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틸다
빅토르 로다토 지음, 김지현 옮김 / 비채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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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의 열광적인 응원과 지원이 계속되던 어린 시절을 되돌아보면 독립된 주체로서 분리된 자아를 인식하기 시작하면서 별의별 시시콜콜한 일상의 사건들이 심각해지기 시작했던 그 어느 시기의 기억들이 떠오른다. 꽤나 오랜 세월이 흘러도 통증으로 남아있는 것이 있는가하면, 너무 유치했던 것에 왜 그리 심각했었는지 웃음이 나오는 대목도 있다. 또한 영원히 기억되었으면 하는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추억도 있고, 지워버렸으면 싶은 죄책감도 있다. 그럼에도 그런 모든 것들과 그 과정이 오늘의 나를 구성하고 있다는 자각에 이르면 인간의 성장이란 것이 슬프고도 경이롭기까지 하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그래서인지‘마틸다’란 열네 살 소녀의 변화무쌍한 감성의 기록인 이 작품에서 맹랑하고, 당혹스러운 시선과 행동은 물론 죄책감과 도덕적 회의 등 그 내적 혼란과 세상에 대한 적의, 그리고 어느 샌가 넓어진 사람들에 대한 이해와 타협하는 인간을 발견케 되는 것은 인간의 성장이란 바로 자연과 우주의 리듬을 절로 익혀가고 외롭지만 홀로 만들어가는 것임을 이해케 한다.

마틸다에게 열여섯 살 언니‘헬렌’의 죽음은 1년이 되도록 지울 수 없는 상실감과 깊은 상처로 작동하기만 한다. 엄마와 유대가 깊었던 언니의 죽음은 마틸다와 엄마의 관계를 더욱 소원하게 만들기만 하고, 사랑과 미움이 뒤섞인 다스리기 어려운 교묘한 감정이 되어 마음을 괴롭힌다. 엄마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실의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엄마를 구해내기 위해 자극적인 행동을 일삼지만 이는 관계를 회복시키기는커녕 더욱 손상된 감정을 키우기만 한다.
누군가에 의해 철로에서 달려오는 열차에 밀려 사망했다는 믿음은 커 보이기만 했던 우상인 언니의 죽음 이면에 놓인 진실을 찾으려는 행동으로 이어지고, 언니의 이메일 휴면계정에 들어가 유령의 메시지를 보내기까지 한다.

실의에 잠겨 무력해진 가족의 사랑을 복원하기 위해, 아니 지워지지 않는 자신의 상처를 치유키위해 언니의 마지막 자취를 따라가는 마틸다의 행로는 왠지 모를 아픔으로 숙연해지게 하기까지 한다. 이처럼 가족의 연대, 사랑의 복원을 위한 걸음뿐 아니라, 유일하다시피한 친구‘애나’에 대한 우정이 미묘한 질투와 인정이라는 복잡한 심리적 과정을 겪으면서 보다 성숙한 관계로 변화하는 모습이나, 동갑내기 남자친구‘케빈’에 대한 이성적 호기심으로의 진전 또한 의젓하게 수용하는 모습에서 자기애의 훌륭한 정착을 인지하는‘성장’이란 독특한 여정에 신뢰를 갖게 되기도 한다.

인간이 성장해 간다는 것, “정말이지 서두를게 뭐람?” 그렇게 자연스럽게 서서히 다가오는 것일 게다. 죽은 언니의 노란색 드레스, 언니의 1주기에 입고서 엄마와 아빠의 마음을 다치게 하였던, 극복하지 못한 정신적 고통은 누군가가 덜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가족의 사랑으로부터 잊혀 질수밖에 없는 언니에 대한 죄책감의 진실을 확인하기위해 언니의 남자친구를 만나러 가는 행위는 이 작품에서 그 상징적 위치가 너무 어마어마해서 어린 소녀의 마음에 더 큰 상처가 나지 않을까 가슴을 졸이게 된다. 마주한 언니의 남자친구로부터 듣게 되는 그렇게 완벽하고 자신에 찬 모습으로만 비추어지던 언니의 고통을 비로소 이해하게 됨으로써, 바로 사람들마다 지닌 그 고유한 비밀의 실체, 즉 모든 사람들이 갖게 되는 두 개의 삶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된다.

하얀 눈이 내리는 밤, 케빈과 가진 자기만의 비밀이 생긴 날, 언니의 노란색 드레스를 묻는 마틸다의 행위는 눈시울을 적실 정도의 감동이 되어 몰려온다. 언니만의 비밀, 엄마만의 비밀, 아빠의 내면은 그들만의 것. 그렇게 삶은 사람들과의 관계와 비밀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성장을 위해 거치는 무수한 감정들과 세상과의 타협, 그리고 이해를 쌓아가는 여정이 발칙하게, 때론 애달프고, 안타깝게 그려지지만 그러나 당당하게 마주하고 이겨나가는 열네 살 소녀의 깨달음에 어느새 격려와 갈채를 보내게 된다. 모든 첫 경험은 실로 두려운 것일 게다. 아스라한 절망과 슬픔을 지나 비로소 피어나는 꽃봉오리를 본 느낌이다. 또 하나의 감동적이고 숭고한 성장소설의 탄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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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르부크 부인의 초상 샘터 외국소설선 4
제프리 포드 지음, 박슬라 옮김 / 샘터사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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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화는 화가 자신을 투영한다. 한 걸음 더 내딛어, 모든 초상화는 자화상이다! 라고까지 하면 억측이라 할까? 시각적 형상이 아니라 내면세계가 이전되어 전달되는 그 감상이라면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런데 이를 조금 비틀어서 다시 정의한다면 초상화는 이미 왜곡된 이미지를 전제하고 있다는 의미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소설은 대략 1890년대쯤으로 추정되는 뉴욕 상류사회의 파티장면에서 시작되는데, 연회의 안주인(主人)‘리드 부인’의 초상화와 실제인물의 불일치에 대한 발칙한 서술과 이를 그린 당대 최고의 초상화가‘피암보’의 예술적 성취에 대한 자기회의로 작품의 전개방향을 일찌감치 제시한다.

부와 명성을 얻었지만 초상화라는 제한된 영역에 묶여 자신만의 예술적 창의성을 펼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하고 내적 갈등을 겪던‘피암보’앞에 엄청난 계약금의 제안과 함께, 대상인물을 보지 않고 초상화를 그려달라는 야릇한 의뢰가 들어온다. 돈벌이 수단으로서의 초상화가가 아니라 진정한 예술성의 지향을 위한 충분한 경제적 토대가 되어줄 것이라는 기대로 황당한 이 계약을 수락한다. 병풍 뒤에 숨어서 들려주는‘샤르부크 부인’자신의 이야기들을 통해 보이지 않고, 볼 수 없는 여인의 초상화를 그리는 것이다. 병풍 뒤에 앉아있지만 상대자인 화가 피암보의 모든 것을 뚫어보고 통제할 수 있는 지위를 가진 샤르부크부인과 오직 목소리와 야야기의 내용을 통해서만 대상을 그려내야 하는 화가의 이 게임은 이미 불공정함을 내재하고 있다.

이미지 형상화를 위해 들려주는 샤르부크부인의 성장과 삶의 행적에 대한 이야기는 소설의 거대한 한 축이 되어 신화적 신비로움과 기묘한 궁금증을 야기하고 과거의 기억이 현실의 사건에까지 은밀히 조우하여 궁극에는 삶의 욕망이라는 본질에 와 닿으며, 볼 수 없는 존재인 샤르부크부인이라는 인물의  실제에 도달하려는 피암보의 갈망과 섞여 다양한 감성적 이야기들과 사건을 만들어내고, 여기에 긴장감과 의미적 풍성함을 위한‘피눈물 흘리는’여인들의 그로테스크한 죽음과 피암보의 신변적 위기와 같은 서스펜스까지 더해져 재미와 속도감이 배가된다.

특히 이 소설을 우아한 매력에 젖어들게 하는 요소인 당대 화가들의 등장은 지적이고 심미적 욕구까지 일깨우면서 인물의 성격을 강화하거나 사건의 전환을 위한 적절한 포인트로 작용하여 현실과 이상, 외형적 모습과 은밀한 내면의 이중성이라는 본원적인 인간 욕망의 모습을 예술적으로 승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19세기말 상류사회 인물들의 초상화를 그린 인상주의 화가‘사전트’가‘피암보’의 스승으로 등장하여 역사적 사실성과 허구의 경계를 허물고, 예술적 성취를 위한 동경과 갈망을 자극하는 인물로서 표현주의의 대표적 화가인‘앨버트 라이더’를 통해 삶의 가치에 대한 현재성을 제고시키기도 한다.

실존으로서‘샤르부크 부인’의 외형적 형상화라는 초상화가 삶의 이야기라는 내면을 통해 재현되어야 한다는 이 대립은 사실‘눈’이라는 시각적 도구에 의지하는 우리로서는 혁명적인 인식의 전환, 가치의 변화를 요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표피적 외형에 현혹되지 말라, 지금까지의 인식수단을 잊어라! 라는 것인데, 이에 대한 우리의식의 저항은 실로 대단히 관능적인 것이 아닐 수 없다. 보이지 않는 신비감에 대해 작동하는 상상력의 진화는 샤르부크 부인에 대한 피암보의 거부할 수 없는 욕망의 점진적 증대로 표현되는데, 이는 진실을 방해할 뿐이다. 눈에서 피를 흘리며 순간에 사망하는 연속되는 의문의 살인사건들은 진실을 왜곡하는 눈에 대한 복수의 행위이다. 이와 같은 은유는 바로 이 소설의 또 하나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데, 서사의 두 축이라 할 수 있는 소설의 중심흐름과 샤르부크부인이 들려주는 환상적이며 동화같은 자기 삶의 이야기가 맞닿는 지점에 이르러 그 의미를 비로소 선명하게 이해하도록 견인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쌍둥이 눈(雪)의 결정과 같은 이 작품의 뛰어난 은유들과 회화작품에 대한 지적 탐험, 눈(目)을 통한 가치와 인식의 왜곡과 진실에 대한 고뇌, 예술적 성취와 같은 삶의 이상에 대한 갈망이 정교하게 얽혀있다. 이처럼 닿을 것 같지 않던 사건들과 욕망의 갈등이 선회하면서 조우하는 귀결에 이르는 무결점의 완벽한 플롯은 이 소설의 또 하나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재미와 삶의 목적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같은 주제, 그리고 지적 풍미까지 넘치는 가히 예술소설의 여왕(女王)적 작품이라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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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9-06 15: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 부자연스럽게 아름다운 자태는 메트로폴리탄에서 가장 아름답고 유명한 그녀 아닌가요. 필리아 님 리뷰를 보니 막 궁금해지는군요!

필리아 2010-09-06 16:13   좋아요 0 | URL
네, 말 많았던 뉴욕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 전시된 사전트의 '마담X'가 맞습니다. 어깨끈 하나가 흘러내린 본래의 그림을 지나치게 관능적이라 하여 수정하였다죠...
 
왜 세계는 가난한 나라를 돕는가 - 국제원조를 둘러싼 정치와 외교적 진실을 낱낱이 파헤치다
캐럴 랭커스터 지음, 유지훈 옮김 / 시공사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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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에는 구호를 받는 나라, 원조 수혜국이라는 딱지가 늘 붙어 다녔다. 불과 10년 남짓 전까지의 일이다. IMF로부터 긴급 구제자금에다 이웃 일본으로부터 구속성 원조를 받으며 국제사회로부터 손가락질을 받던 치욕스러움이 바로 어제의 일이란 이야기다. 그러나 이제 교역과 국민총생산의 규모가 커짐에 따라 국제사회에 대한 책임과 의무의 부담, 즉 지금의 성장에 이르기까지 국제사회로부터 받은 원조를 이젠 돌려줘야 하는 대열에 합류하여야 하지 않겠냐는 보이지 않는 압박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웃 일본은 공여국의 대열에 선 이런 한국을 자신들의 집중적이고 선진적인 원조를 통하여 성공적인 발전과 사회 안정을 이룩시킨 모델이라고 자랑하고 있다. 무슨 망발이냐고 하기에는 60,70년대 일본의 원조가 한국경제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던 것을 부인하기 어렵다. 여기에 냉전시대, 자본주의체제의 최전선으로서의 지역적 위치로 인하여 자신들의 국익과 위상의 유지를 위해 미국 또한 한국의 주요 공여(供與)국이었음은 모두가 잘 아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들 원조는 과연 순수하게 한국의 경제발전을 지원하자는 의도였을까? 그네들이 한국에 제공한 원조의 본질이란 그런 연민과 선의의 인도적 정신과는 결코 무관하였음을 이 저술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여기에는 원조대국이라 할 수 있는 덴마크, 미국, 프랑스, 독일, 일본 5개 국가의 대외원조 역사와 그네들의 원조정책, 원조를 위한 정치, 사회적 조직에 대한 분석과 통찰을 통한 본질의 규명이 있으며, 이로부터 21세기 행성 지구에서의 원조는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미래 제안과 구상이 있다. 중점적으로 소개되고 분석되는 이들 5개국의 해외원조의 목적은 분명 그 출발의 가치나 정책적 방향에서 많은 차이점들을 지니고 있다. 특히, 인구 500 만 명에 불과한 유럽의 소국인 덴마크가 GNP 1%의 공여순위 1위 국가라는 아주 낯선 이해처럼, 의외의 사실을 목격하게 되기도 한다.  

원조란 “수혜국 국민의 형편을 개선할 요량으로 정부가 다른 독립 정부나, NGO 혹은 세계은행과 UNDP 등 국제기구에 공적 재원을 이전하는 자발적 행위”라고 정의하고 있다. 정의에서 보듯이 원조의 표면적 행위에는 공여국의 목적은 설명되고 있지 않다. 다만 빈국이나 전쟁으로 피폐해진 국가의 전후 복구, 불안정한 사회의 안정을 지원하는 등 수혜국의 형편을 나아지도록 돕기 위한 행위라고 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들 대외원조가 실제 수혜국들의 형편을 개선시켰는가에 대해서는 사실 어떠한 확신도 없다는 것이 이 저술의 주요 결론 중의 하나이다. 이러한 이유는 바로 공여국들의 원조 목적을 보면 그 결과를 예상하는 것이 어렵지않다. 

공여율은 세계 20위권에 머물지만 공여금액은 단연 최고의 규모인 미국의 원조 목적은‘외교’에 있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물론 대외원조의 목적을 영리나 개발과 같은 목적으로 명료하게 구분하는 것에는 그 속성상 한계가 있지만, 1990년대 구소련이 붕괴하기까지 냉전체제에서 자기진영의 확보를 위한 세력의 다짐을 위한 원조였다는 것이다. 한편 일본의 경우는 오직‘영리’목적의 원조로 원자재의 확보나 수출증진을 위한 구속성 원조와 같이 돈벌이를 위한 것이었으며, 보건이나 교육 등 진정한 원조에는 거의 배분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결국 최근에 와서 국제사회의 질책과 압력에 따라 이와 같은 구속성 원조라는 야박한 인심을 시정하려는 움직임이 있으나 근본적 변화는 없는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이처럼 한국의 원조와 깊은 인연을 맺는 두 국가의 원조의 성격에서와 같이 이들이 한국경제의 성장과 안정에 기여했다는 주장에는 많은 위선과 기만이 내재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 한국의 대일 교역이 적자를 면치 못하는 근저에는 일본의 물품을 사들이는 것으로 한정된다던가, 일본 기업의 제품이나 기계장치에 의한 산업건설에만 지출되도록 하는 바로 이러한 일본의 구속성 원조에 연유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프랑스의 원조는 그네들의 아프리카 사하라 이남지역의 식민지국을 중심으로 한 것으로 자신들의 언어와 문화에 종속시키고, 외교 시장에서 자신들의 리더십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독일의 경우, 전후 복구를 위한 마셜플랜의 주요 수혜국으로서의 세계사회에 대한 보상의 성격으로 출발하여 동독과의 냉전시대 경쟁에서의 외교적 우위를 확보키 위한 정략이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이들 강대국의 대외원조는 표면상으로는 가난한 나라를 돕는다는 것이었으나 실제에 있어서는 자국의 외교적, 경제적 이익을 위한 구실 이상이 아니었음을 이해케 된다.

반면에 이들과는 확연히 다른 원조정책을 덴마크에서 발견하게 된다. 이들의 공여 프로그램은 빈곤퇴치를 강조하는 순수한 개발원조로서 그네들의‘인도적 개방주의’국가로서의 정체성을 그대로 인류사회를 위해 실현하고 있다는 점이다. “원조는 정치조건을 수반하지 말아야 한다.”는 가치 하에 빈국들의 국가능력, 환경적으로 지속가능한 개발의 장려, 인권의 신장, 보건위생 등 뚜렷하게 빈곤에 집중하고 있으며, 원조금액의 25%라는 엄청난 규모를‘무상원조’에 할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원조의 본래적 정의와 같이 수헤국과 국민의 형편을 개선하는데 도움을 주는‘세계의 사회적 양심’을 실천하고 있는 유일하다시피 한 국가라는 점이다.

이 저술은 이처럼 주요 원조대국의 원조목적에 대한 다각적인 고찰은 물론 원조방법과 원조를 위한 조직에 대한 형태를 검토하고 있어, 그네들의 시행착오와 정치적 현실에 입각한 다양한 시스템들을 통해 새롭게 원조국가의 대열에 참여해야 하는 우리로서는 유용한 기반정보를 얻을 수 있기도 하다. 이러한 대외원조 시스템에서 특별히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으로 여겨지는 것이 있는데, 바로 원조국으로서의 국민적 공감대의 형성과 지속가능한 체제를 위한 사회 환경의 측면이다. 내부의 평등과 사회 정의의 강조, 그리고 국가가 이러한 목표를 실현하기에 적절한 도덕적이고 정치적으로 성숙한 역량을 지녀야 한다는 것으로, 청소년 교육 등 원조에 대한 대중홍보는 물론 국민과 의회의 참여 속에서 이루어지는 투명성 등에 대한 조언은 각별히 유념해야 할 요인이라 할 것이다. 넓게 공유된 사회적 합의는 쉬이 단절되지 않으며, 부패하지 않는다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국제 원조에 대한 한 층 깊어지고 진지해 진 안목을 지니게 된다. NGO를 비롯한 기타 민간 구호기관은 물론, 대외 원조정책의 기획과 조직에 관여하는 정부관계자들이 꼭 참조하였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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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에 흩날리는 비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24
기리노 나쓰오 지음, 권일영 옮김 / 비채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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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독특하다. 수사관, 탐정 한 명 등장하지 않은 범죄 추리소설이니 말이다. 주룩주룩 내리는 일본의 장맛비는 정말 기분이 나쁘다. 그 후덥지근한 기운이란...새벽 세시, 죽은 남편으로 애를 끓이는 꿈속에 들려오는 벨소리, 지극히 비상식적인 시간에 울리는 전화. 그리곤 아침 댓바람부터 친구‘요코’의 행방을 묻는 그녀의 애인인‘나루세’가 야쿠자를 동행하고 무작정 집안으로 쳐들어온다. 허락도 없이 온 집안을 뒤집어 놓는다. 요코가 나루세의 모기업 비자금 1억엔을 갖고 사라졌다는 것. 가장 친한 친구이니 의심 대상순위 1번이란다.

끌려간 곳은 야쿠자 일파의 회장실, 일주일을 줄 터이니 요코와 사라진 돈의 행방을 찾아내라는 것, 이제 ‘무라노 미로’라는 여인은 친구 덕택에 목숨을 건 친구 찾기에 돌입하게 된다.  무고하게 처해진 위기의 상황을 벗어나기 위한 여성 이상의 모습을 발견키 어렵지만 추진력은 가히 여느 수사관을 능가한다.

작품은 당연 사라진 요코에 맞추어지고, 여기서 작가‘기리노 나쓰오’식 음울하며, 엽기적이고, 음탕한 소재들이 하나씩 그 얼굴을 드러낸다. 본디지 룩을 입고 페티쉬 이벤트를 연출하는 등 선정성으로 저널계의 시선을 모은 르포라이터인 요코의 삶의 궤적을 밟아 나갈수록 친구의 낯설기만 한 진실을 발견케 된다. 1억엔의 행방을 찾느라 혈안이 된 나루세와 요코를 찾으려는 미로의 연합전선은 불신과 신뢰를 오가며 어렵사리 전개 된다. 요코의 사무실에서 허드렛일을 도와주는‘유카리’, 그녀의 연인인 듯한‘후지무라’, 요코와 각별한 사이로 보이는 SM쇼를 통해 죽음의 문학을 실현하는‘가와조에’, 어디선가 본 듯한 무희(舞姬) 등 모두 요코의 잠적과 관련이 있어 보이지만, 아무런 실마리도 연결 할 수가 없다.  

소설은 요코의 마지막 행적을 따라 정통 저널리스트로서의 야망을 향해 독일의 도시로 치닫고, 네오나치(neo-nazi)파벌간의 암살사건의 현장에 있었음이 드러나지만, 인종차별의 체험기였던 당초 르포의 목적이 바뀌었음이 밝혀진다. 자신의 입지를 키워나가던 야심적 르포라이터의 잠적과 비자금 도난 사건을 둘러싼 단순한 추적이 네오나치즘, SM쇼, 나루세의 전부인과 요코와의 감정대립까지 얽히며, 무수한 복선을 만들어 낸다. 약속된 일주일이란 기간 내에 요코의 행방을 찾아내는 것은 불가능해 보이기만 한다. 추적의 매듭을 풀어 줄 수 있을 것이라 짐작되던 인물은 자살이 추정되는 주검으로 발견되고, 미궁으로 빠지지만 의외의 명쾌한 단서가 포착되고 사건은 완벽하게 마무리 되는듯하다.

기리노 나쓰오가 누구인가!‘반전의 여왕’답게, 불과 책장을 몇 장 남기지 않은 상태에서 죽은 자가 남긴 의미심장한 메시지부터 주어진 단서들을 다시금 돌아보게 한다. 욕망의 끈적거림이 묻어나는 세상에서 어둠과 죽음은 어디에서 시작되겠는가? 아시아적 상상을 넘어서는 탁월한 작품이다. 인간 본성에 대한 예리한 통찰, 동양적 특수성을 초월하는 보편적 가치의 추구까지, 그리고 가히 논리적 정교함과 치밀한 구성에 있어서는 어떠한 극찬도 아깝지 않을 정도에 이른다. 단어와 문장 하나하나에 까지 장치된 세밀함을 발견하면 아!~하는 탄성을 지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 작품이‘무라노 미로’라는 여탐정을 탄생시키는 시리즈의 첫 편이 될 수 있었던 까닭이 여기에 있었을 것이다.‘기리노 나쓰오를 영리한 언어의 야수(野獸)’라 했던가? 어둠의 세계가 정말 우아하게 마음껏 뛰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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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짐승
헤르타 뮐러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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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앞에 달린 술(장식으로 다는 여러 가닥의 실) 때문에 지레 겁을 먹고 달리는 말처럼, 딱딱하게 얼어버린 채로 너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감시원의 눈길을 의식하며 걸을 수밖에 없는 두려움이 일상화된 세상에 사는 사람들이 있다.  고문과 감금, 그리고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진 공포의 세계, 독재자‘차우세스쿠’의 사익을 위해서만 작동되던 1970,80년대의 경찰국가 루마니아 전체주의정권의 스케치이다. 사실 우리의 70년대 전후시기와 그리 다르지 않은 모습이어서 소설 속 네 명의 청춘을 온통 빼앗아버린 살풍경(殺風景)한 모습이 낯설지만은 않다.

개인의 내면적 사유의 자유까지 간섭하고 통제하려는 사회, 권력이 지시하는 것에 순응하는 것만이 유일한 방향인 전체주의사회는 거짓과 불신을 조장한다. 거리와 상점, 식당, 학교 어디든 감시원의 귀와 눈초리가 사람들을 침묵하게 한다. 소설은 이런 암흑의 세계에서 상처입고 헐떡이는 젊은이들의 불안한 초상을 중심으로 작가 특유의 응축된 시적언어로 처연하면서도 강직하게 그려내고 있다.

작품 초반‘네모’로 표현되는 대학 기숙사의 방처럼 소설의 언어와 문장은 메마르고 건조하며 지극히 짧게 완성되지만, 그 어떤 장황한 묘사보다 독창적이고 풍부한 의미를 내재하고 있어 여운과 감동이 소실되지 않고 지속되는 특유의 풍요로운 감정적 느낌을 갖게 한다. 바로 네모는 공간의 형태이기도 하지만 그대로 그 공간에 있는 여자 대학생들의 감성이기도 하며, 각박한 사회성의 상징이 되기도 한다. 더구나 네모의 벽장 속에서 목을 매단 채 발견되는‘롤라’의 공책에 쓰인 “...라고 롤라는 썼다.”라는 진술들은 그야말로 시로 승화된 소설 아닌가 할 정도의 백미(白眉)들이다.

개인의 짐을 넣어둔 사적 장소인 트렁크조차도 자유가 보장되지 않는다. “나라 안에는 똑같은 트렁크 열쇠가 수없이 많았다. 모든 열쇠가 거짓이었다.”는 문장처럼 이상의 너절한 수식과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여기에는 불법 수색과 압류, 사적자치의 불인정, 국가권력의 위선과 기만, 공포가 모두 내장되어있다. 또한, “옷 속에 그림자만 들어 있는 것 같은, 하루 일과에 지친 남자가 보인다.”라는 한 문장에서 비참한 노동자, 민중들의 희망이라곤 기대하거나 찾을 수 없는 사회의 단면을 그대로 상징하고 있듯이, 문장들은 고밀도로 단단하게 짜여있어 그 풍부한 의미를 음미하느라 쉬이 책장을 넘기지 못한다.

롤라의 의심쩍은 죽음이 인연이 되어 모인 여대생‘나’와 남학생‘쿠르트’,‘에드가’그리고‘게오르크’는 자신들의 정치적 견해와 시를 얘기하고, 노래를 부른다. 이들의 시와 노래는 부조리하고 불온한 세상에 대한 불안한 감정이 흐른다. 이는 전체주의에 기탁하여 민중의 피를 빨아대는 개새끼들과 개의 형상을 한 감시원, 비밀경찰의 음험한 시선을 모은다. 졸업 후 국가에 의해 배정된 지역과 공장으로 뿔뿔이 흩어지지만 이들의 목숨을 노리는 주구(走狗), 경감 프엘레의 손아귀를 벗어나지 못한다. 세상은 은밀한 고발과 감시만이 설쳐대고 신뢰라고는 한 조각도 기대할 수 없는 사람들의 집단에 불과하다.

서로의 상황을 주고받기 위한 편지 속에는 머리카락 한 올을 넣고, 손톱가위는 심문, 수색은 신발, 미행은 감기 걸렸다...생명에 위협을 느끼면 쉼표하나로 약속한다. 그러나 이들의 편지에는 어김없이 이 단어들과 문장이 들어있고, 호칭 뒤의 쉼표는 지나치게 두꺼워지기만 하며, 수시로 가해지는 심문과 수색, 그리고 고문은 죽음의 휘파람 소리를 점점 가까이 들리게 한다. 전체주의에 순응하지 않거나 작은 조짐이라도 있으면 그 사람은 도시에서 사라진다. 그러나 영혼이 사라진“도시의 정신병자들은 절대 죽지 않아. 쓰러지면 그들이 서있던 그 자리, 아스팔트에서 똑같은 사람이 솟아”오르듯이 인간의 본원적 정신을 빼앗을 수는 없는 것.

침묵 할 수밖에 없는 자신들의 죄책감을 죽지 못해 사는 자신들의 가족과 이웃, 사람들로 정당화하지만, 그렇다고 파괴된 도덕성까지, 정의까지 모른 채하기에는 너무 젊기만 하다. 사악한 권력은 끝내 청춘의 목숨을 하나씩 앗아가고, 떠날 수 있는 자는 독일로, 헝가리로 도피한다. 발령 받은 곳에 자신의 짐을 풀 수 없는 세상, 모든 사람들의 안에는 불안감에 날이 고추선 흉흉한 자의식인‘마음 짐승’만이 도사리는 곳, 독재자의 확인되지 않은 병에 대한 소문은 모두에게 쾌재를 부르게 하는 곳, “바늘귀에 꿰인 실처럼” 굴욕이 이어지는 곳, 오로지 불신만이 깊게 드리워진 세상이 젊음과 자유를, 인간의 존엄을 누른다. 전체주의의 무참함과 옥죄는 공포의 긴장이 젊은이들의 절망적인 시선에 불안하게 흔들리며 소설을 가득 메우고 있는 잔혹하고 뼈아픈 우리 인간사회의 기록이다. 다시금 헤르타 뮐러의 시적 감수성이 농축된 언어를 통해 음울한 이 시대의 초상을 우아하게 읽어냈다. 이 같은 역사의 오류, 인류의 어리석음이 반복되지 않기를 희망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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