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스카틀리포카
사토 기와무 지음, 최현영 옮김 / 직선과곡선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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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신공희(cannibalism:人身供犧), 인간이 다른 인간의 신체를 먹는 의례다.

제 배를 채우기 위해 타인과 가족, 그리고 공동체, 생활터전, 생태계의 피와 살을

다 빨아먹어 버리는 우로보로스가 자본주의 사회질서다.

- 낸시 프레이저, cannibal capitalism에서

 

 

연기 나는 흑요석 검은 거울의 신, 아스테카 최고의 신 ‘테스카틀리포카’, 용서를 알지 못하는, 지옥도 초월하는 전투의 신, 이 옛 멕시코 신화의 은유는 소설의 밑바닥을 흐르며, 인간 욕망의 어두운 영토를 독보적인 서사로 비추어 내고 있다. 자유시장 원리가 지배하는 홉스식 자연 상태, 즉   피로 피를 씻고 그 피를 신에 바치는시장 지배권의 전쟁, 마약 자본주의, 피의 자본주의, 주술 자본주의, 식인 자본주의, 그 걸신들린 실체들의 이야기를 디테일한 신화적 지식과 탄탄한 구조로 직조해내고 있다.

 

소설의 서사를 조망한다면 멕시코 북서부 지역을 지배하던 마약밀매 카르텔인 네 형제가 이끄는 카사솔라스가 지역 패권을 차지하려는 신흥 카르텔인 도고 카르텔에 의해 참혹하게 몰살되는 사건으로 시작된다. 유일한 생존자인 셋째인 발미로 카사솔라스를 집요하게 추적하는 도고 가르텔을 피해 보복을 준비 할 수 있는 은신지역을 향한 호주, 인도네시아, 한국, 일본으로 도주의 행적은 여느 소설 작품의 중심 서사를 뛰어넘는 흥미를 제공한다. 그런데 이 정도는 사소한 시작에 불과할 만큼 전개 될수록 전환되는 장면마다 상상 초월의 숨을 멎게 하는 이 세계의 어두운 저 밑바닥들을 불러내 독자의 면전에 들이댄다.


 



보복을 위한 중간 기착지인 인도네시아에서, 붕괴한 마약 카르텔의 우두머리였던 발미로의 행적과 함께 그를 새로운 비즈니스로 시선을 이동시킨다. 장기를 불법으로 적출하는 일본인 백 앨리(back alley;뒷골목)’ 닥터인 스에나가 미치쓰구와의 엮임이다. 이 새로운 인간과의 만남은 자본주의의 맹목적 지향성인 자기 확장’, 다시 말해 공식 경제에서 추방된 비공식 회색지대로 향하는 오늘날 신자유주의 자본 축적 전략의 가장 적나라한 판본이다. 자본주의 DNA에 각인된 그 도착성, 엄청난 수익을 가져다 줄 신종 비즈니스는 초클로(아동의 심장)라는 산지(産地)가 한정된 희소적 자원인 품질 보증된 일본산() 아동 심장을 밀거래하는 것이다.

 

일본산 아동심장, 돈 많은 수증자 부모의 바이오센티멘털리티(생물학적 감상)는 심장 주인의 내력에 대한 품질을 기대한다. 건강한 정신과 육체로 성장한 아이의 심장이기를. 발미로는 야쿠자가 아동복지 목적으로 설립한 위장조직을 통해 무()호적 아동들을 은닉된 장소에서 양육하며, 수요에 따라 살아있는 아이의 심장을 적출, 공급한다. 1회 이식거래에 한화 65억 원에 달하는 거대한 뉴-비즈니스. 그러나 시장 자유주의라는 것이 무엇인가? 이윤 높은 독점 시장에는 경쟁자가 출현하기 마련이고, 동업자는 분배율로 전쟁을 벌인다.


경쟁하지 말고 독점하라!   - 실리콘밸리 IT기업 페이팔 창업자 '피터 틸'

 

이 문장처럼 선명한 실체의 고백이자 끔찍한 자본주의의 극명한 선언도 없으리라. 독점이 부딪칠 때 피를 부르는 전쟁이 시작된다. 소설의 많은 지면이 시장 지배를 위한 소수의 암살단, 즉 폭력 조직 양성의 과정과 그들의 무자비한 잔인성이 길러지는 의식(儀式)의 묘사에 할당되어 있는데, 바로 아스테카의 인신공희, 희생제물이 가져오는 증오와 살의의 소용돌이를 거두어오는 열광과 환희의 구역질 날 정도의 충만한 인간 살해 행위다. 경쟁 조직의 리더로부터 산 채로 심장을 적출하는 저주 받은 정화의 의례 행위, 피의 제사는 심장 밀거래와 병행하며 자본주의 자체가 지닌 그칠 줄 모르는 축적의 본질을 빗댄다.

 

나는 폐쇄조직에 대해 여러 지면에서 그 부패성과 잔인성의 자연적 발화를 지적하곤 했는데, 발미르가 자신의 수하 조직을 단단히 묶는 유대 조성의 묘사들은 그 끈끈한 연대 의식이 어떻게 싹트는지에 대한 가장 본질적인 모습들을 보여준다. 그 잔인성과 무감각한 살인의 행위들은 생략하는 것이 좋겠다. 발미로는 인디헤나(인디오)였던 할머니 리비르타드로부터 어린 시절 형제들과 함께 귀 기울였던 아스테카 최고의 신 테스카틀리포카를 향한 희생제의, 영광스러운 옛 아스테카의 발흥을 위한 의식을 통해 살육 기계인 암살자를 길러낸다.

 

소설에서 아주 중요한 인물로 멕시코 출신의 어머니와 야쿠자 말단 보스였던 아버지로부터 출생한 혼혈 아동인 히지카타 코시모(일명 엘 파티블로‘; 단두대)’라는 소년을 등장시킨다. 살림을 돌보지 않는 아버지, 약물에 중독되어 아이를 방치한 채 자기연민과 쾌락에 절어 사는 어머니, 아이는 인간에 대한 감정, 세상에 대한 이해도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다. 아이는 부모 살해자로 소년원 재소(在所) 생활 끝에 조각에 대한 손재주로 장식 칼을 만드는 공방의 선택 덕에 출감한다. 2M4Cm의 거대한 몸집,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일본인, 스페인어를 말할 줄 아는 이방인, 그는 발미로(가명 엘 코시네로)에 의해 최고의 암살자로 키워진다.

 

코시네로는 파티블로(코시모)를 엘 차보(아가)로 부른다. 둘의 관계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끈끈하게 엮이고, 코시네로는 아스테카의 신화, 테스카틀리포카에 대해 들려준다. 테스카틀리포카, 검은 아스테카의 거울, 인간이 알 수 없는 흑요석 거울에 대해서. 죽음의 각인이 찍혀있는 주술, 꿈과 환상의 그 절대적인 제의의 의미에 대해서. 아이는 묻는다. 왜 위대한 최고의 신이 고작 거울인가요?

 

이 물음은 어쩌면 발미로(엘 코시네로)가 맹신하는 피의 희생제의가 지닌, 또한 식인자본주의가 지닌 한계를 모르는 탐욕, 피의 경쟁을 부르는, 그 반복되는 증오와 살의에 대한 정곡(正鵠)일지도 모르겠다. 이제 소설 내용의 누설자가 되는 것은 피해야겠다. 이 답변은 발미르의 할머니 리비르타드가 이미 들려준 이야기 속에 있는 것 같다. 다만 어린 발미르가 모두 이해하지 못한 것, 용서없는 처벌의 신이라는 반쪽만 이해한 불구의 믿음이라는 것이다.

 

세계의 시초부터 줄곧 놓여있는 뱀과 함께 있는 검은 거울,

보이는 모습에 현혹되지 말라. 이 둘은 전혀 닮은 데가 없다.

색과 모양도 다르지, 하지만 둘 다 신의 분신이다.”  -495

 

이 아스테카 신들의 이야기를 비집고 빛나는 하나의 문장이 있으니 공방의 운영자인 파블로’, 그는 불행한 소년 코시모가 어둠의 세계로 불려 들어가는 것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자신의 무력함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연민의 메시지를 보낸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다. 자비다...(마태복음)”

 

테스카틀리포카는 테스카(거울)와 코아틀()이 함께하는 이름이다. 서로 이질적인 것, 밤과 낮, 그림자와 빛, 불과 물, 태양과 달, 이 세계의 정의는 경쟁도 아니요. 피의 복수도 아니며. 인간이 인간을 먹는 식인의 무참함이 지배하는 곳이 아니라는 말, 이질성, 다름을 수용하라는 의미일 것이다. 인간사회의 추하고 끔찍한 역사, 그리고 현실이라는 무대에 펼쳐지는 그 무지막지한 합리성에의 신묘한 적응성을 보이는 자본주의, 경쟁자와 이질적인 자를 향해 예리하게 갈고 닦인 칼날, 컬트교처럼 폐쇄적으로 엮인 집단들의 음침한 내부성들, 연대의 이탈을 응징하는 가족주의 등, 보이지 않는 비경제적 자원을 먹고사는 은폐된 자본주의의 본질을 가히 독자적 영역으로 구축한 작가와 작품에 갈채를 보낸다.

 

혹여 프레이저가 보았다면 결코 외면하지 않았을 것이다. 배제된 인간들, 돌봄, 생태계 등 -경제적요인들이 뒤얽혀있는 자본주의라는 사회질서 체제에 대한 낡은 경제 중심의 자본주의에서 탈피하여 새로운 확장된 사회적 자본주의를 읽을 수 있도록 시야를 넓힌 그야말로 창조적인 소설이다. 이 작품은 단순한 장르문학으로 그 범주를 좁혀 가두어서는 안 되는 작품이다.

 

멀리 바라보고 깊이 생각하지 않으면 반드시 금세 화가 되어 돌아온다.

(人無遠慮 必有近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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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스
애나 캐번 지음, 박소현 옮김 / 민음사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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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가 인지할 수 있는 것이란, 이 희미한 어스름 속에서 끝없이 앞으로 달려 나가는 이 무서운 질주 밖에 없었다.  침묵, 추위, 눈 그리고 자기 곁을 지키는 거만한 인물, 조각상 같은 남자의 차가운 눈은 바로 은백색 수은으로 가득 찬 헤르메스의 눈, 얼음의 눈, 그 여자의 영혼을 빼앗고 위협하는 눈이었다.”  -164쪽

 

이렇다 할 서사도, 구체적이거나 명료한 시간도 공간도 모호하기 그지없는, 그야말로 이 모든 것이 뒤섞인 혼돈 그 자체인 소설이다. 드러나는 소설 속, 주요 배역인 화자(話者)와 여자, 교도소장으로 불리는 남자, 이들 세 사람에 대해서도 어떤 설명이 없다. 다만 상황 속에서 드러나는 인물의 특성으로 이들의 관계를 짐작할 뿐이다. 그것도 흐릿한 안개 속의 그림자처럼.

 

소설은 화자인 남자 자신의 생각을 잠식하고 있는 여자, 여자를 찾아야 한다는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는 충동을 처리하려는 강박적 집착으로 시작된다. 그는 분명 돌아왔다.’ 고 말한다. 예전에 그가 살던 장소였다는 의식일 것이다.   불가사의한 비상사태가 임박했다는 소문이 있는 지역의 진상조사를 위해서 돌아왔지만,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여자를 만나야 하는 것이라고 자신의 비이성적 행위를 인지하고 있음을 말한다.

 

자신의 행위가 비이성적임을 인지하고 있음을 말하는 이 문장의 진위는 꽤 의심스럽다. 마치 이성적 분별을 잃고 있지 않음을 말하는 것, 그 자체가 이미 현실의 토대가 없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화자는 여자와 자신의 지난 시절의 관계를 회상하며, 여자의 가냘프고 수동적이며 타자에 대한 두려움으로 자신이 과감하게 다가서지 못했음을, 느닷없이 한 남자와 결혼을 해버린 당혹스러운 감정을 말하지만, 이것이 과연 실제였는지, 아니면 왜곡되어 혼합된 환상인지 모호하다. 어쨌든 불가사의한 비상사태란 얼음이 점점 침입해오는, 극한의 추위가 몰고 오는 황량함에 점령당하여 폐허화되는 세계임을 화자가 전하는 풍경으로부터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소설은 변주되어 유사한 상황을 반복한다. 화자의 행위는 여자가 있는 곳을 찾아내고 구원하기위한 생사를 무릅쓴 끊임없는 추적과 실패, 그리고 세계라는 타자에 대한 두려움과 억압에 굴복한 여자로부터의 신뢰 획득과 보호자로서의 인정을 향한 거듭되는 시도로 이루어져있다. 그리고 교도소장으로 상징되는 여자의 남편(?), 혹은 동반자의 야수적 폭력성과 냉담함은 이러한 화자의 시도를 좌절시키는 장애로 충돌한다.

 

그런데, 이러한 충돌을 온전히 현실의 두 인간의 갈등과 마주침으로 이해하는 데 나는 어려움을 겪었다.    나는 우리 두 사람이 실상 분리된 하나의 자아가 아닌지, 생각하게 되었다.(182)”라던가, 설명할 수 없지만, 우리의 모습은 서로 엉켜있었다. 나는 스스로의 반영을 바라보고 있는 듯 했다.(233)”처럼 한 인간의 분열된 자아의 형상처럼 여겨지기도 했으니 말이다. 어쨌든 화자의 여자에 대한 강박적 집착은 변질, 혹은 왜곡된 사랑의 현현인것 같다.

 

교도소장이 여자를 만나기 위해 찾아 온 화자에게   그 여자는 죽었다.”고 말했을 때, 화자의 감정은 여자가 그에게 어떤 존재인지를 드러낸다.  매서운 칼날이 나를 베고 지나가는 느낌이었다. 세상의 다른 모든 죽음은 내 바깥에 있었지만. 이것만큼은 내 안에 있었다.(233)”  여자는 남자와 분리될 수 없는 존재, 곧 여자는 화자를 이루는 하나의 육신이자 정신이다. 여기서 다시금 혼란에 빠져들었는데, 화자는 곧 구원의 대상인 여자이며, 남성적 폭력에 굴종되고 대상화되어 구원을 기다리는 여자는 화자의 또 다른 반영인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화자와 교도소장, 여자는 한 인물의 타자화된 여러 자아인 것이 아닐까하는 의혹에서 헤어나지 못했다는 말이다. 결국 나는 이 세 인물을 하나의 인물로 이해하고 읽어나갔다고 해야겠다.

 


여자는 흘러내리는 은백색 머리카락과 달처럼 창백하고, 유리처럼 부서질 듯한 존재로 반복되어 묘사된다. 또한 여자는 화자가 자신이 신뢰할 수 있는 안전한 보호자, 진정한 삶의 구원자임을 거듭 확인하려 한다. 수동성이라는 오래된 전통적 여자상()이다. 대상화된 존재로 읽혀지기를 기다리는 여자, 그래서 여자는 더욱 화자와 교도소장이라는 남자와 동일 인물로 해석되어야 한다고 여겨진다. 즉 여자가 기대하는 남자의 전통적 형상, 백마탄 기사이며 권력과 부를 한 손에 거머쥐고 있는 왕자님, 그러면서도 여자의 신뢰를 위해 기다리고 인내 할 수 있는 남자, 이들의 반영을 내면에 지니고 있는 여자. 이렇게 이해하면 화자와 교도소장은 여자가 욕망하는 남자의 반영일 뿐이다. 아니면, 화자의 내면에 존재하는 분열된 욕망의 분신들일지도.

 

화자는 권력과 부를 차지하고 있는 교도소장의 폭압 하에 있는 여자를 구하기 위해 거듭 마주치지만 좌절한다. 그런데 이 좌절의 계기가 여자의 미온적 거부거나, 교도소장과 화자를 위협적 인물로 동일시하며 거부하는 행위에서 비롯된다. 이처럼 분열된 타자상은 여자의 내적 욕망의 분신이거나 화자의 그것이거나.  결국 이 소설에 주요 등장인물이란 없다는 것이다. 오직 존재의 내면, 인간적 욕망의 현상만이 있는 것이라 해야 하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하니 조금은 이 모호한 텍스트를 읽어나가는 데 거부감, 불편함이 해소된다.

 

여자는 교도소장을 통해서, 또는 희생제물이 되어 살해되는 것으로 묘사되거나, 실종 혹은 동행의 거부로 남겨진 채 생존 가능성이나 실존하는 장소가 불분명해지곤 한다.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화자는 다시금 여자를 찾아 나서고, 교도소장은 이의 방해자로 등장하며, 점점 세상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얼음, 잔혹한 빙벽의 파괴적 침입이 조여 오는 종말적 세계에 대한 엄습하는 불안감과 함께 야릇하게 뒤틀린 욕망이 병행하며 독자를 비현실적 환상의 공간으로 몰아넣는다. 이 몽롱한 감각에 도취되어 인간 심연의 그 어두운 골짜기를 거니는 것, 어쩌면 이것이 이 소설의 본질인지도 모르겠다. 화자는 말한다.  다시 처음부터 그 여자를 찾아 나서야 했다. 이러한 되풀이는 마치 끔찍한 저주 같았다.(235)”.

 

이 소설에서 어떤 사실을 확인하고, 일련의 서사적 줄거리를 찾는다는 것은 아마 넌센스인 것만 같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욕망이 극지방의 빙하를 녹여, 대양에 실려 온 얼음이 반사하는 태양열로 지구가 냉각된다는 이상기후에 대한 인간의 도덕적 오만을 이야기하려 한다거나, 자기 편익, 영토적 야욕과 같은 이기적 쾌락이 핵전쟁이라는 자기 파멸을 가져오는 종말론적 세계관의 예견과는 아무 상관도 없다는 것이다. 다만 환상과 꿈과 같은 저 무의식과의 대면에서 오는 배경으로 읽어내면 족하지 않을까?

 

물론 헷갈리게 하는 문장도 있다.   인류라는 종족은 이미 죽어가고 있었다. 죽음을 향한 집단적 소망, 자멸을 향한 치명적 충동이 그 지표였다. (296)”  어쩌면 이 문장 또한 현대를 사는 인간의 자기 본질과의 대면에서 해독한 인식의 하나일 것이다. 아마 소설은 공허로 향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모든 무용수가 공허의 가장자리를 따라 빙빙 도는 죽음의 무도에서 두 존재의 구별은 사실상 무의미했다.(368)” 는 이해처럼 여자와 남자라는 두 존재는 분리된 존재가 아니다. 이것은 화자의 자기 실재성을 의심하는 다음의 문장에서 확인 할 수도 있다.

 

갑자기 내가 최근까지 살아온 삶이 굉장히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한마디로 그 경험의 실재성을 더는 믿을 수 없었다.”  -172

 

마침내 화자는 여자를 설득해서 보호자이자 구원자로서의 여정에 동행한다. 그러나 세계는 얼음과 죽음으로 이루어진 잔혹한 추운 세계로 점점 삶의 세계로 침입해 들어오고 있다. 아마 심연을 마주한 존재의 싸늘한 공허가 이것이 아닐까? 자신이 간직하고 있는 묵직한 권총의 무게가 그나마 약간의 안심이라 말하는 화자의 마지막 독백은 바로  달아날 수 없음, 그것 아닐까?

 

얼어붙은 세계에서 '길을 잃은 황혼의 존재',  소설의 시작 문장들에 박혀있는 이 어휘들이 어쩌면 캐번이 드러내고 싶었던 진정한 언어인지도 모르겠다. 인생이라는 운전, 그리고 거의 다 떨어진 휘발유, 어둠 속에서 외로운 언덕길에 발이 묶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차를 돌릴 수조차 없는 좁은 길,...,‘애나 캐번의 지독한 현실 독백인 것만 같다. 문득  역사상 긴 자살 유서로 불리기도 하는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막간이 떠오른다. 이 작품 또한 캐번의 문학적 유서 아니었을까? 모두에 인용한, 위협하는 얼음의 눈의 감시 속에서 어스름한 세계를 그저 질주하는 도리 밖에 없었다는 여자의 마음을 묘사한 문장, 아마 그것이야말로 이 작품의 의지였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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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E(얼음)에 대한 해석:  소설의 제목이자 소설 속 끊임없이 세계 속으로 침입해오는 얼음은 어쩌면 투명한 백색의 환각제 '메스암페타민' 의 속칭으로 해석할 수 있다.  즉 마약의 환각성에 취한 한 인간의 고백록으로. 사방에서 조여오는 얼음, 빙벽의 여러 묘사는 환각제로 인해 신체가 느끼는 감각과 그리 다르지 않으리라 여겨진다. 작가는 이렇게 감각되는 분열된 자아를 통해 자신에게 새겨진 고통의 흔적들을 대면할 수 있었던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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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트리 스피박 라이브 이론
마크 샌더스 지음, 김경태 옮김 / 책세상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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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 낯선 인종의 사람은 그 생김새가 같아 보인다. 한국인을 비롯한 극동에 위치한 사람들을 서구의 인간들은 다 똑 같이 생겼다고 하며, 더구나 이러한 자신의 편협한 시선에 기초하여 한국인은 성형대국답게 모두 똑같이 생겼다고 모욕을 가하기까지 한다. 인종적 우월의식에 따른 무관심과 무시해도 된다는 억척스런 무지에 토대를 둔 교만 때문이다. 어찌 모두 똑같게 생겼겠는가? 다름에 대한 차별과 배제라는 알지 않으려는, 알고 싶지 않다는 외곬의 수구(守舊)성과 타자를 알지 못하는 유아적 이기심에 터 잡은 미성숙한 자의식에 뿌리를 둔 골 깊은 맹목(盲目)일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글을 쓰거나, 써진 글을 읽는 사람에게도 아주 흔하게 나타난다. 유럽의 엘리트 지식인이라 자처하는 인간들은 자신의 글이 세계 모든 지역의 인간에게도 동일한 인식으로 읽힐 수 있으며, 그렇게 읽혀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시아의 한 귀퉁이 사는 농부의 아내는 아마 전혀 다른 시선으로 읽기 십상이다. 그럼에도 감히 인류 보편적 진리 또는 지식이라거나, 동일한 이해를 갖는 것이 지식이라 주장하기도 한다.

 

그런가하면 읽는 이들 또한 글쓴이가 의도한 의미를 읽어내는 것, 혹은 평자가 해독한 어떤 지침적 노선을 따라가는 것을 잘 읽어 낸 것으로 착각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한 소설에서 작가가 일부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말투를 사용하며, 마치 리얼리티를 부여하려 했다고 하면, 독자는 이렇게 쓴 작가의 의도를 따라가는 것, 즉 작가의 의지를 읽는 것을 잘 읽었다고 생각하기 일쑤다. 그 말투를 사용한 이유, 즉 직업에 대한 오래된 편견이 내재하고 있으며, 그것을 관습적으로 되풀이하는 작가의 인식에 의문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이거 계급 차별 아닌가? 인종차별 아닌가? 이 작가는 사람을 이렇게 구분하고 있구나라고 그 글의 태도를 알아차리는 읽기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 책은 이러한 태도와 상궤(常軌)를 같이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책의 주제이자 대상 인물인 가야트리 스피박 초국가적 리터러시라고 일컫는, 여러 차이 안에서 세상을 읽는 능력을 지닌 주체로의 변화를 주장하며, 마르크스주의와 페미니즘에 데리다의 해체적 시각을 도입하여, 다르게 읽기와 소외되고 무시된 이들에게 저항의 언어를 제공한 시대의 윤리학자이자 사상가이다.

 

책은 스피박의 주저(主著)포스트 식민이성 비판을 중심으로 하고, 그녀의 사상적 시원이라 할 수 있는 논문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를 기저(基底)로 하여, 주류 세계의 잃어버린 관점과 특권의 탈중심화를 향한 지고한 윤리적, 문화적 사유를 쫓는다. 그것은 자본주의의 결여된 윤리를 가리키고, 페미니즘 전선에 뛰어들며, 뿌리깊은 언어의 오용과 문화적 폭력의 실태를 드러낸다. 저자인 뉴욕대() ‘마크 샌더스교수는 이 탐사를 꼼꼼하게 해독하고 있지만 여전히 스피박의 저술만큼 쉽지 않다.

 

그럼에도 저작들을 읽는 일반 독자에게는 접하기 어려운 스피박의 각종 발표 논문을 통해 특정 사상이나 주장의 논지를 보다 분명히 전달 받을 수 있으며, 논의의 명료성을 스피박 당사자의 답변을 통해 확인케 하는 대담으로 인해 문학과 독해, 윤리에 대한 그녀의 개념들에 상당한 이해를 갖게 된다. 스피박은 초기 탈식민분야의 시초격인 인물이다. 그녀의 행적은 민족-국가의 시민으로서 대도시와 민족-국가와 출생지 사이의 교류를 위한 조력자로서 서발턴을 비롯한 목소리를 지니지 못한 인민을 담아내기 위한 노력으로 점철되어있다.

 

우리는 미래의 인문 교육자들이 초국가적으로 글을 읽고 쓸 수 있도록 해야 한다.” -13

 

이 문장은 스피박의 연구 실천의 행적을 아마 한 마디로 요약한 것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주류의 목소리인 담론적이고 사회적, 지정학적 내재성에 대한 공모자로서의 읽기가 아닌, 스스로 다른 사람과 그 밖의 많은 타인의 입장이 되어봄, 즉 도덕적 선의 위대한 도구인 상상력을 지님으로써 세계의 특권적 해독을 피할 수 있다는 선언일 것이다. 그것은 고대 연극의 파라바시스(Parabasis)’와 말소 표기 아래에서만 번역되어야 하는 책임 불가능성의 보존이며, 존재한 적 없던 것처럼 지워버린 승인되지 않은 페제(廢除)의 흔적으로부터 말하는 주체의 상상하기 이다.

 

이러한 언어들은 모두 다르게 읽기, 서사의 양식 외부에 있는 사람들을 포함하는 읽기, 내포된 독자로 상정된 읽기로부터 비켜선 읽기를 말하는 방식이다. 예를 들자면 탈식민화된 지역의 양상을 전하는 토착정보원이 있다고 하자. 아마 그는 분명 그 지역의 지식 엘리트일 것이고, 그는 현지의 하급계급과 분리되어 있는 존재일 것이다. 즉 그 정보에는 그들이 보호하고자 하는 이들의 실제와 인식론적 불연속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하층 계급의 사람들은 역사적 진보의 주류에 결합되지 못하기에 항상 서발턴으로 남게되며 또한 서발턴으로 만들어진다는 점이다.

 

그래서 데리다의 해체는 스피박에게 중요한 해독의 도구가 된다.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영역를 하면서 스피박은 서문에 해체를 자신의 언어로 정의하고 있는데, 그것은 이미 기입되어 있는 재구성하기 위해 분해하는 것으로서, 결정할 수 없는 순간을 드러내고, 고유 체계를 뒤집는것이다, 또한  비평가의 통제, 텍스트의 권한을 버리는 것, 의미의 우위에 대한 확신을 저버리는 독해이다.

 

마음의 변화와 욕망의 비강압적인 재배열로서 인문학 교육을 배우고 실천하는 것, 아래로부터 배우는 것을 학습하는 것이다. 입증 불가능한 것으로부터 배우는 훈련으로서 문학적 읽기, 즉 초국가적 리터러시를 실행하는 것이다. 이러한 실천적 모델로서 스피박의 마르크스 자본읽기나 인도의 작가 마하스웨타 데비의 소설 읽기의 사례들은 자본주의의 윤리적 결여와 페미니즘의 작동방식 및 양상을 새롭게 이해하고 바라볼 수 있는 관점을 제공한다.

 

이를테면 데비의 벵골어로 써진 소설 Stanadayini을 스피박은 <젖어미>로 번역한다, 가능한 번역어인 <The wet-nurse(유모)>는 원어의 의미가 지닌 충격을 주기에는 불충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젖가슴을 상품으로서의 노동력이라는 기관으로, 또한 성별화된 동인의 작동방식을 가시화하는 것이다. 문학 읽기, 번역의 시선에서 이처럼 숨겨질 수 있는 것을 드러내어 해독하여 존재하지 않음을 읽는 것이 바로 초국가적 리터러시임을 알려주는 것이다.

 

스피박은 쥘리아 크리스테바중국 여성에 관하여를 비롯하여 데리다의 저술들에 내재된 자민족중심주의, 강박적인 자기-중심주의를 비판하기도 한다. 이러한 예시적 이야기가 있다, 백인 남성이 황인 남성으로부터 황인 여성을 구하는 스토리가 있다고 가정하자. 이것에 어떤 문제가 도사리고 있는지 우리는 읽을 수 있어야 한다. 유럽 백인의 제국주의적 자비를 통해 여성 서발턴을 침묵시키게 한다. 황인 여성은 이 구원에 대해 무어라 할 말이 있겠는가? 그래서 스피박은 선언한다. 페미니스트로 발언하기 위해서는 서구 제도의 역사에서 그 흔적을 완전히 덮어버려야만 한다.”.  어떤 텍스트가 쉽게 대립적으로 보일 때 그 공모를 목격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스피박은 크리스테바에게 주문한다. 내가 누구인지, 다른 여성은 누구인지, 나는 그녀를 어떻게 명명하고 있는지를, 그리고 유럽중심적인 페미니즘의 타당성은 무엇인지를 자문해보라고. 부유한 국가의 여성은 통합적인 착취 체제에 객관적인 관심이 없다고 지적한다. 명확하게 억압을 작동시키는 저임금 노동의 가장 낮은 수준의 여성들에 대한 인식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사실 나의 감상은 스피박의 사상적 논의에 대한 마크 샌더스가 쓴 해석들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스피박의 윤리적, 사상적 이해가 어떤 것인지를, 그것이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어떤 의미인 것인지를 수용하는 데 결코 적은 것은 아닐 것이다.

 

읽기에 관한 직감 및 윤리적인 것에서 독자가 그러한 연결고리를 발견하도록 도와주는 단서들을 구체적 해석의 형태로 제공하는 이 책은 무수한  찢어진 문화적 직물들을 어떻게 수선(修繕)하며 해독하여야 하는지를 분명히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혹시 우리는 자애로운 자유주의적 페미니스트로서 제3세계를 자기 이해의 수준에서 동질화해버리는 것은 아닌지를 돌아보게 된다. 우리는 우리를 의심해보아야 한다. 나는 어떤 위치에서 세계를 읽고 있는지를. 내 양식의 외부에 있는 존재에 대한 이해가 있는지를. 난해하고 독창적인 스피박에 조금 가까이 다가가는 데 아마 이 저술은 분명 긴요한 도움이 되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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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원 2023-02-08 21: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미안한 질문 드려요. ˝ 데비의 벵골어로 써진 소설 「Stanadayini」을 스피박은 <젖어미>로 번역한다, 로 번역해도 충분해보이지만 충격을 주기에는 불충분한 의미를 지닌 어휘이기 때문이다. ˝ 이 부분이 이해가 잘 가지 않아서요. 젖어미가 아니라 무엇으로도 충분한가요. 뒷문장에 나오는 단어인가요?

필리아 2023-02-08 22:13   좋아요 1 | URL
‘유모‘로 번역되는 어휘이지만 스피박은 원어가 담고있는 의미의 적나라한 드러내기를 위해 ‘젖어미‘라는 여성의 신체를 포함한 단어로 번역했다는 뜻입니다...^^
즉 유모라는 단어는 사용자인 주인의 언어이고, 실제 여성의 신체를 내어주는 노동이라는 의미를 숨기고 있는 것이죠. 스피박은 이 노동을 은폐한 주류의 언어를 버리고, 보다 진실한 언어를 사용한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제 문장 표현이 서툰 까닭인 것 같네요. 문장을 조금 수정했습니다~고맙습니다. 초원님.

초원 2023-02-09 21:22   좋아요 0 | URL
친절한 필리아님 감사해요. 촘촘한 읽기로, 세련된 리뷰로 고마운 안내자이십니다.
 
뮈세의 베네치아 작가가 사랑한 도시 6
알프레드 드 뮈세 지음, 이찬규.이주현 옮김 / 그린비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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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른 욕망의 나라는 그리 일찍 깨어나지 않는다.” - 티치아노의 아들에서

 

 

이 관능적 문장은 젊은 시인 뮈세가 연인 조르주 상드에게 기대했던 열정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뮈세 사후 2년 뒤에 출간된 상드의 소설 그녀와 그(Elle et Lui)에서 뮈세로 추정되는 주인공 로랑이 기대하는 여인상, 바로 그것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아이는 성녀 테레즈의 숨결로 되살아난 비너스같은 사람을 애인으로 원한다고 상드는 쓰고 있다. 신성한 모성애와 밤의 열정을 지닌 여인, 자신의 갈망만을 가지고 세상의 온갖 도취를 끌어안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 이기적 인물이 당사자로서 상드와 함께한 그 유명한 스캔들을 낳은 베네치아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이다.

 

책의 표제는 뮈세의 베네치아로 하고 있지만 그 실제는 뮈세의 단편 소설 티치아노의 아들이다. ‘작가가 사랑한 도시라는 기획 하에 편집된 시리즈의 하나로서 소설의 무대가 이탈리아 베네치아이기 때문이었던 듯하다. 이 책을 읽게 된 것도 오직 베네치아에 매혹된 내 취향이 이끈 것으로, 주인공들이 거닐고 이동하던 장소를 그려보며, 운하에 떠있는 곤돌라와 바닷물에 잠긴 광장, 바닷물이 계단에 철썩이는 현관, 새벽안개 자욱한 미로같은 골목길의 영상이다.

 

소설 티치아노의 아들속으로

 

이 작품은 16세기 이탈리아 베네치아 르네상스 황금기를 대표하는 회화 <우르비노의 비너스(Venus of Urbino)><천상과 세속의 사랑(Sacred and profane love)>으로 잘 알려진 티치아노 베첼리오(Tiziano Vecellio)’의 둘째 아들 폼포니오 필리포 베첼리오(일명 피포)’와 베네치아 최고행정기관인 10인 위원회의 피에르 로레단의 딸이자, 행정장관 도나토의 미망인인 스물네 살의 과부이며 명문가의 상속녀인 베아트리체 도나토와의 사랑 이야기이다.

 

선친 티치아노와 형이 같은 시기에 사망하자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은 피포는 베네치아의 젊은이들을 몰락시키는 일을 하는 오르시니 공작부인의 집에서도박과 여흥으로 가산을 탕진하며 놀아나는 방탕아라 할 수 있다. 이 인물은 뮈세 자신이 투영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상드와 함께한 베네치아 여행에서 그녀는 소설 집필에 몰두하며 연인인 뮈세의 시작(詩作) 활동을 독려하고 있었다. 젊은 연인의 사랑의 갈망을 열의로 받아들이지 않는 상드에 대한 배반감으로 뮈세는 그 상황에 대한 바람과 자신의 열정을 이 소설로 표현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성(理性)을 모두 저당 잡힌 채 쾌락에 허우적거리는 무기력한 일상을 보내고 있던 피포에게 그윽한 섬세함이 배어 있는금자수가 수놓인 벨벳으로 된 주머니가 선물처럼 전달된다. 그곳에는 이 주머니가 간직하게 될 것을 허투루 낭비하지 마세요. 집을 나설 때, 금화 한 닢만을 주머니에 넣으세요. 그날 하루가 괜찮을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인가 남아 있거든 자선을 베풀 수 있는 가난한 자를 찾아보세요.”라는 서신과 함께. 피포는 베네치아의 귀족 여인들을 그려보며, 주머니를 만든 여인을 찾아보려는 열정으로 끓어오른다. 피포는 자신의 대모인 행정관 파리칼리고의 아내인 도로테아 부인을 찾아 혹여 주머니의 주인에 대한 행방을 알 수 있는지 묻게 되고, 그녀로부터 하나의 제안을 받는다. 당사자를 알려 줄 수는 없으나 소네타를 써보라는 단서를 붙인다. 몇 차례 썼다 버렸다를 반복한 끝에 미지의 여인을 위한 소네타를 완성하고 넌지시 도로테아 부인의 치마폭에 밀어 놓는다. 그 내용은 대략 이렇다.

 

어릴 적 페트라르카를 읽었을 때

나는 시의 영광을 나누고 싶어 했다네.

그는 시인으로 사랑하였고 연인으로 노래하였다네.

그만이 사용할 수 있는 신들의 언어로.

 

.....(中略).....

 

저 아래서 나를 부르는, 나를 사랑하는 그분께

스치는 길에서라도 내 손을, 내 삶을 드릴 수밖에.

 

이 유치한 소네타는 곧 효력을 나타내는데, 주머니에 대한 긍정적인 사랑의 고백으로 받아들인 미지의 여인은 하녀를 시켜 모든 이들의 눈에 띄지 않는 비밀의 만남을 약속받는다. 이 꽃에 입맞춤을 하세요. 이것은 제 여주인의 입맞춤을 담고 있답니다.” 이 행위에서 발견되듯 피포는 실물성(實物性)’이라는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것만이 사랑이라는 믿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실물성에 대한 주장은 반복되고 있는데, 베아트리체의 기대와 피포의 행위가 어긋나는 것의 상징적 비유일 것이다.

 

피포의 방탕에도 불구하고 예술에 대한 신성한 불꽃이 잠재해 있을 것이라 믿으며, 베아트리체는 자신이 그의 화가로서의 재능을 살려 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마치 상드가 뮈세에게 기대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녀는 자신이 그와 함께하는 조건으로 매일 화폭 앞에서 2시간의 그림 작업을 할 것을 제안하고 그 첫 번째 작업으로 자신의 초상화를 그려 줄 것을 제안한다. 베아트리체에 대한 존경과 감사, 신비와 사랑에 휘감겨 있는 피포로서는 제안을 수락하지만, 이 젊은이의 강렬한 정념과 탕아적 기질은 이런 규칙적 일을 감당해 내지 못한다. 그는 이렇게 항변한다.

 

이 초상이 아름답다 한들(진정 내말을 믿으라)

연인의 입맞춤 한 번만도 못하기 때문이니!

 

피포가 남긴 소네트의 마지막 절의 이 문장처럼 그는 실물이 아닌 제아무리 아름다운 걸작이라 하더라도 살아있는 여인의 입맞춤에 비 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베아트리체의 인내와 피포의 화가로서의 재능의 발현에 대한 기대는 왜 사랑에 몰입하지 않고 일(회화작업)의 병행을 요구하는가라는, 다음과 같은 피포의 자기 정당화와 마주치게 된다.

 

사랑과 영광은 형제자매 같아요, 왜 그것을 나누려고 하시는 거죠? ... 사람들은 결코 동시에 두 가지를 할 수 없습니다. ()과 시()를 동시에 상인이 할 수 없듯...”

 

소설 이야기는 이쯤에서 정리하고 이 작품에 수놓인 베네치아의 거리와 사랑의 순간에 대한 기막힌 문장들의 거리를 거닐어 봐야 할 것 같다. 베아트리체와 피포의 은밀한 첫 만남에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버린 채 이렇다 할 화가로서의 재능도 보이지 않는 남자의 사랑에 몸을 낮추는 여인의 모습이다. 그녀의 눈은 사랑과 더불어 혼란과 용기가 가득했으며, 에로스 신은 그 순간 초자연적인 명작을 더욱 미화시키는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은빛 꽃들이 수놓인 그녀의 벨벳 드레스가 바닥을 덮고” “우아하고 슬픔이 어린 모습으로 대리석 여신처럼 아름답고 창백한 그녀는 운명에 몸을 맡겼다.” 19세기 낭만주의 문장의 절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두 연인의 데이트 장소인 운하 옆 퀸타빌레 거리 궁륭아래, 도시와 리도 섬 사이, 달 밝은 밤이면 베네치아식 사랑을 나누라고 독자에게 권하고 싶은 장소로 피포가 말하는 이 장소에 독자의 상상력이 더해지면서 과연 이곳을 찾아 볼 기회가 있을까하며 머리를 저어보기도 한다. 16세기에도 쇄락하는 도시로 묘사되었던 해수면 아래로 매일 조금씩 가라앉는 안개와 물의 도시 베네치아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사랑과 예술의 세기말적 상상의 이 작품은 시간과 몰입, 인내, 천재성과 같은 예술적 지향과 맞닿으면서 특별한 문학적 여행을 만끽하게 한다.

 

()은 여자가 원하는 것을 원한다.” - 베아트리체 도나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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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구태여 문학 장르를 특정한 개념적 세부분류로 구분하는 것은 어쩌면 식자(識者)들이 자신들의 무료함을 달랠 겸 어쭙잖은 전문성의 자랑질도 하고 싶었던 것이라고 얘기할 수 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 동기야 어쨌든 이러한 분류 작업은 독자들의 작품에 대한 이해에 분명 도움을 주고, 글을 쓰는 이들에겐 진부함을 탈피하는 새로운 방향의 안내가 되어주기도 할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단순한 이해에는 무언가 부족한 느낌이 듭니다. 우리네 일상적 언어로 이 세계를 온전히 표현할 수가 있나요? 아마 부족한, 결여된 무엇을 느낄 수밖에 없을 겁니다. 이를테면 지배질서가 은닉하거나 배제시켜 그 근원을 표현하지 못하거나 할 수 없는 것들로 인해 그것에 도달하기 위해 작가들은 그 결핍의 욕구에 시달리는 것이 실상이니까요. 그래서 작가들은 기성의 세계 인식이나 언어가 확보한 독단론을 뛰어넘어 시간성의 교란이나 현실과 가상을 전복하는 새로운 세계를 그리고 싶은 충동에 내몰리곤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럼으로써 이 세계의 존재방식을 재질서화하고 풍부하고 다채로운 세계의 인식을 제시하려고 하는 것이겠지요. 이러한 관점으로 바라보면 새로운 장르의 출현, 그 시도는 당연하고 불가피한 소산이라고 이해하게 됩니다. 이제 슬립스트림(slipstream)’이라는 이미 오래되었지만 제겐 낯선 장르를 알아보아야겠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국내에 번역 소개된 적이 없던 작가인 것 같은데요, 민음사에서 ‘애나 캐번(Anna Kavan)’의 소설 Ice』이 번역 출간 되었네요. 이 소설을 평론가들은 생소한 장르인 슬립스트림의 전형적 작품으로 꼽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추가적인 장르화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SF작가 존 케셀(JohnKessel)’ 슬립스트림은 장르가 아니라 공포나 코미디 같은 문학의 효과일 뿐이며, 인지부조화가 그 핵심이라 지적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단지 문학적 효과로 이해하던, 장르로 받아들이던 슬립스트림이 무엇인지는 알아야겠습니다. 이러한 개념을 포함하고 있는 작품이 과연 내 취향에 맞는 것인지, 설사 맞지 않더라도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에 대한 선()지식이 필요한 것이니까요.

 

가장 단순하고 간단한 정의는   익숙한 것을 낯설게 하거나 낯선 것을 낯익게 만드는 글쓰기의 한 형태인 이상함의 소설’”이라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를 조금 구체적으로 표현한 설명으로, 슬립스트림 문학의 특징은   사실주의 원칙의 파괴, 전통적인 환상적 이야기의 탈피를 위해 SF를 비롯해 심리적 붕괴에 대한 인식을 이용한 비현실적 감성의 탐구라고 합니다.  이들 정의는 너무 압축되어 있으며, 구체적 실체가 그려지지 않습니다. 혹자는 간략하게  ‘SF 요소를 지닌 소설이지만 주류의 순문학에 가까운, 경계가 허물어진 주류 문학이라고도 합니다. 다시 말해 인간의 상태를 표현하기 위해 SF장르의 비유를 사용하는 고급 예술의 한 형식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정의들을 보면 언뜻  마술적 사실주의가 떠오르는데요, 슬립스트림은 이를 포함하는 상위의 개념이랍니다. 마술적 사실주의는 우리들이 몸담고 있는 일상적 현실에서 출발하는, 즉 굳게 현실에 발을 딛고 창조적 상상을 통해 환상에 이르도록 가공되는 것입니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가브리엘 마르케스, 이탈로 칼비노로 대표되는 일련의 작가들이 보여주는 환상과 현실, 심리적 실재와 현실성, 역사와 허구 등의 경계 해체를 통해 상호 교환되는 특성을 공유하는 작품들이지요.

 

그런데 슬립스트림은 환상, 동시성, 파편성 등 마법적 사실주의의 시간 형식의 파괴는 물론 소설의 행동 공간을 여러 층위로 중첩 사용할 뿐 아니라, 일반적 SF소설이 갖는 선형적 이야기 구조를 버리고 사실과 초현실, 부조리를 마구 뒤섞은 의식의 흐름 기법에 가까운 비현실적 소설이라 묘사되고 있습니다. 영국 소설가 크리스토퍼 프리스트(Christopher Priest)’는 이를 한 문장으로 정리했는데요,   일그러진 거울을 살짝 들여다보듯 독자에게 느껴지는 '타자성'”이라고 말이죠. 슬립스트림을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것을 마음의 상태에 접근되는 상태 그대로 생각하는 것이라고 조언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슬립스트림, 왠지 이들 정의에 대한 문장들을 읽고 나면 선뜻 다가가기 어려운 소설로 이해됩니다. 그럼에도 이 용어의 기원을 말한 영국 사이버펑크 작가 브루스 스털링(Bruce Sterling)’의 말처럼 "SF 장치를 사용하지만 장르 SF가 아닌 작품" 이라는 간략한 문장이 다소 그 문턱을 낮춰줍니다. 슬립스트림의 범주에 속하는 작품으로 스타니스와프 렘(Stanistaw Lem)’The Cyberiad, ‘토니 모리슨Beloved, '무라카미 하루키태엽 감는 새 연대기등이 거론되고 있습니다만, 페미니즘 문학의 시원을 연 ’애나 캐번의 작품 Ice를 통한 슬립스트림의 실체에 접근해 보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이 작품은 서구에 페미니즘의 두 번째 물결이 몰아치기 직전인 1967년 출간 되었답니다. 1970년대 페미니스트 SF 주요 작품이 등장하기 이전에 써진 소설로서, “여성에 대한 위협적이고 치명적인 성적 대상화와 삶을 파괴하려는 집단 간의 냉전을 묘사하고 있다고 하는군요. 그리고 기후변화와 전쟁 위기... 즉 이들을 통한 페미니스트 문학의 실험이라는 것입니다. Ice는 기존의 거의 모든 장르를 넘나들며, 장르를 파괴하는 파괴적 모더니스트 소설이라 평가되고 있습니다.

 

1967, 68혁명이 아직은 일어나지 않은, 기성의 고루함과 젠더의 구분이 여전히 암약하던 시대입니다. 애나 캐번은 기성의 언어로는 그녀가 기대하는 새로운 질서를 표현하는 것이 불완전하고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세계의 실재와 본질에 대한 의구심, 그 반발의 추동이 불가피하게 문학의 장르 파괴, 마구 넘나드는 의식의 흐름을 쫓을 수밖에 없었던 것 아닐까하고 생각해보게 됩니다. 어떤 개념의 원형으로 불리는 작품은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시대성, 지배 질서를 넘어서기 위한 작가의 노력이 배어있으니까 말이죠. 그것의 실체에서 무언가를 발견하게 되리라는 기대일 겁니다.  어쩌면 요즘의 SF를 넘나들며 주류 문학의 경계를 허무는 한국 문학의 흐름도 이와 그리 다르지 않는 연장선에서 보아도 되는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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