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로칼랭
로맹 가리 지음, 이주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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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로맹가리’가 자신에게 새로운 이름, ‘에밀 아자르’를 부여하고 출간한 최초의 작품이다. 더구나 결말 부분이 잘려나간 채 출간될 수밖에 없었던 사연들까지 더해 호기심을 자극하지만, 그의 당시 사적 상황을 이해하면 자신의 소설에 대한 냉정한 평가를 기대해서였다는 그 자신과 세간의 주장을 조금은 전복하고 싶어진다.

첫 번째 아내를 떠나 당대 스크린의 아이콘이었던‘진 세버그’와의 염문과 재혼, 그리고 다시금 이혼이란 결과는 그의 신분상 명예(외교관으로서 또한 존경받는 작가로서)에 흠집을 안겨주었던 것이 사실이고, 또한 문단에서 그의 작품에 대해 더 이상 매혹적인 시선을 보내지 않고 있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아자르라는 변신은 비우호성을 돌파하기 위한 작가적 수단이 아니었을까하는 억측도 해보게 되는 것이다.

아마 이러한 작가 주변의 환경은 그에게 새로운 언어의 준비를 시작하게 되었을 것이고, 이는 이전의 작품과는 다른 언어를 요구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이 작품 『그로 칼랭』의 주인공‘쿠쟁’이 하는 말은 세상 사람들의 어법과는 사뭇 다르며, 그 소통의 단절은 내면의 과잉으로 이어지는 것 같다. “일반적인 현상, 세계는 흘러 나가지 못해 공격적으로 경쟁하게 된 사랑의 초과분 때문에 고통을 겪고 있다고 생각한다. 내면의 요새 안에서 엄청나게 축적된 애정의 자산이 쇠퇴하고 손상된다.”즉 감정의 잉여를 해소하지 못하는 대 도시 평범한 사람들의 소외와 단절로 인한 배출구의 차단 말이다.

어쨌든 이 미터 이십 센티미터의 비단뱀과 자신의 서식지(방 두 개의 아파트)에서 동거하는 쿠쟁이라는 사내는 직장 동료들로부터 “그 사람은 아무도 마음에 두질 않아...”라는 말을 듣게 될 정도로 자신의 사생활에 대한 애착이 깊다. 그리고는 “약간은 자기 나름의 내면생활이 필요”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공공연한 소외의 소문을 떨치기 위해 자신에게도 “누군가 있다”라는 것을 증명하는 방법으로 비단뱀‘그로 칼랭’의 사진을 꺼내어 내미는 것처럼 그의 언어는 세상과 다르다.

그러나 이러한 쿠쟁의 다른 언어는 경찰서 서장과의 대화에서 엉뚱한 제안으로 자신의 언어에 공포에 질린 것 같았음을 느끼고 있음에도 “나는 아주 쉽게 애착을 느낀다.”고 하는 것과 같이 외려 세상 사람들의 독해가 잘 못 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의 다름 아니다.
이러한 역설적이고 뒤틀린 쿠쟁의 말을 듣다보면 속에서부터 올라오는 웃음이 쿡쿡하고 터져 나오게 되는데, 이 코미디와 같은 언어들을 사용하는 이유는 세련된 비판, 아니 조롱이라 하여야 할지도 모르겠다. 일례로 “어떤 위대한 프랑스인은‘어려움을 꾹 참아야 한다.’는 훌륭한 말을 했지요. 만약 우리 아버지들이 참을성이 없었다면 분명 여기까지 이르지 못했을 겁니다. 주민 머릿수와 국민총소득 얘기입니다.”처럼 ‘인구 통계학’적이라는 쿠쟁의 반복되는 비유는 그 근원의 불완전성을 보잘것없게 보이게 하는 식이다. 결국 우리들이 잃어버린 진정한 언어, 즉 본질에 대한 제대로의 살펴보기를 요구하고 있는 것일 것이다.

한편, 그로칼랭의 탈피 장면이 거듭 등장하는데, 그때마다 쿠쟁은 경이로워하며 이유 없이 행복한 느낌에 젖어든다. 그리곤 “생애의 지극히 낙관적 사건, 재생, 부활절, 욤 키푸르(대속죄일), 희망과 약속 ”이라고 해석하고, 이는 “진정성을 보장하는 동시에 비단뱀이 새로운 삶을 얻을 때가 되었음을 느끼는 감동적인 순간”이라고 경탄한다. 여기에서 작가의 변신, 즉‘에밀 아자르’로의 새로운 탄생, 즉 작가 자신의 재생을 위한 간절한 희구를 보게 되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결국 이 언어는 마침내‘불가능의 끝’이라는 그로칼랭이 자신(쿠쟁)에게 인간의 목소리로 말을 걸어주는 것과 같이 도달이 묘연한 것이 아니었을까. 아마도 작가가 자살하면서 남긴 <결전의 날>이라는 유언의 쪽지 마지막 문장, “나는 마침내 완전히 나를 표현했다.”고 한 것이야말로 바로 이‘불가능의 끝’을 완성한 것이라는 생각에까지 이르게 된다.

사실 이 작품의 문장들 하나하나 마다에는“본성에 대한 진정한 승리가 열어주는 지평과 전망”을 일깨우고, 추가된‘생태학적’이라고 불리는 결말부분과 같이 자연보호라는“미래가 기대되는 예외와 도약의 순간”처럼 의미심장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밀도 높은 주제가 내재되어 있다. 가엾은 흰쥐 블롱딘을 그로칼랭에게 먹이로 주지 못해 고통 받는 쿠쟁에게 “생쥐를 무더기로 주세요. 알아보기 힘들 겁니다. ~ 中略 ~  개성이 생기는 거지요. 개성 없는 다수로 받아들이면 훨씬 인상이 희미해 질 겁니다.”에서와 같이 우리의 인식에 대한 역설적 반성을 요구하기도 하며, “다른 사람이 주게 하세요.”처럼 본질은 변화된 것이 없음에도 주체만을 바꾸어 합리화시키는 어리석은 세상을 조롱하기도 하는 것이다.

“확실히 현 상태에서는 애무가 부족하다.”라고 타인에 대한 이해가 들어서지 못하는 현실세계에 대한 안타까움과 더불어, 비단뱀과 자신을 동일시하기에 이르는 쿠쟁이라는 현대인의 위태로운 소외의 강박이 해학적이고, 또는 변태적으로 , 그러면서 진중한 목소리로 외쳐지고 있다. “즉각적인 우정을, 자발적인 뜨거운 격정을, 일종의 상호관계 같은 감정”이 세상에 창궐하기를 바라면서.
아마 출생 전 의식 상태인‘프롤로고맨’을 이해하기위해서라도, 비단뱀이 동물이 아니고 하나의 인식임을 깨닫기 위해서라도 몇 번의 재독이 필요한 작품이다. 어쩜, 순수한 상태의‘로맹 가리’를 비로소 읽고 있는 것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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딩씨 마을의 꿈
옌롄커 지음, 김태성 옮김 / 도서출판 아시아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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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박한 농촌마을이 주사바늘이란 탐욕의 얼굴에 무참하게 스러져 간다. 채혈(採血)을 위한 매개체인 주사바늘이란 물질에 인간 탐욕의 죄를 물을 수도 없으며, 그 목적인‘피’를 황폐해진 텅 빈 마을의 원인이라 할 수도 없다. 비록 주사바늘이 사람들의 살갗을 뚫어 피를 빼내기 시작했을 때, 이미 인간들의 패배는 예정된 것이었지만 보다 본질적인 것은 인간의 혈액이 한낱 상품, 사고파는 거래대상으로 변질된 것에 있을 것이다.

물질지상의 자본주의체제가 인간까지 사물화한 것은 사실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폐쇄되어 있던 중국 사회에 거침없이 밀어닥치는 서구 물질문명의 화려함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된 농촌사회는 분출되는 욕구를 억제할 수 없었을 것이다. 소득원이 부실한 빈곤한 농촌사회의 현대화를 위한 정책의 일환으로 지방정부는 매혈(買血)을 통한 소득을 부추긴다. 여기엔 오직 물질에 대한 욕망만이 있을 뿐, 인간 존엄성의 인식과 같은 도덕적 정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부정과 부패만 성화를 댈 뿐 공공성에 확보되어야 할 양심이 들어설 자리는 없다. 약삭빠른 인물들은 채혈소를 차리고 어수룩한 농민들의 피를 사들이기 시작하고, 피를 팔아 받은 돈은 사람들을 물질숭배와 과시적 소비에 휘둘리게 한다. 마을의 초가집은 벽돌집으로 바뀌고, 황톳길은 시멘트 포장로로 변화한다. 채혈소를 운영하여 폭리를 취한 자들과 마치 밑천 없이 벌어들인 것 만 같은 재화에 현혹된 사람들은 매혈을 통해 모방소비와 소비의 한계를 늘려나간다.  

부의 축재에 열을 올리는 인간들에게 위생이라는 보건 안전망과 같은 인간에 대한 배려는 존재치 않는다. 이러한 상황은 이유 없는 열병으로 마을 사람들을 몰아넣고, 감기와 같은 미열을 동반한 증세는 에이즈(AIDS;후천성면역결핍증)로 밝혀진다. 마을은 집단 패닉상태에 빠진다. 너나 할 것 없이 매혈을 통해 부를 확보했던 마을 사람들을 공포의 죽음으로 이끈 매혈사업은 더 이상 지속가능 사업이 되지 못한다. 소설은 딩씨마을(丁壯)의 정신적 지주역할을 하는‘딩선생(할아버지)’과, 사람들을 꾀어 매혈로 부를 축재한 부도덕한 파렴치한인 그의 큰 아들‘딩후이’를 대립시켜 도덕적 책임을 묻고 있지만 엄청난 파괴의 힘으로 밀어닥친 물질주의에 대한 마을사람들인 일반대중의 탐욕이란 본성역시 책임을 회피하기는 어렵게 보인다.

한편 흥미롭다하여할지는 모르겠으나 열병 환자들이 학교로 모여들어 집단생활을 하는 장면이 있는데, 이는 자본주의의 무차별적 사물화와 부의 차별성이 지니고 있는 악덕에 반(反)하여 공동 갹출과 노동의 형평성 등 공동생활을 위한 평등주의의 묘사를 통해 공산주의에 대한 향수, 일종의 회귀를 그리고 있다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작가가 폭로하고자 하는 것은 물질이 파괴하는 인간성에 있다. 마을의 리더인 딩선생을 축출하고 촌의 주임으로 행세하는 사람들과 이에 부응하는 마을사람들의 의기투합은 학교의 기물을 개인의 소유로 분배하고, 나아가서는 죽어가는 자, 죽은 자들을 위한 관(棺)을 마련한다는 명분으로 고목들을 무차별적으로 베어내는 행태에서 물질에 숨겨진 소유의 욕망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이고 있다. 물론 여기에는 열병으로 죽은 자들에게 현(縣)정부가 무상으로 공급하는 관을 빼돌려 판매하는 딩선생의 아들 딩후이라는 인물, 즉 부패한 정부 관리, 권력에 대한 반발이자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이해가 있을 수 있으나, 작가는 이 들 양자에게 공히 부도덕에 대한 책임을 묻고 있다. 생태계의 무참한 훼손, 교육현장의 파손이라는 정신의 상실...

그러함에도‘피를 판다’라는 시작에서부터 이 소설은 인간의 생명, 즉 죽음을 담보로 하는 이 무서운 물질주의의 망령에 대해 맹공을 가한다. 무상 공급되는 관, 다시 말해 죽음에 대해 주어지는 보상까지 가로채는 파렴치함, 그리고는 에이즈로 죽은 미혼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음혼(陰婚:영혼결혼)을 부의 축재에 이용하는데 이르는 자본주의 물화의 대상은 대체 어디까지인가? 하는 물음과 같다. 결국 비속(卑屬)살인이라는 비극에까지 이르며, 정의의 심판을 내리기까지 하지만 이미 마을에 인적은 사라지고 폐허만 쓸쓸하게 남아 스스로들을 사라지게 한 탐욕의 자취만 황량하게 그림자를 드리운다. 자신의 생명으로 썼다고 하는 이 작품의 고통과 슬픔, 그리고 통한의 절망을 고스란히 읽을 수 있다. 국내에 소개된 그의 전작인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에 이어 이 역시 판금(販禁)된 소설이 되는 운명을 맞이하였다니 작가의 목숨을 건 집필의 처절함이 더욱 깊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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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의 몫 - 모더니티총서 10
조르주 바타유 지음, 조한경 옮김 / 문학동네 / 200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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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력의 발전을 인간 활동의 이상적 목표로 보는 오늘의 우리에게‘비생산적 소비’,‘낭비’,‘소모’를 인류의 본원적 가치라고 말하는 이 전복적 사유의 저술은 바타이유의 사상적 기점이자 근원적 사고를 담고 있어 이후의 그의 저술들 - 『에로티즘』,『에로티즘의 역사』- 을 이해하는데 절대적인 관점을 제공하고 있다 할 수 있다.

모든 유기체는 에너지(부)의 원천과 본질을 아무 대가없이 베푸는 태양 광선에서 얻으며, 이 대가없는 베풂 때문에 삶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에너지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받아들이고, 초과분은 체계의 성장에 사용토록 한다. 그런데 만약 이 체계가 어느 순간 그 에너지를 활용하여 성장하는 것이 한계에 이르러 그 초과에너지가 성장에 흡수될 수 없게 되면, 남아도는 에너지는 폭발할 수밖에 없으며, 그래서 어떠한 방식으로든 대가없이 소모되어야만 안정과 균형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 이 저술을 관통하고 이후 바타이유의 모든 사유를 지배하는 관념이 된다.

즉 대가없이 소모하는 것, 바로‘비생산적 소비’라는 것으로써, 이는 인류평화, 생존과 유지를 위한최고의 진리로 인식되는 것이다. 물질의 풍부한 생산이 미덕이 아니라 생산에는 전혀 관여치 않는 사치와 소모가 미덕이라는 말이 언뜻 낯선 이야기로 인식되지만 고대사회의 증여에 의한 교환시스템이나 희생제의와 같은 종교적 축제를 비롯해서 군사기획사회로서의 이슬람의 소모적 전쟁이나, 티베트의 승려사회라는 비생산적 집단, 서구 중세 종교기획사회의 모습을 통해 잉여의 해소가 인간과 지구, 나아가 우주 질서의 본성임을 납득케 하고 있다.

1차 및 2차 세계 대전이라는 우리가 목격하는 역사의 사실들을 저자는 바로 과잉에너지의 파국적 소모의 예로서 파악하고 있다. 예로서 산업혁명으로 인한 비약적인 생산력의 발달은 자원증대와 성장과잉을 초래하였으며, 이로 인한 유례없는 인구성장과 같은 압력은 어떠한 형태로든 잉여에너지의 발산, 소모가 필요했다는 것이다. 결국 많은 비생산적 소비의 방식이 있으나 서구사회는 파괴적인 비생산적 소비를 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고대사회는 이러한 과잉에너지의 낭비가 일상적 태도이며 제도화 되어 있었음을 발견케 되는데, 고대 아즈텍인들의 희생제의나 북아메리카 인디언들의 포틀래치라는 증여교환시스템은 그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인신공양과 노예의 대량살상을 동반하는 거대한 희생제의는 생산이나 부의 획득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닌 그야말로 대량의 순수한 소비로서 비생산적인 소비라는 천박한 소모를 신성한 세계로 돌려놓아 삶의 균형을 축조했으며, 경쟁자에게 모욕을 주거나 굴복시키기 위해서, 또한 상대의 도전을 자극하기 위한 부의 막대한 파괴나 증여의 방식을 통한 일종의‘부의 순환방식’인 포틀래치는 효과적인 잉여의 소모였다는 점이다.
또한 지형적으로 폐쇄된 지역인 티베트사회의 경우 과잉에너지의 내부 폭발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소모의 출구가 요구되는데, 불교 라마승이 지배하는 신정국가로서 아무런 생산도 하지 않음에도 막대한 소비만 하고 더구나 아이도 갖지 않는 수많은 수도원과 소속 승려집단은 잉여를 흡수하는 탁월한 체계였다는 것이다.

한편 현대 자본주의사회의 최고의 선으로서 생산의 가치와 악덕으로서의 사치와 낭비라는 소비의 개념을 가져온 종교개혁을 과잉에너지의 비생산적 소비를 인류사회에서 거두어간 전환점으로 파악하고, 칼뱅주의를 중세의 순수한 종교적 요구인 비생산적 소비의 세계를 파괴하여 자본주의를 근본주의화한 기저로 설명하고 있다. 즉 가처분 노동력의 유용한 사용과는 거리가 먼 교회의 건축이나 교회장식물과 같이 구체적 이익을 벗어난 사치인 잉여의 소비라는 덕목을 말살하였다는 것이다. 어쨌거나 이러한 비생산적 소비가 반드시 찬란한 가치를 목적으로 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폭발을 이완시키는 의미를 가지며,“베풂과 지체 없는 삶의 취향”이라는 실존의 미덕을 지닌다는 측면에서 자연의 평화로운 순환에 기여하고 있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하겠다.

우리 인류사회는“과잉생산이 다른 출구를 찾지 못할 때 전쟁만이 팽창산업의 유일한 고객”이었음을 경험하였을 뿐 아니라 그 파괴력과 결과가 가져올 공포를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시대적으로는 그 간극이 존재하긴 하지만 이 저술의 마지막장에서 언급하고 있는‘마셜플랜’은 2차 대전 종전 후 냉전의 시대에 유럽의 경제복구를 지원하기 위한 미국의 잉여를 해소하는 막대한 무상공여로서 파국적인 소비를 회피한 비생산적 소비의 슬기로운 모델이 된다.

그칠 줄 모르는 성장지향, 부의 축적에 여념 없는 현대인들을 지배하고 있는 정신은 끓어 넘치는 상품, 즉 잉여의 문제를 이미 낳고 있는지도 모른다. 자본주의 의식을 장악하고 있는 고전경제학의 개인의 이익을 전제의 이익으로 이해하려는 잘못된 관점은 바타이유의 이 일반경제학에 의해서 극적인 사유의 전환을 요구받고 있다. 마셜플랜의 교훈인“개인의 이익이 우선하는 사회에서 전체의 이익이 우선하는 사회로의 전환”과 같이 우리는 비생산적 소비를 실현하는 사회로의 복귀를 위한 다양한 정책을 마련하여야 할 것이다. 부의 상당부분을 비생산적 소비에 바치도록 하는 노동자 운동(작업시간의 단축, 소득의 증가는 여가의 증가로 사치와 낭비를 촉진하며, 아울러 부의 공평한 배분으로 정의를 구현한다)이나, 좌파정책(복지 등)은 혁명과 같은 전복적 혼란에 의하지 않고 경제제도를 평화적으로 발전시키는 효과적인 방향이 될 것이다.

‘사치, 종교예식, 기념물 건조, 전쟁, 축제, 스포츠, 장례, 예술, 도박, 섹스, 증여, 기부’와 같은 ‘소비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소비’는 과잉 에너지를 해소하는 유용한 수단이다. 초과 에너지가 부르는 재앙을 피하기 위해서는 이들 비생산적 소비를 오늘의 사회에서 여하하게 복원하고 촉진하는 가하는 것이 중대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잉여를 가진 부자의 헛된 사치와 과시는 기부와 공공증여와 같이 내부의 폭발을 터뜨리는 정의로운 수단으로 배출되어야 할 것이다. 이후 죽음의 사치, 성의 사치와 같은 방식으로 고찰되는 생명의 심오한 진실로 나아가는 이 소모의 개념은 인류 문명의 변화를 규명하고 그 발원을 이해하는데 핵심적인 기호가 된다. 바타이유를 읽어나가는 모든 이들에게 그의 탁월한 저술들에 앞서 『저주의 몫』을 우선 필독하기를 권한다. 이는 그의 사상의 뿌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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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네 뒤에 있었어
니콜라 파르그 지음, 이혜원 옮김 / 뮤진트리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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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느낌을 뭐라 말해야 할까?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쓴 유일한 소설이라고 작가가 말했듯이 감정의 미세한 흐름들을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는 화자에게서 삶의 민낯 그대로를 보게 된다. 사랑하고 질투에 분노하며, 비참한 굴욕감에 몸을 떨다가, 또 다른 성적욕망에 행복과 불안으로 갈등하는 남자가 있다. 사실 소설의 테마만 놓고 보면‘사랑과 이별’이라고 단순하게 정의할 밖에 없지만 일상의 사건에서 부딪는 순간순간들의 감정에 대한 찬란한 묘사와 자기 행복을 꿈꾸는 인간들 본연의 욕구에 대한 숨김없는 발설, 남편과 아내의 관계성에 대해 수없이 반복되는 이해와 갈등, 그리고 사랑에 대한 오해와 균형을 상실한 관계의 비대칭성이 가져오는 고통 등이 내면의 서사라는 예사롭지 않은 이야기의 맛으로 진부함을 완전히 참신함으로 뒤바꾸어 놓는다.

화자(話者)인 30대 남자가 쏟아내는 처연해 보일정도의 세세한 내면의 이야기들이 얼마나 숨을 가쁘게 하는지, 자신에 대한 엄숙한 비판인가하면 어느덧 아내‘알렉상드린’의 일방적이고 공격적인 성격의 결함을 우회하고 있고, 필요이상으로 아내에게 무력감을 보이며 자기의 삶을 희생하는 남자인가 하면 스물일곱 남자로 변하여 자유와 사랑의 열정에 휩싸인 자신감 넘치는 남성을 희구하는 것처럼, 그 감정의 오르내림으로 멀미가 날 정도이다.

“잠자리를 할 마음도 없는 여자” 때문에 아내에게 헤어지자고 불쑥 내뱉은 고백으로 전깃줄에 상처가 나도록 얼굴을 맞고는 비열한 위협으로 죄스럽기 짝이 없는 짓을 한 자신이기에 아내의 감당해야하는 고통을 위해서라도 철저하게 자신을 희생하며 살아야 했다는 남자의 말은 과연 진실일까? 자기의 비굴할 정도의 희생은‘마조히즘의 극치’였다고 말하는 남자의 진심은 무엇이었을까? 남편을 자기마음대로 부릴 수 있으며, 일방적 감정을 강요하는 아내, 항상 화를 내는 폭력적 아내에 대한 잠재의식 속의 반란이었을 것이다. 그러함에도 화자는 한 달 반 동안 쉬지도 않고 신뢰를 손상한 대가를 치르지만 필요이상의 대가를 치르게 하는 아내에 대한 적의로 고통을 받는다.

한편 소설의 중요한 두 사건인 아내가 태연히 저지르는 성적 일탈과 화자의 이탈리아 로만체에서의 24시간이라는 짧은 시간 발생한‘알리스’라는 여성과의 사랑이야기로부터 파생하는 심리적 파동의 섬세한 묘사는 바로 이 작품의 탁월함 그 자체로서, 아마 이러함이 소설을 풍요롭게 하고 공감을 일으키게 하는 요소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남자와 성적탐닉에 빠져버린 아내의 수첩을 우연히 읽고 반응하는 화자의 절망적인 감정의 흐름은 그야말로 문장의 진수이다.

“나아닌 다른 몸을 향한 사랑의 말을 읽고 또 읽었어. ~ 나는 그 글을 읽는 바로 그 순간 연기처럼 사라져버리는 줄 알았지. ~ 중략 ~ 앞뒤 가리지 않고 달려가 아무 차에나 뛰어들 수도 있다는...”
“그녀는 나 없이 정욕의 역사, 일시적인 열정의 역사를 체험한 거야. ~ 그 자식의 완벽한 육체와 무심함에 홀딱 반했지.”

이렇듯 배신의 고통으로 몸을 떨면서도 아내의 성적 욕망은 부부의 사랑, 가정의 존속과는 별개의 문제라고 자신을 위로한다. 더구나 아내와 헤어지자고 한 비열한 남자로서 당연히 감수하여야 할 문제로 말이다. 그럼에도“그놈의 호텔방에서 섹스 할 때 쏟아냈을 그녀의 거친 숨소리”를 상상하며 괴로워하는 화자에게서 제도와 윤리, 그리고 개인의 행복에 대한 끊임없이 소모적인 충돌을 목격하게 된다.

그리고 이탈리아에서의 알리스라는 여성과의 운명적 만남이 남자의 삶에서 어떠한 의미였는지를 알아가는 것은 사랑, 성적욕망에 대한 중요한 이해가 된다. ‘로맹가리(에밀 아자르)’의 아내기도 했던‘진 세버그(Jean Seberg)'처럼 윤곽이 또렷하며, “르네상스 시대 그림에 나오는 금발의 라틴계 마돈나”라고 묘사되는 여자, 알리스로부터 비로소 알게 되는 사랑의 희열, 행복과 삶의 자유에 대한 이해이다. 작품의 표제인‘난 네 뒤에 있었어(Ero dietro di te)’는 바로 이들 만남의 표상이기도 하다.

“꿈결과도 같은 구원의 이 늦여름 햇살, 내 마음을 달래주고, 나를 다시 살아나게 하는 이 햇살, 이 자유의 빛, 정지된 시간, 제 빛을 되찾은 색채, 완벽하리만치 온화한 대기, 매혹적으로 전개되는 일들...”

같은 순간에 자신과 똑같은 감정을 느끼거나 이해할 수 있는 미지의 여자를 어디선가 만난다면 그 행복을 구체화 시킬 수 있을 거라고. 바로 알리스가 그런 여자라고. 행복은 그런 여자. '랭보‘의 「감각」이라는 詩의“여자와 함께 할 때처럼 행복하다”는 바로 그런 감정. 소설 속 길게 나열되는 사랑의 산문시 같은 문장들에서 만사를 잠시 잊고 문득 언젠가 느꼈던 것만 같은 늦여름 아침의 나른한 햇살이 그리워지고 좋아지게 된다.

자신의 비정상적이고 공격적인 감정에 순응하며 희생하는 남편, 배려하는 남자에 대한 일종의 중독증을 사랑으로 오해하는 여자와 이러한 기만적인 감정으로 심적 고통과 삶의 균형을 잃어가는 남자의 내면이 다양한 일상의 모습에서 그려진다. 결국 자신감을 불러일으켜 주고 같은 사랑을 원하고 있음을 읽을 수 있는 여자에 대한 로망은 남자에게 자신을 생각할 권리, 삶의 본질적 자유를 환기시켜준다. 남편의 감정을 지배하려는 아내의 굴레를 벗어나 프랑스에서 연인이 있는 이탈리아를 향해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남자, 그리곤 5일간의 꿈결 같은 열애의 시간을 보내고 돌아오는 남자의 알 수 없는 불안감과 그의 시선에 비친 제야의 불꽃에서 왠지 심각하고 복잡한 인생이란 벗어던질 수 없는 무엇이 있는 것처럼 아득함이 느껴진다. “경쾌함에 대한 작은 환상”이라고 치부하면서, 더구나 “각자가 지닌 비밀의 정원 속에 감추어진 멋진 추억”정도로 묻어두고 하루도 편할 날이 없는 여자와 평생을 하는 것이 옳은 일일까? 이 작품은 이렇듯 사랑했으며, 그리고 결혼하여 아이를 두고 가정을 이루고 있는 우리네들 모두에게 항상 반복되는 질문에 대한 사유이기도 할 것이다. “햇살이 적당하고 만사가 순조롭다고 억지를 부리지 않을 때, 그 순간이 바로 행복”인데, 바로 그 햇살의 기억이 흐리멍덩하기만 하다. 평범하기 짝이 없는 한 무능한 남자의 고백을 읽고 가슴이 뭉클하고 시린 것은 왜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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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헌의 동양학 강의 2 - 천문편
조용헌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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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 인문편이 강호고수의 걸출한‘구라빨’이었다면 2권인 천문편은 주역(周易)을 중심으로 풍수와 사주, 관상이 어울려 사람답게 사는 법, 자연과 화친하는 법등 우주의 섭리를 이야기하고 있다고 하여야 할까. 해서 산과 강, 자연이 있고, 천지의 질서인 태양과 달을 말하며, 유약한 인간이 섬기는 신의 세계인 종교가 있고, 우주 질서 속의 미물인 인간의 운명을 말하고 있다.

‘보약 세 첩 먹는 것보다 등산이 좋다’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등산 예찬을 하면서, 40~50대 우울증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이번 기회에 우리나라 3대 종주코스를 완등(完登)해 보라고 권유한다. 그러면서 고단백 에너지 코스로 바위의 화기(火氣)와 계곡물의 수기(水氣)가 이상적으로 버무려져 있는 백담사에서 봉정암 올라가는 길이 최고라고 적절한 중용의 길을 안내한다. 산을 오르는 이유야 다양하겠지만 “통즉등산 通則登山, 궁즉입산 窮則入山”이라고 즐거워서, 또는 삶의 궁지에 몰려 구원의 길을 모색하는 것이든 묶었던 노폐물이 걸러지는 상쾌함과 다 올랐을 때 선들선들 불어오는 바람이면 삶이 평화로워지는 것처럼 입산이건 등산이건 한 번 날 잡아 떠나야 할 터이다.

양기가 뭉친 명당이라는 지리산 남쪽의 악양(岳陽), 봉우리들이 뾰죽하여 화기가 넘친다는 화체산인 화왕산과 200칸 규모의 고택인 아석헌(我石軒), 속세의 먼지가 없는 절경인 관동팔경과 기쁘게 이야기하는 집이라는 현판이 걸린 선교장, 논산 노성리 윤증고택 등 풍수에 얽힌 재담과 이들에서 맛보는 별미인 무장공자(無腸公子)와 탕중왕(湯中王)이라면서 얼마나 맛있었으면 먹을 때마다 “아무리 힘들어도 죽지말자”라는 생각이 들었다는 민어탕에 이르면 역시 저자의 입담을 인정치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리고 동물과 식물, 지수화풍(地水火風)의 자연 모두에서 절절한 사연들을 쏟아내는 이야기들을 보다보면 궁극에는 어떻게 살 것인가? 혹은 어떻게 죽을 것인가? 에 통하는 거대한 줄기를 발견케 된다. 선탠이 있으면 문탠(moontan)도 있어 매월 보름에 달의 기운을 받으면 오장육부에서 달 월(月)자 들어가는 장(腸)과 부(腑)가 튼튼해지고 감성에너지가 회복되어 화병이나 우울증을 다스리는데 좋다는 해설처럼 건강하게 살다가 평온하게 죽는 방편의 고수다운 인생지침이기도 하다. 문득 사람이 죽으면 지수화풍의 4대로 흩어지는데, 보이지 않는 바람이라는 미세한 조짐에 대한 감지를 말하는 구절에서“가끔 바람 부는 쪽으로 귀 기울이면 ~ 中略 ~ 아득하게 멀리서 오는 바람의 말을.”하는 마종기 시인의 <바람의 말>이라는 詩구절과 겹쳐, 내 곁을 스치듯 지나가는 바람이 그 누군가일 것 만 같아 조심스러운 긴장이 돌기도 한다.

한편 저자는 강요하거나 훈계하지 않으면서 넌지시 도덕을 야기하고 인물이나 정치사회의 일면을 은근슬쩍 비판하는 세련됨도 선사한다. 명당자리에 묻히면 후손들이 잘 될 거라고 명당을 찾지만, 풍수에도 윤리가 있단다. 도덕적 자격에 미달하는 자에게는 발복(拔福)하지 않는단다. 그러하니 적악자(積惡者)가 제아무리 명당에 묻히더라도 복하고는 인연이 없다니 살아서 공덕을 부지런히 들 쌓아야 할 터이다. 특히 이 저작에서 풍수법 하나를 배웠다면 화기와 수기에 대한 것으로 소득이라면 소득이라 할 수 있겠다. 몇 년 전 소실된 숭례문이 정면에 화기가 넘쳐나는 관악산 때문에 이를 잠재우기 위해 비보(裨補:모자라는 것을 채워줌)용도로 남지(南池)라는 연못을 두었었다는 것이다. 금싸라기 땅이고 도로확보 때문에 메워버려 표지판만 남아있다니, 만일 이 연못이 있었다면 역사적 유적이 그렇게 맥없이 사라지지는 않았을 것만 같기도 하다. 어쨌거나 결과론이긴 하나 풍수론도 예사롭지만은 않다.

돌산(돌산-관악산-서울大)은 불이고, 기가 세단다. 그리고 돌 속에 잠재한 광물질로 인해 뇌세포의 활성화를 도와 암석위에 사는 것은 정신을 많이 사용하는 직업에게 좋다니 어디 돌산위에 지은 집들을 찾아보아야 할 것만 같다. 그래서인지 지반이 온통 돌인 평창동, 구기동이 고급주택가로 뒤바뀐 것을 보면 그럴듯하기도 하다. 팔자니 관상이니 궁합이 맞느니 그렇지 않느니 하는 것에 사실 아예 관심이 없는 내게는 이 저술 중 예언, 사주, 관상을 말하는 운명의 장은 내키지 않는다. 다만 전, 현직 대통령의 관상을 동물의 유형에 빗대어한 운명 풀이처럼 심심풀이 장도 흥미롭거니와 나이 쉰이 넘으면 얼굴에 격(格)이 천격과 귀격으로 정해진다는 성찰은 나름 삶의 태도를 되돌아보게 하기도 한다. 탐안(貪顔), 진안(嗔顔), 치안(痴顔)은 아닌지 거울을 한 번 들여다보고, 지안(知顔), 호안(好顔), 낙안(樂顔)이면 잘 산 얼굴 아니겠는가하며 또 한번 들여다보게 된다. 즐거움이 어려 있는 얼굴이면 좋겠다. 우리의 수려한 산천과 고택 사찰은 물론 천문의 신비를 주역으로 풀어내어 들려주는  삶의 이치가 저자의 넉넉한 품성만큼 여유롭고 풍요롭게 수록되어 있는 역술 기행이라고 하여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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