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에 흩날리는 비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24
기리노 나쓰오 지음, 권일영 옮김 / 비채 / 2010년 8월
평점 :
품절


좀 독특하다. 수사관, 탐정 한 명 등장하지 않은 범죄 추리소설이니 말이다. 주룩주룩 내리는 일본의 장맛비는 정말 기분이 나쁘다. 그 후덥지근한 기운이란...새벽 세시, 죽은 남편으로 애를 끓이는 꿈속에 들려오는 벨소리, 지극히 비상식적인 시간에 울리는 전화. 그리곤 아침 댓바람부터 친구‘요코’의 행방을 묻는 그녀의 애인인‘나루세’가 야쿠자를 동행하고 무작정 집안으로 쳐들어온다. 허락도 없이 온 집안을 뒤집어 놓는다. 요코가 나루세의 모기업 비자금 1억엔을 갖고 사라졌다는 것. 가장 친한 친구이니 의심 대상순위 1번이란다.

끌려간 곳은 야쿠자 일파의 회장실, 일주일을 줄 터이니 요코와 사라진 돈의 행방을 찾아내라는 것, 이제 ‘무라노 미로’라는 여인은 친구 덕택에 목숨을 건 친구 찾기에 돌입하게 된다.  무고하게 처해진 위기의 상황을 벗어나기 위한 여성 이상의 모습을 발견키 어렵지만 추진력은 가히 여느 수사관을 능가한다.

작품은 당연 사라진 요코에 맞추어지고, 여기서 작가‘기리노 나쓰오’식 음울하며, 엽기적이고, 음탕한 소재들이 하나씩 그 얼굴을 드러낸다. 본디지 룩을 입고 페티쉬 이벤트를 연출하는 등 선정성으로 저널계의 시선을 모은 르포라이터인 요코의 삶의 궤적을 밟아 나갈수록 친구의 낯설기만 한 진실을 발견케 된다. 1억엔의 행방을 찾느라 혈안이 된 나루세와 요코를 찾으려는 미로의 연합전선은 불신과 신뢰를 오가며 어렵사리 전개 된다. 요코의 사무실에서 허드렛일을 도와주는‘유카리’, 그녀의 연인인 듯한‘후지무라’, 요코와 각별한 사이로 보이는 SM쇼를 통해 죽음의 문학을 실현하는‘가와조에’, 어디선가 본 듯한 무희(舞姬) 등 모두 요코의 잠적과 관련이 있어 보이지만, 아무런 실마리도 연결 할 수가 없다.  

소설은 요코의 마지막 행적을 따라 정통 저널리스트로서의 야망을 향해 독일의 도시로 치닫고, 네오나치(neo-nazi)파벌간의 암살사건의 현장에 있었음이 드러나지만, 인종차별의 체험기였던 당초 르포의 목적이 바뀌었음이 밝혀진다. 자신의 입지를 키워나가던 야심적 르포라이터의 잠적과 비자금 도난 사건을 둘러싼 단순한 추적이 네오나치즘, SM쇼, 나루세의 전부인과 요코와의 감정대립까지 얽히며, 무수한 복선을 만들어 낸다. 약속된 일주일이란 기간 내에 요코의 행방을 찾아내는 것은 불가능해 보이기만 한다. 추적의 매듭을 풀어 줄 수 있을 것이라 짐작되던 인물은 자살이 추정되는 주검으로 발견되고, 미궁으로 빠지지만 의외의 명쾌한 단서가 포착되고 사건은 완벽하게 마무리 되는듯하다.

기리노 나쓰오가 누구인가!‘반전의 여왕’답게, 불과 책장을 몇 장 남기지 않은 상태에서 죽은 자가 남긴 의미심장한 메시지부터 주어진 단서들을 다시금 돌아보게 한다. 욕망의 끈적거림이 묻어나는 세상에서 어둠과 죽음은 어디에서 시작되겠는가? 아시아적 상상을 넘어서는 탁월한 작품이다. 인간 본성에 대한 예리한 통찰, 동양적 특수성을 초월하는 보편적 가치의 추구까지, 그리고 가히 논리적 정교함과 치밀한 구성에 있어서는 어떠한 극찬도 아깝지 않을 정도에 이른다. 단어와 문장 하나하나에 까지 장치된 세밀함을 발견하면 아!~하는 탄성을 지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 작품이‘무라노 미로’라는 여탐정을 탄생시키는 시리즈의 첫 편이 될 수 있었던 까닭이 여기에 있었을 것이다.‘기리노 나쓰오를 영리한 언어의 야수(野獸)’라 했던가? 어둠의 세계가 정말 우아하게 마음껏 뛰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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