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주의 몫 - 모더니티총서 10
조르주 바타유 지음, 조한경 옮김 / 문학동네 / 2000년 12월
평점 :
절판


생산력의 발전을 인간 활동의 이상적 목표로 보는 오늘의 우리에게‘비생산적 소비’,‘낭비’,‘소모’를 인류의 본원적 가치라고 말하는 이 전복적 사유의 저술은 바타이유의 사상적 기점이자 근원적 사고를 담고 있어 이후의 그의 저술들 - 『에로티즘』,『에로티즘의 역사』- 을 이해하는데 절대적인 관점을 제공하고 있다 할 수 있다.

모든 유기체는 에너지(부)의 원천과 본질을 아무 대가없이 베푸는 태양 광선에서 얻으며, 이 대가없는 베풂 때문에 삶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에너지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받아들이고, 초과분은 체계의 성장에 사용토록 한다. 그런데 만약 이 체계가 어느 순간 그 에너지를 활용하여 성장하는 것이 한계에 이르러 그 초과에너지가 성장에 흡수될 수 없게 되면, 남아도는 에너지는 폭발할 수밖에 없으며, 그래서 어떠한 방식으로든 대가없이 소모되어야만 안정과 균형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 이 저술을 관통하고 이후 바타이유의 모든 사유를 지배하는 관념이 된다.

즉 대가없이 소모하는 것, 바로‘비생산적 소비’라는 것으로써, 이는 인류평화, 생존과 유지를 위한최고의 진리로 인식되는 것이다. 물질의 풍부한 생산이 미덕이 아니라 생산에는 전혀 관여치 않는 사치와 소모가 미덕이라는 말이 언뜻 낯선 이야기로 인식되지만 고대사회의 증여에 의한 교환시스템이나 희생제의와 같은 종교적 축제를 비롯해서 군사기획사회로서의 이슬람의 소모적 전쟁이나, 티베트의 승려사회라는 비생산적 집단, 서구 중세 종교기획사회의 모습을 통해 잉여의 해소가 인간과 지구, 나아가 우주 질서의 본성임을 납득케 하고 있다.

1차 및 2차 세계 대전이라는 우리가 목격하는 역사의 사실들을 저자는 바로 과잉에너지의 파국적 소모의 예로서 파악하고 있다. 예로서 산업혁명으로 인한 비약적인 생산력의 발달은 자원증대와 성장과잉을 초래하였으며, 이로 인한 유례없는 인구성장과 같은 압력은 어떠한 형태로든 잉여에너지의 발산, 소모가 필요했다는 것이다. 결국 많은 비생산적 소비의 방식이 있으나 서구사회는 파괴적인 비생산적 소비를 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고대사회는 이러한 과잉에너지의 낭비가 일상적 태도이며 제도화 되어 있었음을 발견케 되는데, 고대 아즈텍인들의 희생제의나 북아메리카 인디언들의 포틀래치라는 증여교환시스템은 그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인신공양과 노예의 대량살상을 동반하는 거대한 희생제의는 생산이나 부의 획득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닌 그야말로 대량의 순수한 소비로서 비생산적인 소비라는 천박한 소모를 신성한 세계로 돌려놓아 삶의 균형을 축조했으며, 경쟁자에게 모욕을 주거나 굴복시키기 위해서, 또한 상대의 도전을 자극하기 위한 부의 막대한 파괴나 증여의 방식을 통한 일종의‘부의 순환방식’인 포틀래치는 효과적인 잉여의 소모였다는 점이다.
또한 지형적으로 폐쇄된 지역인 티베트사회의 경우 과잉에너지의 내부 폭발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소모의 출구가 요구되는데, 불교 라마승이 지배하는 신정국가로서 아무런 생산도 하지 않음에도 막대한 소비만 하고 더구나 아이도 갖지 않는 수많은 수도원과 소속 승려집단은 잉여를 흡수하는 탁월한 체계였다는 것이다.

한편 현대 자본주의사회의 최고의 선으로서 생산의 가치와 악덕으로서의 사치와 낭비라는 소비의 개념을 가져온 종교개혁을 과잉에너지의 비생산적 소비를 인류사회에서 거두어간 전환점으로 파악하고, 칼뱅주의를 중세의 순수한 종교적 요구인 비생산적 소비의 세계를 파괴하여 자본주의를 근본주의화한 기저로 설명하고 있다. 즉 가처분 노동력의 유용한 사용과는 거리가 먼 교회의 건축이나 교회장식물과 같이 구체적 이익을 벗어난 사치인 잉여의 소비라는 덕목을 말살하였다는 것이다. 어쨌거나 이러한 비생산적 소비가 반드시 찬란한 가치를 목적으로 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폭발을 이완시키는 의미를 가지며,“베풂과 지체 없는 삶의 취향”이라는 실존의 미덕을 지닌다는 측면에서 자연의 평화로운 순환에 기여하고 있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하겠다.

우리 인류사회는“과잉생산이 다른 출구를 찾지 못할 때 전쟁만이 팽창산업의 유일한 고객”이었음을 경험하였을 뿐 아니라 그 파괴력과 결과가 가져올 공포를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시대적으로는 그 간극이 존재하긴 하지만 이 저술의 마지막장에서 언급하고 있는‘마셜플랜’은 2차 대전 종전 후 냉전의 시대에 유럽의 경제복구를 지원하기 위한 미국의 잉여를 해소하는 막대한 무상공여로서 파국적인 소비를 회피한 비생산적 소비의 슬기로운 모델이 된다.

그칠 줄 모르는 성장지향, 부의 축적에 여념 없는 현대인들을 지배하고 있는 정신은 끓어 넘치는 상품, 즉 잉여의 문제를 이미 낳고 있는지도 모른다. 자본주의 의식을 장악하고 있는 고전경제학의 개인의 이익을 전제의 이익으로 이해하려는 잘못된 관점은 바타이유의 이 일반경제학에 의해서 극적인 사유의 전환을 요구받고 있다. 마셜플랜의 교훈인“개인의 이익이 우선하는 사회에서 전체의 이익이 우선하는 사회로의 전환”과 같이 우리는 비생산적 소비를 실현하는 사회로의 복귀를 위한 다양한 정책을 마련하여야 할 것이다. 부의 상당부분을 비생산적 소비에 바치도록 하는 노동자 운동(작업시간의 단축, 소득의 증가는 여가의 증가로 사치와 낭비를 촉진하며, 아울러 부의 공평한 배분으로 정의를 구현한다)이나, 좌파정책(복지 등)은 혁명과 같은 전복적 혼란에 의하지 않고 경제제도를 평화적으로 발전시키는 효과적인 방향이 될 것이다.

‘사치, 종교예식, 기념물 건조, 전쟁, 축제, 스포츠, 장례, 예술, 도박, 섹스, 증여, 기부’와 같은 ‘소비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소비’는 과잉 에너지를 해소하는 유용한 수단이다. 초과 에너지가 부르는 재앙을 피하기 위해서는 이들 비생산적 소비를 오늘의 사회에서 여하하게 복원하고 촉진하는 가하는 것이 중대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잉여를 가진 부자의 헛된 사치와 과시는 기부와 공공증여와 같이 내부의 폭발을 터뜨리는 정의로운 수단으로 배출되어야 할 것이다. 이후 죽음의 사치, 성의 사치와 같은 방식으로 고찰되는 생명의 심오한 진실로 나아가는 이 소모의 개념은 인류 문명의 변화를 규명하고 그 발원을 이해하는데 핵심적인 기호가 된다. 바타이유를 읽어나가는 모든 이들에게 그의 탁월한 저술들에 앞서 『저주의 몫』을 우선 필독하기를 권한다. 이는 그의 사상의 뿌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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