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를 창조하는 새로운 복제자 밈
수전 블랙모어 지음, 김명남 옮김 / 바다출판사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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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의 모든 사상이나 현상의 근원에 대한 생각들이란 궁극적으로 우리 인간의 본질에 대한 규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의 본성- 생물학적이 되었든, 정신 또는 마음이라는 형이상학적 관점이 되었든 - 에 대해 그토록 알아내지 못해 모두들 안달하는 것일까? 결국 인간의 실체에 대한 정의야 어찌되었건‘인간’이 세상의 주체, 즉 설계자이고 기획자이며 제조자이고, 또한 그렇기에 이로부터 파생되는 정치와 경제, 문화 등의 인간사회 구조에 숨겨진 본질적인 원천적 요소를 이해하는 것은 인간자신들을 위해 당연한 물음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신다윈주의자로서 동물생물학자인‘리처드 도킨스’가 그의 저서『이기적 유전자:The selfish gene』에서 생물학적 복제자인 유전자에 비견하여 처음으로 일종의 문화전달자인 밈(meme)을 언급함으로써 유전자가 아닌‘제 2복제자’에 대한 관심이 시작되었다 할 수 있는데, 이는 현대 인간의 사유와 행동양식이 소위 생물학적 배경만으로 해석 되거나 규명될 수 없다는데 기인한다. 진화심리학을 비롯한 사회생물학자들의 생존유지와 번식이라는 유전자의 생물학적 논리에 기반한 설명이 여전히 개체의 행동을 장악하고 있는 유전자의 지배력에 근인(根因)하는 것이기에 많은 부분에서 타당성을 지니고 있으나 또한 많은 부분에서 설명되고 있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결국 오늘의 인간의 모습, 즉 큰 뇌를 가지고, 언어란 의사소통 기호를 지니며, 각종 전자장치를 만들어내고, 우주공간을 비행하는 것은 물론 더 이상 번식하려 하지 않는 개체가 늘어나는 등 이러한 현상 중 많은 것들을 유전자의 자연선택원리 만으로 설명하기에는 무언가 불명확하고 부족하다는 것이다. 유전자가 아닌 스스로 복제하고 진화하는 제 2의 복제자가 있다는 것인데, 바로“의복과 음식의 유행, 의식과 관습, 예술과 건축, 기술과 공학 등 문화가 뇌에서 뇌로 퍼져 가면서 그 수가 늘어나며 진화하는”문화전달 단위이자 모방의 단위인‘밈(meme)’이 그것이란 것이다. 더구나 이 저술은 밈과 유전자와의 공진화 역사는 물론 경쟁관계에서 우월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고 까지 주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제2의 복제자라는 밈이 진화알고리즘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 된다. 변이와 선택, 그리고 보유(유전)라는 자연선택의 원리인데, 밈 역시 퍼질 수만 있다면 무조건 퍼지게 하려하고 뇌 속의 제한된 처리 용량에 들어가기 위해 경쟁한다. 그리고 뇌를 비롯한 저장장치에 저장되고 모방을 통해서 다른 뇌로 전달된다. 또한 유능한 복제자의 필수요소인 정확한 복사와 복사량을 늘리고 오래 살아남기 위한 전략을 모두 갖추고 있으니 복제자로서의 조건은 확보하고 있는 것이 된다. 특히 밈의 핵심은 남을 관찰함으로써 어떤 행동에 대해서 뭔가를 배우는‘모방’이다. 이 모방을 통해서 밈은 선택되고 복제되기 위해 경쟁하며, 그래서 밈은 자신을 확산시키기 위한 다양한 전략들을 만들어 내는데, 인간 진화역사에서 중요했던 것들인 성(性)이나 권력, 음식에 관한 단어나 문장, 관련 형상들을 통해 보다 많이 선택되어 복제되고, 사람들의 대화에 자주 오르내리는 흥미진진한 스캔들이나 끔찍한 뉴스, 유용한 지침, 위험 회피를 위한 조언과 같은 말들로 자신을 퍼뜨린다. 밈 역시 유전자와 마찬가지로 목적의식이란 것이 있을 수 없다. 다만 자신이 많이 복제되어 오래 동안 살아남는 전략을 취할 뿐이다.

어쨌든 “인간은 진화 역사에서 최고의 전환점은 우리가 서로 모방하기 시작한 순간”, 바로 그 순간부터 제2의 복제자 밈이 나서기 시작했으며, 이 밈이 인간의 뇌를 거대하게 만든 선택압으로 작동했고, 유전자의 선택환경과 그 변화방향에까지 압력을 행사했다는 것이다. 결국 오늘의 인간은 유전자와 밈의 공진화에 의한 결과이며, 나아가 밈이 유전자의 고삐까지 틀어쥔 상황이라고 까지 주장한다.
저자‘수전 블랙모어’는 이러한 밈의 본질 하에 인간과 인간사회의 행동과 사고, 문화 전반에 걸친 해석으로 나간다. 그래서 이 저술은‘밈학’이라는 새로운 학제의 영역을 개척하는 시발점이 되는 중요한 저작물이라 할 수 있다.

사회생물학을 비롯한 심리학, 과학철학, 신경과학, 사회학을 망라한 인간 행동에 대한 다채로운 해석과 밈이론은 경쟁을 벌인다. 어떠한 해석과 이론이 더 유효한가, 그리고 보다 경제적이며 종합적이고 시험 가능한 예측들을 낳을 수 있는 것인지를 통해서 밈이란 제2복제자의 본성을 명료화하고 확증하고 있다. 일례로 인간의 짝짓기는“최고의 모방자와 결합하라!”라는, 즉 당시에 가장 선호되는 밈을 모방하는 남성과의 결합을 선호하게 만들었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오늘날 최고의 모방자라는 최신 유행하는 옷, 음악취향, 종교적 견해나 정치적 견해, 교육수준의 외형적 특성과 밈을 많이 퍼뜨리는 생활을 하는 작가나 예술가, 기자, 아나운서, 영화배우, TV탤런트, 가수, 그리고 유명 정치인(권력자)을 여성들이 선호하는 것을 보면 일견 타당한 논리로 이해된다. 결국 사람들은 상대의 밈복사, 사용, 확산 능력을 기준으로 배우자를 선택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더구나 진화심리학과 같은 사회생물학으로서는 거의 해결하지 못하는 난제인 인간의 금욕주의 행동이나, 산아제한, 입양과 같은 현상도 밈이론으로는 명쾌한 가설과 설명을 낳는다. 출산율 저하의 문제를 대다수의 사회이론은 경제적 문제, 또는 낙태의 용이성, 도덕성의 쇠락이라고 해석하고 있지만, 보다 근원적인 요인은 여성의 높은 교육, 인쇄나 방송매체에 대한 접근성과 같이 여성의 소통 대상인의 증가로 인한, 다시말해 유전자보다는 밈에 시간을 많이 쏟는 여자들, 더 많이 모방되는 인물의 확산에 있다고 해석하고 있다. 나아가서 모방되고 복제될 가능성이 높은 것들, 사람들의 말이나 전달수단을 통해서 빈번하고 많이 오르내리는 성이나 권력, 음식을 보면 그러한 것들이 얼마나 강하게 살아남아 복제되고 확산되는지 이해 할 수 있게 된다.

다소 극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겠지만, 현대 인간의 섹스가 아이를 번식하기 위해 하는 행위라는 생물학적 인식으로 과연 해석이 가능한가하면, 사실 누구도 다음세대에 유전자를 많이 남기겠다는 의지로 섹스를 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아기를 만들려고 야한 잡지”를 사고, 야한 동영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섹스라는 행위 그 자체의 즐거움 때문이라 하는 것이 옳은 판단일 것이다. 즉 성은 이미 밈에 장악되어 있다는 것이며, 이처럼 유전자라는 복제자가 밈이라는 제2의 복제자에게 목이 메달려 끌려가고 있는 형국이란 얘기가 된다.
이 밖에도 밈이 복제와 확산을 위해 선택한 술수로‘이타성의 술수’나‘진실성의 술수’의 본성을 통해 복사의 충실도와 다산성, 그리고 긴 수명의 유지를 위한 책략은 도킨스가 말하는 이기적 유전자의 행동전략을 그대로 취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특히 밈이 이들 전략을 수행하기 위해 다음절(多音節)언어로 그리고 언어의 기호인 문자를 다듬고 나아가 종이위의 기호인 책으로, 라디오로, TV로, 컴퓨터 저장장치로, 또한 확산의 속도와 범위를 확대하기 위한 철도, 도로, 배, 항공기와 같은 이동수단은 물론 인터넷이라는 월드와이드웹으로의 이행은 복제자로서의 밈의 성질을 표현하고 있다 할 수 있다. 밈의 이러한 본성을 이처럼 규명하고 복제자로서 인식하는 실익은 인간을 이해하고 인간의 미래를 예측하는 더할 수 없이 효과적인 도구라는 점이다. 어떤 현상이나 물체가 선택되고 오래 살아남을 것인가는 복사의 충실도, 확산의 용이성과 양적범위, 내구성과 같은 수명이 곧 성공적인 밈을 판단하는 자명한 판단 기준이 될 것이다. 궁극적으로 이러한 복제자들의 경쟁은 더 나은 복사 체계의 발명을 촉진하고 더 획기적인 모방능력을 지닌 것으로의 진행을 압박할 것이다. 또한 유전자의 운반자인 용기로서의 인간 개체는 밈의 운반자라는 동일한 의미의 부여가 가능한데, 소위 자유의지라는 망상에 입각한 자아의 실존이란 상상의 존재를 저자는 자아복합체(일명 셀프플렉스)라는 밈들의 덩어리로 규정하듯이 몸과 뇌와 밈들로 구성된 인간 존재로서의 인간 개체의 이해는 더 이상 독립적 마음이라는 허상을 지우고 진정으로 자유로운 삶으로의 방향으로 구원해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사실 이정도로 인간의 정체성을 해체하고 나면 단지 유전자와 밈의 집합체에 불과하여 인간 존재 의의에 대한 허무성과 비록‘데니얼 데닛’의 표현처럼‘무해한 망상’일망정 자아의 상실로 두려움이 엄습하기도 한다. 제2의 복제자가 완전히 유전자를 압도하는 상황이란 밈(meme)이라는 모방전달자의 세상, 어쩌면 휴머노이드와 같은 로봇의 세상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인간이 스스로를 진정 존중한다면 저자의 역설적 말처럼 자기 복제에만 관심이 있는 이기적인 자아 복합체의 희생자이기를 그만두는 것일지도 모른다. 실체가 없는 기만적인‘자아’에 휘둘림으로써 오늘의 인간들, 인간사회의 살육과 전쟁과 탐욕이 그칠 줄 모르는 것이고, 더구나 배아세포로부터의 줄기세포를 추출하고 인간복제의 자기 파괴적 행위를 서슴지 않는 인간의 모습은 밈의 존재를 더욱 확실하게 하는 증거가 될 것이다. 인간의 진화와 현대 인간의 본성을 통찰하는 데 있어 밈이론은 분명 탁월한 통찰력을 제공하는 개념이다. 과연 제 2복제자로서의 밈이 인간규명의 훌륭한 이론으로 지지 받고, 진정한 학문으로서 정착할지는 두고 보아야 할 일이겠지만,‘수전 블랙모어’가 정의하고 그 가설의 가능성을 진일보시킨 저작이라는 의미에서 모방자의 진화론적 해석은 우리의 직관과 사고, 일상의 행위에 엄청난 파문을 일으키게 한다. 도킨스의 생물학적 진화의 걸작 『이기적 유전자』에 버금가는 인간의 문화적, 형이상학적 진화의 걸작으로 감히 이 저작은 손색이 없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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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 스웜 - 가장 단순한 방법으로 세상을 뒤바꾼 가장 영리한 집단
피터 밀러 지음, 이한음 옮김, 이인식 해제 / 김영사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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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집생활을 하는 사회성 높은 곤충이나, 새나 물고기와 같은 무리생활을 하는 동물들의 행동은 우리 사람들의 눈에 그저 신비스럽기 그지없을 때가 있다. 먹이가 있는 곳의 최단경로를 찾아내는 개미나, 최적의 거주지를 선택하고 판단하는 벌의 행동, 일시에 날아오르고 멋지게 V자 대형을 이루고 날아가는 새 떼의 우아하기까지 한 군무(群舞), 엄청난 높이로 정교하게 쌓아 올려 진 흰개미의 흙 탑 등은 그네들에게 무언가 인간을 능가하는 지성이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기대까지 갖게 한다.

사실 우리 사람의 직관이라는 선입견으로 보게 되면 그들의 일사불란한 행동은 마치 탁월한 지능을 갖춘 강력한 리더에 의해 정교하게 계획, 설계되고, 물샐 틈 없는 감시체계 속에 실행되는 것만 같다. 그러나 오랜 시간 관찰을 해보면 어떤 명령에 의해 움직일 수 없음을 이내 발견하게 되는데, 광활한 대지위에 않아있던 수천의 새들이 동시에 날아오르는 것은 특정한 누군가의 지시가 전달되어 그 전달이 1킬로미터 떨어진 동료에게 이르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또한 개미들이 먹이를 찾으러 군체(群體)를 떠나 특정 장소로 가는 경로를 누가 알려주는 것인가 하면 결코 알려주는 개체도 없으며, 지시자도 없다는 것을 이내 발견하게 된다. 아무도 알려주는 이나 지시자가 없음에도 어떻게 완벽한 시스템처럼 조직화되고 과업이 완성되는 것일까? 그리고 그 원리와 속성을 이해하는 것이 우리에게 어떠한 이득이 있는 것일까?

이와 같은 궁금증의 비밀을 알려주는 것만으로도 이미 이 저술은 매혹적이지만, 그 비밀이 발상의 전환은 물론 창의적 적용을 통해 우리 인간사회의 고민을 해결하는 지혜까지 선사하고 있어 지적쾌락에 더해 복잡계를 이루는 오늘의 사회를 이해케 하여 실용적 이익까지 거두게 하는 영리한 저작이라 할 수 있다.
개미의 먹이 찾기 이동경로에서 복잡해진 영업 네트워크 구축방법을 찾아내고, 꿀벌의 거주지 선택에서 집단지능과 지식의 다양성이 만들어내는 지혜를, 그리고 새떼의 군무에서 로봇지능의 알고리즘으로 발전케 하는 것처럼 발상을 자극하는 무궁무진한 원천적 지혜들을 발견하게 된다.

먹이가 있는 곳에 가려면 몇 갈래의 길이 있지만, 개미가 지나는 곳에는 페로몬이 남는다. 짧은 경로를 지나온 곳은 긴 경로로 간 개미의 밀도보다 시간적으로 빠르기 때문에 페로몬이 다른 경로보다 짙게 되고 그 짙은 페로몬은 개미들을 안내한다. 결국 점진적으로 개미들은 가장 짧은 경로로 모여든다는 것이다. 단지 개체의 본능적인 행동방식이 의미 있는 집단행동이 되는 것으로, 그저 개체 자신의 행동일 뿐이지만 집단으로서는 조직화된 행동이 되는 것과 같다. 여기서‘자기 조직화’가 창발하는 조직구성을 위한 방법론적 힌트를 획득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한편 새로운 거주지의 마련을 위해 벌들이 하는 선택의 과정은 흥분을 자아낼 정도이다. 몇 곳의 장소를 물색한 정찰벌들의 반복되는 춤을 보고 후보지를 지지하는 벌들의 비율이 적정수준에 이르기까지 검토와 지지자가 늘어남으로써 최상의 결과를 선택하는 벌 무리의 지혜는 소위 '대중의 지혜(wisdom crowds)'가 영리함을 능가하는 단적인 실례가 된다. 갈수록 거대해지는 기업조직에서 다수의 구성원들이 하는 언어에 귀를 기울이는 것만으로도 탁월한 예측이 될 수 있으며, 다수가 발하는 다양함이 영리함을 능가하는 선택을 할 수 있다는 예증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집단의 다양성을 “2+2”와 같이 단순한 과제에 적용하는 것은 어리석을 것이다. 게다가“거만한 지도자, 다양성이 부족한 구성원, 외부 정보의 경시”와 같은 불행한 특징들이 조직될 경우에는 오히려 커다란 실수를 저지르게 되기도 하며, 전체 시스템을 보지 못하고 개인의 국지적 부문에만 초점을 맞출 경우 시스템의 복잡성을 외면하여 재앙을 초래하기도 한다. 우호적인 경쟁, 지식의 다양성은 추구하여야하지만 환원적 편견이나 집단사고(groupthink)와 같은 우는 경계하여야 할 것이다.

이외에도 분산지능이 망(network)의 자기 치유적 기능을 위해 어떻게 효율적으로 발휘되며, ‘간접협동’이라는 독특한 영리함을 보이는 흰개미의 개체 수준의 단순한 규칙의 고수가 자기환경에 전략적이고 전술적인 대응책인가와,‘적응모방’이라는 서로 상호작용을 하라는 지극히 단순한 알고리즘이 그 멋진 새들의 집단비행을 만들어내는 것과 같은 실험과 연구사례의 설명은 정보공유 체계의 잇점, 로봇 지능개발 분야의 적용처럼 우리세계에 기발한 아이디어와 전략을 제공하기도 한다.
체커게임이나 스워머 노이드(swormer-noid)와 같이 개체의 단순한 행동의 경험 누적만으로 조직이나 집단의 의미있는 패턴을 구사하게 할 수 있다는 발상은 바로 이 저술이 통찰하고 지향하는 지성이라 할 수 있다.

이렇듯 긍정적인 시사도 있지만 메뚜기 떼와 같이 대규모로 인간의 작물에 손실을 끼치는 부정적 행동에서도 우린 지혜를 찾아낼 수 있다. 결코 군집 생활을 하지 않는 메뚜기가 어떻게 재앙을 일으키는 약탈적 무리로 변하는 것일까? 이유는 메뚜기의 근육질 뒷다리가 자극을 받았을 때 그들은 자신들의 개체가 지나친 밀도로 과밀상태임을 알리는 신호가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서로 잡아먹으려는 행동과 잡아먹히지 않으려는 행동의 촉발, 즉 생존을 위해서는 계속 움직여야 한다는 충동이 거대한 떼를 형성하여 인간에게 막대한 피해를 주는 약탈자가 되는 것인데, 단지 메뚜기 뒷다리의 사소하고 하찮은 자극이 엄청난 결과로 이어지는 자연시스템의 한 사례이다. 이와 같은 예가 사우디아라비아의 연례 성지순례일에 발생했는데, ‘자마라트’라는 세 기둥에 의식을 치루기 위해 수십만의 행렬이 일시에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앞 사람의 1분도 안 되는 지체가 대(大)행렬의 순간적인 정체로 수 백 명이 압사한 사건이다. 사건은 불규칙한 흐름의 패턴, 군중의 밀도에 대한 분석을 통해 시정되었는데, 이때 메뚜기의 행동연구는 훌륭한 모델이 된다. 또한 직접적으로는 메뚜기‘떼’로의 전환을 예방하는 방책으로 밀도의 역치수준을 알아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발견도 가능케 한다.

극도로 복잡해져만 가는 네트워크(網)사회라 할 수 있는 오늘의 현대사회는 이처럼 어디선가의 작은 문제가 사회전체를 마비시킬 수 있다. 시골길 어느 고압선에 나뭇가지의 작은 접촉이 대도시의 정전을 유발하고, 산업전체에 막대한 손실을 초래하기도 하며, 예기치 못한 대형 자연재해는 인간사회를 혼란에 빠뜨려 순간 사회기간망을 무용지물로 만들기도 한다. 너무 복잡해서 어디에서 문제가 발생했는지, 무슨 문제인지를 파악하는 것도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개미사회의 자기조직화나 분산지능, 자기 치유적 기능,  꿀벌의 지식 다양성에 대한 양(Positive)의 되먹임 행동, 단지 이웃과의 상호작용이라는 단순 알고리즘에서 우린 이들을 해결할 해법을 발견하게 된다. 하찮은 미물, 무심코 보여지는 새와 물고기의 움직임에서, 바로 생물의 진화라는 자연 시스템에서 상상치도 못했던 지혜를 보게 된다. 영업, 물류, 조직 등 비즈니스 문제를 비롯한 현대 사회의 난제들을 해결하는 해법이 명쾌하게 설명된 그야말로 탁월한 혁신 전략 총서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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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고베르토씨의 비밀노트 1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지음, 김현철 옮김 / 새물결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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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예술을 인식할 때에는 소위 칸트가 말하듯이 잠시 선악의 코드, 참과 거짓과 같은 윤리적 코드를 꺼두도록 습관화 되어있다는 얘기가 어느 정도는 맞을게다.‘뒤상’의 도발적인 <변기>와 같은 작품이 사실 일반 사무실에 있거나 용도 그대로 가정의 화장실에 있다면 그것이 무슨 예술작품일 수 있겠는가. 미술 전시장에 놓이고, 수식됨으로써 예술로 읽히도록 강요되는 것이 아닐까? 광기와 적나라함, 그리고 엽기적 몽상과 병적인 감각의 그림을 짧은 생애에 수없이 남긴‘에곤 실레’에 바치는 오마주 같은‘바르가스 요사’의 이 작품 역시 문학이라는 형식을 취함으로써 외설을 피하고 있다 할 수 있지 않을까싶다.

이 다분히 병적인 화가의 그림 한 점 한 점이 허구의 이야기에 실려, 소위 건강한 정신이라는 판에 박히고 빈곤한 상상력과 획일화된 것들을 전복하고 인간의 사고를 옥죄는 사상과 가치들의 허위를 마구 찔러대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금지된 상상력을 자극하고, 감추어진 것들을 파헤쳐 충족되지 못했던, 역설적이게도 병적이고 추잡함이라고 하는 것들을 드러냄으로써 비로소 풍요로운 인간의 정신세계를 완성하고자 하는 반란이 바로 여기서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소설은‘리고베르트’라는 환상과 편집광적인 남자의 비밀노트를 우리들이 훔쳐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데, 작중 인물들이 노골적으로 성애장면을 바라보고 있는가 하면, 마치 작품 전체가 관음증에 걸린 현대인을 배려(?)한 듯이 상상의 관능적 쾌락으로 안내되고 있다.

기원전 6세기 로마의 타키누스왕과 그의 아들에게 겁탈당하고 이를 고발한 후 자살한 여인인‘루크레시아’라는 정절과 정숙한 유부녀의 표상인 이름을 지닌 리고베르토의 아내, 그리고 의붓아들인‘폰치토’와 리고베르토, 이들 세 사람이 만들어내는 고통과 쾌락의 몽환적 세계가 펼쳐진다.[사진: Man Ray(만레이), La Prière, 1930]

“내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세계, 내게 기쁨과 고통을 안겨주는 세계는 ~(中略)~ 상상력과 욕망과 예술적인 기교로 탄생한 인물들이 존재하는 세계, 내가 수년 동안 끈기와 애정을 가지고 모아온 그림, 책, 판화에 담긴 세계”라는 리고베르토의 관점은 그대로 소설이 표현하는 세계이다. 이처럼 미신과 편집광적이며 환상으로 넘쳐나는 남편의 세계를 이해하고 공유하던 루크레시아의 생활은‘순수함의 결정체’처럼 보이지만“천사의 탈을 쓴 독사”와 다름없는 초등학생인 의붓아들 폰치토의 함정으로 파괴되고, 이혼 후 독립된 일상을 살아가지만, 다중 인격체 같은 아이의 거침없는 기만에 저항하지 못한다. 이렇게 소설은 리고베르토와 루크레시아, 그리고 폰치토와 루크레시아라는 두 개의 축으로 전개된다고 할 수 있는데, 폰치토와의 이야기는‘에곤 실레’의 그림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으며, 리고베르토와의 이야기는‘관능의 미학’이란 전체의 주제를 구성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루크레시아의 첫 연인이었던‘모데스토(일명 플루토)’와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일을 저질러보는 것, 세속적인 삶이 충동에 충실해지는 것”으로서의 뉴욕과 파리, 베네치아의 화려한 경로에서 보여주는 성희(性戱)가 보여줄 수 있는 상상의 모든 감각을 마비시킬 정도의 직설적인 묘사는 부도덕을 넘어서는 도덕적 상승의 최고의 경지라고 주장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더구나 이 성애(性愛)의 장면 모두는 루크레시아가 리고베르토의 요구에 의해 침실에서 들려주는 것이고, 그 들려지는 장면이 불러일으키는 관능의 쾌락은 성적 감각을 고조시키는 수단이 되고 있다. “욕망이 질투심을 밀어내는”경지, 과연 그것, 쾌락의 지고한 경지가 소위 최대행복을 추구하는 공리주의적 도덕의 최고라는 말이라면 일견 논리적이지만 우리의 감성이 수긍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확신이 서지 않는다.

춘화(春畵)가 연상되는‘우타마로’의 판화 두 점이 내려다보는 리고베르토와 루크레시아의 관능의 내음과 음색이 가득한 침실, 한결같이 치마를 걷어 올리고 이상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실레 그림에 집착하는 폰치토의 불경스럽기만 한 대화는 ‘만레이’의 사진,‘구스타프 쿠르베’의 음부를 드러낸 나신의 그림, 여인들의 향기를 그려보려고 시도했던‘클림트’의 <다나에>, 더구나‘아인란트’나 ‘로제 바이양’, 성의학자‘허벌록 엘리스’까지 인용되면서‘마조흐’의 『모피를 입은 비너스』부류의 변태적 성애를 일찌감치 넘어서버린다. 그런데 이 작품이 그리 단순치만은 않은 것은 종교에서부터, 페미니즘, 상류사회단체들의 위선과 모순, 기만성을 비롯해 보편성을 획득했다고 주장하는 주류적 사고를 처참할 정도로 조롱하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쾌락의 지고(至高)인 성희의 찬양은 바로 솔직하지 못한 인간과 인간사회에 대한 회의와 도덕성에 대한 수위 높은 비판의 다른 표상임을 이해 할 수 있게 된다. “우리는 과연 무슨 이유로 이 무료한 우주에서 비틀거리는 팽이처럼 맴돌고 있단 말인가!”이 성적 쾌락에 관한 백과전적인 관능적 기억과 환상의 노트가 누비고 다니는 실제와 허구의 상상력에 자극되고 마비되느라 시종 경직되었던 감각세포들이 고생 꽤나 하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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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이 2010-10-16 2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엄마 찬양'을 앞부분 몇장 정도 보았어요. 말씀하시는 내용이 서로 비슷하네요. 이게 연작인건가요?

필리아 2010-10-18 22:10   좋아요 0 | URL
연작은 아닌것 같구요, 작가가 에로티즘에 천착한 것 같습니다. 특히 회화를 통한 이야기 전개가 대다수의 작품에 공통적으로 보이네요...//새엄마~,리고베르토~,나쁜소녀~ 세 작품이 동일인물들로 구성되었다는 걸 보면 연작의 특성도 있는것 같구요...
 
피플 붓다
한승원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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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사는 것일까? 이 난해하고 고통스러운 질문에 대한 답이라 할까? “우리들이 살아가는 것은 그냥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세상을 살아갈 만한 가치가 있는 세상으로 창조해 가는 것”, 그래서 어떻게 사는 것이 바로 그러한 것인지를 엿보게 해주는 이 작품에서 깨달은 이의 자유롭고 거침없는 충만한 생명력으로 눈이 환히 열리고, 왠지 모를 가슴 뿌듯한 만족감이 휘감아 도는 감동에 젖어든다.

장학사와 교장이셨던 할아버지, 그러나 주변 이들의 시선에는 비천하기만 해 보이는‘염장이’로 죽은 이들을 씻기며 살아간다. 그리고 손자‘상호’는 베트남 어머니를 둔 절름발이 고3 소년으로 아이들로부터 끊임없는 괴롭힘을 당한다. 이렇게 보면 소설의 축을 구성하는 이 두 사람에게서 사랑과 희망, 삶의 가치와 같은 미덕을 발견 할 수 있기나 할까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빚에 쫓겨 도피한 부모를 대신해 소년 상호는 이렇게 할아버지와 단 둘의 생활을 이어간다.

할아버지의 고물자전거와 그 뒤에 항상 실려다니는 꽹가리, 기력을 잃고 아픈 독거 노인들을 찾아다니며 침과 뜸을 떠주기도 하고, 나무 그늘아래 노인들에게 소리를 들려주며, 손수 마련한 쑥물로 주검을 정성으로 씻기는‘우주의 청소부’, 할아버지 안교장은 미래가 확보되지 않는 모든 존재를 소멸시키는 시간의 잔인함을 이해한 자이다. 그래서 줄곧 하여왔던 교육계에서 졸업을 하자 다른 새로운 일, 즉 자신만의 미래 시간을 만들기 위해서 새로운 새내기로서 실천의 길을 걷는다.“나는 낙엽이다. 떨어져 내려 어린 나무들의 뿌리를 덮어주고 있다가 점차 썩어 거름이 되어”주는 길....
손자 상호에게 그런 염장이 할아버지는 짓궂은 아이들이 그를 조롱하고 비하하는 이유이며, 신체의 취약성과 피부색의 차이는 반복되는 괴롭힘의 대상이 되고, 이들로부터 빠져나갈 수 없는 무력감은 더욱 고통스럽게 한다.

소설은 이 두 사람의 삶을 매개하며, 또한 인생 덕목의 가치를 상징하는 억불 바위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데, 억불산 자락아래에 있는 그네들 집에서 바라보는 자비로운 성상의 얼굴을 한 바위의 성스러움과 의기는 이들에게 의지이자 꿈과 희망의 가르침이다. 만인을 구제한다는 억불(億佛 ; People Buddha), 억불을 닮고자 하는 소년에게 할아버지의 모습, 무언의 삶의 행위에서 억불과 닮은 할아버지를 발견한다. 한 때 부와 권력을 가진 뭇 남성들과의 편력이란 사람들의 몰이해로 외면당하는‘송미녀’라는 노파의 병든 몸에 뜸을 떠주며 방치되고 포기된 그녀에게 사랑을 통한 삶의 의미라는 연민을 선물하며, 제자들과 베풂의 덕으로 모인 돈은 헐벗은 사람들을 위해 소용하는 염장이의 삶은 억불의 모습 그대로이다.

이 작품이 더욱 매력적인 것은 소년 상호의 세상에 나가기 위한 홀로 섬의 과정에 스며든 이야기들, 그리고 할아버지 안교장의 우주의 시원, 생명력의 본질에 대한 거침없는 철학적 담론들이라 할 수 있다.
악동들의 해코지, 인생 진로의 선택, 빙충맞은 자신을 응원해주는 2년 후배인 누님같은 순영과의 풋풋하고 순박한 사랑으로 설레는 모습이나, 억불바위를 오름으로서 의지와 삶의 목표를 확인하고 마침내 괴롭히던 녀석과 맞장을 뜸으로써 유약한 소년시절을 졸업하고 새로운 인생의 길로 나아가는 일련의 성장기는 손자의 우물 속으로 자신의 시간을 흘려보내는 할아버지의 보이지 않는 후원의 손길과 결합하여 인간의 성장에 대한 우리네의 관점을 한층 성숙시켜 준다. 
 

더구나 우주 성장의 시원(始原)으로서 여인의 배꼽이 의미하는 원초적 유혹과 인간성의 유지에 있어서 성적 쾌미의 가치, 산난초 꽃의 적갈색의 음험한 향기를 머금고 있었다던 연꽃, 혹은 환혹의 구멍, 그 젊은 날의 송미녀의 허방 노릇에 대한 찬양은 여신(女神), 아니 숭고한 억불의 경지에까지 올려놓는다. 하~아, 미녀의 허방은 억불의 자비라! 그리곤 염장이라는 죽음을 씻는 이의 허무의 마주함은 생명력을 더 자유롭고 헌걸차게 키워나가는 것으로서, 죽음의 이해가 곧 성숙한 삶의 요소임을 역설하기도 한다.

이처럼 염장이 할아버지의 모습은 억불의 현신(現身)이며, ‘나다니엘 호손’의 『큰 바위 얼굴』이자,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의 모습으로 읽히기도 한다. 또한‘알베르 카뮈’『페스트(흑사병)』의 주인공 의사‘리외’처럼 각박하고 쓸쓸한 세상을 치유하는 사랑과 희망, 자유의 화신(化身)이기도 하다.

한편, 자신의 성장을 확인키 위해 상호가 떠나는 다산 초당에서 백련사로 이어지는 무전여행의 여정에서 백련사 방장스님과의 조우 장면은‘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중 장돌뱅이 허생원과 동이의 오마주가 아닐까 하는 재미를 주는데,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였었다는“그 늙은 스님의 갸름한 얼굴 윤곽, 쌍꺼풀 진 눈매,...”, “혹시 그 스님이 내 외할머니를 버린 그 한국군인 아니었을까”하며 ‘사랑과 배반의 슬프면서도 오묘한 역사’를 떠올리는 것은 이 소설의 사유가 달리는 그 폭과 깊이의 여정을 대변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한승원 선생의 그 어떤 작품보다 관능적이지만 또한 그 어느 작품보다 숭엄함과 경외를 느끼게 한다. 모든 사람들이 가는 길은 결국 한 길이며, 한사코 느긋하게 무늬를 따라 순조롭게 풀어내야 하는 것이 삶의 순리이며, 줄곧 하던 일을 졸업하면 반드시 새내기가 되어야 한다는, 정말 “찬란한 슬픔의 봄”같으며, “고귀한 순정의 눈물 같은” 인생교본의 결정체라 하여야 할 것이다. 오묘하게 가슴을 저리게 하는 감동이 있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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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수아비춤
조정래 지음 / 문학의문학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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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고는 폭로적이고 저열한 이야기의 재미로 낄낄대는 부류가 있고, 불쾌감이나 분노를 서로 다른 의미에서 느끼는 부류도 있을 것이다. 또한, 화끈거리는 자괴감으로 경제정의와 민주주의의 실천에 대해 깨달음이 있는 부류도 있을 터이다. 그러나 사실 도덕불감증에 걸린 물신주의의 이 사회에서 작가가 기대하는 야만의 역설을 이해하는 층이 얼마나 될지 조바심이 들뿐 아니라, 아마 재벌과 사회권력층의 비리를 훔쳐보는 관음증적 쾌락에 머물러 버리지나 않을까 하는 우려도 지워버릴 수 없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신자유주의 질서에 포획된 작금의 우리사회는 경제권력을 배제하고서는 정치를 말 할 수 없는 세계이며, 실제 시장경제만능의 자유주의와 경쟁논리의 기반위에 오늘의 정치가 놓여있다 해도 그른 말이 아니다. 다만, 작가는 정치민주주의가 어느 정도 궤도에 올라섰으니 이제 더 이상 경제민주주의의 실현을 뒤로 미룰 수 없다는 관점에서 펜을 들었음을 선언하고, 경제의 민주주의, 즉 경제정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사회의 야만성을 생살 그대로 드러내 보여, 그 적나라한 야만의 역설 속에서 진실을 캐내기를 기대하고 있는 것 같다.

소설의 중심 사건은 재벌그룹의 탈법과 불법 하에 자행되는 재산상속을 통한 그룹승계, 자산축적으로, 이를 위한 막대한 비자금의 조성, 정계, 관계, 법조계는 물론 언론, 대학까지에 이르는 전방위적 물적 로비의 추악한 양태이다. 그리곤 탐욕을 지켜내기 위해 벌이는 재벌과 그 충견들의 썩은 내 나는 활약상이 천박한 이야기로 화려하게 장식되고 있다. 작중(作中) 재계 1위의 태봉그룹 임원인 1급 로비스트‘박재우’라는 인물을 경쟁그룹인 일광그룹에서 비밀리에 스카웃하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정관계 등 전방위 로비에서 실기(失機)하는 탓에 일광의 총수가 형사처벌을 피하지 못했다는 판단에서 대대적인 로비관리조직을 구축하는 것인데, 여기에는 소위‘돈 싫다는 놈’없더라는 물신주의 최고의 신념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높은 자리에 있는 자(者)일수록 뇌물의 경로를 중시하는데 이를 위해 탈 없이 주고받을 수 있는 공직사회의 핵심인물들을 조직에 흡수하는 것이고, 또한 민형사상의 법적 문제를 틀어막기 위해서 검사를 거액으로 스카웃하고, 대학은 사회의 이해관계가 없어 적대적 행위를 할 수 있기에 기부를 통해 행동을 틀어쥐는 행태로 이어진다. 결국 돈 앞에서는 진실과 거짓도 없으며, 선악의 구분도 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탈(脫)도덕, 아니 무(無)도덕이라는 자본권력의 실체, 천박한 이 땅의 자본주의의 본 모습이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수 천명에 이르는 핵심 로비대상 망을 완성하고, 회장의 직할부대인‘문화개척센터’핵심측근 3인이 회장으로부터 각기 수고의 보상으로 30억원에서 50억원의 특별스톡옵션을 건네받는 장면은 그야말로 노동의 과실이 자본가의 약탈적 잉여로 전환되는 전형적인 자본주의의 내적 모순을 보여준다. 오직 이기적인 탐욕만이 존재할 뿐 그 어떠한 윤리적, 규범적 논리도 들어설 여지가 없다. 작가는 이들 자본가 충견들의 입을 통해 돈에 환장하는 인간들의 심리상태를 마음껏 조롱한다. 제아무리 도덕군자같은 얼굴하고 있더라도 그 뒤에는 여지없이 천박한 탐욕이 똬리를 틀고 있는 것 아니냐고 말이다.

소설의 절정은 불법 재산상속과 그룹승계를 완료하였을 때 불거진 일광의 탈법행위에 대한 시민단체와 소수 지식인의 비판인데, 1조원에 이르는 비자금으로 도배질을 당한 정관계와 법조계가 비호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귀결이고, 신문지상에 비판의 글을 게재한 대학교수는 재임용에서 탈락하거나, 정의의 심판을 요구하는 검사는 조직에서 버려지는 기이한 현실이 정당화되는 파렴치한 이 사회가 조명되고 있다.
재벌들에 대한 법의 판결문에 항상 등장하는‘국가경제와 사회발전에 이바지한 공로’라는 터무니없는 구절처럼 사실 웃기는 말도 없을 것이다. 이건 한국사회에 만 있는 아주 독특한 법 윤리인데, 수조원의 불법, 편법, 탈법적 비자금의 축적과 재산상속이 처벌되지 않고 유야무야, 흐지부지 처리되고, 곧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지는 것이다.

노예처럼 일해서 가족의 생계를 꾸려나가는 대다수 근로자의 고혈인 노동의 과실이 정당한 분배에 소용되지 않고 재벌과 그의 충견들, 부도덕하고 부패한 공직자와 권력자의 자본축적으로 전환되는 것은 아마 자본주의가 무엇인지 모르는 이들도 정의와는 한참이나 이격되었음을 인지할 것이다. 그러나 허연 탐욕의 침을 질질 흘려대는 충견들이 말하듯이 약간의 물질에 영혼을 파는 오늘의 상품화된 인간들은 자신들이 바로 노예임을 결코 알 지 못한다는 지적은 적확하고 또 명백한 진실이라 할 수 있다.
이는“소비의 양식이 일상생활에서 계급의식을 결정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피에르 부르디외’지적처럼,‘아파트, 자동차, 적당한 교외의 휴식과 여행’을 확보하자 마치 자신이 스스로를 피지배자로 인식하기보다는 문화적 혜택을 누리는 계급으로 오인하고 있음을 자각하지 못하는 대중의 우매함을 깔깔대며 비웃는 것이기도 하다.
 

더구나 국민총생산, 대외교역규모가 증가했다고 국가경제 발전이 이루어진 것처럼 떠들어대지만 이 논리가 얼마나 기만적인지는 민중이 느끼는 삶의 질은 갈수록 하락하고 있음이 증명하고 있다. 노동잉여가 근로자에게 흘러가지 않고 소수의 자본가에게 탈법적으로 누적되는 시스템에서는 제아무리 국가경제가 신장하더라도 시민의 삶은 결코 나아지지 않을 것이다. 소설은 이러한 부정과 부패를 억제하고 투명한 경제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해서 시민단체의 역할과 시민의 적극적 참여를 역설하고 있다. 기업의 투명한 경영체계와 정당한 자원배분시스템, 공직사회의 윤리와 기강, 언론 및 대학 등 사회발언의 지배적 권력 등의 오,남용, 왜곡에 대한 시민의 감시체계가 역동적으로 작동하는 것은 진정한 민주사회로의 성숙을 위한 필수적 수단이라고 말이다.

사회 환원과 분배, 그리고 사회정의라는 이야기만 나오면 펄쩍 뛰는 이 땅의 천민자본주의의 체질이 그네들 스스로 변화할 가능성은 손톱만큼도 없다할 수 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천문학적인 비자금이 모아지고 사금고에 차명계좌에 부동산에 해외자산에 은폐되어 축적되고 있을 것이다. 또한 이를 비호하는 도덕이 실종된 공직사회의 네트워크 역시 여전히 작동하고 있을 것이다. 게다가 자신들의 계급을 인식하지 못하는 대다수의 대중들은 자발적인 복종과 거수기의 노릇으로 알량한 생계를 이어가며 불의를 옹호하고, 자신을 해치는 시스템을 위해 싸운다. 낯부끄러운 자괴감과 이기주의적 부패자본사회로 변해만 가는 이 사회의 거짓과 악함 그리고 도덕적 불쾌감의 실체를 그네들의 무식하고 파렴치한 언어로 생생하게 그려낸 수작이다. 적나라한 패담(悖談)까지 무릅쓰며 세상에 드러내야 했던 진실의 언어에서 노 작가의 안타까움과 괴로움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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