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에서 여름, 이윽고 겨울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45
우타노 쇼고 지음, 권남희 옮김 / 비채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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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에서 느껴지는 계절의 모호한 경계, 그리곤 궁극에는 다가올 수밖에 없는 을씨년스러움과 왠지 모를 쓸쓸함이 잔득 묻어 있는 소설이다. 쇄락과 죽음, 돌이킬 수 없는 안타까움 같은 것이랄까? 대형 슈퍼마켓 지점의 보안부장인 오십대 남성‘히라타’, 그의 앞에는 빵과 우유를 절도한 초췌한 여성이 앉아있다. 그녀의 신분증에 기재된 1985년 출생의 기록은 회사의 재산을 지키는 엄격함을 남자로부터 지워버린다. “두 번 다시 이러면 안 돼”, “돌아가도 좋아”

 

남자의 일상적 행동에 일탈이 생긴 것은 곧 사건이랄 수 있을 것이다. 삶을 지탱하는 소중한 기억, 혹은 감히 심연에서 퍼 올릴 엄두를 못 내던 고통의 기억이 건드려졌기 때문일 것이다. 여자는 남자에게 고마움을 전하기 위해 접근하고, 남자는 여자의 추레하고 헐벗은 차림새와 뻔히 읽히는 내면의 진부함으로 외면하지만 교차하는 동정과 연민의 감정까지 피하지 못한다. 겨울날씨에 맨발의 샌들, 닳아 얄팍해진 겉옷은 생활고로 고통 받는 여자임을 감추지 못한다. 다만 그녀의 생일이 1985년 10월 5일이라는 사실이 뺑소니사고로 사망한 딸에 대한 애틋함과 보고 싶은 간절함과 동일한 의미를 부여하게 한다.

 

소설은 시점을 바꿔 7년 전 딸아이의 뺑소니 교통사고에 의한 사망과 아비로서의 통렬한 애처로움의 기억을 더듬고, 딸의 죽음이란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아내의 고통스런 자살의 기억을 술회한다. 외려 피해자인 죽은 딸아이의 부주의만을 열거하며 자신들의 무능력을 회피하는 경찰들에 대한 분노까지, 자식을 상실한 부모의 쓰라리고 아픈 통한(痛恨)이 혼자가 된 남자의 내면을 흐른다. 대기업 임원승진의 유력한 후보자였지만 중앙의 격렬한 경쟁 지대에서 벗어나 지방의 지사로 내려와 억울하게 희생된 딸과 아내의 원통한 응어리를 간직한 채 시간을 지탱하는 고독한 남자, 그가 자신의 딸과 동갑내기인 여자에게 선의를 베푸는 것은 일종의 보상심리였을 것이다.

 

작가의 역량이 돋보이는 것은 이렇게 가족을 잃고, 세상을 외롭게 허우적대는 남자와 또 다른 상처를 지닌 여자와의 조우와 같은 흔하고 낡은 패턴의 이야기가 너절하게 들리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폭력배에 불과한 남자와 동거하며 급기야는 진심의 도움을 베풀었던 남자를 간통으로 협박하기에 이르는 여자와 같이 진부함의 끝이 보이지만, 이에 반응하는 중년 남자의 허를 찌르는 태도와 그의 육체적 반전은 이를 완전히 쇄신해 버리는 것이다.

보안부장의 직위를 이용하여 여성 절도범에 성적 요구를 협박했다는 모함과 위협은 가족을 잃은 고독한 중년 남자의 이성을 허물어버릴 만큼의 강박이 되지 못한다. 더구나 그 남자가 시한부의 삶을 살고 있다고 한다면 아마 어불성설일 것이다.

 

물론 이러한 구성이 소설적 우연을 남용하여 이야기의 진정성이나 재미를 반감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전혀 미스터리하지 않았던 소설의 흐름이 이로 인해 내용의 깊이를 더하게 된다면 그것은 또 다른 의미에서의 작가적 역량이라 하여도 무방하리라. 여자가 잊고 간 듯한 휴대전화와 손가방! 이 우연찮은 물건이 진실과 거짓의 경계를 넘나들게 한다. 딸아이 사망의 진실? 뺑소니 운전자의 발견? 남자를 10년 남짓에 이르는 고통의 시간에서 풀려나게 하는 해결이 될까?

 

누군가가 궁지에 빠진 나를 진심으로 구원하려 한다면, 그리고 그 구원의 의지에 고결한 아픔이 있는 것이라면, 그 구원자의 아픔을 위해 나는 어떤 보답을 할 수 있을까? 그가 안은 아픔과 슬픔이 자신의 죽음을 방치할 정도로 고통스러운 것이라면 그가 죽기 전에 그 고통에서 해방되도록 도울 수 있을까? 그것이 나의 죽음을 요구하는 것일지라도? 그래서 여자의 실수 같은 실수는 진실 같은 진실이 되고, 거짓 같은 새하얀 거짓이 된다. 자신들의 생명으로 하는 보시(布施), 영영 진실을 모르기에 구원되는 이 아이러니, 삶이란 본디 이렇게 부조리한 것일 게다. 정말의 사랑, 죽음의 희생을 통해 구원되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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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없는 독 미야베 월드 (현대물)
미야베 미유키 지음, 권일영 옮김 / 북스피어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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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毒)이란 사전적 의미처럼 건강이나 생명에 해를 끼치는‘성분’이다. 이것은 어떤 도덕적 기준이나 양심의 개입을 허용하는 개념이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독은 ‘인간의 도덕률에 어긋나는 나쁨’이라는 악(惡)과 구별되지만, 그럼에도 사람에게 해를 끼친다는 본성을 가진 것임에는 분명하다. 즉 독 자체가 의지를 가진 것이 아니지만 이것이 무엇인가에 의해 표출되면 악과의 분별은 무의미해 진다. 독은 이처럼 표출되기 전까지는 알 수 없는 모호한 것이고, 소설의 제목처럼‘이름’을 가질 수 ‘없는’것일 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독이 어디에 있는 것이고, 그것이 어떻게 사람들의 사회에 작동되고 있는가는 항상 주의를 요구한다. 소설은 직설적으로 무차별연쇄독살 사건으로 독의 물질적 실체를 드러내지만 사실 의지가 없는 독으로서, 이 형상은 결과이지 본질이 아니다. 성분에 불과한 독이란 사람의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닐 뿐 아니라 만져지지도 않는다. 무엇인가가 품고 있는 것이다. 아마 이러한 독성을 가장 많이 지니고 있는 것, 또한 이것을 가장 많이 뿌리는 것이 사람이 아닐까? 하는 의문은 정당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존재는 바로 사람이라는 생각 말이다.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추리소설에 지나치게 무거운 접근이 되어버렸지만, 이 작품은 바로 이러한 사람들이 발산하는 독성에 대한 탐색이기 때문이다. 산책 중의 한 노인이 편의점에서 산 우롱차를 마시고 돌연사 한다. 불특정인을 대상으로 하는 무차별적인 독극물 주입에 의한 네 번째 희생자가 된 것이다. 청산가리라는 독은 누군가라는 사람의 의도에 의해 정말의 독이 되었다. 사람의 행동이 수반된다. 한편으로 이마다 콘체른이란 대기업 사내보 편집실의 26세 아르바이트 여성의 극단적인 자기애는 타인에 대한 폭력행위로 나타나고, 직장 동료들을 지속적으로 가해한다. 이 병적인 여성의 행동은 오직 타인을 고통스럽게 함으로써 자기 위안이란 보상으로 대체하는 것인데, 그녀가 퍼뜨리는 성분은 분명 남을 해친다는 측면에서 독이다.

 

여기에 독은 산업사회가 무책임하게 저질러댄 오염물질로서도 그 모습을 나타낸다. 특히 새집증후군이나 오염된 토지에 건설된 주택으로 인한 각종 질병은 바로 사람들의 욕망이 만들어 낸 찌꺼기로서의 독이다. 한국사회로 말하자면 개발열풍으로 토양에 대한 성분 조사도 없이 준공업지나 공업지에 마구 지어진 주택단지가 그 희생물일 것이다. 원인도 모를 천식과 피부질환 등등, 사람을 해치는 독을 뿌려대는 바로 그 사람들의 무책임한 의식이야말로 독이라는 것이다. 소설은 또 추가한다. 학교에서 저질러지는 집단 따돌림(이지메)에 희생되는 아이들의 돌이킬 수 없는 정신적 외상(外傷)을. 사람들이 뿜어내는 독성들이 너무도 많아서 그것들에 일일이 이름을 붙여줄 수 없을 정도이다. 결국 인간이 독 그 자체가 아닐까하는 소설 속 인물의 독백은 의문이 아니라 단정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야기의 구조는 독극물 연쇄살인사건을 중심으로 보통의 사람들이 겪는 일상의 에피소드들이 결합하면서 거대한 독의 그물망으로 촘촘히 채워진 세상의 현실을 해부하는 모양을 가지고 있다. 이‘독의 네트워크’의 현실을 엮는 이는 대기업의 사내보 편집실 직원인‘스기무라’라는 삼십대 후반의 남성이고, 더구나 회장의 사위라는 신분으로 대상없는 살인을 저지르는 청년의 궁박한 삶이나, 자기 욕망 달성의 한계에 분노를 일으키는 여성과 대비되어 간접적이고 넌지시 부조리한 오늘의 삶의 형상을 조명하게 한다.

 

이렇듯 일면 무거운 사회 비평적 시각을 주제로 하고 있긴 하지만, 이 소설의 재미에 압도당하는 이유는 희생자의 손녀인 여고생 미치카와 회장의 딸인 스기무라의 아내인 나호코, 그네들의 딸 모모코등이 어우러져 발산하는 연민과 가족애와 같은 따뜻한 온기 때문이고, 사내보 편집실의 여성 편집장인 소노다를 비롯한 직원들의 수식되지 않은 인간미일 것이다. 여기에 더해 세상물정에 어두울 것만 같은 어수룩한 인물인 사내보 편집직원인 스기무라의 탐정 아닌 탐정으로서의 역할 수행이 어떤 작위도 없이 사건의 중심으로 접근하게 되는 자연스런 이야기의 전개가 큰 몫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소설은 엄청난 감정의 기복이나 자극을 요구하지 않으면서 우리 현대인들의 도덕적 무관심을 질타하고 있다.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타인의 감성을, 건강을, 생명을 해치는 것은 아닌지, 독성을 간직한 우리 사람들은 스스로 경계해야 하지 않을까? 나의 부(富)가, 나의 지위가, 나의 직업이, 나의 태도와 행동, 그 자체만으로도 독성이 발산될 수 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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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꽃, 눈물밥 - 그림으로 아프고 그림으로 피어난 화가 김동유의 지독한 그리기
김동유 지음, 김선희 엮음 / 비채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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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이 책은 낯설고 거북한 무엇이었다. 한국의 미술은 근대성에 이르기위해 대중을 외면하고 자신들만의 이상적 세계로 가버렸다는 것이 내 관점이었기 때문이며, 포스트모던 또한 미술가들의 자기만족적 예술관의 추구라는 점에서 이와 다르지 않다는 것이 나를 지배하는 인식이었다. 예술이 동시대의 삶을 말하지 않고, 더구나 보이지 않거나 외면당하는 삶의 형태들을 대중에게 인식케 함으로써 삶을 사유하는 방식을 고민하고 더 이상 말하려 하지 않은 채 자기들만의 리그에 빠져 젠체하는 허위의식이 가소로웠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러한 선입견은 이 책에 시선을 맞추는 데 망설임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지독한 그리기”, 그리고 “나의 그리기를 처음으로 세상에 내놓는다.”라는 저자의 고뇌가 느껴지는 집념과 수줍은 듯한 고백의 언어가 숱하게 쏟아져 나오는 조잡한 인문학적 식견을 첨삭한 미술작품의 독해 따위나 화단이 축조한 경계 내에서 편협한 위세를 말하는 것이 아님을 분별하게 되었다. 특히 천박하고 탐욕스런 기득권 유지를 위해 자기들만의 아성을 쌓아 배척하는 자들의 얘기가 아님을 뒤늦게 알아차리곤 외려 호감과 동지적 이해를 갖게 되었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라 하겠다.

 

또한 지면의 모든 글들에 드러나는 진솔한 작가의 면모는 불신과 가면의 장벽을 완벽하게 거둬들이게 한다. 그래서 같은 시대를 살아가며 마주하게 되는 닮은꼴의 고민과 갈등, 망설임과 외로움의 면면들과 이를 이겨나가는 슬기와 희망의 원천에 더욱 공감하게 된다. 아마 한국 사회처럼 모든 분야에서 왜곡과 아집으로 뭉쳐진 기득권 집단과 같은 배타적인 곳은 없을 것이다. 이 폐쇄적인 그룹이 해당 분야의 주된 흐름을 좌우하다보니 다양성이 도태되는 것은 자명한 이치다. 그러하다보니 정작의 예술가는 기회조차 갖기가 힘겹고, 어렵사리 자신의 예술세계를 지탱하는 것은 생존의 위협을 망각해야 가능한 지경이다. 결국 진짜배기는 도태되고, 남의 흉내만 내는 아류들, 엉터리인 가짜들이 주류입네하고 설쳐댄다. 이러한 토양에서 자신의 예술 세계를 일궈내고, 세계의 화단이 인정하는 화가가 된다는 것은 굳이 그 사람의 행로를 추적치 않아도 그 고통의 시간이 어느 정도일지 가늠할 수 있다.

 

활동무대가 그 흔한 파리나 뉴욕은 물론, 서울도 아닌 지방 소도시인 공주를 터전으로 삼은 지역화가, 더구나 지방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한 가난뱅이 화가, 회화의 소재 또한 키치적이고, 한물간 대중적 과거의 조야한 사물이나 그려대는 화가는 한국적 토양에서 당연히 배척된다. 그러함에도 그는 자기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가장 잘 할 수 있는 사람인지 아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것이 그림을 그리는 것이고, 결코 그리지 않고서는 삶의 지속에 의미를 부여할 수 없는 사람임을 처절할 정도로 인식하는 것이다. 이 처절함의 기억들이 많은 지면에서 펄떡인다. 가난으로 병을 얻은 아내와 어린 딸을 안고 시골의 축사를 거처로 삼아야 했던 화가로서의 좌절과 번민, 어려운 가계의 큰 아들임에도 아버지의 기대를 저버리고 미대에 진학함으로써 부자의 정을 단절했던 야속하기만 했던 기억, 빈정거림과 조롱이 밴 화단의 시선들, 가장으로서 생계를 위해 택시회사에 달려갔다 퇴짜를 맞고 돌아서야 했던 인생의 변곡점이었던 순간의 고뇌들이 자신만의 삶의 길을 가는 것이 진정 무엇인지, 무엇을 이겨내야 하는 것인지를 목격하게 한다.

 

이처럼 집념을 잃지 않고 자기만의 삶의 길을 위해 거친 지난한 곡절들이 결국은 어떤 것을 우리 사람들에게 선사하는지를 공감케 하기도 하지만, 화가‘김동유’로부터 예술이란 무엇이며, 예술인이란 어떠한 태도여야 하는지에 대해 함께 느끼고 생각게 되는 것은 이 책의 또 하나의 미덕이다.

해외의 트렌드를 추종하며 모방하기에 급급한 기능자들, 그래서 자기 것을 지니지 못하는 한국 주류의 일천한 의식, 게다가 예술의 본질적 의미에 대해서는 고민조차 없이 지적 허영과 탐욕만 가득 담겨 시대의 삶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하지 못하는 미술이 지역의 이름 없는 화가, 아니 정말 예술을 삶으로 살아낸 화가만이 뛰어 넘을 수 있음을, 그 가능성의 실현을 보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읽기가 된다.

 

남들의 성공에 기생하며 살아가는 예술가들이 얼마나 흔하디흔한가! 진짜배기 자신의 영토를 만드는 화가는 또 얼마나 생존하기 힘든 풍토인가 말이다. 포스트모던의 성공이 확실해지면 너도 나도 포스트모더니스트가 되어 그 익숙함의 이득을 착취하며 살아가는 어중이떠중이 화가들이 주류를 이끈다. 그러니 일류의 아류에 불과한 이들이 세계의 미술품 시장에서 눈길조차 받지 못하는 것은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예술이란 낯설게 하기, 비로소 보이게 하기, 새롭게 하기가 아닌가? 그래서 우리들의 삶이 새로이 해석되고, 막혔던 문제를 해결하는 사유의 확장을 가져다주는 것이어야 하지 않는가? 아무런 인맥도 없던 화가의 작품을 알아보고 그가 고집스럽게 지탱하던 그림의 세계가 바로 예술이라고, 길을 마련해준 갤러리의 대표까지 사랑스러워 진다.

 

‘이중 이미지’라는 그만의 화풍으로 세계 화단의 주목을 받게 된, 화가 김동유의 삶, 그의 예술의 세계가 더욱 든든한 지지를 받게 되기를 기대하게 된다. 또한 고단한 삶의 시련, 그 시간들이 그림에 녹아 우리 대중의 삶을 대변하고, 생각을 더욱 키워내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라게 된다. 그림에 삶의 희망이 있고, 가능성의 실현이 있는 그러한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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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경고 - 현대인들의 부영양화된 삶을 꼬집어주는 책
엘리자베스 파렐리 지음, 박여진 옮김 / 베이직북스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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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어느 시대보다 극성을 부리는 단어, 매일 같이‘행복’을 말하는 책들이 제목을 달리하며 출간되어 서점 진열대를 장식하고 있다. 모두 행복하다면 굳이 행복을 말하지 않을 것이다. 인류 역사이래 가장 물질적 풍요와 편의를 누리는 시대에 냉랭하고 굳은 얼굴을 하고는 불행하다고 말하는 오늘의 우리들 모습은 실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사람들이 그토록 쫓는 행복이란 무엇인가? 사람들이 행복이라고 하는 것에는 보편적인 어떤 개념의 합의가 있을 것이다. 언제 행복하다고 느끼고, 무엇으로 인해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기쁨? 성취감? 순간적 쾌락? 아니면, 내면적 평온상태와 긴장된 정신에서의 해방인가?

 

만일 이 모두가 옳다면 우린 행복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럼에도 현대의 우리들은 행복해 할 줄 모른다. 바로 여기에 우리들의 자화상이 있다. 우리들에게 습관화된 인지적 오류, 무언가에 대해 기뻐하고 만족하면 행복할 것이라는 명백히 잘못된 논리적 거짓으로 자신들을 기만하고 있다는 저자의 지적이 그것이다. 만족감은 더 많이 성취하고 있지만 욕망 그 자체는 시들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 우리들의 행태가 이것을 입증한다. 끊임없이 만족하려는 이 만족에 대한 강박증이 행복 중독증에 몰입하게 하는 것이다. 가히 탐욕스러움 그 자체가 아닌가? 제아무리 가지고 성취해도 제어되지 않는 욕망의 고리 말이다. 그래서 더욱 나는‘행복’을 집요하게 추구하려는 이 사회의 언어가 혐오스럽고 그런 사람들에게서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욕망 자체가 추하다거나 도덕적으로 나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욕망이 없다면, 즉 무언가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의 역사는 이미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욕망하지 않는 것은 곧 소멸이고 죽음이자 무(無)의 상태 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들은 저자의 지적처럼 잘못된 논리적 연결에 의해 만족과 행복을 등식화함으로써 욕망의 제동장치를 잃어버렸다. 그래서 지나치게 많은 것에 습관처럼 익숙해진 우리는 아무리 충족해도 항상 빈약함에 허우적거리고, 행복하지 않다고 푸념한다. 결국 지나친 것, 과잉의 추구가 우리들을 우울하게 하고, 행복 중독증으로 몰아대는 것이다. 물질의 과잉, 자유의 과잉, 쾌락의 과잉, 권력의 과잉, 정치의 과잉, 투명함의 과잉...모두 넘치는 과도함의 추구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과잉의 욕망이 우리들을 습관화시킨 근인은 무엇일까? 직관과 작용을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는 착각, 이를테면 과시적 욕구에 기인하는 허위와 겉치레, 편견과 같은 것들이기도 하며, “뭔가 좋은 것이라면 많을수록 좋을 거야”와 같은 게걸스런 원시적 욕망 같은 것이다. 여기에 저자는 민주적 평등성의 이상, 합리성, 명료성, 객관성, 명백한 실용성과 같은 모더니즘의 분석적이고 분리적인 이성관의 구상성, 그리고 사랑이라는 감성의 제거와 포스트모더니즘의 아름다움의 해체와 상대주의적 관념이 몰고 온 몰개념화가 빚어낸 개인주의와 나르시시즘을 더한다.

 

이와같은 과잉 추구에 대한 저자 ‘엘리자베스 파렐리’의 설명은“자기중심적, 질투, 시기, 자기도취, 타인과의 공감결여, 속임수 등으로 자기를 확장하려는 나르시시즘”에 빠져있는 오늘의 사회, 주체성을 상실하고 타자의 욕망을 획득하는데 전전긍긍하는 우리들이라고‘베블런’이 쓴『유한 계급론』의 압축적인 문장을 떠 올리게 한다. 이는 달리 말하면 신분, 계층 상승의 무형적 가치, 즉 위신재(prestige goods)를 생산하려는 멈추지 못하는 중산층의 과시적 행동의 모순적 쳇바퀴의 지적이라 할 수 있다. 결국 네 대를 주차할 수 있는 주차장, 수영장, 많은 방과 드넓은 거실을 자랑하는 교외의 맥 맨션처럼 미적 얼굴을 상실한 추한 건물들과 도시의 확장을 부추겨 자연을 침해하는 부자들의 행동처럼 더 많이, 더 큰 것을 소유하려는 욕망에서 이미 필요의 범주와는 아무런 인과관계를 발견 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한편, 『행복의 경고(The danger of happiness)』라는 이 책의 차별점은 이처럼 부영양화 된 현대인의 삶에 대한 단순한 반성적 제안의 경계를 넘어서 현대적 욕망들이 구현된 양태들에서 욕망의 속성들을 인문학적으로 고찰하고 마침내 범지구적 생태계의 미래 전망을 제시하는데 있다고 할 수 있다.

사실 물질적인 것에 가치를 두는 물질주의가 자의식의 취약함이나 타인의 존경에 지나치게 가치를 두려는 경향이며 전형적인 자기애의 특성이라는 진술이 새로운 해석은 아니지만 상실에 대한 두려움의 방어로서 물질의 소유에 매달리는 현대인들의 과잉욕망에 대한 행동을 이해하는 데 유용한 것처럼, 근대성, 모더니티의 특성을 통한 도시확장, 거대 주택과 같은 도시에 대한 사람들의 그릇된 욕망의 해석은 ‘낙원 증후군’같은 욕망의 의식과 무의식 연결의 오류로 욕망과 도덕성의 균형 예측에 실패한 우리들의 모습을 관찰 할 수 있게 해준다.

 

또한 모더니티의 특성인 민주주의와 자유의 관념들이 공공의 영역을 해치고 개인의 영역화됨으로 인한 폐해와 선택의 자유와 같이 자유의 과잉이 마침내 현대인들 자신을 희생시키고 말 것이라는 예언들의 현실화를 목격하면서 현저성이라는 그릇된 욕망의 실체를 이해하게도 된다. 특히, 가장 욕망의 현시(顯示)성을 잘 보여주는 옷과 집을 가면이라는 거짓과 연결의 양면적 통찰을 통해 본래적 기능을 상실하고 나아가 인간성의 상실과 문화적 파괴에 이르는 현상들을 비범하게 포착해내기도 한다.

그런가하면 자기연민과 이기주의로 치닫는 페미니즘의 자기모순이 탐욕스런 쇼핑과 어떻게 연결되었는지, 입과 질의 유사성을 통한 섹스와 먹는 행위의 흥미로운 해석으로 자기절제를 집어치워버린 나르시시즘에 빠진 현대 여성을 냉철하게 비판하기도 한다.

 

사실 이러한 무절제한 욕망에 길든 우리들의 모습과 그 욕망에 내재한 혐오스러운 양태들, 그리고 이로 인한 자기 파괴의 결과를 이해하게 되지만 우린 항상 공공의 영역, 혹은 집단적 이익보다는 개인, 나를 위한 욕망에 더 끌리고, 이산화탄소배출과 같은 온난화가 나와는 직접 관련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떨쳐내지 못한다. 마치 “아무리 많이 소비하더라도 늘 더 많은 것이 통 안에 있으리라 믿는”것처럼 말이다. 끊임없는 비교의 잣대, 경쟁, 그것은 내게서 벗과 이웃과 사랑의 관계를 격리시킨다. 물질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욕망의 그 잘못된 쳇바퀴를 멈출 수 있어야 할 텐데 말이다. 이제 만족과 쾌락과 행복의 잘못된 등식을 이탈하여 삶의 의미를 진정 풍부하게 하는 관계성, 유대감, 공동체와의 연대에 관심을 돌려야 할 터이다. 저자가 그리는 꿈의 도시, 꿈의 공동체를 그릴 수 있는 미래를 위해 우린 우리의 과잉 욕망을 통제하고 규제 할 수 없는 것일까? 정작의 의미를 강탈당한 욕망과잉의 사회, 우리들의 일그러진 초상을 다시금 돌아보는 계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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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짐승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9
모니카 마론 지음, 김미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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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겐 통독 전후시대의 옛 동독인들의 사랑이 왜 처연하고 비릿한 회상이어야 하는지, 안타까운 비애를 가득 머금은 것이어야 했는지, 더구나 그토록 집요하게 대상을 향해 자신을 결박시켜야 하는지, 마치 “더 이상 지상에 존재하지 않을 때까지 같아지고 또 같아지려고”한 것인지를 어렴풋이나마 이해하게 해준 소설이 있다. 닿지 않는 그 아득한 사랑의 간절함에 깊게 드리워진 정말의 번민을 해독하고자 하는 무의식적 욕망 탓이었을까? ‘카차 랑게 뮐러’의 『차마, 그 사랑을』과 동시대를 배경으로 한‘모니카 마론’의 『슬픈 짐승』을 자연스레 읽게 된 것은 우연이지만은 않을 것이다.

 

두 작품 모두 떠나버린 연인에 대한 기억의 기록이지만, 이 기억의 성분과 기록의 목적은‘그’와 ‘나’처럼 다르다. 뮐러가 쓴‘조야’는 죽은 연인이 남긴 유품 속 노트를 읽고서 비로소 그에게 써내려가는 애틋한 연민의 송사(送辭)임에 비해, 마론이 쓴 ‘나’는 끝없이 막으려 했던 억압된 기억의 해방, 생을 지탱시켜왔던 사랑의 기다림이란 구속에서의 영원한 자유를 향한 자기구원의 회고이다. 그럼에도‘조야’와 ‘나’라는 두 동독 여인들이 하는 사랑은 매우 닮아있다. 장벽 서쪽에 있던 남자들, 그녀들의 연인과 일체화되기 위해 신앙적 몸부림에 가까운 집요한 사랑, 즉 온 마음과 육체에 남자들을 깊이 각인하고 있다는 점에서이다.

 

베를린 장벽, 이 경계의 동쪽 진영, 동독에 살아야했던 사람들, 그네들의 시대를 “기이한 시대”, “갱단 지배의 시대”로 부를 수밖에 없었던 이유 속에 붙잡은 사랑을 놓칠 수 없고, 그 사랑과 일체화되려는 간절한 열망이 이미 숙명처럼 체화된 것인지도 모른다. 자유와는 대척에 놓여있는 구속과 억압에 길들여짐에 대한 역설, 빼앗긴 인간 본성에 대한 집착, 감성의 저 뒤편으로 망각했던 가치인 사랑의 절실함을 향한 안타까움이 아니었을까? 젊음, 사랑, 자유... 모든 것을 앗아간 기이한 시대에서 해방된 여자에게 사랑은“지금 놓치면 다시 돌이킬 수 없다는 두려움”의 강박이었으리라.

 

“자유를 얻었지만 그 자유는 그저 자발적으로 선택한 다른 감금상태와 맞바꾸고자 했을 때만 좋은 것 같았다.”는 그녀의 자유에 대한 패러독스는 사랑이란 “항상 죽음과 불가능한 것에 대한 쾌락”이란 말에 닿을 만큼 절실하고 유일한 것일 수 있음을 이해하게 된다. 이처럼 여자의 사랑은 치열함이고 가히 투쟁적이다. 처절한 갈등의 고통이 연속되는 그녀들의 사랑에서 황폐함과 폭력이 지배하던 파시즘의 세상, 그 기이한 시대가 만들어낸 상처의 깊이를 헤아리게 된다.

이는“모든 것을 내게서 빼앗아갔다. 나는 정말로 기이한 시대에 살았다.”는 ‘나’의 말처럼 다가온 사랑을 움켜쥘 수밖에 없도록 하는 절실함과 어떤 최후에 대한 두려움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에게 “당신은 뒤늦은 내 청춘의 사랑이야.”라고 남자에게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자신의 몸 안에 움츠리고 있던 젊음의 거침없음에 맡기는 것, 모든 문명적 규범을 무시하면서까지 사랑으로 번민하는 인물의 상투적인 모습을 가소로워할 정도로 알만큼 나이가 든 중년 여자 ‘나’는 사랑의 열망에 온전히 빠져드는 것 외에 어찌할 수 가 없었을 것이다. 그녀는 이렇게 사랑했지만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소설의 백미는 바로 이즈음에 있는 것 같다. 정작 해방되었지만 다시금 사랑이라는 자기구속에 빠져버렸던 여자가 이제 구십 살인지 백 살인지도 스스로 구별할 수 없는 나이에 그 사랑에 진정한 자유, 해방을 비로소 부여하는 작업 말이다.

 

기억을 막으려고 어떤 일을 하기에는 너무 지친 순간이 되어 그녀는 연인을 기다리는 일을 그만두기로 하는 것이다. 차마 사랑을 자신의 삶과 분리할 수 없었던, 더 이상 사랑과 자신을 구분할 수 없을만큼 멈추어있던 사랑, 그 초월의 시간을 비로소 흐르게 하는 것이다. 두 동독 여자의 봉인된 기억을 해제하는 작업일 것이다. 아니 그녀들이 기억하려 한 것은 진정 무엇이었을까? 아마 다시 꾸며내려 한 것이었을 게다. 그리곤 “인생에서 놓쳐서 아쉬운 것은 사랑밖에 없다.”는 인생의 이해를 확인 하는 것, 사랑했던 자신과 남자의 삶과 죽음을 다시 만들어내는 것 말이다.

 

이제 인생의 절반을 넘어선 내게 내 삶의 유일한 기쁨이 무엇이었는지 묻게 된다. 내게서 활기와 의욕의 힘을 사라지게 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이 도시의 문명과 규칙들이 점점 거추장스럽고 두려워짐에 따라 더욱 갈구하게 되는 것이 무엇인지. “너무 일찍 죽음의 공포 속에서 소리치면서” 사랑을 몸 밖으로 내보냈던 불행한 영혼들 중의 하나가 아니었는지 반문하게 된다. “사랑만이 우리 안에 마지막으로 남아있는 자연”이며, 인간들에 의해 만들어진 세상의 질서 전체는 그저 그것을 길들이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이라면, 나는 사랑이 비록 “비극적으로 끝나거나 진부하게 끝나거나 둘 중 하나”일지언정 두려움 없이 사랑을 할 수 있어야만 하는 것이 아닐까?

 

기이한 시대, 베를린 동쪽에 예속되어 있던 사람들과 갑자기 그들과 함께 살게 된 서쪽 사람들 사이에 넓게 퍼져있는 몰이해, 그래서 우리의 자연성에 대한 모든 고백은 믿음의 문제임에 불과함을 함께 생각게 하는 이 자유와 사랑의 이야기는 파시즘의 과도함과 기이함에 대한 혐오와 조롱과 함께 인생의 가치와 이유를 반추케 하고, 불치의 병이 될지언정 바이러스처럼 침입해 올 사랑앓이를 하게 한다. 인생에서 놓쳐서 아쉬운 것은 정말 사랑밖에 없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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댈러웨이 2012-11-27 1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3월에 이 책 읽으면서 계속 멍했던 기억이 새삼 나네요. 모니카 마론이 누구야 하면서 말이죠. 필리야님, 간만에 제가 아는 책이 리뷰로 올라왔네요. 반가워서 덥썩요. ㅎㅎ 카차 랑게 밀러의 책도 한번 찾아봐야겠어요. 잘 읽었습니다.

필리아 2012-11-27 14:14   좋아요 0 | URL
이제 저에게 "지금 너 사랑하고 있니? "하고 묻게될 것 같아요...//고맙습니다. 댈러웨이님~~