 전개를 보이지만, LA에서 직선거리 150Km 떨어진 주요 배경인 팜스프링스처럼 적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그 문화의 유머와 속도감, 기분좋은 감동만을 빼내 상실의 슬픔과 삶에 대한 진지한 통찰을 우아하게 직조해 낸 작품이라 하고 싶다. 아이들의 온 숨이 넘어갈 듯 까르르대는 그 즐거움에 함께 순수해지는 웃음소리, 이야기를 관류하는 가장 사랑하던 엄마, 그리고 연인과 아내의 상실이란 슬픔으로 인해 흐느끼는 자기 소외의 고통을 온전하게 품어낸 소설이다. 그 안에 깃든 마음 속 깊은 서로에 대한 의지와 용기의 감정, 그 사랑의 정체가 독자에게 깊숙이 스며들어 환한 감동의 웃음을 지으며 춤추는 그들을 그려 보게 된다. 내면의 그 무언가가 녹아내리는 기운을 느끼게 된다.

 

우린 힘든 여름 내내 우울하게 지내는 대신 파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에겐 여러분이 필요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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