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로칼랭
로맹 가리 지음, 이주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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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로맹가리’가 자신에게 새로운 이름, ‘에밀 아자르’를 부여하고 출간한 최초의 작품이다. 더구나 결말 부분이 잘려나간 채 출간될 수밖에 없었던 사연들까지 더해 호기심을 자극하지만, 그의 당시 사적 상황을 이해하면 자신의 소설에 대한 냉정한 평가를 기대해서였다는 그 자신과 세간의 주장을 조금은 전복하고 싶어진다.

첫 번째 아내를 떠나 당대 스크린의 아이콘이었던‘진 세버그’와의 염문과 재혼, 그리고 다시금 이혼이란 결과는 그의 신분상 명예(외교관으로서 또한 존경받는 작가로서)에 흠집을 안겨주었던 것이 사실이고, 또한 문단에서 그의 작품에 대해 더 이상 매혹적인 시선을 보내지 않고 있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아자르라는 변신은 비우호성을 돌파하기 위한 작가적 수단이 아니었을까하는 억측도 해보게 되는 것이다.

아마 이러한 작가 주변의 환경은 그에게 새로운 언어의 준비를 시작하게 되었을 것이고, 이는 이전의 작품과는 다른 언어를 요구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이 작품 『그로 칼랭』의 주인공‘쿠쟁’이 하는 말은 세상 사람들의 어법과는 사뭇 다르며, 그 소통의 단절은 내면의 과잉으로 이어지는 것 같다. “일반적인 현상, 세계는 흘러 나가지 못해 공격적으로 경쟁하게 된 사랑의 초과분 때문에 고통을 겪고 있다고 생각한다. 내면의 요새 안에서 엄청나게 축적된 애정의 자산이 쇠퇴하고 손상된다.”즉 감정의 잉여를 해소하지 못하는 대 도시 평범한 사람들의 소외와 단절로 인한 배출구의 차단 말이다.

어쨌든 이 미터 이십 센티미터의 비단뱀과 자신의 서식지(방 두 개의 아파트)에서 동거하는 쿠쟁이라는 사내는 직장 동료들로부터 “그 사람은 아무도 마음에 두질 않아...”라는 말을 듣게 될 정도로 자신의 사생활에 대한 애착이 깊다. 그리고는 “약간은 자기 나름의 내면생활이 필요”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공공연한 소외의 소문을 떨치기 위해 자신에게도 “누군가 있다”라는 것을 증명하는 방법으로 비단뱀‘그로 칼랭’의 사진을 꺼내어 내미는 것처럼 그의 언어는 세상과 다르다.

그러나 이러한 쿠쟁의 다른 언어는 경찰서 서장과의 대화에서 엉뚱한 제안으로 자신의 언어에 공포에 질린 것 같았음을 느끼고 있음에도 “나는 아주 쉽게 애착을 느낀다.”고 하는 것과 같이 외려 세상 사람들의 독해가 잘 못 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의 다름 아니다.
이러한 역설적이고 뒤틀린 쿠쟁의 말을 듣다보면 속에서부터 올라오는 웃음이 쿡쿡하고 터져 나오게 되는데, 이 코미디와 같은 언어들을 사용하는 이유는 세련된 비판, 아니 조롱이라 하여야 할지도 모르겠다. 일례로 “어떤 위대한 프랑스인은‘어려움을 꾹 참아야 한다.’는 훌륭한 말을 했지요. 만약 우리 아버지들이 참을성이 없었다면 분명 여기까지 이르지 못했을 겁니다. 주민 머릿수와 국민총소득 얘기입니다.”처럼 ‘인구 통계학’적이라는 쿠쟁의 반복되는 비유는 그 근원의 불완전성을 보잘것없게 보이게 하는 식이다. 결국 우리들이 잃어버린 진정한 언어, 즉 본질에 대한 제대로의 살펴보기를 요구하고 있는 것일 것이다.

한편, 그로칼랭의 탈피 장면이 거듭 등장하는데, 그때마다 쿠쟁은 경이로워하며 이유 없이 행복한 느낌에 젖어든다. 그리곤 “생애의 지극히 낙관적 사건, 재생, 부활절, 욤 키푸르(대속죄일), 희망과 약속 ”이라고 해석하고, 이는 “진정성을 보장하는 동시에 비단뱀이 새로운 삶을 얻을 때가 되었음을 느끼는 감동적인 순간”이라고 경탄한다. 여기에서 작가의 변신, 즉‘에밀 아자르’로의 새로운 탄생, 즉 작가 자신의 재생을 위한 간절한 희구를 보게 되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결국 이 언어는 마침내‘불가능의 끝’이라는 그로칼랭이 자신(쿠쟁)에게 인간의 목소리로 말을 걸어주는 것과 같이 도달이 묘연한 것이 아니었을까. 아마도 작가가 자살하면서 남긴 <결전의 날>이라는 유언의 쪽지 마지막 문장, “나는 마침내 완전히 나를 표현했다.”고 한 것이야말로 바로 이‘불가능의 끝’을 완성한 것이라는 생각에까지 이르게 된다.

사실 이 작품의 문장들 하나하나 마다에는“본성에 대한 진정한 승리가 열어주는 지평과 전망”을 일깨우고, 추가된‘생태학적’이라고 불리는 결말부분과 같이 자연보호라는“미래가 기대되는 예외와 도약의 순간”처럼 의미심장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밀도 높은 주제가 내재되어 있다. 가엾은 흰쥐 블롱딘을 그로칼랭에게 먹이로 주지 못해 고통 받는 쿠쟁에게 “생쥐를 무더기로 주세요. 알아보기 힘들 겁니다. ~ 中略 ~  개성이 생기는 거지요. 개성 없는 다수로 받아들이면 훨씬 인상이 희미해 질 겁니다.”에서와 같이 우리의 인식에 대한 역설적 반성을 요구하기도 하며, “다른 사람이 주게 하세요.”처럼 본질은 변화된 것이 없음에도 주체만을 바꾸어 합리화시키는 어리석은 세상을 조롱하기도 하는 것이다.

“확실히 현 상태에서는 애무가 부족하다.”라고 타인에 대한 이해가 들어서지 못하는 현실세계에 대한 안타까움과 더불어, 비단뱀과 자신을 동일시하기에 이르는 쿠쟁이라는 현대인의 위태로운 소외의 강박이 해학적이고, 또는 변태적으로 , 그러면서 진중한 목소리로 외쳐지고 있다. “즉각적인 우정을, 자발적인 뜨거운 격정을, 일종의 상호관계 같은 감정”이 세상에 창궐하기를 바라면서.
아마 출생 전 의식 상태인‘프롤로고맨’을 이해하기위해서라도, 비단뱀이 동물이 아니고 하나의 인식임을 깨닫기 위해서라도 몇 번의 재독이 필요한 작품이다. 어쩜, 순수한 상태의‘로맹 가리’를 비로소 읽고 있는 것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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